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3-11-06 10:06
20231105 로마서 강해 38강 롬 6:5-7 더 이상 죄에게 종노릇 하지않는우리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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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3-11-06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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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05 로마서 강해 38강 롬 6:5-7 더 이상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않는 우리

다 함께 묵상 기도드리겠습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 고백하겠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 말씀, 잠언서 26장 6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잠26:6)
“미련한 자 편에 기별하는 것은 자기의 발을 베어 버림이라 해를 받느니라”

기도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를 불러서 주님의 증인으로 삼으시고
끝까지 저희들을 어리석은 자로 남겨두셔서
십자가의 지혜만을 돋보이게 하는, 증거하는 증인으로 삼아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십자가의 지혜에 합류한 자로 저희들을 붙들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시편 78편 40절에서 42절 말씀을 교독하겠습니다.
[아삽의 마스길]
(시78:40~42)
“저희가 광야에서 그를 반항하며 사막에서 그를 슬프시게 함이 몇 번인고 저희가 돌이켜 하나님을 재삼 시험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격동하였도다 저희가 그의 권능을 기억지 아니하며 대적에게서 구속하신 날도 생각지 아니하였도다”

이 시간 주민자 집사님 우리를 대표해서 기도해 주시겠습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저희 계획이 주님의 뜻에 묻힐까 두려워 기도라는 명목으로 늘 칭얼거렸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매달아 놓고 외면하고 돌아서서
진토 될 이몸 걱정에 전전 긍긍하며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늘 분주하였습니다.
그러함에도 주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날마다 빛으로 오셔서
그림자로 붙어 쫓아다니는 사탄의 정체와
또 거기 붙어 바둥대는 이 끔찍한 괴물의 실체를 드러나게 하시어
어디에도 숨을 곳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그렇게 생각부터 불순하여 겉과 속 어디에도 자기의로만 가득한 인간 주제에
구원을 꿈꾸고 천국을 꿈꾸는 어이없는 저희들입니다.
하지만 이런 죄인들을 부르시는 주님,
오늘도 주님의 일하심으로 이 자리에 끌려 나왔으니 이 귀한 시간 말씀 안으로 흡수되어
세상과 나는 간데없고 구속한 주님의 십자가만 바라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하나님 말씀, 로마서 6장 5절에서 7절 말씀을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롬6:5~7)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아멘.

말씀 자체가 너무 어려워요.
왜 이렇게 어려우냐? 문제는 우리에게 있죠.
오늘 본문을 이렇게 꼼꼼히 세밀하게 읽어 가게 되면 과연 여기에 대해서 아멘할 수 있을까?
실제로 내 몸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잖아요.
무엇이? 십자가 사건이.

우리가 흔히 알기로 과거, 2천 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잖아요.
그런데 이 말씀을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만 하는 게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이거든요.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함께 죽었다면
예수님의 죽으심이 그 안에 성도가 함께 죽었다라는 거예요.
이런 체험을 해보셨나요?

여기에서 무엇이 등장합니까? 체험이라는 질문을 했잖아요. 제가.
지금 로마서에서는 계속해서 은혜로 말미암은 믿음을 이야기하고 있거든요.
그 은혜로 말미암은 그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속에 성도가 합류당하는 겁니다.

문제는 이런 말씀을 읽을 때 인간의 육이라는 것은 영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아요.
영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천공은 뭐냐? 이 대중적이니까.
그건 영의 세계가 아니냐? 그게 육이거든요.

악마가 뭔지를 몰라요.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게 다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바탕으로 하여서 영을 이야기를 하거든요.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그 인간이 생각하는 악마, 그 개념을 그대로 차용해서 들어와 버립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거든요.
사람들이 보기에는 귀신이 나갔어요.
그런데 거기에서 귀신이라는 것은 (우리가 말하는 죽은 영혼이 아니고)
그들은 이 마귀를 인정하잖아요.
마귀에 대한 오해예요.

마귀는 무엇을 요구합니까?
‘말씀대로’를 요구를 해요. 말씀대로 하라는 겁니다.
말씀대로라는 것은 돌로 떡덩이 만들고 귀신 쫓아내고 죽은 자 살리고 이게 마귀가 요청하는 바예요.

쉽게 말씀드리면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으면 이러한 능력을 갖고 싶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 어느 누가 거지 나사로처럼 살다가 그야말로 히바리 없이 살다가 히바리라는 말 알죠?
아무 맥없이, 흔히 여러분들이 기도를 잘하는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리다’
이미 그 말 자체가 이름이 빛나버립니다.
그걸 원하는 인간은 아무도 없어요.

예수님이 등장했다라는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됐다는 것은
이 땅에 살고 있는 인간들이 그냥 인간들이 아니라 남은 자거든요.
남은 자들이 말씀을 바탕으로 하여서 믿는 믿음, 그 확실한 신앙은 다 악마적이다라는 선언입니다.
그게 십자가예요.

예수님과 그 당시에 성경 전문가들과는 대화가 통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같으면 대화가 통하지 않겠어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성경 전문가잖아요.
성경 전문가와 예수님이 만났어요. 대화가 될까요? 안 될까요? 안 되었잖아요.
안 되니까 살해하잖아요.
대화가 된다라는 것은 소통이 된다라는 것이고
소통이 된다라는 것은 합의점에 도달할 수 있다라는 의미예요.

그런데 예수님과 대화를 할 때
뭔가 대화가 될 것 같은데 들으면 들을수록 이 예수는 미친 자에 불과한 거예요.
왜 예수님이 미친 자가 되느냐? 하면 그 상대자들이 말씀을 바탕으로 깔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이건 충격적이잖아요.
말씀이 없는 자들, 무당이, 아니면 본디오 빌라도와 대화를 해서 대화가 안 되어서 ‘너는 미쳤구나’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면 우리가 동의를 할 수 있는데, 그들에게도 마찬가지지만
말씀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여호와만을 믿는 그들과 예수님이 대화를 나누실 때
대화가 되지 않는 그것은 충격 중에 충격이에요. 대화가 안 되니까.

사도행전 21장에 보면
예루살렘 교회에 이 율법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이 수만 명이라고 나와요.
십자가만 이야기를 하면 안 통하잖아요. 그들이나 우리나 똑같아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양보를 한 겁니다. 양보.
그건 그럴 수 있고.
‘그럴 수 있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정말 십자가를 사랑한다면 율법을 지켜야 되지. 할례를 행해야 되지. 모세가 한 말이 그 말이야.’

우리도 그런 복음을 전할 때 그런 말을 안 해봤습니까?
그게 예루살렘 교회가 이 적그리스도로 나타나는 모습이에요.
주님이 가만 안 두죠. 사도바울도 거기에 합세를 합니다. 합세를.
여러분 상상이 안 가잖아요.

갈라디아서가 가장 일찍 쓰여졌다 하거든요. 그죠?
그러면 예루살렘에 올라가기 전에 쓰여졌다면 사도 바울이 어떻게 행동해야 됩니까?
그 ‘어떻게?’라는 질문이 나올 때 이 사람들의 사고가 뭐냐? 라고 하면
‘자기가 알고 있으면 아는 대로 행동할 수 있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알고 있으면 아는 대로 사느냐? 얘기예요.

사람들의 논리는 그런 거죠.
갈라디아서를 그 정도로 썼으면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거기에 율법을 지켜야 된다는 자들이 등장을 했잖아요.
그러면 예루살렘 교회에 올라가서 그 복음을 갖고 분명히 얘기를 하거든요.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라는 얘기를 하는데

말은 그렇게 했는데 이 파도가 너무 강해.
‘나는 그렇게 파도가 밀려올지라도 복음을 부인하지 않겠어.’
만고 자기 생각이에요.

오늘 제가 잠언서 26장 6절을 하면서 기도를 했잖아요.
이 편지를 보내는데 어리석은 자에게 보내면 어떤 꼴이 됩니까?
근데 주님께서 복음을, 이 귀한 생명의 복음을 누구한테 전달시킵니까?
지혜로운 자에게 전달시킵니까?
어리석은 자를 불러서 십자가의 지혜를 증거하는 증인으로 삼으시죠.

주님이 왜 그렇게 하십니까?
우리를 지혜롭게 만드는 게 목적이 아니에요.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은 우리를 위함이 아니에요.
아들을 위함이에요.
로마서 자체가 그 아들을 위해서, 아들로 인하고 아들로 말미암고 아들에게로
최종적으로 그것을 위한 세상 창조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 세상 사람과는, 이 세상이라고 했을 때는 남은 자 유대인뿐만 아니고요.
심지어 성도라 불리는 자들도 못 알아듣는 이야기예요.
‘에이 목사님 그거는 너무합니다.’
너무한 게 아니고 그럴 것 같으면 성령을 왜 주셨어요? 성령은 허수아비입니까?
성령이 허수아비입니까?
성령이 활동을 하니까 바람이 부니까 나무가 흔들리잖아요.
근데 인간들은 이걸 빼버려요.
빼버리니까 십자가가 안 나오고 뭐가 나옵니까? 나의 믿음, 나의 행위가 나오는 거예요.

5절에 보면 “만일 우리가”
이런 용어 자체가 구원의 확신이 있는 자들에게는 화가 나는 단어잖아요.
‘만일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면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이렇게 말하면 기분이 좋아요? 나빠요?

‘목사님 만일이라는 말은 쓰지 마세요. 우리는 이미 주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이 얘기를 하고 싶잖아요.
우리는 확정적인 신앙을 요구를 해요. 확정적인 걸.
그 말씀을 듣고 들으면 들을수록 더 확실하다라는 것을 소유하고 싶어요.

치매에 걸리면 어떡하겠습니까?
어제 길거리에 가는데 어떤 아줌마가 노래를 부르는데 자기 엄마가 치매 걸렸대요.
여기 나오면 행복하대요. 가정해서 그 사람이 권사라면, 권사 50년 차라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50년 동안 십일조하고 봉사하고 온갖 일을 다 했어요.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과거의 역사가 그를 구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저희와 함께 이렇게 모인 것이 한 1년 정도 되었잖아요.
줌으로 합치면 한 3년 좀 넘고, 그게 구원을 얻는 데 도움이 되나요?
오늘 이렇게 모인 것이 구원을 얻는 데 도움이 되나요?
‘목사님 그런 얘기는 복음 듣는 우리에게는 하지 마세요.’

우리 자신이 은혜로 산다라고 그렇게 얘기를 해놓고
사람들은 은혜라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주어진 거잖아요.
그러면 주님이 지금 살아계십니까?
하나님 우편에서 놀고 계십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빈다라는 것은 기도만 한다는 말이에요?
안 그러면 기도하시는 대로 실제로 실행한다는 말입니까? 실행하시는 거잖아요.

제자들을 위해서 예수님이 기도를 했잖아요.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 기도에 모든 성도들이 합류를 당하잖아요.
그런데 놀랍게도 로마서 8장에도 나오거든요.
“우리는 빌 바를 알지 못한다”라는 겁니다.

확신이 있는 인간들은요 빌 바를 알아요.
그게 문제인 거예요.
로마서를 앞부분하고 뒷부분으로 가면 안 맞거든요.
이 자체에서도 앞뒤가 안 맞아요.
말씀을 보는 시각 자체가
바리새인과 서기관처럼 이 로마서를 통해서 정리를 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래요.
정리가 되고 깔끔하게 요약이 되면 그걸 자기 소유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로마서 끝나면 ‘로마서 땠다.’ 그래서?
말씀이라는 게 얼마나 무시무시한가 하면요. 로마서에도 나오거든요.
사람들은 이 글로써 기록된 이 계시의 말씀을 우습게 여겨요.
왜냐하면 글일 뿐이기 때문이에요. 글.

그런데 인간이 그렇게 역사화시키고 고정화시키고자 하는 그 글을 갖고 계시로 만들어버렸어요.
계시로 만들어버리면 성령께서 이 글을 통하여서 일을 하시기 시작합니다.
일을 하게 되면 무엇이 다 드러나게 되는가? 하면
육에 속한 자들이 낱낱이 드러나게 돼 있어요.
그중에 대표자들이 바리새인과 서기관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할 때 그 육은 어떤 육입니까? 어떤 육입니까?
그저께 제가 우연히 유 선생을 통하여서 어떤 걸 보게 되었는데
그 kbs 스페셜을 (옛날에 했던 건지 모르겠지만) ‘거리의 뉴욕커들’ (발음을 잘 해야 되는데)
거기에 사는 사람들이 이 지하실에서 모여 사는데 물론 그 원장은 아파트에 살겠죠.
그 사람들이 왜 거기에 사느냐? 한국 사람들인데. 영어를 유창하게 해요.
제가 그래서 그거 보고 그랬습니다. ‘와 영어 엄청 잘하네.’
그들이 왜 거기에 사느냐? 하면 마약, 술, 도박이에요.
이 세 가지 때문에 쫄딱 망한 사람들입니다.
거기에는 원장은 도박 해서 망했다라는 이야기인데
그래서 옆에 사람이 ‘원장님은 낮에는 도박하고 밤에는 기도했죠.’

제가 추론해 보니까 목사인 것 같아요. 목사들 중에 그런 목사들이 있거든요.
제가 중국에 있을 때도 그 한인교회 목사가 이 빠징고인가 뭐 하여튼 가가지고
가짜지 진짜인지 모르지만 그런 사람 꽤 있잖아요. 그런 목사.

이제 그들이 이제 찬송가를 부르는데
‘세상에서 방황할 때나 주님을 몰랐네 예수여 이 죄인도 용서받을 수 있나요?’ 감동이잖아요.
자기들도 눈물을 흘리거든요. 근데 문제가 있어요.
그렇게 돌아온 너희들은 의인이냐? 얘기예요.
그러면 도박하지 않고 술 안 마시고 또 한 가지 뭐였습니까? 마약하지 않으면 깨끗한 의인이네요.
우리는 아무것도 안 하잖아요. 여러분 술 안 마시죠? 도박 안 하죠. 그죠? 마약 안 하잖아요.

그렇게 주님 부르는 것에 대해서 문제를 삼는 게 아니에요. 그럴 수는 있어요.
그러면 왔으면 십자가 앞에 십자가 복음을 전해줘야 되는데
십자가 앞에는 돌아왔죠.
그러면 12달, 몇 년, 3년 4년 마약을 끊고 술을 안 마시고 도박을 안 했어요.
그거 대단한 거 아닙니까? 맞죠?
근데 그들에게 진짜 생명을 이야기하려면 이게 죄라는 걸 이야기해야 돼요.
그걸 죄라고 하면 그 사람들이 뭐라 하겠습니까?
성령을 못 받으면 백이면 백이 화를 내고 분노를 내요.

오늘날 교인들이 그 생각을 갖는 겁니다.
자기가 과거에는 제대로 된 복음을 몰랐는데 이제는 복음을 제대로 알았다는 거예요.
제대로 알았으니까 더 이상 나를 건드리지 말라는 거죠. 나를.

저를 예를 들면 복음을 들은 지 30년.
그 30년이 복음을 알게 한 게 아니잖아요. 성령께서 어느 순간 깨닫게 하신 거잖아요.
들어서 구원을 얻을 것 같으면 다 가르치죠.
분명히 복음은 전하는 자에 의해서 들려지게 돼 있어요.

그런데 그 전하는 자가 들려지게 되는데
문제는 이 전하는 자가 직접 이렇게 들려지게 되어서 구원 얻는 경우는 없습니다.
만일에 그것이 그런 식으로 되어진다면 복음이 훼방을 받게 되죠.
그래서 복음을 제대로 전한 자들은 ‘나는 아니오’라고 이야기를 하죠.
복음을 제대로 들은 자들은 반대로
‘당신 때문에 내가 복음을 제대로 알게 된 것이 아니라’라고 이야기를 해야 돼요.
되게 기분 나쁘겠죠.

여러분이 전도를 했다 칩시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이 있다 칩시다. 진짜 복음 세계로 왔다 칩시다.
그 사람이 하는 말이 ‘내가 구원 얻은 것은 너 때문이 아니야.’
요한복음 4장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그 여자는 먼저 자기의 모든 죄가 들통 나버렸죠. 들통나서 물동이도 버려두고 자기 동네에 들어가서
‘메시야를 만났다’라고 전도를 했단 말이에요.
근데 전도 당한 그 동네 사람들이 뭐라고 이야기를 합니까?
‘내가 니 말 듣고 믿는 게 아니고 우리가 직접 보고 들어서 믿는다’라고 이야기를 해봐요.
‘너 빠져’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이 평생 복음을 전했잖아요. 주님이 부르신 이후에.
그런데 마지막을 보게 되면 아시아 교회도 떠나가고 데마도 세상을 사랑하여 떠나가고
몇 사람이 남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 남은 자들도 주께서 구원시킨 거예요.
본인한테 바울에게 그걸 알려주는 겁니다.

그 구원받은 자에게만 그것을 알려주는 방식이 그 방식이에요.
바울이 얼마나 짜증 나지 않겠습니까?
자기가 헐벗고 굶주리고 매도 맞고 사망의 위험, 칼의 위험, 온갖 경험을 다 했잖아요.
그걸 통해서 겨우겨우 예수 믿는 자로 자기가 만들었다고 하지 않잖아요.
어쨌든 은혜로 통하여서 구원 얻었는데
마지막에 감옥에 있을 때 그런 얘기를, 그런 사태가 벌어지는 가운데 벌어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돌아간 상대에게 ‘내가 너에게 뭘 해줬는데, 얼마나 애를 썼는데, 내가 너를 구원하기 위해서 칼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헐벗음과 굶주림과 물론 배부름도 있었지만 그렇게 했는데 왜 떠나가느냐?’
이런 태도가 나오지 않겠어요? 물론 바울은 그게 안 나와요.
안 나오는데 바울의 뒷면에는 이 요한 삼서에 나오는 디오드레베 같은 사람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죄인 중에 괴수라 하는 겁니다. 주님이 그렇게 일을 하는 거예요. 일을.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만일이라고 쓰는 이유가 있어요.
주님의 말씀 자체가 사복음서에 보면
이 천국 비유를 보게 되면 천국 비유가 섞여 있잖아요.

마태복음 20장도 마찬가지잖아요. 천국 비유, 포도원 품꾼 비유.
포도원에서 일할 사람을 아침 9시, 12시, 3시 일할 사람을 뽑아와서 일을 시킬 때
마지막에 온 사람부터 품삯을 제공할 때 그들 모두는 포도원에서 일한 사람들이에요.

마태복음 7장에는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한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주님은 불렀으면 구원을 해주셔야지,
왜 불러놓고 지옥 보낼 자를 그 속에서 또 뽑아냅니까?
이걸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말씀을 보게 되면 별로 와닿지 않아요.

그런데 이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와버리면 어떻게 돼요? 죄인 중에 괴수가 돼요.
그 사태를 주님께서 일으키기 위해서 지금 말씀을 이렇게 하시는 거예요.
십자가의 영이 성도에게 들어오게 되면 구원의 확정성 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과 그 부활에 참여한 자로, 죽은 자로 이 땅에 살게 하는 거예요.
이 말도 어렵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죽었어요. 성도는.
‘연합한 자가 되었다.’ 할 때, 죽었잖아요.
이 ‘죽었다’라는 이 말 자체가 선악 체계를 갖고 있는 인간에게는 이해가 안 되는 말이에요.
왜 이해가 안 되느냐?
그건 선악은요 선악은 정답이 있잖아요. ‘선이다 악이다.’

근데 십자가는 정답은 정답인데 모든 정답을 부정하는 정답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상대 대상이 정답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백지가 아니라 정답을 갖고 있어요.
정답을 갖고 있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방식은 자신의 죽으심으로 다가와요.
주되심의 자리가 못 박혀 죽으실 때 ‘다 이루었다’ 했잖아요.
부활은 십자가 사건을 제대로 보여주는 모습이에요.

그래서 지금 로마서에서도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했으면
야 부활한 사람처럼 살자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않는 모습은 죄의 몸이 멸했다라는 거예요.

여기서 질문 들어갑니다. 여러분 죄의 몸이 멸했습니까?
‘나는 이 말씀의 의미를 알아.’ 지금 말씀은요 이 찔러 쪼개는 검이에요. 말씀은.
찔러 쪼개는 검 앞에 우리는 쪼개져야 되죠.

“죄의 몸이 멸하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라는 거예요.
못 박혀 죽었다라고 할 때는 이것을 과거가 아니라 그 과거가 계속해서 현재형이 되는 거예요.
그게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 전에 택함을 받은 자의, 성도의 모습이에요.

‘우리는 못 박혔나니, 죄의 몸이 멸했다.’ 여기에만 관심이 있잖아요.
공부를 할 때 1단은 뗐다 2단은 뗐다 3단은 뗐다.
우리는 그런 데에 관심이 많잖아요. 그게 우리의 본성이고요.
그런데 말씀은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들려주지 않습니다.

십자가 사건의 현재형으로 우리를 계속해서 몰아가는 거예요.
그래야 십자가의 증인이 될 거 아닙니까.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아멘’입니까? 당황스럽죠.
‘아멘’은 했는데 그다음 뭐가 걱정이 돼요? 그다음 뭐가 걱정이 됩니까?
“다시는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그렇게 했으면 아멘은 했는데
‘나 지금 죄에게 종 노릇 하고 있는 거야? 아니야?’
‘에이 목사님 그 설교 어렵게 하지 마시고 우리는 이미 십자가의 피로 다 구원받았으니까 죄에서 종노릇 하지 않지 않습니까?’ 말은 맞아요. 말은 맞아.

그럼 아멘 했잖아요. 그러면 물을게요.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말씀을 보는 이 눈 자체가 성령이 아니면 소경으로 돌아가요. 우리가.
눈을 뜨게 했으니까 나는 한 번 떴으니까 이제 눈이 안 감길 것이다.
눈이 떠진 사람은 영원한 소경이에요. 눈이 떠진 사람은.

왜 영원한 소경입니까?
성령의 인도하심이고 달리 표현하면 우리는 주님의 증인이잖아요.
주님이 세상 끝날까지 함께 동행을 하시잖아요.
우리를 위해 빌 바를 알지 못하는 우리를 위해 성령께서 간구하시고
예수님께서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간구하시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거예요.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아멘’ 이러면 어떻게 해석해야 돼요?
‘주님께서 십자가만 증거케 하기 위해서 우리를 이런 식으로 다루시는구나.’

만일에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성도들이라고 불리니까 일단은.
앞서서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면”이라고
“만일”이라는 단어를 썼잖아요.
그러면 구원의 확신이 있는 구원파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읽을까요?
‘우리한테는 만일을 쓰지 말라.’ 해요.

14만 4천에 든 그 인간들도 ‘우리한테는 쓰지 말라.’ 해요.
그 윗대가리가 또 바꾸거든요.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14만 4천에 머물 인간들이 아니에요.
그러면 14만 4천의 조건을 계속 성경을 갖고 제공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밑에 있는 인간들은 죽을 때까지 그 짓 하다가 14만 4천에 못 들고 죽어요.
왜냐하면 죽으면 더 이상 돈 못 내잖아요. 장사는 그렇게 하는 거예요. 장사는.

‘하나님의 교회’ 지문 찍으면 생명책에 기록되잖아요.
그 생명책에 기록되었는데 이런 말씀이 왜 필요합니까? 필요 없죠.
성경은 들고 다니는데 뭘 가르쳐요?
자기들의 교주가 가르치는 교리, 설교를 계속 듣게 하는 겁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성경을 보라고 한 이유가 그거예요.
제 설교를 계속 들으면 세뇌 당해요.
세뇌당하는 거는 문제가 아니에요. 당할 수도 있는데.
성경을 보셔야 돼요.
어떤 누구도 그 범주에서는 못 벗어나요. 인간은.
세뇌 안 당할 인간은 없어요.

여러분이 좌파 유튜브만 계속 봐보세요. 그러면 그 세계 속으로 여러분이 빨려들어가요.
우파 유튜브를 계속 보세요. 그 세계에 빨려들어간다고요.
드라마를 맨날 보세요. 드라마에 미쳐버려요. 사람이.
유행가를 맨날 들으면 유행가에 미쳐버려요. 거기에 자기가 감정이 이입돼가지고.
돈만 계속 생각해 보세요. 앉으나 서나 돈 생각해 보세요.
말씀이 떠오르겠습니까? 종이 되지.

창세기 6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이런 말씀은 신약에만 있는 게 아니에요.
“다시는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이런 말씀들이 신약에만 나오는 게 아닙니다.
6장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노아가 나옵니다.
노아를 하나님께서 평가를 하는데 8절부터 보면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사적이거든요. 사적)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이렇게 나옵니다.
여기에 보면 “당세의 완전한 자라”고 해요. 완벽한 자라는 겁니다.

이 성령을 못 받은 사람들은 이걸 어떻게 읽는가? 하면
노아는 그 시대에 사는 사람들과 다르게 살았다라고 생각해요.
구별되게 살았다고 생각을 해요.
이런 욕망이 수도원을 통해서 드러났거든요.

그 수도원의 역사를 보면 그 원천이 불교에 있거든요.
불교에 세속을 떠나는 게 나오잖아요.
그걸 빼와서 인간의 욕망, 온전히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거예요. 온전히.
그래서 이 창세기 6장에 나오는 “당세에 노아는 완전한 자라”고 할 때
그 완전한 모습을 자기 마음대로 상상을 해요.

방금 우리가 “노아는 은혜를 입었더라” 어느 구절이 떠오릅니까? 로마서가 떠오르죠.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다”
그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잖아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게 되었잖아요.
내 게 아니고 은혜, 공짜잖아요 공짜.

공짜라는 말은 노아가 히브리서 11장에 가면
“믿음으로 이 방주를 준비했다” 이렇게 나오거든요.
믿음이 나오잖아요. 모든 사람이 믿음이에요.
그 믿음이라는 것은 나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에요.

구약이니까 어떻게 그렇게 들어갑니까?
지금 우리가 구약에 살아요? 신약에 살아요? 신약에 살고 있잖아요.
성령 못 받은 사람은 그 해석이 안 나와요.
“노아는 은혜를 입었더라” 해놓고 “그의 사적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당대의 의인이요 완전한 자라”
의인은 어떤 게 의인입니까? 구약의 의인과 신약의 의인이 같을까요? 다를까요? 같아요.

율법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율법을 다 지키는 자가 의인이지 않습니까?
율법을 지키는 자가 있습니까?
율법을 주신 목적이 뭐예요? 로마서 보니까,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두는 방식이에요.
하나님의 저주 아래 두기 위함이에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는 것을 말씀하기 위함이에요.

그러면 구약에 나오는 의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히브리서에서는 아주 노골적으로 말하죠.
믿음의 사람이에요. 믿음의 사람.
이 믿음의 사람이라는 것은 로마서에 나오잖아요.
나의 믿음이 아니라는 거죠. 나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그를 끌고 간 거예요.

그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그를 끌고 가는 모습을 보니까 어때요?
완전해요. 엉망진창이에요? 이게 기쁜 소식 아니에요?
엉망진창일 정도가 아니라 똑같아요.
물 심판받은 그들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라는 겁니다.

‘다를 게 하나도 없다’라고 하니까 ‘똑같다’라는 이야기하는데
인간은요 죄가 드러나는 그 현장은 모양을 다 달리해요.
복음을 모를 때는 사도바울이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는 모습으로 죄가 드러났다면
복음을 안 이후에는 복음을 전하는 모습으로서 죄가 드러나게 돼 있어요.

“노아가 당대의 의인이요 완전한 자라” 그렇게 얘기를 했잖아요.
그러면서 뭘 이야기하는가? 한번 봅시다.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하나님과 동행했다 그러거든요.

여러분 우리가 다 주님과 동행하죠? 예. 아멘. 혼자밖에 안 하시네요.
동행하잖아요. 주님이 우리와 동행을 하잖아요.
동행을 하면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앞부분이 이미 다 언급을 했습니다.
“완전한 자요 의인이다.”

그 완전한 자요. 의인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가? 하면요
“그가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이겁니다.
‘아니 목사님 뭐 갑자기 이상한 이야기를 합니까?’ 이게
세 아들을 낳은 게 이게 완전한 모습이고 의인의 모습이에요.

마태복음 24장을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최종 심판 날을 언급을 하시는데 강림의 날이죠.
이 말씀은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이 마태복음 24장이 해석이 안 돼요.
성령 받지 않는 사람들의 특징이 뭔가? 하면 주님이 오실 날을 기다린다는 겁니다.
받지 않는 사람들.

그 기다리려면 뭘 준비해야 돼요? 여기에 뭐가 들어가야 돼요?
내 행위가 들어가야 되잖아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으면 성도는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렇게 되면 주님과 함께 거하기를 소망하는 사도바울조차도 죄인으로 드러날 뿐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그런 말을 했기 때문에 그건 정당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모든 말씀은 십자가를 증거하고 있어요.

놀라운 것은 주님이 다시 강림할 날, 아직도 십자가 안 졌거든요.
제자들은 성령을 못 받았어요.
못 받았으니까 성령이 오게 되면 뭐만 하면 돼요?
“땅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리라”라고 했으니까

그 일로 사용하는 방식이 주님의 방식인데 그 사용 당하는 자는 뭘 또 상상을 하겠습니까?
‘언제 오실까? 언제 끝날까?’ 우리 그런 생각 안 해요?
지금 살기가 너무 좋아서 빨리 끝나고 싶은 마음이 전부 다 없으신 것 같은데
아 저는 빨리 끝났으면 좋겠어요. 복음 전하는 게.

여기에 보면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다 알죠. 이거는. 이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근데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표적을 요청할 때 뭐 합니까?
너희는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전혀 모르죠.
지금 이것은 이 세상 일이잖아요.
그러면 인간들이 어떻게 해석해야 돼요?

예수님이 이렇게 비유를 하면 우리가 알아들어요? 못 알아들어요?
못 알아듣는다는 말씀을 하시고
예수님은 성도에게 이 말씀이 그대로 응하도록 이루어내시겠다는 거예요.
말씀은 우리가 적용하는 게 아니에요.
말씀은 우리가 이해하고 받아들여서 뭔가 준비를 하고 살아가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그게 아닙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되었다”라는 말은
가르치라고 할 때 이 가르치라는 언어를 통하여서 안 그러면 뭐라 하겠습니까? 인간들이.
가르치라고 말 안 하면 뭐라고 하는가? 하면요 어떤 인간들이 나오는가? 하면
‘기다리자 깨달을 때까지’ 이런 인간이 나오거든요.

인간은 자기가 어떤 방법을 다 동원하더라도 구원에 도달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주실 때 인간이 말씀을 받는, 이 세상에서 통용하는 그 모든 방식,
가르침도 있고 뭐 혼내는 것도 있고 별별 요소를 다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해야만 또 인간들은 책망을 받아요.

애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할 때 다양한 방식을 쓰잖아요. 그죠? 그죠?
어떤 사람은 대화로 하라 이야기하는데
DNA 구조상 내가 대화로 안 됐기 때문에 우리 애도 대화로 안 돼요.
그리고 애는 자기가 빠져나갈 구멍을 찾잖아요.
‘엄마 교육학에서는 요즘 교육학은 대화로 그냥 얘기를 하면 돼. 본을 보여야 돼.’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 거예요.

말씀을 대하는 것도 마찬가지죠.
만일에 그럴 것 같으면 말씀을 그런 식으로 주시죠.
그런 식으로 준다고 자기가 알아듣습니까? 우리가.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앞에 이른줄 알라”
이걸 보거든. 보거든.
왜 이런 식으로 예수님이 말씀하셨느냐? 하면 듣는 상대가,
지금 제자들의 질문 자체가 엉터리이기 때문에 그래요. 24장 3절에 보면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이러할 때 이 질문 자체가 지금 마태복음 수요일 날 하고 있잖아요.
제자들의 질문 자체가 지금 잘못되었거든요.
그 질문 자체가 잘못되면 예수님이 질문을 제대로 바꾸어서 답변을 해 주시면 되는데
그 질문에 맞게 답변을 해요. 맞게 답변을 하니까
우리들은 그 맞게 답변을 한 것이 ‘야 이것이 진짜 진리야’라고 생각하면서 성령을 날려버리죠.

제자들이 질문을 했잖아요. “어느 때에”
지금 방금 이 24장 이 말씀도 그에 대한 답변이에요.
그에 대한 답변이면, 제자들이 듣는 답변이 있잖아요.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아 예수님이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문 앞에 있는 줄 알라”라고 하셨지.’
근데 성령이 와버리니까 어떻게 돼요?
성령이 오면 이 말씀의 사람이 돼버려요.
이 말씀 속으로 합류를 당한다는 겁니다.
주님을 증거하기에 바빠요. 증인이기 때문에.
무엇을 하더라도 주님의 증인이에요.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는 현장인 거예요. 성도는.

좀 더 보겠습니다.
십자가 사건이 일어난 현장이 어떤 현장인지 봅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얼마나 유명한 말씀입니까? 그죠?

사람들이 이걸 보면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말씀대로 주님이 강림할 줄로 믿습니다.’ 하는데,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굉장히 수상하죠.
이렇게 믿는 자들이 다 무엇을 제공합니까?
14만 4천을 제공하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다움,
그런 것들을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는 걸, 이걸 제공하는 거예요. 계속해서.
우리 교회에 오면 천국 간다는 거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구원 얻은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 아멘 나와야 되는데.
맞잖아요. 예수님이 십자가의 피 능력으로 성령을 주셔서 구원하잖아요.
왜? 모두가 다 귀가 닫혀 있기 때문에 이사야의 예언을 확정해 놨잖아요.
모든 귀가 닫혀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구원 얻을 사람 없습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앞뒤 맞는 말씀만 하셔야지...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른다.
앞에는“이와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그 보는 사건이 뭐예요? 첫째 기근과 지진과 전쟁.
그럴 것 같으면요 시리아는 이미 주님이 100번, 천만 번 오고도 남았어요. 그 동네는.
맨날 전쟁이잖아요. 맨날.

말씀을 해석하는 방식이
예수님의 말씀이 엉터리라는 말씀이 아니라 이 말씀대로 이루어져요. 실제로 이루어지는데.
그 이루어짐이 어떻게 흘러가버리는가? 하면
역사적 사건 자체가 묵시 사건으로 다 교체 작업이 일어나버리면
그 사건 하나를 통하여서 이미 이 시대는 어떤 시대냐? 심판의 때라는 거죠.

그런데 사람들은 계속해서 말씀을 보면서
‘이 말씀이 언제 이루어질까?’ 그걸 기다리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때 그 시는 아무도 모르고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
왜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지 알겠죠? 지금은 아직 주가 안 되셨거든요. 예수님이.

그러면 주님의 영인,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을 받으면
그때를 안다라고 하는 인간들이 있거든요.
지금도 있다니까요. 예수님이 언제 오신다라는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예수라는 거거든요.
그런 사람들은 특징이 돈벌이입니다. 돈벌이.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임할 때 사람들은 모두가 다 어떻게 할까요?
준비를 할 거 아닙니까? 그런데 말씀을 봤으면 준비를 할 거 아닙니까?
그런데 주님은 영~ 이상한 말씀을 하는데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여기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그럼 노아는 이 일을 안 했습니까? 똑같이 한 거예요.
그래서 창세기에 보면 “세 아들을 낳았다” 이 얘기를 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오실 때 인자가 임할 때,
임할 때라는 자체는 이미 주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기 때문에
다 이루심 속에는 모두가 다, 이 세계, 노아의 때와 같은 그 모습을 그대로 똑같이 보이는 겁니다.

단지 노아는 보이는 게 있었죠. 방주를 짓고 있었잖아요.
방주를 짓고 있는 것이, ‘심판이 온다’라는 걸 믿고 방주를 짓고 있는 것이
그 주변 사람들에게는 지혜로운 짓입니까? 안 그러면 어리석은 짓입니까?
어리석은 짓이잖아요.

그러면 성도들은 ‘주님이 강림합니다.’ 이거는 어리석은 짓입니까? 지혜로운 짓입니까?
이거 답변 잘해야 됩니다. 지혜롭죠.
왜? 강림을 기다리니까.

그런데 십자가만을 증거하면 어떻습니까? 십자가만을 증거하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하면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이 설교를 보게 되면, 주님이 강림하신다는 설교를 하게 되면 사람들이 모여요.
‘강림을 하게 되면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지금보다 훨씬 더 즐겁고 행복하게 산다’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가 그 정도로 대단하다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은 우리를 어떻게 합니까? 요한복음에 보면
“내가 이 제자들을 데려가기 위함이 아니라 세상에 남겨두기 위해서” 기도를 하시잖아요.
이 땅에서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 않는 자는
그 죽은 자로서 살지 않는 자는 절대로 천국 못 갑니다.
그 죽은 자들이 이 땅에 살면서 십자가만 전하거든요.

그 십자가만 전하면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소망이 있어요? 없어요? 소망이 다 사라지잖아요.
십자가만 자꾸 이야기하니까 도대체 뭘 붙들란 말입니까?
뭘 붙들기는요. 십자가 사건 속에 살면 되지.

노아도 당대의 의인이지만, 완전한 자지만 똑같이 결혼해서 살았어요.
신부가 결혼 안 하잖아요. 왜 안 합니까? 완전한 신부가 되려고 하거든요.
완전한 신부, 카톨릭 신부들.
결혼 안 하면 완전합니까? 완전의 의미를 전혀 몰라요.
‘에이 그래도 먹고 마시고 안 했잖아요. 노아가’

먹고 마시고 안 했습니까? 방주에서 나왔잖아요.
나와서 어떻게 했습니까? 술에 취해가지고 벌거벗고 누웠어요.
또 사람들이 이걸 보면서 ‘그래 우리도 노아처럼 살아야지 맨날 술 먹고 벌러덩 까지자’
이런 사람들은 말씀 밖에 있는 사람이에요.
제가 지금 이 걱정해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니라
성도는 말씀 속에 사는 사람이지 말씀을 이용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말씀을 이용한다는 것은 자기 행위를 거기에 집어넣는 거예요.

‘술 마셔도 천국 가요. 담배 피워도 천국 가요.’ 사람들이 이 얘기만 하거든요.
근데 술 마셔도 지옥 갑니다.
사도바울은 술 마셔도 천국 간다는 말은 하지 않아요.
“술 취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못 받는다” 이야기예요.

말씀이 희한하죠.
우리가 바울보다 더 뛰어나가지고 뭐라고 하는가? 하면
술 취해도 천국 가고요. 술 안 취해도 천국 갑니다.
목사들이 그렇게 가르치거든요. 왜? 십자가는 모든 죄를 용서하니까. 맞죠. 말은 맞죠?

십자가는 모든 죄를 용서하기 때문에 모든 죄를 용서하지 않아요.
왜? 십자가의 피만 자랑케 하기 위해서.
그래서 다시는 죄의 종노릇하지 않는 표현을 쓰는 이유가
‘완전하다 온전하다’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 “노아가 당대에 완전한 자라” 했잖아요.
그럼 완전의 모습은 이제 신약 성경에 의해서 제대로 꽃을 피우잖아요.
그 완전의 모습은 믿음, 누구의 믿음입니까? 노아의 믿음 아닙니다.
여러분 방주 짓는다고 심판에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제가 좀 상상력을 펴보면 이 노아만 방주 지었겠어요? 따라하지 않겠습니까? 요즘도 그렇잖아요.
예수 믿어야 천국 간다니까 다 따라하잖아요.
똑같이 방주를 짓는다고 홍수 심판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노아의 온전함은, 노아의 의로움은 “은혜를 입었다”라는 겁니다.
그 은혜는 이 방주에서 나올 때 정결한 동물의 희생 피예요.
그 피가 그를 구원한 거예요.
근데 이 구원조차도 심판과 구원을 나누는 구원이 되죠.
왜냐하면 함 족속이 저주를 받거든요.

나를 위한, 나의 구원을 위한 구원 자체가 없다니까요.
이 원칙은 하나님은 끝까지 변치 않습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이렇게 반박할 거예요.
‘당신은 지금 십자가의 완료성을 부정합니까?’ 말귀를 못 알아듣죠.

왜 그 사람들이 저한테 그런 공격을 할까요? 그건 간단합니다.
자기 구원을 확신하기 때문에 그래요.
말씀 자체가 지금 십자가 사건 속에 우리를 집어넣는 건데
“육 가운데 사는 것은 끝까지 이 죽을 육체에 예수의 생명을 나타내게 하기 위함”인데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려면 날마다 죽어야 되잖아요.
그럼 날마다 죽는다는 거는
‘나 구원 확신되었어. 다 이루었어.’ 이걸 믿는 것으로 끝나는 겁니까? 아니잖아요.
그 자체가 날마다 죽이시는 모습으로 우리를 다루는 거예요.

이 “완전하라” 구약 성경에 꽤 많이 나오거든요.
꽤 많이 나오는데 창세기 17장 1절에 보더라도
하나님께서 이제는 거꾸로 말을 합니다. 거꾸로 말씀하시죠.
6장에서는 아예 노아를 “완전한 자”라고 이야기를 하고 이게 말씀이 흥미로운 게 이런 거예요.
노아가 어떻게 살았는가는 얘기하지 않고 그 뒤에 아들 셋을 낳았다. 이것만 나오거든요.
지금 앞부분에 이 창세기 6장에서는

그런데 17장에서는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
이 같은 단어거든요. 완전하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럼 완전하라고 이야기를 하니까 어떤 생각을 갖게 되는가? 하면
이전에 아브람이 제대로 완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는 완전해야지라고
우리가 그렇게 생각을 할 수 있잖아요. 17장 1절에 보면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완전하게 행하려면
하나님께서 이 사라를 통하여서 자식을 주시겠다 할 때 비웃으면 돼요? 안 돼요 안 되죠.
이 완전하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하셨잖아요.
언약하신 대로 아브라함을 다루시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또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면
‘그렇게 말씀하시지 왜 완전하라고 말씀하십니까?’ 지금 이걸 따지고 싶잖아요.

제가 너무 생각을 많이 합니까?
‘완전하라’라고 말씀을 하셔야 뭐가 튀어나옵니까? 죄가 튀어나와요.
‘언약대로 한다’라고 이야기해버리면 인간들은 믿어버려요. 그냥.

사도 바울이 로마서 뒷부분도 마찬가지고
뒷부분 서신서들에서 수많은 법 조항을 내뱉는 이유가 뭐가? 하면 그게 없으면 피가 안 나와요.
성도는 십자가 안에 살기 때문에
피를 자랑하기 위해서는 말씀 전체가 우리 속으로 들어오게 되잖아요.
맞죠? 말씀을 우리 속에 집어넣었잖아요.
말씀을 집어넣으면 뭐가 나올까요? 예수님의 죽으심이 나오죠.
죽으심이 나오려면 죄가 나와야 될 거 아닙니까?
계속해서 인간들은 자기 구원의 완벽성을 포기를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에서 다시는 죄의 몸이 멸했으니까,
멸했으니까 ‘더 이상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라’라고 이야기를 하니까
사람들이 뭐가 죄인지를 몰라요. 그 죄의 모습이 바뀌어버립니다.

이 말씀 속으로 들어가면 두 개 다가 이 말씀 속으로 들어가게 돼요.
최종적으로는 성도는 십자가만 자랑하게 돼 있어요.
그게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않는 모습이에요.
죄가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6장에 뒷부분에 나오거든요.
그러면 성도는 계속해서 그 말씀 속에 살려지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자랑하게 돼 있어요.

(로마서 6장) 7절을 보겠습니다.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야 희한하게 말씀하시죠.
이렇게 되는 이유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죄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거예요.
의롭다 하심을 얻은 모습은 어떤 모습으로 살려지느냐? 라고 하면
바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쫓는 모습으로 살려지는 거예요.

지금 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복음을 모르는 게 아닙니다.
복음이라는 것이 어떻게 바뀐다 했습니까? 지난 시간에 사도행전 8장을 이야기했잖아요.
다 들어요. 일심으로. 다 아멘하고 세례까지 받잖아요.
그걸 다 안다니까요.
그 아는 속에서 들어오게 되면 이 하나님의 심판이 하나님의 집에서 먼저 시작을 한다 했잖아요.

십자가 복음을 계속해서 사도바울이 누구에게 전합니까? 지금.
이방인에게도 전했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전했지만
모든 서신서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전해요.
그 이유는 교회라는 것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주님만 남겨야 되는 곳이지 내가 남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장에 보면 요한계시록에 보면 일곱 교회가 사라지잖아요.
이사야 선지자가 “잎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라는 것이
구약에만 있는 게 아니라 신약에도 있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은 교회를 남기고 싶어 하거든요.
교회가 있어야 누가 있어요? 내가 있거든요. 내 구원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요즘은 교회도 날려버렸죠.
나만 있으면 되는 거예요. 나만 있으면.
복음을 왜 더 안 듣느냐? 하면
내가 깨지기 싫은 거예요. 내가 깨지기 싫은 겁니다.
복음을 듣는 사람끼리 모여서 얘기를 할 때 왜 그렇게 조심하느냐? 하면
내가 깨지기 싫어서 그래요. 내가 깨지기 싫어서.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이미 완전하잖아요. 의롭다 하심을 얻었잖아요.
누가? 노아도 마찬가지고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
로마서에서는 아브라함이 나왔잖아요. 아브라함이.

아브라함이 단순히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
이 얘기만 하기 위해서 4장에서 언급한 겁니까? 다윗을 그렇게 언급한 거예요? 아니죠.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이후에 어떻게 살았습니까?
그다음 성화가 되었나요? 아니잖아요.

성도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의롭게 된 자예요.
그걸 어디에서 확정합니까? 하면 십자가에서 확인하는 거예요.
그러면 십자가에서 이 모든 것이 이루어졌음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성도가 살려지게 되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구약에 쫙~ 나오죠.

히브리서 11장 보고 마치겠습니다.
다 보지는 못하고요. 거기에 믿음의 사람들이 등장을 하거든요.
이 사람들이, 이 시대에도 믿음으로 살잖아요. 성도들은. 그렇죠?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다” 했을 때는 믿음이 먼저 끌고 가죠.
믿음이 먼저입니다. 자기가 아니라.
‘믿었으니까 증거를 얻었다’가 아니고 사실은 거꾸로죠.
약속을 주니까 자기가 믿잖아요. 아브라함이.
믿으니까 그 믿음이 박살나는 방식으로 믿음이 그를 끌고 가는 거예요.

우리는 어떤 논리를 갖고 싶은가? 하면
‘믿음이 먼저 아브라함을 인도하셨어. 근데 아브라함이 오해를 했어. 오해를 하면서 자기 오해한 것이
엉터리로 드러나면서 진짜 믿음이 나오고...’ 이런 생각을 먼저 하는데,
그렇게 일을 진행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믿음으로” 이 믿음은 ‘내가 믿는다’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내가 믿어버리면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가? 하면
‘하나님이 창조한 걸 믿어요.’ 이렇게 돼요.

근데 히브리서는 벌써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에
이 창조 세계가,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 십자가 지신 주님을 위한 세계인 것까지도 포함되고 있어요.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뭘? 죽었는데 뭘 말해요? 죽었는데.
완전히 거꾸로 해석을 하는 겁니다.

구약의 성도들이 믿음으로, 이 믿음으로 살았다라는 이 내용을 어떻게 해석을 해요?
이 로마서를 근거로 하여서 해석에 들어가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그를 그렇게 살게 한 거예요.

자기가 뭔가 주도권을 갖고 행세할 수 있는
그러한 행위를 내세울 수 있는 그러한 권한이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마귀의 종인데 어떻게 주신 걸 갖고 자기가 지킬 수 있습니까?
만일에 마귀가 없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져서 ‘믿음으로 내가 했습니다.’
이게 나올 수 있지만,
그렇게 믿음으로 했다라는 자들이 예수님을 살해했잖아요.

그러면 여기에서 이 가인의 믿음이나 뒤에 나오는 노아의 믿음, 에녹의 믿음
모든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속에 합류당한 믿음이에요.
그러면 그들은 모두가 다 무엇을 담고 있어요? ‘나는 아니오’를 담고 있죠.

‘아니오’를 담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그야말로 주어진 상황 속에서 막 살아요.
‘조신하게 살지, 조심하며 살자. 우리는 이 몸이 죄와 함께 죽었기 때문에,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의로운 자로 살자’ 이 말이 나올 수가 없어요.

말씀을 통하여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우리를 인도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그냥 단회적 사건으로 모든 것을 끝낸 사건이기에
우리를 계속해서 그 사건 속에 머물게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주님의 증인으로 내모시는 거예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은 저희에게 완벽성을 요구하기에 우리를 십자가 사건으로 다시 몰아넣으시고,
십자가에서 주님이 다 이루셨음을 이 죽을 육체에 계속해서 십자가 사건을 반복시키면서
십자가의 피만을 자랑하는 주님의 증인으로 삼아주심을 감사합니다.
날마다 말씀에 의해서 깨어지는 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말씀을 우리가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주님을 증거하는 말씀의 세계 속으로
저희들을 인도하시기를 간절히 원하는 주의 백성에게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