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3-11-19 14:55
20231119 로마서 강해 40강 롬 6:14-18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45  
https://www.youtube.com/live/OcQx4TTgbDM?si=Mde-DUBgePdhhFkd

관리자 23-11-20 21:13
답변 삭제  
20231119 로마서 강해 40강 롬 6:14-18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다 함께 묵상 기도드리겠습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 고백하겠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 말씀, 잠언서 26장 8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잠26:8)
“미련한 자에게 영예를 주는 것은 돌을 물매에 매는 것과 같으니라”

기도하겠습니다.
미련한 저희들을 불러서 영광스럽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조롱거리밖에 되지 않는
그러한 죄인들을 주의 이름을 위하여 영광스럽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날마다 미련한 자로서 영광스러움을 덮어쓴 자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시편 78편 51절에서 64절 말씀을 교독하겠습니다.
[아삽의 마스길]
(시78:51~64)
“애굽에서 모든 장자 곧 함의 장막에 있는 그 기력의 시작을 치셨으나 자기 백성을 양 같이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에서 양떼 같이 지도하셨도다 저희를 안전히 인도하시니 저희는 두려움이 없었으나 저희 원수는 바다에 엄몰되었도다 저희를 그 성소의 지경 곧 그의 오른손이 취하신 산으로 인도하시고 또 열방을 저희 앞에서 쫓아 내시며 줄로 저희 기업을 분배하시고 이스라엘 지파로 그 장막에 거하게 하셨도다 그럴찌라도 저희가 지존하신 하나님을 시험하며 반항하여 그 증거를 지키지 아니하며 저희 열조 같이 배반하고 궤사를 행하여 속이는 활 같이 빗가서 자기 산당으로 그 노를 격동하며 저희 조각한 우상으로 그를 진노케 하였으매 하나님이 들으시고 분내어 이스라엘을 크게 미워하사 실로의 성막 곧 인간에 세우신 장막을 떠나시고 그 능력된 자를 포로에 붙이시며 자기 영광을 대적의 손에 붙이시고 그 백성을 또 칼에 붙이사 그의 기업에게 분내셨으니 저희 청년은 불에 살라지고 저희 처녀에게는 혼인 노래가 없으며 저희 제사장들은 칼에 엎드러지고 저희 과부들은 애곡하지 못하였도다”

이 시간 박연배 집사님 기도해 주시겠습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저희들에게 은혜를 베푸사 교회로 모이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저희들은 죄악 중에 태어나 본질상 죄의 종 노릇하면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런 저희들에게 오늘도 말씀을 통하여 성령이 역사하시사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로우심과 긍휼과 사랑을 찬양하는 자들이 되게 오늘도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아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하나님 말씀, 로마서 6장 14절에서 18절 말씀을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롬6:14~18)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아멘.

저도 지금 계속해서 로마서 강해를 하고 있지만 말씀이 너무 복잡해요.
아니 죄의 종이면 죄의 종이고 의의 종이면 의의 종이다.
그럼 너희들은 의의 종이지 않느냐? 방금 14절 말씀도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그 이유는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주관한다는 말은 통치한다는 말이거든요.
죄가 왕이 아니라고 했잖아요.
‘은혜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한다’라고 했으면 밀어붙이면 되잖아요.

“죄가 더 이상 너희를 통치하지 못하리니”
이 본문이 우리를 좀 곤란하게 합니다.
무엇이 곤란하냐? 하면 지금 말씀이라는 자체가 상대가 있어요. 상대가.
물론 그 상대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인데.
그건 다 알고 있잖아요. 물론 그것조차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 말씀을 읽는 자들이 이 말씀을 읽을 때 어떻게 읽느냐? 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해요.
왜냐하면 그 읽는 상대가 예수님이라면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셔서 이루신 일을 증거할 것이고
그 상대가 예수님이 아니라면 누구를 증거할까요? 나를 증거하는 거예요.

좀 쉽게 하면 성령 받은 사람은 말씀을 읽을 때 말씀을 읽고 말씀을 적용할 때
누구를 증거하게 되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요.
우리는 이걸로 만족 못하잖아요.
왜냐하면 예수 중심 교회도 있으니까.
예수 중심이라 해놓고 들어가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에요.
십자가를 완전히 삭제해버리죠.

방금 이 본문도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이 확정적이잖아요.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그다음 하는 말이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한다’라고 이야기를 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어법 자체가 이렇게 돼 있어요.
‘못하리니’, 그 ‘못하리니’ 말씀이 누구에게 적용이 되느냐? 라고 할 때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적용이 돼요.
이것은 미래 시제죠.

그런데 “이미 너희들은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라고 합니다.
어느 것을 선택하고 싶습니까?

제가 어제 뭐 벌써 주무실 준비가 돼 있어서 우리 성도님들은 안 주무시는데.
부탁을 받았어요. 그래서 한국 와서 결혼식에 처음 가봤거든요.
제가 부조한 게 아니고 부조 돈을 저한테 줘가지고 가서 밥 먹고 와 달래요.
그래서 가서 진수성찬을 조금만 먹고 왔어요. 근데 결혼식을 보는데 제가 처음 봤잖아요.
옛날에도 수 년 전에도 한번 보긴 봤는데 저거들끼리 결혼식을 해요.
아 손님들을 왜 불렀는지 모르겠어요.
자기들끼리 아내에게 뭘 하는 거 있잖아요 편지. 남편에게 뭐 하는 거... 주례도 없어요.

그걸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느냐? 라고 하면 여러분 그런 결혼식 많이 가봤잖아요.
‘이 결혼은 우리 결혼이지 네가 왜 끼어드느냐?’ 이 얘기거든요.
그러면 왜 불러요? 부조도 받지 말지. 저거 결혼식이면 자기들 가족끼리.
아~ 자기 부모님들이 또 부조한 거 다 회수를 해야 되니까.
요즘 세태예요. 끼어들지 말라는 거예요. 그 끼어들지 말라는 걸 극으로 달리면 혼자 살겠다는 거예요.
그 ‘나 혼자 산다’는 프로그램이 얼마나 인기가 많아요.
물론 jms와 연관돼 가지고 난리지만, 뉴스를 안 보시죠?

끼어들지 말라는 거예요. 깔끔하게 살고 싶다는 겁니다.
깔끔하게 사니까 깔끔하게 이혼도 쉽게 해요.
옛날에는 과거에는 많은 사람들이, 친지들이 다 와서 증인이 되잖아요.
증인이 되니까 그 눈치라도 보잖아요. 저 눈치 때문에 이혼도 못하잖아요.
지금은 눈치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또 한 가지는 어제 갔는데 뭐 한 10년 만에 처음 본 사람인데
저쪽 계열이 아니고 제 아내 계열이에요. 어제 결혼식이.
성주 쪽에 있는 농촌 도농 교회인데 한 교인들이 한 70~80명 된대요.
어떤 집사님이 그러니까 안수 집사님이 3년 전에 교회에 들어왔대요.
열심히 봉사하길래 장로로 세웠대요. 그런데 몇 달 전인가 몇 주 전인가 신천지였대요.
그런데 이미 교인들이 어른들만 10가정인가 한 20가정 정도가 벌써 포섭이 된 거예요.
그중에 한 10명 정도는 아예 대화가 안 되는 거예요.
뭐라고 하는가? 하면 ‘너희들은 이단이야 우리가 진리야’
그분이 이제 재정 담당이니까 이제 법적 소송을 한다 그러는데.

그런 일이 교회에 생기면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이 번거로운 일이거든요. 번거로운 일.
‘저 신천지가 없었다면 우리 교회는 잠잠하게...’
종교 생활이거든요. 사실은. 제가 대놓고 얘기는 못했어요. 시간이 짧아가지고.
담임 목사님이 복음을 안 전하니까 신천지가 날뛰는 거 아닙니까.
우리 교회도 좀 왔으면 좋겠어요. 신천지 보시면 초대합니다. 와서 한번 침투를 한번 해보세요.

아까 예배 시간 전에 어떤 분이 날마다 삭제당한다는데
삭제당하는 사람한테 신천지가 통하겠습니까?
날마다 부정당하는 사람한테 신천지가 통하겠느냐? 이 얘기예요.

제가 지금 이 두 가지 예를 드는 이유가 뭐냐? 하면
우리들은 번거로운 일 귀찮은 일을 싫어하죠.
신천지가 개입됐을 때 진짜 복음을 전하는 교회라면 감사 기도를 올려야 돼요.
왜 그렇습니까?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악마가 날뛰니까 가룟 유다가 있어야 될 거 아닙니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그 말씀의 현장 속으로 인도하심에 대해서 사람들은 불쾌하는 겁니다.
그럼 이걸 뒤바꿔서 얘기를 해보면
왜 신천지를 사람들이 좋아하고 결혼식을 할 때 자기들끼리 잔소리 듣기 싫다는 거잖아요.
보니까 아버지께서 이렇게 하는데 ‘하나님의 축복하기를 기도한다’
하나님이라고 쓰면 기독교 아닙니까? 말씀도 듣기 싫은 거예요.

요즘 애들 다 그렇잖아요. 성경 얘기하면 고리타분하다 이야기하거든요.
어제 그 뉴스를 보니까 민주당에서 뭐 젊은 애들은 ‘부자는 되고 싶고 뭐는 하기 싫고...’
이거 갖고 난리 나잖아요. 그죠?
반명 계열부터 시작해가지고 저기 국민의 힘에서 맞는 말을 하거든요.
그 팩트 폭격을 싫어해요. 근데 저거들은 다 팩트 폭격을 하거든요.
세대를 반영하는 거예요.

제가 지금 그거 옳다라는 얘기가 아니라 그런 글을 올렸을 때
사람들이 이 독려를 하고 거기에 공감을 하고 지지를 하는 것은 무엇을 싫어하는가? 하면
나를, 내 가는 길을 막지 말라는 거예요. 제발.
내 마음대로 살겠다는 거거든요.

신천지라는 이런 집단이나 다락방이나 구원파, 다 구원파 계열이거든요.
개혁주의도 구원파인데. 여러분들은 어중간한 개혁주의에 있어서 그래요.
제대로 된 개혁주의에 들어가면 구원파 중에 구원파예요.
왜냐하면 교리를 확실하게 붙들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 교회는 별로 많지 않습니다.
다 여러분들이 장로교회를 다닐 때 다 개혁교회라고 얘기했는데 저도 장로교회를 다녔거든요.
합동측에서도 다녀보고 통합측에서도 다녀보고 통합측은 약간 가라라 하지만
통합측에 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들어가 보면 워낙 다양하게 돼 있어 가지고.
고신측에서도 있어 봤거든요.

제가 지금 소속된 곳은 합신, 신학계에서는 나름대로 개혁주의의 중의 개혁주의자.
그 깊이 들어가면 다 구원파예요.
구원파의 특징이 뭐냐? 하면 ‘로마서처럼 설교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로마서처럼 설교하면 안 된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에요.
눈치를 채셨나요? 듣는 당사자들은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판단할 능력이 있어요.
판단할 능력이 있다는 것은 반드시 한쪽을 취하게 돼 있다라는 겁니다. 한쪽을.

그래서 말씀을, 로마서를 설교를 할 때 이리저리 돌리지 말고 핵심을 이야기하라는 거예요.
핵심, 십자가 이야기하면 십자가는 핵심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십자가보다 분명한 진리가 없잖아요.
그런데 십자가를 이야기하면
그건 뭐라고 하는가 하면 ‘다 아는데...’
다 안다는 말 하는 거 보니까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로마서를 설교를 할 때 어떻게 해달라고 하느냐? 하면 방금 이야기했잖아요.
14절 하나만 갖고도
“죄가 너희를 통치하지 못하리니” 이걸로 밀어붙이면 곤란해요.
“못하리니”라고 하니까 확정적인 게 아니고
아예 ‘못한다. 왜냐하면 너희들은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
‘그러니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성도는 죄가 통치하지 못하는 그 세계 속에 살아야 된다.’

그러면 그렇게 사는 법이 뭐냐? 그 법을 진리라고 하거든요.
여기에서 질문을 누가 하고 있어요? 내가 하고 있죠.
그러면 내가 질문을 했으면 내가 원하는 답을 줘야 된다라는 겁니다.
근데 내가 누굽니까? 선악과를 먹은 심판주예요.

그런데 말씀이 성령을 통해서 역사하게 되면 내가 어떻게 돼요? 부정이 돼요.
참 신기하지 않습니까?
아니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라는 말씀이 현재형이잖아요.
그 말씀에 해당 사항이 없는 자는 예수님을 따르는데 가짜로 따르는 거죠.
누구처럼? 가룟 유다처럼, 아니면 성령 못 받은 제자들처럼.

말씀이 성도에게 다가오면 자기 부인의 능력이 작동을 합니다.
그러면 작동을 하는데 로마서가 어려운 게 그거예요.
로마서를, 제대로 말씀을 보게 되면 어디를 추구하게 되는가 하면요,
신비주의를 추구하게 돼 있어요.
제가 아직 로마서 설교를 한 목사들의 설교를 거의 못 봐서 잘 모르겠는데
제가 알기로는 로마서를 제대로 설교를 하게 되면 신비주의를 추구한다라고 하는 목사들을 못 봤어요.
제가 알기로는.

여러분은 어때요?
로마서를 제대로 연구하면 신비주의를 추구 안 할까요? 할까요?
로마서를 제대로 가르쳐버리면 두 부류로 쫙 갈라지는데 한쪽은 신비주의입니다.
제대로 로마서를 읽은 사람들은 반드시 신비주의로 갑니다. 제대로 공부한 사람들은.

제대로 공부 안 한 사람은 어디로 가는가? 하면 신비주의로 가는 게 아니라
말씀 중심, 그러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으로 가요. 극과 극이죠.
아니 왜 신비주의로 갑니까? 라고 이렇게 질문을 한다면 답변을 해드리겠어요.
사도바울이 어떻게 예수님 만났습니까?
공부를 해서 만났어요?
신학 연구를 해서 만났습니까?
자기가 원해서 만났어요?
이것도 제대로 보면 신비주의가 될 수가 없거든요.
내가 아무리 기다린다 한들 주님이 찾아옵니까, 안 옵니까? 안 오거든요.

이미 앞서서 사도바울이 마음의 할례를 이야기했습니다.
마음의 할례라는 것은 성령의 할례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한 세례잖아요. 그죠?
그걸 우리가 원한다고 받을 수 있나요? 없죠.

그런데 이 로마서를 읽어보게 되면 말씀을 이렇게 굉장히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이렇게 풀어나가면서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방금 여기에서 본문도 “죄가 너희를 통치하지 못한다”라는 것은
이미 앞서서 이야기를 했거든요.
이미 6장 앞부분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이 말씀들을 말씀대로 두면 되는데
말씀대로 두지를 못하는 이유가 뭔가? 하면 말씀을 내가 정리를 해야 되겠다는 거예요. 정리.
‘에이 그러면 목사님 왔다 갔다 하지 않습니까?’ 왔다 갔다 하지 않아요. 왔다 갔다 하지 않습니다.
‘왔다 갔다 한다’라는 말의 의미는 ‘에이 믿음과 행함이 왔다 갔다 하지 않습니까?’
둘 다가 박살 나요. 말씀 자체가.

말씀을 그대로 둘 때 믿음을 주장하는 자들도 완전히 박살 나고 산산조각이 나고
행함을 주장하는 자들도 박살이 나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믿었잖아요. 맞죠?
지금 로마서 자체가 아브라함과 다윗을 예로 지금 모든 본문에 다 집어넣었어요.
아브라함이 믿었죠. 믿었는데 그 믿음이 어떤 믿음이었습니까? 깨어지는 믿음이잖아요.

왜 하필 이 사도바울이, 주님이 사도바울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거기에서 끌고 오느냐?
지난번에도 그런 말씀 드렸잖아요.
22장에서 끌고 오면 얼마나 멋들어집니까? 그건 인간들이 생각하는 믿음이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드러나는 현장은 반드시 자기 부인이 일어나는 현장인 거예요.
놀랍게도 그 자기 부인이 일어나는 그 자기가 부인할 요소가 뭐냐? 하면 ‘내가 믿는다’라는 겁니다.
내가 믿는다라는 거.
그래서 사복음서에 제자들이 ‘나는 믿습니다’라고 끝까지 밀어붙이거든요.
나오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그런 말씀들이 나오는 이유가.

“모든 사람들이 주를 버릴지라도 저는 버리지 않겠습니다”
이건 그냥 단순한 한 사건을 두고 하려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 열두 제자를 끌어당겼잖아요.
열두 제자라는 것은 이스라엘의 모델입니다.
그중에 한 사람이라는 것은 전체의 모델이죠.

마치 구약 이스라엘 12지파 중에 누구를 처음에 먼저 뽑아냅니까? 재미있는 것은,
레위 지파를 뽑아내고 그다음 요셉 지파를 뽑아내고 그다음 유다 지파를 뽑아내잖아요.
다 뽑아내도 마태복음 1장으로 들어가면 다 뭐예요? 육일 뿐이에요.

제자들이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한 사람의 객기가 아니라 한 사람이 자기의 열심이 아니라
첫째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인간의 사고 방식입니다.
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정도 같으면 대단한 믿음 아닌가요?
우리가 그 정도 되나요?
그 사람이 어제 만났던 촌수로 잘 모르겠어요. 아무튼 뭐 한 6촌 정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저쪽 사람들이 놀랍대요. 뭐가 놀랍냐? 하면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가 돼 있대요. 신천지에 그 소속된 사람들.

그러면서 탄식을 하는 거예요. ‘왜 우리는 그런 믿음이 없느냐?’
같이 목숨을 바쳐보면 되죠. 그래봤자 이단끼리 붙어놓으면 누가 이겨요?
압수수색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 이겨요. 이건 웃을 일이 아닙니다.
그 신천지 애들이 왜 검찰이나 판사 이쪽 애들을 다 포섭을 하느냐? 하면
그런 관계가 다 엮여 있는 거예요. 들은 얘기입니다.
들은 얘기라 안 하면 또 ‘내 생각입니다.’ 하면 압수수색 올 수 있으니까.

그 사람이 지금 뭘 생각하느냐? 하면
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정도 같으면 믿음이 아니냐? 라는 거예요.
얼마 전에 대구에서 10만 명 수료하고 했잖아요.
우리가 볼 때는 ‘그 미쳤나. 거기 들어가게?’ 이래 이야기하지만,
복음을 제대로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그 사람들의 얘기를 들으면 나름대로 납득이 가요.

왜냐하면 복음은 원래 납득이 안 돼야 되거든요.
납득이 안 된다하니까.
‘목사님 그러면 우리는 신비주의처럼 기도원에 올라가 가지고 막 부르짖어야...’
그것도 아니에요.
그것도 로마서 10장에서 신비주의자들이 등장을 하거든요.
신비주의자들이 등장해서
하늘로 올라가서 주님을 내려와야 된다. 이렇게 사도바울이 비꼬아버리잖아요.
음부에 내려가서 주님을 끌어올려야 된다. 이 얘기가 나오는 이유가 뭐냐? 하면
로마서들을 제대로 읽게 되면 결국은 신비주의자들인데
사도바울은 뭘로 돌려버립니까? 말씀으로 돌리죠.
“이 말씀이 너희 눈앞에 있다”라고 해버립니다.
신명기 말씀을 갖고 와버리죠.

그래서 복음은 어떻게 전파됩니까? 사람이 전달하죠.
그 전하는 사람은 보내심을 입었다라고 하는 겁니다.
여기에서 핵심은 ‘보내심을 입었다’라는 거예요.
‘보내심을 입은 자는 눈에 보이지만 출처가 이 땅에 있지 않다’라는 겁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
‘아 그러면 열심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기 때문에 부지런히 말씀을 들음으로 말미암아 되지 않습니까?’라고 가르치는 자들이 신천지예요.
논리가 어떻습니까? 제가 신천지를 너무 높게 보는 게 아니고요.
제가 설교할 때마다 여러 번 얘기했잖아요. 연구한다고. 걔들은.
연구팀들이 따로 있다니까요. 좀 괜찮은 신학들 다 끌고 오죠.

근데 그 모든 걸 다 끌고 오면 맞는 말을 다 하잖아요.
심지어는요 제가 하는 설교를 다 끌고 막~. 이제는 어떤 기계가 나왔는가? 하면
돈만 주면 유튜브에 나오는 이 음성을 자동으로 문서화시킵니다.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한 줄 요약도 가능한 시대가 됐어요.

그러면 그 모든 핵심을 다 끌고 와서 ‘이것이 진짜 진리입니다.’
그다음 한마디만 더 넣으면 돼요.
‘이것이 바로 우리를 위한 복음입니다’라고 돌려버리면 게임이 끝나요.

복음은 우리를 위한 건 없습니다.
로마서에 나오는 ‘우리’는 어떤 ‘우리’입니까?
‘진짜 우리’라면 로마서에 의해서 융단 폭격을 맞는 우리죠.

히브리서 4장에 나오잖아요.
“말씀은 좌우에 날 선 검과 같아서” 이 말씀에 의해서 쪼개지는 자여야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구원이 목적이 아니잖아요.
주님을 증거하기 위한 목적이잖아요.

그러면 여기에서 “주님의 증인이 되리라” 했잖아요.
그러면 이 말씀 하나만 갖고도 ‘우리는 14만 4천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증인이 되어야 됩니다’라는
이런 논리가 다 이단인 거예요.
가짜 복음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이 왜 그걸 주장하느냐? 라고 할 때는
자기들은 제대로 된 복음을 갖고 있고 제대로 된 구원을 얻었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요.

이제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보면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
이 말씀을 구원파들이 받아들이면 아멘 해요.
아멘 하면서 다시 어디로 가는가? 하면
로마서 6장 1절에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자” 라는 논리가 나와요.
‘은혜 아래 있다’라는 증거가 되려면 반드시
앞서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라고 했잖아요. 이게 사도바울을 통해서 주님이 치밀하게 따지는 겁니다. 복음의 말씀을 따라오는 자들이 지금 세 번째 이야기를 하거든요.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오?”
지금 이 얘기를 하는 이유가 뭐냐? 라고 하면 앞서서 또 나왔거든요.
“은혜를 더하기 위해서 죄에 거하겠느뇨?” 아니면
앞서 3장 입니까? 거기에서 “우리가 이 은혜를 넘치게 하기 위해서 죄에 거하자”라는
그런 주장들을 세 번씩이나 지금 언급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로마에 있는 성도들은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십자가 복음을 깨우친 자들입니다.
만만하게 볼 자들이 아니에요.

우리는 로마서를 읽으면서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수준이 낮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게 아니에요.
완벽하게 알아요. 뭐까지 아느냐? 하면
“죄가 너희를 통치하지 못하리니” 이것까지도 알아요. 그리고 “못한다”까지도 알고요.
그리고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것까지도 알아요.
그러면 그다음 무슨 생각을 할까요?
‘성도들이니까 아무 생각 없다.’ 아무 생각 없는 사람은 없어요.

그래서 계속해서 사도바울이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서 우리를 육이라고 표현하는 겁니다. 육.
육이 없으면 영이 안 나와요.
계속해서 성도의 몸을, 몸뿐만 아니라 그 모임 자체가 말씀의 역사를 통하여서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는 현장으로 내모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어떤 육적 속성을 갖고 있는가? 하면
정답을 소유하고 싶은 거예요. 자기가 심판주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으면 우리가 거기에 보탤 것도 없고 더 할 것 없다’라고
할 것 아닙니까? 맞죠? 다 맞잖아요.

그다음 그러면 어떻게 살 거냐? 얘기예요.
어떻게 살겠습니까?
질문을 하잖아요. 십자가에서 다 이뤘다면 어떻게 살까요? 를 묻잖아요.
그 질문이 우리에게 안 나올 수 있나요?
그런 질문이 안 나온다면 그 사람은 십자가가 필요 없는 사람입니다.

문제는 이들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라고 할 때 은혜 아래 성도는 살고 있잖아요.
수준이 우리보다 훨씬 높아요.
은혜 아래 살기 때문에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기 때문에 죄를 지어야 되잖아요.
여러분 그런 생각까지 갔습니까? (갔다라고 끄덕거리네.) 그 생각까지 가야 되거든요.

지금 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만만치 않습니다. 왜 성도들이 만만치 않은가? 하면요
이 진리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악마가 발악을 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 악마성이 제대로 흘러나와야 십자가가 제대로 밝히 보이게 돼요.
복음을 듣기 전에는 이런 소리를 안 합니다. 복음을 듣기 전에는.
그리고 가짜 복음을 들어도 이런 소리를 안 하죠.

진짜 복음을 들어보니까 “우리는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
잘 들어보세요. 법 아래 있으면 어떻게 살아요? 법에 저촉을 받으니까 계속 죄만 짓죠.
그러면 은혜 아래에 있으니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논리가 뭐예요? 앞서서 우리를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이런 말씀들이 나왔으니까
은혜 아래에 있으니까 우리는 새 생명 가운데서 살아야 된다.

그다음, 새 생명 가운데서 사는 게 뭡니까? 라고 질문을 하면 죄를 지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과연 그 이야기를 합니까?

지금 앞서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을 듣고도 지금 이런 소리가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저들은 눈치챈 거예요.
새 생명 가운데서 산다는 것은 은혜 아래 산다는 것까지도 아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뭐냐? 라고 하면 은혜 아래 살려면 죄를 지어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오늘날 신학은요 이 수준도 안 돼요.
그러니까 바울이 말하는 말귀를 하나도 못 알아듣는 겁니다. 물론 주님의 말씀이지만

오늘날 신학은 대부분 뭐라고 갑니까?
이 구원파들은 어떻게 이걸 처리해 버리는가? 하면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다 용서했지 않느냐?
그러니까 우리는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무슨 짓을 하더라도 죄 짓지 않는 자다’ 이렇게 주장을 해요.
아니면 ‘죄가 아니다’라고 주장을 해요.

어떻습니까? 그들의 말이?
우리가 어떤 짓을 하더라도, 살인을 하든, 간음을 하든, 사기를 치든, 전세 사기를 치든,
죄가 아니라고 이야기를 하거든요. 이거 복음 아닙니까?
이걸 스가랴로 갖고 가면 새까만 이 죄덩어리를 흰옷으로 갈아입혔잖아요. 이거 복음 아닙니까?
그렇게 주장을 할 때 뭐라고 반박하겠습니까?

그들의 노림수가 뭐예요? 복음을 이용해서 내 마음대로 살고 싶다라는 거거든요.
거기에는 무엇이 없는가? 하면 ‘믿는 나’는 있는데 나를 부인하는 능력은 없어요.
그래서 말씀 자체가 그렇게 주장하는 자들에게 요한일서 같은 경우에는
“우리가 죄 없다 하면 하나님을 (뭘로 만든다 합니까?) 거짓말쟁이로 만든다” 이야기하거든요.

아니 하나님이 똑같은 말씀을 하시면 앞뒤 맞는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 서로 충돌되는 이야기를 왜 자꾸 하느냐? 얘기거든요.
그래서 인간들이 자기가 신이거든요.
말씀을 주시면 요한계시록에 나오듯이
나한테 불리한 것은 삭제해버리고 유익되는 것은 다 끌어오는 겁니다.
여기에 첨가까지 해버리는 거예요. 신천지는 자기가 ‘청도에서 해를 봤다’ 그러거든요. 별을.
그게 계시가 된 거예요. 그들은.
근데 그런 게 왜 먹히느냐? 하면
성경에 사도 바울이 주님을 어떻게 만났어요? 빛난 해처럼 만났잖아요. 눈이 부시게...

“은혜 아래 있다”라고 하니까 그다음 불쑥 튀어나오는 게 뭐냐? 하면
‘죄를 짓자.’ 이건 논리입니다. 논리. 논리고 실제예요. 맞잖아요.
우리가 은혜 아래 있으면 어떻게 해야 돼요? 제가 설교할 때도 그런 얘기했잖아요.
우리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잖아요. 죄 안 지으면 은혜 아래 있다라는 게 드러날 수가 없어요.

그럼 여기에서 이런 말씀을 딱 던질 때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갖는가? 하면
주인공의 자리에 자기를 둡니다. 내가 주인공이예요. 내가.
그래서 이 말씀을 듣고 우리는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죄를 짓자라고 이야기를 하죠. 논리가.

그런데 시편 51편에 다윗의 시편을 보면 다윗이 ‘죄를 짓자’고 해서 지었어요?
아니면 주님의 의로우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죄악 중에 잉태하고 죄악 중에 태어나게 했습니까?
주도권을 누가 갖는 거예요? 죄가 같죠. 죄가.

이런 걸 상상해 볼 수 있느냐? 얘기예요. 죄가 주도권을 갖고 있어요.
또 이렇게 이야기하면 또 뺑뺑이 돌거든요. 뫼비우스의 띠처럼.
죄가 주도권을 갖고 있는 그 사실을 내가 안다 이야기 해요. 내가.
인간의 입장에서는 죽을 때까지 자기 부인이 안 돼요.
자기를 잊을 수가 없고 자기를 끝까지 긍정하게 돼 있습니다.

불교나 철학에서는 ‘나’라는 게 아예 없다라고 하는 자들도 있고, 있다라고 하는 자들도 있는데
‘나’라는 것은 그냥 하나의 사건의 뭉치. 기억의 뭉치. 들어보면 맞거든요.
불교에서는 찰나찰나 일어나는 것들을 다 끌어모은 게 ‘나’다.
그러니까 ‘나’라는 실체가 없다. 그렇게 주장을 해요.
그래서 무아지경에 도달해야 된다 뭐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그 ‘무아지경에 도달해야 된다’는 너는?
그래서 뺑뺑이 돌다가 끝나는 겁니다.

그 뺑뺑이 돌다가 끝나는 그 증거가 뭔가? 하면 주님이 죽여버리거든요.
“죄의 삯은 사망이라.”

그 ‘나’라는 것을 부정하려고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자유롭고 싶거든요.
그런데 로마서의 말씀을 읽어보면 이렇게 말씀을 들어보면 나를 부정할 도리가 없어요.
말씀이 없을 때는 나를 부정할 수 있는데
말씀을 꼼꼼하게 읽어 들어가기 시작하면 나를 부정할 수가 없다니까요.

그래서 “죄가 너희를 주관하지 못하게 하라.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
여기서 ‘너희’가 나왔잖아요. 그럼 너희가 누굽니까? 말씀을 듣는 나.
나는 은혜 아래 있으니까 어떻게 살아야 되겠느냐?

왜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라는 질문이 나오는가 하면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그래요.
모든 인간들은 자기 행위를 통하여서 그 결실을 따려고 하거든요.
행위가 없으면 인간은 사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오?”
“그럴 수 없느니라”
이 정도 되면요 ‘어쩌란 말입니까?’가 나와야 되거든요.
이 ‘어쩌란 말입니까?’ 가 둘로 갈라지는데
사도행전에서는 “형제들이여 우리가 어찌할꼬”
왜냐하면 이게 코너거든요. 더 이상 빠져나갈 길이 없어요.
근데 아까 이 이단들은 빠져나갈 길을 통로를 터줘요.
그런 자들에게는 어찌할꼬가 없다니까요.

상한 심령이 되어야 된다고 할 때 그것도 내가 되어지는 것은 상한 심령이 아니에요.
다윗이 상한 심령이 되었을 때 자기가 되고자 했습니까? 아니에요.
나단 선지자가 찾아온 것도 안 되고 직접 지적질을 해야 돼요.
성령이 우리를 책망을 할 때 상한 심령이 되는 거예요.
그럴 때 나오는 게 ‘어찌할꼬’ 예요.
근데 상한 심령이 된 자는요 ‘어찌할꼬’가 안 나와요.
상한 심정이 되었다는 것은 코너로 몰렸다라는 겁니다.
막다른 골목길에서 더 이상 빠져나갈 길이 없다라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빠져나갈 길을 계속해서 제공해 주는 겁니다.
그래서 그 길이 아우토반과 같은 고속도로, 속도 무제한, 그런 고속도로를 제공해주면
사람들이 신나서 몰려오는 거예요.
뭐가 없습니까? 제가 처음 시작할 때 결혼식 얘기했잖아요.
‘나를 귀찮게 하지 말라’는 거예요. ‘우리끼리 결혼하는데 너거들이 뭐냐?’ 이거예요.
이제 아내고 남편도 다 싫으니까 너도 가라.
황혼이혼이 유행한다는데 그거 뭐 한참 됐잖아요. 그 악마성 끝까지 보여주는 겁니다.
지옥 갈 이유를 계속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혼자 사는 것도 마찬가지고, 그렇지 않은 게 없거든요.

말씀을 볼 때도 이 아우토반과 같은 그러한 이 고속도로를 내어달라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을 조금만 읽으면 그런 길은 없다라는 걸 알 건데.
왜 문제가 되느냐? 하면 구약과 신약이 다르다라는 이 신학적 사고를 교인들에게 퍼부어 줬어요.
구약에는 율법을 줘가지고 고속도로가 아니었다면
신약에는 예수님의 피로 고속도로를 깔았다라는 거예요. 말은 맞아요.
말은 맞는데 예수님의 피로 고속도로를 깔아버리면 그 고속도로 안에 구약이 다 들어와야 되거든요.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그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잖아요.
그리고 구속받은 자들은 어떻게 삽니까? 광야를 산다고 했잖아요. 히브리서에서도.
광야길을 사는데 똑같은 이야기를 해요.
“저들과 같이 너희들도 마음을 강팍케 하지 말라”
이건 율법 아닙니까? 율법 맞죠? 시편에 말씀한 것을 그대로 갖고 왔거든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헷갈리는 거예요. 왜?
‘아우토반을 깔아놨는데 왜 이런 소리를 하느냐?’

그럼 이 아우토반은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할 때 이렇게 뭐 패러글라이딩 타고 들어가서 그다음 불도저로 밀잖아요.
그럼 미는 일을 누가 해야 되는가? 하면
주님은 깔아놓긴 깔아놨는데 보이지 않는 고속도로를 깔아놨다는 겁니다.
그 보이지 않는 고속도로를 우리가 이 포크레인 불도저를 밀고 가야 된다라는 거예요.

들어보면 다 납득이 되고 설득이 되는 거예요. 왜?
이미 마음속에는 이 에덴 동산으로, 천국으로 향하는 그 고속도로를 확정지어 놓았기 때문에 그래요.
그게 누구였는가? 하면
약속을 받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출 받았을 때
그들은 그 앞길이 아우토반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뺑뺑이를 돌리잖아요. 뺑뺑이를 돌려서 어디로 몰아갑니까?
코너로 몰아가죠. 어디로? 홍해 바닷가로 몰아가고, 뒤에는 바로의 군대가 쫓아오잖아요.
사실 성도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망이 우선이죠.
그럼 성도는? 거꾸로 돼야 돼요.
홍해를 건넌 후에 찬양 부를 게 아니라 그 장면을 만났을 때 오히려 감사와 찬양이 나와야 되죠.

감사와 찬양이 나온다고 홍해가 없습니까? 예?
광야길이 없나요? 또 그런 노림수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데 이 고속도로를 원하는 사람은 그러한 것들이 없기를 원하는 거예요.
그래서 거추장스러운 것들은 다 삭제해버리죠.

삭제하는 방식이 뭔가? 하면 ‘우리 집단에 오면 구원을 얻습니다’ 라는 겁니다.
우리 집단 교적부에 기록되면 이 지문, 저는 등록이 안 돼요. 그러니까 하나님 교회도 못 가요.
왜냐하면 지문 등록이 안 되거든요. 출입국을 할 때 이 10개를 다 해야 되는데
손가락이 하나 없으니까 또 9개를 등록하는데 이게 다 늘 벗겨지니까. 노가다하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하면 천국 간다는 겁니다. 생명책에 기록된다는 거예요.

그것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어요? 그런데 성경을 읽어보면 머리 아프잖아요. 맞죠?
그들이 이 성경을 부인하는 건 아닙니다. 그대로 들고 다니거든요.
읽어보면 알아먹습니까, 못 알아먹습니까? 특히 로마서 보면 복잡하잖아요.
그러니까 이 복잡한 거 때려치우시고
그 설교할 때도 어려운 이야기하지 말고 ‘쉽게 이야기하라’는 거예요. 쉽게.
자기가 지금 안 쉬운데요. 쉽게 얘기해 봤자
십자가만 얘기해도 십자가를 자기가 비비 꼬아가지고 괴상한 십자가를 만들어내잖아요.
그걸 그들이 원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말씀을 통하여서 반드시 어떤 반응이 나오도록 몰아가느냐? 하면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죄를 짓자”라는 이 말이 튀어나오는 복음을 전해요.
그래야만 둘로 갈라져 버립니다. 신기한 거예요. 복음이.
그래서 아까 ‘우리’라고 얘기했을 때
이 우리는 산산조각 나는 로마서에 의해서 산산조각 나는 우리라 했죠?
왜냐하면 자기 부인이 되지 않는, 그 부인의 능력이 없는 우리는 우리가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도 마찬가지고요.
우리가 사도신경으로 신앙 고백할 때 “내가 믿사오니”의 그 나도 마찬가지예요.
‘아니 목사님 그 엉터리 신앙 고백 왜 합니까?’ 나를 왜 거기에 집어넣습니까?
집어넣어야 되죠.
‘이 신앙 고백한다고 천국 못 간다’는 이야기를 해야 될 거 아닙니까?
근데 이걸 어떻게 바꿔버립니까?
나는 이미 중생이 되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신앙 고백을 하는 거고, 제대로 된 교리를 믿고...
교리라는 게 별거 없습니다. 각 집단이 만들어낸 이 천국에 이르는 계단이죠.
계단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거예요.
신천지는 다단계처럼 해가지고 얼마나 체계적입니까? 그 올라가는 기쁨도 제공해 주고
그 마지막 올라갔을 때 누구를 알현할까요? 이만희를 알현하는 겁니다.
웃을 일이 아니에요.

대형 교회도 담임 목사 알현하려면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어렵잖아요.
아무나 안 만나주죠. 보디가드들이 몇 명이 진을 치고 있습니까?
복음과 정반대죠. 누가 찔러 죽일까 싶어서 겁나 가지고. 물론 뭐 아무나... 그런 문제도 있지만
인간이 원하는 그 욕망을 그대로 제공해 주는 겁니다.
그래서 ‘복잡한 말씀은 제발 우리에게서 치워라’는 거예요.

그래서 무엇을 제거하는가? 하면
이 로마서에서 가장 우리가 좋아하는 것 중에 하나가 뭡니까? 성도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하리로다.” 이거 좋아하잖아요.
그런데 그게 이렇게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탄식하듯이 툭 튀어나오려면
그 상황으로 내몰려야 되거든요. 지금 내몰고 있어요. 사도바울이.
7장에만 나오는 게 아니라 6장에도 똑같이 나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하리로다” 하면요
사도바울이 전하는 이 복음에 의해서 우리가 빠져나갈 이 길목들이 다 차단됐어요.
이 차단된 기쁨.

그런데 우리의 욕망은 차단되지 않기를 원하거든요.
복음을 들으면서 이 뚫린 길로 쭉쭉 나가기를 원하는데, 사도 바울이 그런 줄 알았는데,
사도 바울을 통해서 복음의 친교를 나누는데 그 내용을 들여다 보니까 진짜 친교예요.
진짜 친교가 뭔가? 하면
그들이 빠져나갔다라고 생각하는 그 길들을 다 막아버리는 겁니다. 뭘로? 복음으로.
왜냐하면 이 복음 자체가 다 십자가를 증거하기 때문에.

그럼 십자가를 증거하려면 십자가 사건을 유발하는 사태가 일어나야 될 거 아닙니까?
그중에 하나가 뭔가? 하면 은혜 아래 있으니까,
우리 은혜 아래 있잖아요. 맞죠?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잖아요.
그럼 ‘있다’가 끝입니까?

‘있다’가 끝이 될 수 없는 이유가 뭔가? 하면 육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있다’는 그냥 말이잖아요. 언어잖아요.
그런데 이 ‘있다’라는 말이 육 속으로 들어오면
은혜 아래 있으니까 이제 내 몸은 어떻게 살아야 된다는 거예요?
이 사람이 말씀을 생각하지 않으면 그냥 ‘은혜 아래 있으니까 그냥 살자’ 이래 생각하지만

말씀을 생각하면 뭐예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라는 말씀을 떠올릴 것 아닙니까?
그것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대화가 안 되죠.
성경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니까.

그러면 그 사람은 반드시 자기의 육의 몸을 갖고 움직이게 돼 있잖아요.
여러분 가만히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지금 설교 들을 때도 여러분의 뇌는 어디로 갑니까?
몸은 어때요? 다 움직이게 돼 있거든요. 활동을 하게 돼 있어요.
주님이 그렇게 만들었어요.
선악과를 먹은 이후에 모든 인간들은
자기의 움직임을 통해서, 몸의 움직임을 통해서 어디로 도달하려고 합니까?
하나님의 자리에 도달하려고 해요.

‘생각이 먼저냐? 몸이 먼저냐?’ 논쟁이 많거든요. 그거 해봤자 답이 안 나와요.
성경은 육의 몸이라는 거예요. 육의 몸.
가인 같은 경우에 아벨을 죽이는데 어떻게 죽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난 뒤에 죽여버리잖아요.
그 말씀이 사실은 그 가인이 한 행위가 우리 모두의 행위거든요. 예수 안 믿는 자의 행위가 아니라.
왜냐하면 그 가인에 들지 못하는 인간은 천국 못 가요.

예수님으로부터 구원받는 자는 예수님을 살해한 자만 구원을 받아요.
예수 믿지 않는 자가 자기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라고 얘기합니까? 안 하죠.
꼭 안 믿는 자들이 뭐라 합니까?
바리새인처럼 ‘저들이 십자가에 못 박았고 나는 믿었습니다.’ 이야기하죠.

성경을 볼 때 안목이 성령을 받은 사람은 다 바뀌어버리는데, 이 말도 되게 어려워요.
왜냐하면 다 바뀐다 하면
우리는 순간적으로 안경을 끼면, 선글라스를 끼면 까맣게 바뀐다. 이런 식으로 자꾸 인식을 해요.
표현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게
이미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 성도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고요.
죄가 주관치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완전히 바뀌었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얘기를 하면 또 사람들은 그걸 믿어버려요.
정말 재미있지 않습니까?

‘그럼 설교를 어떻게 해야 됩니까?’
어떻게 하기는요? 죄만 드러나는 설교밖에 못하는 거예요.
그리고 철저하게 굉장히 논리적으로 설교를 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왜냐하면 상대들이 죄가 나올 수 있는 그 요소들을 다 뽑아내는 설교를 하는 거죠.

“죄를 지으리오. 그럴 수 없느니라” 그다음 하는 말이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이 말씀을 딱 들으면 여러분 무슨 생각이 듭니까?
분명히 우리는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 했잖아요. 맞죠?
은혜 아래 있으니까, 은혜 아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죠? 죄를 지어야 되잖아요.
‘아니 목사님. 은혜 아래 있는데 어떻게 죄를 짓습니까?’
앞서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했잖아요.

‘목사님 저는 은혜가 넘칠 것은 원치 않고 은혜만 요만큼만 받길 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와 길이를 알아가게 하기 위한,
‘알아간다’라는 말은 지식으로 안다라는 그런 것도 다 포함을 하는데 그것은
죄의 깊이를 알아갈 때 그 은혜의 깊이가 깊어지는 거거든요.
그러한 내용들이 가득 차 있는 겁니다.

그러면 또 질문이 나올 것 아닙니까?
‘그러면 은혜 안에 있으려면 죄를 지어야 되겠네.’ 라고 할 때 사도바울이
“죄의 종으로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은혜를 더하기 위해서 죄를 지으면, 네가 죄를 지으면 넌 누구의 종이냐?
죄의 종이라는 거예요.

제가 말씀을 있는 대로 보자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편리성과 우리가 원하는 선악 구조에서 선을 택하는 그 진리를 뽑아내려면
앞에 말씀을 또 삭제를 해야 돼요. 앞에 나온 말씀을.
무슨 얘기인가? 하면
은혜 아래 있으니까 죄를 지으리오? 라고 했을 때 그 앞부분 “죄를 지으리오?” 라는 걸 빼버리고
은혜 아래 있잖아요. 그러니까 은혜 안에 있으려면
앞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 했으니까 죄 짓지 않는 자는 은혜를 몰라요.
이런 얘기도 안 하잖아요. 목사들이.

왜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닐 때 그런 악마짓을 했는지 이제야 눈치채시겠죠?
성령을 받게 되니까 자기들이 한 신앙 고백,
심지어 예수 이름으로 귀신 쫓아낸 모든 것들이 이 귀신 농간에 놀아난 거예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건 주님의 능력으로 했지 않습니까?’
당연하죠. 그건.

근데 주님의 능력으로 해서 뭘 합니까?
마태복음 7장에 나오잖아요.
“내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다 했잖아요.”
근데 뭐 하라는 겁니까? 나 구원해달라는 거 아닙니까.
어떤 사람은 이런 얘기를 해요.
‘가룟 유다까지 사랑하는 성도가 되어야 된다.’
이 말이 옳아요, 그릇되었어요? 옳죠.

그런데 그 ‘사랑’이 뭐냐? 라는 거예요.
그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게 사랑이에요.

그런데 인간들이 생각하는 사랑은 뭐냐? 하면
다 받는 거예요. 안는 거예요.
십자가를 전해서 이 사람이 사기를 쳤잖아요.
그러면 경찰에 신고해서 감옥에 집어넣는 게 십자가 사랑이에요.
왜냐하면 감옥 가도 십자가의 용서함은 변질이 안 돼요.
이것보다 기쁜 게 어디 있습니까?

근데 그런 사람들이 원하는 거는 뭔가? 하면
사랑이에요. 다 받아라는 겁니다. 다 받으면 그게 사랑이라는 거예요.
그게 무슨 사랑입니까?

성도가 “성령을 받게 되면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된다” 했죠.
그 증인이라는 것은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거예요.
그 사랑의 내막은 십자가의 피 흘리심이에요. 십자가는 두 요소로 나눠버립니다.
지금 사도바울이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십자가 사랑을.
그런데 상대는 십자가 사랑을 소유하려고 하는 거예요.
누구 중심으로? 나 중심으로.

로마서 7장에 나오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 나와 또 다른 나. 이 자아 논쟁 있잖아요.
이게 철학계에서도 첨예한 논쟁이거든요.
‘내가 있느냐, 없느냐?’ 이걸 해버리면 이 ‘나’가 무한대로 가버리거든요.
이런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이유가 있어요.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항상, ‘나’라는 게 무한대로 가더라도 무한대로 나를 부정 못해요.
왜 무한대로 가느냐? 하면 자기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이 무한대처럼 보이거든요.

말씀에 의해서 코너로 몰리면 감사가 나와야 되는데
코너로 몰지 말고 문을 열어달라는 거예요.
제가 제일 답답한 게 이거거든요. 복음을 전하면 ‘좀 열어달라’는 거예요.
안 열리는 게 기쁨이에요.

여러분 아무리 말씀을 보더라도요 오늘 말씀 보면 새롭게 주님이 안 열어주면 안 열려요.
지식과 지(知), 인간이 갖고 있는 지식은, 정보는 알고 있어요.
이 정보는, 이 지식은 구원을 못 얻습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 ‘너희가 앎이라. 너희가 믿는다’
이런 이야기를 계속해서 반복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목사님 그러면 ‘안다’라는 걸 빼버리고, ‘믿는다’는 걸 빼버리고 이야기하면 안 됩니까?
여러분 안다는 걸 뺄 수 있어요?
선악과를 아는 지식을 이미 소유했는데 어떻게 안다는 걸 빼요?

그런데 주님은 아는 걸 끌고 와서 어디로 인도합니까? 십자가로 인도해요.
믿는 것도 포기할 수 있을까요?
왜 믿는 걸 포기 못하는가? 하면 선악과를 먹은 인간들이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잖아요.
쫓겨났으니까 쫓겨난 에덴 동산을 어떻게 해야 돼요? 알아요, 몰라요?
모르죠. 모르잖아요.
모르니까 있다고 믿어야 되는 거예요.
그 믿는 내용을 뭘로 채우려고 합니까? 지식을 갖고 채우려고 하는 거예요.

이것은 성도들에게도 똑같이 적용이 돼요.
‘아니 목사님 성도와 성도 아닌 자가 명확하게 구분이 되어 있지 않습니까?’ 라고
우리는 상상을 하잖아요. 그걸 망상이라 합니다.
성도와 성도 아닌 자가 구별되는 지점은 없어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죠.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릴 때 그 하나님의 아들과 다른 두 강도가 구별됐어요, 안 됐어요?
구별됐다면 군병들이 얼른 내려서
‘유대인의 왕이요 하나님입니다.’이렇게 믿었을 거 아닙니까?
구별이 안 돼요.

우리는 내심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 이렇게 나오니까, “소금이~” 라고 하니까
뭔가 구별이 될 줄로 생각하는데 구별되는 지점은 이런 말씀을 들을 때 구별이 돼요.
한쪽은 어떤 쪽으로 나오느냐 하면
한쪽은 ‘이제 진리를 알았다’라는 거예요. 이제 고속도로를 뚫었다라는 겁니다.
그런데 다른 한쪽은 갑자기 말문이 콱 막혀버리죠.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라는 이건 확정적이거든요.
그리고 죄가 통치하지 못한다라고까지도 했는데 몸은 어떻게 살아요?

여러분 “죄가 우리를 통치하지 못하리라” 했잖아요.
2천년 전에 말씀했어요. 지금 통치합니까, 못합니까?
질문이 벌써 함정이잖아요.
말씀 앞에 들어가면 죄인으로 드러나야 돼요.

말씀이 신기하게 작동을 하는 게 이런 부분입니다.
우리는 글이 있으면 그 글을 갖고
내가 있기 때문에 이 내가 이해하는 식으로 정답을 받으려고 하잖아요. 그죠?
수능을 칠 때 얼마 전에 쳤잖아요. 문제 이렇게 치면 답을 써야 되잖아요.
그게 우리가 갖고 있는 인식 구조예요.

그런데 주님의 수능은 문제지를 주면 답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나는 빵점입니다.’
빵점이다라는 방식을 어떤 식으로 주님이 조치하는가? 하면
만점을 맞는 방식으로,
하나도 못 맞추는 방식으로 주님이 일을 하는 겁니다.

지금 아직까지 설교가 이해 안 되신 분이 있을 것 같은데 다시 말씀드립니다마는
“은혜 안에 있으니까 죄를 지으리오?” 라고 사도바울이 이렇게 반문을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바울의 로마서를 따라왔다라는 거예요. 지금. 따라왔거든요. 계속 지금 반복합니다.
따라왔으니까 그 따라온 자들이 뭘 하는가? 하면
바울조차 마찬가지예요. 이런 얘기를 또 해야 되죠.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 아래 있으니까 죄를 지어야 되겠네.’
그럼 여러분 답변해 보세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에 있죠? 그죠? 하나의 문장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쳐요.
그럼 죄 없는 곳은 은혜가 없죠. 두 가지 문장이 있잖아요.
여러분 어느 걸 선택하겠습니까?

죄가 더 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 하니까 은혜 아래 있으니까 어떻게 해야 돼요? 그다음 생각은.
죄를 지어야 될 거 아닙니까.
지금 말씀대로 살려고 안 지으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 있는데.
그러면 죄를 안 짓는다면 그러면 그 사람에게는 뭐가 필요 없어요?
십자가가 필요 없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지금 말씀에 똑같아요. 원리가.
구약의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말씀을 주시잖아요.
그 말씀의 성취자가 누군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디에서 성취해버립니까? 십자가에서 성취를 해버리는데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으면
십자가 지신 주님이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면 우리는 말씀의 성취자로 드러나야 되잖아요. 맞죠?
말씀의 완성자로 드러나잖아요.

말씀의 완성자가 어떤 식으로 드러나느냐? 하면 이런 식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지금 완전히 코너로 몰아버려요.
몰아버리면 이 말씀의 성취자가 이미 구원을 받았잖아요.
죄가 왕 노릇하지 못하거든요. 못하고, 은혜가 왕노릇 하는 자입니다.
그건 아는 거예요.

아는 게 실제로 말씀으로 우리를 몰아붙이게 되면 그다음 어떻게 돼요? 입을 다물죠. 입을.
왜냐하면 길이 없잖아요.
‘아니, 목사님 나는 그러면 죄 안 지을래요.’
죄 안 지으면 어떤 문제가 발생해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말씀을 삭제해버리는 겁니다.
이게 복음이거든요.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영생이 없다”
여기에는 인간의 행위가 개입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뭘 도와줬습니까? 도와준 게 없어요.
말씀의 성취로서 예수님이 홀로 자기 몸을 대속물로 내어주신 겁니다.

복음이 뭐예요?
내 쪽에서 할 수 없는 것이 선물로 주어진 게 복음이잖아요.
그래서 “너희가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으면
이 은혜라는 것이 성도님이 구원을 얻었잖아요.
그 은혜가 계속 작동하는 몸이잖아요.

계속이라는 것은 연속성인데,
우리 육이 있기 때문에 이 연속성이 우리 가운데서는 어떻게 나타납니까? 깜빡이로 나타나죠.
생각은요 기억을 해가지고 다 연속이 돼 있는데 우리가 그렇게 안 돼요.

누구의 종이냐? 죄를 짓는 자는 죄의 종이다.
순종하는 자는 순종의 종이다.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다.
여러분은 누구의 종입니까? 이 질문을 하는 거예요.
여러분은 죄의 종입니까? 아니면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입니까?

그래서 17절 말씀을 하는 겁니다.
여기에서 사실은 계속 반복합니다마는 딱 ‘꼼짝 마!’예요. 꼼짝 마.
마치 사도행전에서 이 사도들의 설교를 들었을 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는 그 사태로 다시 처음으로 돌려버리죠.
쉽게 말하면 첫사랑으로 돌려버려요. 첫사랑으로.

그래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야 이 말씀이 왜 이렇게 중요하냐? 하면 7장 25절에 또 한 번 더 등장하거든요. 봅시다.
7장 25절에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라고 할 때(롬 7:24)
그걸 했기 때문에 건져주는 게 아니고 이 말씀으로 코너로 몰아가죠.
육체 가운데 산다 했잖아요.
육이 있기 때문에 나가 있고 또 다른 나가 있고 또 누가 있어요?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가 있죠.
이 나와 또 다른 나는 계속 무한 반복입니다. 무한대로 계속 흘러가요.
여기에서는 또 다른 나,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십니다라고 아는 또 나가 있죠.
이것도 소용없다라는 겁니다.

근데 이런 인간에게 주님이 성령을 주셨기 때문에 이것은 나로부터 나오는 게 아니죠.
그래서 우리 인간 쪽에서는 나라는 걸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은 이렇게 몰아가면 무한대 반복하다가 끝이 나요.
무한대로 가다 끝난다니까요.

그런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하리로다” 이렇게 되면 십자가 사건이 덮친 거예요.
이걸 아까 제가 ‘신비’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를 제대로 읽으면 신비주의가 된다는 거예요.
정말 놀랍죠? 성경을 제대로 읽어도 다 신비주의예요.
왜냐하면 성령이라는 자체가 우리가 공부를 한다고 오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왜 이렇게 말씀을 촘촘하게 주시느냐?
왜 상대가 누굽니까? 선악을 아는 지식을 소유한 자들이에요.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이기 때문에 선악을 알게 하는 그 지식을 가졌음을 알고요.
그들이 가장 앞장서서 믿지 않는 자들보다 본을 보여주는 겁니다.
어떤 자들로서? 악마에게 철저하게 속했다라는 거예요.
지금 이렇게 코너로 몰아버리면 구원받을 길이 없는 거예요. 더 이상.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이미 의의 종이 되었기 때문에 이 말씀 속으로 끌고 오는 겁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되는 것은
이미 의의 종이 되었기 때문에 앞에 말씀을 삭제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예요.
우리는 의의 종이 되었기 때문에 앞의 말씀을 삭제하고 싶은 거예요.
왜? 내 속이 편하고 싶잖아요.

다시 예를 들게요.
‘우리 교회는 신천지가 들어오면 안 돼요.’ 이유가 뭐예요? 번거로운 게 싫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성경을 보세요. 이단들이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복음이 또렷하게 드러나죠. 맞죠?
갈라디아 교회도 마찬가지고, 골로새 교회도 마찬가지고.

우리들도 이 세상에 살면서 온갖 일을 다 겪잖아요.
어떤 사람은 복음을 들은 이후에 이건 뭐 일어나지 않은 일만 다 일어나요. 예상할 수 없는 일이.
아니 주님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이렇게 듣는 분이 계시는데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게 축복이에요.
제가 그분한테 얘기했거든요. 그게 복이라고.
사랑에서 끊을 수 없잖아요.

그런 번거로운 일, 결혼식이 번거로워야 돼요. 교회가 소란스러워야 되죠.
삶 자체가 고속도로가 깔린 길 맞아요.
근데 그 고속도로를 주님이 어떻게 깔았느냐? 하면
물이 없고 먹을 게 없고 불뱀이 있고 온갖 고속도로로 깔아놨어요.
왜? 십자가의 피의 고속도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 범사에 감사가 나오지 않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여기에는 말씀의 논리, 로마에 있는 사람들은 똑똑하잖아요. 나름대로.
원래 서울 사람들이 똑똑하다 그러잖아요. 맞잖아요. 그죠? 눈 뜨고도 코 베어 가잖아요.
그 눈 뜨고도 코 베어 가려면 얼마나 똑똑해야 되겠어요.

로마에 있는 교인들도 똑같아요. 알 만큼 안다는 겁니다.
지방은 이 정도로 이렇게 성경 지식에 대해서 요즘은 뭐 어쨌든 그래도요.
그래도 대구 가서 사람들 만나보면 큰 교회 장로님들 만나보면 서울만큼 안 그래요.

이 로마에 있는 교인들이 얼마나 똑똑하겠습니까?
말씀의 논리 이런 것들 정확하게 꿰뚫고 있는 거예요.
꿰뚫고 있으니까 사도바울이 ‘그래 너희들 알지. 그래 아는 것만 아니라 너희들 믿지’
그래서 한번 알고 믿는 것을 한번 따져 보자 라는 겁니다.
따져보니까 어떻습니까?

이 대목에서 성도들은 입을 다물게 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여기에 합류당하는 자.
합류당하지 않으면 어떤 태도가 나오는가? 하면 바울을 조롱해요.
‘니만 아냐 나도 안다’라고 얘기해요.

그런데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여기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가 빠졌잖아요.
그거 빠져도 괜찮아요. 그게 다 들어가 있으니까.
이 하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예요.
그걸 깔고 있습니다. 지금 로마서 전체가 깔고 있잖아요.

그래서 놀랍게도 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뒤에 보면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이것도 되게 어렵죠. 또 보세요.
마음으로 너희들이 교훈의 틀, 교리의 틀, 이렇게 번역을 했는데,
그 교리의 틀을 하든, 교훈의 틀을 하든 이건 하나도 안 중요해요.
왜냐하면 이 내용은 십자가의 피기 때문에 그래요.
성경 말씀을 교리를 다 끌어모으면 십자가잖아요.
그걸 어떻게 순종했습니까? 여기에 순종했다라고 하잖아요. 맞죠? 다시 읽어볼까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다시 사도바울을 예를 듭시다.
사도바울이 교훈의 본을 순종했습니까? 순종했나요?
순종해서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습니까? 아니죠.
그러니까 주님이 찾아오심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런데 이런 표현밖에 안 돼요. 인간에게는.

복음을 사도행전에 전하잖아요.
전할 때 분명히 사도들이 전하고 듣는 자들이 거기에 화답을 하잖아요. 그죠?
그런데 이것을 이 성령을 빼버리면 ‘내가 전하고 니가 믿었다’가 되고
‘내가 전한 교훈의 틀을, 교리의 틀을 니가 마음으로 순종하여 믿어 구원이 되었다’
이런 논리를 펴잖아요.

근데 이 논리가 안 통하는 이유가 뭔가? 하면 세례가 있잖아요. 할례, 성령.
그러면 사도바울이 이 로마서를 통하여서 ‘귀 있는 자만 들으라’ 이 얘기입니다.
귀 없는 자는 이 말씀을 들으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라는 이 내용이 나오는 게 아니라
‘그래 내가 그때 믿었지’ 이게 나와요.

우리가 복음을 들을 때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 찬양이 흘러나오는 사태로 내몰려야 됩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그렇게 내몰려지고 있어요.
왜냐하면 나의 증인이 아니라 십자가에 피 흘리신 주님의 증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름 똑똑하다고 하면서 말씀을 상고하고 연구하는 자들에게
도무지 빠져나갈 길을 주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십자가만을 자랑케 하고 하나님만 찬양케 하는 귀한 복음의 말씀을 듣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삶을 주께서 날마다 코너로 내모시는 이유가 십자가만 자랑케 하기 위해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쫓게 하기 위함임을 알게 하여 주시고
감사함으로 받게 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말씀 앞에 우리가 살아가는 막힌 삶의 길목 앞에서
십자가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소원하는 주의 백성에게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