작성일 : 23-09-17 23:21
20230917 로마서 강해 31강 롬 4:25-5:5 믿음과 화평과 환난과 소망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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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3-09-18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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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7 로마서 강해 31강 믿음과 평안과 환난과 소망

다 함께 묵상 기도드리겠습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 고백하겠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 말씀, 잠언서 25장 2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잠25:25)
“먼 땅에서 오는 좋은 기별은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 같으니라”

기도하겠습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소식이야말로 기쁜 소식이고
목마른 자에게 갈증을 해소하는 생수와 같은 그러한 소식인 줄 알았지만
주님이 저희에게 들려준 소식은 이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고
우리가 기다렸던 소식은 악마의 소식임을 깨닫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우리가 기다리는 소식을 듣는 자들이 아니라
주님이 친히 들려주시는 말씀을 듣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시편 76편 1절에서 12절 말씀을 교독하겠습니다.

(시76:1~12)
“하나님이 유다에 알린바 되셨으며 그 이름은 이스라엘에 크시도다 그 장막이 또한 살렘에 있음이여 그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 거기서 저가 화살과 방패와 칼과 전쟁을 깨치시도다(셀라)주는 영화로우시며 약탈한 산에서 존귀하시도다 마음이 강한 자는 탈취를 당하여 자기 잠을 자고 장사는 자기 손을 놀리지 못하도다 야곱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꾸짖으시매 병거와 말이 다 깊은 잠이 들었나이다 주 곧 주는 경외할 자시니 주께서 한번 노하실 때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 주께서 하늘에서 판결을 선포하시매 땅이 두려워 잠잠하였나니 곧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판단하러 일어나신 때에로다(셀라)진실로 사람의 노는 장차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는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너희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서원하고 갚으라 사방에 있는 모든 자도 마땅히 경외할 이에게 예물을 드릴지로다 저가 방백들의 심령을 꺾으시리니 저는 세상의 왕들에게 두려움이시로다”

이 시간 오준석 집사님 우리를 대표해서 기도해 주시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오늘도 십자가 피 공로를 위해서 모든 인간을 죄 안에, 율법 안에 가두시고 일하시는 주님,
성경은 십자가를 증거하지만 우리는 모든 말씀을 나를 위한 말씀으로 선과 악을 판단합니다.
모든 일어나는 사건들이 나를 이롭게 하면 선이고 나에게 손해가 나면 악으로 간주합니다.
나에게 도움이 안 되는 십자가보다는 돈 버는 게 좋고, 나를 즐겁게 해주는 유튜브가 재밌고,
항상 우선순위는 나의 일과 내 가정이 중요하고 이 땅에서 이렇게 할 것도 많고 분주한 마르다 같은
저희들을 말씀 듣는 자리로 이렇게 불러주시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도망 다니는 야곱보다는 이 땅에서 안정적이고 존경받는 에서의 삶을 부러워하며
100년 가까이 허무하게 방주 만드는 노아를 조롱하고 이 땅에서 나를 위한 천국을 꿈꿉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행색이 조금 달라 보이는 저 세리와 창기와 다르다고 매일 헛소리로 떠듭니다.
육신의 옷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을 때 예수님
모두 한 목소리로 나를 위한 하나님은 절대 십자가를 지면 안 된다고 우리의 실체를 드러내시며
왼편 강도처럼 당신이 하나님이 맞다면 나를 구원해 보라고 예수님께 조롱하며 비웃는 이런 우리들을
오늘도 십자가 앞에서 책망받게 하시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매일 우리의 조롱과 비웃음을 홀로 받으시며
묵묵히 주를 위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심판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 말씀, 로마서 4장 25절에서 5장 5절 말씀을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롬4:25~5: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아멘.

계속해서 믿음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고요.
그 믿음의 실체가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이 말씀입니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반복된다 하더라도 그건 지식일 뿐이고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이 이 내용이에요.

예레미야 31장에 보면 새 언약이 나오죠.
말씀을 마음속에 집어넣는데, 이 말씀을 아브라함 속에 집어넣으면 돼요.
그러면 아브라함의 생애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그 ‘우리’ 속에 아브라함이 들어가 있고,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그 ‘우리’ 속에 아브라함이 들어가 있고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르는 모든 자들이 거기에 들어가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보게 되면 그 아브라함의 그 인생사,
12장부터 쭉 나오는 그 모든 삶 속에 이 말씀을 집어넣으면 돼요.
집어넣으면 되면 정답이네요. 이렇게 할지 모르지만,
항상 아브라함은 인도함을 받는 자가 되죠.
믿음의 특징은 항상 아는 자가 아니라, 알았는데 아는 것이 부정당하고
계속해서 인도함을 받는 겁니다.

여기에서 ‘우리’라는 것은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아닌 우리’예요.
사람들은 이 본문을 보면서 예수님은 우리 구원을 위해 돌아가셨고
달리 말하면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서 살아나셨다’라고
이야기를 하죠. 이 말이 잘못되었습니까? 아니죠. 성경대로잖아요.

우리는 ‘성경대로’ 이야기를 하면 ‘우와 진짜 말씀대로 하네.’
마태복음 4장에 나오는 그 마귀가 성경대로 했다라는 사실을 놓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워낙 목사들이 성경대로 하지 않으니까
성경대로 하면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말씀을 전한다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과거의 목사들이 초등학교 겨우 나와서 공부 못해가지고 중학교도 못 가가지고...
중학교도 그 당시에는 시험을 치고 들어갔거든요. 제 전 세대는.
진짜 찌질이 공부 못해가지고 중학교 겨우 나와서 맨날 놈팽이 치다가
성경학교 들어가서 목사가 됐거든요. 아는 게 있습니까?
읽어도. 국어를 모르는데 논술이 안 되거든요. 주워들은 걸 갖고 외치니까 무식하게 외치는 거예요.
성경 구절 뽑아가지고 ‘믿으세요. 믿으세요’

그런데 세련된 사람들이 등장을 하죠.
미국에 유학을 갔다 온 그런 사람들이 등장을 해서, ‘성경대로’ 말씀을 가르치기 시작하는 겁니다.
‘성경대로’ 가르치면 진리라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성경대로’ 가르친 자들이 서기관과 바리새인이고
‘성경대로’ 예수님을 시험한 자가 마귀였습니다.
‘성경대로 해 보라’는 게 마귀예요.

그래서 로마서에 나오는 이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씀대로 ‘예수님은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셨습니다.’ ‘여러분 믿으세요.’ 이러면 ‘아멘’ 하면서 이게 더 신나잖아요.
왜 신이 나는가? 하면 내가 여기에 참여할 수 있잖아요.
선악과를 먹은 인간들은
자기가 말씀에 참여하는 그것에 대해서 굉장히 쾌감을 느끼고 즐거움을 느껴요.

그런데 선악과를 먹었다라는 사실을 성령을 통해서 깨닫는 자는
참여하는 자체가 악마적 발상임을 알아요.
성령을 받지 못한 자들은 자기 자신이 선악과를 먹었다라고 인정을 해도 먹은 티를 내요. 거꾸로.
그래서 그들은 자기가 말씀에 참여하는 것을 즐겁게 여기고 기쁘게 여겨요.
가령 오늘 여러분들이 말씀을 들으러 오셨잖아요.
많은 일들이 있잖아요. 오늘 말씀 들으러 안 와도 할 일이 태산 같습니다. 기도했었듯이.
아니 오늘 하루 일당 한 10만 원 주는 곳에 갈 수도 있는 거고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제치고 여러분 말씀 들으러 왔을 때
이것에 대해서 주님은 뭐라고 이야기하시는가요?
‘말씀대로’라면 어떻게 합니까? 여러분이 말씀에 순종했다라고 이야기할 거 아니에요
순종하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멸을 당했지만,
여러분들은 안식일을 지켰다 이렇게 이야기하잖아요.

어젯밤에 운동하러 이렇게 밤늦게 가니까 요 옆에 하나님의 교회 있잖아요.
그 안식일을 지키고 있거든요.
옛날에 토요일 안 쉴 때 안식일을 어떻게 지켰는지 궁금해요. 코미디 아닙니까? 코미디.

그래서 하루빨리 이 김정은이 통일을 해야 돼요.
그래서 아예 주일을 없애버려야 됩니다.
제가 그런 곳에서 한 20몇 년 살았잖아요. 여기도 지금 말씀을 듣고 있지만.
주일마다 출근시켜요. 거의 52주 되면 제가 보기에는 한 20주 이상은 출근을 시킵니다.
대신에 평일날 놀게 해줘요. 그런 세계에 안 살아보셨죠. 여러분.

안식일 지킨다고요? 가능하다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할 일이 없고 심심하니까 지키는 거예요.
아예 주님이 못 지키게 해버리잖아요. 못 지키게 하면 신나게 ‘아멘’하면 될 일을
자기들이 거기를 참여를 해서 지키겠다라는 겁니다. 그 미소들,
그 교회 앞에 가서 얼굴 한번 보세요. 여러분 얼굴보다 훨씬 밝아요.
자기 영혼을 악마에게 바쳐가면서까지도 즐거운 거예요.
그 이유가 악마와 자기가 한 편이기 때문에 그러거든요.
‘말씀을 내가 지킬 수 있다’라는 거고, ‘내가 믿을 수 있다’라는 이야기입니다.
교회가 그것을 가르쳐 왔거든요.

과거에는 무식한 목사들이 ‘무조건 믿으라’고 가르쳤는데
그렇게 믿으면 그건 그냥 무속 신앙에 가깝고 기복주의에 가까워요.
그러니까 말씀 중심으로 가는데, 말씀 중심으로 가보니까 어때요? 똑같이 기복 신앙이에요.
똑같이 무당하고 다를 바가 하나도 없습니다.

진짜 말씀 중심으로 가게 되면 말씀의 중심인 분이 누구입니까?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잖아요.
그러면 십자가만 남아야 되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은 십자가의 원수로 드러나는 일이 되어야 되잖아요.
그러면 오늘 여러분들이 귀한 시간에 말씀을 들으러 오신 이것이 헛되다라고 이야기를 해야 돼요.
헌금을 한 것을 칭찬하고 봉투 올려가지고 이름을 꼭 불러주잖아요.

요즘은 이름 안 불러줘도 연보를 해요. 왜? 지문을 누르면 리스트가 쫙 나오잖아요. 얼만지.
석차도 나옵니까? 장로님. 나옵니까? 나온대요. 제가 완전히 깬도를 때렸는데 석차까지 나오거든요.
그러면 30만 명 중에 30만 등. 그거 기분 좋아할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오기가 생기고 객기가 생기죠.

그런데 거기에 예배 가는 사람들 부류가 판사, 검사, 박사, 박사 할애비들 거기에 가득 모여 있거든요.
물론 열 받아서 다른 동네로 다 갔지만, 그 가봤자 그 동네가 그 동네예요.
그 다른 동네로 간 그 목사가 설교를 하는데 (이렇게 해야 또 눈이 반짝반짝하니까)
‘2033년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2천 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큰 교회를 다녀야 그런 소리를 듣거든요. 거기에 ‘아멘’하고 앉았어요.
뭘 노리는 겁니까? 헌신하고 돈 내라는 거예요.
10년 후에 우리가 주의 뜻을 이루어드리려면 돈 내라 이 얘기예요.
‘기독교인이 최소한 50%가 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거기 앉아 있는 사람들이 우쭐거리잖아요.
말씀을 갖고 ‘말씀대로 믿자 말씀대로 살자’라는 자들이 있다면 그 악마입니다. 악마.

우리 전 집사님이 길거리에 갔는지 어딜 갔는지, 어떤 사람이 전도를 하더래요.
‘하나님도 믿고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얻습니다.’ 이렇게 전도를 하더래요.
우리 집사님이 또 은혜를 받아서 ‘십자가의 피를 믿어야 구원을 얻습니다’라고 하니까 가버리더래요.
저라면 붙들고 ‘좀 기다려 보세요.’ 이렇게 했을 건데.

그들은 성경에 있는 걸 갖고 와서 자기들이 할 수 있는 것을 제시를 하는 거예요.
할 수 있는 것은 은혜입니까? 은혜가 아닙니까?
은혜가 아니에요.

그들이 로마서를 얼마나 많이 읽고 공부를 했겠습니까?
여러분 조금 이렇게 배웠다는 사람은요 로마서 설교를 수도 없이 듣고요
수도 없이 로마서를 읽었을 겁니다.

그런데 로마서에서 은혜를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자꾸 무엇을 끄집어냅니까? 믿음을 끄집어내요. 믿음.
‘은혜’ 자리에 ‘믿음’을 쏙 집어넣으면 믿음은 ‘내가 믿을 수 있다’라는 이야기 속에 들어가잖아요.
나의 행위 속에 들어가니까 은혜를 싹 삭제해버리는 겁니다.

은혜는 선물이거든요.
선물은 선물의 원천을 찾아가야 돼요. 에베소서 4장에 보면
선물은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으시고 악마의 종으로 노릇하는 우리들을 사로잡으시고
대신 죽으신 그분이 어떻게 했습니까?
악마를 사로잡으시고 우리를 십자가의 피로 용서하시고 그분이 성령을 주셨잖아요.
그 성령을 주신 결과물들이 은혜입니다.
모든 것이 선물이에요. 여러분이 지금 입고 있는 옷, 이 까만 머리 흰머리,
이 십자가의 피 공로예요.

문제는 은혜의 세계는 믿는 자만이 해당되는 세계잖아요.
믿지 않는 자들은 믿음이 없는 자들은 모든 걸 무엇으로 확인하고 믿습니까?
눈에 보이는 걸 보고 확인하고 믿죠.

우리가 어디에 삽니까? 이 세상에 살죠.
이 세상은 누가 장악하고 있습니까? 악마가 장악하고 있죠. 마귀가.
마귀가 세상 권세의 영광을 받았잖아요.
‘에이 예수님이 승리하셨으니까 이제 마귀는 맥도 못 춘다.’
맥도 못 추는 게 아니라 할 수만 있거든 믿는 자들도 미혹하는 게 마귀예요.
오히려 마귀가 더 활개를 치잖아요.
그게 예수님이 십자가에 승리한 증거예요.

은혜가 없는 자들은 방금 제가 말씀을 드렸잖아요.
십자가에서 승리한 증거라고 이야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눈으로 확인하려고 하죠.
어떻게? ‘사단아 물러가라’
휙 나가면 ‘야 주님이 승리한 증거라’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런 인간들은 히브리서에 가면 믿음의 그 선진들 속에 절대로 못 들어가죠.
왜? 보는 것으로 말미암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요.

5장 1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라고 이야기를 할 때
벌써 로마서 앞부분을 다 잊어버렸죠.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모든 자들 가운데 쏟아진다”라고 할 때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인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어느 누구도 심판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게 종말이에요.

심판을 피할 길이 없는데
어떻게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냐? 라는 겁니다.
이것은 원인이 우리 쪽에 없는 거예요.
믿음조차 누가 제공했습니까? 은혜로 제공하신 거예요.
믿음이 어디에 속해 있어요? 행위에 속해 있습니까? 은혜에 속해 있습니까?
칼빈이 이런 걸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믿음은 은혜에 속해 있거든요.

그런데 인간들은 은혜에 속해 있는 것은 불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인간이 할 수 없음을 이야기하는데,
은혜에 속해 있는 그 믿음이 성경에 있기 때문에
성경에 있는 이 믿음을 갖고 오는 거예요. 갖고 오니까 그때부터 가르치기 시작하는 거예요. 지식을.
고린도전서를 백날 읽어도, 주석을 해도 사도바울이 지식을 쏟아냈잖아요.
쏟아내면서 하는 말이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고 어리석은 것이고
성령께서는 십자가의 지혜로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십자가의 지혜는 세상의 모든 지혜를 파한다 하잖아요.

여러분 예수님 당시에 구약 성경이 있었잖아요.
구약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 자들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구약 성경을 어떻게 해버렸습니까?
십자가의 지혜로 완전히 파괴 시켜버렸어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떻게 예수님께서 구약 성경을 파괴시켰느냐?’ 이렇게 물으면 ,
제가 그분한테 묻고 싶은 게 있어요.
‘구약 성경대로 해석을 해가지고 살아보라’는 거예요.
아무리 해석하고 살아보고 기다려도
십자가 지신 주님이 우리 속에 들어온다라는 신학이 나올 수 있느냐?이 얘기예요. 없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은 성전을 자기 몸으로 말씀하셨잖아요.
그 논리가 구약에서 나오지 않아요.
왜 예수님이 오셨을 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악마적 행사를 하느냐?
그때가 왜 종말이냐? 라고 할 때는
그들이야말로 악마의 모습을 보이는데
악마의 모습은 우리가 생각하는 느부갓네살왕이나 그런 사람들이 아니에요.
벨사살 왕 이런 인간들이 아닙니다.

악마의 모습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여호와를 유일신으로 믿으면서
오로지 성전에서 흠없는 제물로 제물을 드리면서, 그리고 말씀대로 믿고 살아가는 자들이 악마예요.
왜 그들이 그런 식이 되었느냐? 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실 때,
처음부터 그들을 어떻게? ‘심판 날에 가두기 위해서 주셨다’라고는 예상을 못하죠.

왜냐하면 “들으면, 순종하면 복을 주고 순종하지 아니면 저주를 내린다”고 했기 때문에
아마 그들은 손들고 이야기할 거예요. ‘당신이 이런 말 하지 않았느냐?’
지옥 간 자들이 왜 분을 품겠습니까?
왜 슬피 울며 이를 갈겠어요?
당신이 성경에서 성경대로 믿고 우상을 버리고 순종하라고 했지 않느냐?

그런데 왜 그 율법 외에 율법과 선지자, 우리들이 생각한 게 아니라
완전히 예수님이 말씀하는 율법과 선지자들이 전한 그 십자가로 구원을 해버리느냐? 이 얘기예요.
화딱지 나겠어요? 안 나겠어요?
말씀대로 믿었는데 지옥을 가요.

하나님께서는 상대가 누군지를 압니다.
상대가 누군지를 알고 상대에게 왜 이스라엘에게 그 말씀을 주셨느냐? 라고 할 때는
새 언약을 위해서 주신 거예요.
인간들은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에 말씀을 딱 주시면 그 말씀이 누구를 위해 주셨다고 생각하죠?
자기를 위해 주셨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아담과 여자를 보세요.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이 약속을 받으니까
그 약속을 누구를 위해 주셨다라고 해석을 해요? 나를 위해 주셨다라고 해석하잖아요.
지금 우리들이 이 아담 속에 있잖아요.
로마서 5장에 이제 가면 “첫째 아담 안에 있다”라고 하는데
그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이 모든 말씀은 누구를 위해서 기록하였고
예수님의 십자가는 누구를 위해서 지셨다라는 겁니까?
나를 위해 지셨고 나를 위해 말씀을 주셨다라는 게 누구의 논리인가? 하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논리예요.
남은 자들의 신학입니다.

그래서 5장 1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그러므로”라고 했잖아요.
그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라는 이 내용 속에는 사도바울을 집어넣어 봅시다.
믿음으로 의롭다 된 분이 사도바울이 맞죠? 뭘 믿었습니까?
그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었어요?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고 예수님을 핍박하고 저주하고 죽이는 내용이 여기에 담겨 있어요.

그렇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라고 하면
주님의 피 흘리심이 옴팍 덮어쓴 겁니다.
내가 한 건 아무것도 없고 오로지 그 피 흘리신 분의 주되심을 자랑하고 증거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원수인 우리를 불러서 복음의 증인을 삼았다는 거예요.
지금 로마서가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자기 구원론에 미친 자들은 로마서가 해석이 안 돼요.
로마서를 쓰는 사도바울이 구원받기 위해서 구원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이 그를 만났습니까?
찾아오셨습니까? 아니죠.
그런데 예수님이 찾아오기 전에 이 사울은 구원에 미쳐 있었어요.
성경에 나오는 부자 청년을 봅시다. 구원에 미친자예요.
“어떻게 하면 내가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선악과를 먹은 자들의 최종 목표는 ‘자기 구원’이에요.
자기 구원인데 그 자기 구원을 이 유대인들은 약속을 믿고 있기 때문에
현실로 끌어당기려고 하는 겁니다.
약속에 의하면 구원이 어디에 이루어집니까? 시온산에, 예루살렘에 이루어지잖아요.
이사야 보면 2장에 나오잖아요.
모든 산들 위에 뛰어날 것이라는 그 예언의 약속이 있잖아요.
이 땅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그런 기대를 품고 있었어요.

그러면 그 천국은 누구를 위한 천국이냐? 라고 할 때는 자기를 위한 천국이었던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찾아오시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라는 겁니다.
그다음 하는 말씀이 중요해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여기서 “누리자”라는 단어를 갖고 ‘이것이 선포형이다, 아니면 권고형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데 선포가 되었든, 권고를 하든 다 좋아요.
중요한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라는 거예요.

이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니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다르다”라고 했거든요.
14장 27절에 보면 “평안을 너희에게 끼친다”
이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다른 평안이라 했어요.

여기에서 세상은 어떤 세상을 말하는 겁니까?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잡혀서 죽는다고 하니까 제자들이 근심을 하거든요.
두려움 속에 떨고 있을 때 평안을 준다고 했어요.
그 평안을 준다고 할 때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다르다 했거든요.
그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하면 남은 자 유대인들의 세상이에요.
이방 나라가 말하는 평안 아니에요.
해봤자 그들의 평화는 남은 자 유대인들의 사상에 합류 당합니다.

로마서도 똑같잖아요.
이방인들이 다 어디로 합류 당합니까? 이스라엘로 합류 당하거든요. 유대인들로.
세상의 평안이 어떤 평안이었느냐? 하면
메시야가 와서, 다윗 왕 같은 인물이 와서, 세계를 평정하고,
이 예루살렘을 하나님의 나라로, 나라의 중심으로 세우는 것이고
모든 열국을 그들의 졸개로 만드는 그 나라가 되어질 때
그들은 그 자리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겁니다.
왕 되신 예수님 옆에 1인자는 예수님이지만 2인자 3인자 4인자,
모르드개처럼 그러한 위치를 권력을 차지하고 싶은 거예요.
그것이 그들이 꿈꾸는 평안이었습니다.

지금 이들이 로마 제국 아래에 있잖아요.
평안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으니까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제자들은 오해했을 수도 있죠.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다르다”라고 하니까.
‘그래 이 로마 제국 압제하에서 누리는 그 평안과는 전혀 다른 질적인 평안일 거야.’
그렇게 해봤자 그들이 기다리는 평안인 겁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평화를 누리자”라고 할 때
이 평화를 누리자라는 의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이 사건으로 펼쳐지게 돼 있어요.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진노를 받아서 심판을 받아야 되는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니까 ‘이제 나 살았다’가 되잖아요.
화평케 되었으니까 이제 진노가 없다라고 생각되잖아요. 그죠?
여기에 딱 머물러 있는 자들이 성령 못 받은 자입니다.

왜 그러냐? 라고 하면 심판주가 자리가 바뀌어요.
모든 인간이 범죄를 했죠. 범죄를 하니까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을 것 아닙니까?
그 심판에서 피할 자는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하나님의 심판을 다 덮어썼습니다.
다 덮어쓰고 그 덮어쓴 분이 심판주가 돼요.
그 심판주 되신 분이 살릴 권세도 있고 죽일 권세도 있는 분이 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라고 했을 때,
‘누리는도다’라고 했을 때 성도는 어디로 들어갔다는 거예요?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갔다라는 이야기예요.
심판주 되시는 주님의 심판을 받았다는 말입니까? 받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심판에 이미 합류당한 자예요. 합류 당하고, 심판받았고.

받았는데, 앞서 나왔잖아요. 6장에 가면 세례로 이야기 하거든요.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주심이 되었는데”
그 ‘우리’가 어떻게 되는가? 하면 내어줌 속에 십자가 속으로 합류를 당해요.
합류를 당하고 다시 살림을 당하는 자가 성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라는 말을 했을 때
유대인들의 사고, 남은 자 유대인들의 사고를 갖고 있는 자들은
이제 드디어 하나님과 화평케 되었으니까 그다음은 어떻게 펼쳐져야 돼요?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야 왕국이 펼쳐져야 된다라는 논리가 나오는 겁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로마서를 읽을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했으니까,
“누리는도다”라고 했으니까
누리고 있잖아요. 누리고 있으니까 그래서? 그래서? 그다음이 중요해요.

“화평을 누리는 도다. 누리고 있다”
누리고 있기 때문에
화평을 만드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참예하는,
날마다 죽고, 날마다 다시 살아나는,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목사님 왜 그렇게 이 성경을 복잡하게 하느냐?’
복잡하죠. 왜냐하면 로마서는 사복음서를 이미 바탕에 깔고 있고요. 구약을 깔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간단하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심판받지 않고 천국 간다.’
이런 자들은 성령을 아예 근처 가지도 못했어요. 성령의 할례를 못 받은 자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고 자체가 유대인들의 사고기 때문에 그래요.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불렀잖아요. (또 쓸까요? 졸리시니까)
원래 설교라는 게 처음에는 이렇게 긴장이 되고 그러지만 몇 번 들으면 잠 옵니다.
이게 인간의 악마성이기 때문에 그래요.
만나도 하루 이틀이지 3일만 내리면 지겹다 하거든요.
그게 우리가 얼마나 악마적이냐 이 얘기예요.

아브라함을 보게 되면 아브라함의 믿음이 나왔잖아요.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평화를 누렸습니까, 누리지 못했습니까?
갈대아 우르에서 자기 본토 친척 집을 떠나서 나그네로 살 때 본향을 향하여 갈 때
하나님과 화평을 누렸어요, 못 누렸어요? 누렸죠.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아요.
언제 진짜 화평을 누린다 생각하죠? 아브라함 본인부터 약속이 이루어질 때,

머릿속에는 뭐밖에 없는가? 하면 자기 주변을 둘러보고
그 세계가 갖고 있는 그 나라, 안식의 나라, 강대한 나라. 보는 거 그것밖에 없습니다.
우리와 똑같아요. 요한계시록 21장을 한번 볼까요? 21장 1절에서 8절입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봄에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여기에 보면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말씀이 나오죠.
이 말씀을 읽는 사람들은 지금 우리 방금 읽었잖아요. 머릿속에 이미지가 다 그려졌어요.
앞으로 이 AI가 발달하면 이 뇌 속에 집어넣으면 글을 읽을 때
자기가 상상하는 모든 바를 아마 이 도표나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을 거예요.
지금도 AI가 그걸 해주거든요.
말을 하면 이걸 도표로 그려달라 하면 돈 좀 투자하면 그림으로 그려줘요.
그런데 AI만 그리는 게 아니라 AI는 자기가 배운 걸 그리거든요. 자기가 아는 거 종합해서.
그럼 우리는 안 그립니까? 지금 우리가 다 그리고 있죠.

그리고 있으니까 아마 지금 현실이 괴로운 사람들은요, 어려운 사람들은
‘야 진짜 좋겠다’라고 생각해요.
꿈을 꾸는 거예요. 이 말씀을 보면서.
그러면 사람들이 주장을 하겠죠. ‘이 말씀대로 믿자’라고 하잖아요. 믿자.
‘믿자’라고 하면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온다’ 하잖아요. 예루살렘은 어디 있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거든요.
근데 목사들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도 그들이 믿어요. 믿어.

왜 그런가? 하면 본인이 지금 탐욕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러거든요.
그 예루살렘이 알함브라... 맞아요? 궁전.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겁니다.
지금 만민중앙교회만 그런 게 아니에요.
교회를 다니는 모든 인간들이 이런 말씀을 읽으면 그런 천국을 상상하는 거예요. 상상.

지금 여러분이 제대로 읽어본 사람들은 무엇을 눈치를 챕니까?
눈물을 닦아주려면 이 땅에는 어떻게 돼야 돼요? 이 땅에서는?
눈물을 흘리는 자가 되잖아요.

지금 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이 뒤에 이 이야기는 십자가 사건을 뒤엎은 거예요.
십자가를 뒤덮으면 부활의 세계가 되거든요.
십자가가 없는 부활은 없어요.

지금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여러분이 사는,
사도 요한이 니가 지금 밧모섬에서 고난받는 이 일이, 성도들이 이 땅에서 고난받는 그 일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이라는 이야기예요.
그걸 목격하지 못하는 자들은 어떻게 하겠어요? 그걸 피하려고 하겠죠.
자기가 말씀을 보면서, 말씀대로 믿으면서, 믿어봤자 인간에게는 자기가 경험한 것, 배운 것 아니면
첫째 아담이 물려준 그 무의식 세계 덩어리뿐이에요.

성령은요 우리의 기억을 부정합니다. 우리의 기억을 부정해요.
우리가 어제 성경 배웠던 것, 그걸 집어넣어가지고 진리라고 내놓으면 성령은 그걸 부정하죠.
왜 부정합니까?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따라오라”고 했잖아요.
자기를 부인하고 따라오라 라는 그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하는 말씀이지 어제 한 말씀입니까?
오늘 우리에게 한 말씀이라면
우리가 배웠던 것, 들었던 것, 모든 것들을 부정하고 따라오도록 성령께서 조치를 취하는데,
인간들은 기억을 갖고 그것을 진리인 양 꺼내놓는 거예요.
모든 말씀 연구는, 말씀을 듣는 것은, 십자가와 만나는 현장이 되도록 주께서 조치하는 일입니다.

다시 돌아가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이 말씀대로 믿어버리면 어떤 사태가 벌어집니까?
유대인들이 기다렸던 메시야 왕국과 똑같아져요.
그러면 그다음에 나오는 모든 말씀이 해석이 안 돼요. 봅시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1절을 제가 읽는 성경, 옛날에는 이렇게 번역된 게 있어요.
“혹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우리로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며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자”
이 해석도 마찬가지예요.
이미 읽는 내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내가 있고,
하나님이 계신 사이에 예수님이 들어오셔서 화평케 했다라는 게 이 성경 내용이잖아요.
그러면 중심을 어디에 두는가? 하면 이 화평케 한 분은 뭡니까?
나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게 하기 위한 일뿐이에요.
일뿐이기 때문에, ‘일 끝냈으면 빠져라’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날 교인들이 목사들이 십자가를 이야기했다가
신앙생활 조금 하게 되면 십자가 이야기를 제쳐놓잖아요. 고난 주간 빼고.
십자가를 제쳐놓고 부활을 이야기를 하잖아요.
왜냐하면 그 부활의 능력과 세계는 무엇과 동일합니까?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이 능력으로 행하시는 일과 동일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화평케 하셨으면 나는 그건 이미 믿었고 구원 얻었기 때문에
그 화평케 하는 일과는 이미 끝난 일이잖아요. 십자가와는 끝난 일이잖아요.

그럼 우리는 부활에 참여한 자로서 어떻게 살아야되느냐?
그것은 부활한 주님은 능력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여호와 같은 능력을 갖고 우리에게 다가오신다는 거예요.
그러한 논리를 갖고 있는 겁니다.

2절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라고 하죠.
그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은혜에, 믿음에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가게 했다라는 이야기예요.
여기는 나의 믿음이 없어요. 부정당한다는 겁니다.
‘없다’라는 말을 하는 이유가 믿음이 없다라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설교를 들을 때 제대로 들어야 됩니다.
인간은 자기 믿음을 포기한 적이 없어요.

여기에서 ‘믿음이 없다’라는 말은
은혜에 들어가는 그 부분에 있어서 우리의 믿음이 없다라는 이야기예요.
‘값없이 은혜로 선물을, 구원을 얻었다’고 했을 때
그 ‘값없다’라는 말은 우리 쪽에서 값을 제공한 것은 하나도 없다라는 이야기고
아들의 값을 제공했잖아요. 그다음 나오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야~ 갑자기 주님께서 믿음으로 서 있는 은혜에 들어감을 얻게 한 성도가
어떤 삶의 태도를 갖고 있느냐? 라고 할 때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라 할 때 ‘소망한다’거든요. 소망.
뒤에 나오는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니라” 이 소망이라는 단어가 같아요.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을 기뻐한다는 거예요.
뭔가 말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저만 이상한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을 기뻐한다. 즐거워한다”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 이야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이냐?’라는 것을 알아야 될 거 아닙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영광은 십자가를 이야기하고 싶죠. 맞아요.
근데 십자가가 맞는데요. 이 십자가에는 무엇이 반드시 세팅이 되어 있는가? 하면
부활이 함께 담겨 있어요.
십자가 속에는 부활이 함께 담겨 있어요.

로마서 6장 4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으므로”
앞서서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라고 소개를 했잖아요.

6장에 오면 우리도 어때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을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으므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야~ ‘장사되었다’라는 것은 죽었다라는 이야기도 들어가 있지만,
장사되었기 때문에 ‘장사되었다’라는 특징이 뭐예요?
계속해서 사망이 왕노릇하는 그 세계. 조금 오해가 있지만,
고난이 왕노릇하는 그 세계 속에 산다는 얘기예요. 그다음 봅시다.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여기에 보면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라는 표현이 나오죠?
앞서서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한다 했잖아요. 맞죠?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는 것, 여기에 보면 아버지의 영광이 나오는데
그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통하여 이걸 조금 달리 표현하면
“아버지의 영광의 권능을 통하여서, 권능으로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이 얘기를 하는 겁니다.
십자가와 부활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다른 모든 사람들은 죽어버렸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한 인물은 예수님뿐입니다.

그 십자가가 아버지의 영광이 되는 이유가 뭐냐? 하면
그 십자가 안에 부활이 담겨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지금 이 얘기를 왜 하는지?
성경은 누구한테 하는 겁니까? 지금.
이 땅 가운데 살아가는 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죠.
그러면 이 땅 가운데 살아가는 모든 자들은 죽어야 되죠. 그죠?
우리는 믿음으로 부활에 참예한 자가 맞죠?
맞는데, 그 완료성 속에 사는데, 그 완료성이 이 땅에서는 어떤 식으로 드러나느냐? 하면
미완료식으로 드러나는 거예요.

‘에이 목사님 그거 때려치우고 우리는 완료된 걸 믿고 삽시다.’
믿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는 말씀의 사람이잖아요.
그러면 말씀에 의해서 살려지는 사람이잖아요.
그러면 말씀에 나온 그대로 성도들은 살려지게 돼 있어요.

그다음 나오는 말씀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야~ 이것 갖고 얼마나 사람들을 후려 먹습니까?
‘여러분은 주님과 함께 죽었고 다시 살아났기 때문에 (십자가 자체는 날려버리고)
새 생명 가운데서 살게 하려 하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새 생명 가운데서 사는 게 뭡니까?’ 여러분 답변 한번 해보세요.
“새 생명 가운데서 살게 하려 함이라”고 했을 때 그게 뭡니까? 라고 물으면,
100이면 100이 뭐라고 이야기해요?
십자가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지금 앞서서 새 생명 가운데서 사는 게 뭔지를 얘기를 했잖아요.
주님과 함께 죽고, 그죠? 주님과 함께 죽고. 그다음 나오는 게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요 말씀 세계 속에 사는 게 새 생명 가운데서 사는 거예요.
쉽게 말하면 십자가 사건이 반복되는 삶이 새 생명 가운데서 사는 삶이라는 겁니다.

다시 로마서 앞부분으로 가봅시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라고 할 때 이게 소망이거든요.
이 소망이 앞서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는 하나님의 영광이었잖아요. 그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는 게 영광이었잖아요.
그런데 이게 어디에 붙어 있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 거기에 붙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사도바울이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고 기뻐하는 그 모습을 3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그게 뭔가? 하면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갑자기
믿음 이야기를 하다가, 하나님과 화평케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한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환난 이야기를 해요.
환난이 없으면 소망이 없어요.
환난이 없으면서 ‘소망한다’는 자는
십자가 없으면서 부활을 믿는 자와 똑같은 이야기예요. 지금.

뒷부분에 3절을 빼버리면,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고 즐거워한다’라고 하니까
‘야 우리가 살아갈 때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고 즐거워합시다. 여러분’
그런데 뒤에 나오는 이 환난은 어떤 환난입니까? 앞서서 나왔잖아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서 살아나셨거든요.
이 말씀이 성도에게 들어오면 이 말씀을 증거하는 자가 되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하는 자가 됩니다.

그런데 지금 말씀 자체가 십자가의 부활이 포함돼 있죠.
그래서 성도는 (사도바울이 그래서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라는 것이, 부활이라는 것이 십자가 안에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들은 악마성이 있기 때문에 십자가와 부활을 분리하는 순간 십자가를 떼버립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십자가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십자가 안에 없는 자들은 그 새 하늘과 새 땅에 못 들어간다는 이야기고
십자가 안에 사는 사람들은 어린 양의 피를 자랑하고 증거하는 자
그 피로 씻은 옷을 입었으니까 그 사람을 보면 뭐밖에 안 보입니까? 피밖에 안 보일 거 아닙니까?

그걸 거꾸로 표현하면
피는 그 성도의 입에서 나오고 몸은 뭐밖에 안 나온다는 거예요?
‘저 꼬라지로 무슨 복음을 전하고 저 모양으로 무슨 예수 믿고 천국 간다고? 죄 용서받았다고?’
그러한 온갖 비웃음을 당하는 자들이 성도예요.
‘하나님과 화평케 되었다면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이 질문을 스스로 해보라는 겁니다.

목사들이 왜 교인들을 갖고 놉니까?
하나님과 화평케 되었으면 성도는 성도답게 살아야 되는데
그 답게 사는 모습이 뭐냐? 라고 할 때
성경은 환난이라는 거예요.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
이게 나중에 로마서 8장에 나오거든요. 8장에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어요. 무엇이나?
환난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칼이나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거예요.

그러면 환난 당할 때 허허허 이렇게 하는 게 아니라
인간은 시간 속에 살기 때문에 환난이 있는 가운데 즐거워해요.
왜? 이 삶 자체가 피를 증거하기 위한 삶이기 때문에
여러분의 모양이 이 모양 이 꼴입니다. 이것보다 감사하고 신나는 일이 어디 있어요?

그런데 성령을 받지 못한 자들은 유대교에 속했다 했죠?
그들은 하나님과 화평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화평케 된 모든 사람들은 새 생명 가운데서 살아야 된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가르치거든요.
말을 조심하고 행동을 조심하고 화를 내지 않고...
그런데요 여러분 결혼해서 한번 살아보세요. 살아보면요 그 인간하고 다시는 살기 싫어요.
계속 살고 싶다는 사람은 말을 안 해서 그래요.
말을 안 하는 사람은 세월이 지나면 암에 걸려 죽습니다.

안 그러면 다른 사람에게, 타인에게 분노를 쏟아 내든지...
인간이라는 자체가 그렇게 구성되어 있어요.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한다’라고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들을 한번 보세요. 어떻게 사는지?
중국의 신학이 이게 장악했거든요. ‘새 생명 새 생활’ 그걸 가르칩니다.
삼자교회가 가르친 게 그거거든요. 그러니까 중국 공산당에서 가르치는 것과 일치하는 거예요.
‘새 생명 새 생활’을 더 큰 집합 속에 집어넣으면
‘공산당이 지시하는 것대로 살아라’ 이 얘기거든요.

그런데 그 신학이 어디서 왔습니까? 청교도 신앙에서 왔잖아요. ‘성도라면 성도답게 살아야 된다.’
여러분이 스스로에게 얼마나 그걸 쥐어박으면서 구박을 합니까?
특히 부자들 친구들을 만나보세요. 맨날 하는 말이
‘니 복음 안다면서 니 왜 그렇게 사느냐?
하나님과 너 화평되었다면서, 하나님이 니 편이라면서 왜 그 모양 그 꼴이냐?’

그다음 봅시다.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니라”
이 과정을 표현해내는데 그것은 인간들이 쌓여지는 과정인데
환난 딱 받자마자 확 돌아서는 사람도 있죠. 씨뿌리는 비유에 보면. 그들에게는 소망이 없죠.
그런데 여기에서는 이 환난이 무엇을 생산하는가? 하면
여기에 보면 ‘이루는 줄 앎이니라.’
이 ‘이룬다’는 말은 헬라어 성경을 보면 ‘계속해서 생산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계속해서 소망을 생산한다’는 말은
계속해서 환난이 연속적으로 일어난다라는 의미입니다.

또 이 환난이 연속적으로 일어난다하니까
여러분 망상하지 마시고. 주께서 그 환란을 일으켜야 돼요.
이게 주파수처럼 어떤 때는 다다다다 일어나지만
지금 다다다다 일어나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죠? 우리 중에도.
어떤 사람은 이렇게(천천히) 일어나는 사람도 있는 겁니다.
그러니 여기에서는 놀라운 것은
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 이 자체가 무엇과 함께 엮여 있는가? 하면
십자가의 고난과 함께 엮여 있다라는 사실이에요.

‘환난을 많이 당하면 인내심이 (이렇게 뭐가 된다?) 계속해서 쌓여가지고, 그다음 연단이 되어가지고, 소망할 것이다.’ 그건 이 세상이 갖고 있는 사고 방식이에요.
지금 이 내용은 환난과 소망을 분류를 했지만
이걸 앞부분에 롬4:25절에 의하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디에서 돌아가셨습니까?
이 땅에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돼요.
육신을 입은 상태에서 돌아가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을 하셨어요.
그럴 때 사람들이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조롱합니까? 거기에 대해서 진정으로 인정을 합니까?
물론 백부장은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이렇게 인정을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조롱하죠. ‘니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러면 이 대우를 누가 받느냐? 라고 하면
복음을 전하는 성도들이, 성령의 할례를 받은 자들이 똑같이 받는 거예요.
자 그 예를 제가 먼저 인물을 들어봅시다. 누구를 먼저 드는가? 하면 아브라함을 들어봅시다.
아브라함이 그러한 인물이잖아요. 이미 끌어당겼잖아요. 아브라함이.
아브라함을 끌어당겼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신약 시대의 인물과 성도들과 동일하다라는 거잖아요.

그럼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의 고향 친척 집을 떠나서 약속의 땅으로 가서 100세 되어서
이삭을 얻어서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죽었어요. 그 자리에서. 그곳에서.
자 그러면 여러분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그 아브라함이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어. 계시를 받아가지고 모든 것을 버리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어. 그러면서 기다리고 기다려서 100세 때 하나님이 내 아내 사라도 태가 닫혔고 나도 자식을 못 낳게 되었는데 하나님이 자식을 주셨어. 하나님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에 모래와 같이 자식을 많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고 4대 만에 약속의 땅에 들어갈 것이라고 약속을 하셨어.’ 그러면,
사람들이 뭐라 하겠습니까? ‘미쳤구나.’ 이야기할 것 아닙니까?
(여러분 공감을 전혀 못 하시네.) 상상을 해보라는 거예요.
75세 때부터 백 몇 세 때까지 그 소리가 무슨 소리였어요? 헛소리잖아요. 헛소리.
잠시 반짝, 그 롯을 잡아간 그들과 전쟁 해서 승리를 했지만,

그다음 아브라함을 보면서 사람들이 뭘 이야기했겠습니까?
십일조는 멜기세덱에게 바치고, 나머지는 그 소돔왕에게 다 돌려주고,
자기가 동맹 맺은 자들에게 다 주고, 지는 뭐 먹고 살아요?
약속 먹고 산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변에 살아있는 사람들이 ‘4대가 와야 4대지.’ 여러분 그런 생각 안 들어요?
지금 하루도 지겨운 사람도 있잖아요.
‘빨리 지나가면 좋겠다. 이 고난 또한, 이 슬픔 또한(맞죠? 권집사님.) 곧 지나가리라.’
근데 4대라 쳐봅시다. 4대. 윤 대통령 내려오고, 그다음 대통령 되고, 그다음 대통령 되고,
그다음에 풀린다하면 ‘그럼 나 뭐 먹고 살아요?’ 이 얘기잖아요.
적용을 한번 해보세요. 사람들이 보기에 조롱거리입니까? 조롱거리가 아닙니까?

지금 사도바울이 십자가를 전하고 있죠.
십자가를 전한다는 것은 부활의 이 영광, 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소망도 함께 전한다는 거거든요.
부활을 안 전하는 게 아니에요. 십자가 안에 부활했기 때문에.
그런데 이 부활이라는 자체가, 이 소망이라는 자체가,
환난 가운데서 소망한다는, 영광을 소망한다는 이 자체가
사람들로부터는 조롱의 대상이고 비웃음의 대상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비웃음인 것을 제거하고 삭제하자’는 게 오늘날 교회예요.

그 뒤에 봅시다. 5절
“소망이 부끄럽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정말 은혜가 되지 않습니까? 저 혼자만 은혜받습니까?
‘소망이 부끄럽지 않다’라는 말을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 소망을 이야기할 때
성령 받지 못한, 성령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은 모두가 다 부끄럽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부끄럽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돼야 돼요?
새 생명 가운데서 살아야 되죠.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우리의 그 건너지 못하는 이 건널목을 사다리를 놓아줬어요.
사다리를 놓아줬으니까 악마는 제거되고 이제 화염검은 사라지고 에덴 동산으로 우리를 인도하셔서 우
리를 어떻게 살게 하신다? 이 땅에서부터 벌써 천국 생활을 하게 하신다라는 거예요.
말은 다 맞아요. 이미 우리가 성도는, 참 성도는 이 땅에서 천국 생활 하는 게 맞아요.

그런데 그들이 생각하는 그 천국생활은 (그런 교회를 다니셨잖아요. 권사님 그죠?)
그러면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부끄럽습니까? 부끄럽지 않습니까?
예수 믿고 난 뒤에 사업도 잘되고 자식도 잘되고 부자가 되었어요.
그럼 사람들이 그를 볼 때 뭐라 합니까? ‘야 너 예수 믿더니만 잘되더라.’
혹시 여러분도 그런 말씀 듣는 분 있죠? 사단의 유혹이라 생각하세요.
그러면 그렇게 얘기를 하는 게 뭐냐 하면

복음은 성령 받지 못한 자에게는 부끄러운 이야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 모든 사람이 조롱을 했잖아요. 비웃었잖아요.
여러분이 복음을 전했는데 성령받지 못한 자가
‘그것에 대해서 니 얘기 들어보니까 그 진짜 너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고 있네.
그 말도 안 되는 그 소망을 지금 이야기하고 있구나.’
그런 소리를 안 듣는다면 내가 수상한 자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성도가 내놓는 복음은요 지금 사도 바울은 아예 대놓고 확정적으로 얘기해요.
자기가 지금 로마서를 쓰면서 신령한 은혜를 나누려고 하잖아요. 찾아가는 것도 마찬가지고.
그 은혜를 나눌 때 어디에서 서로가 하나 되느냐?라고 할 때는
서로가 부끄러운 소망을 갖고 있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그래서 이 소망이 부끄럽지 않다라는 겁니다.
그다음 나오는 말씀이 굉장히 중요한데 뭔가 하면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성령에 의해서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십자가를 자랑스럽게, 그것만 자랑하는 자로 살 수 없다라는 이야기인 거예요.

왜 성령 이야기할까요?
성령을 이야기해버리면 무엇을 제거해 버립니까?
인간의 행함, 경험, 인간이 접근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다 제거해버려요.
지금 그 의미를 사도바울을 통해서 주님이 말씀하는 겁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기 때문에 소망이 부끄럽지 않다라는 거예요.
그러면 ‘난 소망이 안 부끄러워.’ 이 얘기하는 게 아니라
십자가를 전하는 거예요. 십자가를.

지금 사도바울이 성도가 어디로 들어갔습니까?
하나님과 화목되었다 했잖아요.
화목되었다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그 우리를 어디에 집어넣습니까?
화평케 되었다라는 이 화평케 하신 그분의 죽으심 속으로 우리를 집어넣어버려요.
집어넣어버릴 때 사람들은 ‘정말 저 인간은 되도 안 한 소망을 갖고 있구나.’

여러분 그런 생각 안 듭니까?
‘복음을 아는 사람도 얼마 없고, 교회 모이는 것도 (제가 볼 때는 이만하면 대단한 거지만)
초라하고... 복음을 아는데 왜 이럴까?’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해도 우리는 하거든요.
‘주님이 함께하는데 왜 내 문제는 안 풀릴까?’
진짜 복은 죽을 때까지 안 풀리는 자가 진짜 복 받은 자예요.

죽을 때까지 안 풀린 사람들 있잖아요.
예수님은 안 풀렸고요.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창대하리라”는 이것이 예수님한테는 거꾸로 돼 있잖아요.
창대했다가 완전히 미약한 상태가 되고.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안 풀립니다.
안 풀리고 있잖아요. 늙어간다는 증거거든요. 힘도 없어지고 기억도 사라지고.
저들과의 차이가 뭡니까? 저들은 소망이 부끄러운 거예요.
그런데 성도는 소망이 부끄럽지 않는 겁니다.
왜? 이 인생 자체가 십자가의 죽으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이 세상에 던져놓고 증인 삼기 위한 증거물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이 세상 사람들이 당하는 그 일들을 고스란히 다 당해야 됩니다.

지금 이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이 소망을, 시편 119편을 보겠습니다.
이 구약을 아는 사람과 구약을 모르는 사람의 차이가 있거든요.
구약을 아는 자들은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소망이라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납니다.
그게 오늘날 기독교가 유대교이기 때문에 그래요.
119편 105절부터 제가 읽어 나갈게요.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얼마나 많이 들었습니까?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까’ 어디로 인도합니까? ‘환란 가운데로 인도한다.’
이렇게 해석을 하는 인간은 아무도 없어요.
환란 가운데로 인도하다가 최종적으로는 어떻게 하실 것이다?
‘나를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맞아요. 언제?
우리를 죽이신 이후에.

요한계시록에 보면
그 영광스러운 면류관을 받는 자들이 어린 양의 이름 때문에 죽임당한 자들이잖아요.
문제는 유대인들은 이 시편을 외우죠. 어떤 사람은 시편 119편이 제일 기니까 다 외우고,
외운다는 걸 자랑하고 있는데. 참 이해가 안 돼요.
그거 외워서 어디 써먹으려고 그럽니까?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주의 의로운 규례를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 나오는 건 이것밖에 없어요.
자기 행위를 통해서 ‘제대로 지키면 주의 말씀이 발의 등이고 내 길에 빛으로서 인도하실 것이다.
말씀이 나를 인도할 것이다’라는 거예요. 좀 더 봅시다.

“나의 고난이 막심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여호와여 고하노니 내 입의 낙헌제를 받으시고”
‘내 입의 낙헌제’ 민수기 할 때 했죠? 민수기 30장.
특히 여자들이 경솔하게 막 소원하는, 서원하는 그 얘기예요.
그런데 이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이 낙헌제, 이 서원을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다라는 거예요.
그 정도로 자기 자신을 말씀으로 살겠다라는 이야기입니다. 봅시다.

“주의 법은 잊지 아니하나이다”
110절. “악인이 나를 해하려고 울무를 놓았사오나 나는 주의 법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철저하게 법에 머물러 있어요. 율법에.
“주의 증거로 내가 영원히 기업을 삼았사오니 이는 내 마음의 즐거움이 됨이니이다 내가 주의 율례를 길이 끝까지 행하려고 내 마음을 기울였나이다 내가 두 마음 품는 자를 미워하고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 주는 나의 은신처요 방패시라”

지금 계속해서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뭐예요?
자기의 대적이 있는 거예요. 대적이 자기를 지금 괴롭히고 있는데
지금 현 상황은 대적은 잘 나가고 있고 자기 꼬라지는 지금 엉망진창이라는 거예요.

114절. “주는 나의 은신처시요 방패시라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말씀을 바라는 이유가 뭐예요? 말씀대로 이 대적을 심판해 달라는 이야기예요.

“너희 행악자여 나를 떠날지어다. 나는 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리로다”
행악자들이 괴롭히니까 자기는 형편없는 곳으로 내몰리는 상황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명을 지키겠다’는 거예요.
지금 이들이 누군가? 하면요
서기관과 바리새인입니다. 기절초풍할 일이잖아요.
그다음 봅시다.

“주의 말씀대로 나를 붙들어 살게 하시고 내 소망이 부끄럽지 말게 하소서”
여기에 ‘소망’이 나오죠.
시편 119편에 나오는 이 ‘소망’을 부끄럽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돼요? 환난을 받아야 됩니까?
아니죠. 환난 없는 인생을 살아야 되잖아요. 잘 나가는 인생.
사람들이 왜 구약을 좋아하는지 아시겠죠?

구약을 좋아하는 이유가 뭔가? 하면
사도바울이 십자가의 영을 받고
이 ‘소망이 부끄럽지 않다’라는 이 말 자체를 제거하기 때문에 그래요.
소망이 부끄럽다라는 겁니다.
소망이, 사도바울이 말하는 소망이,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이죠.
이 영광의 소망은 반드시 십자가에 달려 죽고 부활이에요.
십자가가 없으면 부활이 없습니다.
그 영광의 소망은 이 땅에서는 반드시 구약에서 말씀하는 것과 정반대로 진행이 돼요.
반대도 또 안 맞거든요.

어쨌든 지금 이들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기다리는 이 ‘소망’과는 전혀 다른 소망이 펼쳐지죠.
제자들도 소망이 있었을 거 아니에요.
이 사도 바울도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잖아요. 소망이 있었잖아요.
그 소망은 오히려 거꾸로, 부끄러운 소망이었다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심판이 현재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나 이 성령을 부음을 받지 못한 자들은 십자가 복음이 부끄러운 겁니다.
지금 우리는 부활을 믿고 있잖아요. 그러면 노골적으로 이야기해 봅시다.
‘부활을 믿고 있는데 부활이 어디 있어요?’
여러분 그러면 뭐라고 이야기할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하는 말이 ‘부활을 믿습니다’라고 밖에 이야기 못하잖아요. 맞죠?
지금 사도바울은 그러한 논쟁 속에 이미 다 들어갔던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뭘 전합니까? 십자가를 전해요.
‘부활이 어디 있냐?’고 묻는 자에게 십자가 피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십자가 피를 이야기할 때 어떤 사태가 벌어지죠? 환난의 사태가 벌어지죠.
환난은 반드시 소망을 낳는다고 했잖아요.
부끄럽지 않는 소망을 낳는다고 했잖아요.
‘봐라’ 내가 뭐예요? 증거물이잖아요. 성도가. 꿈에도 생각을 못하는 거예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사실을, 성령 부음을 받지 못한 자들은 무엇을 상상을 해요?
부활할 것이라는 것을 상상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요한계시록 21장을 읽은 겁니다.
그걸 읽게 되면 성령의 부음이 없는 자들은 무엇을 자꾸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가? 하면
‘이때가 지나면 좋은 날이 올 거라’ 그걸 자꾸 떠올려요.

그러나 성령의 부음을 받은 자들은 환난 받는 자체가,
지금 성도는 다 환난 속에 있는 거거든요. 왜냐하면 악마가 이 세상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는 우리가 또 이 환난을 조작해내려고 하잖아요.
‘나도 스데반 집사님처럼 좀 환난 받고 싶다’
‘돈 벌다가 이렇게 환난 받기는 싫다’ 이 꼼수예요. 꼼수.

모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모두가 다 환난 안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십자가를 자랑하는 거예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기에 십자가 사건 속으로 날마다 저희들을 몰아넣으시고
환난을 끊임없이 발생시키시고 그 속에서 소망을 끊임없이 발생시키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있음을 말씀을 통하여 들려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소망이 부끄럽지 않음을 십자가만 자랑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모든 사람들로부터 부끄러움을 당하는 십자가만 자랑하는
십자가의 길로 걷기를 소원하는 주의 백성에게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