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4-02-04 19:49
20240204 로마서 강해 51강 롬 8:5-8 하나님의 율법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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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4-02-05 0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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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04 로마서 강해 51강 롬 8:5-8 하나님의 율법

다 함께 묵상 기도드리겠습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 고백하겠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 말씀, 잠언서 26장 22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잠26:22)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

기도하겠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창조하셨기에, 죄인들의 속마음을 낱낱이 아시기에
남의 말하는 것을 별식과 같이 여기며 그 맛을 음미하는 그러한 죄인들임을
말씀을 통하여 책망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들이 남의 말을 하면서 별식처럼 여기는 그런 인생이 아니라
진정한 타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말할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복음을 끊임없이 쏟아내는, 복음을 말하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시편 84편 5절에서 8절까지 말씀을 교독하겠습니다.
[고라 자손의 시 영장으로 깃딧에 맞춘 노래]
(시84:5~8)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셀라)”

이 시간 김명희 집사님 우리를 대표해서 기도해 주시겠습니다.

함께 기도드리겠습니다.
복음을 처음 들었을 때 첫사랑의 설레임으로
나중된 자, 창세전 언약에 의해 선택된 자, 주님의 12제자가 된 것처럼 두근거리던 그 벅차 올랐던 기쁨도 잠시
약속된 구원과 축복을 이 세상에서 누리고자 세상 권세를 탐하고 구걸하는 자로,
죽음과 고통에 떨고 사업이 망해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로 들통이 납니다.

복음은 오늘도 쉴 새 없이 사건을 유발시켜 매일매일 예수를 죽인 가해자임을 드러내고
이미 십자가의 보혈로 용서되었음을 아는 뻔뻔한 자로 폭로시킵니다.
이제 우리의 남은 인생은 미련한 자, 게으른 자의 모습으로
십자가의 증인으로 온전케 주님이 죽여주는 삶을 삽니다.
이만큼 끌려왔으니 또 그만큼 끌려가게 하소서
그 여정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가는 길임을 알게 하시니 두렵고 떨리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고
오롯이 주님이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으니 그 놀라운 사랑과 긍휼에 감사드립니다.
이 모든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나님 말씀, 로마서 8장 5절에서 8절 말씀을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롬8:5~8)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아멘.

‘아멘’ 하셨습니다.
5절에 보면 “육신을 쫓는 자, 따르는 자”
그리고 “성령을 쫓는 자, 따르는 자” 이렇게 말씀하고 있죠.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은 종입니다. 사망의 종이라고도 하고요.
악마의 종이죠. 출생 성분이 나빠요.
‘너그 아버지 뭐 하시노?’ 이래 물었을 때
‘울 아버지는 마귀입니다.’ 여기에서 어느 누구도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교인들은 아니면 목사들이나 신학자들은
‘육신을 쫓는 자는,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한다’라고 하니까
‘그래 오늘부터 결심했어. 육신을 쫓지 않고 성령을 따르면서 성령을 쫓으면서 살아야지.’
이렇게 생각을 할 수밖에 없고요. 이 모습이야말로 가장 육신을 따르는 모습이에요.

남은 자 유대인들의 착각이 무엇이냐? 하면요.
말씀을 자신들이 다룰 수 있다라고 생각한 겁니다.
거의 한 1200년~1100년, BC 1100년이죠. 그 유구한 역사를 끌고 오면서
이들은 말씀에 대해서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거기에 대해 연구를 해온 거예요.
‘말씀대로 살면 복을 얻고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는
그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선악 논리가 구약 성경에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렇게 되어 있죠? 선악 논리가 그대로 나타나 있잖아요.

‘목사님 범죄해도 살리던데요.’
살리기는 살리는데 범죄하면 죽이기도 죽여버립니다.
우리가 계속 지금 신명기를 주중에 보고 있는데 출애굽 세대들을 다 죽이시잖아요.
그리고 사사 시대에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그들을 또 심판을 하시고
왕을 달라고 하는 그들, 그 왕을 주셨을 때 그들이 원하는 왕조차 말씀에 불순종하죠.
우상을 만들어서 예루살렘 성전을 우상의 전당으로 만들었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상을 만든 그 이스라엘도 하나님이 심판하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실 것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잖아요. 그렇게 하셨습니까?

성경은 분명한 게 악을 행한 자는 반드시 심판을 합니다. 율법 위반자는.
이 원칙이 바뀌지가 않는 거예요.
그 내용을 누가 알고 있는 있느냐? 하면
예수님을 만나기 전 사도 바울, 사울이죠. 사울이 알고 있고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겁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육신을 쫓는다”라고 했을 때
지금 로마 교회 안에도 누가 들어와 있습니까? 유대인 중 그리스도인이 있을 것 아닙니까.
오늘날 우리가 다 이방인인데 얼마나 코미디냐 하면
이방인 주제에 유대인 행세하는 인간들이 너무 많다는 거예요. 정신병자입니다.

이방인인데 이방인은 이스라엘 백성은 될 수가 있어요.
그런데 말씀을 해석을 할 때
왜 유대인이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그들은 말씀을 진지하게 봐요.
말씀을 가볍게 보지 않습니다. 목사 치고 말씀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사이비 집단의 목사들도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면서 엄중하게 생각을 해요.

만일에 이 유대인 계통이 이 말씀을 듣는다면
“육신을 쫓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한다”라고 했을 때 그 육신의 일이 무엇이냐? 라고 하면
사울이야 알죠.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그러면 목사님 주님을 만났다면 이런 생각을, 유대인과 같은 생각을 더 이상 하지 않아야 되지 않습니까?’ 라고 질문을 할 것 아닙니까. 맞죠?
대부분의 이 목사나 교인들이, 성도라고 하는 사람들이
‘성령을 받았다면 육신을 쫓는다는 그 생각, 육신을 따라 행한다는 생각은 없어야 된다’라고 생각을 하고 있잖아요. 그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 라는 겁니다.

왜 그렇게 계속해서 이런 말씀에, 서신서에 나오는 이런 말씀들에 미혹을 당하는가?
상당히 위험한 발언이죠. 말씀에 미혹을 당하는 거예요.
말씀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우냐? 하면
마귀가 말씀을 먹어버리면, 마귀가 말씀을 장악하면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모든 말씀을 누구 중심으로 해석을 합니까? 마귀 중심으로 해석하거든요.
그 마귀가 누구예요? 사람이거든요. 사람.

왜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실 때 이 양날의 검처럼 복음을 우리에게 주셨느냐? 라고 하면
인간이라는 자체가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주시면 다 장악을 한다는 거예요.
심지어 십자가 복음조차도.
한 단계를 거쳐왔으면, 사복음서를 거쳐왔으면 더 이상 유대교적 사고방식이나
이방인적 사고방식이 교회 안에 머물 수 없어야 되는데
오히려 진리의 복음을 듣고 그 복음의 세계로 깊숙이 들어간 그 이후에 어떤 모습을 드러내느냐 하면
거꾸로 가는 거예요. 역행하는 열차처럼.

그 이유는 성도 같은 경우에는 십자가의 사랑을 알아가게 하기 위한 조치지만
성도 아닌 자는 오히려 그 과정을 통하여서 제거시키기 위한 조치예요.
‘목사님 한 번 선택했으면 아니 구원하는 거는 당연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한테 묻고 싶어요. 성경 필요 없잖아요.
성경이 왜 필요해요? 한 번 선택받았으면 끝났는데.

그럼 말씀은 뭐가 되느냐? 하면 취미 생활이 되죠.
‘살아서 운동력이 있어 찔러 쪼갠다’는 이런 말씀들이 다 취미.
아니면 ‘나의 복을 얻기 위한’ 그러한 어떤 주술적인 의미로서의 성경 말씀.
오늘 어떤 사람이 (제가 우연히 뉴스를 보는데) 무당이 그런 말을 한대요.
‘집으로 들이지 말아야 될 요소가 두 개가 있는데 거울과 밥통이다’ 뭐 그런 거 혹시 들어보셨나요?
들어보셨다고요? 거울을 통해서 귀신이 잘 들어오고 밥통을 통해서 뭐 귀신이 잘 들어온다...
그 자리에 복으로 바꾸려면 거기에 말씀이라는 자리를 집어넣으면 되잖아요.
성경 말씀을 그렇게 보는 겁니다.

‘목사님 그러면 성령을 받으면 그냥 로마서 8장 5절을 읽어버리면 깨닫지 않습니까?’
이 말이 맞아요. 맞는데 틀렸어요.
그 맞다라는 것이 어떻게 드러나느냐? 하면
이미 성도들은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에 이 절차적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느냐? 하면
우리의 악마성을 드러내면서
이 말씀을 이미 모두 안 자로, 말씀은 안 자로 이렇게 표현을 하는데
달리 표현하면 십자가 사건에 참예하는 자로 드러내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선악과를 먹은 인간들은 이런 말씀들을 보면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있으니까 다 깨달았지 않습니까?’라는 식으로 덤비는 거예요.
목사가 설교를 할 때 언어적 한계가 있어요. 똑같이 육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한계가 없죠. 듣는 자들이 문제였죠. 그 언어적 한계를 갖고 표현을 하면
듣는 사람들은 그 언어적 한계가 진리 인양 그걸 포착을 해서 그걸 자기 소유화를 시키는 거예요.

사실 신학자들의 문제가 언어적 한계 속에 있으면서
마치 그 언어 체계가 진리 체계를 다 담은 양 이야기를 하거든요. 성경을 안 보는 모양이에요.
여호와 하나님이 출애굽을 시켰는데 광야길을 인도한 여호와 하나님을 눈으로 목격한 그들이 생산한
여호와는 어떤 여호와입니까? 황금 송아지잖아요.

그러면 황금 송아지를 쫙 빼버리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출애굽기 32장 가기 전까지 여호와 하나님을 쫙 설명해서
‘여러분 어떤 하나님입니까?’ 물으면 뭐라고 하겠어요? ‘언약의 하나님’
맞아요. ‘언약의 하나님’ 그걸 그들이 안 믿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언약의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입니까?’
‘우리를 애굽에서 구원한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그래요. 우리를 애굽에서 구원한 언약의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입니까?’
황금 송아지가 나와요.

누가 그 황금 송아지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요? 요기 있잖아요. 여기. 지금 여기.
신학자들이 얼마나 무식하냐? 하면
성경을 연구하더라도 그게 안 보이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들이 보는 안목은 선악 구조를 못 벗어나요.

‘목사님 성령 받으면 선악 구조를 벗어날 수 있지 않습니까?’ 맞아요.
선악 구조를 벗어날 수 있는데 벗어날 수 있다라는 그 말씀 안에는 똑같은 거예요.
육신을 쫓는 내용이 담겨 있으면서 영을 쫓는 내용이 거기에 엎쳐져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영을 쫓는다는 것은 순수 영역이잖아요. 옳은 영역이잖아요.
근데 성령을 쫓아 행하면 무엇이 드러납니까?
육신을 쫓아 행했던 것들이 다 들통나게 되잖아요.

정답이라는 것을 선악 구조 속에서 선을, 정답을 계속 원하기 때문에
신학자들이 그런 식으로 성경을 푸는 겁니다.
그게 사람들에게 먹히는 거예요. 왜 먹히느냐? 저그 아버지가 마귀거든요. 자기 아버지가.

성경을 이렇게 가르쳐 보면 사람들이 좋아하거든요.
본문을 이렇게 풀어주면 좋아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내가 원하는 진리의 체계를 이해했다’라는 겁니다.

그런데 복음이 전파가 되면 그것이 복음으로 바뀌거든요. 복음으로 바뀌어버리면
‘니가 아는 체계가 무너져야 된다’라고 복음이 설파가 된단 말이에요.
그러면 화가 납니다.
왜냐하면 본인은 그 진리 체계를 지식을 쌓아서 자기를 견고케 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십자가라는 것으로 확 밀어버리니까 불쾌한 거예요.
그 불쾌함을 당해야 되죠.

책망을 받는다고 할 때 사람들은요. 오해를 하는 게
‘나 책망 받을 준비 됐어.’ 그러니까 책망을 하면 기분 좋게 책망받는다 이런 망상을 하는데
그러면 그건 책망이 아니죠.
책망이 들어오면 온갖 육적 요소들이 올라와야 돼요.
그것들을 일으키시면서 성령께서는 십자가 앞에 그 사람을 세우는 겁니다.

신약 성경 말씀이 왜 어려우냐? 하면 구조 자체가 어려워요.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오게 되면
구약적 하나님의 말씀의 그 체계 자체는 굉장히 육적인데 굉장히 영적이에요.
이것도 또 어려운데 1차적으로 보면 그냥 한 라인인 것 같아요.

호세아서 6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왜 이런 말씀들을 봐야 되느냐? 하면 이 마귀가 우리를 속이기 때문에 그래요. 마귀가.
6장에 보면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이렇게 외치잖아요.
5장 15절에 보면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서 저희가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기다리리라. 저희가 고난을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여 이르기를”

이 북이스라엘을 중심으로 남유다도 마찬가지인데
로마서 1장 18절 이하에 나오는 그 범죄함이 호세아서에 다 나와요.
호세아서에 그 범죄함이 다 담겨 있습니다.
그렇게 범죄 할 때 하나님이 그들을 칩니다. 칠 때 그들이 괴로우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다라고 하거든요. 괴로우니까.

그러면 호세야 5장 말씀을 보면 이것을 그대로,
사실은 괴로와도 안 찾아요. 다니엘서를 보면 딴 생각하고 있다가 70년을 깨달아요.
그렇게 기도가 나오거든요. 비로소 깨달았다 이렇게 나옵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어찌 되었든 이 내용이 그 다니엘을 지나서
예수님 당시로 가게 되면 이 로마 압제하에 있는 그 상황에서 이들이 이 말씀을 어떻게 보겠습니까?
간절히 구할 때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 것이다라는 기대감을 갖고 있어요.

그리고 6장 1절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돌아가자”
이 ‘여호와께 돌아가자’ 이 돌아가자라는 것이 정점에 오르는 시점이
계시가 단절된 그 400년 그 기간입니다. 흔히 신학적으로 중간사 기간이거든요.
우여곡절을 다 겪으면서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라는 그 신학사상.
그것이 회당 중심으로 예루살렘 중심으로 그렇게 이루어진 겁니다.

돌아가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오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돌아가면 우리를 치료해 주신다는 거예요.
전도를 할 때 요즘도 그렇잖아요.
‘예수님 믿으면 가정의 문제 해결됩니다.’
많이 들으셨죠? 그것이 이런 데서 나오는 거예요. 여호와께로만 돌아가면...

그러니까 여호와와 이들은 뭘 모르는가? 하면
여호와와 예수님이 완전히 이 대적 관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몰라요.
여호와가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우상이 됩니다.
우상이 되는 것을 몰라요. 성령을 못 받았으니까.

“여호와께로 돌아가면 우리를 고치실 거다.” 그 말은 맞아요.
고친다는 의미가 우리가 예상하는 그 방식의 고침이 아니고 문제 해결이 아니라
문제 해결은 맞아요. 문제 해결은.
맞는데 그 문제 해결은 주님께 돌아가면 우리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버리고
이제는 내가 더 이상 살지 않는 인생, 그 피만을 증거하는 그 인생을 살게 된다라는 거예요.
사실은 문제 해결이 아니에요. 새 창조입니다.

문제 해결은 어떤 경우냐? 하면
창조를 했을 때 문제가 발생했으니까 예수님을 중간에 투입시켜서 문제를 해결해가지고
원래 창조 세계로 돌리겠다라는 게 그게 문제 해결인데
목사들이 그런 말을 함부로 막 내뱉잖아요.
거기에 다니는 교인들이 왜 그게 마음에 드느냐? 하면 그렇게 보이잖아요.
왜냐하면 우리는 다 현실의 모든 것을 문제라 하잖아요. 문제.

근데 주님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당하는 모든 것들이 ‘문제 아님’ ‘해결 끝났음’
십자가에서 이미 다 끝냈다라는 겁니다.
그걸 증거하기 위해서 문제 속에 우리를 두는 거예요.

그러면 영에 속한 사람들은, 육에 속한 사람들은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덤벼들겠지만
영에 속한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해결 안 하려고 덤빌까요?
똑같이 해결을 하려고 덤비죠.
덤비면서 누구와 마주치게 됩니까? 십자가 사건과 마주치게 돼요.
죄인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호6:2절에 보면 그렇게 나오죠.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이틀, 삼일이라는 말은 ‘바로, 곧’
물론 예수님의 죽으심 이것을 이야기할 수도 있는데 성령 받기 전에는 그걸 몰라요.

여러분 이틀이 깁니까? 짧습니까?
그런 일을 한번 당해보세요. 1시간도 얼마나 긴지 몰라요. 1분도 얼마나 긴지 몰라요. 그죠?
지금도 그걸 당하는 사람들이 있을 줄로 압니다마는.

어찌 되었든 이 언어가 너희들이 그렇게 범죄를 했지만 여호와께로 돌아오면
여호와께서 금방 고친다라는 거예요. 그러면 안 돌아갈 사람이 있겠습니까? 라고 하면요.
없다라는 말을 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역사적 사건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떤 환경 속으로 몰아넣느냐? 하면
이 말씀대로 지키려고 하는 자들을 만들기 위한 환경으로 몰아가요.
그 방식이 계시의 단절이에요.

그러면 이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오죠.
돌아오고 난 뒤에 이들이 뭘 기다립니까? ‘여호와께서 자신들을 치료해 줄 것이다.’
어떻게 치료해 주느냐? 그건 이미 선지자, 이사야나 이런 선지자를 통하여서
아브라함 언약의 완성, 메시야 왕국, 다윗 왕이 다스리는 그 세계를 시온산을 중심으로 만들어
주실 것이라는 그 기대감을 품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질문하겠습니다. 이게 뭐가 잘못됐습니까? 말씀대로 믿잖아요.
여호와께로 돌아가는데 그냥 뻔뻔하게 돌아가느냐?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금 6장 이후에 보면 이들이 이 앞부분에도 나오지만, 아예 호세아한테 뭐라고 합니까?
이 창기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으라 하잖아요. 사람들은 이런 걸 너무 낭만적으로 봐요.
만일에 호세아가 그 고멜을 사랑하고 있었는데
‘야 호세아야 너 가서 니 아내를 삼아라’ 그러면 ‘예’라고 갈 거 아닙니까?

선지자입니다. 호세아가. 그럼 창기를 어떻게 여겼을까요? 예? 어떻게 여기겠습니까?
개처럼 취급할 것 아닙니까? 그런 여자와 결혼하라는 거예요.
미쳤어요? 누가 그렇게 결혼하겠습니까? 아무도 못해요.
근데 요즘 보면 그렇게 하겠다라는 사람들이 있는데
할 수는 있죠. 왜? 그렇게 한 사람에게는 십자가가 안 나와요. 자기 의로움이 나오지.

그런 이 창기, 고멜과 결혼을 시키는데 이스라엘의 형국이 그런 거예요.
이 창기, 음란한 여인.
음란하다라는 것은 우상숭배와 연결이 돼 있습니다. 이게 맞물려 있어요.
신약에 와서도 똑같습니다. 우상숭배와 음행이, 간음이 맞물려 있어요.
이렇게 되면 신약 말씀을 만만하게 못 봅니다.
제가 설교할 때마다 강조를 하지만
시내산은 불붙는 산에 있을 뿐입니다. 불타 죽는 것이 가장 괴롭다고 하는데
그런데 신약의 말씀들은 지옥 보내버립니다. 안 타 죽어요. 타긴 타는데 안 죽어요.

호6:3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여호와를 힘써 알자라는 거예요. 힘써 알면 뭘 기대합니까?
언약의 땅에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리셔서 그 땅을 풍요롭게 했듯이 우리를 축복해 주실 것이다.
그래서 여호와를 알자라는 겁니다.

이 구절을 갖고 또 목사들이 사기치는 인간들이 있잖아요.
‘여호와를 알자. 성경 공부를 열심히 해야 됩니다.’
그 성경 공부 열심히 한 자들이 예수님을 살해한 바리새인과 서기관이에요.
지금 그 얘기를 하고자 하는 거예요.

그러면 ‘여호와를 알자’라고 했으니까
말씀을 들어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여러분 이 말씀을 어떻게 해야 돼요?
들어야 돼요? 말아야 돼요?

제가 신명기 설교할 때 그런 말씀을 드렸잖아요.
‘부모를 공경하라’ 했을 때 부모 꼬라지가 존경할 만한 꼬라지입니까? 아닙니까?
여러분이 자녀들이 다 있잖아요. 없는 분도 계시지만 자식을 키워보면요.
뭘 얘기하면 ‘아버지는 뭘 그렇게 잘하셨냐?’ (뭐 제 딸이 그런다는 건 아니고...)
환경이 그렇게 되거든요. 환경이.

아버지가 부모가 말을 할 때 자식들이 뭘 갖고 근거를 댑니까?
‘아버지는 그렇게 살았느냐?’ 이거예요. ‘엄마는 그렇게 살았느냐? 왜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그런 놈을 죽이라는 게 성경이에요. 끌고 가서 죽여야 돼요.
누가 부모를 공경하겠느냐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말씀이라는 것은 그렇게 작동을 안 해요.
‘공경하라’는 것이 그들의 행실을 보고
‘본을 보여라’는 것은 그 ‘본’도 어떤 ‘본’인가? 하면
율법 앞에서는 안 지켜도 된다는 게 아니라 열심히 지키려고 애를 쓰는 가운데
율법에 대해서 못 지키는 상황과 또 하나는 아예 안 지키는 상황과 경우의 수가 여러 가지가 있어요.
그런 상황 가운데서
못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긍휼이 임한 부모. 그 내용을 담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긍휼만 이야기하면
‘은혜를 받았으니까 죄를 지어도 용서받은 부모니까...’ 그것만 보면 율법 들을 필요 있습니까?
없습니까? 지킬 필요가 없잖아요.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말씀을 열심히 연구하고 알아가자.’
이 복음의 비밀을 더 깊이 알면, 깊이 알면 마지막 도달 지점이 무엇일까요?
내가 바로 마귀의 아들임이 들통납니다.
이게 복음의 세계예요.

그런데 지금 호세아를 읽는 유대인들이나 오늘날 교인들이 이걸 읽을 때 어떻게 읽느냐? 하면
이 말씀의 체계가 복잡하게 연결돼 있거든요.
하나만 나오는 게 아니에요. 방금 이야기했잖아요.
안 지켜서 심판을 받았기 때문에 지켜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분명히 있고,
그래서 못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긍휼이 임했다라는 것도 분명히 있고
못 지켰으니까 심판을 받았다는 내용도 같이 있어요.
이게 한 4가지 시스템이 같이 작동을 하는 겁니다.
근데 우리는 선악 구조 속에서 하나를 뽑아내려고 하죠.

조금 더 보겠습니다. 호6:4절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하나님의 사랑을 원했거든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원했는데
이들이 타인에 대한 그 불쌍히 여김 이런 것들이 없어요.
‘쉬 없어지는 이슬 같다’는 겁니다.

불쌍히 여김이 없다라는 것은 그걸 역으로 이야기하면 모두가 다 강퍅한 거예요.
왜 강팍합니까? 왜 오늘날 철저하게 개인주의가 되었습니까?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왜 그럴까요?
내가 가장 소중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나의 소중함을 계속해서 유지를 하려면 돈이 가장 중요하죠. 권력이 가장 중요한 겁니다.
그러면 돈과 권력은 남을 짓밟지 않고는 획득할 수가 없어요.
이게 이 세상의 법칙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가장 이 십계명을 주시면서
‘애굽 땅 종 되었던 곳에서 인도함을 받았다’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그들에게 근본적으로 원하는 것은 사랑이잖아요.

사랑의 그 최종 목적은 뭡니까?
‘너 죽으라’ 이야기거든요. 너 죽어라. 그게 사랑인데 이들은 그 말씀에 합류하지를 않습니다.
왜? 약속의 땅에 들어가 보니까 필요한 게 뭐예요?
여러분 이 땅에 살아보니까 가장 필요한 게 뭐예요? 돈이잖아요.
근데 돈만 있으면 됩니까? 많이 있어야 되잖아요. 많이.

그저께 뉴스 보니까 셋째 아기를 낳으면 1%대 이자를 준대요. 혹시 아세요? 집사님?
그거 대출했습니까? 그게 2023년생부터 된대요. 우리 언이가 딱 해당되거든요. 1%대 그걸 준대요.
대출을 준대요.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돈이잖아요. 얼른 챙기세요. 그런 거는.
이 돈보다 더 중요한 게 없거든요.

인애는 필요 없습니다. 인애는 돈을 잃는 체제거든요.
타인에 대한 긍휼은 나를 잃어버리는 그 시스템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그런 걸 원치 않습니다.
이 북이스라엘이나 남유다가 그런 상황 속으로 내몰려요.
내몰리면 돈이 중요한 거예요. 우리도 지금 오늘 여기 마지막인데 이 마지막이 되면 설렙니다.
어쨌든 미리 장소가 결정이 됐는데 또 더 좋은 곳으로 가네요. 망하니까.
여기보다 환경이 훨씬 좋아요. 화장실도 좋고... 안 추워요. 거기는. 교통도 뭐 아주 멋지고.
모든 게 돈이잖아요.
사람들은 죄가 안 드러나려고 하거든요. 조금 더 보겠습니다.

호6:5절.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저희를 치고 내 입의 말로 저희를 죽였노니 내 심판은 발하는 빛과 같으니라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이 얘기를 하니까 사람들이 뭘 생각하겠어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인용했는데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는
나의 목숨을 원하는 게 주의 뜻이라고 얘기를 하는데

또 꼴값 떠는 인간들은 성경을 해석하니까 인애가 이슬처럼 사라지는 인애니까
‘인애를 행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거야.’
그래서 교회 재정의 50%를 구제로 쓰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런 교회가 있잖아요. 칭찬받거든요.
저는 한 99%를 쓰고 싶어요. 헌금이 한 천억 나오면. 왜 안 웃으세요? 한 천억 나오면.
말씀은요.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내가 지켰다라고 하면
그건 자기 쪽에서 지킬 만하기 때문에 지킨 것이고 그거는 말씀에 대한 순종이 아니에요.
말씀은 항상 불가능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거예요.
제가 어떤 분이 어떤 목사님과 얘기를 하다가 복음을 전하는 목사님인데
아니 부자일 때는 헌금을 안 한다는 거예요. 그분이.
그런데 망하니까 헌금을 하더라는 거예요. 그분이. 불가능이거든요.

호6:7절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내게 패역을 행하였느라”
지금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게 이거예요.
‘아담처럼 언약을 어겼다’라는 거예요.
이것 갖고 또 신학자들이 ‘아담 언약이 있다’ 이런 주장을 펼치는데
그 사람들의 문제가 뭐냐? 하면요.

하나님께서 언약이라는 말씀을 썼을 때,
이 ‘베리트’라는 이 언약을 썼을 때 (맞나요? 베리트라는 용어?) 이 언약이라는 이 용어를 쓰실 때
하나님은요. 언약의 요소가 여러 가지가 있거든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아담 같은 경우에는 불순종이잖아요.
불순종이라는 것은 모세 언약에 의하면 거기에 대해서도 율법에 대한 불순종이 나와요.
언약을 배반한다라고 할 때 신명기에도 나오거든요.
언약 배반이라는 것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라는 게 언약 배반으로 이야기해요.

그러면 이 언약을 이야기할 때
인간은 자기 나름대로 거기에 나오는 요소를 뽑아내어서 분석을 하려고 하든지
아니면 거기에 없는 내용을 마치 다윗 언약에 있는 그 언약적 요소를
아니면 노아 언약에 있는 언약적 요소를 다 갖고 가서 해석을 하려고 해요.

여기에서는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호세아서는?
불순종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불순종.
그러면 그것이 언약을 어긴 것이 아니냐? 언약을 어긴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만 이렇게 어겨도 다 어긴 겁니다.

‘아담처럼 언약을 어겼다’라고 할 때
로마서 5장에서 첫째 아담이 나오잖아요.
첫째 아담으로 인하여서 이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 하잖아요. 그죠?
그 첫째 아담이 살아가는 방식이 어떤 방식이냐? 하면 육신을 따라 행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면 첫째 아담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면 돼요.
그 첫째 아담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샘플링이 되어서 보여주는 자들이
지금 호세아서에 나오는 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입니다.
불순종의 모습이죠.

호6:8절에 보면 “길르앗은 행악자의 고을이라 피 발자취가 편만하도다”
길르앗 부근에 도피성이 있거든요. 도피성은 원래 고의적으로 살해하지 않은 자를 보호하는 성이에요.
제가 좀 과하게 해석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복수자가 이런 부분에 대해서 무시하죠.

호6:9절 “강도떼가 사람을 기다림 같이 제사장의 무리가 세겜 길에서 살인하니 저희가 사악을 행하였느니라”
단순히 이 가짜 제사장들 그들만을 논하는 게 아니라
아무튼 이런 것도 하나님께서 희한하게 하세요.
가짜 제사장이다 진짜 제사장이다 이걸 논하는 게 아니라
요 가짜 제사장의 모습이 나중에 남유다에 있는 예루살렘의 진짜 제사장들의 모습과 똑같아져요.

왜 사람을 살해하는 그러한 자들이 되느냐? 떼거리 몰려다니면서.
돈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돈이 되기 때문에.
떼거리로 몰려다니면서 사람을 죽이고

호6:10절 “내가 이스라엘 집에서 가증한 일을 보았나니 거기서 에브라임은 행음하였고, 이스라엘은 더럽혀졌느니라 유다여 내가 내 백성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 네게도 추수할 일을 정하였느니라”
약속을 주긴 주는데 이런 것들에 대해서 사람들은 희망을 걸겠죠.
어찌 됐든 이들은 행음하고 우상숭배하고

호7:1절. “내가 이스라엘을 치료하려 할 때 에브라임의 죄와 사마리아의 악이 드러나도다 저희는 궤사를 행하며” 거짓말쟁이라는 겁니다. 거짓말을 왜 해요?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상대를 속여서 뭔가를 빼내려고 하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거든요.
“안으로 들어가 도적질하고 밖으로 떼지어 노략질하며”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하나님 언약 백성인데.

호7:2 “내가 그 여러 악을 기억하였음을 저희가 마음에 생각지 아니하거니와 이제 그 행위가 저희를 에워싸고 내 목전에 있도다 저희가 그 악으로 왕을 그 거짓말로 방백들을 기쁘게 하도다”
왕이나 방백이나 다 개판인데 이게
서로서로가 상부상조한다라고 해야 될까요?
아예 노골적으로 왕이 율법에 따라서 제대로 판결을 못하도록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뭐니 뭐니 해도 머니죠. 그 방법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뭘로 통합니까? 돈이 통하는 세계예요.
구약 이스라엘 속에 우리의 죄악들이 다 다 나타나 있는 거예요.
그래서 교인들끼리 돈거래하지 말라는 겁니다.

‘주님 사랑하면 돈 거래하죠. 빌려주면 되죠.’
빌려주면요. 원망이 나옵니다.
구제도 하지 마세요. 구제하면요. 요즘은 구제를 받으면 구제받는 사람이 큰 소리 쳐요.
‘아니 작년에는 주는데 왜 올해는 안 주냐?’고

호7:4절 “저희는 다 간음하는 자라 빵 만드는 자에게 달궈진 화덕과 같도다. 저가 반죽을 뭉침으로 발효되기 전까지만 불 일으키기를 거칠 뿐이라 우리 왕의 날에 방백들이 술의 뜨거움을 인하여 병이 나며” 술취한다는 거죠. 술취한다는 표현을 하는 겁니다. 술을 먹는 것이 끝나는 게 아니라
이 말씀을 떠나는 자들의 모든 행세가 술 취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신약 성경에 술 취하지 말라는 거예요.
‘아니 술 취하지 말라고 하니까 술 한 잔만 마시면 되죠.’
지옥 갑니다. 술 마시면 지옥 가요. 왜 지옥 가는지 아세요?
십자가의 피로만 구원을 받아요.

‘술 마셔도 천국 갈 수 있죠’ 이렇게 주장을 하잖아요. 사람들이.
말씀을 우습게 여기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성경은요. 술 마셔도 천국을 가요. 이 두 가지 말씀을 같이 하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뭘 선택하겠습니까? 내 편한 대로.
그러니까 말씀으로 책망을 받을 마음이 없는 거예요.
이게 오늘날 교인들 모습입니다.
‘목사님 사업을 하려면 어떻게 술을 안 마시고 가능합니까?’
그러면 목사가 뭐라고 이야기해야 돼요? 그럼 또 답을 알려줘요.
술 마시더라도 죄인 되면 된다고
안 알려줘도 자기가 알아서 다 해결하거든요.
주님이 그 환경 속으로 몰아넣으시면 죄인으로 드러나면 되는데
그런 식이 되면 자기를 변명하고 옳다라고 주장을 하게 돼 있어요.

이 당시에 이들이 간음하는 자, 우상숭배 뭐 이런 것들은 기본적입니다.
이것이 가능하려면요. 무엇이 많아야 돼요? 돈이 많아야 돼요.
주류가 누군가 하면요. 돈 가진 자들이 주류예요.
그 주류들이 이렇게 우상숭배를 하고 뭔가 이런 짓들을 할 때 밑에 사람들은 따라가고 싶잖아요.
아니 어떤 사람이 요즘 이 뭐라 합니까?
딥페이크가 워낙 유명해서 유튜브에도 보면 유명한 사람 위로 올라와가지고
‘이 주식을 사면 한 달에 1억 법니다.’ 제 설교 올리려고 보면 그런 게 막 뜨잖아요. 그죠?
유명한 인물들이 뜨잖아요.
이들이 그러한 어떤 이 돈, 그들이 ‘누가 돈을 벌었다’ 유튜브에 나오니까. 김미경이 그렇게 벌었대요
mk라고 유명한... 아줌마들의 거의 우상이죠.

그러면 사람들이 ‘야 저 사람이 돈을 벌었네. 나도 하고 싶다.’
저 사람이 새벽마다 자기 부모님이 기독교인인가 그랬는데 새벽마다 (몇 년 동안 했어요.
한 알아요 10몇 년 했죠? 잘 관심이 없네요. 사람들이 한 20년 했습니까?)
그러니까 사람들이 한 30만 명 여의도 순복음교회보다 더 큰 것 같아요. 제가 보기에는.
떼돈을 끌어모으죠. 그 사람이 성공을 하니까 ‘나도 새벽마다...’ 따라가는 거죠.

호7:6절. “저희는 엎드리어 기다릴 때에 그 마음을 화덕같이 예비하니 마치 빵 만드는 자가 밤새도록 자고 아침에 피우는 불의 일어나는 것 같도다 저희가 다 화덕같이 뜨거워져서 그 재판관들을 삼키며 그 왕들을 다 엎드러지게 하며 저희 중에는 내게 부르짖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재판장과 왕을 다 엎드러지게 한다라는 것은 뭘 제거해버렸다는 겁니까?
율법 체제 자체를 완전히 무너뜨려버린 거예요.
오늘날 교회 같아요.
십자가의 피로 다 용서되니까 책망받을 게 하나도 없어요. 맞죠?
십자가의 피로 다 용서되니까 다 뭐예요? 다 괜찮다잖아요.
근데 말씀이 그렇게 만만합니까?

십자가의 피로 다 용서됐기 때문에 책망받지 않을 거리가 없다라고 나와야 돼요.
아니 살인하고 간음하고 부모 공경 안 하고 우상숭배한 것만 책망받는 게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복음을 전하고 진짜 말씀을 가르친 것조차도 책망을 받는다
이렇게 나와야 되는데 정반대로 말씀을 해석하는 겁니다.
그 이유가 이 호세아서를 읽으면서 유대인들이 기다렸던 그 메시야,
그 메시야를 기다리면서 호세아를 해석한 그런 방식이에요. 

호7:8절 “에브라임이 열방에 혼잡되니 저는 곧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
전병을 뒤집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요리 해본 사람은 알죠. 새카맣게 타버리잖아요.

호7:9 “이방인에게 그 힘이 삼키웠으나 알지 못하고 백발이 얼룩얼룩할지라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이렇게 심판을 받아도 깨닫지 못해요.

호7:10 “이스라엘의 교만은 그 얼굴에 증거가 되나니 저희가 이 모든 일을 당하여도 그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구하지 아니하도다 에브라임은 어리석은 비둘기 같이 지혜가 없어서 애굽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앗수르로 가는도다 저희가 갈 때에 내가 나의 그물을 그 위에 쳐서”
이렇게 나오잖아요.
부르짖을 때 실제로 남유다가 어려울 때 누구를 의지합니까? 애굽을 의지하거든요.
애굽으로 도망가요 살기 위해서.
애굽에서 불렀는데.

그러면 이 말씀을 누가 읽고 있어요?
남은 자 유대인들이 읽고 있으면 이들이 애굽을 찾을까요? 안 찾을까요? 안 찾습니다.
힘을 의지할까요? 안 할까요? 안 찾죠.
여호와만 신뢰합니다. 여호와 하나님만 신뢰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 살아요.

‘그러면 예수님을 죽일 때 왜 본디오 빌라도의 그 힘을 의지했느냐?’
그것은 율법대로 하기 위해서, 처결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성경을 볼 때 우리는 요놈들 나쁜 놈이니까
나쁘다라고 해서 그들이 하는 행동을 보게 되면 이런 말씀의 바탕을 다 삭제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그 나쁜 바리새인의 대표자가 누군가 하면 사도바울이에요.
사도 바울을 그 속에 집어넣어줘야 됩니다.

그러면 그들이 이 호세아서를 읽을 때 어떻게 살았느냐? 라고 하면 율법대로 살았죠. 말씀대로.
과거의 우리 조상들은 선지자가 외치면 안 들었는데
지금은 선지자가 없잖아요. 그 당시에, 예수님 당시에 선지자가 없거든요. 세례요한만 선지자인데
세례요한의 선지자가 바리새인에게는 왜 안 통했느냐? 하면요.
선지자들의 기준은 율법이잖아요.

율법대로 살아가는데, 그 잘못한 게 없는데 굳이 세례 요한에게 가서 세례 받을 필요가 있나요?
물론 세례요한은 여호와 하나님 말씀에 의해서 그들을 향해서 “독사의 자식들아” 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 차원이에요. 본인도 몰라요.
왜냐하면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까?” 라고 묻는 그 질문을 보면
그 구약 체계 속에 그대로 담겨 있는 겁니다.

우리는 세례요한한테 가서 이들이 세례를 안 받았으니까 나쁜 놈이라 생각하지만
여러분 복음을 전해보면요.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의 특징이 뭔가 하면
‘내가 왜 죄인이냐?’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 사람한테 세례요한이 통하겠습니까?
안 통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주님을 만나기 전에
세례요한의 설교를 들었다면 세례요한의 말이 통할까요? 안 통할까요?
‘그래 그래 니 말이 다 맞아. 니 말이 다 맞아.’
‘회개하고 돌아오고 옷 두 벌 있는 자는 하나 나눠주고 군인들은 강제로 남의 것을 뺏지 말고 힘으로. 그건 내가 다 지키는 거야.’ 그렇게 얘기할 거라 이야기입니다.
그런 자들이 지금 호세아서를 보는 안목이에요.

그런 자들이 어떤 자들이냐? 라고 하면 지금 제가 다 악하게 이야기했잖아요.
‘그게 육신을 따르는 자들이죠’ 라고 이야기를 하면 틀렸다는 얘기입니다.
그들도 육신을 따르는 자가 맞아요.

그런데 육신을 쫓는 자들의 그 모습 자체가
지금 제가 말씀드린 그 남은 자 유대인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게 살아가는 그들이 바로 육신을 쫓는 자라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많이 했기 때문에 넘어가겠습니다. 이제

롬8:7절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니라”
지금 이 내용이에요. 하나님의 율법이 나옵니다. 갑자기.
그러면 하나님의 율법이 뭐냐? 라고 하면
호세아에 가게 되면 하나님의 율법은 모세의 율법이죠. 그죠?
모세의 율법을 이들은 순종하지 않았잖아요.
‘하나님의 법’이라고 해석되어 있는데 똑같아요. ‘노모스’라고 ‘하나님의 율법’이에요.

그래서 로마서에 가면 ‘하나님의 율법’이라 했을 때
율법이 원래 하나님, 시내산에서 주신 율법이 있고
예수님이 있죠. 예수님이 주님이시잖아요. 주님이 주신 율법이 있습니다.
그 산상 설교를 보게 되면 주님이 주신 율법이 시내산 율법을 삼키게 돼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이 하나님의 율법은 무엇이냐? 하면
요한복음 6장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6장 35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산상설교에서 율법을 주시면서 이제는 내게 오고 나를 믿으라고 명령을 합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께서 나를 믿으라고 할 때
이 요한복음 5장에서나 이 8장에서도 11장도 마찬가지죠.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해버립니다. 안식일을.

율법을 지키라고 한 분이라면 율법을 본인이 지켜야 되는데
안식일을 범한 분이 하시는 말씀이 ‘나를 믿으라’고 하는 거예요.
이 말씀을 듣는 이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지금까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도록 산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겁니다.

왜 죽여야 되느냐?
자기 민족들 보존도 중요하고요. 그건 반드시 있어야 되고 그게 1번이고요.
그리고 동시에 자기 민족들 가운데 우상숭배자가 있으면 안 되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멸망당했거든요.
‘저들 중에 하나가 우상숭배하는 것이 뭐가 문제가 됩니까?’ 라고 하면
구약을 보면 신약에도 똑같이 나오죠. 고린도전서에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그 현상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우상숭배자들을 제거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거기에 해당되죠.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은 겁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이야기를 했잖아요.
그러니 율법에 정면으로 배치가 되는 겁니다.
율법을 이들이 지키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는 거예요. 지키기 때문에.

‘그러면 목사님 안 지키면 들을 수 있습니까?’
안 지켜도 들어봤자 그게 요한복음 6장에 나오듯이
자기 유익을 위한 예수님을 향한 믿음일 뿐이에요.
구약과 사복음서로 이렇게 넘어오면 이 ‘육신을 쫓는다’는 의미가 밝혀지죠.
모든 인간이 육신을 쫓고요.
요한복음 1장에서는 “빛이 세상에 왔으되 어둠이 깨닫지 못했다”라고 하잖아요.
그 어둠이 바로 다 육신에 속한 자입니다.

그러면서 요한복음 1장 11절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고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여기에도 법이 나오죠.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이라는 게 나오잖아요. 이 법이 나오는 거예요

이 법을 누구가 순종하지 못하느냐? 하면
육신에 속한 자들은 절대 순종 못합니다.
‘그러면 육신에 속하지 않는 자가 있습니까?’라고 질문하면
없어요. 없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법에 순종할 수가 없어요. 육신은.

그러면 여러분은 육신에 속했습니까? 아닙니까?
‘목사님 우리는 성령에 속했는데요.’
말씀이라는 게 얼마나 놀라운가 하면요. 보세요.
육신에 속한 자가 자기를 육신에 속했다라고 인정할까요? 안 할까요? 안 합니다. 절대로.

이 말씀이 이런 거예요.
성령에 속한 자만이 자신이 육신에 속했다라고 인정을 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와 대화를 하실 때
“인자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들려야 하리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성령을 주실 때 비로소 성령으로 거듭난 자가 만들어지죠.

만들어질 때 만일에 니고데모가 그렇게 거듭나게 되었다면
비로소 자신이 예수님과 대화를 할 때 어디에서 난 자임을 알 수 있습니까?
땅에서 난 자요. 그리고 육신으로 육신을 따르는 자임을 비로소 아는 겁니다.
성령을 받지 못하면 니고데모는 끊임없이
‘왜 그게 이해가 안 되지? 왜 그게 납득이 안 되지?’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지
자기 자신이 육신에 속했다라고는 인정을 하지 않아요.

성령을 받게 되면 자기가 질문한 방식이나 그 이해한 모든 방식이 육신에 속한 자로서
죄인 중에 괴수로 드러나는 그러한 요소로서의 질문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육신을 따르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다”라고
얘기해요. 굉장히 강조를 하죠.
불가능하다라는 겁니다. 불가능.

그래서 뒤에 나오는 게 성령이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을 쫓는다’. 아까 이야기하다 말았는데
육신을 쫓는 것도 배후가 따로 있고요.
우리는 육신을 쫓는다 할 때 ‘내가. 쫓든지 말든지 그건 내가 결정할 바라’ 이렇게 생각하지만
이 로마서에 의하면 내가 결정할 수가 없어요.
성령을 쫓는 것도 마찬가지죠.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으면 성령을 쫓아 행할 수가 없어요.
그 말씀을 지금 하고 계신 겁니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만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하나님의 법이 뭐냐? 십자가 복음이에요.
“주 예수를 믿으라” 합니다.
나중에 로마서 10장에 또 나와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이 내용이 법으로 주어지는 거예요. 법.
제가 설교할 때마다 얘기했잖아요. 법 아닌 게 없다고.
율법 아닌 게 없어요. 말씀은.
이 율법에 대해서 공격하는 그들은, 십자가를 이야기하는 그들은 이런 소리를 되게 싫어하죠.
성경이 지금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왜 ‘법’이라고 말씀을 하시느냐?
그 이유는 인간 자체가 성령을 받아도 육체 가운데 살기 때문에,
항상 선악 구조 속에서, 법 체계 속에서 살기 때문에 그래요.
그 방법 아니고는 복음을 전할 방법이 없어요.
‘여러분이 예수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라고 전하지,
‘여러분 선택받으면 구원 얻습니다. 예수 믿게 됩니다.’ 이게 무슨 복음 전파입니까?
그렇게 전한 데가 없어요. 성경에 보면.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육이기 때문에 그 육적 방식으로 복음이 전파되고
육적 방식으로 믿는다라고 나오고 지금 우리도 다 육적 방식이잖아요. 맞죠? 오늘 뭐 타고 왔습니까?
지하철, 승용차. 식사하셨어요? 안 하셨어요? 하셨죠? 다 뭐예요? 이 모인 게 다 뭐예요?
육이잖아요. 여기에서 못 벗어납니다.

주님은 ‘이 육신으로는 하나님의 법에 결코 순종할 수 없다’라는 것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깨닫게 하는 거예요.
성령이 없는 사람은 자신이 육신에 속하여서 육신을 따라서 산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어때요?
‘성령을 받으면 여러분 성령을 쫓아 행해야 됩니다’라고 이야기를 하잖아요.
‘육신을 쫓는다’는 이야기는 빼버리잖아요.
성령을 쫓는다는 말씀 속에 육신을 쫓는다는 내용.
‘절대로 하나님의 법에 복종할 수 없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앞에 ‘육신을 쫓는 자는 하나님의 법을 절대 순종할 수 없다’라는 내용이 있고
뒤에 ‘성령을 쫓는 자~’ 이 얘기가 나오니까
인간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못 섬겨요.
이 시간이 발생하면 두 개를 동시에, 이 양자 세계처럼 동시성이 안 돼요. 인간은.
근데 성령은 이 말씀을 그 속에 담아버려요.
담아서 우리를 십자가의 피의 증인으로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렇게 만들어내시는데

인간들은 이 말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율법을 우리가 순종할 수 있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지금 로마서는 우리의 불가능성을 계속해서 언급합니다.
불가능성뿐만 아니라 우리의 이 연속성을 부정합니다.
나의 연속성을 부정해요.

우리는 연속성인데, 십자가의 피로 만든 우리는 연속성인데
나는 계속해서 잘라냅니다. 어떻게 잘라냅니까?
구약 이스라엘을 보면 그 이스라엘 전 역사를 성도의 인생이라고 봅시다.
성도의 인생이라고 보게 되면 이스라엘이 어떻게 만들어집니까?
어린 양의 피로 만들어졌죠. 만들어지고 그다음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유지가 되잖아요.
계속해서 유지가 되는데 그 이스라엘의 구성원들은 계속 바꿔지잖아요.
바꿔지잖아요. 바꿔지는 걸 눈치채야 되는데

이 남은 자 유대인들은 바꿔지는 그것에 주목을 하지 않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에 주목을 하는 거예요. 그걸 국가라고 합니다. 국가.
그게 국가의 신화라고 하죠. ‘국가는 영원할 거라’
국가라는 것을 왜 사람들이 좋아하는가? 하면
나는 죽고 사라지더라도 국가는 영원하니까 마치 내가 영원한 것처럼 느끼는 거예요.
마귀가 노리는 지점입니다.
그게 유대교가 그 짓을 했거든요.

신학도 마찬가지죠. 바뀌거든요. 계속.
이 바뀌는 걸 보면 이스라엘을 위한 새로운 세대들의 탄생이잖아요.
충격적이잖아요. 나의 구원 자체가 들어갈 자리가 없어요.
로마서에서 나의 구원을 꿈꾸는 자들을 철저하게 공격을 합니다.

십자가의 피를 증거하기 위한 구원이지
우리를 구원해서 안정적으로 천국에 고스란히 넣어주기 위한 구원이 아니에요.
물론 빌립보서에서는
“너희 가운데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루실 줄로 확신하노라”
이렇게 말씀을 하실 때 그 내용의 말씀이 틀린 게 아니에요.
그 말씀을 어디에 집어넣으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생애를 집어넣으면 돼요.

‘지킬 줄로 확신한다’고 하니까 ‘나를 보호하고’ 이게 아니라
보호를 하긴 해요. 언제까지? 그가 사명이 다할 때까지.
우리가 장소 오늘 끝나잖아요. 끝나면 주님이 ‘너 할 일 다 했다’ 하면 장소 못 얻어요.
일단 돈도 없고. 어찌 됐든 비슷한 장소를 얻게 됐는데 그게 끝이에요. 그게 끝인데
‘아니야 나는 사명을 받았으니까 이 교회는 계속 유지가 돼야 돼.’
그러면 그 사람은 뭘 믿고 있는 거예요? 교회를 믿고 있는 거예요.
이걸 우리 개인에게 들어오면 우리가 사명이 다하면 죽습니다.

‘나는 왜 이래 빨리 죽어? 나는 왜 이렇게 오래 살아? 나는 왜 이렇게 병자처럼 이렇게 살아?’
사명이 남아서 사명을 지금 감당하라고 살리는 거예요.
이 교회도 마찬가지고요.

근데 이걸 나의 것으로 바꿔버리면 내가 영원해야 되는 거예요.
구약을 보면서도 이것이 내부 구성원들이 계속해서 새롭게 만들어지고 생성되고
이게 우리로 보면 우리 자신이
어제 복음을 들은 우리가 그 복음을 들은 그 사람이
그날과 그 환경 속에 살면서 새로운 우상이 만들어집니다.
새로운 우상이 만들어지면 오늘 주님께서 그 복음을 알고 믿었던 그 우상을 부정시키면서
십자가를 자랑하는 주님의 백성 죄인이죠.
죄인으로 계속해서 생성해내는 거예요.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연속성이 없습니다.

우리는 ‘어제 내가 오늘 내가 아닙니까?’
그건 악마가 가르쳐준 거예요.
‘그러면 목사님 그 세계에서 우리가 벗어날 수 있습니까?’
없어요. 그 세계에서 못 벗어나야만
지금 방금 말씀드린 어제의 나가 주님의 피로 오늘도 새롭게 생성된 피조물임을 증거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저쪽 세계는 어떻게 보느냐? 하면
육신에 속한 자들은 ‘어제 너나 오늘 너나 똑같지 않느냐?’ 이렇게 봐요.
그들은 뭐가 없습니까? 성령이 없죠. 말씀이 없으니까
어제의 오늘이나 오늘의 오늘이나 동일하다고 주장하죠. 그들 중에 한 부류가 뭐냐? 하면
어제의 신앙 지식과 신학 지식이 오늘 자신의 신앙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에요.
그게 신학자들이고요.

그 신학자들이 어디로 들어왔는가? 하면
개혁주의라는 곳으로 고신측도 마찬가지고 교리들 있잖아요. 교리로 들어온 거예요.
제가 교리가 틀렸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맞는 게 없어요. 이 세상에는. 심지어 성경도 안 맞잖아요.
이 말을 하면 또 이걸 트집 잡죠. 원래 이단 판별자들은 한 단어를 갖고 하거든요.
성경이 안 맞다는 것은 마귀가 성경을 갖고 오잖아요. 인간은 맞는 게 없거든요.

그러면 교리나 신앙고백이나 맞는 게 없음을 드러내기 위한 내용으로 가르치면 돼요.
마치 우리가 돈 버는 일이 뭐가 맞아요? 내 배를 위함인데.
맞는 게 없어요.

그런데 이들이 마치 ‘맞다 진리다’라고 하니까 이걸 어디까지 끌고 왔습니까?
교회에 끌고 와서 다락방이 되었든 하나님의 교회가 되었든 신천지가 되었든
이 교리를 만들잖아요. 그 교리를 만들어서 마치 그걸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외우면
천국 백성이 되었다라고 주장을 하는 겁니다.
제가 지금 이런 집단들을 자꾸 언급하는 이유가 우리가 다 그 부류예요.
첫째 아담에서 아무도 못 벗어나요.

‘그러면 어쩌란 말입니까?’
지금 어쩌란 말이긴 성령이 인도하시잖아요.
‘그럼 목사님 성령이 인도하심을 어떻게 받습니까?’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은 항상 이 질문을 할 수밖에 없어요.

“너희 가운데 성령이 없으면 (뒤에 나오죠.)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갑자기 논리적인 것 같은데 갑자기 성령 이야기를 확 해버리잖아요.
성령이 만일에 보이는 것 같으면, 이런 마이크 같으면 잡고 움직이면 되는데
방언같이 룰루랄라 하면 나 성령 받았다고 주장하면 되는데
성령은 바람과 같거든요. 바람과 같다는 것은 소유 대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분명히 성령이 인도하심이 있는데
성령은 내가 관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분명히 우리 가운데 계시지만
활동을 할 때 바람처럼 움직일 때만 그 성령의 역사들이 드러나는 거예요.
소유권이 우리한테 없습니다.

그리고 이 “성령을 쫓는 자는” 앞부분에 이야기했잖아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성령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생명과 평안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십자가에서 나와요.

그래서 성령의 이 인도하심을 받는 자들은
철저하게 십자가로부터,
십자가에서 생명과 평안이 나옴을 이렇게 확인하는 자리로 인도함을 받아요.
그래서 항상 무엇과 부딪혀야 되는가? 하면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다”라는 이 자리, 이 지점과 부딪혀야 됩니다.
만일에 할 수 있다가 되면, 예수를 내가 믿을 수 있다가 되면
그 사람은 무엇을 제거시키는 거예요?
십자가의 피를 제거하는 겁니다. 악마가 노리는 지점이 그 지점이에요.
피만 제거하면 돼요. 악마는.

피공로만 제거하면 인간은 죄인이 아니잖아요. 이제 의인이고
의인이니까 어떻게?
‘예수님 할 일 다 하셨죠? 안녕히 계세요. 그러니 나는 (어디에 살겠습니다?) 부활의 세계에서 살겠습니다. 이제 십자가는 안녕히 가세요.’ 이렇게 하는 겁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학이 부활의 신학이라는 것이 주류를 이루거든요.

왜 그러냐? 하면 부활은 희망적이잖아요.
근데 십자가는 어떻습니까? 부정적이잖아요.
여러분이 아직 십자가 복음을 얼마 안 들었잖아요. 한 20년 들어보세요.
한 7~8년 들은 사람이 그런 소리를 했다고 해요. ‘또 십자가냐?’

그리고 우리 자녀들 지금 꿈이 무럭무럭 자라야 되는 이 시점에 맨날 설교 들으면 죄인이라 그러지
뭐 인간이 해봤자 다 하나님의 원수라 그러지 육신의 생각대로 산다고 하지.
아니 목사님 설교 듣고는 우리 애들 못 키우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이 자녀를 안 데리고 오는지는 모르지만. 자녀도 없지만.

왜 그런 마음을 갖고 있느냐? 하면요.
이게 이 세상에서는 내 자녀가 성공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진짜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공은 복음을 아는 거잖아요.
복음을 알았으면 모든 걸 얻은 거거든요. 근데 그건요. 돈이 안 돼요.
돈이 안 되니까 ‘십자가 설교 그만하시고 우리 애들한테 긍정적인 얘기를 해달라’는 거예요.
태교를 하는데 피복음을 자꾸 이야기하면 애가 뭐 알겠습니까?
시편 51편을 알고 나올 거 아닙니까? “모친의 태중에서 죄 중에서 태어났다.”
이게 안 기뻐요? 안 기뻐? 우리 언이는 다르지만.

그런 것들이 세상을 살 때 도움이 안 되거든요. 그게 예수님의 십자가예요.
니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니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너도 구원하고 나도 구원하라.’
여러분 이런 기도 이만큼 나오다가 들어가고 있죠?

제가 왜 나오다가 들어갔냐? 하면 지금 이 내용이 그거예요.
육신을 쫓는 자와 성령을 쫓는 자가 이 한 몸 안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그래요.
그게 로마서 7장에서 얘기를 했잖아요.
이렇게 가야 또 ‘아 그렇죠’ 수긍이... 없는 걸 제가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성령을 쫓는 자는 성령의 일을 생각한다’ 할 때
‘도모를 한다’라고 했잖아요. 단순히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은 어디로 우리를 끌고 갑니까? 십자가로 끌고 가요.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에요.
사람들이 성령 충만 받으면 ‘허허 기분 좋다.’ 이거 사기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니 성령이 뭔지 몰라요. 미리 좀 해봅시다. 뒤에 가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니까 어디로 끌고 갑니까?
환란, 핍박, 기근, 적신, 칼.

우리가 옛날에 부흥회 때 성령 충만 받고 싶어서 안달이 났잖아요. 왜 안달 났습니까?
쉭쉭쉭해서 병 낫게 하고 싶고 슉슉슉 해서 막 방언하게 하고 싶고
죽고 싶어서 성령 충만 받고 싶은 사람 한 사람도 없잖아요.
‘성령이여 강림하사 나를 감화하시고’ 그 머릿속에 뭘 생각해요?
나를 감화하면 이 내용,
‘나는 철저하게 육신에 속하여서 육신을 쫓는 자로서 하나님의 법을 절대로 순종할 수 없는 그런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시고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어서 십자가로 우리를 끌고 가셔서 생명과 평안의 세계 속으로 우리를 인도하옵소서’
이런 기도를 하면서 기도원 가는 사람 봤습니까?
물론 주님이 그렇게 갔는데 돌릴 수도 있어요. 그게 없다는 건 아닙니다.
그게 우리의 본심이잖아요.

그래서 이런 본문을 보면서도 탐심을 이렇게 드러내는 거예요.
‘그래 육신을 쫓는 자는 하나님의 법에 절대 굴복할 수 없다 했으니까 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성령을 쫓아 행하겠다.’
이게 바로 유대교입니다.
이런 자들을 만나면요. 복음이 안 먹혀요. 십자가 이야기 그만하라는 거예요.

어제 제가 또 어떤 결혼식을 갔는데 결혼식 가서 1만 원 주고 샀거든요.
엄청 비싸게 보이죠. 1만 원짜리입니다. 나눔 가게 이런 데 있었는데
거기서 어떤 목사님을 만났는데 나름대로 언약신학 이야기하고 이런 사람인데
그분이 이제 자기 이야기를 해요. 십자가를 이야기하니까
‘성경에는 십자가도 있고 언약도 있고 부활도 있고 다 있는데 왜 너는 십자가만 이야기하느냐?’
제가 보기에는 그 목사님이 십자가를 잘못 설명한 것 같아요.
십자가 속에 이 내용이 다 담겨 있거든요.
그러면 부활을 갖고 십자가를 이야기해야 되는데
부활을 갖고 십자가를 이야기를 안 하니까 상대가 듣기로는 십자가만 이야기하는 것 같잖아요.

제가 그래서 이야기했어요.
사도바울을 찾아왔을 때 주님은 분명히 심판주로서 찾아왔어요.
근데 심판주로서 찾아왔는데 사도바울에게 찾아올 때는 뭐라 했습니까?
‘니가 왜 부활한 주를 안 믿느냐?’ 이렇게 얘기했습니까? 아니죠.
‘왜 니가 나를 핍박하느냐?’

‘누구십니까?’ 물었을 때
‘나는 세상을 심판하는 심판주다’ 이렇게 말씀 안 하셨잖아요.
‘니가 핍박하는 예수라’는 거예요.
심판주가 이 땅에서 모습을 나타낼 때는 핍박받는 모습으로 나타내요. 누구? 성도로.

그러면 성도가 왜 핍박받느냐? 라고 하면 예수님을 닮았거든요.
예수님이 세상을 향해서 악하다 했어요. 세상을 향해서 악하다하니까 나도 악하고
그러면 우리는 모두가 다 육신에 속하여서 하나님의 법에...
예수 못 믿는다 이 얘기예요.
‘예수님 믿어야 구원 얻는다’라고 말을 하면서 ‘우리는 예수 못 믿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을 기쁘게 한 분은 딱 한 분이에요.
물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오 내 기뻐하는 자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뿐이에요.
십자가에 피 흘리신 그분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 피를 증거하는 방식밖에 없어요.
그 방식이 바로 육신에 속하여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서
하나님의 법에 절대로 순종할 수 없는 우리들을 어떻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성령을 쫓아 행하게 하셔서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시고
십자가의 피를 자랑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겁니다.
내가 기쁘게 하는 방식은 없어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분은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나님의 아들밖에 없음을 말씀을 통하여 들려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기에 저희들을 통하여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하셔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만을 마음껏 증거하는 자로
살아가게 하심을 감사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날마다 죄가 쏟아져 나옴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기쁨이 되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보게 하시는,
그 주님의 놀라운 은혜만을 사모하는 주의 백성에게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오늘까지 여기서 모이고 이번 주 수요일부터
성수역하고 뚝섬역 가운데 있는 고우넷빌딩입니다. 2층에서 모임을 갖는데
주일은 조금 넓은 공간에서 모이고
수요일은 좁은 공간에서 모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