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3-11-12 19:54
20231112 로마서 강해 39강 롬 6:8-13 불의의 병기와 의의 병기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54  
https://www.youtube.com/live/XnBKbz5wO0Y?si=8RFy5fS_H3GcV9vA

관리자 23-11-13 21:22
답변 삭제  
20231112 로마서 강해 39강 롬 6:8-13 불의의 병기와 의의 병기

다 함께 묵상 기도드리겠습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 고백하겠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 말씀, 잠언서 26장 7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잠26:7)
“저는 자의 다리는 힘 없이 달렸나니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도 그러하니라”

기도하겠습니다.
첫째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인간들의 말들은 미련한 자의 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저희들은 미련한 자의 말이야말로 참 지혜의 말로 받아들이는
그러한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지만,
오늘도 주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모든 지혜롭다고 하는 것들이
미련한 모습으로 드러나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시편 78편 43절에서 53절 말씀을 교독하겠습니다.
[아삽의 마스길]
(시78:43~53)
“그 때에 하나님이 애굽에서 그 징조를, 소안 들에서 그 기사를 나타내사 저희의 강과 시내를 피로 변하여 저희로 마실 수 없게 하시며 파리 떼를 저희 중에 보내어 물게 하시고 개구리를 보내어 해하게 하셨으며 저희의 토산물을 황충에게 주시며 저희의 수고한 것을 메뚜기에게 주셨으며 저희 포도나무를 우박으로, 저희 뽕나무를 서리로 죽이셨으며 저희 가축을 우박에, 저희 양떼를 번갯불에 붙이셨으며 그 맹렬한 노와 분과 분노와 고난 곧 벌하는 사자들을 저희에게 내려 보내셨으며 그 노를 위하여 치도하사 저희 혼의 사망을 면케 아니하시고 저희 생명을 염병에 붙이셨으며 애굽에서 모든 장자 곧 함의 장막에 있는 그 기력의 시작을 치셨으나 자기 백성을 양 같이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에서 양떼 같이 지도하셨도다 저희를 안전히 인도하시니 저희는 두려움이 없었으나 저희 원수는 바다에 엄몰되었도다”

이 시간 김춘희 집사님 우리를 대표해서 기도해 주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루의 시작과 끝을 양심을 토대로 수시로 바뀌는 선과 악을 구별하여
만족하며 생활하고 있기에 초라한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외면하는
율법 없이 범죄한 자로 시작하여 율법 없이 망한 자로 드러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인생과 우주의 존재 목적을 이해하고 싶어 성경을 읽고, 설교를 저울질하며
기억력은 왜곡된 구조들로
말씀으로 친히 찾아오신 나사렛 예수님을 무시하고 살해한,
결국에는 살해당한 율법이 있는 범죄한 자로,
멸망의 끝인 십자가 현장으로 인도하심에 감사드립니다.

불의한 죽음으로 연합된 아들의 나라로 초대받은,
용서받은 공범자들만이 선물로 받은 신령한 은사로
모든 입을 막고 교제하는 자리에서
율법의 한 의로 화목제물이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찬양하는
주께만 범죄한 곤고한 자로 인도해 주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나님 말씀, 로마서 6장 8절에서 13절 말씀을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롬6:8~13)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아멘.

말씀을 주시고 ‘이것을 믿으라’ 그러면 참 쉬울 겁니다. 믿으면 되니까요.
‘믿는 게 불가능하지 않습니까?’라고 하지만 인간들의 믿음은 그 불가능성을 초월합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살해한 이유는 믿었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을 살해한 겁니다.

로마서의 말씀이 어려운 이유가 무엇이냐? 라고 하면
우리가 원하는 선악 구조로 답을 해주면 참 좋지 않겠습니까?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이것이 정답입니다’라고
교회에서 수도 없이 듣고 로마서를 읽으면 어떻게 돼요? 와장창창 무너지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십자가로 다 이루셨으면,
좀 편하게 살면 안 됩니까? 왜 이렇게 복잡하게 말씀을 하는 겁니까?
로마에 있는 성도들도, 성도라 불림을 받는 자들도 아마 이런 소리를 했을 겁니다.
‘아니 예수님이 십자가에’ (여기도 나오죠)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단번에 죽었다’라는 것은 다시 죽음이 왕노릇 하지 못하는 죽음이라는 거예요.
히브리서에 의하면 영단번 제사, 한 번의 죽음이 영원한 희생물이 되는 죽음이고
그의 살아나심은, 살아났다라는 것은 죽음이 다시는 그를 지배하지 못한다라는 거죠.

그거 누가 모릅니까? 여기 있는 분 다 알죠. 이 말씀을 듣는 분 모르는 사람 없잖아요.
그러면 이걸 믿고 살면 되잖아요.
앞서서 ‘주님과 함께 연합하여 세례를 받았다. 예수님과 함께 우리가 죽었다.
그리고 그 죽었으면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믿습니다.’ 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그런 식의 믿음은 유대인들이 다 갖고 있어요.
방금 ‘믿습니다. 말씀을 인정합니다.’
누가? 내가 인정하는 거거든요.
우리 자신이 나를 부인할 능력을 갖고 있나요? 한번 스스로 질문해 보세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라고 탄식하는 내가 부정이 되나요?
그 순간은 부정이 되는데 그 순간이 지나면 어때요?
여러분들도 어떤 사건이 닥쳤을 때 ‘주님의 은혜입니다’라고 하죠.
그다음 어때요? 새로운 다른 사건이 등장하면 ‘은혜? 그 무슨 은혜냐?’ 얘기하죠.
나를 잊지 못해요.

말씀이 우리가 들었듯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라고 할 때
그것으로만 말씀이 끝을 맺어준다면 참 편해요. 그걸 믿으면 되니까.
그런데 말씀이라는 자체가 계속해서 선악 구조로 말씀을 한다라는 겁니다.
심지어 십자가조차도 어떻게?
“믿으라” 하죠. “주 예수를 믿으라” 하잖아요. 믿는 것이 선이잖아요. 아닌가요?
‘에이 목사님 믿는 건 선이 아니잖아요.’
그럼 뭔데요? 악입니까?
‘믿는 게 믿는 거죠.’
그래서? “믿으면 너와 내 집이 구원을 얻는다” 했잖아요. 그게 선이잖아요.

구약에 율법을 주셨을 때 선악 구조로 주셨잖아요.
선악 구조로 주셨으면 신약의 복음을 주실 때는 이 전체가 복음이 되는데
복음을 주실 때는 우리가 구약을 읽든, 창세기를 읽든, 율법을 읽든, 어디를 읽든
선악 구조로 말씀이 안 보이고 이 선악 구조가 무너진 체계로 말씀이 보인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 다 복음을 알잖아요.
은혜를 받았잖아요. 값없이.
값없이 선물을 받은 여러분들이, 성령을 받은 여러분들이 말씀을 볼 때 어떻게 보입니까?
성경을 안 읽는 사람은 뭐 할 말이 없죠.
성경을 안 읽는 사람의 특징이 뭔가? 하면 신학을 이야기를 해요.
근데 신학을 이야기하는 사람 불러가지고 말씀을 이야기하면요. 답을 못해요.

왜 못하는가? 하면 신학은 신학일 뿐이에요.
신학으로 구성되는 순간 그것이 선이 되어서 그 선은 반드시 예수님을 살해하게 돼 있어요. 구조가
왜냐하면 자기 부정이 안 되거든요.
‘옳은 신학을 정립했다’라는 것은
‘나는 이 옳은 신학을 갖고 있고 소유하고 있고 믿고 있기 때문에 나는 천국 간다’라는
주장을 내뱉기 때문에 그래요.
여기에 무슨 자기 부인이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주님을 원해서 만났습니까?
원해서 만나지 않았잖아요. 일방적으로 찾아와버렸잖아요.
그러면 로마서 쓸 때도 쉽게 쓰면 되잖아요.
‘여러분, 여러분이 아무리 애쓰고 노력하고 주를 위해 애쓰더라도 구원 못 얻습니다.’
‘주님이 찾아오시기만 하면 됩니다.’ 맞아요? 틀려요? 이게 맞잖아요.
근데 바울이 그렇게 썼습니까?

실제로 그렇게 주장하는 신학자들도 있었고 목사도 있어요. 나름. 숫자는 얼마 남지 않았지만,
그 김성수 목사 밑에서 배워가지고 여러 갈래로 나눠지잖아요.
원어 파는 데 미친 사람부터 시작해서,
들어보니까 지식으로는 안 되니까 주님이 찾아와야 된다라는 거예요. 김○찬이라는.
이름이 뭔지 모르겠어요. 지금도 인터넷에 있거든요.

그렇게 이야기를 할 때 통할까요? 안 통할까요? 통하죠.
왜 통하는가? 하면 은혜로 값없이 주어진 선물이잖아요.
그런데 은혜로 값없이 주는 선물을 우리가 원한다고 받습니까? 설교한다고 받을 수 있나요?
그 사람이 도를 깨친 거예요. 나름대로.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셨다라는 이 신학 자체가, 이 복음이라는 자체가 사람의 힘으로 불가능하잖아요.
그렇게 말을 하니까 사람들이 듣고 앉았어요.
그러면 그들은 뭘 하느냐? 라고 하면 ‘기다리자’라는 거예요.
근데 이 사람이 하나를 모르죠.
사도바울이 기다렸습니까? 사도바울이 기다렸나요?
애써 진리를 갈구했나요? 찾아 나섰나요?

왜? 주님이 찾은 바 되지 않는 자에게 찾은 바 되는 식으로 찾아오시는가? 하면
주님의 일은 주님만 하시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의 일은 자기 자신의 피로만 이루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찾아서 주님이 오신다. 성령이 오신다. 그러면 이게 유대교거든요.
‘내가 찾고 기다리고 구하면 주신다. 두드리라 열리리라’
예수님이 왜 이렇게 말씀을 하셨는가? 하면
그 말을 제자들이 먼저 듣잖아요. 수제자도 듣잖아요.
그러면 베드로가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우리와 똑같이 생각해요.
‘두드리고 찾고 구하면 주신다’라고 확실하게 믿었다니까요.
그게 악마적 해석이에요.

그렇게 돼버리면 어떤 사태가 발생하는가? 하면 유대교가 여호와를 버리고 우상을 쫓았잖아요.
그 우상을 쫓을 때 그 우상의 특징이 뭡니까?
내 뜻대로 들어준다라는 게 우상이에요. 내가 만들었잖아요.
여러분의 우상은 누굽니까? 딸? 아들?
왜냐하면 내가 만들었거든요. 내 말 안 들으면 화가 나잖아요.
왜? 나의 우상이기 때문에 그러면 패버려야 되요.

부처도 마찬가지고 조상신도 마찬가지잖아요.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제사상에는 법대로 올려야 된다 했거든요.
그 법이 와해 된 이유가 뭔가? 하면 그렇게 안 해도 잘 먹고 잘 살더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뭘 올립니까? 피자 올리고 그렇게 하잖아요.

우상이 바뀌는 거예요. 누구에 따라서? 나의 현실에 따라서 우상의 모양이 계속 변하는 겁니다.
그 우상의 특징은 내가 원하는 대로 들어준다라는 거예요.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그 우상들은, 주변에 있는 우상들은 누구를 대변하는가? 하면
그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이방인들을 대변해 주는 우상이에요.

신과 사람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로 묶여져 있어요.
이방 나라가 이스라엘을 볼 때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별개로 보지 않잖아요.
마찬가지입니다.
잘 사는 걸 보니까 들어가 보니까 그들의 신이 어떤 신이더라?
바알 신이더라. 아세라 신이더라. 조상신이더라.
지방신도 있나요? 메이크입니까? 지방신이.
별별 신들이 다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 신을 찾고 믿는 겁니다. 그러다가 멸망을 당하잖아요.
멸망을 당하니까 정신을 차린 겁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린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니까 우상을 찾는 방식으로 여호와를 믿는 거예요.
여호와의 약속을 붙들고 믿고 메시야를 기다린다면,
기다릴 때 그냥 기다리는 게 아니고 준비되어서 기다린다면,
그 메시야를 통하여서 내 꿈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거예요.

‘아이 목사님 내 꿈하고 하나님의 뜻하고 다르잖아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그걸 아셔야 돼요.
성경을 읽어보세요. 내 꿈과 하나님의 약속이 일치합니다.
율법을 지키면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잖아요.
그게 여러분이 원하는 복 아닙니까?

‘율법을 지키면 영생한다’라는 게 여러분이 원하는, 우리가 원하는 복 아닌가요?
인간이 말하는 행복이 뭐예요? 모든 것이 내가 원하는 대로, 바라는 대로 되는 거잖아요.
그게 복이잖아요.

하나님께서 약속을 하실 때 선악과를 먹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복과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달랐다면
문제가 있지만, 약속의 땅에 들어가 보니까 우상을 섬기는 자들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축복의 축복의 축복 100배의 축복을 받는 거예요.
과거 이삭이 받았던 그러한 축복을 그들이 받고 있는 거예요.

자기들과 비교가 되잖아요.
자기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겨봤자 그러한 축복이 안 주어지는 겁니다.
우상을 섬겨서 멸망을 당하니까 멸망당한 이유를 알아요? 몰라요? 알죠.
오늘 본문에 ‘안다’라는 내용이 나오고요.

그다음 또 뭐가 나오는가 하면 하나님이 약속을 주셨잖아요.
칠십 이레가 마치면 어떤 일이 일어난다?
시온산을 중심으로 메시야 왕국이, 천국이 도래한다라는 거예요.
그 천국의 모습은 내가 원하는, 내가 소망하는 모습인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대로 살면서, 성전에서 제사를 제대로 드리면서 약속의 메시야를 기다렸던 겁니다.
다윗의 자손을 기다렸던 거예요.

여기에서 또 무엇이 나옵니까? 그들의 ‘믿음’이 나오죠.
아는 것도 있고 믿는 것도 있어요.
그런데 이 앎과 믿음이 무엇을 무슨 사건을 일으킵니까? 십자가 사건을 일으켜요.

그런데 지금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지금 6장에서 앞에서 계속 그렇게 나와요.
말씀을 읽어보면 3절에 보면 물어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알아요? 몰라요? 여러분 다 성도잖아요.
성령 받았으면 알아요? 몰라요? 그걸 모르면 성도 아니잖아요.
알죠. 근데 아는 게 믿음이냐? 라는 거예요. 지금.
왜냐하면 아는 자들 중에
“은혜를 더하게 하기 위해서 죄에 거하자” 하는 자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뿐만 아니라 안다고 하는 자들 중에 어떤 자들이 등장할까요? 멀리 볼 필요 없습니다.
구원파, ‘나는 무슨 짓을 해도 죄 안 짓는다.’ 그 성경에도 있거든요.
우리는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 이런 표현들이 나온단 말이에요.
그 말씀을 못 알아듣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그들에게 십자가 복음을 이야기해 보세요.
100만 번 ‘아멘’합니다. 여러분 좀 놀라야 되는데
이걸 구원파에게 십자가 복음만을 이야기해 보세요.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다 이루셨다.’ 이것만 이야기해 보세요.
다 아멘을 한다니까요.
그런데 다 이루심을 니가 아느냐?

알기 때문에 뒷부분에
“너의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이렇게 나오거든요.
그러면 뭐라고 할까요? 그들이.
안다라고 하는 자들 이 뒤에 보면 또 믿는다는 게 나오거든요.
한번 봅시다. 4절에 보면 주님께서 하신 일이 나오는데 하반절에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시는 분이 누굽니까? 주님이거든요.

앞서서는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안다라고 하거든요.
그러면 우리가 아는 것, 주님이 행하게 하시는 것,
이것이 충돌이 일어날까요? 충돌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또 질문을 할게요. 새 생명 가운데 생각하는 게 뭡니까?
사실 성도는요 이 질문이 필요 없죠. 왜냐하면 주님과 함께 죽고 살았잖아요.
그러면 새 생명 가운데 살게 하는 분이 누굽니까? 주님이잖아요.
그러면 그 질문이 필요합니까? 필요하지 않습니까? 필요 없으면 이 말씀을 안 하죠.

근데 우리의 논리는 필요 없다라고 생각해요.
왜? 기계같이 생각하니까 이 몸을.
성령을 받게 되면 더 이상 선악 구조에서 헤매지 않고, 벗어나서.
‘그리스도 안’도 엉터리에요. 다 엉터리에요. 뭐 맞는 게 없어요. 말만 하면 다 엉터리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구조에서 벗어날 수 있다’라고 자꾸 생각을 하는 거예요.

악마가 어디에서 가장 발악을 합니까?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 발악을 하지,
복음이 전파되지 않는 곳은 악마는 그냥 취미생활을 해요.
신천지에 가서 악마가 할 게 뭐가 있어요?
잠만 자도 자기들이 알아서 자기 부하 노릇 하는데...
성경을 거꾸로 보잖아요. 모두가 다.

예수님이 등장하니까 진짜 복음이, 율법의 한 의가 등장하니까 마귀가 자기의 모습을 드러내잖아요.
드러내면서 예수님 옆에서 악마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복음이 전파되지 않는 곳에는요 그냥 그냥 마귀 종으로서 그냥 노는 거예요. 노는 거.
‘저 모습이 악마적 모습이야.’ 악마적 모습이 나오는 곳은 복음이 선포되는 곳이에요.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우리가 죄인이라 하는 이유가 희한하잖아요.
주님이 우리와 동행하기 때문에 죄인이라는 고백을 하는 거예요.
그 말은 ‘악마가 나와 동행한다’라는 이야기잖아요.
이런 설교 처음 듣는 사람은,
유튜브 들어와서 이거 설교 처음 듣는 사람 못 알아들어요. 무슨 말인지.

사도바울이 기도했잖아요. 세 번이나 기도했는데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하거든요. 주님이.
그러니까 너는 은혜가 족하려면 필수적으로 마귀가 죽을 때까지 동행을 해야 돼요.
마귀가 동행하지 않는 인간은 성도 아니에요.
왜냐하면 주님의 영을 받은 자는 반드시, 성령을 받은 자는 십자가의 피를 자랑하기 때문에 그래요.
십자가의 피는 사건이에요. 앎도 아니고 믿음도 아니에요.

그런데 ‘안다. 믿는다.’ 이 요소를 인간 세계 속에서 뺄 수 있느냐? 하면 못 빼요.
여러분 ‘안다’는 걸 뺄 수 있나요? 안다는 걸 뺄 수 있나요?
‘안 믿겠다’라고 하잖아요. ‘나는 믿음 요소를 빼겠다’라고 하는데
‘안 믿겠다’라는 말은 ‘안 믿겠다는 걸 믿겠다’라는 이야기거든요.
말장난이 아니라 인간이 육이 있는 한 인간은 안다는 거, 믿는다는 거 이걸 못 빼내요.
왜냐하면 선악 구조 속에 있기 때문에 그래요.

선악 구조 속에 있기 때문에
아는 것이 선이 되고 믿는다는 것이 선이 되기 때문에
이 육이 있는 한 그것을 끝까지 고수를 하게 됩니다. 사수를 합니다.

근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면 이러한 어떤 사고 방식들을 삭제해버리면 얼마나 좋겠느냐?
하지만, 로마서를 보게 되면 삭제하기는 커녕 더 활성화시켜요. 활성화.
얼마나 신기합니까? 이런 말씀들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라는 이 말씀이 말씀대로 되려면 어떻게 돼야 돼요?
죄가 더하도록 주님이 조치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은 이 말씀의 의미를 자기가 낚아채어서
그러면 ‘은혜를 더하기 위해서 죄를 더 하자’라고 자기를 어느 자리에 넣어버립니까?
주인공 자리에 집어넣는 거예요.

악마의 특징은 내가 주인공이에요. 내가 주인공.
유대인들이 말씀을 볼 때 내가 있고 말씀이 있잖아요.
그러면 시내산에서 모세가 이렇게 전달을 해주면 모세를 어떻게 보는가? 하면
모세가 하나님의 율법을 자신들에게 전달해 줬다라고 생각을 해요.
문서잖아요. 율법. 그 문서를, 돌판을 전달해 줬으니까 그 돌판을 어떻게 보느냐? 하면
이 돌판에 새겨진 율법을 지켜야 하거든요. 누가 지켜야 돼요?

여러분 같으면 그 말씀을 어떻게 들어요? 철이 있는 인간이라면....
이렇습니다. 갓난 아이가 있는데 오늘 언이가 안 왔잖아요.
언이한테 엄마가, 아빠가 ‘너 우유 먹어.’ 이렇게 말하면
언이가 갑자기 확 일어나서 부엌으로 가서 의자 놓고 올라가서
뜨거운 물 다 피해가지고 뜨거운 걸 피할 수가 없잖아요.
다 피해가지고 자기가 마신다라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뭘로 보는가? 하면 여호와를 우상으로 보는 거예요.
우상은 인간이 만들어서, 인간의 자기 모습의 투영이라고 어떤 철학자가 얘기를 했잖아요.
그건 자기가 말한 게 아니라 성경에 나와 있어요.
하나님은 그런 분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 하나님이 말씀을 하시면 내가 그 말씀을 듣고 지킬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우상은 어떻습니까? 내가 만들었으니까 내가 다 할 수 있는 요소를 제공하면 되잖아요.
내가 만들었으니까. 내가 할 수 없는 걸 이 우상에게 드리지는 않아요.
불가능성도 가능성을 매개로 하여서 불가능성을 유발시키는,
그러한 사고 방식을 갖고 있다라는 겁니다.

모든 것이 나로부터 출발을 하거든요.
그러니 이 율법을 받았을 때 율법을 주신 분이 불붙는 산에서 주신 여호와 하나님이라면
율법은 어떤 율법이에요? 불이 타는 율법이거든요.
그 율법이 복음으로 바뀌거든요.
복음이 불타는 복음입니다.

근데 복음을 뭘로 만들어버렸어요?
불타는 복음이 아니라 지식으로 만들어서 앎으로 바꿔버리고,
믿는다는 것으로 끌고 와버렸죠.
알아야 믿을 거 아닙니까?
‘믿어야 알 수 있지 않느냐? 알아야 믿지 않느냐?’

성경은 이렇게 되든, 저렇게 되든,
진짜 성도라면 믿어서 알았든, 알아서 믿었든, 둘 다 뭐예요? 엉터리.
그 우상이기 때문에 율법을 그렇게 보는 거예요.

아까 언이 이야기했지만 엄마 아빠가 ‘먹어라’하면 애가 알아서 먹습니까?
‘먹어 먹어 우유 먹어’ 우유 준비하기도 전에 먹어라 그러잖아요.
‘그래 우유 먹자 먹어’

이 선악과를 먹은 자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자기 쪽에서 해석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상인 겁니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시내산에서 불 가운데 모세를 통하여 돌판에 율법을 주신
그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세트 하나가 우상 하나님이 돼요.
왜냐하면 내가 뭐예요? 내가 엉터리기 때문에.
그 사고방식을 예수님 당시에 남은 자들이 포기를 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보면 절에 5절에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이건 우리 것이 아니죠. 주님이 하실 일을 또 얘기를 하고 그다음 6절에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여기에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안다는 거예요.
그래서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 일은 누가 합니까? 주님이 하신 일이죠.
우리가 알고 있는 거예요.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않는 것을.

여러분도 다 알고 있죠. 우리가 알잖아요.
그러면 여러분 죄에게 종 노릇 합니까? 안 합니까? 안 하죠.
한다하면 곤란합니다. 안 하기 때문에 하는 거예요.

로마서 7장으로 가면 사도 바울이 그 고백을 해요.
다 알아요. 아는 게 무용지물입니다.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하리로다”
또 했어요. 그래서? 그다음에 또 어디로 갑니까?
그러면 이 ‘곤고한 사람이라. 상한 심령으로 살아가야지.’
그게 돼요? 인간이.

말씀이 살아 있는데,
인간들은 “말씀은 살아있다”라고 하니까 살아있는 말씀을 또 어떻게 해석합니까?
히브리서에 나오는 4장의 말씀. 살아있다라고 하니까 자기가 살려내려고 해요. 자기가.
큐티가 그거잖아요.

제가 볼 때는 말씀 자체를 살려내는 게 아니라 말씀 자체가 우상화 돼 버렸잖아요.
자기 우상화 만드는 거잖아요. 자기 신격화 만드는 거예요.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라고 하면
‘말씀 자체가 살아있다’라는 거거든요. 사문화된 게 아니라.
이 말씀 구절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말씀이 되면
이 말씀 자체가 누구에 대해서 증거했습니까?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했잖아요.
말씀이 육신이 되셨잖아요. 육신이 되신 분이 십자가를 지셨잖아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면 이 말씀 하나하나가 십자가의 피 공로를 드러내기 위한 말씀이 되어지고
그러면 이 말씀 앞에 모든 성도는, 성령 받은 자들은 죄인으로 드러나는 거예요.

그런데 선악과를 먹은 자들은 선악, 이것을 포기하지 않잖아요.
안다는 걸 포기하지 않고 믿는다는 걸 포기하지 않거든요.
‘그러면 사도바울이 그런 걸 다 삭제해버리고 얘기하면 되지 않느냐?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그렇지 않아요. 안다는 게, 믿는다는 것이 없으면 죄가 안 나옵니다.
좀 달리 표현하면 육이 없으면요. 십자가의 증인이 안 돼요.

이 정신병자들이 육체의 소욕을 하지 않으려고 별짓을 다 하잖아요.
별짓을 하면 벌써 떨어져 죽어야 돼요. 자살해야 돼요.
육체의 소욕을 이렇게 끄집어내지 않으려면.
불가능합니다. 그건.

‘고집멸도’ 이런 소리를 하잖아요. 그 언어가 내뱉는 순간 고집멸도를 하고 싶은 거예요.
도에 이르고 싶은 겁니다. 도에.
그 욕망을 어떻게 인간이 포기를 합니까?
왜 머리 깎고 절간으로 들어갑니까? 그것보다 큰 탐심이 없어요.
그러면 그것만 큰 탐심이냐? 예수 믿고 구원 얻는 것도 똑같은 짓거리거든요.

그러면 교회와 절간의 차이가 뭡니까?
진짜 교회가 교회라면
예수님 믿고 구원 얻으려고 오는 그들을 향해서 십자가 복음이 선포되어야 되는 겁니다.

또 선악을 추구하는 인간들은요 ‘교회도 절간하고 똑같으니까 가지 말자’ 그러는데
물론 안 가면 어디 갈 거예요? 한번 한번 생각해 봅시다. 어디 갈 거예요?
사람 모이면 어디로 가는가? 하면요 자기하고 친하고 돈 되는 사람하고만 모여요.
그리고 설교는 어디서 듣는가? 하면 유튜브만 듣죠.

그런 사람에게 얘기하면 뭐라고 하는가? 하면 ‘나 다 안다’라는 거예요.
그 성경은 아는 게 필요 없거든요.
반드시 이 육체 가운데 살게 하는 거예요. 우리를. 죽을 육체 가운데.
오늘 본문에도 나오지만, 죽을 육체 가운데 우리를 살게 하는 겁니다.
그 죽을 육체가 없으면 십자가의 증인이 되지 않고 나의 증인이 돼요.

그리고 계속 봅시다. 8절 보면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믿는다는 이야기가 나왔죠.
이미 십자가 사건은 오늘날로 말하면 2천 년 전에 완성된 사건이거든요.
그럼 성도에게는 창세기 전에 완성된 사건이에요.
그러면 이미 죽었잖아요.
죽었으니까 그걸 우리가 알고 있으면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맞죠? 믿고 있잖아요.
여러분 안 믿습니까? 살 줄로 믿잖아요.

그 믿는 모습이, 아는 모습이 어떻게 나타나느냐는 거예요.
안다. 믿는다는 내가 옳다는 건데
이 앎과 믿는다는 것이 죽을 육체 가운데 들어오게 되면 십자가 사건이 작동을 합니다.

작동이라는 것은 외부에서 작동을 하죠.
외부라 하면 또 오해하니까 성령을 우리 가운데 주셨으니까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는 몸으로 우리를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 만들어내는 방식이 뭔가 하면 외부에서 와요.
이게 참 독특해요. 요한일서에 보면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라고 하거든요.
그러면 로마에 있는 성도들은 이미 성령을 받았잖아요.
그러면 왜 이 편지를 받아야 됩니까? 왜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합니까? 성경에서.
이미 기름 부음이 거하는데. 배울 필요도 없는데.

인간들은 그런 얘기를 하면 자기 편한 대로 말씀을 받아들여요.
‘기름 부음이 거하시니까 누구든지 나한테 가르칠 필요가 없어.’
기름 부음이 거하기 때문에 누구든지 나를 다 가르치게 돼 있어요. 이거 참 진짜 기쁜 소식인데.
복음을 아는 인간이든, 복음을 모르는 인간이든, 누구로부터 무엇이 들어오더라도,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 겁니다. 드라마를 보더라도, 유행가를 듣더라도, 가스펠송을 듣더라도.

여러분 찬송가 부를 때마다 의문이 안 듭니까?
‘왜 자꾸 이런 찬송가를 불러댑니까? 복음을 아는 목사님이’
그 구조 속에 빠져나갈 길이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도 어디입니까? 저기 서권태 목사 그쪽은 찬송가를 시편으로 다 만들었죠. 맞아요?
그런 교회도 있거든요. 아예.

그러면 그들이 뭐라고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요.
‘그래 시편으로 찬송가를 불렀다고? 그러면 너희들이 뭘 증거하고 있니?’ 물어봅시다.
그런 교회에서 십자가만 증거합니까? 옳은 말씀을 자꾸 가르치는 거예요.
‘우리는 진짜 말씀대로 찬양을 드리고 찬양을 고백하고 말씀대로 배운다.’
그래서? 그게 바리새인과 서기관이잖아요.

“누구든지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하면
누구의 가르침을 받아서 너희들이 진리를 알고 진리의 깊은 그 은혜,
십자가의 사랑의 깊이 속으로 들어간다는 말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가르쳐서 배워서.
왜냐하면 주께서 친히 가르치기 때문에.

근데 주께서 친히 가르치는 방식이 뭔가 하면
사람들과 만나게 하고, 가르치고, 설교를 듣게 하고, 배우는 그 방식이에요.
또 이렇게 이야기하면 불안하잖아요. 요걸 이용해서 또 가르쳐서 자기 제자 만들려고...
벌써 봐요. 자기 제자 만들려고 하잖아요.

똑같이 흉내 낼 수밖에 없어요.
뭔가 ‘복음을 전하니까 새로운 것이 있을 것이라. 새로운 모임이 있을 것이라’
우리가 새로운 게 뭐가 있어요? 그죠? 돈 없으니까 매일 빌려서 모이고
아니 모이니까 오후 예배가 있으니까 도시락 사 오고. 여기는 밥도 못 하잖아요. 이 지하에..
하여튼 주님이 일을 희한하게 하잖아요. 그죠?
그럼 예를 들어 저녁까지 모인다 하면 또 도시락 사 오고, 밥 사 먹고...
그러면 뭐가 필요하죠? 돈이 있어야 되잖아요. 김밥 주문하잖아요.
그러면 김밥 오늘 배달시켰는데 봉사하는 분이 못 온다면 어떻게 돼요?
그러면 배달해야 되고, 그러면 또 다른 사람이 해야 되고. 다른 게 뭐가 있어요?
이거는 세상 모임하고 똑같아요.

제가 여러분하고 처음 만났을 때 그런 말씀드렸잖아요. ‘교회에 대한 꿈을 버려라’고.
망상해요. 망상. ‘교회는 이러해야 된다.’
교회의 모양은 액체입니다. 구조는 액체예요.
어떤 분이 왔다가 안 오시지만 ‘왜 사도 신경을 고백하지 않느냐? 그거 이단이지 않느냐?’
‘합시다.’
또 누가 ‘그거 왜 합니까?’ 하면 그럼 ‘하지 맙시다.’

그런데 사람들의 인식 구조는 그걸 해야 교회라는 거예요. 왜?
기존 교회가 사도 신경을 고백 안 하는 교회는 이단이라 하니까.
난 처음 알았어요. 그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느니라’ 그 고백 외에는 다 이단이에요.
그러면 그 고백하는 자도 이단인데요. 벌써.
그게 두려워서 쫄아가지고 그걸 해야 되고.

또 ‘주기도문 왜 안 하느냐?’
죄송합니다마는 제가 지금 그분을 욕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거예요. ‘교회는 이러해야 되고......’
‘축도는 왜 안 하느냐?’
그래서 했어요. 또. 하니까 또 ‘복음 전하는 목사가 축도는 왜 그걸 하느냐?’고.
‘진짜 복음을 안다면 축도고 뭐고 집어치워야지.’
그럼 어떻게 할까요? 그럼 기도는 왜 해요?

아니 남들이 입는 옷을 다 입고 겨울이 되면 파카를 다 입잖아요.
저같이 유행을 선도하는 사람은 아무거나 입지만. 옛날에는 10년마다 유행이 돌아왔잖아요.
요즘은 한 2~3년마다 돌아오거든요. 그러니까 옷 버리지 마세요.
금방 금방 돌아옵니다. 왜냐하면 정신병자들만 모였거든요.
빨리 버리고 빨리 교체해야 돼요.

목사도 마찬가지죠. 설교도 한 10번 들으면 물립니다. 물려가지고 빨리 바꿔야 돼요.
여러분 그 세계 속에 우리가 살고 있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우리가 워낙 똑똑해졌거든요.
이전에는 우리가 무식했어요. 성경에 대해서.
그런데 이 정도 복음을 듣는 우리들은 너무 똑똑하기 때문에 조금 들으면 벌써 물려요.
‘니 하는 얘기 다 알아.’
바꿔야 돼. 다 바꿔. 다 바꿔. 이정현이 다시 와야 돼. 이정현 맞나요?
제가 중국 처음 갔을 때 그 노래가 완전히 전 대륙을 휩쓸었거든요. ‘바꿔’라는 노래.
저작권이 없으니까 그 당시에.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계속해서 이 육체 가운데 사는 걸 분명히 주님이 말씀을 통해서 말씀하셨거든요.
죽을 육체 가운데 이 생명이 나오게 돼 있다고요.
그런데 우리들은 계속해서 다른 걸 상상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선악과를 먹어서 하나님과 같이 되었거든요.
그래서 교회라는 것도 거룩한 교회를 꿈꾸거든요.

제가 중국에서 나오기 전에 우리 구 장로님이 여러분들하고 전화를 했잖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왜 교회 하려고 하느냐?’
그럼 그전에 ‘탕자교회’는 교회 아닙니까? 등록 다 해가지고 세금 혜택 받고, 전기세 혜택 받고,
전기세 혜택 받고 싶으면 교회로 만드세요. 전기세 굉장히 저렴합니다.
여름에 24시간 써도 한 5만 원도 안 나올 겁니다. 혹시 필요하신 분 있나요? 우리 교회 등록하면...

그거 안 하면 교회 안 됩니까? 교회를 꼭 등록해야 돼요?
자꾸 뭔가를 이상적인 교회를 꿈꾸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러면 안 해야 되지 않나요?’
안 하든 하든 뭐? ‘우리 교회는 그러지 않습니다.’

돈만 있어 보세요. 그렇게 안 하려고 해도 그렇게 돼요.
오히려 요즘은 교인들 많이 모이고 그런 장소 그것도 또 돈 내야 되잖아요.
학교에 모이든 어디 모이든.
자꾸 사람들이 이 번거로운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해요. 예수님을 믿으면서. 그렇지 않나요?
‘번거로운 일이 없었으면.’

오죽하면 수도원에 들어가겠습니까?
요즘 수도원은 어디입니까? 자기 집구석이에요.
집구석에 들어가서 도를 닦는 방식은 유튜브를, 선생을 계속 물갈이하죠.
수만 명, 수십만 명의 설교가 있으니까.
이제 ai가 뭐까지 나왔는가? 하면 번역해주는 거. 글자로 번역하는 정도가 아니고 좀 있으면요
동시통역이 나옵니다. 이제 내년에 삼성이 동시통역 전화기가 나온다 하잖아요.
그러면 그걸 어떻게 응용할 수 있는가? 하면
영어로 설교하는 그 유튜브에 전화기를 틀어놓고...... 얼마나 창의적입니까?
바로 영어가 통역이 돼요. 처음에는 한 80~90% 가겠죠. 조금만 있으면 100% 가잖아요.
그걸 계속 돌리는 겁니다. 그러면 도 닦는 거예요.

도 닦는 방식이 뭔가? 하면 ‘나는 안다. 나는 믿는다.’
그런 자에게 뭐라고 말씀하는가? 하면
“너희 죽을 몸의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들리지 말고 의의 병기로 드리라” 이 얘기 해요.
병기는 뭘 해요? 싸우죠.
싸움은 누구와의 싸움입니까? 마귀와의 싸움이죠.
마귀와의 싸움이니까 사람들이 정신병 걸려요.
마귀와 하니까 ‘이건 악마적인 생각이야. 악마적인 생각하면 안 돼.’ 백날 해도 못 벗어나고요.
더 큰 마귀는 어디에 있는가? 하면
우리가 생각할 때는 내부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물론 내부에 있는데.
외부에서 다가와버리면 악마가 확 살아나요. ‘이거 어디서 등장했지?’

9절을 보면 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우리가 알아요. 맞죠?
주님이 죽으시고, 한 번에 죽으시고, 단번에 영단번 제사를 드리시고,
살아나셨다는 것은 다시는 죽지 않는 죽음이라는 거죠. 그걸 우리 알죠? 혹시 모르는 분 없잖아요.
아는 거예요.

지금 이 로마서를 듣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
그리고 이 서신을 회람하는, 돌려서 읽는 모든 성도들이 이걸 복음을 들을 때
기본이잖아요. 기본. 기본 알죠? 기본 메뉴. 이 ‘도의 초보’잖아요. 도의 초보. 흔히 말하는.
이 기본 메뉴를 누구나가 다 알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 얘기를 왜 하느냐? 얘기예요.
‘우리가 앎이니라. 우리가 앎이니라. 우리가 믿노니. 우리가 믿노니’
이것은 공통분모 속에 다 들어갑니다.

그런데 어디에서 이제 쨍그랑 깨져버리느냐? 이 얘기예요.
알고 믿는 거는 누구나가 다 동의를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아까 제가 얘기했잖아요. 구원파나 신천지나 그들한테 이런 얘기하면요
그들은 연구자들이 따로 있잖아요. 왜냐하면 그 단체를 유지하려면 연구를 해야 되거든요.
앞으로는 그 연구자들 하면 또 돈 들여야 되니까 그 돈을 갖고 AI 비싼 기계를 하나 사면 돼요.

그럼 뭐라고 하는가? 하면 ‘그거는 다 알아’ 이 얘기 해요.
이들은 뭘 모르느냐? 하면
그 안다는 것이 십자가 사건을 유발했다는 사실,
믿는다는 것이 십자가 사건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을 못하는 겁니다.

오늘날 간단하잖아요.
개혁주의 교회가 제대로 된 교리를 만들어서 가르쳐서 그걸 믿고,
믿으려면 알아야 되잖아요. 가르치고 믿으면 구원 얻었다라고 가르치거든요.
삼위일체도 마찬가지예요.
‘성부 성자 성령이 한 분입니다.’ 하나는 맞는데,
한 분이라고 가르치잖아요. 그럼 믿잖아요. 한 분인 걸 알고 믿잖아요. 그러면 구원 얻었다.
그게 구원입니까?

십자가 사건이 어디에서 일어났는지를 기억을 해야 돼요.
예루살렘에서 일어났어요. 예루살렘은 말씀의 중심인 곳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증인들이 복음을 전하면서
가는 곳마다 미움과 핍박을 받을 때 그곳을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고 얘기해요.
‘못 박히신 곳’이라 할 때는
물론 해골이라 이래 나오지만 그 지점이 어디예요? 예루살렘이에요. 예루살렘.

예루살렘의 특징은 뭡니까? 예루살렘의 특징은?
‘말씀 중심, 여호와 중심, 성전 중심’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신천지들이 똑같이 이렇게 이야기를 하거든요. 그렇게 비난을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여기가 진짜 진리의 눈이 열리게 해주는 곳이다.’ 이게 뭐예요?

지금 요한계시록의 특징이 뭔가? 하면 흩어버렸잖아요. 흩어버렸는데
흩어버린 것을 응집시키기 시작하면 그 응집된 그 모임이 뭐가 되는가? 하면 십자가의 원수가 돼요.
그들은 그걸 모르는 겁니다.

그런데 왜 그게 먹히는가? 하면 선악 구조였거든요.
기존 한국교회가 처음에 들어올 때 기복 신앙으로 들어왔잖아요.
‘예수 믿으면 잘 먹고 잘 산다.’
그러다가 미국 유학파들이 들어와서 말씀 중심의 설교를 하기 시작했잖아요. 강해 중심의.
강해 중심으로 설교를 하면서 어떻게 바뀌어버렸는가? 하면
‘제대로 알아야 된다. 제대로 믿어야 된다.’라고 바뀌어버렸어요.
그게 원래 개혁주의거든요. ‘제대로 알고 제대로 믿어야 된다.’
그걸 그대로 누가 따왔는가? 하면 신천지나 이단들이 다 따온 거예요.
‘제대로 믿어야 된다’ ‘제대로’가 뭔지를 이미 자기들이 답을 갖고 있어요.

아까 이스라엘 이야기했잖아요. 구약 이스라엘 여호와 하나님이 아무리 사건을 통해서
자기를 계시하셔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있어요, 없어요?
우리는 알 수 있다라고 생각하잖아요. 자기를 계시하셨으니까.
알 수 있는 게 아니라 계시하면 할수록 그들은 여호와를 우상화시킵니다.
답이 정해져 있거든요. 내가. 내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무리 불과 구름기둥,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그들을 이끌어주셔도
그들은 우상화가 더욱더 견고해지고 흔들리지 않는 우상을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진짜 말씀을 주신 시내산에서 불 가운데 말씀을 주신 그 하나님이 오시니까
죽여버리잖아요.
이 정도 되면 이 고집이 어느 정도입니까? 그게 우리 인간들의 모습이에요.

11절을 보면 또 좀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니라”
여기라는 거죠. 그죠?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겨라”
여기라고 했잖아요. 그럼 여기면 되잖아요. 이거 문제 없잖아요.
알고, 믿는 것, 여기는 것, 문제 있습니까? 없습니까?
모두가 어디에 관련돼 있어요? 생각과 관련돼 있죠. 생각과.
이 생각은 누구로부터 나옵니까? 나로부터 나오죠. 나로부터 나오는데
‘그래. 알고 있습니다. 믿습니다. 여기겠습니다.’

그런데 앞서서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할 수 있겠느냐”라고 실제로 던져버려요. 이 말씀을.
던져버리면 이게 혼돈이 되죠. 믿는다는 게 뭐냐?
믿으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말씀대로 믿어야 되잖아요. 액면가대로.
여기에서 자기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성경은 11절에서 잘라놨는데 12절을 봐야 돼요.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의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이 말씀을 들으면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이 ‘죽을 몸’은 누구입니까?
성도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표현을 독특하게 합니다.
죽을 몸이에요. 죽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이게 독특하죠.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 오히려 에녹과 같이, 엘리야 같은 사람이 더 많이 등장해야 안 됩니까?
그런데 싹슬이 다 죽여버립니다. 누가 되었든지.

우리 같으면 ‘베드로 정도면 죽지 않고 올려보내면 더 잘 믿지 않겠냐?’라는 거예요.
그게 아닙니다. 그때는 그런 방식으로 주께서 그 세상의 악함을 증거하셨다면
에녹이 주님과 동행하다가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은 이 세상은 끝났다는 얘기예요.
이것은 예수님을 보여주잖아요. 예수님이 땅에서 제거당해서 올라가 버렸잖아요. 아버지께로.
갔다는 것은 이 세상은 끝났다는 얘기입니다. 그걸 그림자로 보여주는 거예요.

우리를 어떤 몸으로 보는가? 하면 이 몸을, 죽을 몸이에요. 죽을 몸.
죽을 몸이라면 죽으면 되잖아요.
그런데 이 죽으면 되는데 이 죽을 몸이 그렇지 않아요. 살려고 하죠.
살려고 하는 방식이 뭔가? 하면
‘믿습니다. 알겠습니다. 여기겠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나와요.

그래서 이렇게 얘기하죠.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와~ 이 말씀도 정말 어려운 게 뭔가 하면 죄가 왕노릇하잖아요.
그러면 왕이라면 왕 마음대로 할 것 아닙니까. 전제 군주예요. 완전히.
이것은 어느 한 분야도, 어느 한 부분도, 이게 뒤에 보면 지체가 나오거든요.
이 몸의 손가락 하나하나도 왕의 지시를 따르게 돼 있어요.
그러면 “죄가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이렇게 말씀을 하시면, 그 왕과 싸우려면 이것도 말이 안 되잖아요.

예수님이 우리의 왕이 돼버리면 이런 말이 필요합니까? 필요하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왕이 따로 있고, 왕이 따로 있잖아요. 예수님이 왕이시고 마귀가 왕이잖아요.
그럼 마귀가 왕노릇하다가 예수님이 십자가로 승리했으니까 이 몸은 누가 왕 노릇합니까?
예수님이 왕 노릇하잖아요.
예수님이 왕 노릇 하면 이 마귀가, 죄가 우리 죽을 육체에 왕 노릇 할 수 있어요, 없어요? 없죠.
왕이 공존을 못하거든요.

그런데 주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은 우리의 방식과 전혀 다르게 일을 합니다.
죄가 죽을 육체에 왕 노릇 해야만 살아있는 말씀에 의해서 찔러 쪼개버려요.
그게 주님이 왕 노릇하는 방식이에요.

여기에 보면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하거든요.
몸의 사욕이 뭡니까? 몸의 욕망이거든요.
여러분 몸의 욕망을 우리가 통제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다라고 하는 사람 일로 한번 나와보세요. 그리고 저기 칼을 한번 갖고 와보세요.
한번 찔러볼까요? 제가 극단적 표현을 썼지만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이 몸의 욕망이 뭔가? 하면 자기도 몰라요.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선악을 구분해서 자기가 원하는 편에 서서 선이 되어서
거기에 대해서 분노를 하고 화를 내고 짜증을 내게 돼 있어요.
“몸의 사욕을 쫓지 말고” 하는데
주님이 우리의 왕이니까 분명히 ‘죄가 죽을 육체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라’ 했잖아요.
그러면 그렇게 삽니까? 살아요. 사는데 이 말씀이라는 게 중첩의 구조예요.
왜냐하면 ‘이게 아니다’라고 해버리면 말씀 자체가 거짓말이 돼버립니다.
그래서 설교가 어려운 거예요.

육에 속한 자들이 해석하는 법이 나오고
그다음 영에 속한 자들이 해석하는 법이 충돌이 일어나요.
그 육에 속한 자들은 끝까지 육으로 올라가요.
특징이 뭔가? 하면 이렇게 이야기하면 뭐라고 하는가? 하면
‘믿고 아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어떻게?) 죄가 왕노릇하지 않게 육의 사욕을, 몸의 사욕을 쫓지 말아야 됩니다’라고 이야기해요. 그러면서 끌고 오는 게 성화론이에요.
이 사기꾼들입니다. 사기꾼들.

‘몸의 사욕’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데요.
철학자들이 그런 얘기를 하잖아요. ‘타인의 욕망’이라고.
내가 내가 아닌 거예요. 그 철학자들의 이야기가 아니라요.
구약 이스라엘을 보면 하나님과 같이 된 자들이 무엇을 욕망하는가? 하면
‘하나님처럼’ 되기를 욕망을 해요.
타인의 끝자락은 누군가? 하면요 여호와 하나님이에요.

그리고 오늘날 시대는 그 타인의 끝자락은 예수입니다.
예수님처럼 살고 싶은 거예요. 그게 욕망이에요.
그 몸의 욕망은 무얼 추구하느냐? 라는 거예요. 무얼 추구합니까? 몸의 욕망은?
방금 이야기했듯이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거예요.

마태복음 16장을 한번 보겠습니다.(13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렇게 물으신 이후에
제자들이 사람들의 생각을 전달한 이후에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이 말씀을 들었을 때 베드로는 어떻게 생각했는가? 하면
자기의 이 고백이 하나님이 나한테 알려줘서 했다라고 생각해요.
예수님의 말씀과 전혀 다른 해석을 하는 겁니다.

지금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 고백이
자기 부인이 안 됐어요. 자기 긍정을 위한 고백이에요.
심지어 예수님이 하신 말씀조차도 자기를 긍정하는 말씀이라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를 베드로라 하여서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고 천국 열쇠를 네게 주겠다.”
했을 때 베드로는 어깨가 계속 더 올라가는 겁니다.
‘야, 드디어 예수님을 따라다닌 보람이 있네’ 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그러한 생각, 그러한 사욕이 어디로부터 출발합니까?
이 죽을 육체로부터 나오거든요.
마귀가 지배하고 있잖아요. 마귀의 종이니까 몸 자체가.

그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다라는 소식을 전합니다.
이 베드로의 고백과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고 천국 열쇠를 네게 준다라는 이 말씀 이후에
비로소 예수님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쳤어요.
‘미리 말씀하시지.’
미리 말하면 어떤 문제가 되느냐? 하면
미리 말을 하게 되면 십자가의 의미가 희석이 돼요. 십자가의 의미가.

악마의 본성, 그 몸의 사욕의 마지막 끝자리가 어딘가? 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서 그 말씀대로 믿는 거예요.
말씀을 알았죠? 방금. 이야기를 했으니까. 그걸 믿어요. 그거 믿고 그다음 뭘 노립니까?
무얼 노리느냐? 가 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드러나요.

예수님께서 고난받고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을 말씀하시니까
오늘날 교인 같으면 ‘왜 부활을 안 믿어?’ 이야기하는 거예요.
‘왜 부활을 안 믿어?’라고 하는, 부활을 믿어야 되고, 부활 신앙을 주장하는 자들이
이 베드로와 똑같은 사고 방식입니다.
부활 신앙을 주장하는 자들이 뭘 추구해요?
축복, 강함, 권세, 돈, 가정의 화목, 자식이 잘되는 것... 그걸 추구하거든요.

이에 예수님께서 뭐라고 합니까?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않는다라고 하니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여기에서 ‘몸의 사욕’이 그 정체를 드러냅니다.
이 몸의 사욕이 베드로를 통해서 정체를 드러내는데
이 마태복음 4장에 보면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
“니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내게 절하면 세상 권세와 영광을 네게 주겠다” 하거든요.
이 베드로가 지금 그 세 번째 시험을 하는 겁니다. 멱살을 잡고.
십자가 지면 안 된다는 거예요.

분명히 거룩한 산에서 (그다음 나오죠. 거룩한 산 나오는데 “저의 말을 들어라” 이제 나오는데)
예수님이 이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우상으로 섬겼듯이
‘예수 당신은 내 말을 듣기 위한 그리스도’라는 거예요. 내 말을 듣기 위한.
이게 바로 몸의 사욕이에요. 몸의 사욕.

그러면 몸의 사욕을 쫓지 말라고 했으니까 이제 한 수 배웠잖아요. 베드로를 통해서.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다음에 이제 나오는 게 뭐예요?
‘주님 십자가 지세요.’

이 십자가 지는 게 문제가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부인하게 하는 십자가라는 거예요.
로마서에서는 함께 죽이는 십자가입니다. 강 건너 불구경을 못 하게 돼 있어요. 주님의 십자가는.

몸의 사욕을 쫓지 말고, 그다음 나오는 말씀이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이 부정하는 내용을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이유가 뭐냐? 라고 하면
이 부정하는 요소가 몸에서 계속해서 흘러나온다라는 겁니다.
그게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말씀이에요.
지식은 교만케 한다는 게 그런 의미예요.

‘나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이제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삽니다.’
다 알아요. 다 아는 게 왜 교만케 되는가? 하면
아니까 뭐예요? ‘나를 건드리지 마라’ 거든요.

그런데 이 아는 육체 덩어리를 어디로 집어넣습니까?
“죄가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라”는 말씀 속으로 집어넣어버려요.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라”는 말씀 속으로 집어넣어버립니다.
집어넣게 되면 우리는 반드시 죄가 왕 노릇하는 몸으로 드러나야 된다는 거예요.
이것도 또 지식으로 들어가면 ‘그래 맞아 우리는 죄가 왕 노릇하는 몸이 맞지.’

말씀 세계로 들어가야 예수님의 말씀 이 로마서의 말씀대로 응해집니다.
“순종치 말고” 이렇게 말씀을 성도들에게 말씀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돼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하리라’고 고백을 하게 되는 겁니다.
지식을 쫓는 자들은 못 따라와요.

우리 잠언서 26장 7절입니까? 오늘 거기 읽었습니까? 26장 7절이죠.
미련한 자, 그 어리석은 자들의 그 어리석음의 지식이 어디까지 왔느냐 하면
생명의 말씀까지 온 거예요. 유대인들이 율법 중심이었잖아요.
마찬가지입니다.

철저하게 주님이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할 것이다”
성령을 우리 가운데 부어주신 목적이 거기 있는 거예요.
‘너는 죽어도 안 돼’라는 겁니다.

그 안 되는 죽을 육체를 갖고
십자가 사건의 완료성의 현장으로 죽을 때까지 만드시는 거예요.
그러면 또 손 들고 ‘나는 매일 순간순간 그렇습니다.’ 그건 아는 거고, 그건 믿는 거고, 그건 맞아요.
그 아는 것과 믿는 것이 언제 무너집니까?
실제로 그 사건이 일어날 때 확 무너지는 거예요.

그래서 그 뒷부분 봅시다.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렇게 나오는데
너희 지체가 몸덩어리죠. 몸덩어리. 이 몸 전체를 이야기하는 거고
이 뭐 손가락 이 전체 몸이죠. 이거 하니까 마태복음 생각나지 않습니까?
“몸 하나가 실족하게 하면 빼버리고 발 하나가 실족하면 잘라버리고” 지금 그 얘기를 하고 있어요.
지금 말씀이. 다 연관이 돼 있기 때문에.

왜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의의 병기로 드리라” 이렇게 말씀을 합니까?
부정적인 얘기를 안 하는 게 우리한테 좋잖아요.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면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빼고,
“그러니 여러분들은 의의 병기로 여러분 몸을 드리세요.” 이렇게 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근데 의의 병기로 드리려면 반드시 불의의 병기가 나와야 돼요.

선악 구조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이 본문을 동시성으로 못 봐요.
뭘로 보는가? 하면
‘이건 드리면 안 되고 요렇게 드리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의의 병기로 드리는 것이야.’
근데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예가 나왔잖아요.
아브라함과 다윗의 예가 나와도 못 알아들어요. 무슨 말인지.
성화론을 주장하는 그 인간들은 정말 지옥 갑니다.
제 이야기가 아니고 말씀 자체가 그렇게 돼 있거든요.

다윗이 그렇게 해서 어떻게 됐습니까?
나중에 늙으막에 인구조사를 하잖아요.
악마의 꾀임을 받아서 거기에 넘어가잖아요. 그게 무슨 성화입니까? 끝장판을 보는 겁니다. 끝장을.
‘아유 내가 죄 중에 태어났으니까 죄밖에 지을 수 없죠.’ 이 얘기도 아니고.
안 지으려고 애를 썼는데 악마의 종이 되는 겁니다.
그래야만 다윗은 그림자로서 ‘나는 다윗 왕이 아니오’라는 고백을 통하여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분만이 유일한 왕입니다. 주입니다.’ 라는 것을 고백하게 되는 거예요.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예요.
왜 아브라함은 끝판에 다른 아내를 취하여서 자식 놓고 잘 먹고 잘 삽니까?
별 것 없어야 돼요. 아브라함은. 그림자이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기대를 합니까?
‘이삭까지 낳고 번제단에 바쳤으면 제대로 된, 정신을 바짝 차리고, 다시는 (누구처럼?)
다윗처럼, 여인을 가까이하지 않는 그 모습을 보이면서 주님만 사모하고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거예요.

주님이 죄인을 부르러 왔는데 자기는 의인이 돼버린 겁니다.
이게 오늘날 교회예요.
교리를 가리키는 게 목적이 그거예요.
‘알고 믿으면 당신은 의인’이라는 겁니다.
말은 알아요. ‘난 죄인인데 의인이에요.’ 이게 그 말도 맞잖아요. 이중성을 갖고 있잖아요.
그럼 죄인이 의인이 되려면 그 사이에 십자가가 일어나야 되는데

십자가 사건이 이론입니까, 실제입니까?
제가 설교할 때마다 말씀드리잖아요.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셨어요.
만일에 그런 신앙이라면 예수님이 지식으로 전달해버리죠.
죽을 육체 가운데 십자가를 증거하는, 이 십자가의 능력을 뽐내겠다는 게 주님의 조치예요.
그래서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복음의 은혜의 진리를 아는 우리들도 반드시 죽어야 돼요.
죽고 썩어 문드러져서 냄새 풀풀 풍기면서 화장터에 가서 불에 너무 잘 타야 돼요.
‘예수님 믿으니까 주님이 부를 때 벌떡 일어나기 위해서 안 타야 돼.’ 그렇게 믿는 인간들도 있어요.
그래서 ‘나는 화장하지 말라’ 묻어달라는 거예요.
저하고 아주 가까운 분이 그랬어요. 부활 때 살아나야 되니까.

로마서 자체만 갖고 해석을 하면 해석이 하나도 안 돼요.
그래서 제가 베드로를 말씀드린 거예요.
베드로가 이렇게 십자가를 멱살 잡고 막는 이 모습은 어디에서 반복되는가? 하면
오순절 날 성령을 받았어요. 성령 충만을 받았어요. 그러면서 이제 복음을 전하러 가는데,
잘 전했는데, 갑자기 주의 천사가 나타나서 고넬료와 만나게 하는, 주선을 합니다.
그 하늘에서 보자기가 내려오는데 온갖 부정한 것들만 가득 내려와요.
저는 뭐 어떤 것도 다 먹을 수 있습니다. 중국 가서 이렇게 다닐 때 사람들이 신기하대요.
‘선교사님들은 골라 먹는데 목사님은 왜 아무거나 먹느냐?’
아무거나 먹으니까 배탈 나는 거예요. 골라 먹어야 되는데.

이 율법을 워낙, 성령 충만 받았으면 율법이 날아가야 되잖아요.
맞죠?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니까.
그런데 율법이 그 속에 그대로 남아 있어요.
우리 같으면 주님의 은혜를 받았으면 그것이 이 속에 없기를 간절히 바라잖아요.
사도바울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그게 안 된다니까요. 이 죽을 육체이기 때문에. 썩을 육체이기 때문에.
그걸 그대로 내버려 둬서 어떤 사태가 딱 일어나게 한 거예요. 하필.
그러니까 “나는 부정한 것은 안 먹겠습니다”라고 나오는 거예요.
그 사고가 어디까지 연결됩니까?
이방인들은 구원 못 얻는다는 얘기거든요.

근데 주님 쪽에서는 “내가 깨끗게 했다”라는 거예요.
내가 깨끗게 했다 하니까 사람들은 뭐라고 생각하는가? 하면
‘그래 거룩한 것, 부정한 것 구분하지 마.’ 자꾸 이렇게 생각을 해요.
성경을 보세요.
어떤 믿음 좋은 인간이 우상의 제물을 막 먹잖아요. 근데 사도바울이 뭐 합니까?
거꾸로 이야기하죠.
여러분이 믿음 좋으면 우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잖아요.
없으면 뭐라고 얘기해야 돼요? ‘그래 막 먹어라’고 얘기해야 되잖아요.

근데 “나는 형제가 만일에 실족케 된다면 영원히 고기를 안 먹겠다”라고 얘기해요.
이게 이게 뭐예요? 이게.
아마 오늘날 믿음 좋다는 사람들이 그걸 보면 조롱할 거예요. 맞죠?
지금 그런 말씀을 보면서 옛날에 우리 대학생 때 질문을 진짜 많이 하거든요. 그런 고민을 하고.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말씀을 자세히 보니까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는 현장은요
고기를 먹는 자에게도 일어나야 되고요. 안 먹는 자에게도 다 일어나야 돼요.
인간은 선악 구조밖에 없죠.
그러면 또 인간들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이렇게 나오거든요.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한쪽을 선택하게 만들어요. 선악 구조 속에서.
왜냐하면 자기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자기가 하나님이 됐다라는 거예요. 물론 그것도 선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지만요.

베드로도 마찬가지고 사도바울도 마찬가지고.
반드시 불의의 병기로 드린 자를 의의 병기로 드리는 모습으로 만들어냅니다.
그게 말씀이 살아있는 모습이에요. 그걸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님 사도바울을 통해서 말씀할 때 그렇게 말을 하지’
그렇게 말을 해도 알아들어요, 못 알아들어요?
여러분 우리가 지금 오후에 이사야를 보는데 귀를 닫히게 한다 했잖아요.
그러면 귀가 닫혔다는 걸 누구만 알아요?
아~ 성경을... 우리 똑똑하잖아요. 누구만 알아요? 성도만 알잖아요.

성도 아닌 자는 말씀을 볼 때 ‘나는 귀가 열렸다’라고 할 거예요.
닫혔으니까 계속해서 주님께서 지금도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주님의 기도로
우리를 십자가로 인도하시는 겁니다.
이것보다 신나는 게 어디 있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선악과를 먹은 이 죽을 육체에서 끝까지 불의의 병기로 사용하는 모습을 끄집어내셔서
의의 병기로, 십자가의 능력으로 만들어내셔서 십자가만 자랑케 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말씀을 믿고, 알고, 행하는 자가 아니라
주께서 친히 말씀의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십자가 지신 주님께서 다 이루시는 현장의 몸임을 감사하는 주의 백성에게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