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3-10-22 14:49
20231022 로마서 강해 36강 롬 5:20-6:2 복음을 조롱하는 자들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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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3-10-23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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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2 로마서 강해 36강 롬 5:20-6:2 복음을 조롱하는 자들

다 함께 묵상 기도드리겠습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 고백하겠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 말씀, 잠언서 26장 3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잠26:3)
“말에게는 채찍이요 나귀에게는 자갈이요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니라”

기도하겠습니다.
미련하기 때문에, 채찍을 더 맞아서 지혜로운 자가 되려고 하는 이런 죄인들을
주께서 날마다 채찍으로 책망하셔서
정말 미련한 자임을 드러내시고 십자가를 밝히 보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주께서 날마다 저희들을 채찍질하셔서 십자가만 자랑하는 미련한 자로 드러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시편 78편 18절에서 29절 말씀을 교독하겠습니다.
[아삽의 마스길]
(시78:18~29)
“저희가 저희 탐욕대로 식물을 구하여 그 심중에 하나님을 시험하였으며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광야에서 능히 식탁을 준비하시랴 저가 반석을 쳐서 물을 내시매 시내가 넘쳤거니와 또 능히 떡을 주시며 그 백성을 위하여 고기를 예비하시랴 하였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듣고 노하심이여 야곱을 향하여 노가 맹렬하며 이스라엘을 향하여 노가 올랐으니 이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며 그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한 연고로다 그러나 저가 오히려 위의 궁창을 명하시며 하늘 문을 여시고 저희에게 만나를 비같이 내려 먹이시며 하늘 양식으로 주셨나니 사람이 권세 있는 자의 떡을 먹음이여 하나님이 식물을 충족히 주셨도다 저가 동풍으로 하늘에서 일게 하시며 그 권능으로 남풍을 인도하시고 저희에게 고기를 티끌 같이 내리시니 곧 바다 모래 같은 나는 새라
그 진 중에 떨어지게 하사 그 거처에 둘리셨도다 저희가 먹고 배불렀나니 하나님이 저희 소욕대로 주셨도다”

이 시간 우리를 대표해서 서미화 집사님 기도해 주시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희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불러주시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이렇게 모일 수 있게 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저희들 주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 하지만 나의 행복과 나의 구원에만 관심 있는 말뿐인 저희들입니다.
교만되이 살아가지 않게 하여 주시고
세상 속에 살면서 세상에 목적을 두지 않도록 저희를 잡아주시옵소서.
말씀을 듣고 잘 나눌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고 주님이 십자가의 증인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것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하나님 말씀, 로마서 5장 20절에서 6장 2절 말씀을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롬5:20~6:2)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아멘.

복음을 들으면 화가 나요.
복음은 기쁜 소식인데 왜 화가 나느냐? 우리의 육하고 맞지 않아요.
선악과를 먹은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 속에는 선악을 판별할 능력이 있어요.
어린아이 같은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뒤에 우리 초등학생들이, 초딩이 둘이 있잖아요. 다 선악을 판단해요.
내가 좋으면 선이고 나쁘면 악이에요.

어린아이, 유치원 아이들에게도 오늘 본문을 이렇게 들려주면 어떤 반응이 나오겠느냐? 이거예요.
예수님이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 못 간다고 했으니까
어린아이들은 이 성경을 가르쳐주면 진짜 어린아이같이 대답해요.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애들은 알아들어요.
‘아 율법을 주신 것은 범죄를 더하기 위해 주셨다. 죄지으라고 주셨구나’
지금 그 얘기를 하고 있거든요.

복음에는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나는데
그 의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이 단팥빵이 있으면
바깥에 있는 그 밀가루입니까? 그거 빼고 앙금, 그 팥만, 요렇게 의를 쏙 빼서
이렇게 알려주기를 원해요. 우리 생각은 그런 생각이 강해요.

그런데 이 하나님의 의.
“복음에는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 했을 때는 반드시 나오는 내용이 뭔가? 하면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선악과를 만드신 목적이 드러나지 않으면 의가 나올 수가 없어요.

우리는 가능한 선악과를 제거하려고 하잖아요.
그 제거하려는 그 우리의 모습은
우리의 삶을 바라보면서 조금 더 완전해지려고 하고, 완벽해지려고 하고.
‘우리들은 복음을 아니까 복음을 아는 사람다워야 된다’라는 이 생각, 이것은 예외가 없습니다.
우리 육이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는 자기가 아무리 머릿속에 세뇌를 시키더라도
상황이 발생하면, 상황은 누가 발생시킵니까? 주님입니다.
주님이 사태를 발생시키면 이러한 이 죄인의 습성들이 그대로 나올 수밖에 없어요.

애들한테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까지만 얘기하지 않고 그다음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봅시다.

애들한테 적용을 시키면 ‘얘야 얘야 너는 부모님 말씀을 듣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지시하는 바는 듣지 말라고 하는 말이야.’
이 자식 키워본 분들은 다 알죠. 그죠? 안 듣잖아요.
애들을 가르치는 분들도 마찬가지지만.

근데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이 ‘듣지 말라’는 정도가 아니고
‘듣고 더 악랄하게 범죄하라’고 주셨다라는 거예요.
그 악랄함이 나오지 않으면 은혜가 넘치지 못한다라고 하십니다.

어느 목사가 이렇게 설교를 합니까? 이렇게 설교를 하는 순간
‘참 잘 되었군요. 그렇지 않아도 제가 이제 어떤 사람에게 사기를 치려고 하는데 제가 양심에 가책이 있어서 못 치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복음을 들어보니까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고 그러하다면 죄를 더 지어야 되겠네.’
복음을 제대로 전했다면 이런 말이 반드시 나와야 됩니다.
이 말이 안 나온다면 복음을 제대로 전하지 않은 거예요.

왜냐하면 복음은요 이 리트머스 거름종이입니다.
이 복음이 선포되어야 둘로 쫙 갈라져 버려요.
성령이 있는 자와 없는 자가 갈라져 버립니다.
지금 로마에 있는 택정함을 입은, 사도바울도 택정함을 입었잖아요.
그럼 성도들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택정함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지금 복음을 전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들에게 전한다는 것은
사도바울 본인에게도 전하는 것이고 여기 있는 우리에게도 전하는 겁니다.
사도바울도 이러한 복음을 들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바울은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죠.
예수님이 찾아왔잖아요.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안 나오죠.
안 나오는데 이 내용이 다 담겨 있어요. 거기에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했잖아요.

이런 얘기를 들었을 때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하느냐? 하면
삐리릭~ 해가지고 갑자기 100%로 바뀌어가지고 ‘말씀을 다 알아들었다’
이런 생각을 우리들이 갖잖아요.
아니면 ‘삶의 방향이 (회개했으니까) 완전히 돌이켜서 다른 길로 가더라’
이런 논리가 성경하고 안 맞거든요.

인간들의 눈에는 술 마시고 마약하고 뭐 하는 짓거리를 하다가 안 하니까 돌이킨 건 맞아요.
물론 믿음은 그렇게도 나타납니다.
그런데 십자가가 밝히 보여야 돼요. 그러면 그 돌이킨 것은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오히려 거꾸로 해석을 하잖아요.
‘아 율법이 가입한 것은 죄를 더 짓게 하고 은혜가 넘치게 하여서 나를 마약하게 했구나.’
이 얘기를 하는 순간 또 두 부류가 딱 갈라집니다.
‘너 왜 너 자기 변명을 해?’
‘아니 나 피를 자랑하는데.’ 그럼 또 하나는 ‘그래 너 말 잘했어. 나도 그렇게 살고 싶어.’
이렇게 갈라지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주님을 만났을 때 충격받은 게 그겁니다.
율법을 보면 구약의 율법. 이슬람도 율법을 지금 추종하잖아요.
물론 최종 해석자의 권위를 따르죠. 마호멧입니까? 그 사람이 최종 결정권자예요.
그 말하는 게 정말 웃기는 게 그거예요. 최종 해석자가 누구냐? 라고 하면
아무리 율법이, 모세 오경이 하나님의 율법이라 백날 해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최종 해석자가 되면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 손아귀에 놀아나요?
자기들의 손아귀에 놀아나게 되어 있습니다.

왜 십자가냐? 라고 하면 십자가는 우리의 손아귀에 놀아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말씀을 갖고 복음을 전하는 당사자도 복음 자체가 부정해버리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십자가를 전하는 사람은 ‘나를 따르라’ 이야기를 못해요.
‘내가 가르친 대로 믿으면, 이 말씀대로 제대로 공부하면 천국 갑니다.’
이런 소리를 못하게 돼 있어요.
왜냐하면 복음 자체가 그걸 부정하거든요.

사도바울이 로마서를 쓰니까
자기는 괜찮은 위치에 있고 ‘너희들 까불지 마’ 이렇게 썼다라고 사람들이 생각을 해요.
그게 아닙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 할지라도 거짓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도 거기에 집어넣어버립니다. 희한하죠?
이건 희한한 게 아니라 이스라엘을 보세요.
이스라엘 가운데 하나님이 율법을 주시고, 율법을 주시는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이 무엇을?
해석하는 그들 속에서, 율법대로 제대로 순종하지 않으면 진멸을 해버리잖아요.
복음은 전해놓고 자기는 지옥 가는 거예요.

이런 일이 없다고요? 없습니까? 가룟 유다가 복음 전했잖아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했거든요. 병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구약의 율법을 연구를 하잖아요.
연구를 하면 ‘율법을 주신 목적이 뭐냐?’를 명확히 해야 됩니다.
율법을 주신 목적이 뭐예요? 우리는 답을 알고 있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다.

그러면 어떻게 전하느냐? 그건 목사들이나 신학자들이나 누구나 다 알죠.
그런데 구약 해석을 들어가면 다 율법적 해석이에요.
‘여호와를 경외하라. 여호와를 찬양하라.’ 이 모든 게 뭐예요?
예수님을 증거하면 그 말씀 안에 십자가가 밝히 보여야 되는데
십자가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라’ 이렇게 가르칩니다.

이 사람들이 말씀이 있으니까 그냥 믿는 거예요.
예수님을 전한다니까 그것도 믿고, 구약으로 들어가니까 그것도 그대로 믿고.
그러니까 짬뽕인 겁니다. 짬뽕.
여러분이 교회를 오랫동안 다녔으면 딜레마가 뭐였어요?
“예수 믿으라” 한 것도 있고, 구약 보면 “지켜라”는 것도 있고. 도대체 어쩌란 말이냐?
사실은 그게 정답이거든요.
‘어쩌란 말이냐?’가 사도행전에 뭐라고 나오는가? 하면 “어찌 할꼬”가 되거든요.
그럼 어쩌란 말이냐? 가 어찌 할꼬가 돼야 되는데,
“어찌 할꼬”가 안 돼요. 인간은.
왜? 자기가 선악을 알고 있기 때문에.

사도바울 같은 경우에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기 때문에
‘율법을 주신 목적은 자기 백성을 위해서 주셨다’라고 확정하고 있습니다.
그 율법대로 살아간다면 생명이 있고 영생이 있고 축복이 있고
율법대로 살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거예요.

지금도 그렇게 가르치잖아요. 그죠?
원래 율법에는 문제가 없었어. 그렇다 하니까 사람들이 이 말씀에 대해서 탐이 나는 거예요.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그 말씀에 보세요.
율법을 지키면 복을 받고 안 지키면 저주 받죠. 그 말씀의 끝자락에 누가 있습니까?
율법의 완성자이신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계시죠.

그러면 “율법을 지키면 복 받고” 이 말이 무엇을 유발한 거예요?
십자가 사건을 유발했잖아요.

그런데 목사나 신학자나 성경 읽는 사람들은
율법의 기능은 선한데 우리가 문제이기 때문에
율법을 제대로만 잘 단도리 한다면 우리가 천국 갈 수 있는 듯,
아니면 천국은 못 가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제대로 살 수 있지 않느냐? 라고 가르쳐요.

분명히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거든요.
“모든 사람을, 모든 인류를 심판 아래 가두기 위함이라”고 선언을 한 내용 안에 뭘 집어넣어야 돼요? “율법을 지키면 복을 받고, 축복을 받고 지키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내용을 집어넣어야 돼요.

근데 사람들은 이 교인이라고 나름 예수 믿고 성령 받았다는 사람들은 이걸 못 집어넣죠.
못 집어넣는 이유가 뭐냐? 하면 본인이 심판주기 때문에 그래요.
나도 눈이 있다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너희들은 눈이 무슨 눈? 썩은 동태 눈.
제가 좀 과격하게 표현했지만,
소경이나 뭐 그거나 뭐가 달라요?
소경이라 했잖아요. 소경이 무슨 성경 말씀을 읽고 적용하고 해석을 할 수 있느냐? 이 얘기입니다.

그러면 성경 말씀을 왜 주셨느냐?
성경 말씀은 성령에 의해서 감동되었어요.
그러면 주님께서 말씀을 하실 때는 반드시 말씀을 통하여, 뭘로 말씀하세요?
성령으로 말씀하시죠.
여기에서 성령 못 받은 자들은 어디로 갑니까?
‘말씀 중심으로’ 가게 돼 있어요.

그런데 말씀 중심으로 갔는데, 문제는 방금 다시 갑시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 말씀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다 담고 있죠. 다 담고 있지 않나요?
창세 전 언약까지 담고 있거든요. 이 말씀 자체가.

이렇게 말씀을 하게 되면 그다음 이제 나오는 그 반응이 뭐냐? 라는 거예요.
그 뒷부분에 좀 더 봅시다. 21절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지금 앞부분에 20절을 제대로 읽어야 21절이 이해가 돼요.
“죄가 사망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가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한다”는 이 내용이
겹쳐져 있습니다. 겹쳐져 있어요. 겹쳐져 있는 내용을 20절에서는 겹쳐져 있는데
21절로 가면 이걸 분리시켜 버리죠.

분리시키면 누구에게 유리하냐? 라고 하면 나에게 유리해요. 나에게.
이걸 분리시키면, 뭐가 ‘짜이쩬~’ 할 수 있습니까? (중국말을, 방언을 갑자기 해서...)
‘안녕~’ 할 수 있어요? 앞부분에 나온 말씀과 안녕~ 할 수 있는 거예요.

말씀의 층위는 어느 하나도 뺄 수가 없어요.
인간들은 말씀이 있으면
‘이게 옛 언약이고 새 언약이니까 옛 언약을 위해서는 새 언약을 빼버리자’ 하잖아요.
그런 논리를 인간들이 갖고 있거든요.
구원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서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한다” 라고 이야기하니까
왕 노릇은 완전 장악이잖아요. 우리들이 생각하는 왕 노릇은. 맞죠? 맞잖아요. 그 말이 맞아요.

그런데 이것이 복음이 되어버리면
이 ‘왕 노릇’이라는 의미가 우리가 갖고 있는 것과는 달라요.
‘우리’라는 것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가? 하면
다윗 왕국을 기다리는 자들이 유대인이었거든요. 남은 자 유대인. 메시야 왕국이에요.
그 메시야 왕국의 모델은 다윗이 다스리던 그 시절.
그다음 솔로몬이 다스리던 더욱 확장된 그 세계가 그들이 꿈꾸는 메시야 왕국입니다.

지금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팔레스타인이 전쟁하는 것은
이 포괄적으로 보면 복음과 상관이 있는데 역사와 연결고리가 하나도 없어요.
지금 여러분이 지금 블레셋과 싸우고 있는데.
블레셋과 싸우지 않는 사람은 성도 아닙니다.
블레셋이 어디 있어요? 팔레스타인이 어디 있습니까? 모든 것이 지금 그림자고 비유잖아요.
그러면 이 로마서에 의하면 어디에 있어요?
우리 가운데 있고, 내 속에 있고, 그다음 또 어디 있어요? 외부에 있잖아요.

예수님을 왜 죽여버렸습니까? 왜 예수님을 팔아먹었어요?
가룟 유다는 무엇을 고대했습니까? 힘으로 통치하는 메시야 왕국을 고대했거든요.
그런데 십자가 진다고 할 때 그것을 그가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가시적인 세계를 소망하고 기다린 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전하면 집어던져 버립니다.
‘아 예수 믿으면 뭔가 믿는 증거가 있어야지.’
증거라는 것이 어떻게 돼 있는가? 하면
나타났다가 사라져요. 고정성이 없어요.

안 믿으시는 표정인데 구약에 나오는 믿음의 선지자를 보세요.
약속의 땅에 갔잖아요. 갔는데 뭔가 보였죠? 보였는데 어떻습니까?
주님이 “그거 아니야”
기근을 주시니까 애굽으로 내려가죠. 뭔가 있는 것 같은데 또 “아니야.”

히브리서에는 뭐 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고 소망한다” 하죠. 로마서에도 똑같이 이야기해요.
뭘 소망합니까? 보이지 않는 것을 이야기해요.

근데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떤 식으로 말씀을 하는가? 하면
보이는 것을 통하여서 말씀을 하는데, 보이는 것을 통하여 말씀하는 방식이 뭐냐? 하면
그 속에 십자가 사건을 집어넣는 방식이에요.
그러니 어느 누가 이걸 받아들이고 믿을 수 있겠느냐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저도 어릴 때 저 국가 이스라엘에 대한 동경, 세뇌당했잖아요.
모태 신앙 해본 사람들은 다 거기에 미쳐 있어요.
우리 어머니 세대가 다 그런 설교를 들었거든요.
왜냐하면 다 ‘이스라엘, 남은 자, 남은 자는 돌아온다’ 이런 설교를 목사들이 다 했거든요.
그 당시에 전도사들이.

예수님이 참 이스라엘이라고 상상도 못해요.
그 예수님이 만드신, 여기 있는
(혈통적으로 보면 아브라함의 자손 아니잖아요. 혈통적으로 보면 남은 자 유대인이 아닌데,)
우리들이 유대인이라는 생각은 상상도 못하고,
그 팔레스타인이나 그 가나안 지역에 있는 그 일곱 족속들이
어디에 꽈리를 틀고 자리 잡고 있습니까?
요기에 있네. 요기. 요기에도 있고, 저기도 있고, 바깥에도 있고.

어떨 때? 피를 이야기할 때.
그것이 완전히 새롭게 호흡을 불어넣는 것 같아요. 이 악마성이.
피를 이야기하지 않으면 이 악마성이 살아나지를 않아요. 실제로도 그렇고.
예수님이 등장을 하니까 악마가 발악을 하잖아요.

교회도 마찬가지죠.
복음이 전파될 때 악마가 머리를 내밀거든요.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악마는 머리를 내밀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이 이런 복음을 들었을 때 자기 자신부터 지금 문제가 발생하는 거예요.

우리는 ‘성령 받으면 확 바뀔 거라’ 제발 좀 그 생각 버리세요.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 충만 받은 베드로가 뭘 합니까?
철저하게 음식에 대해서 구별하잖아요. 레위기에 나오는. 희한하지 않습니까?

우리 같으면 성령 충만 받으면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님만 자랑하고 십자가만 자랑하고.
이럴 것 같은데 그게 아니라
십자가를 자랑하려면, 예수님의 주되심을 자랑하려면, 그 내용들이 쏟아져 나와야 돼요.
그래서 우리가 죽을 때까지 나와야 되는 게 뭐냐? 하면 죄입니다.

그런데 이 죄가, 지금 이 로마서에 나온 이 말씀은 누구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냐? 라고 하면
물론 일차적으로는 모든 사람인데, 모든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지만
이 모든 사람이 앞부분에 “모든 사람, 많은 사람” 계속 반복을 했잖아요.
그 모든 사람 중에 모든 사람을 뽑아내버립니다.
그들만이 이 말씀에 아멘을 하죠.

그런데 한 번 뽑아냈죠? 한 번 뽑아냈는데. 한 번 뽑아냈잖아요.
방금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미 이 이야기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처음 복음을 들었을 때 받아들인 겁니까, 아닌 겁니까?
받아들였다고도 볼 수 있어요.

그런데 아직까지 이 내용이 그들에게 전파되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무슨 얘기인가? 하면
“예수님의 피로 구원을 얻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 그리스도가 주가 되셨습니다”라는
그 복음을 들었어요. 그래서 믿고 나섰는데
그들의 전제가 뭐냐? 하면 죄인이라는 것은 다 동일하게 인정을 한 거예요.
우리들도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
‘십자가의 피로 예수님을 믿는다’라고 들었고, 그걸 믿고 있잖아요.
‘그 피의 공로로 구원을 얻었다.’

그런데 막상 들어와 보니까 말씀의 세계가 펼쳐지는데
그 피로 구원을 얻는 내용이, 그 구원이
나를 위한 구원이 아니었고 피를 위한 구원이면서
동시에 여기에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이런 말씀들이 쏟아져 나오잖아요.
나오면 어떤 마음이 발생합니까? 이전에 내가 전혀 없었던 마음이 생겨나는 겁니다.
성경을 안 읽는 사람들은 뭘 고수하는가? 하면 나의 믿음을 고수해요.

제가 여러분들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성경을 좀 읽으세요.
성경을 읽지 않으면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가? 하면
제가 설교하는 그 내용을 여러분이 이미 정리를 다 했어요.
여러분들이 한 번 기도를 한 두세 번씩 했잖아요. 기도하는 걸 들어보면 정리가 다 됐어요.
그 정리한 것을 믿고, 고수하고, 그걸 내세울 가능성이 거의 100%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고, 말씀을 읽게 되면 와장창창 무너져요.
아무리 해석해도 안 돼요.
저한테 그런 말씀 많이 하셨잖아요. 그러니까 보라고. 이 말도 좀 못 알아듣는데...
그러니까 보라고요. 안 그러면 우리가 죄인임을 몰라요.

사람들하고 대화를 하면, 좀 복음을 들었다하는 사람들,
말씀을 들었다는 사람들과 왜 대화가 안 되느냐? 하면
그들이 신학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대화가 안 돼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학을 주장했습니까?
신학을 주장한 자들은 누구냐? 하면 예수님을 살해한 바리새인과 서기관입니다.

선지자들이 신학을 내세웠습니까? 사도들이 신학을 내세웠어요? 신학을 정리했습니까?
만일에 오늘날,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게 그겁니다.
성경을 정리해서 신학을 이렇게 요약하는 것. 할 수는 있어요.
근데 그것을 통하여서 구원을 얻을 것 같으면
주님이 사도바울 정도 되는 사람에게 간단하게 정리를 하면 되잖아요. 그런 것 아닙니까?
저는 그런 생각을 해요.

그러면 로마서가 정리가 안 됐다는 이야기거든요.
사도바울이 여기 조금 저기 조금 뽑아가지고 지 마음대로 얘기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로마서를 한번 정리를 해보겠다 해가지고, ‘로마서의 신학’ 해가지고 뽑아내고......
그건 어디에 유용한가? 하면 소통하는 데 유용해요.
그런데 그것이 복음을 전하는 데는 1도 도움이 안 됩니다. 1도.
그런 차원에서 신학을 이야기하고 한다면 박수 칠 일이죠.

‘이걸 좀 가르치면, 이걸 좀 하면 사람들이 성경을 잘 이해하지 않겠느냐?’
이해를 해서 어디에 써먹으려고 하느냐? 는 거예요.
십자가 사건이 이해한다고, 거기에 내가 참여할 수 있고 참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다니엘서를 한번 보겠습니다. 다니엘 2장
느부갓네살 왕이 남유다를 완전히 불살라버렸죠. 선지자의 예언대로 불살라버리고
이들을 포로로 잡아, 유대인들을 포도로 잡아왔는데 남유다 사람들을.
그런 가운데 꿈을 꿉니다.
참 이게, 제가 보기에는요 정말 이게 이해가 안 되는 게 그거예요.
아니 장래의 일, 이 느부갓네살 왕이 꿈꾼 게
창세 전부터 주님이 재림할 때까지의 내용 전체를 담고 있어요.

그런데 이 꿈을 누가 꿨습니까? 우리 같으면 누가 꾸기를 바라죠?
예수님 잘 믿는 사람, 여호와를 잘 경외하는 사람이 이러한 꿈을 꾸기를 바라지 않습니까?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십자가 사건이 어디에서 일어납니까? 어둠 가운데서 일어나죠.
우리가 갖고 있는 이 선입견이라는 게, 선악 구조라는 게 무섭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포로로 잡혀갔다라는 것은 이미 유대 땅이, 약속의 땅이 짐승의 땅이 되었다라는 것을
바탕으로 깔고 있습니다.
나중에 짐승의 땅이 어떻게 바뀌어가는가 그 변화의 과정이,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의 과정이에요.
마지막 짐승은 제가 여러 차례 말씀드렸잖아요. ‘말씀대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모습’이 짐승의 모습을 띠는데.

느부갓네살왕이 꿈을 꾸죠.
그 꿈의 내용은 하나님의 ‘장래 일’인데, 우리가 볼 때는 ‘장래의 일’이잖아요. 그죠? 바벨론 제국.
근데 바벨론이 벌써 시작되었잖아요.

이 ‘장래의 일’이라는 말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느냐? 라고 하면
이 장래의 일이라고 표현을 함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을 창조한 목적을 다 담아내버립니다.
예수님이 그 느부갓네살 왕이 꿈꾼 내용의 성취자가 되잖아요.
성취자가 되니까 어디까지 갑니까? 창세 전 언약까지 가버려요.

그러니 이 느부갓네살 왕에게 장래 일을 알려주신 이유가 따로 있어요.
지금 로마서 5장에 나오는 이 말씀과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율법을 주신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놀라운 것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여기에서 느부갓네살 왕이 꿈도 생각나지 않으니까 해석도 안 되겠죠.
우리 이런 걸 보면서 어릴 때 얼마나 ‘나도 이런 꿈 꾸고 싶다.’ 그랬습니까.
그래서 목사들이 꿈을 꿨다 하고 해석을 내뱉는 인간들이 있어요.
근데 그들의 문제가 뭐냐? 라고 하면
(제 이야기는 그냥 개꿈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마치 하나님의 뜻처럼 얘기를 하는데)

그들의 문제가 뭐냐? 라고 하면, ‘안다’라는 겁니다. 오늘 그 얘기를 지금 하려고 하는 거예요.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자들은 나름 복음을 아는 자들이에요.
알 뿐만 아니라 믿음을 갖고 있는 자들이에요.
지금 느부갓네살 왕이 이제 답답하니까 자기가 누구 행세합니까? 하나님 행세를 하거든요.
“이 꿈을 알려주고 해석을 해라.”
그러니까 그 동네에 해석을, 얼마나 큰 제국입니까? 똑똑한 사람들은 다 불러모았어요.
마치 옛날에 그 2차 대전 때입니까? 미국에서 똑똑한 사람을 다 끌어모아가지고
그 원자 폭탄 만드는 그걸 만들어내듯이, 다 불러서 ‘꿈을 이야기하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꿈은, 왕이 꾼 꿈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분이라야 그걸 알려줄 수 있고
우리는 안 된다라고 이야기할 때 다 죽이겠다고 하잖아요.

다니엘이 이 꿈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2장 27절부터 봅시다.
“다니엘이 왕 앞에 대답하여 가로되 왕의 물으신 바 은밀한 것은 박사나 술객이나 박수나 점장이가 능이 왕께 보일 수 없으되”
이게요 “보일 수 없으되”라는 말이
세상의 박사와 술객들, 점장이들, 그들이 보일 수 있다라는 것과
지금 다니엘이 말하는 보일 수 없다라는 것과 보일 수 있는 거죠. 나중에는.
그것의 차이가 있어요.
세상에는 보여주면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합니까? 대응을 할 수 있잖아요. 맞죠?

예를 들어 지금 이스라엘하고 하마스가 전쟁을 하잖아요.
그러면 이 전쟁이 발생했을 때
주식 분석가들은 이 전쟁이 끝날 경우에 어느 주식이 한 100% 오를 거냐라는 것을 뽑아냅니다.
지금은 인간이 안 뽑고 ai가 다 뽑아요.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대응을 할 수 있잖아요. 대응을.
투자를 한다든가 아니면 하지 않는다든가.

지금 한국 경제가 엉망이라고 하거든요. 그죠? 딤채. 딤채라는 상표 알죠? 모르는 사람 없잖아요.
지금 무슨 관리? 무슨 관리라고 합니까? 법정관리. 그게 들어갔다는데.
그러한 어떤 일들이 발생할 때 대응을 할 수 있잖아요.
이 지금까지 왕들 주변에서 꿈이라든가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해서 하늘의 징조를 이야기하면서
대응을 한 겁니다.

그런데 다니엘이 지금 이야기하는 이야기는 대응할 수 있느냐? 라는 얘기예요.
그 꿈을 알려줍니다. 알려주고, 그것을 알고 그 꿈이 뭐가 됩니까?
느부갓네살 왕이 꾼 꿈이 다니엘을 통해서 입으로 나오는 순간 그게 뭘로 바뀌어요? 말씀이 되죠.
물론 느부갓네살이 꾼 꿈도 말씀이 됩니다.
그 말씀이 되어지면
그 말씀이라는 것이 과연 인간에 의해서 믿을 수 있고 그것을 붙들 수 있느냐? 이 얘기예요.
그걸 아는 것이 인간에게 도움이 되느냐? 얘기입니다.

다니엘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28절부터 보면
“오직 은밀한 것을 나타내실 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그가 느브갓네살 왕에게 후일에 될 일을 알게 하셨나이다”
여기에 보면 “후일에 될 일을 알게 했다”라고 하죠.
우리는 아는 것을 되게 좋아하죠. 이렇습니다. 제가 금요일인가 설교할 때
요즘 특새(특별새벽기도) 기간입니까? 그래요? 순복음도 특새하는 거예요?
특새를 하는데 금메달까지 준다고 합시다.
저기 서초동에 가면 금메달을 주거든요. 혹시 금메달 따고 싶은 분은 그 교회에 등록해서......
40일 합니까? 차가 없는 사람이 가장 유리하지도 않네요. 택시 타고 가야 되니까.

나중에는 금메달을 하나로 만들 거예요. 제가 그 담임 목사라면 하나를 만들 거예요.
하나로 만들어서 이 순서를 딱 정할 겁니다.
새벽 기도만 오지 말고 가장 먼저 오고 가장 큰 소리로 기도하고
그걸로 하지 말고 ‘응답을 들은 걸 내놓으라’는 거예요.
처음에는 그냥 금메달을 부여합니다.
근데 그 기도가 한 달 후에 응답되었는지 보자 해가지고 사람을 불러낼 거예요.
그러면 그 응답받았다는 사람들이, 사기 치는 인간들이 다 나오겠죠.
원래 사기 치는 사람이 1등 받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기도를 했는데,
십자가라는 것이 밝히 보이는 사건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이 얘기예요.
그들이 예상한 거냐? 라는 겁니다. 예상 못한 거거든요.
그런데 그게 축복이에요.

그런데 그들은 뭘 꿈꾸고 있습니까?
특별 새벽 기도하면서 뭘 기도하겠어요?
우리는 특별히 새벽 기도 안 하잖아요. 그러면서 늘 기도하고 있잖아요.
뭐가 되기를 원하고 뭐가 잘 되기를 원하고. 남 욕할 게 없습니다. 그들의 모습이 우리 모습인데.
그 기도를 할 때, 건강한다든가 사업이 더 잘되게 해준다든가...
라이벌이 있잖아요. 교회 가면 라이벌이 있거든요. 자기보다 더 뛰어난 사람.
그걸 목표로 기도하거든요. 돈이 없는 사람은 돈 많은 사람 뒤에 가서 기도하세요. 권사님들 앞에.
‘주여, 지금 천만 원이 필요한데 이 천만 원이 없어서 우리 가족이 자살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면 누가 응답하는가? 하면
권사님이 응답해 줍니다. 제가 아는 전도사는 그렇게 해서 학비 벌고 아무튼...
여러분 상상이 안 가죠. 그 사람이 그래 목사가 되었으면 무슨 짓을 하겠어요?
주님의 응답이라는 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과 다른 걸 주시거든요.

그러면 또 이 로마서 6장에 나오듯이
‘나 그럴 것 같으면 기도 안 하겠다.’ 이거 보세요.
믿음 없는 인간들이 항상 하는 말이 응답이 내가 원하는 걸 안 주니까 나는 바른 기도하겠다.
이런 사람이나 아니면 응답하는 것을 주지 않으니까 기도 않겠다라는 사람이
분명히 예수님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 했잖아요.
말씀 속으로 들어가면 죄인이 되요. 십자가와 만난다는 겁니다.

지금 이 다니엘이 장래 일을 알게 하셨나이다라고 하면서 알려줍니다. 단2:32~34절
“머리는 정금이요 가슴과 팔들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그 종아리는 철이요 그 발은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이었더니 또 왕이 보신즉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또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리매”
이 내용을 알려줘요. 그러면서
“이 금머리는 바벨론 당신입니다. 느부갓네살 왕 당신입니다”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면 이 내용 전체 역사의 흐름을 다 알았잖아요.
알면, 여러분이 느부갓네살 왕이라면 금신상 만들까요, 안 만들까요?
금신상이 뜨인 돌에 의해서 박살 난다 했잖아요.
그러면 느부갓네살 왕이라면 이것은 멸망당해야 될 나라이기 때문에 만들지 않아야 된다라는 게
우리들의 생각이에요. 왜냐하면 알았기 때문에. 말씀을 알았기 때문에.

“이 세상이 불로써 심판받는다.” 알잖아요. 아는데 어떻게 삽니까? 참 웃기는 게
아니까 ‘믿습니다’ 해서 어디로 가요? 브라질로 가거든요.
그 ‘돌나라’라는 그 나라. 그죠? 천 명이 갔는데 지금 아직도 500명이 남아 있는데
그 사람들을 소환해봤자 그 밑에 있는 자들이 똑같은 짓을 해요.
배워먹은 게 그것밖에 없기 때문에.
그 엄청난 재산을 누가 차지하겠습니까?
정명수도 마찬가지예요. 돈이 어마어마하잖아요. 하나님의 교회든지 뭐 신천지든지.
돈은 그거 아마 국세청에서 조사해도 안 나와요.
헌금할 때 현금으로 하라 해보세요. 그거 어떻게 합니까?

이 미래를 알았을 때 어떻게 행동을 합니까? 미래를 아니까 어떻게 살아요?
말씀이라는 것과 말씀이 아닌 것의 차이는 있어요.
미래를 대응하는 방식에 있어서,
알기 때문에 자기가 자살하는 사람도 있고 미래를 알기 때문에 준비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있어서는 준비가 안 돼요.

아무리 알고. 칭찬을 하잖아요. ‘야 너 진짜 대단하다.’ 그렇게 알고
그렇게 될 줄로 믿죠. 믿는데 놀랍게도 이 알고 믿는, 그 말씀이죠.
말씀 속에 느부갓네살이 빨려 들어가요. 이게 말씀의 능력이에요.
말씀의 능력 속으로 빨려들어갑니다. 이걸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되거든요.
나중에 기뻐하거든요. 짐승이 되었을 때. 나중에.

문제는 알고, 말씀을 알고 우리가 믿는다라고 할 때
그것이 얼마나 허구적이냐? 라는 얘기입니다. 지금 제가 왜 이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방금 알았잖아요. 말씀을.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 말씀을 던졌을 때 우리는 어떤 반응이 나옵니까? 어떤 반응이 나와요? 말씀을 알았죠
1번 알았다. 두 번째 뭐예요? 알았으니까 믿어야 되죠.
그래서? 그래서?

알았다면 반드시 반응이 6장 1절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이 말을 하는 이유가 뭔가? 하면 “우리”라는 표현을 쓰죠. 우리.
이 우리는 신학적으로 유명한 우리잖아요. 그런데 그 신학자들이 뭘 모르는가? 하면
이 “우리” 안에 누가 있는가? 하면 “어떤 자들”이 있다라는 걸 몰라요.
“우리”라고 해버리니까 사람들은 ‘이 우리는 다 구원받은 자야’ 이렇게 생각을 해요.
혹시 우리는 그런 생각하지 않습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사신 우리죠. 맞죠?
피로 사신 우리라면 그 우리 안에는 어떤 자들이 함께 들어 있다라고 이야기를 해야 돼요?
우리 속에 들어갈 수 없는 자가 들어있다라고 이야기를 해야 돼요.
‘아니 목사님 논리가 안 맞잖아요. 피로 사신 우리라면 그 모두가 다 구원받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니까 죄를 짓자라는 게 맞잖아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 했으니까

사도바울이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여기 더한다는 것은 이 헬라어 성경으로는 “은혜를 넘쳐 흐르게 하기 위해서는”
앞부분과 연결돼 있거든요.
“죄에 머물러 있겠느냐?” 그 머물러서 “헤엄치자”라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 말 맞잖아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 했으니까.
그러면 여러분이 이 말씀을 달리 해석할 길이 있습니까?

말씀이라는 것이 인간의 논리성과 합리성을 완전히 무너뜨립니다.
이 진화론자들이 자기들의 합리성을 갖고 와서 ‘야 세상은 진화되었다’ 이렇게 주장을 하잖아요.
그들에게 이 본문을 해석해보라 그러세요.
그리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왔다’라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해 보라고 그러세요.
한 걸음 더 나가면
‘예수님의 피로 우리의 죄가 용서된다’라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해 보라 그러세요.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불가능한 이야기거든요.
근데 우리는 그러한 세뇌를 받았잖아요. 과학적 사고.
그래서 말씀이 논리적으로 안 맞으면
그 논리를 끼워 맞추기 위해서 뭘 집어넣을까요? 뭘 집어넣었습니까? 행위를 집어넣어요.

남포에 있는 어떤 교회 목사님인데 유명한데 제가 대학원 다닐 때 교수님이셨는데
13장 비유를 설명하면서 앞부분까지는 멋지게 얘기를 했어요.
‘옥토가 되자. 이런 건 아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것도 아니에요.
왜냐하면 옥토가 되라고 가르치거든요. 힘써 일하라 가르칩니다. 뒤에 서신서에 보면.
물론 기존 목사들이 ‘옥토가 되어라’라고 한 것이 문제였죠.

말씀을 볼 때 다양하게 봐야 되는데, 다양한 각도에서 보게 되면
이 말씀 자체에서 답을 못 뽑아내게 돼 있거든요.
근데 거기에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이 되잖아요.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이,
질문부터 해야 돼요. ‘그게 뭐냐?’라는 것부터 이야기를 해줘야 될 것 아닙니까?
성도에게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이 뭔가요?
돈으로 치면, 한 달란트 남겼습니다. 다섯 달란트 남겼습니다. 100달란트 남겼습니다. 이렇게 하면
‘이야 진짜 결실이 있네’라고 하는데

하나님 나라에서 30배의 결실은 어떤 식으로 드러납니까?
이런 언어가 던져지는 순간, 인간은 수학적 사고를 하게 되죠.
왜냐하면 구약에도 그런 표현을 하거든요. 양의 개념이 나온단 말이에요.
그런데 양의 개념 자체가 뭘로 다 바뀌어버렸습니까?
십자가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와 길이로 바뀌었어요.

성령이 하시는 일을 우리가 측량할 수 있나요? 측량이 되나요?
‘야 당신은 정말 큰 은혜 받았습니다’라고 할 때
이 ‘크다’라는 의미가 그만큼 죄인이고 사랑의 깊이를 받았다는 건데 옆에 있는 사람에게 척량을 해서
그 농도를 ‘당신은 100mm를 받았네요.’ 이런 얘기를 할 수 있어요? 없어요? 없는 거예요.
그 얘기를 안 해요. 유튜브 들어가서 한번 들어보세요.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 대표자가 누굽니까?
가장 먼저 죽은 야고보, 스데반 집사님. 그런 사람들이에요.
무슨 열매를 맺었어요?

모든 성도는요 동일한 열매를 맺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로마서에 나오죠. 선물이 넘쳤다 했잖아요. 선물이기 때문에.
왜 예수님이 그러면 그러한 말씀으로 하셨느냐? 라고 하면
상대가 악마잖아요. 악마들에게는 악마적 언어를 주셔야 돼요.
못 알아듣는 말씀을 하는 겁니다. 안 믿으시는 분위기인데...

마태복음 4장에서 마귀는 뭘 요구했습니까?
예수님은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주러 왔는데,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눈에 보이는 걸 보여라’라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걸 보여주신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긴 있죠. 있는데 ‘그걸 봤다’라고 하는 자들은 뭐예요? 다 소경입니다.
‘병 고쳤으니까 하나님 아들로 믿습니다.’ 요런 자들은 다 예수님을 떠나가게 돼 있습니다.

말씀을 들었으니까 우리가 아는 것은 성령을 배제하죠.
배제하니까 어떤 마음이 일어나느냐? 라고 하면
‘그러면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머무르자’ 이런 논리를 편다는 거예요.
이런 생각 안 해본 사람 손 한번 들어봅시다. 안 해본 사람?
질문을 잘했네. 아무도 안 들었네. 다 해보셨네요.

이 말씀 속에서 벗어날 인간이 없어요.
왜냐하면 이 상황이 되면 말씀 속으로 우리가 빨려들지, 이 말씀을 내가 지키는 경우는 없습니다.
말씀 속으로 빨려들면 죄인으로 드러나요.
물론 긍휼의 그릇으로 선택받지 못한 자들은 지옥으로 가지만.

지금 답변을 한번 보세요. 이 반박을 보세요.
반박을 보면서 문제를 찾았습니까? 무슨 문제를 찾았어요?
지금까지 뭘 이야기했습니까? 사도바울이. 믿
음을 이야기했죠. 은혜를 이야기했죠.
그런데 지금 뭘 꺼냅니까? 행위를 꺼내잖아요. 행위를 꺼내잖아요. 지금.
“은혜를 더하기 위해서 죄를 더 짓자.” 죄를 짓는 게 뭐예요? 행위잖아요.

야고보서를 이야기하는 순간, 모든 인간들은 뭘 끄집어내요? 행위를 끄집어내죠.
믿음을 이야기하고 있잖아요.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라고 하면서 믿음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로마서와 똑같습니다. 야고보서가.

그런데 믿음은 어디에서 나와요? 우리의 육체 가운데서 나와요.
우리가 살아가는 현장에서 믿음이 나오거든요.
이런 말씀을 복음을 전하면서 던지는 순간
‘그러면 우리가 은혜를 더하기 위해서 죄를 더 지어야 되겠네요.’
그런 이야기도 들어보셨죠? 그 말을 제가 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그런데 그 말이 무엇과 관련되어 있어야 되는가? 하면
이 말씀에 합류하는 것과 관련되어지면 죄인이 돼요.

그런데 ‘죄를 더 지어야 되겠네요’라고 하는 자들은
죄 짓는 것을 뭘로 이야기합니까? 자기의 의로움으로 내세우는 겁니다.
십자가의 피가 의로운 거잖아요. 죄 짓는 게 왜 의로움입니까?

다윗을 보게 되면 나단 선지자가 찾아오기 전까지,
자기가 죄를 알아요. 그래서 죄를 무마하려고 우리아를 죽이잖아요.
그런데 진짜 죄를 아는 시점은
나단 선지자가 비유를 들어서 얘기할 때도 몰라요. 저는 그게 참 마음에 들어요.
“바로 너다” 이렇게 얘기할 때.
비유법은 잘 안 통해요. 인간들에게는.
왜냐하면 제자들에게 하신 모든 말씀이 비유잖아요. 못 알아듣잖아요.
그래서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책망을 하시는데.

로마서 3장을 봅시다. 3장에서도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데 5절에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다는 거예요. 그게 다윗의 시편 51편이라는 겁니다.
그럼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면 사람들이 이렇게 얘기하죠.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은 불의하시다.’ 이렇게 반박을 하죠.
그런데 성령 받은 사람은 “결코 그렇지 않다.”
이 인간의 그 논리 속에 성령 받은 사람들은 피해가 버려요.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겠느냐”
거짓말하는 자가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죄를 더 짓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
내가 심판받을 이유가 없다라는 거예요. 맞죠? 논리가.
이들이 주장하는 논리가 옳아요, 옳지 않아요? 옳잖아요. 왜 옳으냐? 하면
우리가 그들과 한통속이기 때문에 그래요.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8절에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복음이 전파되면 반드시 이런 소리가 나오도록 해야 돼요.
근데 여기에 “어떤 자들”이라는 거예요. 어떤 자들.
이 “어떤 자들” 속에 누가 들어있느냐? 라고 하면 우리 모두가 다 들어 있어요.
말씀은 우리를 피해 가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감동으로 됐기 때문에.
이미 말씀을 어디 속에 다 집어넣었다고 했습니까?
우리 속에. 새 언약은 우리 속에 다 집어넣었다고 했죠. 저만 아는 겁니까? 다 아는 내용이잖아요.

말씀이 들어왔잖아요.
들어오면 이 모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하는 말씀이 되잖아요.
‘이거는 내 게 아니고 이거는 저쪽 거야. 저 사람에게 해당되는 거야’
이런 식으로 말씀을 적용할 수가 없어요.

요한복음 6장을 보고 마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장정 오천 명을 먹이시니까
사람들이 왕을 삼으려 했죠. 임금을.
그들 중에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이 엄청 많은데
그들에게 예수님이(6:54~55)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이 말씀을 무슨 수로 알아듣습니까?
알아들을 방법은 딱 하나예요. ‘믿습니다.’
지금 이 얘기를 왜 하는가? 하면
제자들이 그렇거든요. 12명 외에 많은 제자들이. 엄청나게 숫자가 많았습니다.
많은 게 좋잖아요. 많아야 헌금이 많을 것 아닙니까. 논리적으로.
교인 수가 2명이다. 기분 안 좋아요.

근데 예수님은 알아듣지 못하는 말씀을 하셨어요. 어려운 말씀을.
사실은 ‘어렵다’ “이 말씀은 어렵다. 누가 알아듣겠느냐”라는 말은 비웃는 말이에요.
왜냐하면 메시야 왕국이라는 것은, 선지자들의 예언에 의하면
비유는 비유일 뿐이고 실제는 이 땅에서 이루어지거든요.
근데 자기의 살과 피를 영생 얻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니까
이건 누구 방식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어요?
니고데모 방식으로밖에 해석이 안 되는 거예요. 못 알아듣는 겁니다.

그런데 12 제자가 남아 있었어요.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질문합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그러면 우리는 뭐라고 하겠어요? 뻔해요. 신앙 고백했잖아요. 아까 예배 시작할 때에.
여기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심에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여기에 뭐가 나옵니까? ‘믿고 아는’ 게 나와요.
신학적으로 ‘믿는 게 먼저냐? 아는 게 먼저냐?’ 이 논쟁 갖고 치열하게 싸웠어요.
신학을 공부한 사람은 알아요. 여러분 생각은 어때요?

이 딜레마에 빠져버리면 답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요 무엇이 먼저냐? 하면 복음이 먼저 전파가 돼요.
전파가 되고 들어요. 듣고 마음으로 믿게 되는 게 이 과정입니다.
듣는 게 먼저고, 들었으니까 알죠. 알고 난 뒤에 믿어요.
이 과정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돼 있어요.

사도바울을 보면, 예수님이 찾아왔을 때 “누구십니까?” 물었잖아요.
물으니까 뭐라고 대답합니까?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알았잖아요.
그 앎이 믿음 속으로 들어가는데, 그 믿음조차 어떻게 됩니까? 부정되거든요.

지금 여기에서 이들은 “믿고 알았다”라는 거예요. 뭘 믿었느냐?
여기에 보면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인 줄 믿고 알았다.”
이 믿고 앎이 잘 들어보세요. 이 요한복음이 우리가 볼 때는 사복음서에 속해 있잖아요.
그런데 신학자나 사람들이 굉장히 훗날에 기록했어요.

그 훗날에 기록돼버리면 이 말씀을 어디에 집어넣을 수 있는가? 하면 로마서에 집어넣을 수 있어요.
로마에 있는 교인들이나 아니면 갈라디아 교인들도 마찬가지고요.
고린도 전후서를 읽는 그 교인들에게 이 말씀을 집어넣어버리면
그 교회 안에는 어떤 자들로 채워지느냐? 하면
믿고 아는 자들로 채워지게 돼 있습니다. 맞잖아요. 지금

사도행전에 복음을 전하면,
예수님이 주님이다라는 것을 알게 되잖아요. 그 아는 것을 믿잖아요.
근데 그걸 알고 믿었다, 믿고 알았다. 괜찮아요.
그런데 그 속에는 누가 또 들어 있습니까?
마술사 시몬 같은 자들이 같이 들어있고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사람들이 그 속에 들어있어요.
그 속으로 지금 집어넣어야 돼요. 요한복음을.

요한복음도 누구한테 하는 말입니까? 이방인? 천만의 말씀이에요.
요한복음은 성도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방인들만 이 말을 못 알아들을까요? 유대인들도 못 알아들어요. 이 말씀을.

지금 베드로가 앞장서서 “우리는 당신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습니다.”
“믿고 알았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뭐라 합니까?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충격적인 말씀을 하시죠.
‘믿고 아는 것’ 보다 더 우선이 ‘선택’인 거예요.
에베소서에 가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 이게 선택이라고 하니까
이 선택은 십자가 안에서의 선택입니다. 십자가 안에서.
십자가 안에서의 선택이 아니면 어떤 사태가 발생하는가? 하면
그 선택한 자에게서는 십자가의 능력이 안 나오게 돼 있어요.

우리는 ‘선택받았기 때문에 구원을 얻는다’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러면 이 논리에 의하면, 십자가 없어도 구원받죠? 맞잖아요.
사람들이 그런 질문을 하거든요. ‘이순신이 구원받았느냐?’ 우리 어른들은 다 해본 질문이잖아요.
‘이순신 구원받았어요? 세종대왕 구원받았어요?’
그러면 우리가 옛날에 좀 선택론 배운 사람은
‘선택했으면 구원했을 거야.’ 그렇게 답변 저는 해봤거든요.
‘선택했으면 구원받았을 거야.’
그런데 그 선택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이에요.
그러면 왜 복음이 전파되지 않았느냐? 지옥 보내기 위해서 전파 안 했습니다.

구약도 똑같아요. 애굽을 왜 진멸했습니까?
그것은 진노의 그릇이기 때문에 지옥 보내는 거예요.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라고 하잖아요. 왜 그렇게 했습니까?
그것은 십자가의 피 능력을 증거하기 위한 선택이에요.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신나는 거예요. 열두 제자가.
그런데 예수님이 여기에 초를 쳐버립니다. 뭐라고 초를 칩니까?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로마서 3장에 보면 어떤 자들이 비아냥대고 비웃는 자들이
‘우리가 의를 이루기 위해서 죄를 더 짓자’라고 하는 자들이 발생했죠.

로마서 6장으로 가면
‘은혜를 더하기 위해서 죄에 머무르자. 은혜를 넘치게 하기 위해서 죄에 머무르자’라고 하는 자들이
본격적으로 등장을 하는 겁니다.
이들이 내세우는 게 뭐예요? 행위입니다. 행위.
복음을 전하면 반드시 내세우는 게 ‘앎’과 ‘믿음’이에요.

여기에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합니까?
“내가 너희 열둘을 택했는데 너희 중에 하나는 마귀니라”
‘너희를 택했다’라는 것만 있으면 이건 성도 아니에요.
‘열둘을 택했는데 그중에 하나는 마귀니라’ 해야 여기에 이 열두 제자가 아멘합니까, 안 합니까?
“나는 아니지요?”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논리가.

로마서를 읽을 때도 똑같아요.
그렇게 비아냥대는 자들이 “나는 아니지요?”가 아니라
이 말씀대로 훅 들어가면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 거예요. 행위가 나오는 게 아니라.
사도바울은 이 몰래 들어온 자들이 있거든요. 가룟 유다 같은.
가룟 유다는 사복음서에서는 우리는 답을 알고 들어가잖아요.
그런데 교회 시대로 들어가면, 사도행전으로 들어가면 몰라요. 그걸.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그러면 우리 중에도 있겠네요?’
뭐 우리 중에 이야기합니까? 나 자신이 그런 인간인데.
사람들이 자꾸 오해를 해요. ‘그러면 내가 그런 사람이냐?’ 맞죠. 자기가 맞죠.
그럼 아멘하면 될 일을 뭐가 기분이 나빠요?

그런데 지금 요한복음 6장을 보면서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않았느냐” 요것만 머릿속에 확 들어가 있는 거예요.

“너희 중 하나는 마귀다.”
왜 불특정인 하나를 딱 찍느냐? 라고 하면 ‘너희 모두가 다 그렇다’라는 얘기예요.
그러면 왜 너희들 중에 하나는 마귀가 되고 하나는 주께서 시키는 사도들로 바뀌느냐? 라고 하면
피 때문에 그래요. 피 때문에.
그 피를 자랑케 하기 위해서
주께서 한쪽은 심판에, 한쪽은 긍휼의 그릇으로 다루시는 겁니다.

그래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느니라”라는 이 말씀이 왜 중요하냐?라고 하면
모든 세상이 선악과 구조로 갇혀 있어요. 맞죠?
그 세계 속에서 못 벗어나요.
우리가 지금, 복음을 안다고 하는 우리들도 모여보면 옳고 그름을 다 따지거든요. 못 벗어납니다.
심지어 그런 사람들에게 지금 이런 이야기를 딱 던지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은혜를 더하기 위해서 죄를 짓자’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 말씀 속으로 들어가면 십자가가 나와야 돼요.
행위로 가서 십자가가 나올 수도 있고요. 바로 십자가로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받지 못한 자들은 반드시 어디로 미끄러지는가? 하면
행위로 미끄러져요.

사도바울의 말을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할 수 있느냐?’라고 하면
다음 주 보겠지만, 뭐가 나올까요? 그다음은? 또 행위가 나와요.
행위를 주장하는 자들을 바울이 치니까
그 논리를 갖고 ‘그러면 죄를 안 지어야 된다’는 행위가 나오는 거예요.

“죄 가운데 우리가 어찌 살리요” 이야기하니까. 무슨 말인지를 못 알아들어요.
왜 말씀 앞에서 행위가 나옵니까?
십자가를 자랑해야죠. 우리는 다 행위를 하고 있는데.

사도바울은 지금 이 기쁨 속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겁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고
율법을 주신 것은 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더 짓게 하기 위해서 주신 거예요.

그래서 지금도 우리에게 모든 말씀은 어떻게 다가오는가? 하면
율법으로 다가와요.
심지어 예수 믿는 것,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조차도 율법으로 다가옵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체가 뭐라 했습니까?
양심이라는 게 있다 했잖아요. 이게 선악 구조예요.
왜 주님은 우리를 이렇게 그대로 버려두느냐?
우리는 십자가의 증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령께서 날마다 저희들을 친히 인도하셔서 십자가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끊임없이 행위를 내세우는 죄인을 불러서 책망하시고
십자가만 자랑케 하는 그 은혜에 감사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말씀을 믿는 자가 아니라
십자가의 증인으로서 말씀의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소원하는 주의 백성에게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