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3-09-24 15:06
20230924 로마서 강해 32강 롬 5:6-11 기약대로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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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3-09-25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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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24 로마서 강해 32강 롬 5_1-11 기약대로

다 함께 묵상 기도드리겠습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 고백하겠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 말씀, 잠언서 25장 2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잠25:26)
“의인이 악인 앞에 굴복하는 것은 우물의 흐리어짐과 샘의 더러워짐 같으니라”

기도하겠습니다.
선악가를 먹은 죄인들 가운데 살아가는 저희들을 부르셔서
주님의 증인으로 삼아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 세상은 우리들을 십자가만 자랑치 못하도록 유혹하고 미혹합니다.
이러한 세상 가운데서 십자가만 자랑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시편 77편 1절에서 9절 말씀을 교독하겠습니다.
[아삽의 시, 영장으로 여두둔의 법칙에 의지하여 한 노래]
(시77:1~9)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하나님께 내 음성으로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나의 환난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으며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내가 하나님을 생각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셀라)주께서 나로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 내가 괴로워 말할 수 없나이다 내가 옛날 곧 이전 해를 생각하였사오며 밤에 한 나의 노래를 기억하여 마음에 묵상하며 심령이 궁구하기를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그 인자하심이 길이 다하였는가, 그 허락을 영구히 폐하셨는가, 하나님이 은혜 베푸심을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 긍휼을 막으셨는가 하였나이다(셀라)”

이 시간 남명은 권사님 우리를 대표해서 기도해 주시겠습니다.
주님, 입술로는 주를 존경하나 마음으로는 멀리하며 살아가는 저희들을
오늘도 말씀하시는 주님 앞에 인도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선악과를 먹은 티를 나타내느라 선과 악을, 또 옳고 그름을 내가 판단하고 결정하며 선택하고 버리며
내가 맞았지 내가 잘못했지 하며 살아가는 저희들을 부르사
이 모든 것이 거짓되고 아무것도 아님을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의 공로로 저희들에게 알게 하시고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오직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나의 삶은 이 십자가의 피를 증거하는 것이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입을 열지 못하고 사는 죄인입니다.
친족 간의 관계가, 이웃의 관계가 깨질까 하여 그것을 더 중히 여기며
주님을 마음으로 멀리하는 나의 삶의 본체입니다.
주님,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오늘 주시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죄의 깊이를 더욱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사
진정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의 피를 자랑하며 감사하며 살아가는 삶으로 바꾸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나님 말씀, 로마서 5장 1절에서 11절 말씀을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롬5:1~1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아멘.

지난 시간에 1절에서 5절까지 말씀을 살펴보았는데, 오늘 6절부터 보겠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지금 로마서 5장 1절에서 11절 사이의 말씀은, 4장 25절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이 십자가 사건을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연속적으로 말씀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이 십자가 사건은 이미 로마서 1장에서 말씀하셨죠.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약속된 복음이라는 거예요.
그 약속된 것이 ‘아들’이라는 겁니다. 다 기억하고 계시죠? 약속이 아들.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그 약속은
땅에 대한 약속, 자녀에 대한 약속, 복에 대한 약속, 삼박자 구원이죠. 이 세 가지인데.
이 세 가지 약속이 로마서에서는 아들로 소개를 하고 있고 아들로 이 약속이 성취되었다라는 겁니다.

3개가 하나가 된다? 우리 인간이 갖고 있는 논리는 못 받아들이는 얘기예요.
자식은 자식이고 땅은 땅이고 복은 복이고
이 세 가지 요소가 약속의 자손인, 이 아들 예수님에게 모두다 담겨 있다라는 것을
인간은 못 받아들여요.

못 받아들인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가? 하면
약속이 세 가지니까 이 아들 속에서 또 3개를 뽑아내려고 해요.
뽑아내어서 분화를 시키려고 합니다.

요즘 자녀들은 독립을 안 하려고 하잖아요. 부모를 떠나 이제 결혼을 해서 분가를 해야 되는데
이 복음이라는 세계라는 것은 분가가 없어요.

그런데 성경을 해석을 할 때 이 약속에 대한 세 가지가 아들에 의해서 성취가 되면
‘이 아들이 어떤 분인가?’를 위한 약속이 되어야 되거든요. 소개가.

그런데 예수님께서 약속을 이루었으니까
자녀들은 우리고, 우리가 갈 땅은 천국이고 천국도 아니거든요. 성령인데.
그리고 복은 또 따로 있다라는 겁니다. 복은 따로 있다라는 거죠.

로마서에서는 그러한 사상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성경 전체가 그런 사상을 용납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런 생각 자체가 아브라함의 믿음이기 때문에 그래요.
설교를 처음 듣는 분들은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셨을 때 그 약속이 자신을 위해 있다라고 생각을 했었어요.
마치 인간들이 창세기를 보면서 세상에 이 모든 만물이 마지막 날 지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은 사람에게 중심을 두면서 우리 사람을 위해서 세상을 창조하셨다.

아마 교회를 오래 다녀본 사람들은 이런 설교를 한 번쯤은 다 들어봤을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세상을 만드셨다.’ 이러한 신학이 유대교 신학입니다.
유대교 신학은 말씀 중심의 신학이고 성전 중심의 신학이고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하나님 중심의 신학인 거예요.

그 신학의 원초가 어디 있느냐? 시조가 어디 있느냐? 라고 하면 첫째 아담안에 있어요.
이 로마서 5장에서 등장을 하는데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선악과를 먹은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게 되면 그 말씀을 누구 중심으로 해석을 하느냐? 라고 하면
말씀을 받은 나 중심으로 해석을 한다라는 거예요.

‘에이 목사님 그거는 유대인들이고...’
그럴 것 같으면 우리 사복음서 다 찢어버립시다.
우리 성도에게 해당 사항이 없다면 유대인들에 해당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 해당되는
그 이야기가, 그 말씀이 우리에게 해당이 없다면 앞으로 여러분은 이미 초자들만 그 성경을 읽으시고
복음을 좀 오래 들은 분들은 읽지 맙시다.
그거 왜 읽어요. 읽을 필요가 뭐 있습니까? 다 뗐는데.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예요. 뒤에 또 나오거든요. 이런 내용들이.
계속해서 반복되어 있습니다. 로마서는.
정답이야. 우리가 알죠. 정답이 뭡니까? ‘오늘도 목사님 설교하는데 정답은 십자가뿐이더라.’
정답을 잘 아는데. 그러면 제가 반문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을 받았죠? 맞죠?
그러면 아브라함이 입에서 무슨 말을 계속 내뱉었을까요?
‘약속, 약속, 약속’ 그것만 외쳤을 거 아닙니까.

공감을 안 하시는 분위기인데 약속을 받았으면 약속을 믿었을 거 아니에요.
그러면 약속은 어떻습니까? 반드시 이루시죠.
그런데 약속을 받은 그가 약속 속으로 들어가니까 어떤 일이 발생합니까?
아브라함이 진멸되는 상태, 신약적으로 표현하면 지옥 가는 상태가 발생한 거예요.

“기약대로” 기약대로,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이 “연약하다”라는 표현은 좀 부드럽게 했다라고 볼 수도 있지만
뒤에 보면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라고 표현을 하고 있고요.
성경에서 표현은 연약하든, 믿음이 부족하든,
이 하나님의 요구 사항은 무조건 완전해야 돼요.
연약하니까 좀 봐주겠다. 이런 게 없습니다.
연약하다라는 표현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때 오해를 하거든요.
좀 부족하니까 힘을 복돋아주는 거예요.

애들 공부 못하는 이유가 열심히 안 해서 못 하거든요.
머리가 나빠서 못하는 애들은 거의 없어요. DNA 유전자를 보면.

지금 하나님께서 이 “연약할 때”라고 표현을 했을 때
인간에게 핑곗거리를 주고자 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핑곗거리를 주고자 하는 게 아니에요.

지금 로마서를 듣는 사람들은, 읽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름을 받은 자예요.
성령의 할례를 받은 자입니다.
로마서 처음부터 출발해서 뒤에 오면, 한 5장쯤 오면 다 잊어버리거든요.
저도 마찬가지로 다 잊어버려요. 인간이라는 자체가.
똑똑한 사람들은 1절부터 쫙 외우면서 기억했죠. 기억해봤자 소용없어요.
왜 소용없는가? 하면 인간 자체가 앞으로 가면 뒤에 것을 잊게 돼 있어요.

지금 여기에서 “연약할 때에” 지금 사도 바울이 하고자 하는 얘기가 “기약대로”입니다. 기약대로.
이 기약대로라는 것은 “정하신 대로”라는 의미예요. 정하신 대로.
이걸 달리 표현하면 “약속”이라는 표현을 할 수 있고 “약속의 때”
이걸 갈라디아서에서는 “때가 차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나의 때”,
이 나의 때라고 했을 때는 하나님의 언약이잖아요.
약속하신 것을 언약을 통해서 성취를 하시는데 그 기약대로 하신 일이 무엇이냐? 라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4장 4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우리의 현실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데, 1절부터 보면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굉장히 괜찮게 있었다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로마서에 의하면
“모두가 다 하나님을 알되 영화롭게 하지 않고 감사하지도 않았다”라는 표현이 이 표현이에요.
마치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후견인, 청지기 하니까 율법 아래 있으니까 뭔가 괜찮았다.
그 후견인과 청지기의 특징이 뭐예요? 예수님을 살해하게 하는 그 역할을 한 거예요.

로마서에 조금 더 들어가면 이방인들조차도 마찬가지죠.
본디오 빌라도가 거기에 합세를 하잖아요.
왜 합세를 합니까?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잖아요.
옳고 그름을 판결을 하거든요.
그럼 옳고 그름의 판결은 누구 중심으로 한 거예요? 본디오 빌라도 자기 중심으로 한 거거든요.
그것과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사두개인들, 그들의 예수님의 판결과 똑같아요.
자기가 살기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그 사건을 벌인 거잖아요.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라니까 철저하게 갇혀져 있다라는 거예요. 철저하게.
언제부터? 선악과를 따먹기 전입니까 후입니까?
로마서로 들어오면, 아니면 저 고린도전서로 가게 되면, 아예 창조부터 가둬놨어요. 창조부터.
왜냐하면 이 첫째 아담을 “산 영”이라고 소개하거든요. 산 영. 처음 지었을 때 산 영이잖아요.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초등 학문이 율법입니다. 율법이 하나님의 말씀이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면 종 노릇한다라고 생각을 할까요? 하지 않을까요?
이 종노릇이라는 것은 죄의 종노릇이거든요.
이 율법을 주게 되면 ‘야, 내가 지금까지는 하나님의 뜻을 몰랐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알았으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 수 있고 살아가려고 애를 쓰고 살아가죠.’
그 자체를 두고 종노릇 한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 오늘날 예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말씀을 믿고 살아가자.’ 표현은 가능을 해요.
그것은 십자가를 증거하는 차원에서 말을 할 수 있지만
그와 달리 십자가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면 로마서 6장에 가면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빛의 자녀처럼 살아야 된다’라고 하니까 이걸 어떻게 가르칩니까?
‘말씀대로 살자’라고 가르치거든요.
그 가르침이 초등 학문 아래에 있는 거예요.

갈라디아스나 로마서가 해석이 왜 안 되는가? 하면
앞뒤 맞는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앞뒤 모순되는 이야기를 하거든요.
십자가의 피로 구원을 받았으면, 의롭게 되었으면 뒤에 법이 나오면 안 되잖아요.

그걸 용감하게 법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 아무도 없는데 그 사기꾼들이에요. 목사들이.
권면이라고 하잖아요. 그게 사도 바울의 권면입니까? 살아계신 심판주의 말씀입니까?
히브리서에 나오잖아요.
“우리가 선 곳은 불붙는 산과 게임이 안 되는 곳이라” 하거든요.
불붙는 산에서는 시내산에서는 목숨만 불태워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선 자리는 이 복음 앞이잖아요. 복음 앞에.
천만 천사는 겁나는데 이 복음 앞에는 하나도 안 겁나는 사람은 성령 못 받은 사람이에요.
이 복음은 천국과 지옥을, 영원한 지옥을 보내는 심판주 앞에 선 복음이에요.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에 있었다.” 언제까지? 정한 때까지.
갈라디아서도 마찬가지예요. 아멘 할 자만 아멘하고. (아멘 했잖아요. 방금. 우리 언이가.)
아멘할 자만 아멘하고 귀 없는 자는 못 듣게 돼 있어요.
그러면 귀 없는 자는 이 말씀을 어떻게 듣겠습니까?
귀 없는 자는 이 말씀을 똑같이 갇힌 상태, 초등 학문 방식으로 복음을 듣는 거예요.
그게 교리 교육이거든요. 교리가 뭐예요? ‘이걸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

그저께 어떤 분을 어제 만났는데 신천지에 가서 교육을 하더래요.
근데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신천지는 이렇게 똑바로 공부를 안 하면 잘라낸다. 그러더라고요.
근데 자세히 들어보니까 예쁜 여자는요 안 잘라낸대요. 고속 승진을 시킨대요.
jms도 그런 것 같아요. 키 178 이상. 저는 탈락이에요. 170도 안 되니까

그들이 모두가 다 제시하는 바가 뭔가?하면 법이에요 법. 초등 학문입니다.
그들 속에서 십자가는 하나의 법으로 작동을 해요. 십자가는 이야기도 하지 않겠지만
그러면 장로교회나 개혁교회도 십자가를 이야기하나요? 십자가는 아련한 추억일 뿐이에요.
제가 저기 허브공원에 산책을 하는데 밤늦게 하는데
어느 교회에서 나왔는지 밤에 찬양을 하는데 가사를 이렇게 들어봤는데
제가 머리가 나빠서 대충 이야기를 하면.
한여름이잖아요. 어릴 때 교회 다 본 사람들은 한여름이면 뭐가 생각납니까? 성경학교.
성경 학교의 추억을 떠올리는 가사를 쭉 나열하면서 예수 믿으라는 거예요.
추억을 팔아먹는 겁니다.

지금 우리 세대, 우리보다 더 위의 세대는 교회 안 가본 사람이 없거든요. 거의 다 가봤습니다.
성경학교 가서 노래 부르고 즐겁게 율동하면서 맛있는 간식 얻어먹고 신나는 노래하고 또 영화도 보고
우리 때는 조영남이 주연으로 나오는 영화도 나왔었거든요. 신앙.
혹시 보신 적 있나요? 세대가 또 다르니까, 서울하고 또 달라요. 이 촌 동네는

십자가를 빼버리는 거예요. 그 십자가를 빼버린다는 것이 어떤 식으로 빼느냐? 라고 할 때는
우리가 가장 잘 아는 게 십자가의 완료성이잖아요. 그죠?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그런데 그들도 그걸 다 인정을 해요.

어제 그분이 얘기하는데 자기가 이제 김성수 신학을 설교를 많이 들었다라고 얘기를 했대요.
그 신천지에 가니까 어떤 리더급이 김성수 설교를 쫙 외우고 나왔대요.
복음 전하려면 그 정도 돼야 안 됩니까?
혹시 여러분들이 누구한테 가면 제 이름을 대면 한 주가 지나면 제 설교에 대해서 다 외우고 나와요.
왜냐하면 그들은요 그게 공부기 때문에 그냥 외우고 하나의 논리를 펴는 겁니다. 자기 나름대로.
그러면서 지는 지옥 가고 구원 얻을 자는 구원 얻게 할지 모르지만.

제가 설교할 때마다 얘기했잖아요.
걔들은 연구를 해요. 성경을 새롭게 연구한 것은 다 연구해서 다 가져와요.
다 갖고 가서 사람들이 질문할 수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답변을 다 해줘요.
다 해주고 난 뒤에 결론이 뭔가? 하면 ‘믿으면 된다’라는 얘기입니다.
‘이런 교리는, 이런 말씀은 우리 외에는 가르치지 않는다’는 거예요.
어떻습니까? 설득력이.

인간들 자체가 구원받고자 하잖아요.
구원받고자 하는 그 욕망 속에 있기 때문에 올바른 성경 해석을 하고 올바르지도 않지만.
우리가 일반 교인들이 그 수준까지 안 되잖아요.
그러면 우리 전 집사님처럼 십자가 이야기하면 되는데 피 이야기하면 되는데
피 이야기는 또 못해. 왜? 지식이 쏟아지는 그 상황에서 피는 무식해 보이잖아요.
이게 솔직한 거 아닙니까?

예수님의 피를 이야기하려면 많~은 지식을 쏟아내야 된다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그러면 여러분이 어느 만큼 지식을 쏟아내겠어요?
성령을 빼버리면 뭐만 남는가? 하면 지식만 남아요.
예수님의 피 한마디를 이야기했는데 성령이 역사하게 되면 그 자체가 온전한 복음이 돼요.
근데 악마는 성령을 제거하고 지식을 계속해서 갖고 오잖아요.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때”, 이 때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고,
창세기 3장 15절에 아담과 여자에게 약속하신 그 때입니다.

“때가 차매”라는 말은
이 말씀이 우리 이방인들은 ‘그냥 때가 됐으니까 예수님이 오셨다’ 이렇게 생각을 하잖아요.
맞죠? 아닌가요? 근데 유대인들은요 이 때를 기다렸어요.
기다린다라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느냐? 하면
기다린다라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나요? 제가 1년 전쯤에 한국으로 왔잖아요.
올 때 여러분들이 기다렸잖아요. 물론 안 기다리는 분도 있지만.
‘왜 오느냐?’ 라고 하는 분도 있었지만.

기다릴 때 뭔가를 상상을 하죠. 그죠?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때를 기다렸습니다. 때를.
다니엘서를 한번 볼게요. 다니엘 2장 31절입니다.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왕이 꾼 꿈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이렇게 이야기하죠.

“왕이여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 그 신상이 왕의 앞에 섰는데 크고 광채가 특심하며 그 모양이 심히 두려우니 그 우상의 머리는 정금이요 가슴과 팔들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그 종아리는 철이요 그 발은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 또 왕이 보신즉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리매 때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숴져 여름 타작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었나이다”

이 꿈에 대한 해석을 또 다니엘이 합니다.
그 다니엘이 한 꿈에 대한 해석이 다니엘서에서 계속해서 여러 차례 반복되어서 얘기를 할 때
이 신상에 그 머리는 느부갓네살 왕이고, 그 뒤에 나오는 것은 바벨론 다음에 나오는 나라,
계속해서 그 제국들을 언급하고 있죠. 그 마지막 자리에
“사람의 손으로 말미암지 않는 뜨인 돌이 와서 태산을 이루어 온 세상에 가득하다”라는 게
이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왕이 꾼 꿈에 대한 해석입니다.

그러면 이 뜨인 돌을 잘 생각해 보세요.
‘뜨인 돌이 이루는 태산은 어떤 나라일까?’를 상상할 거 아니에요.
그러면 ‘어떤 나라일까?’를 상상할 때
그 이전에 있던 바벨론이 되었든, 그다음 페르시아 제국이 되었든,
헬라 마케도니아가 되었든, 로마 제국이 되었든,
그들보다는 더 강력한 힘을 소유한 그러한 나라가 도래할 것이라고 예상을 하는 겁니다.
우리야 믿음이 좋으니까 뜨인 돌이 철과 진흙을 박살 낸다라고 하니까
‘아, 예수님이 오히려 그들에 의해서 산산이 부서져서 이 땅에서 제거되는 분으로’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잖아요. 말씀을 듣고 배웠기 때문에.

근데 이것이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일지도 몰라요.
왜냐하면 그렇게 알고 있으면서 이 땅에서 우리는 왜 부서지려고 하지 않느냐? 이 얘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유대교라니까요. 복음을 알아도 우리가 유대교라니까요.

지금 “때가 차매”라고 할 때 이방인 쪽에서는
왜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이방인은 유대인과 상관이 없는데
왜 구약을 봐야 되고 왜 그들의 사상을 이렇게 알아봐야 되느냐? 라고 하면
그들이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자들로서, 말씀을 먼저 받은 자로서
인간으로부터 나올 수 있는 모든 요소를 다 끄집어내 놓았어요.

‘우리는 예수님 믿기 때문에 그들과 상관없어’가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 안에 들어왔기 때문에 십자가가 완료잖아요.
완료 안에 들어왔기 때문에 그 완료의 내용성 속으로 완전히 다시 들어가는 거예요. 우리 인생이.

그런데 구약에 살았던 그들의 삶이 우리가 살아가면서 똑같은 현장 속에서
환경만 다르지만, 그 요소들은 똑같이 뿜어져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때가 차매”라고 할 때
이미 사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때를 말씀하셨고
그 어머니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계시를 받았잖아요. 천사로부터.
그러면 포도주 부족하는 이 부분에 있어서
요 정도는 해결해 줘야 된다는 거예요. 요한복음 2장에서.
요 정도는 해결해줘야 더 큰 일도 할 수 있잖아요.
잔칫집에 포도주 부족한 거 그거 하나 공급 못하면
무슨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나의 때가 아직 되지 않았다”라고 얘기를 하는 데도 몰아붙이잖아요.
그게 마리아의 믿음이에요. 아브라함도 똑같거든요.
몰아붙이는 그 모습은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 마리아도 마찬가지고 제자들도 몰아붙여요.

우리는 믿음이 좋기 때문에 안 몰아붙인다고 하는데
안 몰아붙이면서 뭐 하세요? 그게 궁금해요. 안 몰아붙이면서.
이 신앙인이라는 게 재밌는 게 안 몰아붙이면 뭐 하는가? 하면
자식 키우는 데 미쳐버리고 돈 버는 데 미쳐버려요.

어제 그분이 간증을 하시는데 그전에는 소망이라는 게 잡혀 있는데
잡혀 있을 때는 열심을 내는데 목사님이 전하는 설교는 소망이 안 잡히네요.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사람이 그 사태로 몰려가야 돼요.

우리 시편 방금 77편을 읽었잖아요.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지 않느냐? 이 소리를 해야 돼요.
그래야 십자가와 만나는 현장이 될 거 아닙니까?
다니엘서의 예언 그것이 이제 칠십이레로 이렇게 예언이 되었을 때

이들은 계속해서 기다리는데 이들의 문제가 뭐냐? 라고 하면
우리들도 똑같아요. 갈라디아서 4장 4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렇게 말씀을 하시니까 인간들은 시간을 어떻게 보는가? 하면
이 과거로부터 시간이 흘러가죠. 그죠? 흘러가면서

이거는 진짜 그림을 안 그릴 수가...... 좀 크게 할게요.
창세기부터 지금 여기까지 “때가 차매” 예수님의 십자가거든요.
이 사복음서 전체가 십자가 안에 있고 이 십자가에서 이 모든 것들을 다 장악해버립니다.
“때가 차매”라고 하면 지금 갈라디아에 이단들이 왜 발생했느냐? 얘기예요.

이 복음을 어떻게 듣는가? 하면 시간으로 보는 겁니다.
약속이 있으니까 (에베소서 이야기는 조금 이따 다시 할 겁니다.)
약속이 있으니까 (잘 들리시죠? 중국에도.) 약속이 있으니까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믿고 기다립니다.
기다립니다. 그래서 때가 차죠. 그 뜨인 돌이.
때가 찬 것이 십자가 사건이니까
인간들은 어떻게 인식을 하는가? 하면
때가 찼으니까 이 모든 것들을 날려버리는 인식을 갖고 있어요. 날려버려요.

그런데 이 때가 찼다라는 말씀 안에는 이 모든 내용을 다 담고 있는 거예요.
다 담고 있다고요. 그럼 ‘여기에서 다시 출발하자’가 나올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이 “때”라는 것이
선지자들의 예언에 의하면 종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종말.
사도행전 2장 할 때 제가 설교를 했죠. 하도 오래돼서 기억도 안 나겠지만.
이 때라는 것이, 날이라는 것이 단수와 복수로 구성되어 있거든요.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게 다 ‘한 날’이에요.
종말이라고 하면 다 이루었다로 끝내버리는 겁니다.

끝내버렸는데 문제가 뭐냐? 하면
여전히 인간이 시간 속에서 육체 가운데 산다는 게 문제예요.
그런데 이미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해서 이 앞에 있는
이 아브라함의 믿음 같으면 이스라엘 전체를 넣을 수 있잖아요.
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해서 이 전체가 그리스도 안으로 설명이 되었잖아요.
그리스도 안에서 다 이룸을 보여주는 아브라함의 믿음이에요.

아브라함의 믿음을 조금 더 달리 표현하면
아브라함의 믿음이 부르심부터 죽을 때까지 이 전체가 뭔가? 하면
아브라함의 믿음이라는 겁니다. 믿음

이 약속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때가 차매” 이 약속을 이루심으로 말미암아
아들을 통해서 이루죠. 아들. 아들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시는데
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진 이 내용이 여기에 보면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셨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셨다.
이런 얘기하면 이방인이 우리들은 상관이 없잖아요. 율법 아래에 있는 우리들을.
그러니까 이방인들이 성경을 읽을 때는 골라서 읽어야 돼요.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성경을 읽어서는 안 된다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방인 유대인을 나누는데 나누어 봤자 말씀이 우리를 집어넣어버리면
우리가 유대인이 되고 이방인이 되고 이스라엘이 돼요.
그게 말씀의 세계예요.
우리가 말씀을 해석을 하기 때문에 우리가 분석을 하고 그걸 적용을 하려고 한다라는 겁니다.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한마디를 하니까 사람들이 또 여기 오면
‘아 우리가 율법 아래 있었는데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다.’ 이렇게 또 해석을 하는 거예요.
근데 이렇게 해석이 되면 “때가 차매”가 날아가 버리잖아요.

약속이라는 자체가.
그러면 그렇게 해석을 하게 되면
아들의 명분을 얻기 위한 십자가가 되면 말은 맞는데 그런 해석을 누가 했느냐? 라고 하면
유대인들이 한 거예요.
이 때를 기다리는 자들이 그런 해석을 한 겁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도 마찬가지예요.
성령 없이 읽어버리면 ‘성경대로’ 하는 것이 유대교가 되고
악마적 발상에서 나오는 해석이 되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럼 도대체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됩니까?’
어떻게 읽을 방법을 제시할 길이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말씀을 하실 때
자기 백성에게는 반드시 성령으로 일을 하시는 거잖아요.
‘그러면 목사님 그럴 것 같으면 성경 읽을 필요가 없네요.’
정말 말 잘했어요. 성령 못 받았어요. 그 사람은.
성령 못 받은 티를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말씀이 육신이 되셨는데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을 필요가 없다는 태도 자체가 뭘 노리고 있습니까?
성경을 처음부터 열심히 공부를 해서 연구를 해서 도달하고자 했던 그 사다리가 사라지니까
‘필요 없으니까 성경 보지 맙시다.’
그래서 무슨 짓하는 사람들이 많습니까? 기도원에 가서 기도만 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박수치면서

그런 게 많아요.
여러분 유튜브에 들어가면 십자가 어쩌고 어쩌고 다 이야기하는데
들어가면 무당들이 제가 볼 때는 99.9%예요. 그들의 주장이 이런 거잖아요.
십자가는 예수님이 친히 대속물로 내 준거다. 지식으로 도달할 수 없는 거라고
들어보면 다 맞는 말 같거든요.

말씀이 사라지게 되면 십자가의 의미가 사라져버립니다.
십자가의 사랑과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그 세계가
어떠한지를 다 삭제해버리는 게 그들의 태도예요.

구약을 모르니까 예수님을 살해한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그 메시야 왕국을 모르니까
오늘날 신천지나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교회가 날뛸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들과 대화를 할 때 결론을 한번 이야기해 보세요.
천국이 어떤 곳이냐? 이야기하면요
공통점이 다, ‘우리가 다 같이 (어떻게?) 주님과 함께 영원히 왕 노릇하며 잘 산다’
이것밖에 없다니까요.

여러분은 뭐라고 이야기하겠어요?
그래서 로마서가 중요한 겁니다. 갈라디아서도 마찬가지지만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지만
로마서가 해석이 안 되면 요한계시록도 해석이 안 돼요.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로마서에도 똑같이 나오거든요.
“이 양자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게 때가 찬 이야기인데

다시 로마서 5장으로 가서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십자가 사건은 이미 일어난 사건이죠.
그래서 항상 이 과거에 완료된 것이 계속해서 지속되는 사건입니다.
성경을 이렇게 해석을 해야 돼요.
‘과거에 일어난 일이다’가 아니라 본문을 자세히 보면
그 일어난 일이 어떻게 현재형으로 작동을 하느냐?
그리고 어떻게 현재 형과 미래형으로 작동하느냐?

우리야 믿음이 좋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이니까
어차피 과거 현재 미래 뭉뚱거려서 거기에 매이지 않는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잖아요.
그게 얼마나 편한 이야기입니까? 그게 왜 편하냐? 하면요
현실을 내가 살고 있는 이 부분을 회피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지금 로마서 5장에서 “환난 가운데 즐거워한다” 했잖아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고 있고 이미 누렸잖아요.
누리고 있다면 왜 환난 받아야 돼요? 제가 성경을 거꾸로 해석한다잖아요.
우리는 시간적으로 해석하면 ‘누렸으니까 환난을 받든 말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이렇게 해석할 수 있잖아요.

그러면 다시 과거 현재 미래가 있으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죠. 그죠?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잖아요. 그러면 현재는? 현재는 뭐냐?라는 거예요.
그러면 이 현재도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는 이야기입니다.
미래도 십자가에서 다 이룬 거죠.
그러면 과거든 현재든 미래든 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을 증거하는 현실이잖아요.

분명히 “기약대로”, 약속한 대로.
그래서 이 약속을 받지 못한 자들은 로마서를 해석 못한다는 얘기입니다.
약속은 성령이거든요.

성령이라는 것을 조금 더 정확하게 설명해 드릴게요.
성령을 약속을 받은 거거든요. 그걸 갈라디아서에는 땅처럼 이야기하는데
그 성령은 누구의 영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심판주가 됐잖아요.
주가 되셔서 아버지께로부터 받아서 자기 백성에게 성령을 보내주는데
그 성령은 무슨 일을 해요? 아들에 대해서 가르치고 증거하는 일을 하죠.

그러면 “성령을 받았다”라는 것은 “아들을 받았다”라는 거예요.
표현을 그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걸 “주님이 우리와 동행을 한다”라는 표현도 하고,
그리고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라는 식으로 표현을 하는 겁니다.

약속대로 죽으시고, 정하신 때를 따라 죽으시고, 이 죽으셨다가 과거잖아요. 이 과거니까.
그러면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 하면
믿음으로 사니까 그래 이미 죽으셨으니까 그다음은요? 그다음이 나와야 돼요.
왜냐하면 인간은 그다음이 안 나올 수가 없어요.
그다음 뭐가 나올까요? ‘나 구원 얻었다’ 하든지
아니면 ‘이 구원을 우리가 지켜내야 한다’든지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거예요.
 
한쪽은 ‘나 구원 얻었다’. 과거형이니까
‘정하신 기약대로 경건치 않은 자들을 위하여 죽으셨으니까 나 구원 얻었다.’
다른 한쪽은 ‘구원 얻은 것으로 끝내지 말고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면 열심히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된다’라고 이야기할 거 아니에요.
이것도 십자가와 원수 짓 아닌가요?
맞는 말인 것 같은데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면 우리가 살아야 된다는 자체가 용납이 안 돼요.
왜냐하면 거기에는 뭘 집어넣으려고 합니까? 행위를 집어넣으려고 하잖아요.

아까 갈라디아서 얘기를 하다가 그 이단들이 왜 나오는가? 하면 시간으로 보는 거예요.
시간으로 보니까 ‘때가 차서 다 이루었다’ 하니까
그다음 자기가 시간 가운데 살고 육체 가운데 사니까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라는 문제가 발생해요.
 
복음을 들으면 여러분들도 똑같은 질문을 하잖아요. ‘목사님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여러분 그런 질문해봤잖아요.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어떻게? 갈라디아 교인처럼 살면 돼요.
살면 되는데, 책망을 받으시면 됩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방식에 있어서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인물의 범주를 못 벗어나요.
환경이 그렇게 만들면 못 벗어납니다.
‘나는 믿음으로 살 수 있다.’
예를 들어 ‘말씀을 듣기 위해서 주일날 빠지지 않을 수 있다’라고 아무리 애써도
언이가 태어나면 힘들어요. 가두어 놓기 때문에.
환경이 그렇다는 거예요. 환경이.

그러면서 이 로마서 5장 7절에서“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쉽지 않다는 말은 불가능하다라는 의미가 강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셨다라고 보게 되면 의인을 위해서, 주를 위해서 죽는 사람은
주님이 만든 새로운 피조물 뿐이기 때문에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다라는 표현을 하는 거예요.
인간 쪽에서는 불가능한 겁니다.
이 의인이 그냥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의인, 그거라고 생각하면 안 돼요.
그거라면 그냥 뭐 죽을 수도 있다 치죠.

그다음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선인을 위하여.
나라를 위하여 죽는 자들이 있잖아요. 그죠?
독립을 위해서 죽은 자들이 있잖아요.
요즘은 독립 운동하다가 죽은 사람은 바보가 됐어요.

왜 바보가 되느냐? 현실에 적응하고 살아야 되죠.
이완용이가 훌륭한 사람이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우리 어떻게 살아요? 우리 다 이완용처럼 살고 있잖아요. 지금.
주의 백성이라고 하면서...
문제는 십자가가 나와야 되는데

지금 사도바울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예수님의 죽으심은 정한 때를 따라 죽으심이에요.
이것은 인간 쪽에서 나올 수 없는 죽으심이고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한 죽으심이에요.(문좀 닫아주세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라는 거예요.
과거거든요. 과거.

그런데 성경 말씀이 정말 놀라운 게 그 뒷부분입니다.
뒤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 말의 의미가 확정이 아니고 ‘확증’입니다. 증.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죽으신 것은 과거잖아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잖아요. 여러분 그걸 계속 지금 믿고 있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확증하는 그 자리가 성도가 지금 살고 있는 자리라는 거예요.

성도는 육이 있고 육이 있는 자는 항상 현실을 살게 돼 있어요.
인간은 기억을 갖고 과거를 소환하죠. 그죠? 기억을 갖고 살잖아요.

그런데 말씀은 항상 오늘, 지금을 말씀하고 있거든요.
분명히 십자가 사건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나타내신 것은 과거인데
그것이 지금 여러분 이렇게 앉아 있는 자리에서 그 사랑을 확증하고 있어요.
확실히 증거하여 제시하고 있는 거예요. 제시하고.
날 보라는 겁니다. 날 보라.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한 나를 보라는 거예요. 이 성도 자체가.
그 성도를 증인이라 하는 겁니다.

이렇게 말하면 또 선악과가 작동을 하잖아요.
‘내 모양 내 꼴이 무슨 이게 하나님이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자기의 사랑을 확증한
그 제시하는 그 증거물이냐?’
그러니까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라”라고 하는 거고요.

로마서에서는 환난 가운데 있거든요.
아까 기도하셨잖아요. 환란을 피하려고 하잖아요.
많이 싸워봤자 말 안 통하잖아요. 대화가 안 되잖아요. 대화를 하니까 내가 또 부족하고.
성경 아는 지식도 부족하고, 입을 다물어야 가정의 화평이 유지가 되잖아요.

오죽하면 사도 바울이 혼자 사는 게 좋다라고 표현했을까요.
고난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 현재형, 현재 이 제시하고 있는 너희들이 바로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그 사랑을 지금 나타낸다”라는 거예요.
지금.
그 지금 나타내는 현장이 복음 때문에 고난받는, 환난 받는 현장인 거예요.

앞부분에서“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계속해서 생산해낸다”고 했죠. 계속적인 표현이에요. 이 본문은
그 자체가 확증한 증거입니다. 증거.
니 모양 니 꼴, 그런데 무슨 사랑을 확증 했느냐?
‘그래 나도 모르겠어. 근데 나는 십자가뿐이야.’
마귀는 ‘그래 증거 좀 내놔라. 증거.’

환난 받는 걸 보고 그게 무슨 증거입니까?
환난도 피하고 주님이 피할 길을 제시를 하고
부자도 되고 잘 먹고 잘 살고 그러한 상황으로 살려질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자기의 사랑을 확증한, 우리가 사랑받은 자라 했잖아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말이야 다 맞아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맞는데
문제는 그 사랑을 그들은 뭘로 생각합니까?
성도는 십자가의 사랑을 받기 위해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았어요.
십자가의 사랑을 받기 위해. 그걸 증거하기 위해서.

예수님 옆에 달린 강도 보고 ‘너 사랑받은 증거를 내놔라.’ 이게 증거라 이게 증거.
‘나와 함께 낙원이 있으리라.’ 그게 증거예요.
이것보다 신나는 복음이 어디 있습니까? 이 기쁜 복음이.

그런데 선악과를 먹은 자들은 계속해서 뭔가를 내놓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시간이 있으니까 이 시간이 있고 육이 있으니까
‘주님의 때가 차매’라는 그 말씀의 의미를 ‘내가 뭐를 주님께 해야 된다’라고 하는 겁니다.
정반대죠.
성도들이 성령을 받은 이후에 구약을 보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 거예요.
산상 설교를 보더라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성령 받기 전에 제자들은 산상 설교를 들을 때는
‘이야 구약의 시내산에서 주신 그 하나님의 율법보다는 훨씬 더 치밀하고 엄격한,
제대로 된 하나님다운 율법을 주시는구나’ 이렇게 해석을 한 게 맞아요.
그게 100%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에는 질서가 잡혀야 되잖아요.
여러분 그것까지 생각해 봤습니까?
질서가 잡히려면 뭐가 있어야 돼요? 법이 있어야 되잖아요. 법이.
경찰이 있어야 되잖아요. 경찰이 있어야 내가 그곳에 살 맛이 나잖아요.

아니 이렇게 산보를 하는데 옆에서 칼 푹 찔러버려도,
아무 관련 없으면 아무나 찔러 죽일 수 있잖아요.
저도 수천 번은 죽었을 겁니다. 맨날 다니니까 홀로 다니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이 산길이.

하나님 나라도 마찬가지죠.
질서가 있다라는 것은 무엇이 있다는 거예요? 법이 있고.
법이 있다라는 것은 뭐가 있어요? 서열이 있다는 거예요. 서열.
제자들이 그걸 생각한 겁니다. 서열.
왜? 하나님 나라의 모델이 솔로몬 왕국이기 때문에 그래요.
다윗 왕국이기 때문에 그렇거든요.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법이 뭐예요? 십자가잖아요.
십자가는 인간이 생각하는 모든 법을 깨어버립니다. 9절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피로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이런 말씀이 우리는 너무 좋은 거예요.
특히 로마서 8장에 보면
“미리 정하신 자들을 부르시고 또한 부르신 자들을 의롭다 하시고 또한 의롭다 하신 자들을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거기에 모두가 다 과거완료형이 돼 있거든요. 과거형이 돼 있어요.
이미 끝냈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거든요.

그런 말씀들이 얼마나 신납니까?
신나니까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는가 하면 ‘마음껏 죽어라.’ 이야기예요. 마음껏
뭐 때문에? 피만 자랑하다가.

십자가의 완료성을 갖고 구원론을 챙기는 자들을 성경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구원파들이 그 논리거든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는 거예요.
그것만 믿으면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믿음이 어떤 식으로 나타나요? 지금 나타나고 미래로 나타나요.

자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죠. 그죠?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는데 봅시다.
출발부터 죽을 때까지 그게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의 모습이에요.
근데 우리는 뭘 낚아채고 싶습니까? ‘나 구원 얻었다.’에요.
아브라함처럼 살기 싫은 거예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라고 계속 이야기를 해놓고. 아브라함처럼 살기 싫은 거예요.
살기 싫으니까 구원론을 낚아채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으니까.

근데 로마서에서는 그런 인간들을 다 알고 있어요. 다 알고 있어요.
왜냐하면 이미 그 세계 속에는 이 십자가의 완료성의 복음을 다 전파되었고
그러한 가르침을 다 받은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그 집단 속에서 나올 수 있는 그 죄들은 또 다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조금 더 봅시다. 9절 하반절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그러면 당연히 구원을 이미 얻었어요? 얻을 것입니까?
구원파들은 ‘이미 얻었다’ 이야기할 거 아니에요. 로마서를 갖고 오고.
그래서 성경이 이쪽 가면 완료형으로 나오고 이쪽으로 가면 미완료형으로 나오는 이유가 있어요.
너는 신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너는 양자인데, 아들의 명분을 얻긴 얻었는데 너는 장자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성도는 장자의 증인이에요. 근데 인간은 자꾸 신이 되고 싶은 거예요. 신이.

이스라엘이 신이 되는 걸 실패했잖아요.
율법을 지킨다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인데
율법을 안 지켰기 때문에 시편에서 너희가 범인처럼 죽는 도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이제 시비를 걸잖아요.

그 실패를 딛고 예수 믿는 자들은 어떻게 나갑니까? 예수님 믿고,
어떻게? 나는 예수님처럼 작은 예수가 되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이런 소리를 하고 있어요.
아들의 명분은 맞아요.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자녀 맞아요.
자녀 맞는데 십자가의 증인으로서의 아들이고 맏아들을 자랑하는,
그 맏아들이 하신 일을 자랑함으로 말미암아
고 맏아들이 이 땅에서 살아간 그 길을 고스란히 걸어가는 게 아들이고 양자입니다.

그래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이렇게 나와요.
앞서서도 소망한다 했잖아요. 소망.
하나님의 영광을, 영광의 소망을 즐거워한다라고 했잖아요.
미래형으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다 이룬 그 영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 없듯이 살 수 있다라고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잖아요.
근데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심판주로부터 구원을 얻죠. 그런데 문제가 뭐냐? 하면 이거예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잖아요.
그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사람들이 그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을 비웃었잖아요.
어떻게 비웃었습니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너를 구원하라” 했잖아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면 그 아들의 영을 받은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어떤 취급을 받아야 되는가? 하면
‘너는 구원은커녕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야’라는 말을 들어야 돼요.

그걸 안 듣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 이름으로, 예수가 무당이잖아요. 우상이고.
기도하고 집에 십자가 갖다 걸고 차도 바꿔야 돼요.
집사님 차 바꿔야 돼요. 그건 복 받은 게 아니고 적어도 국민차는 타야 되잖아요. 제네시스 정도는.
그래야 조롱거리가 아닐 거 아닙니까?
장로님은 그걸 더 뼈저리게 느끼실 것 같은데
그런 대형 교회에 들어가려면 차를 좋은 거 타야 되거든요.

호텔에도 마찬가지잖아요. 티코 타고 못 들어가거든요. 안 가보셨죠. 감히.
저는 많이 옛날에 살 때 들어가 봤는데.
인물이 좋으면 통과돼요. 세상은 외모로 보기 때문에.

그러한 식으로 ‘너는 구원을 못 얻은 자야’라는 소리를 듣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사도바울이 “예수님의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이미 성도는 이런 말씀을 통해서 미래형이지만 완료형으로 이 말씀을 받는 거예요.
그게 로마서 8장으로 가면 나오는 거거든요.

우리가 기계라면 컴퓨터라면 그냥 입력을 하면 요동 없이 살 수 있잖아요.
사람들이 그 생각을 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주님이 성령을 어디에 주셨는가? 하면요 육체 가운데 사는 그에게 성령을 주셨다라는 겁니다.
그러니 사도바울을 보세요. 로마서 7장으로 가면 요동치잖아요. 요동을.
그게 한 번만 요동쳤겠어요? 이단들은 ‘그건 믿기 전이라’ 하는데...
불러와 보세요. 지가. 요동 안 치면 그건요 인간이 아니고 기계예요. 기계.
그런 자들이 사이코패스라고 합니까? 소시오패스인가? 뭐 그런 인간이잖아요.

“더욱더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 것임이니라”
그 환란 속에 있으니까 비웃음의 대상이고 조롱의 대상이니까 이 말씀 자체가 얼마나 위로가 돼요.
그런데 누가 이걸 공격하겠어요? 누가? ‘나 구원 얻었다’고 하는 자들이 공격을 해요.
‘나 구원 얻었다’고 하는 자들이 공격한다니까요.
뭘 갖고? ‘너 지금 보니까 예수님 제대로 안 믿네. 예수 이름으로 예수 이름으로 승리를 얻는다
했는데 니가 지금 환란 가운데 있는 걸 보니까 아직 성령의 능력을 맛을 못 봤구나.’

교회 안에 있는 자들이 공격하고 비난을 하고 비웃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살해했잖아요. 유대교가 하나님의 교회잖아요.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교회를 믿는 자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예수님을 살해한 거거든요.

로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당파가 생기는 거예요.
16장에 가면 ‘서로 문안하라’ 하죠.
문안하라 하면요 인간들은 문안 안 해요.
왜냐하면 문안하는 순간 손해 볼 일이 발생하거든요.

우리는 문안하라니까 기분 좋게 읽는데 우리 전화 문안도 안 하잖아요.
왜? 상대가 나를 이상하게 여길까 싶어서, 손해 볼까 싶어서.
‘문안하라’라는 말은 ‘너 죽어라’ 이 얘기거든요.
문안하는데 시간 내야 되죠. 돈 투자해야 되죠. 밥도 사줘야 되죠.
근데 돌아오는 건 뭐예요? 비웃음밖에 없는 거거든요.
물론 성령 안에서 교제를 한다면 십자가 안에서 함께 즐거워하겠지만, 10절 보겠습니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이제는 원수 되었을 때라고 표현하죠. 연약할 때 원수 되었을 때)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이미 화목되었거든요. 원수 되었을 때. 이거는 다 믿고 살아요. 맞죠? 이거는 현실이 아니니까.

이 로마서가 재밌는 게 현실은 앞서서 5장 몇 절입니까? 거기.
환란 중에도 이야기를 하는데 그 한 부분만 딱 집어넣어놓고
뒤에서는요 환란이라는 이 현실을 다 빼버려요. 싹 빼버리고.
“십자가의 피로 원수 되었을 때 화목케 되었다 십자가의 피로 의롭게 되었다”하고
현실은 싹 빼버리고 미래로 싹 가버려요.
이미 성도들은 그 현실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조금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이 세 가지 3종 세트가 성립이 안 되는 자는 성도 아니다.
이렇게 보셔도 돼요. 이렇게 하면 이제 충격적이죠.
목사님 그러면 행함이 아니라 말씀이잖아요. 말씀의 세계잖아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이 십자가를 전하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방금 제가 그렇게 이야기하려면 사람들이 당장 ‘그럼 누가 구원 얻습니까?’ 이렇게 가는데.
그 말씀을 들으면서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이렇게 나오면 되는데.
사람들은 계속해서 ‘그럼 누가 구원얻습니까?’

지금 성경은‘ 아무도 구원 못 얻는다’ 하잖아요.
주님께서 지금 이 말씀을 통해서 새롭게 자기 백성을 생성을 해요.
‘과거에 너 구원받았으니까 오늘 구원받는다’라는 이 논리를 다 깨는 거예요.

갈라디아 이단들이 처음은 십자가로 시작하잖아요.
뒤로 어디로 갑니까? 행위로 가잖아요.
골로새도 마찬가지고, 예루살렘 교회도 사도행전을 통해서 봤잖아요.
처음에는 율법으로 왔다가 십자가로 갔다가 다시 어디로 갑니까? 돈이 되니까 율법으로 가는 거예요.

저는 그게 우리의 앞날의 모델입니다.
십자가로 시작했다가 어디로 가요? 처음에 행위에서 십자가로 왔다가
또 어디로 갑니까? 이 세력이 많아지고 유지가 되려면 뭘로 가야 돼요? 법이 있어야 돼요. 법이.

맨날 십자가 이야기하면 상승이 안 되잖아요. 상승이. 인간은 상승하는 즐거움으로 살잖아요.
내가 복음을 들은 지 1년, 2년, 10년이 되었는데 맨날 제자리걸음이 아니라
말씀을 들을수록, ‘저 목사 설교를 들을수록 더 소망 없네.’ 그러면 감사가 넘쳐야 되는데
사람들은 그러한 감사가 안 넘치잖아요.
그때 문득
‘예수님을 믿더라도, 복음을 알더라도 우리가 복음을 아는 자의 면모를 보여야 된다.’
거기에 넘어가는 겁니다.

똑같습니다.
“더욱 더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더욱더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계속해서 반복을 하죠.
이 사이에 현재는 뭐냐? 라고 하면 “즐거워하느니라 즐거워하느니라 즐거워하느니라”
그 내용이 지금 3절에 나오고요. 그리고 11절에 나오는 겁니다.

즐거워하는 현실은 뭐예요? 구원이라는 것은 믿고 있죠. 알고 있잖아요.
그리고 이미 의롭게 되었다는 것도 이미 확정적이잖아요.
그거야 뭐 믿는 거는 쉽잖아요.
미래는 가봐야 되고 과거는 내가 안 가봤으니까 그냥 인정하면 되잖아요.

근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현실은 십자가로 인하여 환란 가운데 있는데
놀랍게도 그 환란받는 자체가 하나님과 화목된 증거요 의롭게 된 증거요.
이 자체가 이 11절에는 이렇게 말하죠.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달리 표현하면 이 “하나님 안에서”를 오해하지 마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주가 되기 때문에
이 십자가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즐거워하는 겁니다.

그러면 뭘 갖고 즐거워해요? 지금, 뭘 갖고.
계속해서 우리를, 지금 현실을 학생은 학생으로 살고
누구 어떤 형편에 있든 돈이 많든 적든 사장이든 아니든 어떤 형편에 살든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뭐 때문에 즐거워하겠어요? 지금 나오잖아요.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는 거예요.
그러니 내가 형편이 어떻다. 가난하다. 뭐 돈이 없다. 사람들 보기에 쭈글스럽다.
제가 어릴 때 제일 많이 듣던 그런 이야기가 있어요.
교회 가면 가난하면 사람들이 보기에 쭈글스럽다.
사투리 못 알아듣죠. 부끄럽다는 거예요.

가장 쭈글스러움을 당한 분이, 부끄러움을 당한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부끄러움을 당해야 돼요?
부끄럽지 않은데 저쪽에서 뭘 갖고 부끄럽다라고 생각해야 돼요?
‘뭐 말만 하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대. 피뿐이래. 지 꼬라지는 그 모양 그 꼴인데 십자가뿐이래.’
‘내 이 모습 자체가 이 사랑을 하나님의 사랑을 제시하는 증거물이래.’
이 스가랴서에 보면 마귀가 이 시커먼 그 여호수아를 두고 지적질 하잖아요.
공격하잖아요. 그게 십자가를 자랑하는 성도들이 당해야 될 현실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에서 “즐거워하느니라”
“즐거워하느니라”라고 하면 책망으로 다가가겠죠.
그러면서 진정한 즐거움 속에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고 우리에게 성령을 충만히 부어주셨기에
우리를 말씀의 사람,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길을 그대로 걷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 말씀 하나하나가 주님이 하신 일이요,
성도에게 일어나야 할 십자가의 증인으로서의 삶임을
저희들에게 날마다 알려주시고 인도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주님의 영을 받았기에 말씀의 사람으로서 십자가의 증인으로만 살기를 소원하는
주의 백성에게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