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3-12-04 00:03
20231203 로마서 강해 42강 롬 7:1-6 성령의 새로움과 육의 묵은 것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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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3-12-04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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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03 로마서강해 42강 롬 7:1-6 성령의 새로움과 육의 묵은 것

다 함께 묵상 기도드리겠습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 고백하겠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 말씀, 잠언서 26장 10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잠26:10)
“장인이 온갖 것을 만들지라도 미련한 자를 고용하는 것은 지나가는 자를 고용함과 같으니라”

기도하겠습니다.
주님이 장인이 되셔서 미련한 자를 고용하셔서 미련한 일만 드러내시고,
주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만을 증거케 하심을 감사드립니다.우리 인생이 말씀의 사람이 되게 하셔서 십자가만 증거하는 증인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시편 79편을 교독하겠습니다.
[아삽의 마스길]
(시79:1~13)
“하나님이여 열방이 주의 기업에 들어와서 주의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으로 돌 무더기가 되게 하였나이다 저희가 주의 종들의 시체를 공중의 새에게 밥으로 주며 주의 성도들의 육체를 땅 짐승에게 주며 그들의 피를 예루살렘 사면에 물 같이 흘렸으며 그들을 매장하는 자가 없었나이다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비방거리가 되며 우리를 에운 자에게 조소와 조롱거리가 되었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영원히 노하시리이까 주의 진노가 불붙듯 하시리이까 주를 알지 아니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열국에 주의 노를 쏟으소서 저희가 야곱을 삼키고 그 거처를 황폐케 함이니이다 우리 열조의 죄악을 기억하여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가 심히 천하게 되었사오니 주의 긍휼하심으로 속히 우리를 영접하소서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어찌하여 열방으로 저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리이까 주의 종들의 피 흘림 당한 보수를 우리 목전에 열방 중에 알리소서 갇힌 자의 탄식으로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주의 크신 능력을 따라 보존하소서 주여 우리 이웃이 주를 훼방한 그 훼방을 저희 품에 칠배나 갚으소서 그러하면 주의 백성 곧 주의 기르시는 양 된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로 전하리이다”

이 시간 서대순 장로님 기도해 주시겠습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 태어났고 죄 가운데 살다가 마땅히 지옥에 가야 할 자들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긍휼하심만을 구하며 살아야 함에도
그릇 행하여 각자의 길로 가는 자들입니다.주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주의 부르심을 입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오늘도 말씀을 들을 때 우리들의 절망스러움이 주 십자가 복음으로 함몰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려드립니다. 아멘.

하나님 말씀, 로마서 7장 1절에서 6절 말씀을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롬7:1~6)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찌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아멘.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이러한 복음을 듣고 그냥 믿으면 되죠.
그런데 문제가 성경이 너무 어렵다라는 겁니다.
쉬운 그 복음, ‘주님의 피로 구원을 얻습니다.’
‘우리는 죄의 권세 아래 놓여 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그 죄에서 자유케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죄에서 자유케 하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그 독생자를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얼마나 쉽습니까?

이러한 어떤 복음을 우리 한국 기독교 거의 100년이 넘었잖아요.
그런 식으로 가르쳐 왔어요.
그래서 아주 이상한 것은 교회를 40년 동안 다녀도, 장로가 되어도 성경을 모른다라는 겁니다.
성경을 모르기 때문에 그 성경을 알려주는 집단들이 활개를 치거든요.

참 이상한 이 대목이지 않습니까? 왜 그러냐? 하면
우리들 마음은 이런 거예요. 복잡한 게 싫어요.
복잡한 게 싫으니까 단순하게 말씀을 들려달라는 겁니다.
사람들의 의식이 이런 거거든요.

옛날에 한 100년 전에 들어왔을 때는 초등학교 졸업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 일제시대 때, 그때,
복음이 들어올 때. 그러면 목사들은 쉽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거예요.
‘예수천당 불신지옥’ 말은 맞거든요. 근데 설교하는 본인도 말씀이 뭔지를 몰라요.
그러한 어떤 신학이 계속해서 이렇게 흘러온 거예요.
제가 고등학교때만 해도 저보다 좀 나이 많은 사람이, 어떤 사람이 성경학교를 갔느냐? 하면
고등학교 합격 못한 사람들. 다 그런 건 아닌데. 가는 게 문제가 아니에요.

그들 나름대로 변명이 있을 거 아닙니까?
‘베드로는 이 촌놈이었는데...’
베드로는 촌놈이어도요. 율법에 정통한 사람입니다.

성경을 이렇게 읽게 되면 복잡하잖아요. 오늘 우리가 7장 1절을 읽었는데
여러분들이 지금 복음을 들었는지 지금 중국에 계신 분들은 한 20년 넘었잖아요.
여기도 20년 넘으신 분들도 있고... 제가 한번 읽어드릴게요.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이 말씀이 이해가 됩니까? 우리 권사님들도 계시고.
율법만 나오면 모두가 다 벌벌 떨거든요.
왜냐하면 율법에 대한 해석이 명확하게 나오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이랬다가 저랬다가...

그런데 사도바울은요. 당당하게 이야기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여기에서 법은 율법이에요.
이 로마서를 옛날 성경은 왜 이렇게 번역했는지 모르겠어요.
율법이면 ‘노모스’면 그냥 율법이라 하면 되는데

왜 이 법이라고 했냐? 하면
뒤에 보면,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의문의 묵은 것”이렇게 나와버리거든요.
이 ‘의문’이라는 이 단어. 그냥 기록물이거든요. 이 단어를
바울이 쓸 때 ‘노모스’라는 단어를 써버렸으면 번역할 때 별 문제가 없어요.

그런데 결정적일 때 갑자기 “기록의 옛 것, 옛 것의 기록물”을 이야기를 해버려요.
왜 그렇게 흘러가느냐?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자체가 이방인과 유대인에게 공히 하시는 말씀이잖아요.
양심에 대한 언급을 했잖아요.

이 로마서에서 말하는 율법은 일차적으로는 이 율법, 유대인들이 보는 율법이지만
이 뒤에 “의문의 묵은 것”
이 의문이라는 이 기록물은, 그 율법 자체는 무엇을 모두 끌고 담고 있느냐? 라고 하면
이방인들이 갖고 있는 사고 방식을 다 끌고 다니면서 성경 전체를 끌고 와버립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 믿으라 구원을 얻는다.’ 이게 율법이라는 거예요.
법 아닌가요? 그러면 법 아니면 뭡니까?
예수 믿어야 구원을 얻잖아요. 예수 안 믿고 구원을 얻는 법은 없잖아요.

사도 바울은 처음부터 편지를 쓸 때 누구에게 쓰느냐? 라고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택정함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를 써요.
말씀이라는 게 그래서 어려운 거예요.
그러면 거꾸로 가는 겁니다.
뒤에 가면 야곱과 에서의 선택이 나오잖아요.
말씀이 ‘선택받은 자만 알아들으라’ 이 얘기입니다. 좀 과격하게 표현하면.
그게 과격한 게 아니고 복음적이죠.

반대로 ‘선택받지 못한 자들은 못 알아들으라’ 이 얘기입니다.
조금 더 들어가면 로마에 있는 교인들, 너희들이 복음을 안답시고 뭔가 은혜 가운데 있다라고 하는데
제가 좀 이렇게 약간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거만을 떨고 있거든요. 지금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지금 바울이 굉장히 논쟁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거든요.
그러면서 바울은 넉넉하게 얘기를 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이런 말씀들이 참~
‘형제들’이라면 법을 안다는 거예요. 어떤 법?
율법뿐만 아니라 앞서 이야기했던 이방인들이 갖고 있는 그 ‘양심의 법’까지도 다 알아요.

왜 압니까? 이미 기름 부으심이 그들 가운데 거하기 때문이에요.
‘안다’라고 하니까 ‘내가 이미 지식을 습득했다’ 쪽으로 이해를 하잖아요.
물론 이미 성령께서 알게 하셨죠. 사도바울에게.
알게 하셨는데 이 말씀을 이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바울조차도, 모든 성도들조차도,
이 말씀 속으로 지금 합류시키는 겁니다.

말씀은 항상 오늘날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거든요.
‘아 내 이전에 내가 들었어. 봤어. 그거 이제 다 알아.’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복음을 모르는 자예요.
꼭 성경 공부 좀 하고 배웠다 하는 사람은 나오는 말이 뭔가 하면
‘내 그거 배웠어. 알았어.’

이 구약을 읽어도 완전히 소경으로 읽은 거잖아요.
배우고 알고 체험하잖아요. 그게 소용이 있었습니까?
주께서 인도하시는 환경은 새로운 환경이거든요.
우리는 보면요. 우리는 그냥 그 환경일지 모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세요. 말씀을 통해서.
어제와 오늘이 달라요.

우리의 기분이 어떻습니까? 축구, 좋아하는 팀이 이기면 좋다가 지면 기분 나쁘잖아요.
‘아 나는 상관이 없는데?’ 갑자기 벼락 부자가 됐으면 기분 좋을 거고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한다”라는 겁니다.
이 율법을 제대로 아는 자들에게 말하는 거예요.
그럼 성도라면 율법을 제대로 알아야 되잖아요. 그죠?
그러면 율법을 제대로 안다라는 내용이 이제 뒤에 나오는데 이렇게 나옵니다.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야 정말 중요한 말씀이죠. 상식적으로 법이 있는데 대한민국 법이 있잖아요.
법이 있는데 그 법을 위반한 사람이 자살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법이 적용 대상이 아니죠.
그러면 고소가 다 어떻게 됩니까? 취하가 되잖아요.
많은 사람들이 이 본문을 그렇게 생각을 해요.

그렇게 생각을 하게 되면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가 없어요.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라고 할 때
이 말씀은 성령받지 못한 사람은 못 알아듣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주님이 찾아오시기 전에는 이 말씀을 못 알아들어요.
그런데 보세요. 주님이 찾아오시기 전에도 어떻습니까? 율법이 언제 적용이 돼요?
죽은 자에게 적용이 돼요? 안 돼요? ‘지켜라’ 이게 안 되잖아요.
산 자가 죽은 자에 대해서 처리를 하는 거지.

그러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한다고 그랬을 때 통치하는 거거든요. 통치. 이 통치.
이 성도만 알아요. 살아있을 동안에는 이 율법이 통치한다는 사실.
그런데 성령받지 못한 사람들은 이 율법이 통치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율법을 통치를 해요.

누가복음 18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18절에 보면
“어떤 관원이 물어 가로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질문을 했죠. 어떤 행위를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법을 달라는 거예요. 법을.
지금 이 사람은 율법의 통치를 받고 있어요.
통치를 받고 있기 때문에 뭐라고 질문하면서 나오는가? 하면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는 이야기예요.
본인은 율법의 통치를 받는 줄 꿈에도 생각을 못 해요.

성령 받은 이 누가나 이 성도들은 이 사람의 질문 자체가
‘봐 봐 봐 율법의 통치를 받고 있다’라는 거예요. 통치를 받고 있는데
문제는 이 당사자는 본인이 율법을 어떻게 하려고 합니까?
지키려고 하죠.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이 모습 자체가 통치라는 겁니다. 이 말씀이 되게 어려워지는데...

사도바울이 성령을 받기 전에, 주님을 만나기 전에 율법대로 살았잖아요.
살아버리면 율법의 통치를 받아요? 안 받아요?
우리가 법대로 다 살면 법의 통치를 받습니까? 안 받습니까?
법이라는 것은 위법할 때 들어오는 거잖아요.
법대로 살아버리면 그건 통치를 받는 게 아니에요. 법에 대해서 자유한 거잖아요.
제가 논리가 지금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죠?

사도바울이 주님을 만나기 전에 어떤 생각을 했습니까?
우리는 율법의 나라라는 거예요. 율법대로 우리가 살아야 된다라는 겁니다.
살아야 되기 때문에 그 율법대로 살아버리는 거예요.
살아버리니까 율법이 누구 손아귀로 옵니까? 자기 손아귀로 들어왔잖아요.

예수님이 말씀하셨잖아요.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자기들이 심판주가 되었다라고 말씀하시거든요.
법을 다 지키는 사람은 어느 위치에 올라가느냐? 하면
법의 통치를 받는 것이 아니라 법을 갖고 자기가 통치를 해요.
법이 자기의 종이 되는 겁니다.

지금 이 부자 청년이죠. 어떻게,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이 말을 들어보면, 얼른 들으면, 얼핏 들으면 법의 율법의 통치를 받겠다라는 쪽으로 들리잖아요.
그게 우리들이 속는 겁니다.
우리는 이미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이 질문 자체가 어떤 노림수를 갖고 있는가? 를 볼 수 있는 거예요.
율법의 통치를 받는다면 어떻게 되죠? 율법의 통치를 받으면 앞에 다 나왔잖아요.
“심판 아래 있게 하려함이라”

제가 이걸 두 쪽으로 나누는 이유가 있어요. 성도와 성도 아닌 자를.
이걸 구별을 해야 돼요. 구별을 하지 않으면 말씀 자체가 십자가를 전하는 말씀이 아니라
말씀 자체가 어디로 흘러갈까요? 나의 구원 쪽으로 흘러가게 돼 있어요.

사도 바울은 앞서서 이야기를 했잖아요.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율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그러면 그 율법이 주관한다라는 것을 누구만 아느냐? 할 때
성령을 받았을 때만 아는 거예요.
율법은 죄 아래에 가두고 죄를 더욱더 죄 되게, 이렇게 역동성 있게 일어나도록 유발을 하고
심판 아래 두게 함이라 그게 율법이에요.

신명기 28장 1절 한번 보겠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이 말씀을 이 부자는 어떻게 됐습니까?
‘율법대로 사는 것이 우리가 율법의 통치를 받는 것이다.’ 그렇게 듣는 거예요.
뒤에 보면 율법대로 살지 아니면 저주를 받는다 하거든요.
그러한 사고 방식이 이 부자에게 그대로 깔려 있는 겁니다.
이 사람은 율법이라는 것이 언어로 왔잖아요.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마는
그 창세기 11장에 이 구음이 하나요 그 서로 언어가 하나였을 때
그들이 무엇을 겨냥하고 하게 됩니까? 우리 이름을 내는 거거든요. 우리 이름을.

율법의 통치를 받게 되면 누구의 이름이 나와야 되는가? 하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의 이름이 나와야 돼요.
‘목사님 그럼 너무 나간 거 아닙니까?’ 나간 게 아닙니다.
지금 상대는 ‘법 아는 자들’이에요. 법 아는 자, 율법을 아는 자들에게 말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 그다음에 나오는 게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살았다라고 했을 때 단순히 뒤에 보면 남편이 죽었다 이 얘기를 하는데
성경은 육신적 죽음을 논하는 것도 있지만 그것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이미 앞서서 6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다” 하잖아요.
이 ‘장사되었다’는 것이 육체적 죽음입니까? 아니죠.
그래서 살 동안, 사람이 살 동안 그를 주관한다라고 했을 때
이 산다라는 것이 그냥 목숨이 부지되는 이야기만 하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살아있다라고 할 때는 이 부자 청년이나 아니면 사도바울처럼
신명기 말씀에 근거하여서 말씀은 우리에게 주신 그 목적이 있다라는 거예요.
‘지키면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라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는, ‘우리를 위해서 주셨다’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러한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 산 자들의 모습이에요.
죽지 않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율법의 통치를 받는다고 하면서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 라고 하면
자기 이름을 내는, 우리 이름을 내기 위한 그 최종적인 단계를 지향하고 있는 거예요.
율법이 얼마나 무시무시하냐? 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지 않았다면 인간의 이 악마성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자기들 쪽에서는 살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 여자의 이름을 하와로 바꾸잖아요.
자기가 살았기 때문에 말씀을 자기 언어 체계로 끌고 들어오는 거예요.
여자가, 하와가 첫째 아들을 낳았을 때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케 되었다.”
이 용어도 마찬가지예요.

율법이라는 것이 어디를 최종적으로 향하게 되느냐? 하면
주님이 율법을 주신 취지는 십자가인데
인간들에게 이 언어로 가게 되면 이 언어는 그 언어를 이용하여서,
율법을 이용하여서 본인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는 겁니다.

그게 에스더 1장 22절을 한번 볼게요.
느부갓네살 왕도 있지만 에스더를 왜 보느냐 하면
에스더는 그 느부갓네살 왕을 뛰어넘은 내용이 등장하기 때문에 그래요. 1장 22절
“각 도 각 백성의 문자와 방언대로 모든 도에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남편으로 그 집을 주관하게 하고 자기 민족의 방언대로 말하게 하라 하였더라”
아하수에로 왕이 기분이 좋아서 그 왕후 와스디에게 와서 그 아름다움을 뽐 좀 내달라고 하니까
자기 잘났다고 안 와버렸어요. 여기에 대해서 이제 이 화가 났죠.
아하수에로 왕이 화가 나서 이제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이 법이 됩니다.

법이 되면, 지금 여자들이 남편에게 그냥 이렇게 복종하고
남자가 그 집을 주관하는 단순히 그 차원을 뛰어넘는 거예요. 우리가 되죠. 우리 전체가 돼요.
그런데 이 ‘우리’가 최종적으로 향하는 자리는 어디냐? 하면
아하수에로 왕이에요. 이게 언어입니다. 언어. 말.

사람들이 히브리어, 헬라어 원어 찾고 앉았잖아요.
그 마지막 최종 자리가 이 자리예요. 거기에서는 십자가가 안 나옵니다.
그래서 주께서 성령을 주신 거예요.
말씀을 주실 때 하나님의 감동으로 주신 이유가 거기에 있는 거예요.

말씀만 줘버리면 인간은 이 언어를 갖고 새로운 뭘 창조하겠어요? 심판주가 되는 겁니다.
말씀의 체계를 끌고 앉아서, 지금 오늘날 우리가 그 모습을 보잖아요.
신천지나 이런 데서 하나님의 교회에서 그런 짓을 하잖아요.
자기들이 말씀을 끌어모아서 ‘우리야말로 진짜 구원받은 백성이다.’
그들은 성령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령을 인정한다고요? 인정하면 십자가가 나와야 돼요.
‘인정한다’는 말 자체가 의미가 없다니까요.
그러니까 ‘성령으로 감동되었다. 이건 성령의 말씀이다.’ 백날 이야기해도
나의 말이잖아요. 나의 말.
나의 말은 이 아하수에로 왕과 같이 절대 왕권을 지향하고 있어요.
그 속에 들어간 사람도 다 이만희가 되고 싶은 거예요.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들도 다 사장이 되고 싶잖아요.
능력이 없어서 아버지가 뭐 부자가 아니라서 못 될 뿐이지.
‘나는 그런 욕심 없어요.’ 거짓말을 하면 안 돼요. 율법의 통치를 제대로 안 받는 모양인데.

“탐심은 우상숭배라”는 말씀 자체는
‘모든 인간은 탐심이 있다’라는 것을 확정적으로 말씀하시는 거예요.
‘나는 돈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거짓말을 해도...
그러니까 이 사람은 제대로 된 율법의 통치를 못 받는 거예요.
죽은 자만이, 죽은 자만이 율법의 통치를 제대로 받았고, 받아 있고, 이미 끝났고.
이 내용을 다 담고 있어요.
갑자기 시제가 왔다 갔다 하면 또 정신이 하나도 없죠.

왜냐하면 지금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계속해서 과거 현재 미래로 지금 따져들어가고 있기 때문에
로마서 자체가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십자가 사건을 과거에 위치시키죠. 계속해서.
위치시키면서 그 사건을 현재로 끌고 와버려요.

십자가 사건은 이천 년 전 사건이 아니고
오늘날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핍박받는 현장이 새로운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는 현장이 돼요.
거기에서 무엇이 나타납니까? 오른편, 왼편 강도들이 등장을 하잖아요.
아닌가요?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하면
뒷부분에 가면 ‘여러분 우리는 이제 죽은 자기 때문에 율법이 더 이상 다스리지 못합니다.’
그 이야기를 하고 싶잖아요. 그래서?
뭘 이야기하고 싶어요? 그래서? ‘율법이 더 이상 통치 못한다.’ 그래서 뭘 이야기하고 싶어요?

‘통치 못한다’가 되면 그 내용 안에 뭐가 들어 있어야 돼요?
통치 못하는 사람의 특징이 뭔가? 하면요.
‘날마다 죽어야 하는 죄인입니다’가 돼요. 이게 논리가 맞습니까?
율법이 통치 못하면 죄인으로 드러나야 돼요? 안 드러나야 돼요?

율법은 죄를 죄로 드러내게 하잖아요.
그러면 율법이 우리는 이미 성도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니까
율법이 통치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하죠.
못하니까 죄가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안 나오잖아요.
그러니 말씀을 이해를 할 때 완전히 거꾸로 이해를 하는 거예요.

이 말씀을 제대로 해석하면 십자가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나야 되는데
우리는 ‘어떻게 하면 죄인이 안 될까?’로 말씀을 보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지금 로마서 같은 경우에는 왔다 갔다 왔다 갔다 계속 반복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를 듭니다.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이걸 일반론으로 들어가면 안 돼요.
이방인도 물론, 이방인도 이 결혼법은 창세기 2장 24절 말씀에 모두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받고 있는데 그걸 이야기하려면 율법을 반드시 언급을 해야 돼요.
우리는 이걸 보면서 ‘당연하지’ 그리 생각하잖아요.
남편이 죽으면 다른 사람에게 시집 가도 되잖아요.
그걸 우리는 당연하다고 여기잖아요. 맞죠? 아닌가요?

아니 남편이 살아 있는데 딴 데 시집 가면 어떻게 돼요? 이거는 간음하는 것이 되잖아요.
그런데 남편이 죽고 난 뒤에 시집을 가는 것은 문제가 없잖아요.
지금 고개를 끄덕끄덕거리시는데 그게 문제라는 거예요. 눈치를 채셨나요?

지금 율법을 갖고 오는 이유는 왜 이 이야기를 갖고 왔느냐? 하면
이 이야기를 하려면 마태복음 19장이 나와야 돼요. 한번 봅시다. 마태복음 19장
수요 예배 때 했는데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여서 질문을 하는데
어떤 이유를 갖고 와서라도 이 신명기 24장에 나오거든요.
“남편이 기쁘지 않으면 이혼을 해도 된다”라고 이야기를 해요.
거기에 대한 해석이에요. 해석. 해석이 힐렐 학파와 샤마이 학파의 해석인 겁니다.

이 이야기가 왜 중요하냐면요. 오늘날도 마찬가지잖아요.
‘성경 말씀이 있으면 정 목사 당신이 해석하는 게 있고 내가 해석하는 게 있고
뭐 이만희가 해석하는 게 있는데 뭐가 옳으냐?’ 이야기죠.
‘누가 옳으냐? 그 증거를 대라’고 이야기하고 싶잖아요. 맞죠? 아닌가요?

여러분들이 복음을 전할 때 ‘이게 진리입니다’라고 할 때 ‘그게 진리라는 증거를 대라’고 하잖아요.
그런 말을 할 때 뭐라고 합니까?
십자가 앞에서는 다 죄인이에요. 그게 답이에요.
그러면 나도 옳다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제가 해석을 이야기하잖아요. 사람들이 ‘무엇이 옳은 해석입니까?’
이들은 ‘간음한 여자를 버려야 된다’라는 주의가 있고
아니면 ‘남편이 기쁘지 않으면 어떤 이유를 무론하고 모세 율법에서 이혼 증서를 써주면 되니까
이혼하면 된다’라는 주장을 해요. 여러분은 어느 쪽을 따르겠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의 주장이 있잖아요. 맞죠? 예수님은 뭐라 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두 가지예요.
하나는 뭐냐? 하면 창세기 2장 24절 말씀을 더 확대시키는 겁니다.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 말씀도 무시무시하죠. 요즘은 결혼 안 하려고 하는데.
뭐 살다 보니까 자유로우니까 ‘나 혼자 살겠다’ 그것도 죄라는 겁니다. 지금.
말씀이 위반자예요.
사람들은 말씀을 보면 항상 자기 변명거리로 말씀을 대하는 거예요.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 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사람은 못 나눠요. 그러면 하나님만 나누죠.
하나님만 나누는 방식이 오늘 로마서예요. 남편이 죽는 방식. 아내가 죽는 방식이에요.

그런데 지금 마태복음 19장에서는 어떻게 진행되느냐? 하면
이렇게 말씀하니까
‘그러면 모세는 하나님이 처음에 말씀하신 그 말씀의 취지와 다르게
아내가 남편을 기쁘게 하지 못하면 이혼 증서를 써주고 이혼하면 집으로 돌려보내면 된다라고
했지 않습니까? 그것도 시내산에서 주신 율법이 아닙니까?’라고 따졌어요.
그러면 하나님의 법과 하나님의 법이 충돌을 하잖아요.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이 그 율법을 주신 당사자잖아요.
당사자니까 뭐라고 해석을 하는가? 하면 너희가 악하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악하기 때문에 모세의 율법을 주셨다라는 거예요.
그러면 모세의 율법뿐만 아니라 이제 어디까지 들어가야 돼요? 창세기 1장 24절까지 들어가야 돼요.
너희가 악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주셨다는 거예요.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이 될지라”
이 말씀조차도 악하기 때문에 주셨다라는 겁니다.
십자가를 증거하는 말씀이에요.

왜 이 이야기를 해야 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나는 부모를 떠나서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이 되어서 결혼했습니다’라는 사람은
뭐라고 이야기해요? ‘나는 말씀대로 살았다’ 이야기할 거 아닙니까?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거예요. 예수님의 말귀를.

그리고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하면
“음행한 연고 외에는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또 이혼을 하는 그 이유를 또 끄집어내는 겁니다.
끄집어내는데 그 끄집어내는 방식이 뭐냐? 하면
‘간음해라’라는 거예요. 간음.
‘제발 아내여 간음을 해라. 그래야 내가 이혼 정서 써주고 너 버리고 새 여자 만나...’
제가 과격한 게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은요. 인간의 탐욕 속에 이게 다 깔려 있는 거예요.

말씀을 오해를 해도(오해가 아니고) 완전히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는 거예요.
말귀를 못 알아들으니까.
그래서 이렇게 가르치잖아요. ‘간음하면 이혼해도 됩니다.’ 이렇게.
나중에 고린도전서에 가면 ‘믿지 않는 자가 갈리자 하면 갈리라’
그것도 또 뭐예요? 뭘로 바뀌어버립니까?

주님은 지금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책망하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을 기뻐하게 하기 위해서 그 말씀을 주셨는데
우리는 내 형편과 내 상황을 돌아보면서 그 말씀을 이용하려고 하는 거예요.

살아있는 자는 율법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를 지금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산 자는 이 말씀들, 예수님의 말씀도 새로운 율법이잖아요.
왜 복음으로 안 듣습니까?
복음으로 듣게 되면 죄인으로 드러나는데
율법으로 듣게 되면 내가 율법을 통치할 수 있는 위치에 올라가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해요.
‘나는 간음해도 잘 데리고 산다.’ 그걸 자랑하는 사람도 있다니까요.
이건 마귀에게 덮어 씌어도 이만저만 덮어 쓰인 게 아니에요.

지금 이 로마서에 의하면
‘하나님이 짝지어준 것은 사람이 갈리지 못한다’라는 말씀은 어디까지도 장악하고 있어요?
‘간음을 하더라도 네가 갈리게 못한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말씀을 드렸잖아요.
구원은 누구만 받느냐? 라고 하면 간음한 자만 받아요. 이게 복음인데...
음행한 자가 아니면 구원을 못 받아요.
너무 당황스럽습니까?

세리와 창기를 부르러 오셨다 했잖아요.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 하나하나 모든 것들이 간음한 자요. 음행한 자요.
그것이 드러났느냐? 안 드러나느냐? 그건 하나도 안 중요합니다.
말씀의 세계 속에 의하면 모든 인간이 간음한 자고 세리고 창기예요.

말씀의 취지를 모르는 겁니다.
자꾸 말씀의, 율법의 통치를 받아버리면 죄인 중에 괴수로 드러나는데
자기가 통치를 하려고 하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계속해서 정답을 찾아내려고 하는 거예요.
정답을 찾아내려고 하니까
‘그럴 것 같으면 결혼 안 하는 게 얼마나 좋습니까?’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이 죄 짓는 원천을 제거하자는 거예요. 그게 바로 악마성입니다.

성령을 받기 전에는 제자들이
‘그것이야말로 정말 하나님 앞에서 율법대로 살아가는 제대로 된 모습이라’ 이렇게 생각을 했는데
성령을 받고 보니까 그 모습보다 더 악마적인 모습이 없는 겁니다. 더 악마적인 모습이 없어요.

다시 로마서로 돌아와서 7장으로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이제 율법이 남편이죠. 율법이 남편인데
그 남편이 죽으면 법에서 벗어난다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에서도 또 문제가 생기죠.
율법이 죽어버리잖아요. 율법이 죽어버리면 어떻게 책망을 합니까? 우리를.
그래서 “율법이 죽었다”라는 이 의미가
앞서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받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라는 말씀과 같이 봐야 돼요.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이 말은 맞죠.
사람들은 이 부분을 듣고 싶은 거예요. 법에서 벗어나는 것.
그러니까 지금 사도바울이 이 로마서를 통하여서 정답을 주는 게 아니라
이 날 선 검으로 우리가 갖고 있는 사고 방식을 철저하게 토막토막 내면서
죄인 중에 괴수로 드러나게 하기 위한 조치임을 알지 못하는 겁니다.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그 예를 드는 겁니다. 지금.
죽었으면 당연히 어디로 가야 되죠?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야 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께로.
놀라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로 갔기 때문에 이 말을 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께로 갔지 않은 사람은 이 말을 못 알아들어요.

이 말씀을 통하여서 책망을 받아야 되는데 갑자기 왜 이 얘기를 하느냐? 라고 하면
“은혜를 더하기 위해서 죄에 거하자”라는 이 말 자체가 법이잖아요. 법이라니까요.
행위를 낸다라는 것은 다 법이에요.
로마서를 읽으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된다라고 계속해서 튀어나오는 말들은 법이 돼요.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할 때 그 말귀를 못 알아듣죠.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 삶”은 이 로마서 7장에 나옵니다. 뒷부분에.
새 생명 가운데서 사는 모습은요. 전후 관계가 있어요.
십자가가 있고 부활이 전후가 돼 있거든요. 지금 로마서는 전후를 명확히 합니다.
이 전 후를 이야기를 하면서 뭐라고 합니까?
이 전후를 계속해서 반복 운동을 하죠.
그러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걸로 끝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하리로다.”

그러면 손들고 또 질문할 거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아 감사하는데 왜 곤고한 자냐?’ 이 얘기예요.
곤고한 자기 때문에 다시 이 말씀을 하는 거예요.
“너희들은 율법에 대해서 죽었다”라는 이야기입니다.
남편이 죽었는데 왜 남편이 살아있는 것처럼 하느냐? 이 얘기예요.

‘아이 성도는 남편이 살아있는 것처럼 하면 안 되잖아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이 말 자체가 뭘 노리는 겁니까? 책망받기 싫은 거예요.
죄인 중에 괴수가 되기 싫은 겁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어떻게 보느냐? 라고 하면
책망을 받는 쪽으로, 죄인 중의 괴수로 드러나는 쪽으로 보는 게 아니라
답을 찾아서 ‘어떻게 하면 내가 완전한 자로 설 수 있을까?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는 자로 설 수 있을까?’ 그것을 지향하고 있다라는 거예요.

4절입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이제 이 말씀이 이제 더 어려워져 버렸죠.
자 죽은 자에게서 벗어났죠. 예수님과 함께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했으니까.
그러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한다는 거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을 위한 열매가 뭐냐?’ 이 질문이 중요한 거예요.

하나님을 위한 열매는 뭘까요?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렇게 되니까 사람들은
이 하나님을 위한 열매를 맺히는 것을 뭘로 생각하는가? 하면 다시 법으로 생각해요.
‘어떻게 살아야 된다’라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왜 목사님은 로마서를 읽는 대로 안 읽습니까?’라고 하면
주님이 성경을 읽는 대로 안 읽었어요. 제가 주님이라는 말이 아니고,
지금 말씀 자체가 십자가를 증거하는 말씀인데
사람들은 이 언어를 언어 체계, 우리가 갖고 있는 문법 구조를 갖고 해석을 하기 시작한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그 문법을 깨고 주시면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는 그것도 탐심이 드는데.
깨고 주면요. 어떻게 될까요? 깨고 주면요. 인간의 그 질서 잡는 악마성이 안 나와요.
왜냐하면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이 되었기 때문에
인간이 갖고 있는 그 언어 체계, 어법, 문법. 그 방식으로 말씀을 주시는 겁니다.

좀 쉽게 할게요. 율법을 주셨잖아요.
“지키면 복을 받고 안 지키면 저주를 받는다.” 신명기 28장을 읽어보셨죠?
그런데 거기에 어떻게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오느냐? 이 얘기예요.
인간의 문법과 어법과 원어 연구로 십자가가 나옵니까?
예수님이라는 인물, 나사렛 예수,
이사야 7장에 예언된 처녀에게서 난 그 예수가 나와요? 안 나와요? 안 나오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손 들고 ‘그러면 그럴 것 같으면 왜 주셨냐?’라는 거예요.
그 이야기하게 하기 위해서 주셨다는 거예요. 그 악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 욕망이 이런 거죠.
저도 로마서를 설교하면서 욕망이 논리적으로 정확하게 이렇게 해서 설교가 끝났을 때는
‘야 이렇게 흘러왔구나’ 이렇게 끝내고 싶죠.
그런데 말씀 자체가 그걸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 앞부분에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을 위한 열매’가 뭐예요? 하나님을 위한 열매가.
사도행전에 나오잖아요. 사도행전에 죽은 자들이 나오죠. 누가 죽었어요?
베드로와 요한이 죽었죠? 예수님과 함께 죽었잖아요. 그런데 죽었어요? 살았어요?
죽은 모습도 보이고 산 모습도 보이죠.

성전 미문에 앉은 자를 고쳤을 때는 자기가 죽은 자로 거기에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맞죠?
죽은 자로 드러냈어요.
그런데 고넬료 사건으로 가게 되면 베드로는 자기가 어떤 자로 나타납니까? 산 자로 등장을 하죠.
그러면 그 죽은 자의 모습으로서만 하나님을 위한 열매가 나옵니까?
아니면 산 자를 행세할 때도 하나님을 위한 열매가 나옵니까? 둘 다 나왔잖아요. 둘 다.

그러면 우리가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됩니까?
우리는 장단을 못 맞추게 돼 있어요.
우리는 계속해서 장단을 맞추고 싶어요. 맞추고 싶은데
말씀이라는 것이 우리가 원하는 장단을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일관성 있게 하고 싶잖아요.
죽었으니까 끝까지 베드로와 요한이 처음부터 ‘나는 아니오.’
그래 계시가 떨어지면‘예! 알겠습니다. 충성! 가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면 얼마나 좋아요?

아니면 갈라디아서에 나오듯이 이 게바가 외식을 할 때 그런 거 하지 말고,
‘이미 죽었는데 외식이 왜 필요해요?’ 우리 그런 생각 안 듭니까?
이미 주님과 함께 죽었는데 사람 눈치 왜 봐요? 그런 마음이 있죠? 벌써 복음을 좀 들어가지고.
그러니까 ‘사람 눈치 보는 게 이게 진짜 성도냐?’ 그게 마귀의 시험이에요.
‘그러면 목사님 사람 눈치 봐도 됩니까?’ 이것도 보세요.

우리는 계속해서 ‘눈치를 안 봐야 된다. 봐야 된다.’ 계속 법을 만들어내고 있어요. 법을.
법을 만들어서 그 법에 (어떻게?) 저촉 안 받으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말씀이 우리가 원하는 바, 내 기뻐하는 바,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그것만 싹 끌어모아서 본문을 연결하면 속이 시원하죠.

그러나 말씀은요. 정말 흔히 목사들이 하는 말처럼 이 모순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어요.
십자가와 부활도 모순이거든요.
왜냐하면 부활한 주님이 성령을 주셨다면
성령 받은 자들이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야 되는데 오히려 십자가의 능력을 제대로 보여줘요.
다 죽어요. 다 죽어.

안 죽는 사람 봤습니까? 없어요.
요한계시록을 보세요. 다 하나님의 말씀과 어린 양의 피 때문에 다 죽어요.
이게 부활의 능력이에요. 이게 모순이거든요.
그런데 인간들은 이 모순을 못 견뎌요.

십자가 지나서 부활이니까 시간이잖아요.
부활의 세계를 살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된다?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야 된다.
그 능력이 뭐냐?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는 건데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는 게 뭐냐? 라고 하면 구약으로 들어가요. 다시 율법으로.
‘말씀대로 살면 들어가도 복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내가 일천 번 제를 드렸는데 얼마나 하나님이 축복을 많이 해주시는지 몰라요.’ 그런 이야기를 쏟아내는 겁니다.
법이 되는 거예요. 법이. 지금.

복음을 들어도 인간은 이 법 만드는 것에서 못 벗어나요.
벗어나고 싶잖아요. 우리는. 그게 악마에게 속는 겁니다.
죄인이 되는 즐거움이 있어야 되는데...
이 시편 51편이 다윗에게는 얼마나 신나는 고백입니까?
‘그런 걸 아니까 그 고민 속에서 우리는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또 보세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그러면 주님과 연합했잖아요.
연합한 자가 이 땅에서 어떻게 드러나느냐 얘기예요. 그게 중요한 겁니다.
그게 방금 예를 든 이 베드로와 요한, 아니면 베드로의 모습 속에서 이 내용이 드러나는 겁니다.
그 하나님을 위한 열매는 딱 하나예요.
첫 열매가 주님이시니까
그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그 십자가를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열매예요.

지금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복음을 알잖아요. 십자가 복음을.
십자가 복음을 아니까 알아버리니까 뭐가 돼요? 죄인이 아니라고 하죠.
죄인이 아니라고 하는 그들에게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라는 이 말씀을 이들은 옛날 이야기로 듣지 않고
지금 이야기로 듣거든요.
그러니까 “그러면 죄를 더 짓자. 그러면.” 이런 논리를 펴는 겁니다.

5절입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죄의 정욕이 나오죠.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육인데 이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서 말씀하는, 중요하게 말하는 그 ‘사르크’라는 육인데
이 육신에 있을 때가 언제입니까? 과거입니까? 지금입니까? 미래입니까?

사도바울이 과거로 자꾸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십자가와 함께 못 박혀 죽었기 때문에 시제를 그렇게 보는 겁니다.
지금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하면
“육신에 있을 때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렇게 하니까
우리는 다시는 이런 모습이 안 나올 거라고 생각을 하잖아요.
안 나오는데 왜 죄인 중에 괴수입니까? 예? 안 나오는데.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거예요.

그리고 여기에서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할 때는”
이 죄의 정욕은 두 가지로 나타났죠. 로마서는.
로마서는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이방인들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욕심에 이끌려 자기 마음대로 사는 모습이 하나죠. 그죠?
동성연애부터 시작하여서 별별 요소들이 다 등장을 하잖아요.
물론 여기에 로마에 있는 성도들도 들어갈 수도 있는데

이와 함께 이 죄의 정욕이 바리새인과 서기관에게 역사를 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말씀대로 살아버려요.
지금 로마에 있는 성도들의 문제는 말씀대로 믿어버린 거예요.
물론 그들 중에 이방인처럼 자기의 그 욕심을 따라서, 소욕을 따라서
그 시대에 걸맞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겠죠.
어제 뉴스를 보니까 어떤 목사인가? 감리교 쪽인가?
그 사람이 동성연애 인정하는 이런 소리가 나오는데... 주님은 그런 걸 인정한 적이 없어요.
모든 것이 십자가 앞에서 지옥 갈 이유임이 드러나야 되는 거거든요.

지금 이 죄의 정욕이라고 하니까 사람들은 벌써 뭘 생각해요? 나쁜 짓만 생각을 하잖아요.
죄의 정욕 중에 가장 강력한 죄의 정욕이 바리새인과 서기관, 대제사장들의 죄의 정욕이에요.
성전을 장악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장악하여서 자신들이 주의 자리에 앉는 겁니다.
그런데 단순히 권리만 행사하는 게 아니에요.
그들은 말씀대로 살아버립니다. 본을 보여요.
이게 바로 죄의 정욕이 역사하는 몸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찾아오시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모든 것들이 뭘로 드러났어요? 죄의 정욕으로 드러난 거예요.
그전에는 그것이 죄의 정욕인지 꿈에도 생각을 못 했어요.

여러분 예배드리는 게, 말씀을 순종하는 게, 이렇게 듣는 것이 죄의 정욕이라고 인정하나요?
우리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나쁘다라고만 보잖아요.
그런데 그 자리에 우리가 오늘 이렇게 앉아 있는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뿐이라는 겁니다. 설교라는 것도 죄라고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거예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그러면 우리 지체 중에 역사를 했죠.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를 그분과 함께 자신이 죽으실 때 함께 죽여버리고
새 생명 가운데서 살게 하도록 하셨잖아요.
그러면 “새 생명 가운데서 산다”는 것을
우리가 갖고 있는 어법을 갖고 들어가면 어느 자리에 딱 가는가? 하면
바리새인과 서기관 자리로 가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어려운 겁니다.

여러분 죄의 정욕이 역사하는 모습이 뭔가? 하면요 성화론이에요.
맞잖아요. 성화론을 주장하는 자들이 지금 이런 신학이 있거든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은 받았지만
순종하지 않아서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갔다는 거예요.
근데 제가 아무리 봐도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를 아무리 봐도
그들이 순종해서 약속의 땅에 들어간 적이 없어요.

언약궤를 앞장세웠다라는 것은
‘너희들은 불순종하는 자야. 광야에서 멸망한 자와 똑같아.’
그러면 어떻게 들어갔느냐? 하면 언약 때문에 들어갔어요.
그저께 금요 설교했잖아요. 여호와의 맹세 중에 맹세라고요.

첫 번째 맹세는 열조에게 하신 맹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그 맹세로 인하여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겠다고 했는데
갑자기 하나님의 말씀은
불순종한 너희들은 이 악한 세대에서는 한 사람도 들어가지 못할 것을 맹세해요.
첫 번째 맹세에는 이 두 번째 맹세가 들어 있는 겁니다.
아무도 못 들어간다는 겁니다.

그럼 누가 들어갑니까? 없어요.
누구만 들어갑니까? 예수 그리스도로만 들어가게 돼 있거든요.
그걸 보여주기 위한 약속의 땅에 들어감이에요.

그런데 이 본문을 어떻게 해석합니까?
지켜야 된다는 거예요. 순종해야 된다는 겁니다.
왜 그런 주장이 나오느냐? 라고 하면
‘은혜로 구원받았다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방종하더라’라는 거예요.
방종하면 이렇게 얘기하면 돼요. ‘당신이 성령을 못 받았네요.’ 이야기하면 돼요.
근데 그 이야기는 못하고
‘성령을 못 받았네요’ 이것보다는 십자가를 이야기해야 되는데

성령을 못 받았기 때문에 십자가를 자랑하는 게 아니라
‘어차피 구원을 받았으니까 내 마음대로 살겠다’라는 거잖아요.
그것 갖고 지금 히트 친 대형 교단이 있잖아요. 다락X 라고.
‘이미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다 용서했으니까 니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
주님은요. 니 마음대로 살도록 우리를 부르신 게 아닙니다.
주님의 증인으로 우리를 불렀지.

주님의 증인이 되려면 반드시 하나님을 위한 열매가 나타나야 되는데
그 열매가 뭐냐? 하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하니까 사람들이 또 고상하게 보는데
십자가 안에 들어가 보니까 별별 인간들이 다 있는 겁니다.
우리가 오늘 한 20명 정도 모여 있으면 이 20명, 한번 들어가 볼까요?
세분화시켜서 세분시켜서 쫙 나눠가지고, 한 주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죄인 중에 괴수로 드러나는 즐거움이 있으면
모두가 다 십자가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나면서 감사가 나오잖아요.

그런데 이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이 말귀를 못 알아들으니까 계속해서 어떻게 받아들이냐? 하면
‘우리는 죄의 정욕이 역사하는 몸이 아니라 이제 예수님과 함께 죽었기 때문에, 새 생명 가운데서 살기 때문에 하나님 백성다운 모습을, 성도다운 모습을 보여야 된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게 뭔가 하면 십자가예요.
십자가는 뭐라고 그러냐 하면 도의 초보라고 해요.
말귀를 하나도 못 알아듣죠.

‘맨날 십자가야? 아니 십자가가 언제 십자가인데? 당신 처음 믿을 때 십자가였지 않냐. 이제는 십자가를 좀 버리고 (좀 더 어디로 가자?) 더 높은 곳을,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가자’ 라는 거예요.
백만송이 장미처럼. (그것도 좀 어떻게 보면 복음적인데...)
받은 거 내놓으라는 건데, 받은 게 뭐냐? 자세히 들어보면 이거 뭐예요?
그게 피거든요. 어린 양의 피를 받았는데
피를 내놓지 않고 뭘 내놓으려고 합니까? 사랑을 내놓으려고 해요.

이 교회에 오면 복음을 듣고 피가 나와야 되는데 뭘 내놓으려고 합니까?
사랑을 내놓으려고 하는 거예요. 요즘 우리가 사랑이 넘치잖아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기 때문에.

5절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오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만일에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고 있다면 이 얘기를 왜 해요? 할 필요가 없잖아요.
‘이미 우리는 육신에 있었는데, 주님과 함께 죽었는데 이제는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자’ 하는
이 말씀이 말씀으로, 인간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언어로 주셔서
하나님이 완전히 뭘로 만들어버렸습니까?
이걸 영원불변한 말씀으로 만듦으로 말미암아 이 말씀 속에 우리를 집어넣어버려요.

인간들은 말씀 속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말씀을 이용해서 자기가 말씀을 벗어난 인간이 되고 싶어 하잖아요.
이 세상을 자꾸 벗어나고 싶잖아요.
그러나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하여 이 말씀 세계 속으로 우리를 집어넣어버립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이미 함께 죽었기 때문에, 이미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자기 때문에
다시 이 말씀 세계 속으로 집어넣어서
이 말씀 세계에 해당 있는 자로 드러나게 하여서
십자가의 증인으로 만들어내는 겁니다.

우리는 지나가고 싶잖아요.
사도행전을 보면 짜증 나는 게 뭐냐? 하면 제가 짜증 나는 게 아니라
인간들이 짜증 나는 게 뭔가? 하면
처음에는 ‘내가 한 게 아니고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님이 하셨다.’
자기가 죽은 자의 모습을 그렇게 보이다가 시간이 지나면 성화가 돼야 되잖아요.
근데 갑자기 ‘나 못 먹겠다’ 이야기하잖아요. ‘나 못 먹겠습니다.’
갑자기 율법주의로 돌아가는 거예요. 이런 것들을 사람들은 눈여겨 보지 않아요.

성화론을 그렇게 주장하면 사도행전을 제대로 보셔야 돼요.
그 사도행전에 서신서를 집어넣으면 어떻게 됩니까?
바울이 그렇게 복음을 전하고 오랫동안 복음을 들었던 자들, 권면을 받았던 자들이
대부분 다 떠나갑니다. 대부분 다 떠나가요.

왜 그렇게 종결지을까요?
인간들은 상승 이론을 갖고 있거든요.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기 때문에.
처음 교회는 계속해서 부흥을 해야 된다는 논리를 갖고 있고,
더 커져야 된다는 논리를 갖고 있는 걸 다 깨버려요.

진짜 복음을 전하는 교회는 사라지게 돼 있어요.
‘목사님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요한계시록에 나오잖아요.
일곱 교회가 복음이 제대로 전파되니까 사라져 버렸어요.
왜? 그 책망하는 소리가 듣기 싫은 거예요.
내 나름대로 이 복음 때문에 목숨까지 버렸는데
‘책망할 거 있다. 이리 와 봐.’
아니 복음을 위해서 목숨까지 버릴 정도의 삶을 살았는데 책망할 그게 있다는 거예요.

“이제는 우리가”
이제는 우리가 이 표현을 쓰는 이유가 뭐냐? 하면
성도에게는 계속 “이제는 우리가”
‘그때는 이랬고 이제는 우리가...’ 이것이 계속해서 반복이 되는 겁니다.

구약을 읽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말씀을 이해를 못하느냐? 하면
그건 과거로 보기 때문에 그래요.
과거에서 현재로 넘어오면 계속해서 발전이 있어야 된다라고 생각하잖아요. 그죠?
교회도 우리가 이렇게 모인 지 한 1년 반 되면, 2년 되면
점점 커져야 된다라는 게 인간들의 마음이에요.
그게 인간들이 갖고 있는 탐심이거든요.

그런데 성경은 계속해서 우리를 리셋을 시킵니다.
어디로? 십자가로. 그게 성령의 역사예요.
성령의 역사라고 하니까 사람들은 성령의 열매라고 하니까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자비와 양선... 그걸 맺으려고 발악을 하잖아요.
우리 초등부 때 다 해봤잖아요. 포도나무 해갖고 사랑 희락 화평 9가지 열매...
그거보다 코미디가 없죠. 9가지밖에 없겠어요?
인간이 70억이면 70억 가지가 넘어요. 성령의 열매는.

왜 그러냐? 하면 그 열매가 맺혀지려면 십자가가 나와야 되기 때문에 그래요.
십자가 앞에서 죄인 되는 자가 사랑과 희락과 화평이 넘쳐요.
죄인이 안 된 자는 감사가 안 나와요.
여러분 십자가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났을 때 그것보다 기쁠 때가 없잖아요.
십자가 앞에 죄인으로 드러날 때 화평하지 못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예?
죽을 죄인이 용서받았는데.
그 상황으로 주께서 우리를 몰고 가시는 거예요.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이 죽었다라는 것이 계속해서 우리 몸에서 반복돼야 됩니다.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 벗어났다는 이 말씀도 반복돼야 되고요.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오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이게 이제 핵심입니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오.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여기에서 왜 바울은 “율법의 묵은 것”이라고 표현하지 않느냐? 이 얘기예요.
앞서서 율법, 율법이라고 했거든요. 물론 우리 번역에는 법이라 했는데, ‘노모스’라는 게 율법인데

그 “율법의 묵은 것”이라 하지 않고 왜 갑자기 이렇게 들어가느냐? 라고 하면
말씀을 듣게 되면 인간이라는 자체는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뭘로 봅니까?
법으로 봐요. 법.
뒤에 사도바울이 내 속에 하나님을 따르고자 하는 선한 마음이 있고
다른 걸 따르자는 마음이 있잖아요. 벌써 법이잖아요. 법.

이렇게 얘기하는 이유는
복음을 듣고 난 뒤에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온 성도들은 어떻게 살아가느냐? 라고 하면
이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긴다라고 할 때는 성령을 받게 되면 책망이 되잖아요.

그럼 책망은 어느 자리에서 나오는가? 하면
의문의 묵은 것으로 살아갈 때 책망이 나와요.
계속해서 법 조항이 작동하는 겁니다.

‘목사님은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자는 겁니까?’
율법으로 돌아가자는 말은 이런 거죠.
율법을 지켜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기쁨이 된다라는 거고
우리는 율법의 지배를 받잖아요. 좀 이미 벗어났다 했는데 그 말이 그 말이에요.

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기 때문에
더 이상 법이 우리를 지배하지 않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한다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여러분 그래 살 인간이 있습니까? 예? 이 법에서 벗어날 인간이 있냐? 이 얘기예요.
‘주일날 교회 가야 된다’ 이게 법입니까? 아닙니까?
‘나는 주님이 시켜서 왔다’ 시켰으니까 법이잖아요. 또.
계속해서 우리는 죄인이 안 되고 싶은 거예요.
그리고 이런 말씀을 보면서 ‘그래 의문의 묵은 것으로 하지 말자. 다시는 율법으로 돌아가지 말자.’

그 ‘율법으로 돌아가지 말자’는 말은 어떤 의미냐?
이렇게 해야 되죠.
율법으로 돌아간다고 했을 때는 두 가지예요.
하나는 자기 마음대로 사는 거예요. 구약 이스라엘처럼.
또 하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처럼 사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갑자기 이런 말씀을 들으면서
‘은혜가 넘치기 위해서 죄에 거해야 되겠네’라는 법이 튀어나와버렸잖아요.
“새 생명 가운데 산다”고 하니까
‘새 생명으로 살아야 되겠네.’ 법이 나오잖아요.

법이 나오면 그 법이 어디로 갑니까?
법은 언어잖아요.
그 언어는 “우리 이름을 내고”로 가게 돼 있어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한다”는 거예요.
법 모르는 자는 못 알아들어요.

‘목사님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어떻게 살기는요. 우리는 어떻게 못 살아요? 이 말씀대로만 살 수 있습니다.
그게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을 자세히 보면요.
출애굽을 시키죠. 그들을 출애굽 시켜서 시내산에서 율법을 줍니다.
율법을 줘서 광야 생활을 시키잖아요.
그러면 율법을 위한 광야 생활이에요.
그러면 이 율법에서 이스라엘은 못 벗어나게 돼 있습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배짱 있게 설교를 하는 거예요.
“형제들아”라고 부르면서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한다.” 법을 모르는 자는 말도 하지 말라.
그러면 법 모르는 자들이 꼭 뭐라고 이야기하는가? 하면
‘목사님 그렇게 이야기하면 우리는 (어떻게?) 다시 또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 아닙니까?’
말귀를 못 알아듣죠.

“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긴다”라는 것은 우리 쪽에서는 나올 수가 없습니다.
주의 일이에요. 주의 일입니다. 이건 주의 일이고요.
그다음 뒤에 나오는 “의문의 묵은 것”은 나의 일이 돼요.
그래서 지금 로마서 7장은 나, 주님 이렇게 막 섞여 있습니다.

한 가지만 더 얘기하고 마칠게요. 좀 시간이 되었지만
이 야곱을 보게 되면 야곱이 말하는 것이
언제는 야곱이고, 언제 하는 말은 주의 말씀이 돼요.
우리는 그걸 구분하고 싶잖아요. 그죠?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같이 섞여 있기 때문에.

그러나 복음을 전할 때는 그것을 구분해서 말을 하죠.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을 향해서 맹세하잖아요.
그 맹세가 야곱 개인의 탐심으로서의 말인데
그 말이 하나님께로 가게 되면 그 말한 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성취해버립니다.
죄인은 죄인으로 드러나고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대로 되어지는 그 상황으로 야곱이 이끌림을 받아요.

성도는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오.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라는
이 두 요소를 계속해서 뿜어내는 자들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게 하기 위해서,
의문의 묵은 것을 끊임없이 쏟아내는 저희들을 불러서 십자가만 바라보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법만 쏟아내는 저희들에게 복음을 주심을, 그 은혜를 부어주심을
감사하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 크신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성령의 새로움으로 섬길 것이오, 의문을 묵은 것으로 섬기지 않기를 소원하는
주의 백성에게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