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3-10-29 14:58
20231029 로마서 강해 37강 롬 6: 2-4 세례와 새생명 안의 삶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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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3-10-30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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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9 로마서 상해 37강 롬 6:2-4 세례와 새생명 안의 삶

다 함께 묵상 기도드리겠습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 고백하겠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 말씀, 잠언서 26장 4절에서 5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잠26:4~5)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 두렵건대 네가 그와 같을까 하노라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그에게 대답하라 두렵건대 그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길까 하노라”

기도하겠습니다.
귀한 복음의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고 하신 주의 말씀이
먼저 우리에게 던져주심으로 우리가 어리석은 자요 돼지로 드러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받은 십자가의 사랑을 전달하기에
복음이 떨어지는 자리가 미련한 자가 드러나는 자리가 되게 하여 주시고,
영생 얻기에 합당치 못한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말씀으로 들려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시편 78편 30절에서 39절 말씀을 교독하겠습니다.
[아삽의 마스길]
(시78:30~39)
“저희가 그 욕심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저희 식물이 아직 그 입에 있을 때에 하나님이 저희를 대하여 노를 발하사 저희 중 살진 자를 죽이시며 이스라엘의 청년을 쳐 엎드러뜨리셨도다 그럴찌라도 저희가 오히려 범죄하여 그의 기사를 믿지 아니하였으므로 하나님이 저희 날을 헛되이 보내게 하시며 저희 해를 두렵게 지내게 하셨도다 하나님이 저희를 죽이실 때에 저희가 그에게 구하며 돌이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고 하나님이 저희의 반석이시요 지존하신 하나님이 저희 구속자이심을 기억하였도다 그러나 저희가 입으로 그에게 아첨하며 자기 혀로 그에게 거짓을 말하였으니 이는 하나님께 향하는 저희 마음이 정함이 없으며 그의 언약에 성실치 아니하였음이로다 오직 하나님은 자비하심으로 죄악을 사하사 멸하지 아니하시고 그 진노를 여러번 돌이키시며 그 분 을 다 발하지 아니하셨으니 저희는 육체뿐이라 가고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로다”

이 시간 우리를 대표해서 김명희 집사님 기도해 주시겠습니다.
함께 기도드리겠습니다.
한 주 동안 육체 가운데 요동치는 이 세상 권세를 누리다가
오늘 기도를 통해 내 안의 죄가 입 밖으로 쏟아나오는 선물을 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육적 자아는 더럽고 너무 연약하여 이렇게 죄와 허물로 저주받아 사는 이 세상에서
죽은 삶을 살면서도 끈질기게 나 자신을 놓지 못합니다.
날마다 말씀대로 이끄시는 주님에 의해 십자가를 증거하는 현장 속으로 휩쓸리는 그 순간에도
롯의 아내처럼 뒤돌아서는, 진노의 그릇이 아닌 긍휼의 그릇으로 쓰임 받기를 원하는
우리는 실족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다고 기뻐하는 실족하는 자입니다.
또한 복음을 듣고 주를 믿으면 올무를 피해 갈 수 있고,
소경임을 깨달으면 온몸이 밝은 눈 뜬 자가 될 수 있다는 망상에 빠진 자입니다.
날마다 말씀을 내 마음에 새겨 더욱더 악마의 본성을 드러내니
어찌하면 좋을지,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구속안에서 나는 어리석고 쓸모없는 무능자임을 드러내며
이미 이 모든 것을 십자가 안에서 다 이루신 주님의 놀라운 은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케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이 모든 말씀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나님 말씀, 로마서 6장 2절에서 4절 말씀을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롬6:2~4)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아멘.

굉장히 유명한 말씀이죠.
우리의 모든 관심은 이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 삶.
교회에 가면 우리에게 가장 많은 스트레스를 주는 구절 중에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 헬라어 본문에서는 ‘새 생명 가운데서 산다’ 이런 표현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삶을 걷는다.’ 이렇게 표현이 되어 있어요. 새로운 생명.
“생명의 새로움 속에서 걷는다” 이렇게 돼 있어요. 생명의 새로움.

생명은 두 가지가 있잖아요.
아담의 육체에 의해서 물려받은 생명이 있고,
또 하나는 생명의 새로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주어진 생명.
똑같은 생명인데
하나는 그냥 생명이고 다른 하나는 생명의 새로움.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 걷고 있습니까?
생명 안에서 걷고 있습니까?
아니면 생명의 새로움 안에서 걷고 있습니까?
우리는 자기 자신을 확정하고 싶고
이 믿음의 세계에 들어온 것을 확실하게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새로움 속에서 걷기를 원하죠.

목사들이 이 본문을 갖고 교인들을 갖고 놀기에 가장 좋습니다.
자기는 그래 안 살거든요.
그렇게 살 수가 없어요.
그렇게 살 수 없다는 말은 이미 그들은 생명의 새로움이 무엇인지 모르는 거예요.

중국의 ‘삼자 교회’가 있는데 그 신학의 중심을 잡고 있는 게 ‘새 생명, 새 생활’입니다.
여러분도 옛날에 교재를 통해서 배워봤죠. 교회 안 다녀봤으니까?
새 생명을 얻었다면 새로운 삶을 살아야 된다.

말은 맞는데 어떻게 사는 것이 새로운 삶이냐?
근본적인 문제는 이 구원론부터 해결이 안 되죠. 구원론.
아니 이미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았는데 구원론이 해결이 안 되는 거예요.
거기에서 이제 치고 들어오는 게 구원파잖아요.
새 생명을 먼저 얻어야 새 생활을 할 수 있잖아요.

그들에게 새 생명이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심어주는 방식이
‘당신 몇 날, 몇일 날 구원을 얻었다’라고. 이 강매예요. 일단 강매.
질문을 하면 ‘언제 그랬더라?’
강매를 당하기 시작하면 ‘아 몇 날 몇 일!’
‘오늘 10월 29일 이태원 참사가 일어난 지 일주년 되는 날 구원을 얻었다.’
그때부터 이제 자기가 예수님을 만난 날이라 이야기하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잖아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았다’라는 선언 자체가
‘네가 언제 부름을 받았는가’ 자체를 다 묵살해버립니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이라는 말은 우리의 구원론 자체를 완전히 날려버리는 말씀인데
그런 식으로 이제 새 생명을 이야기하고

그다음 새 생활은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새 생활은. ‘니 마음대로 살아라.’ 1번.
2번은 어떻게 이야기하죠? 니 마음대로 살아라는 목사를 본 적은 있어요.
복음을 전하는 목사님이 계시는데. 근데 그 말을 못하죠.
왜냐하면 그 말을 하는 순간 뭐가 안 됩니까? 교회가 안 되잖아요.

‘구원을 언제 얻었다. 새 생명을 얻었다’라고 하고 난 뒤에,
여기에서 새 생활이 나오잖아요.
그럼 새 생활은 ‘니 마음대로 살아라’가 새생활입니까? 아니면 다르게 말을 해야 됩니까?

지금 이 로마서를 보는 사람들이, 읽는 사람들이 누굽니까? 성도들이에요.
성도들은 이미 영적 할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할례를 받았기에 로마서에 있는 모든 말씀이 아멘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앞서서 “은혜를 더하게 하려면 죄를 더 지어도 되겠네” 이 논리가 나오잖아요.
그러면 ‘네 마음대로 살아라.’ 이 말을 듣는 순간 그거는 말씀이 아니잖아요.
그럼 이 말씀 속으로 들어가야 되잖아요.

구원론을 추구하는 사람은 그런 말을 하는 순간 말씀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되겠네’ 이게 1차 부류.
2차 부류는 ‘그럴 수 없다.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었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 안에서 살겠느냐?’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생명의 새로움 속에서 살아야 되는데 그렇게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달라는 거예요.

방법은 딱 하나입니다. 브라질 가는 방법. 피지 가는 방법.
저거끼리 공동체 만들어서.
저 세상은 어떤 세계예요? 신앙촌이라는 게 있잖아요. 박태선이 만든 거, 맞아요?
그 신앙촌 이 세상은 나한테 먹여주는 입혀주는 그 세상일 뿐이고
자기들은 구원 공동체, 그러한 생각들을 가르치는 거죠.
그러면서 ‘우리 모임에 오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삶의 모습이다’ 이렇게 가르치고.
거기에 들어가도 또 계속해서 압력을 가하죠.
‘새로운 생명 안에서 새 생명 안에서 살아야 됩니다.’

그런데 얘기를 들어보면 그들이 말하는 ‘새 생명 안의 삶’이 뭐냐? 이 얘기예요.
그러면 그들 얘기하지 말고, 여러분 스스로가 지금 설교를 들으면서
‘새 생명 가운데 사는 게 뭐냐?’를 한번 답변해 보세요. 속으로

성령께서 개입하지 않으면 말씀 자체가 누구 방식으로 해석이 되는가? 하면
바리새인과 서기관 방식으로 해석이 돼요.
왜냐하면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말씀이 주도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주도권을 갖고 있어요.

그러나 성령을 받은 사람은 주도권을 누가 갖고 있는가? 하면
십자가 지신 주님이 주도권을 갖고 있어요.
말씀의 주도권을 자신이 갖고 있는 사람들은 ‘새 생명 가운데서 산다’라고 할 때
그다음 나오는 질문이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라는 질문을 해요.
‘나’라는 이 자아, 주인공이죠.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모든 사람의 관심이 거기 있잖아요. 복음을 전하면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내가.’

자기가 자신의 주인공이라면 설교자도 마찬가지죠.
설교자가 증인일 뿐인데 설교자가 주님이라면
‘그래 당신 이렇게 사세요. 이렇게 사는 것이 새로운 생명 가운데서 사는 겁니다’라고 지시를 하고
본인도 말씀의 주도권을 갖고 있다면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살겠습니다’라고 그렇게 할 수 있는데.

우리는 다 누구의 인도하심을 따라 삽니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잖아요.
그러면 그런 질문이 없어야 됩니까? 라고 물으면 당연히 질문을 해야 되죠.
질문 안 한다고 그 질문이 없는 게 아니에요.

이 육신이 죽을 때까지 첫째 아담 안에 있는 그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쏟아내 놓았던
그 모든 것들을 다 쏟아 놓게 돼 있어요.
‘아 나는 입을 다물래.’ 입을 다물어도 소용없다니까요.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벌써부터 말씀 자체가 어려워졌습니다.
왜냐하면 앞서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라고 할 때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라고 말을 했을 때
이 말은 누가 하는 말일까요?
지난 시간에도 얘기했지만 누가 하는 말입니까?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이 하는 말이죠.

그러면 질문 여러분들은 첫째 아담 안에 있습니까? 둘째 아담 안에 있습니까?
정리를 확실하게 하고 봅시다.
첫째 아담 안에 있습니까? 둘째 아담 안에 있습니까?
어떻게 답해도 뭐 엉터리 답이니까?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는가? 하면
이 말씀을 말씀 속에서 말씀이 하시는 말씀을 봐야 되는데
계속해서 자신은 이 말씀을 관찰하고 그것을 통하여서 자기는 그것을 피해가려고 해요.

‘둘째 아담 안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거 맞죠? 성도는. 분명히 얘기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만이 자기 자신을 첫째 아담 안에 있다’라고 인정을 해요.

이 비밀을 왜 몰랐을까요? 안 가르쳐주잖아요.
왜냐하면 성경을 읽을 때
‘둘째 아담 안에 있는 자는 첫째 아담과 상관없다’라고 이야기를 하잖아요.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할 때 이 모든 말씀이 누구와 관련되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돼 있다면
이 모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인 성도들 우리와 관련돼 있지,
우리와 다른, 그리스도의 몸이 아닌 자들은요 이 말씀에 대해서 골라 먹기를 해요. 골라 먹기.
그게 차이점이에요.

성령 받은 자들은 말씀을 골라 먹기가 안 돼요.
왜냐하면 전체가 십자가를 전하기 때문에 어떻게 우리가 골라 먹습니까?
그런데 지금까지 신학 자체가 골라 먹기를 해왔단 말이에요.
나와 너와 다르다라는 거예요. 나와 너와.
나와 너와 다르기 때문에 어떻게 합니까? 죽여버리는 거예요. 상대를.

저는 신천지가 정권을 잡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잡아야 예수 믿는 사람 다 죽일 거 아닙니까? 그래야 비 복음으로 드러나거든요.
지금도 신천지잖아요.
사람들이 복음을 그런 식으로 2천년 동안 해석해 왔어요.
구약 이스라엘도 똑같이 해석했거든요.

구약 이스라엘과 차이점은 딱 하나 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 그들 가운데 계셨다라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심판주가 되시면 둘로 쪼개버립니다.
쪼개버리면 긍휼의 그릇과 진노의 그릇이 달라져 버려요.

이 긍휼의 그릇과 진노의 그릇이 나누어진다라고 하니까 오해를 하는 게 뭔가? 하면
‘너는 진노의 그릇이고 나는 긍휼의 그릇이니까 너는 지옥 가야 돼. 너는 죽어 마땅하다’
이런 논리를 사람들이 펴는데
그러한 신학 자체가 누구의 신학이었습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신학이었어요.
유대인들의 신학이었습니다. 자기 구원 중심의 신학.
십자가 중심의 신학이 아니에요.

십자가 중심의 신학을 내세우는 순간 ‘편협하다. 정말 성경 자체를 너무 좁게 본다’
이런 소리를 다 듣기 때문에 어느 누구 하나도 거기에 대해서 용기 있게 얘기를 못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피 하나에 온 우주 만물, 이 은하계가 몇 개입니까? 수천억 개.
아는 것만 수천억 개 아닙니까? 인간들이 자기들이 관찰한.
그걸 수 조개라 해도 아무도 부정 못해요.
왜? 누가 봤습니까 그걸, 누가 가 봤어요?

‘지구 같은 행성이 수 조개 있다’라고 말해도 과학자들이 믿거든요.
근데 왜 십자가는 안 믿을까요?
그건 그들은 단순히 논리를 이야기하는데 논리의 문제가 아니에요.
그들은 뭘 부정합니까? 영의 세계를 부정하죠.
악령이 그들을 사로잡기 있기 때문에 그걸 안 믿는 게 아니라
저것들은 안 믿는다 하는데 못 믿는 거예요.

말씀 자체가 이렇게 모순덩어리로 우리에게 부어지고 있습니다.
이미 구약과 신약의 모순이잖아요.
율법을 지켜야 복을 받고, 지켜야 하나님께서 너에게 축복을 한다라고 하셨다면
신약에서도 ‘지켜야’ 나와야 되잖아요. 지켜야.
물론 그 말씀을 예수님이 지켜서 성취하는 게 아니고 십자가로 성취를 해버리죠.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잖아요.
왜 자꾸 예수님이 율법을 지켜서 율법을 이루었다는데,
지킨 개념 자체도 달라져 버리죠.
‘지켜라’라는 말은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것이다’라는 그 내용을 담고 있는 말씀이죠.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죄에 대해서 죽었으면
더 이상 “은혜를 더하기 위해서 죄를 더하자”라는 말이 나와야 됩니까? 나오지 않아야 됩니까?

여러분 장례식 가보잖아요. 시체 볼 일이 별로 없잖아요. 그죠? 자기 가까운 친족이 아니면.
자 돌아가신 분한테 ‘일어나라’ 하면 일어납니까?
뭘 할 수 있는 게 있어요? 없어요? 없잖아요.
그냥 묻을 때 입은 옷 그대로 묻으면 그대로 묻히는 거고, 태우면 그대로 태우는 거고
거기에 뭡니까? 그 불 태우는데 화장터에 가면 ‘잠깐 잠깐 잠깐 잠깐 내 유언을 불태우지 말라 했는데 너 왜 그래?’ 이래 말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잖아요.

근데 죄에 대해서 죽은 자가 다시 그 가운데 살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죽었으면 못 살잖아요.
못 사는데, 그러면 그다음 나오는 말이
그러면 주님께서 사도바울을 통해서 왜 로마서라는 이 긴 말씀을 써서 잔소리합니까?
아니 죄 이미 돼서 죽었는데, 죽은 자는 더 이상 죄 가운데 안 살잖아요.
그러면 잔소리할 필요 없잖아요.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시간도 아깝고 돈도 아깝고 다 아깝잖아요.
주차비도 아깝고 다 아까워요.
아까운데 모일 필요가 뭐 있습니까? 이미 죄에 대해서 죽었는데
매일 말씀을 상고할 필요가 뭐 있습니까?
주일마다 말씀을 들을 필요가 뭐 있나요?

‘죄에 대해서 죽었다’라고 할 때는
성도는 실제로 죄에 대해서 죽은 자가 맞아요.
죄에 대해서 죽었기 때문에 지금 이 말씀의 세계 속으로 성도는 빨려 들어가는 겁니다.

성도는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잖아요.
생명으로 옮겼으면 죽음이 왕 노릇 해야 됩니까? 안 해야 됩니까?
사망이 왕 노릇 해야 됩니까? 아닙니까?
죄로 인하여서 사망이 들어왔잖아요.
그러면 죄 문제가 해결되었잖아요.
그러면 죄 문제가 해결되었다면 사망이 왕노릇하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죠. 논리가.

그래서 이만희는 자기 안 죽는다 했다면서요
지금은 그런 말 해도 돼요. 왜냐하면 과학 기술이 워낙 뛰어나기 때문에.
죽어도 살려서, 그거 뭐 어차피 어차피 이만희를 직접 알현하는 사람이 몇 사람 안 되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기계로 돌리면 돼요. 기계로.
푸틴도 그렇게 움직일지도 모르죠. 음모론입니까?
인간들은 그렇게 하고도 남을 인간이에요.

그런데 주님은 이 육이 없는 이 심지어는 주님이 강림하기 전까지는 성도든 성도 아니든 다 죽입니다.
반드시 다 죽여요. 왜 그러냐? 하면 제가 설교를 할 때 그랬잖아요.
성도가 죽음 속에서 뭐가 나온다고 했습니까?
성도가 육체가 죽어야, 제가 육체가 죽어야, 제가 지금 50 얼마밖에 안 되는데 지금 죽었다 칩시다.
그저께 여기를 안 맞고 여기를 좀 제대로 맞아서 죽었다 칩시다.
그러면 사람들이 뭐라 하겠어요?
‘저 봐. 저 복음 전하더니만 길 가다가 돌 맞아 죽었어. 교통사고 나서 객사했어’ 조롱당해야죠.

근데 그 조롱을 누가 가장 먼저 할까요?
여기 앉아서 복음을 듣는 아마 여러분들이 가장 먼저 할 가능성이 제가 보기에는 100프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속에 딴 꿍꿍이가 다 들어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것조차도 주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를 증거하는 요소로 사용해요.

그런 일을 당해봐야 알죠.
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구속을 받았고 영화롭게 되었다라고 확정이 된 몸인데
왜 이렇게 구차하게 어렵게 사느냐? 얘기에요.
어제 이제 어떤 이 학교에 가서 운동장에 앉아서 보니까
이제 할아버지가 연세가 많은 분인데 그 유모차가 요즘 이렇게 지팡이잖아요.
운동을 하는데 ‘복음을 전하다가 저렇게 늙어가지고 이제 이렇게 다니면 참 은혜롭겠다.’
그걸 누가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사람들은 계속해서 망상을 하는 겁니다. 망상을.
지금 이미 주님께서 자신의 죽으심으로, 그 죽으심으로는 완료형으로 들어갔죠.
부활도 주님이 이미 하셨잖아요.

그런데 그 부활에 참예하는 것을 미래로 넘겼다 했죠.
지금 로마서는 계속해서 미래로 넘겼거든요. 부활에 참예하는 것을.
5장을 한번 보세요. 부활에 참예하는 것을 다 미래로 넘겼어요.
미래로 넘기고 오히려 성도의 현재의 삶은 어디로 집어넣느냐? 할 때는 십자가 속으로 집어넣어요.
십자가 사건의 반복되는 현장으로 집어넣습니다.

문제는 이미 구원을 받았고 의롭게 되었잖아요.
이미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잖아요.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한다는 것은, 왕이라는 것은 우리가 알기로는 왕조에서 나왔지만,
주님의 왕 노릇은 빈틈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빈틈이 없어야 되잖아요.

죄에 대해서 죽었다면, 아까도 얘기했지만 죽은 자가 뭘 할 수 있습니까? 죽은 자가.
아무것도 못하는데 사도바울이 갑자기 하는 말이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이 말을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하는 이유가 뭔가? 하면 그들이 그 말을 하고 앉은 거예요.

말씀이 여기에 있다는 것은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못 벗어나요.
이 말씀 속으로 들어가는 자만이 피를 전할 수 있어요.
그러면 사도바울이 그다음 하는 말이 “그럴 수 없다” 하거든요. 죄에 대해서 죽은 자는.

‘그럴 수 없다’라고 하면 지난 시간에 얘기했듯이 그다음 나오는 게 뭐예요?
앞서도 질문이 행위였고 뒤에서도 행위가 나올 거 아니에요. 한번 봅시다.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말씀이라는 것이 영의 말씀이라 했죠.
영의 말씀은 무엇을 담고 있습니까?
육의 말을 담고 있어요. 육의 언어를 담고 있습니다.
그 육의 언어를 담고 있으면서 말씀이 주어지게 되면
육으로 해석하는 모든 것들이 악마적 해석임을 다 들추어내게 돼 있어요.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할 때
사람들은 그래 이제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겠나?
벌써 보세요. 이미 안 살아야 되잖아요.
벌써 그 말 자체가 엉터리라는 얘기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로마서를 통하여서,
성경 전체를 통하여서 십자가 피를 지금 증거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피가 안 보이고 무엇을 자꾸 보려고 해요?
자기 구원과 행위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자기 구원과 행위.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이 말도 진짜 어렵죠.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 했잖아요. 이미 받았잖아요.
이미 받았다면 이미 아는 겁니까? 모르는 겁니까? 알고 있잖아요.
그거 아는 자에게 이야기 왜 해요? 이미 다 아는데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는 거예요.
누가? 우리는, 이 말씀을 듣는 우리는.
받았는데 무슨 반박이 튀어나왔다 했습니까?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니까
그러면 ‘은혜를 더하기 위해서 죄를 짓자’라는 반박이 튀어나오니까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그 죄에 대해서 죽은 것이 어떤 식으로 나타났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는 거예요. 세례.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합하여 세례를 받았습니까? 당황스럽죠? 이런 질문들이.
근데 성도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받았어요.
받았으니까 ‘은혜를 더하기 위해서 죄를 더 짓자’라는 로마서를 안 보는 사람은 그런 소리를 안 해요.
성경을 안 읽는 사람은 ‘뭐 십자가 피로 구원받았지. 나는 적어도 이런 헛소리는 안 해. 은혜를 더하기 위해서 죄를 더 지을 거야. 이런 소리로는 안 해.’

그런데 말씀 속으로 한 번 들어가 볼까요? 들어가 보면.
이럴 것 같으면 십자가를 위한 세상이라면
‘그래 십자가를 위해서 우리가 죄를 더 짓자’ 이 논리를 펼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을 안 읽으니까 죄가 안 나오는 거예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예수님은 과거에 돌아가셨죠.
그 과거에 돌아가셨지만, 이 죽으심은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가? 하면
인간들에게는 시간으로 흐르잖아요. 역사가 흐르는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딱 터지는 순간 다니엘의 그 환상,
느부갓네살 왕이 꿈꾸었던 그 꿈이 어떻게 바뀌어버리냐? 하면
십자가 중심으로 모든 것이 한 시점으로 가버려요.
한 시점으로 가버리고 한 공간으로 가버립니다.

인간들은 납득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러니 ‘에이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 왜 세종대왕은 구원 못 받았습니까?’라고 말하는 사람
뭘 몰라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는 의미를 전혀 모르는 겁니다.
그 십자가 사건 속으로 성도들은 이미 합류당했고 죽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래 놓고 또 하시는 말씀이 그건 과거형으로 돼 있거든요.
그러면서 “어찌 (여기에 보면) 알지 못하느뇨”는 지금, 지금.
또 시제가 바뀌어버렸죠.
우리는 얼마나 악한가 하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하면 그 지점으로 가고 싶은 욕망이 가득해요.

근데 아까 제가 말씀드렸죠.
우리는 이 땅에 계속해서 살면서 육체가 죽을 때까지 살아야 된다고요.
왜냐하면 우리는 그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어떤 자로 살아가야 되는가? 하면
말씀에 의해서 책망을 받는 죄인으로 살아가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세례가 뭐냐? 라는 거예요. 세례.
이 세례가 왜 어려우냐? 라고 하면 잘 보세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 했을 때 여러분 그 경험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물 세례는 받았잖아요. 그죠?
물 세례 받을 때 성령 세례가 동시에 임했습니까? 우리 집사님, 어때요?

여기에서 이제 갈등이 생기는 거예요. 여기에서.
왜? 이 사도행전을 보면 물 세례를 줄 때 성령이 동시에 임하는 경우도 있고요.
그런데 물 세례를 주는 것과 성령 세례가 시제를 두고,
시간 차이를 두고 다르게 임하는 경우도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좀 일을 하실 때
물 세례 줄 때마다 성령 세례가 팍팍 임하면 성경 해석하는 것도 얼마나 쉽습니까?
목사들이 그걸 원하잖아요. 자기가 물 세례 줄 때 성령 세례가 확 임하는.
근데 성령 세례가 사도행전에 임하는 것은 눈으로 보였지만 그 이후부터는 보이지 않아요.
보이는 건 뭐 밖에 없는가? 하면 물 세례밖에 없어요. 물 세례밖에 없어요.

먼저 마태복음 3장을 보면 세례 요한이 물 세례를 주는 그 내용이 나오는데
3장 5절입니다.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물 세례를 받았어요.
물 세례를 받았을 때 성령이 임했습니까? 안 임했습니까? 임하지 않았죠.

그런데 물세례 받은 자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요
이 세례요한이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이야기하죠.

물 세례 받으러 오는 사람들이 자기 죄를 자기가 알아요? 몰라요? 알죠.
아니까 물 세례 받으러 온, 거잖아요.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물 세례 받으러 안 갑니다.
왜? 회개할 죄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래서 물 세례를 받으러 온 이후에 물 세례 받는 그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속으로 아브라함 자손이라 하지 말라”
물론 이것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하는 말씀인데.

이걸 그대로 돌려버리면 누구에게 하는 말씀이에요? 세례받는 자에게 하는 말이에요.
우리가 어떻게 할까? 묻잖아요.
그러면 군인들은 늑탈하지 말고 그런 회개에 합당한 열매들을 세례요한이 이야기를 하거든요.

그러면 물 세례는 사람이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줄 수 있고 세례에 합당한 열매도 사람이 맺을 수 있죠.
그게 지금 물 세례입니다.

그 물 세례의 한계가 뭐냐? 라고 하면
‘자기의 죄를 깨닫는다’라고 표현할 수도 있고 자기의 죄를 알고 회개를 하는 거예요.
마치 술 마시는 사람이 술 안 먹고. 아내를, 마누라를 계속 때리는 사람이 안 때리고.
그러한 사람이 그런 모습으로 보이는 걸 세례에 합당한 열매라 할 수 있는 겁니다.
오늘날 뭐 회개했다라는 말이 다 거짓말이라 거예요.

그게 세례 요한의 외침인데 이 세례 요한의 외침이 예수님 속으로 들어가게 돼요. 물세례가.
그래서 예수님에게 세례 요한이 물 세례를 줄 때 그 물 세례를 받고 올라올 때 성령이 임하죠.
그 물 세례에 플러스 뭐가 됐습니까? 성령 세례가 된 거예요.

그리고 여기에 하나가 더해집니다.
마태복음 3장 11절에 보면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하죠.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라고 하거든요.
성령과 불, 성령은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죠.
불은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보이죠.
물은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보이죠

그런데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가? 하면
예수님이 지금 물세례 받고 올라오실 때 불세례를 받았습니까? 못 받았습니까? 너무 어렵죠.
불세례 받았어요? 못 받았어요? 못 받았죠.
성령 세례만 받았습니다.

세례요한이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준다” 할 때
성령과 불세례는 반드시 그것을 받은 분만이 줄 수 있어요.
예수님이 성령 세례도 받아야 되고 불세례도 받아야 돼요.
왜냐하면 성령 세례와 불세례를 받은 분이 물론 물세례까지 합쳐져야 돼요.
이걸 받은 분이 심판주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불세례 없는 성령 세례, 그런 분은 심판주가 못 됩니다.
왜냐하면 불세례가 없어버리면 주의 자리가 바뀌어지지 않아요.
불세례가 없으면 계속해서 여호와가 심판주가 됩니다. 좀 어렵죠.
그런데 불세례를 받게 되면 예수님이 심판주가 돼요.
심판주가 됨으로 말미암아 그 심판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유대인이 믿는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진짜 주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주님에게 가는 길은 예수님뿐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2장 50절에 이런 말씀을 합니다. 49절부터 보면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예수님이 불심판하기 위해 오셨다라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지금 하시는 그 공생애 기간, 불이 붙었어요? 안 붙었어요.

여러분 성경 읽어보셨잖아요.
불심판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눈으로 안 보이죠.
근데 지금 예수님의 눈에는 불이 지금 붙었다라고 말을 하죠.
불을 땅에 던지러 와서 불이 붙었다고 하잖아요.

이 불이 전 지구적입니까? 전 우주적입니까? 부분적입니까? 아직 부분적이에요.
불이 그런데 이 불이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죠.
그래서 어려운 거예요.
물 세례는 눈에 보이고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다고 할 때 예수님은 성령 세례를 받았어요.

그런데 불세례는 아직 안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다음 50절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받을 세례, 벌써 세례받았잖아요. 물 세례.
그다음에 성령 세례도 받았잖아요.
그럼 무슨 세례가 또 있습니까? 이 세례의 공통점은 죽는 거예요. 세례의 공통점은.

세례의 공통점은 지금 죽는 겁니다.
지금 로마서에서도 세례라는 것은 다시 사는 게 아니에요. 죽는 거예요. 죽는
‘세례받았다’라는 것은 ‘너는 죽었다’라는 것을 계속해서 보여주기 위한 세례예요.

예수님이 지금 받을 세례는 불 세례입니다.
시차가 안 맞죠. 이미 불을 던지러 왔는데 불이 붙었다 하잖아요.
그럼 불을 던지고 있었다라는 말씀인데
아직 불 세례도 안 받았는데 어떻게 벌써 불을 던집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예수님에게는 처음과 끝이에요. 처음이 끝이고 끝이 처음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지금 이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세례요한이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라고 할 때
여기에서 제가 왜 이 이야기를 했는가? 하면 불을 던졌는데 던졌으면 불이 타야 되잖아요.
지금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운다’ 할 때 지옥불이 가짜입니까? 아니면 진짜입니까?
가상 현실이 아니잖아요. 지옥불은.
구더기도 타지 않는데 영원히 거기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그 세계가 지옥이에요.

문제는 예수님이 불을 던졌다 할 때
그 불을 던졌다라는 이 사실을 누가 아느냐? 하면 지금 여기에서는 예수님밖에 몰라요.
심지어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준다라고 소개한 세례 요한조차도 모릅니다.

그러면 언제 이걸 알게 되느냐? 할 때 제자들이 성령을 받게 되니까
‘아 불심판 가운데 우리는 선택’,
선택 중에 하나는 뭐예요? 긍휼의 선택, 주님의 증인을 위한 선택이었구나.
이렇게 되면 시제가 어떻게 바뀌어버립니까?
성령을 받은 상태에서 과거로 돌아가면 과거가 어떻게 돼요? 현재 속으로 들어와버리죠.

자기들은 불심판받아 마땅한데, 그럼 불심판은 안 받았느냐?
불심판 안 받고 구원받는 인간은 없다라는 게 오늘 로마서 6장 이야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실 때 함께 매장됐다는 게 장사지낸 바 되었다라는 거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불심판이잖아요.
문제는 이 불심판 자체가 눈에 안 보인다는 겁니다.
그런데 불심판이 어떻게 이루어지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불심판을 받는 겁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았잖아요.
그 버림받은 분이 없으면 우리에게는 구원이 없어요.
왜냐하면 그 버림받은 분이 어디로 갑니까? 지옥으로 가잖아요.
그 버림받은 분과 함께 우리도 지옥으로 갔다가, 그래서 새로운 생명이라는 거예요.
생명의 새로움이라는 겁니다.
함께 죽이는 거예요.
지금 제가 계속해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바가 뭔가? 하면 보이지 않는다라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다라는 거.

사도행전 8장을 보겠습니다.
계속해서 지금 반복해서 보는데 여기에 보면 마술사 시몬이 등장을 하죠.
이 사도행전 8장이 성경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내용이에요. 마술사 시몬 이 대목이.
왜냐하면 여기에 보면 세례와 성령 세례가 따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문제는 그다음부터 가게 되면 물 세례로 끝나버려요. 이게 어려운 겁니다.

계시가 완성되고 난 뒤부터는 물 세례로 끝나버려요.
물 세례받고 그다음 또 누가 괜찮은 뭔가 지도자가 와서 안수를 하니까
성령 세례가 임하는 이런 내용이 없어요.
왜냐하면 계시가 완성이 되면 보이는 것들은 다 제거해버립니다.

놀라운 것은 보이는 모든 요소들은 뭘로 다 바뀌어 버립니까? 말씀으로 바뀌었잖아요.
우리는 언어로 바뀌었다 이렇게 하는데, 글로 바뀌었다 하는데
글로 바뀐 게 아니라 말씀으로 바뀌어버렸습니다.
놀랍지 않나요? ‘빛이 있으라’ 할 때 여러분 그거 지금 봅니까?
그 세계가 모든 게 말씀으로 다 바뀌었어요.

여기에 보면 빌립 집사님이 복음을 전하는데, 이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데
이들이 이 빌립 집사가 하는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았습니다.
표적이 없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반드시 여기에서는 표적이 개입돼야 돼요.
개입돼야. 나중에 이제 계시가 완성되고 난 뒤에,
말씀만 이야기하면 어떤 인간들이 등장하는가? 하면 표적을 보여라고 이야기해요.
반드시 그렇게 나오거든요. 이렇게 기록됨으로 말미암아.

근데 이미 여기에서는 표적을 보고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요한복음에도 얘기하고
여기에도 똑같이 이야기를 해요.
표적 보고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에요.
그러면 진짜 믿음은 어떤 믿음이냐? 할 때는
성령을 받아서 믿는 믿음이 진짜 믿음이에요.

그런데 성령은 내가 원한다고 받을 수 있습니까? 안 되죠.
방금 표적을 보고 믿겠다라는 것은
내가 나로부터 출발해서 내가 그 근거를 보고 믿겠다라는 태도잖아요.

그런데 성령은 내가 믿고 싶다 해서 믿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주님이 택하잖아요. 일방적으로 성령을 부어주잖아요.
말과 표적을 보고 이 사마리아 많은 사람들이 일심으로, 한마음이 되었어요.
그의 말하는 것을 쫓았어요.

이렇게 하니까 하나가 된 거잖아요.
그러면 이들 머릿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가? 하면
겉으로는 하나인데 속은 두 개예요. 둘로 쪼개지죠.
지금 이게 사도행전 8장에서 그걸 보여주는 겁니다.

나중에 복음이 전파되면 표시가 안 나요.
왜냐하면 모두가 다 물 세례받거든요.
물 세례 받는데, 그 물세례 받은 자들을 어떻게 쪼개버리는가? 하면
말씀이 쪼개짐, 말씀으로 인하여서 쪼갭니다.

로마서에도 나오거든요. 10장인가 거기에 가면 사람들이 뭘 원합니까? 기적을 원하거든요.
그 하늘에 올라가서 주님 데리고 오려고 하고
땅에 내려가서 주님 다시 이 십자가와 부활을 지금도 다시 해놔라. 이거예요.
보여달라는 거죠. 그런 기적을 요구하거든요.

마술사 시몬이 굉장히 그 지역에서 인정을 받는 사람이었어요.
그 모든 걸 버리고 지금 예수님을 믿겠다라는 것은 빌립의 말을 듣겠다라는 것은 큰 결심입니다.
물론 자기보다 이 마술이라는 것은 사기잖아요. 사기.
사기니까 속임이잖아요. 오늘날로 말하면 과학이고.
빌립을 보니까 이것은 속임수가 아닌 거예요. 과학이 아닌 거예요.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그런 일을 행하니까 믿고 따른 겁니다.
그리고 세례도 받았다 이렇게 나오거든요. 13절에 보면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이 말씀 속에 이미 답이 다 있어요.
표적과 능력을 보고 놀랄 일이 아니라 뭐 때문에 놀라야 됩니까?
십자가 때문에 놀라야 되거든요.

근데 십자가는 뭐예요? 말뿐이잖아요. 말.
그런데 그게 말씀이 되잖아요. 말씀.
말씀이 안 된 거예요. 말씀이 안 되니까 십자가 자체가 무엇으로 들립니까?
그건 이론이고 눈에 보이는 것은 표적, 그러한 능력,
능력 중에 하나가 그거죠. 회개하는 능력.
복음을 들었는데 막 회개하더라 그것도 능력으로 보이는 거예요. 육에 속한 자는.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이 와서 안수를 하니까 성령을 받습니다.
그 성령 세례가 여기에 보면, 눈에 가시적으로 보였던 세례입니다. 지금 여기에서는.
마치 예수님이 세례를 받을 때 비둘기같이 내려오듯이 성령의 세례를 두 눈으로 목격한 거예요.
보이게 하신 거예요. 보이게 하셨는데, 문제는 한번 봅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뭐였습니까? 불세례였죠. 그죠?
그러면 성령 세례가 눈에 보이는 그들이 보기에 가시적으로 ‘야 이건 정말 성령 세례다’ 할 때
그 성령 세례받은 자들의 공통점이 무엇이냐? 하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임을 증거해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을 증거하는 거예요.

그런데 마술사 시몬은 거기에 관심이 없어요.
성령이 가시적으로 임하는 데 관심이 있는 겁니다.
그걸 보고 뭐라고 하는지 잘 봅시다.
본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19절.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이 말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지금 마술사 시몬은 자기가 성령 받았다고 생각할까요 안 받았다고 생각합니까?
받았다고 생각하잖아요. 지금 성령을 달라고 하는 게 아니에요. 지금.

“나도 안수하여 내게도 내가 누구든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해달라”라고 요구를 해요.
이런 게 신기하지 않습니까?
물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믿기 때문에 자기는 성령 세례를 받았다라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왜 이 말을 하는가? 하면
누구와 누구를 비교하는가? 하면 빌립과 이 사도들, 베드로와 요한의 능력을 비교하는 거예요.
빌립은 표적과 능력을 행했잖아요.
그런데 물세례를 줄 때, 이렇게 안수해서 물세례를 줄 때
성령 세례가 임하는 걸 보였습니까? 안 보였습니까? 안 보였죠.

그런데 이 베드로와 요한이 안수하고 물세례를 주니까 어떤 사태가 벌어졌습니까? 성령이 임했어요.
안수를 하니까. 물세례를 준 게 아니라 안수를 하니까 성령이 임했어요.
그러니 마술사 시몬이 똑똑한 겁니다.
빌립과 이 베드로와 요한을 보면 비교가 되죠.
저 사람은 표적과 능력은 행하고 말씀은 잘 가르치는데
저 사람에게는 무엇이 없다? 안수하면 성령을 받는, 성령을 내리는 그런 능력이 없다라는 거예요.

그러면 자기를 어느 수준까지 끌고 올라갑니까? 빌립 수준까지 끌고 올라가는 겁니다.
자기도 이미 성령 세례 받았는데
나는 진짜 갖고 싶은 게 뭔가?
이제 베드로와 요한이 안수하여 성령 세례를 받는 걸 보니까 그 능력을 갖고 싶은 거예요. 그 능력.
무엇으로? 돈을 주고.
이거 보면 꼭 오늘 교회 같지 않습니까? 돈 내고 헌금 많이 하고 축복 내려달라는 것과.
뭐 제가 볼 때는 똑같아요. 거래. 거래.

성령은 선물이잖아요.
그 은혜를 지금, 이 본문이 어려운 게 마술사 시몬이 어떻게 되었다라는 결론이 없어요.
열린 결말을 내놔버리기 때문에. 그게 어려운 거예요. 이 본문은.
이렇게 하면 이제 설교자는 쉽죠. 열린 결말이니까 두 가지를 다 끌고 올 수 있는 겁니다.

지금 이 베드로와 요한이 그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죠.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찌어다” 돈 주고 살 줄 생각했으니.
그럼 이걸 보게 되면 지금까지 마술사 시몬은 빌립의 세례를 받고
자기가 하던 모든 것들은 버려두고 쫓은 그 목적이 드러나는 거예요. 탐심이.

제가 지난주도 이런 설교를 한 것 같은데 탐심이라는 것이 언제 드러나느냐? 할 때는
목사가 복음을 자기가 아무리 잘 전해도 십자가를 전하다가 이런 거죠.
교인 수가 천 명이 되었다. 햇가닥 하는 거예요.
그걸 뭐라고 하는가? 하면 이 ‘창세전에 택함 못 받은 자’
책망받을 절호의 기회인데, 그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 이 사람 마음속에는  선물을 돈을 주고 살 줄로 생각한 거예요.
이건 뭔가? 하면 ‘믿었다’라는 것도 다 자기가 믿은 거예요.
자기 쪽에서 들어간 겁니다.
나중에 이 사람이 이 이러한 것들을 없애달라고 22절 볼까요? 21절 보면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확정해버립니다. 이게 사랑이에요.
복음도 모르는데 모르는 사람에게
‘그래도 좀 더 교회 나와보시고 그래도 들어보시고 그러면 믿지 않겠습니까?’
아예 대놓고 베드로는 뭐라 합니까? ‘관계없다’라는 거예요.
이 관계 없다라는 이 말이 복음을 들을 절호의 기회예요.
설득과 납득시키는 게 아닙니다.

맨날 관계가 좋으면요 복음을 제대로 전하면, 아까도 잠언서 하면서 기도를 했지만
이 미련한 자에게는 이 복음 자체가 그 미련한 자를 돼지로 만들기 때문에
돼지로 이렇게 반응을 안 한다면 우리가 복음을 좀 잘못 전했다고 생각하시면...
물론 성령께서 그렇게 하셔야 되는데 22절.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회개하라고 하잖아요. 회개하라.
여기에서 회개하라고 했을 때 ‘제가 회개하겠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눈에 보이는 대로 회개가 되죠. 그죠?

성령의 일은 보이지 않는데 보이지 않는 일은 보이는 것으로 나타나게 돼 있어요.
성령의 불세례가 십자가 사건으로 나타났잖아요.
회개하는 모습이 사람들이 보기에는 똑같은 모습인데
한쪽은 성령을 받은 회개가 있고, 다른 한쪽은 또 자기로부터 회개한 거예요.
자기로부터, 자기가 회개한 사람은 또 뭔가 노림수가 있는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24절.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바 되었도다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라”
이것도 문제죠. 사람들은 착각을 하는 거예요. 계속해서.
베드로와 요한은 증인일 뿐입니다.
마치 그들에게 능력이 있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거예요.
그게 그들이 보는 안목이에요.
이 마술사 시몬을 보는 안목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나를 위해 대신 기도해 주면...

꼭 천주교 안 같아요. 절간에 가면 대신 기도해 주잖아요.
이제 입시철 11월 지금 다음 달 11월달이니까 입시철이 되잖아요.
그러면 거기에 기도할 이제 누가 기도해 주는냐에 따하, 주지승이 제일 비싸죠. 주지승.
물론 절간마다 다 다르지만 100만원 일 수도 있고 천만원 일 수도 있는데
천만 원 정도는 내걸지 않을 겁니다.

지금 이거 한번 보세요. 기도해달라는 거예요.
이렇게 지금 요구를 하는 모습을 보이는 겁니다.
지금 여기에서 세례라는 게 나오는데 세례가 두 단계를 거치잖아요.
이걸 갖고 또 어떤 인간들은 우리는 물 세례만 받으면 안 되고 성령 세례도 받아야 됩니다.
또 이렇게 가르쳐요.

재세례파들은 그런 거거든요.
옛날에 너가 물 세례 받았으니까 이제 제대로 된 세례를 받으려면 다시 받아야 돼. 세례.
한 번 더 받아야 돼. 유아 세례도 필요 없어. 한 번 더 받아야 돼. 자기가 신앙 고백해야 돼.
결국은 뭐예요? 신앙 고백은 지가 해야 된대요.

정반대로 해석하죠.
‘내가 신앙 고백해도 이거는 고백이 아니야. 이건 믿음이 아니야. 물 세례를 받아도 이건 세례가 아니야’라고 하기 위한 세례거든요.
진짜 성령 세례를 받았다면 자기를 부인할 거 아니에요. 자기가 한 모든 일들을

지금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지금 로마서에서 다시 봅시다. 로마서 6장으로 가면.
“ 이미 이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로 알지 못하느뇨”
받았다는 얘기예요.
그리스도와 함께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에게만 이 말씀이 아멘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말의 모순을 갖고 있잖아요.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이 말은 ‘모르고 있구나’ 이 얘기거든요. 모르고 있구나.
그러면 사도 바울이 잊어버려서 그러냐? 그게 아니에요.
잊는 것도 있지만 이들은 계속해서 첫째 아담의, 그 안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이는 겁니다.
그래야만 지금 앞부분에서 한 모든 말씀이
이 성도의 몸에서 현장화되도록 드러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나를 위한 구원은 없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으니까 나 이제 구원받았어.’
그게 아니라 이 말씀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서 우리도 이 말씀을 들어야 돼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예 저 알지 못했습니다.’
‘난 그거 알아요.’ 수상해요. ‘난 그거 알아요’ 하는 것은.
그럼 이 말씀이 필요 없는 사람이에요.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면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가? 하면
십자가의 사랑의 깊이 속으로 들어가요.
근데 사람들은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게 되면 십자가 사랑의 깊이,
달리 말하면 죄의 깊이를 아는 게 아니라 ‘나 괜찮죠. 나 이제 태풍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아요.’
과연 그럴까요? 죽여버리면 어떻게 할 거예요? 자기가.
육이 죽어버리면 어떻게 할 거냐? 이 얘기예요.
그전에 다 기억을 삭제해버리면 어떡하겠습니까?

제가 삭제당했거든요. 휴대폰 이게 안 열려요. 이제 삼성도 아이폰처럼 됐거든요.
삼성폰 있어도 한동훈처럼 제출해도 비밀번호 안 알려주면 못 열어요. 지금은.
이전까지는 열게 돼 있었거든요. 옛날 기기는.
한 20개 30개 했는데도 안 맞아요. 그래서 초기화시켜야 됩니다.

그런 상태를 만들면 어떡하겠습니까? 사람들이 너무 까불어요. 말씀을 안다고, 좀 배웠다고
복음은요 우리를 초기화시켜요.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은 우리가 초기화되는 거예요.
지금 오늘 이 본문도 마찬가지잖아요.
완전히 우리를 초기화시켜버려요. 초자로 대하잖아요. 초자로.

“알지 못하느뇨”
그럼 여기에 손들고 ‘나 알아요’
서태지가 나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 그럼 너는 이 말씀이, 복음이 너에게 필요 없네’ 이래 돼요.
그래서 아까 그런 얘기했잖아요. 골라 잡는다고 사람들은, 말씀을.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매장까지 돼버렸어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여러분 2천년 전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같이 매장됐습니까?
이게 눈에 보이지 않죠. 믿음의 세계예요.
그래서 아까 제가 그 얘기를 한 거예요.
불세례를 이야기할 때 보이지 않는데 불세례고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 불세례가 다른 사람은 그냥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도들에게는 주님 입장에서는 불세례 받은 거예요. 불 심판받은 겁니다.

매장됐다 하는데 ‘나 그거 믿습니다.’
사람들은 그 믿음 언제까지 가겠어요?
“그와 함께 장사되었다.”
그게 지금 성도가 실제 현재의 모습이라는 거예요.
이미 장사되었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장사되었기 때문에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이제 말씀이 되게 어려워져 버렸어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매장이 되었는데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살렸죠.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죠?
죽은 자들로부터 살렸습니다. 살리심과 같이 너희들도 4절에 보면 너희라 하고 우리로 가죠.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분명히 예수님이 살아나셨잖아요.
그러면 그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새 생명, 생명의 새로움에서 걷게 하겠다.’
‘생명의 새로움 속에서 살게 하기 위해서다’라고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이걸 그러면 다시 뒤로 돌아가서
“은혜를 더하기 위해서 죄를 더 짓자”라는
그 모습 자체가 과연 생명의 새로움 속에서 걷는 거냐? 라는 거예요.

여기에서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가? 하면 둘로 쪼개져버립니다.
어떻게 쪼개지는가? 하면
은혜를 더하기 위해서 죄를 더 짓자라고 하는 자들은 첫째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이라 했죠?
그러면 성도든, 성도 아닌 자든 모든 자인데
그 속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이 말씀 앞에서 책망을 받는 자들이에요.
책망을 받는 모습이 생명의 새로움 속에서 사는 자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그 예화를 하나 들면 안 찾겠습니다.
아브라함을 한번 예를 듭시다. 제가 질문을 드릴게요.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1번 생명 안에서 살았다.
2번 생명의 새로움 안에서 살았다.
몇 번입니까? 둘 다 하죠. 둘 다잖아요.
그러면 생명의 새로움 안에서 산 자이기 때문에 생명 아래서 산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데 이 목사들이나 성경을 읽는, 좀 안다는 사람들은 이걸 어떻게 보느냐? 라고 하면
생명의 새로움, 우리가 입에 이렇게 붙어 있는 새 생명 가운데서 사니까 아브라함을 둘로 쪼개요.
어디까지? 아들을 바치기 전까지 하고 받칠 때 이걸 쪼개가지고
이건 성화고 그래서 지금 로마서 6장부터 8장까지를 성화장이라고 아예 못을 박아놨습니다.
맞죠? 목사님.
그렇게 표현을 하거든요. 맞죠? 성화론. 어떤 그렇게 돼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아예 성화론을 막 주장을 해요. 그 내용을.

그러면 이것을 성경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적용해 보면 하나도 안 맞아요.
출애굽을 했죠. 광야 생활을 했죠, 그죠? 홍해를 건너서 광야를 했죠.
그러면 얻어터질 만큼 얻어터졌으면 요단강을 건너서 어떻게 살아야 돼요?
1번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야 된다.
2번 정신을 차리고 말씀대로 살아야 된다.
몇 번입니까?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거든요.

그러면 사사기를 볼 때 어떻게 봐야 됩니까?
방금 아브라함을 이야기했지만, 사사기를 보면 어떻게 봐야 되죠?
1번 생명 안에서 살았다.
2번 생명의 새로움 속에서 살았다.
몇 번입니까? 또 2번이라 해야 되는데 2번 안에 1번이 들어있죠. 우리가 말하는.
3번이 있어야 되죠. ‘새 생명 안에서 살기 때문에 생명 안에서 살았다.’
이게 3번인데 답은.

인간은 이 양자 역학의 세계에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어요.
이렇게 되어야만 무엇이 전파되는가? 하면 십자가가 전파돼요.
구원을 논한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그 말씀은 다 알잖아요. “내 증인이 되리라”
‘너 구원하리라’ 이 얘기가 아니잖아요.

내 증인이 되게 하기 위해서 주님은 우리를 어떻게 만듭니까?
끝까지 우리를 부정하도록 만들어요.
마지막에는 우리를 죽여버립니다. 우리를 죽여버립니다.
때로는 치매에 걸리기 위해서 삭제해버리고요.
그런 식으로 주님이 우리를 안개와 같은 인생으로, 들의 풀처럼
말씀만, 말씀되신 분이 예수님이니까 그분만을 남기도록 우리를 살아가게 하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새로운 생명 가운데 살고 있기에 말씀을 통하여 책망받게 하시고
십자가를 밝히 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주께서 저희들을 날마다 긍휼히 여기셔서 십자가만 자랑하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시고
말씀의 책망 가운데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의 깊이를 알아가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의 죽으심과 함께 매장된 자로서
그 부활에 참여한 자로 생명의 새로움 속에서 거닐기를 소원하는 주의 백성에게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