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4-02-11 19:04
20240211로마서 강해 52강 롬 8:9-10 하나님의 성령, 그리스도의 성령, 성령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137  
https://www.youtube.com/live/U_rPGehELS0?si=SFlQ33uZrgvSRR8J

관리자 24-02-12 20:22
답변 삭제  
20240211 로마서 강해 52강 롬 8:9-10 하나님의 성령, 그리스도의 성령, 성령

다 함께 묵상 기도드리겠습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 고백하겠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 말씀, 잠언서 26장 23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잠26:23)
“온유한 입술에 악한 마음은 낮은 은을 입힌 토기니라 감정 있는 자는 입술로는 꾸미고 속에는 궤휼을 품나니 그 말이 좋을찌라도 믿지 말 것은 그 마음에 일곱 가지 가증한 것이 있음이라”아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인간으로부터 어떠한 말을 내뱉든 그 모든 것이 주님 앞에는 거짓말이요 가증한 모습임을 십자가로 저희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복음만이 진실되고 생명이 됨을 저희들이 날마다 깨달아 알게 하여 주시고,
우리의 입술로 생명의 복음을 담대하게 증거하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시편 84편 9절에서 12절까지 말씀을 교독하겠습니다.
[고라 자손의 시 영장으로 깃딧에 맞춘 노래]
(시84:9~12)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의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보옵소서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이 시간 김춘이 집사님 대표해서 기도해 주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사랑과 긍휼로 모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한 베드로가
주님께서 허락하신 천하고 볼품 없는 여종 앞에서 예수님을 저주하며 맹세하여 부인한
닭 울음 속에 터진 통곡의 사건이, 그 믿음의 사건이
예수님의 기도의 능력이었음을, 예수님과의 관계 맺음이었음을
날마다 육신을 통해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새로운 장소로 옮길 때마다 새로운 원망과 사소한 불만들로
예수님의 일하심을 부인한 새로운 통곡의 사건으로 펼쳐주시니 감사합니다.
사로잡힌 자인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 머릿돌이 된 것이 주로 말미암아 된 것임을
우리 눈에 귀한 십자가 사건인 신비의 계시로 인도해 주시길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나님 말씀, 로마서 8장 9절에서 10절 말씀을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롬8:9~10)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아멘.

상당히 난해한 본문이죠.
이게 뭐가 난해하냐?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여기에는,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의 성령이 나오고요. 그리고 성령도 나오고 그다음 그리스도의 성령도 나옵니다.
영이라는 단어가 다 ‘푸뉴마’ 헬라어로 이렇게 돼 있는데 이 모두가 성령입니다.
그러면 삼위일체니까 삼위일체를 이렇게 엎어가지고 하시는 일이니까
삼위일체를 믿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이 마지막에 하시는 말씀이 9절 끝에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고 10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이렇게 표현하고 있어요.
성경에 보면 ‘성령이 너희 안에 있고 성령이 내주한다’는 말을 교회에서 많이 들어보셨잖아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 이것도 많이 들어보시고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신다.’ 이것이 같이 교회에서 계속해서 사용되어지고 있는데
교회를 아무리 오래 다녀도 이게 정리가 안 돼요.
여러분들은 다 정리가 됐을 줄로 생각합니다마는
이것은 정리가 되는 상황이 아니라 이 말씀 자체가 우리를 사건으로 몰아가는 말씀이에요.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더라” 이렇게 나오거든요.
구약에는 ‘하나님의 신’ 똑같이 이 ‘성령’이라고 표현해도 돼요.
그런데 우리 성경에는
‘하나님의 신이 임하였더라. 하나님의 영이 임하였더라’ 이렇게 표현을 하거든요.

신학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입장에서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신약에 나오는 성령과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신이 어떤 차이가 있느냐?’
이렇게 질문을 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편의상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신을 ‘성신’ 이렇게 표현을 하고
신약에서는 ‘성령’으로 표현을 하는 거예요. 그 단어가 뭔가 진리가 있는 건 아니에요.
물론 그 속에 들어가면 내용을 뜯어보면 진리가 나오는데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신은 어떤 일을 하는가? 라고 이야기를 하면
신약과 비교하면 돼요. 신약과 구약을 비교하면 이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신이 하는 그 역할,
똑같이 성령입니다. 신이라 하니까 그냥 뭐 쉬쉭~ 이게 아니고...
하나님의 성령이에요. 하나님의 성령.
그러면 신약에 나오는 이 성령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라는 차원에서 주어지는 영이 성령입니다.

그럼 이 성령은 완성을 했다는 거예요. 다 끝냈다라는 겁니다.
‘다 끝냈다’라는 그 내용을 우리 성도들에게 주어지게 되면
성도는 성령을 따라 지금 로마서 8장에서 그 얘기가 계속 나오거든요.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거하신다”라고도 표현을 하고 이렇게 번갈아가면서 계속 표현을 합니다.
“하나님의 영” 이렇게 표현을 하는데
“성령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게 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시피
“또 다른 보혜사가 오면 내게 대해서 증거한다”라고 이야기를 해요. 내게 대해서.

이 논리가 어떻게 진행이 되느냐?
구약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생각을 해보면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증거했죠.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말씀을 하셨거든요.
내가 일하는 모든 것들이 아버지의 일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신학적으로 어떻게 푸느냐? 하면
‘예수님은 아버지의 것을 증거하셨구나’ 이렇게 풀어요. 논리가 그렇게 되어 있잖아요. 그죠?
아버지께서 보내셨으니까 보내신 그 아버지의 뜻을 행하러 왔다라고 했잖아요.
그럼 아버지 뜻은 미지의 x라면 그 x는 아무도 몰라요. 사실은.
근데 인간들은 자기가 신이거든요.

그러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면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러 왔어요’라고 자꾸 주장을 해요.
이 논리가 왜 문제가 되는가? 하면
하나님의 영, 그다음 성령, 그다음 그리스도의 영. 여기 뒤바뀌는데
이 내용이 이해가 안 되기 때문에 그래요. 달리 말하면 성령을 받지 않아서 그래요.
성령을 받지 않으면 이 말씀 자체가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지금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이렇게 표현을 한 상태에서
‘성도는 그리스도의 영을 받았고 하나님의 영을 받았고 성령을 받았고’ 이렇게 되면
이 구약의 하나님의 신이 하시는 일들과 그다음 하나님의 영이 하시는 그 모든 일들이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서 재해석이 돼야 돼요.

앞서 이야기하다가 말았지만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했을 때
‘아버지 일’이 뭐냐? 라는 거예요. 아버지의 일이 뭡니까? 아버지의 일이 뭐냐?
여러분 교회 많이 다녔잖아요. 오래 다녔고 성경 봤잖아요. 구약에 다 나오잖아요. 아버지의 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아버지가 되잖아요.
그러면 아버지는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게 아버지의 일이거든요.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했을 때
인간들이 생각하는 방식은 그 아버지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하면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봤다”라고 하고
“내 하는 일을 믿는 것이 아버지께서 일하시는 것을 믿는다”라고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어떤 사태가 발생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하시는 그 일을 통하여서
기존의 유대인들이 믿고 있던 그 하나님 아버지께서 일하신 모든 것들이 부정당합니다.

요엘서를 한번 보겠습니다. 요엘서를 2장 28절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그 후에’라는 이 ‘후’라는 것은 ‘그 날들’입니다. ‘그 날들에’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요즘은 ‘날들에’로 번역돼 있는지 모르겠지만 옛날 성경은 ‘그 후에’ 이렇게 되어 있는데
“그 날들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만민’이라는 이 히브리어 단어도 ‘모든 육체’입니다.
사도행전에 인용하면 모든 육체라고 돼 있어요.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려니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욜2:28~32)
여기에 보면 이 요엘서가 예언하는 내용을 들여다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여서 이 심판의 나팔을 붑니다.
심판의 나팔을 불면 약속의 땅 자체가 완전히 쑥대밭이 돼요. 황폐화됩니다.
황폐화가 된 이후에 다시 구원의 나팔이 불려진다라는 거예요.

이 심판과 구원이 우리의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시차가 적용이 되잖아요. 심판이 있고 구원이 있고.
그래서 요엘서를 보는 이 남은 자 유대인들.
왜 자꾸 ‘남은 자 유대인’이라 하는가? 하면
그들 속에 우리가 들어있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요엘서를 읽게 되면 요엘서의 그 배경이라든가 그러한 어떤 범죄와 심판과
이 여러 가지 내용들을 바탕으로 하여서 읽게 되거든요.
이것을 곧장 사도행전 2장으로 갖고 와버리면 돼요. 되긴 되는데
사도행전 2장으로 갖고 오려면 사복음서를 통과를 해야 돼요.

그 사복음서 안에는 뭐가 들어있냐? 하면
십자가 사건이 들어 있어요.
그 십자가 사건이 들어있는 내용을 통과해서 요엘서를 봐야 된다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 사건 속에 합류하지 못한 사람들이 요엘서를 보게 되면
여기에 어디에 희망을 거느냐? 하면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이러한 두렵고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려리와” 이런 사태 자체가
누구를 위한 심판이냐? 누구를 위한 하나님의 진노냐? 라고 하면
범죄한 자신들은 죄에 대한 대가를 다 받았잖아요.
그러니까 이들을 치는 자들에 대한 심판이에요.

왜냐하면 끝에 보면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라” 이 약속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약속을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자기들은 남은 자고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리라”
그들은 뭐라고 상상하는가? 하면
그 정도로 이 하나님의 심판이 엄중할 것이라고 이 본문을 해석할 수밖에 없어요.
심지어 오늘날 목사들도 이 본문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면
이것은 그냥 상징적이다라고 해석해요.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 때 해가 어두워졌잖아요.
그 사건 자체는 종말을 그대로 앞당겨온 겁니다.
베드로후서에 모든 체질이 이 불에 의해서 심판당한다고 나오거든요.
지금 요엘서를 보게 되면 ‘한 날’이 ‘여러 날들’로 바뀌어요.
그러니까 한 날 안에 여러 날이 있는 거예요.

십자가 사건 안에 인간의 모든 시간,
알파와 오메가 그 사이의 모든 것들이 다 담겼습니다. 그 내용을 지금 예언을 하고 있는데
이 내용을 유대교처럼 해석을 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우리는 구원을 얻는다라는 거예요.

지금 요엘서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어느 누구도 구원 못 얻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하나님께서 언약을 따라,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하여서 남은 자를 구원시키겠다라는 말씀을 한다’라고는 아무도 생각을 못 해요.

마치 오늘날 ‘주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라는 말씀의 의미가
‘어느 누구도 구원 못 얻는다’라고 그렇게 듣는 사람이 있나요? 없잖아요.
‘주 예수를 믿으면 구원 얻는다’라고 믿지 ‘그 말씀의 의미는 누구도 구원 못 얻는다’라고
그렇게 해석을 못 해요. 안 하기도 하고요.

왜 그러냐? 하면 말씀 자체는 십자가 지신 주님을 위한 말씀인데
그 말씀을 나의 구원으로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언약 중심이거든요.

지금 우리가 신명기를 보고 있잖아요. 한번 이스라엘을 역사를 한번 돌아보세요.
돌아보면 남는 게 뭐밖에 없습니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하나님이 만드신 아들의 그 명분만 남아요.
그 속에 있는 구성원들은 계속 바뀝니다.
어느 누구도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 못 봤어요.

왜냐하면 그 구성원들을 바꿔버리면 ‘나는 뭡니까?’ 이렇게 나오거든요. 논리가.
인간은 나의 영속성을 주장하고 싶거든요.
‘예수 믿는 나’, ‘태어난 나’가 영원히 바뀌지 않고 천국 가기를 원하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의 구원은 날마다 너가 아니라는 거예요.
주님이 새롭게 피조물로 만든 너.
너는 결코 영속될 수 없는 너.
피가 아니면 구원될 수 없는 너. 이걸 거꾸로 돌리면
‘피를 위하여서 너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받은 너’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가 영속되기를 원하거든요.
그래서 구약을 해석할 때 ‘어떻게 하면 우리가 버림을 받지 않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거기에만 몰두를 하는 겁니다. 신학적 해석이.

그런데 창세기부터 한번 해석해 나가보세요. 출애굽기를 해석해 보면
거기에 ‘나’라는 인물을 한번 집어넣어보세요. 그 ‘나’가 어디에 자리를 잡을 수 있습니까?
‘목사님 모세는 그래도 천국 같지 않았습니까? 변화산상에 나타났지 않았습니까?’

모세의 영속성이 가능합니까?
모세는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갔어요. 히브리서에 의하면 지옥 간 거예요. 맞잖아요. 논리가.
‘믿음으로 화합지 않았기 때문에 저들이 진멸당했다’ 하거든요.
그 약속의 땅이 성령 아니잖아요. 천국이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모세가 들어갈 수 있었느냐? 하면 언약 때문입니다.
모세의 언약 때문에 모세가 변화산상에서 주님을 만난 거고
그 모세 언약의 완성이 십자가잖아요.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이잖아요. 그 죽으심으로 인하여서 구원을 받은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은 그런 것들을 연속성으로 끌고 가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구약을 설교를 하면 ‘나’가 남아 있는 자리가 없어요.
여러분이 예를 들어
‘애굽에서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은 나’를 그 자리에 한번 집어넣고 성경을 한번 읽어보세요.
어떻게 됩니까? 원망하는 자리가 한두 곳이 아니죠.
그러다가 어떻게 됩니까? 다 죽어야 돼요.

우리는 이중성을 갖고 있거든요.
이미 우리는 첫째 부활에 참여했기 때문에 둘째 사망이 우리를 장악하지 못합니다.
안 죽어요.
그런데 죽어야 돼요.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
이 두 요소를 동시에 갖고 있는 겁니다.
성도를 귀히 여기기 때문에 빨리 데려갈 수도 있고요. 하나가 그렇게 해석이 되고
또 하나는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 데려가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느 걸 뽑아내려고 해요? 긍정적인 것만 뽑아내려고 하잖아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말씀을 보려고 하지 않는 겁니다.
항상 나 중심이죠.

장례식에 가면 죽은 자가 성도라면
‘주님께서 이제 안식의 자리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런 설교가 대부분이잖아요.
‘주님께서 진노의 불을 이렇게 보여줍니다.’ 이렇게 설교하다가는 목사가 쫓겨나겠죠. 그 자리에서.
혹시 그런 설교 들어봤습니까?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간다’ 이 얘기를 하지만
그 죽은 자 자체가 이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것을 죽음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말씀이 응하는 자리가 죽는 자리고,
그 죽은 자는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둘째 사망이 그를 결코 삼키지 못하는 그러한 세계 속에 있음을 보여주는 죽음이죠.

여기에 보면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때에 내가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이 예언이 그냥 툭 튀어나온 게 아니에요. 툭 튀어나온 게 아니라
그 앞부분에 어떤 사건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18장 15~16절을 보겠습니다. 모세가 예언하는 내용인데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 이것이 곧 네가 총회의 날에 호렙산에서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한 것이라 곧 네가 말하기를 나로 다시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시고 다시는 이 큰 불을 보지 않게 하소서 두렵건데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 하매”
이들의 요구를 응답하는 차원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운다’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긍휼이죠.
하나님이 직접 오시면 다 죽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이들이 오해를 할 수밖에 없는 게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가 온다면, 그 선지자를 믿는다면 안 죽는다’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들의 착각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나와 같은 한 선지자’가 우리는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고 있잖아요. 그죠?

그런데 이 예언을 하기 전에 모세가 또 독특한 예언을 합니다.
민수기 11장을 보겠습니다. 11장 1절에 보면
“백성이 여호와의 들으시기에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로 그들 중에 붙어서 진 끝을 사르게 하시매”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께서 들으시기에 악한 말로 원망하는 장면이 나오고요.
그래서 진노하셔서 불로, 그들의 진 끝을 살랐습니다.

끝에 있다라는 것은 원망과 불평이 많다라는 거예요. 가기 싫다라는 거잖아요.
우리 중고등학교 때 보면 공부 못하는 애들이 다 뒤에 앉잖아요. 왜? 딴짓하려고.
드라마 보면 농땡이들이 다 어디에 앉습니까?
요즘은 뭐 1등도 저 우리 김기대 집사님이 앉은 그런 자리에 앉는데... 그건 좀 반칙이고요.
우리 때는 공부 잘하는 애들은, 요 앞쪽에 앉았어요.
그건 드라마이기 때문에 아마 그럴 가능성이 높아요. 항상 공부 잘하는 애들은 앞에 앉잖아요.
지금 이들이 원망을 하니까 가기 싫은데 억지로 가는 거예요. 소풍 갈 때 보면 그 꽁다리들 있잖아요.
꽁다리들. 재밌는 것은 선생님이 꽁다리 가면 가다가 중간뺑이 하거든요.
중간뺑이 라는 게 가다가 중간에, 원래 가야 되는 목적지까지 가지 않고...
이들의 원망이 그 정도로 심하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불살라버립니다.

그 이후에 민11:4절에 보면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고기 먹고 싶은 것은 우발적이에요. 여러분 언제나 먹고 싶은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지금 와보니까 이 별식을 먹고 싶은 거예요.
여기에 보면 외와 수박과 생선, 부추, 파, 마늘 이런 것들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몇날 몇일 똑같은 만나.

설날이 되면 싫어하는 사람 있죠. 설날 음식을 많이 하면 일주일 내내 똑같은 거 먹어야 되니까.
그런 과거들이 다 있나요? 그죠? 과거에는 먹을 음식이 없으니까. 그렇잖아요.
얼마나 원망이 심하면 이런 식으로 이제 화를 내면서 민11:8절에
“백성이 돌아다니며 그것을 거두어 맷돌에 갈기도 하고~” 쭉 나오는데,

민11:10절 “백성의 온 가족들이 각기 장막 문에서 우는 것을 모세가 들으니라”
백성의 온 가족들이 각기 장막문, 각기 천막이 있을 것 아닙니까?
이게 통성기도예요. 통성기도. 집집마다 이렇게....
인간들이 희한해요. 아무튼 이 말이 얼마나 빨리 번져가는지. 소문이.
좋은 말은 안 번져가잖아요. 악한 말은 빨리 번지는 거예요.
한 번 쑥 쑤시면 불만이 와르르 쏟아져 나오죠. 교회도 똑같습니다.
이렇게 모인 수가 몇 명 안 돼도 한 번 누가 불만을 쏟아내면 그 불만을 주르르 이야기해요.
집집마다 원망을 쏟아내는 거예요. 그 애들까지 다 똑같아요.
그러니 이 약속의 땅에 들어간 그들이 은혜로 들어갔지 잘나서 들어간 게 아닙니다.

(민11:10중반절~11) “여호와의 진노가 심히 크고 모세도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여짜오되 주께서 어찌하여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나로 주의 목전에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나로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이제 불만이 나오는 거예요. 상당히 다르죠.
시내산에서는 자기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달라고 기도를 하는데,
지금 모세는 불평을 쏟아내는 겁니다. 모세가 별로 훌륭한 사람 아닙니다.
모세가 만일에 이러한 모습이 없었다면 모세를 메시야로 믿을 겁니다.

오늘날 마치 어떤 목사를 신격화시키잖아요.
이 성경에 보면 대부분이 모두가 다 하자예요.
예수님 빼고는 하자 있는 인물만을 배치한 이유가 있어요.
하자 있는 인물을 배치 안 하면 인간들이 그를 믿고 섬겨버립니다.
십계명에 보면 사람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 하잖아요.
김정은? 김정일, (김정일이 생각 안 났어요. 설교할 때)

이승만 동상? 이게 사람들이 얼마나 웃기는가? 하면
그 동상을 세운 사람들은 ‘이승만이 무엄하다’가 돼버려요. 혹시 아세요? 잘 모르죠?
그 극우파 유튜브를 좀 봐야 돼요.
그러면 극좌파는 뭐라 해요? ‘김좌진은 무엄하다. 홍범도는 무엄하다.’

제가 극우파에 대한 이야기를 자꾸 하니까
나보고 이제 ‘민주 우파를 공격하는 극좌파 목사’ 이렇게 댓글을 유튜브에 달았던데
참 잘 달았어요.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의 특징은 프레임 싸움을 하거든요.
내용 이야기는 절대로 안 합니다.

프레임이 얼마나 무서운가? 하면
그게 교회에도 있거든요. 교회에도 사람들이 소문을 낼 때 프레임을 딱 걸어버리면
‘저 사람은 목사를 대적하는 자야’ 이걸로 끝내버려요. 그러면 끝나버립니다.
내용은 안 들어요. 교회에서 가장 심하거든요. 사실은.
근데 교회에서 가장 심한 게 지금 이 유튜브나 SNS가 발달하니까
이 세계 속에서 완전히 그게 폭발한 겁니다.
교회에서는 그냥 말로 전달을 했잖아요. 지금은 SNS로 전달하거든요.

그러면 그 사람을 프레임을 딱 씌워버리면
그다음부터 우리 마음은 꼴도 보기 싫은 거예요.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프레임을 씌워버리면 들으려고도 하지 않잖아요. 그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에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제가 대구 갔다 왔잖아요. ‘전광훈 복음 아니다’ 이야기하면
‘왜 이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위해서 힘쓰고 목숨 걸고 지금 외치는 사람을 욕하느냐?’ 해요.
그 사람 욕을 하는 게 아니고, ‘그러면 전광훈 이야기 안 해야 되지.’

전광훈이가 말을 했잖아요. 그 사람 말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저 전광훈 안 미워합니다. 하나도 안 미워요.
화가 나는 게 뭐냐? 하면
복음이라는 걸 갖고 복음을 정치적 권력으로 이용을 한다는 거예요.

그걸 어떻게 이용하는가? 하면
‘이 나라가 공산주의가 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좌파 이재명이는 우리가 뼈 빠지게 번 돈을 다 뺏어가지고 번 돈을 나눠준다는 거예요.
그거 짜증 나서 싫다는 겁니다. 맞나요? 어머니가 그 얘기를 하죠?
제 혈족이 완전 팬이거든요. 열혈팬. 근데 그 목사들이 (대구 이쪽 목사들이) 다 거기에 동의를 해요.
왜? 목사들은 다 부자거든요.

제가 합동측에 이전을 하려고 가보니까 목사들이 앉아서 뭘 얘기하는가? 하면
‘자네 이번에 무슨 차 사줬냐?’ 이 얘기를 해요.
그 당시에 그랜저가 아주 좋았거든요. 한 30년 전이니까.
‘집 한 채 사줬냐?’ 이런 얘기를 하고 놀거든요. 다 부자들이에요. 그 사람들은.
그래서 저는 ‘주님이 공산화시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또 반대로 북한은 어떻게 해야 돼요? 북한은 뻔해요.
‘공산주의하에 있으니까 신앙생활 못 한다’ 별별 소리를 다 하잖아요.
근데 그 탈출한 인간들 간증을 한번 들어보세요. 뭐 이야기합니까? 돈에 미쳤어요. 맞죠?
그런 걸 전혀 안 보시는 모양인데 이 자본주의 세계에 들어오면
‘그때가 좋았다’ 하면서 돌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니까요. 돈맛을 보면요. 그 맛을 못 놓습니다.
그래서 그 나라는 민주화가 돼야 돼요. 우리가 그만큼 악마성이 있는 거예요.

역사 속에 전체주의도 등장하고 독재도 등장하고 별별 인간들이 다 등장했는데
그 모든 정치 체제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그것만 없으면 신앙생활을 잘하겠다’는 것은 다 가짜예요.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그 독재하에 들어가서 신앙생활을 못 했습니까?
그보다 큰 독재가 어디 있습니까? 기도도 못하게 하는데.

그러한 어떤 생각들을 갖고 있는 겁니다.
지금 이 불만이 그러한 불만과 동일하다고 보시면 돼요.
그래서 그들이 뭘 기도합니까?
이 체제를 지켜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거든요. 간절히 기도하는데 그들 앞에 누가 있다?
이재명이 있다 그러면 이재명이 영웅이 돼요.
심지어 갓재명이라고 하거든요. 그게 우리가 농담으로 들릴지 모르지만요.
그게 우리의 마음속에 악마성이 들어있기 때문에
갓재명이 되든 갓동훈이 되든 그러한 생각에 미쳐 있는 거예요.

제가 왜 지금 이 얘기를 하는가? 하면 이스라엘의 불만이 그런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모세가 이제 화가 난 거예요.
여호와 하나님 편에 서서 화가 난 거예요. 화는 거룩한 화니까 뭐 괜찮다 하지만
나중에 한번 보세요. 이게 지 마음대로 해가지고 거룩함을
모세는 거룩함을 나타내게 되어 있어요.

민11:11절에 “여호와께 여짜오되 주께서 어찌하여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나로 주의 목전에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나로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괴롭게 하기 위해서 은혜를 입게 한 거예요. 괴로워라고.
이게 나중에 예수님께서 완성을 하거든요.
예수님은 고난 가운데, 핍박 가운데, 저주 가운데로, 조롱 가운데로 걸어가시고
나중에 성도들도 마찬가지예요.

은혜를 입게 한 이유가 뭐냐? 하면
괴롭게 하기 위해서 은혜를 입혀줬습니다. 안 믿으시는 분위기는 아니죠?
왜 괴로우냐? 하면 복음 때문에 괴로운 거예요.
이번에 제가 글을 썼잖아요. 뭐 잘못 올려서 댓글을 올렸지만.

설날에 사람들을 만나보면 친척들을 만나보면 거짓 증언이 판을 치잖아요.
‘너 아들 뭐하냐? 자식 뭐하냐? 사업 잘 되냐?’ 이것밖에 얘기를 안 해요.
거기에 복음을 턱 던져보세요.
‘엄마. 삼촌. 십자가 외에는 우리가 자랑할 게 없어요. 그거 아무리 잘 돼도 소용없어요.’
정치 이야기 나오더라도 그 윤석열이가 대통령으로 평생을 하든 저는 영원히 독재했으면 좋겠어요.
이번에 한 300석을 다 얻어가지고... 좌파는 화를 낼 거거든요.

우리의 왕은 주님이에요.
주님은 완전히 쏠린 세계에 살았잖아요. 로마 제국의 압제하에 살았다고요.
‘그러면 목사님 이렇게 자유롭게 모이지도 못할 건데...’ 안 모이면 되잖아요.
‘그러면 당신은 설교할 자리도 없지 않느냐?’ 안 하면 되죠.
야심이 다 있는 거예요. 야심이.
내 영역을 지키겠다는 겁니다.

민11:12절“이 모든 백성을 내가 잉태하였나이까 내가 어찌 그들을 생산하였기에 주께서 나더러 양육하는 아비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예수님이 지금 이 일을 다 하시거든요. 이 일을 다 하면 예수님이 끝나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을 증거하는 그들,
그 당시에 감독이나 이 장로들이 이 역할을 그대로 부여받습니다. 부여받고
성도들도 여기에 합류를 해요. 그 기능이에요. 기능.
부여받았다고 해서 뭔가 대단한 건 아니고요.

(민11:12~13)“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 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까”
이 사람들은 너무 많고 내 책임이 너무 중하다.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민11:15)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데 고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
성도라면 이 정도 기도는 나와야 돼요.
뭐 때문에? 성도 때문에. 그러자

(민11:16~)“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노인 중 백성의 장로와 유사되는 줄을 네가 아는 자 칠십 인을 모아 데리고 회막 내 앞에 이르러 거기서 너와 함께 서게 하고 내가 강림하여 거기서 너와 말하고 네게 임한 신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하리니”
모세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했어요.
브살렐과 오홀리압도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성막을 만들었거든요. 성막 기구를.
모세도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람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람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이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람은
아까 처음 시작할 때 성령은 십자가의 완료성인데
구약에서는 미완료예요. 그래서 파편적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했는데 문제가 뭐냐? 하면
모세가 한계성이 남아 있었잖아요. 나왔잖아요. 하나님의 신이 임한 자로서.
그런데 요엘서로 넘어오면 ‘하나님의 신을 부어준다. 내 영을 부어준다’라고 하면
모든 인간이 뭘 꿈꾸는가? 하면 나도 모세처럼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근데 그 모세라고 할 때는 자기가 생각하는 완벽한 모세를 꿈꾸는 겁니다.

다시 조금 더 봅시다. 하나님께서 그 70명에게 부어준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고 18절에
“또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 몸을 거룩히 하여 내일 고기 먹기를 기다리라”이렇게 나오고요.
그러면서 이제 26절 사건이 등장합니다. 70명을 불러라 했는데
이 70명이 산헤드린 공회의 원조죠. 플러스 1, 모세.
대제사장이 이제 산헤드린 공회의 의장격이 되는데
두 명이 출석을 안 했어요. 출석을 안 했으면 성령을 안 줘야 되잖아요.
마치 꼭 이런 것 같아요. ‘우리 교회에 와야만 성령 받아.’
근데 저쪽에도 성령을 줍니다. 이 탐심이거든요. 봅시다.

(민11:26)“그 녹명된 자 중 엘닷이라 하는 자와 메닷이라 하는 자 두 사람이 진에 머물고 회막에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나 그들에게도 신이 임하였으므로 진에서 예언하는지라”
지금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운다’라고 이야기를 했고,

요엘서에서는 하나님의 신을 모든 육체,
‘모든 육체’라고 할 때는 일차적으로 누구냐? 라고 하면
남은 자들이에요. 그들에게 부어준다라고 할 때 이 말씀이 그냥 나온 게 아니라 바탕에 있는 겁니다.

(민11:27~) “한 소년이 달려와서 모세에게 고하여 가로되 엘닷과 메닷이 진중에서 예언하더이다 하매 택한 자 중 한 사람 곧 모세를 섬기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말하여 가로되 내 주 모세여 금하소서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 하느냐 여호와께서 그 신을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어떻게 보면 모세가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요.
어떻게 보면 모세가 제대로 말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왜냐하면 앞뒤 이 사건이 있기 때문에.

어찌 되었든 이 여호수아는 뭘 원했느냐? 하면 모세의 지도권이죠.
모든 권력은 누구에게만 집중돼야 돼요? 대통령에게만.
모든 힘은 나에게 집중돼야 된다는 거예요. 왜?
이 여호수아는 자기가 후계자가 될 것을 예상을 하거든요.
아직까지 후계자로 세워지지는 않았습니다마는 나름 모세의 시종이니까.
‘금하소서’라고 하는 거예요.

이 모임을, 이 이스라엘을 뭘로 보는가? 하면
마치 모세는 왕이고 모세 중심으로 모든 것들이 흘러가야 되고 그 배후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있다라고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금하라는 거예요.

그때 모세가 “나를 위하여 시기 하느냐?”
누구를 위해 시기 해야 돼요? 여호와를 위해서 시기 해야 되거든요.
근데 모세를 위해서 시기하는 거예요. 이건 이런 것들 진짜 중요합니다.

목사를 위해서 시기하면 안 돼요.
복음을 위해서. 피 복음을 위해서 이 싸움을 해야 되는데
사람들은 이 싸움을 사람 싸움으로 바꿀 가능성이 대단히 높아요. 이 여호수아처럼.

그 이유는 아볼로파, 게바파.
아볼로가 무너지면 누가 무너진다는 거예요? 내가 무너진다는 겁니다.
여호수아도 마찬가지죠.
이럴 때 모세가 예언을 하는 거예요.

(민11:29중반절)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기를 원하노라” 이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여호와께서 그 신을 모든 백성에게 주실 것을 예언을 한 거예요.

그래서 요엘서를 다시 보면 2장에 28절
“그 후에 내가 (그 날들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이게 언제냐? 라는 거예요. 언제?
언제냐? 그것에 대해서 이들이 이 촉각을 세우고 이 남은 자 유대인들이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내 신을 모든 육체에게 언제 부어주겠느냐?’

언제 부어주겠느냐를 기다릴까요? 안 기다릴까요? 이제 여기 들어가 봅시다.
제가 기다린다 했는데 기다릴까요? 안 기다릴까요?
안 기다립니다. 왜 안 기다렸느냐 하면

하나님의 신이 임한 모세를 보면 어떻게 살았어요? 말씀대로. 율법대로.
이러한 정답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신은 내가 소유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잖아요.
성령을 내가 달라고 한다고 줍니까? 달라고 한다고 줘요? 안 주시죠.
만일에 성령을 내가 달라 해서 준다면 성령은 내 종이에요.
성령을 주시는 예수님은 나의 쫄따구에 불과한 겁니다.
오늘날 교회가 그렇게 다 만든 거잖아요.

‘여러분 성령을 구하세요. 성령을 구하면 주님께서 성령을 주십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도 자기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는 거예요.
자기가 지금 주의 자리에 앉아서. 마귀가 이야기하잖아요.
‘나한테 절하면 모든 걸 주겠다. 너 나에게 절해.’ 이 얘기거든요. 기도한다는 그 내용이.

사실은 기도를 하게 되면 ‘예수님이 나에게 절해!’ 이렇게 요구를 했다가
내가 이 악마성이 드러나면서 그분에게 굴복당하는 게 기도인데,
십자가에 합류당하는 게 기도인데
교회는 그런 걸 용납하지 않습니다. 왜?
교회에서 실패와 사람들 보기에 소유가 없고 부족한 것들이 많이 보이면
그 사람은 주님이 함께하지 않는 자이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 어릴 때부터 기도원 다니면서 얼마나 성령 받고 싶었습니까? 맞죠? (안 다닌 분이 많네.)
다닌 분들 어때요? 성령을 왜 달라고 했습니까? 말씀대로 살고 싶잖아요.
말씀대로만 살고 싶습니까?

요엘서에 나오잖아요. “꿈을 꾸며 젊은이는 이상을 보며”
꿈꾸고, 이상 보고...
모세가 예언자잖아요. 선지자잖아요. 모든 걸 다 한 거예요.
그 모세처럼 되는 것을 상상을 하는 겁니다. 상상을 하는데
이게 신은 줘야 되잖아요.

그런데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보세요. 신을 주는 것을 어떻게 바꿔버립니까?
지식 체계로 다 바꿔버린 거예요. 놀랍지 않습니까?
지금 이 얘기가 왜 중요하냐? 하면 오늘날 복음을 다 지식으로 다 바꿔버린 거예요.
‘그럼 목사님 지식이 필요 없습니까?’ 반드시 있어야 돼요. 성경 지식이 가득해야 됩니다.
가득해야만 ‘이 지식이 아무 쓸모 없다’라는 것을 고백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돈을 많이 벌어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걸 알아요.
돈을 ‘매월 200만 원 버는데 나 돈 별로 사랑 안 해’ 돈맛을 못 봐서 그래요.
그러면서 자기 신앙을 합리화하는 거예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이 말씀을 다 압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의 신을 빼버리느냐? 하면 빼도 상관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신이 아님에도 자기들은 성경을 연구해서
심지어 ‘메시야가 어떻게 올 것이다. 어디에서 올 것이다’ 이걸 답을 다 갖고 있어요.
다 갖고 있으니까 하나님 뜻을 알아요? 몰라요? 알죠.

아니까 자기들을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참 재밌잖아요. 여러분 사복음서에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신이 임했다’ 이런 얘기합니까? 안 합니까?
안 하잖아요. 철저하게 뭘 중심으로 합니까? 말씀 중심이거든요.

그러면 이들은 뭘 생각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신이 임하면 말씀대로, 언약대로, 그대로 살아가는 모습 기다리는 모습
심지어 신이 임했기 때문에 메시야를 기다린다라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아니면 이들이 이런 본문을 갖고
‘우리는 완벽하니까 메시야가 온다면 우리에게 신을 부어줄 것이다’
사실 신을 부어줘도 추가될 게 별로 없어요.
왜냐하면 말씀을 빠삭하게 알면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갈지 알고
이 세상이 누구 손에 달려있는지까지 다 알아버려요.
누구 손에 달려 있습니까? 말씀을 바삭하게 알면 누구 손에 달려 있어요?
내 손에 달려 있죠. 말씀을 아는 내 손에. 왜? 말씀대로 되어지니까.
그런데 성령이 와버리면 어떻습니까? 이 모든 것들이 와장창 무너져버리죠.

모든 육체에게 하나님의 신을 부어주게 되면
이 유대인들이, 남은 자들이 이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신을 부어주게 되면 모세처럼 될 것이다’라는 거예요. 모세의 예언이니까.
그들이 모세를 존경하잖아요.
제가 과하게 해석하는 게 아니고 성경이 이렇게 연결돼 있어요.

그런데 모세처럼 되는 거는 맞아요. 사도행전 2장에 그런 내용이 나오긴 나옵니다.
문제가 뭐냐? 하면 그렇게 신이 임하여서 꿈을 꾸고 환상을 보고 이러한 것들을 했을 때
누구를 증거할까요?
하나님의 신, 여호와의 신이 임했으니까 여호와를 증거할 거란 말입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거예요.

설사 그들이 여호와의 신이 임해서 우리가 말씀을 가르친다 하더라도 그럼 뭘 증거하느냐? 하면
여호와를 증거하게 돼 있어요.
지금 모세도 누구를 증거했습니까? 여호와를 증거했죠.
여호와를 증거한 거예요.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가운데 거하시면” 이렇게 말을 했을 때
이 단어는 일차적으로 성령 받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하시는 말씀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의 성령이 있는 자가 성도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자는 무엇을 알아야 되느냐? 하면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신’의 의미를 알아야 돼요. 그 신의 의미를 알고
하나님의 신이 임하면 어떻게 살 것이라는 내용까지도 그들이 알아야 되는 겁니다.
알아야 된다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어요.
그걸 알려주기 위해서 지금 로마서 1장부터 써오는 거고요.
여기에 ‘그리스도의 성령’, ‘성령’ 이런 표현을 한꺼번에 한 구절에서 다 써버리는 거예요.

요한복음 5장으로 가보겠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안식일날 고치신 사건이 나오죠.
“자리를 들고 일어나 가라” 걸어가라라고 명하심으로 말미암아 의도적으로 안식일을 범하십니다.
근데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이런 겁니다. 19절에 보면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이 말씀이 되게 어려운데 쉬워요.
예수님이 계시는데 예수님이 활동하는 모든 것들이 아버지 것을 보고 한 거예요.
그러면 사람들은 아버지 걸 보여달라고 요구할 거 아닙니까? 못 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통해서만 자기를 계시하시기 때문에.

21절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시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구약의 ‘하나님의 신’은 하나님을 증거하는데
하나님을 증거하는 그 내용을, 내면을 들여다보면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증거한 거예요.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왜 이렇게 말씀을 하시느냐? 인간이 선악과를 먹었잖아요.
그 선악과를 먹은 자가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지점이 뭐냐? 하면
구약의 하나님이 계시하신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을 믿는다라는 겁니다.
어디까지 올라오느냐? 이 얘기예요.

남은 자를 만든 이유는
방금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서 하나님을 계시한 그 내용을 보는 자들, 읽는 자들이
그 구약을 다 연구하면서 어떤 하나님을 찾아내느냐? 하면
“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그 하나님을 찾아내고
그 십계명을 다 지키는 자들이 등장을 하게 돼요.
그들이 말하는 여호와 하나님은 ‘성경대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등장을 하셔서 ‘그 하나님은 우상이라’고 하시는 거예요.

귀 없는 자는 못 듣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바뀐 적이 있느냐?’ 이렇게 묻거든요.
하나님은 바뀐 적은 없는데요.
인간의 죄악을 저지르는 그 상황을 따라서 하나님은 언약을 계속해서 바꿔 가시죠.
갱신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맞춰 가요.

죄의 그 깊이에 따라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그 깊이에 맞추어서 자기를 계시하는 겁니다.
그 마지막에는 어떻게 인간들이 죄악을 드러내느냐? 하면
‘하나님 말씀대로 믿습니다. 십일조도 하고 안식일을 지키고 율법을 어릴 때부터 다 지켜냅니다’라는
그런 자들 앞에 하나님은 누구를 보내버립니까?
그런 죄인을 만들기 위해서 계시를 준 거예요.

왜냐하면 세상 자체가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한 세상이 아니라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주되심을 위한 창조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요한복음 1장에서는 창세기를 어떻게 해석해 버립니까?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 하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의 성령,
로마서 8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성령만 임한 게 아니라 그 성령이 임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사람이고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시는 자고 성령이 임한 자죠.
그런 사람은 창세기를 어떻게 봅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십자가 지신 그 아들을 위하여서, 아들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라고 이야기를 해요.
여기에서 충돌이 일어나는 겁니다.

한쪽은 ‘성경대로 믿자’ 할 거 아닙니까.
다른 한쪽은 ‘성경대로 믿자’ 똑같이 둘 다 부딪히죠.
인간의 상대주의 관점에서 보면 그렇게 되는데

십자가의 입장에서 보게 되면
유대인들은 누가 봐도 ‘하나님이 창조했다’라고 말을 하잖아요. 그죠?
창조론자들이 그렇게 이야기하잖아요. 그 창조자들이 바보인 게 그런 거예요.
요한복음 1장을 갖고 창세기를 해석을 안 하고 그건 빼버려요.
요한복음 1장을 빼버리는 순간 창세기 1장은 유대교가 돼요.
십자가가 빠져버리면 유대교가 된단 말입니다.

우리 인간들이야 호기심이 있어서 그 창조의 능력과 증거를 보면
‘이야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믿을 만하네.’
그게 악마예요. 왜냐하면 우리는 뭐밖에 안 믿어요?
눈으로 보고 확인한 것밖에 안 믿어요.

근데 믿음은 어디에서 납니까? 선물이잖아요. 그죠?
천지창조를 보고 믿습니까? 믿음으로 믿죠.
근데 인간들은 그런 식으로 접근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제 요5:22절에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성령 충만을 받으시잖아요. 그죠? 하나님의 신이 임하였는데
그렇게 표현할 수 있어요.
하나님의 신이 사복음서에서는 하나님의 성령, 예수님의 영, 성령과 이 교차가 가능해요.
예수님이 오셨을 때는.

성령이 임하면 예수님을 어디로 끌고 갑니까? 십자가로 끌고 가죠. 십자가로.
방금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하나님의 신이 임하면 어디로 끌고 가요?
사실 모세 언약 안으로 끌고 가거든요.
모세가 희생물이 되잖아요. 사실 그리로 끌고 가는데

육에 속한 자들은 하나님의 신이 임하면 예언하고...
예언한 선지자들을 보면 얻어터지고 죽임을 당했거든요. 근데 사람들은 그 생각을 안 해요.
우리를 선지자라고 하잖아요. 이 세상에 예수 믿는 자를.

선지자라면 어떻게 돼야 됩니까?
미움받고 핍박받고 죽어야 되잖아요. 맞죠.
그러면 왕 같은 제사장. 그러면 제사장은 어떻게 돼야 돼요? 죽어야 되죠.
그럼 왕은 어떻게 돼야 돼요? 죽었잖아요. 죽어야 돼요.
이 세 가지 직분이 다 죽는 직분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왜 유대교냐? 하면
이 세 가지 직분을 이야기하면서 살려고 하잖아요.
그러니 구약을 해석할 때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니까,
주님이 주가 되셔서 보내준 성령이 없으니까 이 구약을 해석할 때 어떻게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까?
하나님의 신으로 해석하는 거예요.

그래서 성령조차, 주님이 보내신 성령조차 ‘하나님의 신’으로 해석을 하는 겁니다.
힘, 능력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성령의 능력은 우리가 보기에
‘물 위를 걷고 바다를 잔잔케 하고 죽은 자를 살리고 야이로의 딸을 살리고 38년 된 병자를 고치고...’
이게 성령이 충만한 하나님의 아들의 능력이라 하지만
진짜 능력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십자가에서 나와요.

요한계시록 보면 이 마지막 때
악마들은 예수님이 하는 일을 다 해요. 죽은 자도 살리고요.
의사들도 그런다고 이야기하거든요.
유능한 의사는 ‘나는 사람을 살릴 수 없다’해요. 수술만 할 뿐이라는 겁니다.
이걸로 사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메카니즘이 다른 체계라는 거예요. 인간 몸 자체가.
되게 똑똑하잖아요.

근데 그걸 뒤집어버리면 어떻겠습니까? 내가 고쳤다가 되잖아요.
옛날에는 우리는 지금 정보가 있기 때문에 옛날에는 그래요.
의사가 고친 걸 하나님이 고쳤다 해요.
‘하나님의 신’ 개념을 그대로 끌고 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성령을 받게 되니까 그들은 소문이 났을 것 아닙니까.
세례요한이 또 이야기도 했을 거고.

그러고 능력을 행하니까
‘야 진짜 모세가 보낸 그 선지자고 앞으로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신이 다 임할 거라’
그렇게 예상을 할 수도 있어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왜 예수님을 배척하는지 아시겠죠? 그런 기대를 품고 있는 겁니다.
그런 기대를 품으니까 병 낫게 하고 오병이어 기적을 행하니까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거예요.
오늘날도 그런 일을 하면요. 안 따라갈 사람 없어요.
인간은 그런 유혹에 안 빠질 수가 없습니다.

근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졌거든요.
십자가를 져버리니까 이게 모든 것이 무너지잖아요. 체계 자체가.
하나님의 성령이 임했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돼요?
승리하는 자가 돼야 되거든요. 다윗처럼 실패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을 나에게서 거두지 마옵소서’
이제 영원히 신이 임해서 성공한 다윗, 실패하지 않는 그 다윗 왕을 그들이 기대를 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게 하나님이, 신이 하시는 일이었어요.
그래서 성령께서 예수님을 십자가로 몰아갔고요. 그죠?
예수님은 자원해서 거기에 합류를 하셨고

그 이후에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이제 아버지께 있는 그 성령을 예수님이 받아서,
받았다라고 할 때 단순히 경유지가 되는 게 아니라 말은 경유지지만
예수님을 통과해버리면 이 성령은 하나님의 성령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돼요.
그리스도의 영. (오늘 그리스도 이야기를 좀 했어야 되는데)

이 그리스도의 영이 되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하거든요. 사도행전에 보면.
‘주’라는 것은 심판주가 맞아요. 하늘 우편의
그런데 이 땅에 나타난 모습은 그리스도의 모습이에요.

그 그리스도의 모습은
기름부은 자인데 앞서서 얘기했듯이 선지자, 제사장, 왕은 다 죽는 캐릭터입니다.
주님께서 성령을 부어주는 겁니다. 아버지께로부터 받아서.

그래서 신학교 가면 ‘성령이 어디로부터 오느냐?’
예수께로부터도 오고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겁니다. 말은 다 맞아요.
근데 이게 분리가 돼버리면 어떤 사태가 발생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신을 내가 받아버리면 이 신 개념은 구약에 의하면
능력 개념이에요. 힘 개념.

그런데 ‘그리스도의 영’이 되면 뭐예요?
십자가의 영이잖아요. 신학자들이 나쁜 놈들입니다. 있는 걸 다 뽑아서
골라잡으라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로마서 8장 9절에서 이 세 가지를 한꺼번에 언급하는 이유가 있는 겁니다.
그 하나님, 사도바울이 누구보다 잘 알죠.
자기가 나름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겼잖아요. 하나님을 제대로 믿은 거예요.
하나님의 신이 있다라고 확신한 겁니다.

그러니 마치 누구처럼? 구약에 나오는 그 악한 자들을 치는 누굽니까? 삼손이나 이런 자들처럼,
자기 백성 가운데 예수 믿는 그런 자들을 죽이고 핍박을 한 거예요.
그런데 그런 자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니까 어떤 사태로, 어떤 모습으로 바뀌어버립니까?
자기 자신이 우상을 섬기고 있었다라는 사실이 드러난 거예요.
그 우상을 섬기는 자가 성령을 받게 되니까
진짜 신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는 겁니다.
그것이 성령이 임한 사람이에요.

성령이 임했으니까 그다음 나오는 게 또 성령이잖아요.
그래서 성령이 우리와 함께 동행을 합니다. 그 롬8:10절에 보면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이 말씀도 되게 어려운데 몸.
몸이라는 것은 ‘소마’라는 건데 영은 ‘푸뉴마’예요.
근데 이 ‘푸뉴마’를 어떤 사람은 성령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인간의 영이라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문맥상은 인간의 영인데 인간의 영을 왜 이렇게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게 됐느냐? 하면

이것은 예수님의 기도가 있잖아요.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하나가 된 내용을 담고 있는 거예요. 이 영은.
그 하나가 된 내용을 담고 있는 영이 로마서 7장에 보면 어떤 모습을 보입니까?
갈등 속에 있고 곤고한 자가 되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하는 이 과정 속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사도바울이 로마서 8장 9절에서
‘하나님의 성령, 그리스도의 성령, 성령’ 이 세 가지 요소를 말씀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이야기함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받지 못한 자들은 도무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도록 만들어버립니다.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이게 성도의 현장이에요.
몸이 죽었다. 영은 살았다. 요걸 분리하지 말고
요 모습을 7장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그걸로 끝나면 뭐예요? 끝난 거죠. 몸은 죽었잖아요.

성도는 거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하리로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성도는 십자가의 증인으로 살려진다는 겁니다.
제가 아까 설교 처음 시작할 때 그런 얘기했잖아요.

우리의 연속성이 없는 이유가 뭐냐? 하면
연속성을 우리에게 줘버리면 우리는 십자가를 집어던져버려요.
어제 내가 복음을 알고 믿어버리면 십자가를 던져버리고
‘이미 구원은 확보했으니까 내 인생 내 마음대로 살겠다’ 이래 되거든요.

그런데 여기에 보면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면 이 기름부음 받은 자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고난받고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죠.

그러면 성도는 그 부활의 성령을 받았죠. 부활의 영.
부활의 성령을 받았으니까 이 땅에서 어떻게 사는가? 하면
주님이 이 땅에서 살아가신 그 고난, 핍박, 미움받는 인생을 고스란히 살게 돼 있는 거예요.
사는 그 모습이 자기 부인의 방식이에요.

지난 7장 할 때도 얘기했지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이야기하면 사람들을 우습게 여기죠.
‘당신 봐. 복음을 알더니만 아직도 그 모양이야. 그 꼴이야. 아직도 그 수준이야.’
‘그래 나는 곤고한 자야. 근데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할 따름이야.’
그것 때문에 8장 후반부에 핍박을 받아요.

만일에 사람들에게
‘여러분 하나님의 성령, 그리스도의 성령, 성령이 여러분 가운데 거하시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면 어떻게 삽니까?’
뒤에 핍박 빼버리고 로마서 잘라버려야 되죠.

그리고 이걸 어디로 갖고 오겠습니까?
욥이 결론에 그전에 받았던 복에 갑질의 복을 받은 그러한 축복을 끌고 오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습니까? 안 받습니까? 안 받죠.
앞서 제가 그 정치적 얘기를 했지만 좌파에 있든 우파에 있든 그 목사들이 왜 자꾸 그런 걸 추구하고
그걸 왜 자꾸 그걸 내세우느냐라고 하면 그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의 성령은 그런 성령이에요.
악령입니다. 마귀가 요구하는 바죠.

‘네가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면 우리나라를 (어떻게 만들어라?)
공평과 정의가 다스리는 나라로 만들어라’ 좌파들이 그렇게 이야기하거든요.
있는 자 돈 다 뺏어가지고 (뺏는 건 아닌데)

여러분 개인적으로 보험 엄청내잖아요. 그죠? 개인 보험.
실손보험 안 내는 사람 있습니까? 거의 다 내잖아요.
머리만 좀 좋으면 실손보험료를 국가에 다 내서 그냥 보험 혜택 받으면
훨씬 잘 먹고 잘 살거든요. 정책적으로 보면. 근데 왜 안 할까요?
돈벌이 하는 인간들이 따로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근데 사람들은 그걸 하면 공산주의라고 하거든요. 그럼 그걸 또 싫어하고.

반대로 이 좌파들은 그걸 해야 된다는 거예요. 왜?
그래야만 정말 하나님의 공의가, 사랑이 다스리는 세계라는 거예요.
주의 나라는 이 땅이 아니에요.
어떤 상황과 형편에 있든 주님은 이스라엘을 보세요. 형편의 문제가 아니에요.
주님이 그들과 동행을 하니까
언약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면 ‘나 있는데요.’
‘나 있다라는 말 하지 말라’ 이 얘기예요.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얘기예요.

그 ‘있다’라는 모습이 이러한 말씀을 통하여서 책망으로 다가오게 되는 겁니다.
오늘도 이 말씀을 통하여서 우리는 주님의 피만을 자랑할 수밖에 없는 죄인으로 드러나는 거예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를 위한 하나님의 성령, 성령, 그리스도의 성령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주님만을 증거하기 위한 성령임을 말씀을 통하여 들려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러한 말씀 속에서 우리의 죄악들이 드러나고 주님의 죽으심만 돋보이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 인생을 긍휼히 여기시사 그리스도가 우리 가운데 사는 자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십자가만 자랑하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그리스도의 성령이 우리 가운데 거하기를 소원하며 주님과 동행하기를 소원하며,
십자가만 자랑하기를 소원하는 주의 백성에게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