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4-02-25 15:57
20240225 로마서 강해 54강 롬 8:14-17 양자의 영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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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4-02-27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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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25 로마서 강해 54강 롬 8:14-17 양자의 영

다 함께 묵상 기도드리겠습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 고백하겠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 말씀, 잠언서 26장 28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잠26:28)
“거짓말하는 자는 자기의 해한 자를 미워하고 아첨하는 입은 패망을 일으키느니라”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입만 열면 거짓말 하고 입만 열면 아첨하는 저희들의 입을 통하여서
주님의 복음을 전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주의 영께서 친히 주님의 복음을 전하시기에 우리는 거짓말하는 쟁이로 계속해서 드러나게 하시고
십자가의 피로 다 이루셨다는 그 귀한 복음만이 드러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시편 86편 1절에서 9절까지 말씀을 교독하겠습니다.
[다윗의 기도]
(시86:1~9)
“여호와여 나는 곤고하고 궁핍하오니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 나는 경건하오니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 내 주 하나님이여 주를 의지하는 종을 구원하소서 주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종일 주께 부르짖나이다 주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오니 주여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 주는 선하사 사유하기를 즐기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 여호와여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주여 신들 중에 주와 같은 자 없사오며 주의 행사와 같음도 없나이다 주여 주의 지으신 모든 열방이 와서 주의 앞에 경배하며 주의 이름에 영화를 돌리리이다”아멘

이 시간 박연배 집사님 대표해서 기도해 주시겠습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 ,
오늘도 저희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저희들은 항상 욕심으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에만 늘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저희들입니다.
이 시간 저희들에게 말씀을 통하여 성령이 역사하시어
이런 죄인에게 임한 하나님의 심판과 긍휼하심이
십자가에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게 하시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라오며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이루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나님 말씀, 로마서 8장 10절에서 13절 말씀을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롬8:14~17)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아멘

정말 놀라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로마서 8장에서 간단하게 그리스도의 영, 그런 식으로
획일화시켜서 말씀을 하시면 우리가 이해하기 쉽고 받아들이기 쉬울 것인데,

이 성도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고,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고,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고
이 세 가지 요소를 계속해서 반복하면서 말씀하시는 그 목적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겁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뭐 당연하죠’라고 하지만
이 시제가 현재예요.
지금 ‘하나님의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라는 것을
항상 성경은 이 부정적인 것을 깔고 있습니다. 심판의 요소를 깔고 있어요.

그러면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게 어떤 모습이냐? 어떤 것이냐?
그러면 우리가 그냥 하나님의 영으로 나는 인도함을 받아요.
이렇게 주장을 하면 인정할 수 있느냐? 라는 거예요.
제가 그저께 이제 말씀을 준비하면서 그 오산리 기도원.
어떤 여자 목사님이 나와서 거의 45~50분 설교를 하는 걸 들었어요. 내용이 뭐냐? 하면
제목이 ‘하나님의 성령의 불을 받아라’인데
말씀을 통해서만 성령께서 역사하신다는 거예요. 이 말이 틀렸습니까?
제가 그 설교를 들으면서 어릴 때 기도원 가서 들었던 설교들이 조금씩 떠올랐어요.
그 당시 목사들도, 부흥사들도 성경에 없는 이야기는 하지 않거든요.

그런데 이 사람이 목사님이죠.
성경에 나오는, 말씀으로 능력이 임한 구절을 한 30개를 뽑아서 다 외웠어요.
물론 한 구절은 잊어버려가지고 찾았는데... 그거 뭐하러 외웁니까? 써서 나오면 되는데.

뭘 이야기하고 싶은가? 하면
십자가도 이야기해요. 말씀을 이야기하는데
성령, 성령을 충만하게 받고 성령의 불을 받으면 결론은 무엇인가 하면 잘 된다는 얘기예요.
자기 남편이 죽었는데 오산리 기도원에 와서 돈도 없어서 기도를 하고 있는데
주님께서 불을 주셨다든가 하여튼 주셔가지고 음성을 듣게 했다는 거예요.
‘누구야 누구야...’
그래서 그 기도의 응답이 지금이라는 거예요. 지금이 뭐냐? 하면
많은 사람들이 자기 설교를 듣고 아멘을 한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자기는 말씀대로 가르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말씀대로 가르치면 성령의 불이 역사하여서 그다음 나오는 대사는 뻔하죠.
벌써 주무시잖아요. 뭐가 나올지 아니까.
병 고치고, 잘 살고, 화목하고... 이 이야기 없으면 오산리 기도원 안 가잖아요. 맞죠? 집사님.
그 이야기 빼버리면 누가, 그 수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가서
(지금 돈 벌기도 바쁜데) 시간을 내서 가겠습니까?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라는 거예요.
그게 성령의 역사입니까?

‘하나님의 성령으로 어떻게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느냐?’
‘어떻게’라는 것은 우리 쪽에서 없어요. 이게 무시무시한 말씀이에요.
‘어떻게’라는 말씀 자체가 없어요.
성령은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다시피
바람이 임의로 불듯이 성령으로 난 사람은 그러할 뿐이에요.
나타나면 ‘성령의 역사네’ 그게 다예요.

근데 나타난 그 성령의 역사 중에 모델이 있어요. 모델.
그 모델과 다르다면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는 겁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이 누굽니까?
지금 이 14절 이 내용도 중의적이죠.
하나님의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 물 세례 받고 올라오실 때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렸죠.
하늘이 열렸다라는 말은 단순히 음성만 들렸다. 성령만 임했다라는 게 아니라
그 하늘의 내용이 아들 속으로 다 들어왔다라고 봐야 돼요.
하늘이 열리니까 하늘에는 뭔가 숨겨져 있는 것들이 가득가득 있는데 열리고
‘그 아들을 통하여서 뭔가 하늘의 계시를 조금 열어주지 않겠느냐’ 사람들이 그런 망상을 해요.

왜 제가 망상이라고 하는가? 하면
그 하늘 개념에, 열린 개념에
십자가로 말미암아 완성된 천국 외의 것을 사람들이 상상을 하면
그게 계시 밖으로 나가버렸거든요. 그리스도 안에서 나가버렸어요.

지금 왜 하늘이 열렸느냐? 하면
이 하늘의 아버지와 아들과의 그 언약이 땅에서 계시가 되는 겁니다.
성령이 임하고 그러면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이제 아들이라 하잖아요.
마태복음 3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13절에 보면
“이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라 하신데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는데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성령이 먼저 임해요. 성령이 임한 이후에 소리가 들리는 게 뭐냐? 하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 말씀이 굉장히 중요해요.
성령을 예수님이 안 받았으면 아들 아니에요.
그러면 로마서 8장 14절과 안 맞잖아요.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을 때
이 아들의 그 원조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거든요.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아들이 아니에요.

이게 왜 이렇게 중요하냐? 라고 하면
성령 받은 예수님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어디로 갑니까?
죽는 자리로 가는 거예요.
고난의 길로 가는 겁니다. 자기 백성을 대신하여 대속제물이 되는 그 길로 가시는 거예요.
그래서 성령이 없으면 아들이 아니에요.
제가 무시무시한 말을 하고 있죠. 지금.

‘삼위일체에 의하면 성부가 계시고 성자가 계시고 성령이 계시지 않느냐?’
신학적으로 그렇게 주장을 하는데 성경에는 성령이 임한 그 예수님을 아들이라 하는 거예요.
십자가에 죽으심이 없는 분은 아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선악과를 (과격한 표현 안 쓸게요.) 선악과를 잡수셨기 때문에
지식에 대해서 하나님처럼 상상의 나래를 펴요.
‘아니 목사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면 창조 전부터 계셨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때는 십자가가 없지 않습니까?’
누구 이야기예요?
지금 구약에 아들이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나오죠.
그림자로 누가 나옵니까? 이스라엘이 나오죠. 이스라엘.

주님 쪽에서는, 하나님 쪽에서는 시간적 제한을 안 받습니다.
하나님 쪽에서는 십자가라는 그 사건 한 순간이
인간의 모든 역사, 창세 전 그다음 그 이후 심판 이후까지 다 담고 있어요.
우리는 그걸 못 따라갑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성령 안 받았다고 해서 어떻게 아들이 아니냐?’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신개념을 자기가 갖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여러분들이 아셔야 되는 게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이스라엘을 만들어서 자기를 계시하셨는가를 알아야 돼요.

이스라엘을 통해서 계시하신 이유는 이방 나라의 신들은 다 우상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민수기를 통해서 봤잖아요. 그들도 여호와를 믿어요.
여호와의 이름이 유일한 이름이 아닙니다. 꼭 아셔야 돼요.
여러분 오늘날 ‘예수님’이라는 이름이 유일한 이름입니까? 예수님 당시에도 여호수아잖아요.
‘여호수아’라는 그 이름이 한두 개입니까?
여러분의 이름 한번 쳐보세요. 옛날 전화번호부 이렇게 두꺼운 거 있을 때
오준석 하면 몇 개 나옵니까?
수십 개 정도는 뭐... 이름 잘 지은 거죠. 수백 개가 나오잖아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라 했을 때는 그 이름이 특별한 이름을 담는 게 아니에요.
아도나이, 주, 주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하실 때 이 땅에 인간의 언어를 갖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의 언어를 갖고 말씀하셔야
인간이 갖고 있는 신개념, 우상 개념이 다 드러나기 때문에 그래요.

성령을 받으시니까, 물세례를 받으셨잖아요. 이미 물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을 받으시니까
물세례 받는 그 자리로, 모든 백성의 죄를 지고 십자가로 가시는 겁니다.
십자가로 가셨다는 것은
이미 아들이라고 했을 때는 아버지 쪽에서는 십자가의 완료성까지 다 내다보고 있는 거예요.
아들이라 했기 때문에 동시에
이 아들이 이 땅에서 해야 될 일들을 공생애 기간 동안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 아들이

지금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니까
기분 좋잖아요. 기분이 안 좋아요?
‘하나님의 아들 되었다 하나님의 자녀 되었다.’ 기분 좋아요? 나빠요?
물론 성도는 좋은데요. 이 좋음이 과연 좋으냐? 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다” 했을 때
‘불을 받는다. 뜨거워서 병이 낫는다.’
병 나을 수 있어요. 주님이 얼마든지 병 낫게 할 수 있습니다. 못 낫게 하는 분은 아니에요.

낫게 하는데
진짜 주님이 그를 병을 낫게 했다면 그를 어떻게 사용해야겠습니까?
아파서 빌빌거리면서 죽어가는 그 인생보다 더 괴롭고 힘든 인생으로 끌고 가요.
죽은 나사로를 살렸으니까 기분 얼마나 좋습니까? 맞죠?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버니.
살아났잖아요.

여러분이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라 생각해 보세요. 해 봐도 이 나사로의 마음이 못 돼요.
왜 그러냐? 하면
나사로는 이미 주님에 의해서 살림을 받았기 때문에 자기 인생은 자기가 좌지우지 못합니다.
그러니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하거든요.
성경에는 안 나오지만 죽었을 거예요. 언제 죽었는지 모르지만.
아니 아파서 빨리 주님과 동행하고 싶지 않습니까? 영원히 같이 살고 싶지 않나요?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그런 식으로 해석하고 이해를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하심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라면 어떠해야 되느냐? 자녀라면 어떠해야 되죠? 아프면 돼요? 안 돼요?
‘아파도 된다’는 사람은 이미 이 세상에서 탈락이에요.
믿음이 없어서 아픈 거예요.
가정에 문제가 있으면 이 사람도 믿음이 없어서 문제예요.
사업이 안 된다 그러면 믿음이 가짜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여의도가 그래요.)
여의도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마음속 자체가 그걸 용납을 안 해요.

복음을 들을 때 인정하는 것 같지만
이 내부에서 악마가 스멀스멀 이렇게 올라와요. 그걸 인간들이 용납을 안 하죠. 이 시대 자체가.
이 시대만 그렇습니까? 예수님 시대도 똑같잖아요.
예수님을 향해서 대놓고 유대인들이 말하잖아요.
‘니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돌로 떡덩이 만들어라’ 해요.
오늘날로 말하면 우리 딸 지금 입시 준비를 하는데 ‘학교 가게 해달라’ (기도하시죠?)
‘아들이라면 에이 목사님 그런 수준 낮은 걸 기도합니까?’
그러면 빨리 AI 기계가 발전이 돼가지고 우리 뇌 속에 있는 생각을 다 끄집어낼 수 있으면 좋겠어요.

구약이 있는 이유는
우리 자신이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이 못 된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계속해서 아브람인 우리를 아브라함으로 만드신다는 거거든요.
문제는 뭐냐? 하면
그런 것을 하는 것은 그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그것을 죄인 줄 모른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라. 아들이라” 하니까
‘아들은 아들다움을 뽐내야 된다’는 거예요.
아들다움을 가장 잘 뽑는 사람은? 세리, 창기, 거지 나사로.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또 한 사람 덧붙이면 ‘예수님 옆에 달린 강도’
우리도 그 강도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용납하기 쉽지 않습니다.

거지 나사로? (그거 뭐 뒤로 물리더라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그 당시에 사형 제도잖아요. 사형 제도고 한번 상상을 해보세요. 그 시대에 유대인들은
나무에 달려 죽는 자는 누구든지 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고 확정돼 있어요.
오늘날과 같죠.
‘예수님을 잘 믿으면 집안에 문제가 없어야 되고 건강해야 되고 사업이 잘 돼야 되고
교회는 망하지 않아야 되고...’ 이게 그들이 갖고 있는 세계거든요.
그게 이미 굳어져 있잖아요. 굳어져 있어요.

그러면 우리가 지금 복음을 듣기 위해서 모였잖아요.
그럼 이렇게 모이다가 우리가 이제 사라졌다. 돈이 없어가지고 사라졌다. 예를 들어.
갑자기 제가 오늘 지하철 타고 오다가 그 생각을 해봤거든요.
‘이렇게 가다가 사고 나서 내가 죽으면...’ 흥미로운 생각을 해봤는데
그러면 사람들이 뭐라 하겠어요? ‘저봐 저봐. 뭐 복음을 전하고...’
그전까지는 인정을 해요. 그전까지는.
‘쟤 봐!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지 못했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야. 하나님의 자녀라면 지키고 보호한다 했는데 눈동자처럼...’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했는데 목자가 나를 인도하면...’ 여호와가 나의 목자면 그렇게 인도하죠.
근데 목자가 누가 됩니까?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되거든요.
그 예수님을 계속해서 여호와로 바꿔치기 하는 게 오늘날 신학이고 신앙인 거예요.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 16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예수님이 성령을 받으셨잖아요. 성령을 받은 분이 이제 아버지께 구하는데
지금 구해서 될 문제가 아니에요. 물론 지금 구하는데

이 구하는 내용이 흥미로운 게 뭐냐? 하면 겟세마네 기도예요. 조금 이따가 살펴보겠지만.
십자가를 지게 해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게 되면 그분을 주로 세우시거든요. 아버지께서.

주로 세우시면 주님이 기도하신 대로
아버지께 구하여서, 아버지께로부터 성령을 받아서 너희에게 주겠다라는 겁니다.
그 말씀이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라.”

“그가 또 다른 보혜사”라고 이야기를 하니까 ‘예수님과 다른 성령’
어떤 신학자는 그런 얘기하거든요. 하나님 시대, 예수님 시대, 성령 시대. 말은 다 맞아요.
원래 마귀는 맞는 말 한다 했죠?

성령 시대의 특징이 뭔가? 하면 십자가 피만 증거합니다. 그게 성령 시대예요.
‘또 다른 보혜사를 준다’ 하니까
뭔가 예수님 말고 다른 분을 주느냐? 다른 뭔가를 주느냐?
그게 아니라 로마서 8장 14절에 나오듯이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님의 복제품이에요. 그 보혜사가 오게 되면.

그 보혜사를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구해서 주는데 구하면 그냥 줍니까? 아니에요.
반드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돼요. 그 기도를 하는 겁니다.
그 기도 속에 무엇까지 포함돼 있느냐? 라고 하면
성령을 아버지께로부터 받아서 그 아버지께서 지금 아버지께서 주신다 하잖아요.
이 용어가 왔다 갔다 하는 이유가 지금 로마서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분들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이셔서 주가 되게 하신 거예요.
지금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성경은.

우리는 그걸 뽑아내 가지고 ‘성령이 뭔지? 아버지가 뭔지?’ 이렇게 탐구를 하는데
지금 로마서에서 이제 거의 정점에 도달했거든요.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지금 이 얘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고난이 없으면 복음을 모르는 자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는 자예요.

요즘 이 정치를 (여러분들은 관심이 없겠지만) 보면
국민의 힘이나 더불어민주당이나 공천하는 것 때문에 난리잖아요. 관심이 없죠? 다?
제가 그걸 보면서 지옥을 봐요. 지옥을.

지옥이 뭐냐? 하면 공천에서 떨어지면 떨어진 사람들이 악마성을 드러내요.
그러니까 공천서 공천이 되면 공천한 사람을 뭘로 봐요?
‘훌륭합니다. 대단합니다. 정말 공평합니다. 공의롭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떨어지면 뭐예요?
‘이 나쁜 놈, 이 악마 같은 놈...’ 지옥을 목격하고 있어요.
그게 인간의 본심이거든요.
이러한 안목을 성도는 가져야 되는데 성도는 이 땅에서 공천받고 싶어 하죠.
공천을 받아서 뭐 하려고 해요?

여러분 잘 먹고 잘 살아도 100세까지밖에 못 살아요. 100세까지 사는 것도 저주입니다. 저주.
우리 권사님 80 넘으셨는데 80 넘게 사니까 저주 맞죠?
한 60대 70대야 힘이 있고 이렇게 왔다 갔다 하는데,
80 넘어가고 90 넘어가고 그러면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에요.
오죽하면 부부가 동반 자살합니까? 죽여달라고.
네덜란드 가시면 돼요. 이제.

그런데 인간들은 그것도 마찬가지고 저것도 마찬가지인데
이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다면 그런 것 때문에 탄식해야 되죠.
이 세상 자체를 볼 수 있어야 돼요. 악마가 다스리는 세상.
저들이 진정한 복음을 모르기 때문에 악마가 계속해서 들쑤시는 겁니다.
그 공천 되고 싶은 게
취직 잘 되는 거고, 결혼 잘하는 거고, 부자 되는 거고... 이거하고 다 똑같거든요.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으셔서 이제 십자가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미리 이렇게 가르쳐줍니다.
가르쳐줘도 소용없어요. 왜 소용없습니까? 성령이 와야 비로소 말씀이 깨달아집니다.
우리는 가르쳐주면 가르쳐 준 걸 기억했다가 머리 좋은 사람들은 기억을 하잖아요. 그걸 갖고
‘아 이렇게 성령을 주셔가지고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계시게 하는구나’라고 예상을 하는데
그 예상이 다 빗나가게 돼 있어요.

왜냐하면 사도행전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이 올라갈 때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이렇게 질문을 하잖아요.
이 말씀들을 몰라서 그런 게 아니라, 기억을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 모든 말씀들을 자기가 해석을 합니다.
성령이 오지 않으면 깨달을 수 없는 겁니다.

또 한 구절을 더 보겠습니다. 요14:26절을 보면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이 말씀도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의하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죠. 그러면 누가 가르칩니까?
그리스도께서 친히 가르치죠.

그걸 지금 이 요한복음 14장에서는 성령께서 친히 가르치고 그리고
성령은 누구의 이름으로 온다고 합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온다라는 거죠.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혜사를 보내시면 그 보혜사는 예수님에 대해서 가르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가르치는데 그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
그것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했잖아요.

그러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으면 모든 성경이 예수님을 증거하니까
성경 전체가 십자가를 증거하는 말씀이 되거든요. 그게 성령의 책망이에요.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세상 임금에 대해서 책망을 하는 겁니다.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은 기쁜 이유가 뭐냐? 하면
성령을 받으면 기쁘잖아요. 기쁜 이유가 뭐냐? 감사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책망받는 가운데 죄인 중에 괴수로 드러나니까
그 피로 용서함을 받은 그 은혜 때문에 감사하고 기쁘고 즐거운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 성령께서 주의 이름으로 오셔서 보내주시는 그 성령을 받게 되면
기쁘다는 거예요. 뭐가 기쁘냐는 거예요. 뭐가? 죄인 된 기쁨?ㅎㅎ
죄인 된 기쁨은 사람들은 싫어합니다. 왜 싫어할까요? 자기를 부정해야 되거든요.

‘용서하신 사랑’ 어제 제가 저녁에 우산을 들고 이렇게 운동을 하니까
또 우리 집 옆에 큰 교회 하나 있잖아요. 그 큰 건물에 ‘구원의 기쁨을 회복하라’ 이렇게 붙여놨어요.
‘구원의 기쁨을 회복하라’
뭐 말은 나쁘지 않죠. 첫사랑을 회복해야 되니까 그건 문제가 아니에요.
근데 제가 그걸 보면서 뭘 생각했냐? 하면
교회는 이 시절을 따라 간판을 바꿔야 돼요.
똑같은 십자가 이야기하지 말고 한 번은 십자가 이야기하고 한 번은 부활 이야기하고
한 번은 또 천국 이야기하고 또 한 번은 성도의 삶 이야기하고... 12달을 계속 교환을 해야 돼요.

왜 그렇게 교환할까요?
그 구원의 기쁨을 회복하려면 십자가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나야 되잖아요.
그 얘기를 53주 동안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거기에 보면 지금 다섯 번째, 일천번제 드리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계산을 해보세요.
몇 년입니까? 일천번제만 해도 3년 정도 되죠. 15년.
15년 동안 십자가 피만 이야기했다 생각해 보세요. 돌아버릴 겁니다. 정신병 걸리거든요.
물론 성령이 함께하면 기쁨과 은혜와 감사가 넘치겠지만.

사람들이 십자가 피만을 증거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실력도 없고.
그 이야기를 안 해요. 왜냐하면 듣는 우리들도 변화를 원하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복음 전하는 목사도 1년에 한 번씩 바꿔야 돼요.
‘아 또 그 얘기야?’ ‘맨날 그 얼굴이야?’

요즘은 바꾸기 쉽잖아요. 한 주에 한 번씩 바꿔도 돼요. 하루에 한 번씩.
유튜브 들어가면 얼굴이 다 바뀌니까.
성령의 역사를 자기 쪽에서 다 재해석해버리는 거예요.
성령은 우리의 기쁨을 주는 분이 아니에요.
주님의 기쁨을 우리의 기쁨 되게 거기에 참예시키는 분이 성령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서 보낸다 하시잖아요. 그죠?
아버지께서 예수의 이름으로 보낸다라고 하면
‘야 아버지의 영을 우리가 받는구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러면 예수님이 한 일이 뭐냐? 하면
‘예수님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을 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서 십자가를 지셨구나’
그러면, 하나님의 성령을 받으면
‘나도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예수 너 비켜!’ 이렇게 되는 거예요. 논리가.
그 대구교회에 그 (죽었습니까? 그 사람?)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거예요. 작은 예수라 그러면서.

첫 번째 성령 충만을 받아서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했을 때는 진짜 아들이에요.
그러면 두 번째 아들이 하나님의 영을 받게 되면
두 번째 아들은 누구를 증거하느냐? 하면 예수님을 증거해요. 예수 이름을.
하나님을 증거하는 게 아니라.

‘그러면 그 예수 이름만 증거하면 되지 않습니까?’ 라고 하면
그러면 예수님의 이름, 주 예수라고 하잖아요.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는 육신을 입고 오신 그분이고 그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 주가 됐잖아요.
주의 자리는 언제 올라갑니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올라가죠.

근데 그리스도는 뭡니까? 기름부음을 받은 거잖아요.
기름부음 받은 것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갔느냐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선지자, 제사장, 왕. 다 죽어야 돼요.
우리는 그걸 선지자, 제사장, 왕이라하니까 다 긍정적으로 보려고 하잖아요.
그런데 선지자로서, 대제사장으로서, 왕으로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어요.

주 예수 이름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잖아요. 땅 끝까지 이르러 이제부터는 누구의 증인이 되어야 된다?
‘내 증인이 되라.’ 합니다. 내 증인. ‘내’가 누굽니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이에요.
여호와의 증인이 아닙니다. 유대교는 여호와의 증인이죠. 여호와의 증인인데
성도들은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주신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 15장 26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내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예수님이 주의 자리에 오르면 아버지께로부터 성령을 받아서 너희에게 보낸다라는 겁니다.
그분이 진리의 성령이라고 하죠.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할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
요 세트가 이 로마서 8장에 나오죠. 16절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느니라.”

성령이 오시게 되면 성령이 제자들과 함께 활동을 하는데
실제로는 보이는 대상은 제자들뿐이에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겁니다.

증인들이 누구냐? 하면
성령이 증거하시는 분인데 성령은 안 보이잖아요.
안 보이는데 그 성령을 받은 자, 주님께서 주신 자들에 의해서 예수님을 증거하게 되는 겁니다.
“나를 증거하실 것이오”

그래서 성령을 받은 자는 반드시 예수님을 증거해야 돼요.
십자가를 증거하는 자가 성령 받은 자예요.
십자가를 증거하지 않는 자는 성령을 받지 못한 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조금 전에도 제가 오산리 기도원 그 설교를 얘기했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이야기를 해요. 예수 이름으로까지도 이야기를 해요.

근데 예수님이 어떤 분이냐? 하면 병 고쳐준 분이에요.
우리를 천국 보내는 분이고 우리를 건강케 하는 분입니다.
이렇게 되면 ‘나’가 부정이 안 되잖아요.
‘나’가 부정이 안 되는 예수 이름 증거는 다 우상이에요.
그래서 주님께서 그걸 아시기 때문에 자기 백성에게 성령을 줘버리는 겁니다.

성령을 받은 자만이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를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는 육이기 때문에 성령이 없으면 자기 부인이 안 돼요.
‘목사님 주님께서 한 번 성령을 주시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부인하며 살 수 있잖아요?’라고 하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어요. 그걸 지식이라 하는데 그 지식은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나중에 요한 1, 2, 3서에 가면 영지주의자들이 등장을 하거든요.

그 영지주의자들의 특징이 뭔가? 하면 지식으로 복음을 다 꿰뚫는 거예요.
우리는 그 영지주의자들이 그 예수님의 육신으로 오심을 부정한다라고 하니까
‘나는 육신으로 오심을 인정해요.’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이 영지주의자들 바보 같은 자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육신에 오신 것을 부정한다는 의미가 어떤 의미냐? 하면
지금 로마서 8장 이야기를 완전히 날려버리는 거예요. 날려버리는 게 뭐냐? 하면
앞서서 마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이 성령을 받으시니까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했잖아요.
그러면 그 아들이 본격적으로 어디로 갔습니까? 그 육신을 입으신 그분이 어디로 가요?
마귀 속으로 들어가잖아요. 마귀 속으로.
마귀 속으로 들어갔다라는 것은
그들로부터 미움과 핍박과 질시와 조롱을 당하는 세계로 들어갔다라는 이야기예요.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정한다는 것은 단순히
‘아 예수님은 가연설이다’ 신학교 가면 다 가르치거든요. 그 가연설. ‘그냥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안 그러면 ‘그냥 사람의 몸을 빌려서 왔다’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하는 그 이단들도 있고
더 중요한 것은 ‘진짜 예수님이 마리아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어서 태어났다.’
그걸 믿으면 뭐 합니까? 믿으면.

믿어놓고 영지주의와 똑같은 짓을 해요.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기를 원치 않아요.
‘고난에 참예하면 보상이 떨어지겠죠.’ 보상은 딱 하나예요.
생명의 면류관은 주님의 죽음에 참예하는 겁니다. 그게 보상이에요.

하늘의 신령한 복을 다 받았다 했잖아요. 여러분 다 받았잖아요.
그러면 제가 어릴 때 그 본문을 보면서 ‘도대체 신령한 복을 뭘 받았지?’ 잘 몰랐어요.
근데 십자가가 눈앞에 밝히 보이고 십자가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나는 자체가
이미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다 받았어요.

문제가 뭐냐? 하면
내가 생각하는 신령한 복과 성경이 말씀하는 신령한 복의 그 차이가 너무나 크죠.
지금도 여러분이 복음을 들으러 왔지만 ‘신령한 복을 받았다’ 하면 어떤 걸 받았습니까?
환란과 핍박과 고난과 적신.
이게 신령한 복을 받은 증거거든요.
근데 그렇게 생각 안 하잖아요. 제가 여러분을 너무 얕잡아 봅니까?
우리는 이 악마에게 계속해서 조종을 당하면서 이 말씀을 보면서
자기가 갖고 있는 그 꿈, 기대 그러한 것들을 계속해서 망상해낸다는 거예요.

성경 한 구절 더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6장 7절.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예수님이 떠나가는 것이 진리라는 거예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것이 진리인데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오.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십자가가 없으면 보혜사가 안 와요. 이 통로가 독특하죠.
성령이 오셔서 예수님을 십자가의 길로 걷게 하는데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으면, 이제 그다음 성령이라고 하거든요.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
그 예수님의 성령은 반드시 예수님의 죽음이 있어야만 주시는 성령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그 성령은 십자가의 영으로서 그리스도의 영이라 하거든요. 이 말도 굉장히 중요해요.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이야기하면 그 그리스도가 예수님이 그리스도잖아요.
구약에 기름부음 받은 자들이 등장을 하잖아요. 선지자, 대제사장, 그다음 왕들.
그들의 공통점이 뭐냐? 하면 고난받고 핍박받고 죽는 겁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이라 하는 겁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을 받았다’하니까 ‘야 이제 신난다’ 신나죠.
진짜 성도는 그보다 신나는 일이 없는데
이 ‘그리스도의 영’을 이야기할 때 어떻게 오해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성령’으로 오해를 하는 거예요.
왜 ‘그리스도의 성령’이라 이렇게 표현을 하는지 그 이유를 못 알아먹는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싶거든요.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싶다는 것은 선악과를 먹었을 때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 했잖아요.
그것을 지금 우리는 탐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성경을 읽어도 ‘그리스도의 영’ 왜 그렇게 표현하는지? ‘예수님의 성령’
왜 ‘하나님의 성령’ 이런 표현을 왜 하는지?
죄가 드러나는 말씀 해석이 돼야 되는데
이런 죄는 안 드러나고 계속해서 우리의 탐심만 이렇게 계속해서 채워지는 겁니다.

다시 로마서로 가서 보겠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다 푸뉴마입니다. 성령입니다.)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정말 이것보다 신나는 말씀 없어요.
‘나 믿는다, 나 은혜 받았다’ 다 날려버립니다.
지금 “하나님의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그다음 나오는 말씀이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너희가 누구냐? 하면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들.
하나님의 아들인 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인데 나오는 말씀이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다.”
두 번 다시 무서워하는, ‘아이 두려워!’
히브리서에 보면 죽기를 무서워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주님이 오셨다라고 이야기를 하거든요.

그러면 여러분이 이 말씀을 보면
성도는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는 두려움이 없습니까? 있습니까?
요한일서에는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다’ 했거든요. 말씀이 되게 어려워요.
그 말씀 딱 들으니까 ‘나는 두려움 있는데요.’
두려움 없는 사람 손 들어보세요. 저도 손 들면 안 되고...

지금 여기에 보면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았다” 하거든요.
하나님의 영, 성령을 받았어요. 그리스도의 영을 받았다면 두려워하지 않아야 되는데
주님이 사도바울을 통해서 정말 놀라운 이 말씀의 전개를 펼치는데
그 우리의 마음을 다 알아요. 속마음을. 그러면 ‘나 두려운데...’

여러분 칼을 찌르면 두려울까요? 안 두려울까요? 당연히 두렵죠.
‘나 성령 받았으니까 안 두려워.’ 이 사람 성령 못 받은 사람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피가 안 나오잖아요.

말씀이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요.
지금 좌우에 날 선 검이라 했을 때 우리의 악마성을 다 끄집어냅니다.
지금 여기에 보면 “다시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다”는 거예요.
양자가 되게 하는 영. 여기에서 이제 나오죠.

“너희는,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는 아들이라” 했는데
아들은 아들인데 어떤 아들? 양자라는 거예요. 양자.
양자가 되게 하는 영을 받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아들, 본래 아들이 누구예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죠. 장자죠. 진짜 아들.
그분은 진짜 아들이고

그다음 그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서
주가 되셔서 그분이 보내주시는 성령을 받은 자를 양자라 하는 겁니다.
그 성령을 받은 자들은 ‘양자의 영’을 받았어요. 이게 중요해요.

양자가 되는 영을 받았다는 것은 그 영이 어떻게 하는가? 하면
양자 만드는 거예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오해를 할 수도 있는데 다시
마태복음 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았잖아요.
그럼 성령이 예수님을 어디로 끌고 갑니까? 광야로 끌고 가죠.
마귀에게 시험을 받도록 끌고 가면서 아들 만드는 작업에 돌입하는 거예요.

‘양자의 영을 받았다’하니까 ‘나 양자야’ 지금 이렇게 나오는데
성령이 하시는 일, 성령의 인도하심이 나오거든요.
성령이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도 안 하고
자기 스스로 꿈꾸는 그러한 성령 충만을 상상하는 겁니다.

자 봅시다.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았다.”
그러면 악마의 영을 안 받았다는 거거든요. 성도는.
성도는 성령을 받았는데, 본문에 나오는 ‘양자의 영’을 받았다면
다시는 두려워하지 않아야 되는데, 다시는 무서워하지 않아야 되는데

그다음 나오는 단어가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이게 현재형이거든요. 또. 앞뒤가 모순이에요.
여러분 언제 부르짖습니까? 오산리 기도원 가서 언제 부르짖어요?
두려워 덜덜 떨 때 부르짖잖아요. 여러분 언제 부르짖어요? 코너로 몰릴 때 부르짖잖아요.

그러면 두려워하지 않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다면
부르짖을 필요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러면 목사들은 이걸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면
“부르짖는다.” “아빠 아버지다.” 아빠라는 것은 친근하잖아요. 아빠, 아바라는 게 아빠거든요.
‘아빠 아버지라 부른다’라고 하면 좋은데 이 ‘부르짖는다’는 거예요.
애들이 언제 부르짖습니까?
성질 날 때 아빠! 이렇게. 그건 그 얘기가 아니라 물론 그것도 나오겠지만
다급할 때 ‘아빠’ 그러죠.

지금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았는데,
양자의 영을 받았는데 왜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는 그 상황으로 내몰립니까?
뒤에 나와요. 환란과 위험과 적신, 기근, 칼. ‘야 신난다’
신날 수도 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경유하게 되면 신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지금 양자의 영이 다시는 두려워하지 않는,
다시는 두려워하지 않는 이 말씀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면 성도를 이 말씀 속으로 집어넣어요.
집어넣으면 “다시 두려워하지 않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라는 것을 해당 사항이 되려면
나는 그 속에 들어가서 두려움이 있는데
그 두려움이 없는 자로, 성령께서 우리를 끌고 가는 그 현장으로 만드신다는 내용이에요.
그 내용을 어떻게 말씀하는가? 하면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는다”는 거예요.
제 말을 안 믿으시는데 마가복음 봅시다. 마가복음 14장 32절부터 보겠습니다.

“저희가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나의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았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아니 성령을 충만하게 받았는데 뭘 놀라고 두렵고 슬퍼합니까?
십자가 지실 때가 됐거든요.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인데 왜 이런 감정이 필요합니까?
흉내 내는 겁니까? 아니에요.
육신을 입으셨기 때문에 우리와 똑같은 그러한 감정을 다 갖고 있는 겁니다.
이걸 우리가 지식적으로 생각하면 이해가 안 돼요.
‘아니 뭐 흉내내냐?’ 흉내. 그래서 실제로 아까 신학 그런 신학이 있다 하잖아요.
예수님이 그냥 육신을 빌려와가지고 ‘아 내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그렇게 죽었다라는 인간들도 있거든요.
왜냐하면 그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정말 육신이 되셔가지고 성령으로 잉태되셔서 육신이 되셔서
고난받고 두려움에 떨고 아버지께로부터 버림받는 것을 벌벌벌벌 떨면서 지옥 가는 것이 두렵고 떨고... 이런 하나님을 상정 못해요.
근데 진짜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에요.
그런 하나님이 아니면 우리를 구원 못해요.

왜 그러냐? 하면 지난 시간에도 그런 말씀드렸는데 수요일도.
유대인들이 하나님 개념을 다 잡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이방인들이 잡고 있는 것은 우상이잖아요.
근데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하나님 개념은
전지전능한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 약속의 하나님, 그러한 하나님임을 다 알고 있어요.

그런데 육신을 입고 오셔가지고 사람이 되셔서
이 저주받는 것이 덜덜덜덜 떨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는 것이 두렵고 무섭고 슬프고 괴롭고
그런 하나님은 상상도 못 하는 겁니다.
심지어 죽는 하나님이거든요.
그런 하나님이 어디 있어요? 여기에 있다라는 거예요.

그러니 인간들이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겁니다.
죽는 하나님이 왜 진짜 하나님이 되냐? 하면
그 죽으시는 하나님처럼 성령을 받게 되면 같이 죽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죽는 하나님이 싫은 거예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해놓고
그 예수님을 부활의 주님으로 만들어야 돼요.
그래야 내가 이 세상 살 때 희망이 보이잖아요.
‘여러분 목적이 십자가라’ 애들한테 가르쳐 보세요. ‘십자가가 니 인생 목적이다.’
애들부터 안 들어요.

벌써 이미 세상의 영향력, 유튜브는 다 뭘 가르칩니까?
너는 성공해야 되고 잘 나야 되고 뛰어나야 되는데
우리의 목표 지점은 십자가야. 누구부터 거절합니까? 여러분 자녀들 그렇게 목표를 두고 있나요?
나부터 싫어하잖아요. 나부터.
‘야야야 성경 보지 말고 책 하나 더 봐. 공부 더 안 해? 수학 더 풀어야 돼.’
말씀 안 듣는다고 한 대 때리고 그렇지 않잖아요.

사사기 17장 봤잖아요. 지난 신명기 강해할 때.
율법을 자나 깨나 다 가르쳐놓고 결국은 무슨 짓을 합니까?
‘축복이냐 저주냐’ 요것만 싹 빼가지고
아들이 도둑질을 하면 ‘저주를 받아라’ 이래야 되는데
아들이니까 ‘축복을 받아라’ 그러면서 ‘여호와께 거룩히 이 돈을 드리노라’
그 돈 드린 지점이 어딘가? 하면 자기 집이에요.
왜냐하면 자기 집 안에 누가 있어요?
아들 하나 제사장을 세워서 에봇을 입혀서 제사를 드리게 했잖아요.
자기가 영광을 받고 자기가 갑부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게 엄청난 부자라 했잖아요. 미가 집안이.
부자는요. 이 축복 개념밖에 몰라요. 축복과 저주 개념.
물론 성령이 임하면 부자가 가난한 자가 되겠죠. 가난한 자도 똑같아요.
부자가 그렇다라는 것은 가난한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 보면 봅시다. 예수님께서 마가복음14장 34절.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예수님의 코스를 성도가 그대로 밟는다고 보셔야 돼요. 이걸 읽으면서.
‘예수님이 두렵고 떨리고 고민하여 죽게 된 것은 나와는 관련이 없겠지...’
사도바울이 복음 전하면서 자기 성도들을 위해서 고민하고 괴로움 속에 빨려 들어가요.
설교만 딸랑 하고 ‘뭐 될 대로 되겠지. 주님이 그냥 구원겠지’ 이런 거 없어요.

반드시 주님은 성령을 주셨기 때문에, 그 양자의 영을 주셨기 때문에
그 양자의 영은 주님이 행하신 그 일, 역할을 담당하게 되어 있어요.
오늘날 믿음 좋은 사람은 ‘주님이 구원하겠지’

성도가 희생물이 되지 아니하면 구원이 안 돼요. 그게 로마서 뒤에 나옵니다.
보내심을 받은 자가 보냄을 받아서 복음을 전하면 그 말을 통해서 전해지고
그 말을 들은 자가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얻는데
그것만 보이지만 그 과정 속에 뭐가 들어갑니까?
환란과 핍박과 위험, 적신, 칼이 들어가 있어요. 그 사이에.

왜 그걸 계속해서 집어넣느냐?
왜 예수님께서 그냥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가 가졌으면
‘야 십자가에서 끝냈으니까 너 때만 되면 나와 나와 나와 나와’ 이렇게 하면 되는데
왜 자기 백성을 증인으로 보내가지고 제자 삼으라고 하셨느냐? 하면
그것이 바로 진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래요.
성령이 하시는 일이 그 일이에요.

구원론에 미쳐 있으니까 주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으니까 구원할 거라 그러면서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갖는가? 하면
오늘도 제가 여기 아침에 보니까 마스크 낀 제 얼굴을 보니까 ‘참 선량하게 보이십니다.’
제가 그래서 이전에는 그냥 지나갔는데
오늘은 또 참을 수가 없어서 ‘예수님 믿으세요.’ 했더니 가버리더라고요.

사람들은 복음을 안 전하려고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여러분 복음 전해보니까 어떻습니까?
내가 모르는 게 뽀록나고 내 성질 다 나오고 사람들의 평가가 다 덮어서야 돼요.
양자의 영은 그런 영이에요. 좀 더 봅시다. 여기 마가복음14장 34절 하반절.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려 될 수 있는 대로 이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이때가 지나가기를 구했어요. 하~ 정말.
예수님이 이랬으면 그다음 타자들은 이렇다? 안 그렇다? 그렇다라는 거예요.
‘스데반 집사님이 돌에 맞을 때 이런 내용이 없지 않습니까?’
없기는 뭐가 없어요? 이때가 피하고 싶지요.

근데 말하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잖아요. 성령이 몰아붙여버린 겁니다.
몰아붙여버리니까 자기도 몰라요. 자기도 모르는 상황으로 내몰리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위험, 칼, 적신이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하니까
신나게 칼 맞고 신나게 도둑질 당하고, 강도당하는...
강도 당하면 ‘주님이 죽으라고 나를 불렀기 때문에 강도 당해도 좋아.’
그럴 때도 있겠죠. 성령께서 하실 때.

근데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아요. 그래서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두 요소가 같이 있는 거예요. 두 요소가.
그렇게도 하고 그렇게도 안 되고.
그렇게 했든 안 했든 십자가 피만을 자랑하게 되어 있는 게 성도예요.

지금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있다가 조금 나아가서 땅에 엎드려 될 수 있는 대로 이때가 자기에게 지나가시기를 구하여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여기 ‘아바 아버지’가 나오거든요. ‘아빠 아버지’
놀랍습니다. 지금 로마서가 여기에 아빠 아버지가 나와요.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이 기도할 때 ‘아버지,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이렇게 했을까요?
안 그러면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했겠습니까?
‘아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면 기도할 때 뭘 그렇게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되도록 기도합니까?’
그게 사람들이 생각하는 신이기 때문에 그래요.
근데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은
고민하여 죽게 되고요. 될 수 있는 대로 지나가게 해달라는 게 예수님의 모습이에요.

지금 이 말씀을 왜 기록했느냐? 하면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 이 얘기를 하는 이유가 그거예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잖아요.
어디로 갑니까? 죽으심의 길로 가는 거예요. 양자의 영을 받잖아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가 되셔서 성령을 보내주시면
그들은 양자의 영을 받아서 성령께서 양자라는 것을 계속해서 확정하는 자리로 몰아가요.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으니까 ‘아들 되었다’라는 것을 증명하는 차원에서
예수님을 십자가로 몰아가듯이 성도들도 똑같이 몰려가는 겁니다.

좀 더 보겠습니다.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이 말은 뭐예요? 노림수죠. 노림수잖아요.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했을 때 이 아버지는 우상이 됩니다.
제가 이 말을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지금 인간들이 갖고 있는 우상성을 들통내는 거예요. 이걸 쉽게 이야기할게요.
여러분 예수님의 진짜 아버지는 모든 게 가능하잖아요.
그러면 십자가 없는 구원이 가능합니까? 가능하지 않습니까? 가능하죠. 모든 것이 가능하니까.
그런데 그 하나님은 하나님이다? 아니다? 아니에요.

어떤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입니까?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아버지의 원은 뭐냐? 하면
아들을 죽이는 자리로 나아가서 이 죽임을 당한 자가 진짜 아들이에요.
그걸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 아들이라’ 그 아들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아버지께서 ‘그래 알았다. 너 십자가 지지 마.’ 그러면 아들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육신을 입었기 때문에 인간들이 갖고 있는 신개념을 다 갖고 오는 거예요.
좀 더 봅시다. (막14:37~39)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베드로는 십자가 진다고 해도 현실이 아니에요.
이러한 제자들에게 성령이 주어진 거예요.

로마서 지금 8장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성령이 주어졌으니까 여기에 보면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나왔죠.
언제 부르짖습니까?
“양자의 영을 받았으니까 다시는 두려워하는 영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차원에서 예수님이 두려웠고
“이 잔을 할 수만 있다면 내게서 옮기옵소서”라고 기도를 한 거예요.

아버지의 영을 받았다면 두려움이 없어야 되잖아요.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았잖아요. 예수님은. 그렇죠?
그러면 예수님이 이런 기도하면 안 되잖아요.
(아들의 영을 받았잖아요. 성령을 받았잖아요. 성령. 아들의 영이 아니라)
아버지의 영을 받았잖아요.
아버지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이런 기도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너희는 두 번 다시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았다. 그래서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이 내용이 그대로 성도에게 적용이 되고 일어나야 된다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누구에게서 먼저 보여주시는가? 하면 예수님에게서 먼저 보여준 거예요.

우리는 ‘양자의 영을 받았으니까, 다시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았으니까
이제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두려움 없이 떨지 말고 전진 전진 전진.’
뭐 ‘내 주는 강한 성이오.’ 이렇게 쭉 나오잖아요. 그게 그 말이 틀린 게 아니에요.
다 맞아요. 다 맞는데 강한 성의 특징이 뭐냐? 하면요.
나를 부정하는 자리로 끌고 가요.
나를 부정하는 대로 끌고 가서 강한 성다움을, 면모를 보여주는 겁니다.

우리는 ‘내주는 강한 성이오 반드시 이기리로다.’
그 당시 캐톨릭하고 루터가 싸우면서
어쨌든 세력을 등에 업게 되었으니까, 정치적 상황이 그랬으니까 어쩔 수 없었는데
실상은 어떻습니까?
내 주는 강한 성이기 때문에 루트는 죽어야 돼요. 사실은.
근데 주님이 어쨌든 복음을 위해서 그를 살려줬는데...

지금 이런 말씀들이 이해가 안 되는데 사람들이 왜 이해가 안 되는가? 하면
예수님이 분명히 겟세마네에서 그렇게 기도를 하셨잖아요. 이 카피본이거든요. 로마서 8장이.
그러면 “두려워하는 영을 받지 않았다”하니까
‘아 두려움 없어야지.’ 근데 안 맞아요.
왜 안 맞느냐? 하면
말씀을 어떻게 읽는가 하면 지식으로 읽기 때문에 그래요.
여기에서 좀 어려운 게 이거예요. 성경 말씀은 지식이 아니에요.

성경 말씀은 실제입니다. 어떻게 실제가 되느냐?
보세요.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니까 빛이 있었잖아요. 똑같아요. 이 말씀도.
성령을 주시게 되면 성도들은 어떤 상태로 내몰리는가? 하면
“다시는 두려워하지 않는 종의 영을 받지 않았다. 양자의 영을 받았다” 라고 하니까
자기는 어떤 자리에 있었다라는 것이 들통나요?
로마서 7장에 나오잖아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안 돼요. 못 이겨요. 그러면서 덜덜 떠는데 어떻게? 그 두려움조차 어떻게 바뀌어버리죠?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라고 바뀌어버려요.

그 전에 뭐가 나옵니까?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죠. 할 수만 있거든 내 잔을 옮기옵소서.
부르짖는 거예요.
우리는 또 배우고 이게 주워 들은 게 있어가지고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우리가 뭐 부르짖고 이렇게 해서 되겠냐? 그거 들어주겠냐?’ 이런 논리적 생각을 하는데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에요. 양자예요.
양자는 그리스도의 영을 받았잖아요. 하나님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나오는 대로 기도하셔야 돼요.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어야 돼요.

‘목사님. 그러면 돈 없으면 돈 달라고 부르짖어야 됩니까?’
그러면 안 부르짖으면 한번 물어봅시다. 속으로 돈 달라고 합니까? 안 합니까?
정말 얍삽해도 이렇게 얍삽할 수가 없죠. 이런 표현을 안 쓰려고 했지만.
자기가 믿음이 있다라고 지금 으시대려고 하는 거예요.

예수님도 지금 두렵고 떨리고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옮겨달라고 기도하는데
‘아 우리는 그 영을 받았으니까 다시는 이런 기도를 안 할 거다?’ 안 하기는 뭘 안 해요?
만일에 그걸 안 한다면 여러분은 예수님도 아니에요. 예수님은 지금 떨고 했으니까.

근데 우리 속은 어때요?
‘목사님 저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안 해봤습니다.’ 그런 말을 왜 할까요?
자기가 이 부처라는 이게 악마잖아요. 악마.
그 욕망을 그렇게 발산을 하는데 이 고통스러운 세상을 없애는 방법은 나를 없애버리는데,
나를 없애는 것보다 더 큰 욕망이 어디 있습니까?
말씀을 엉터리로 보는 거예요. 조금 더 보겠습니다. 8장 16절.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나중에 보면 성령이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고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간구합니다.
그러면 또 묻겠습니다.
이미 우리는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았으면 예수님이 이겨라라고 기도할 필요 있습니까?
없습니까? 필요 없죠.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는 빌 바를 알지 못한다 하잖아요.
왜 빌 바를 알지 못하느냐? 하면요.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됩니까?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세요. 상황을 쫙 몰아넣으면 빌 바를 알지 못해요. 마땅히 빌 바를.
뭘 빕니까? 진짜 빌어야 될 것은 안 빌고 뭘 빕니까?
오늘 기도하셨다시피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를 빈다니까요.
말씀을 너무 만만하게 보는 겁니다.
우리의 형편을 상황을 주님께서 그렇게 몰아가는 거예요.
빌 바를 알지 못하는 상황으로 몰아가요.
예상 못한 상황으로 몰아가는 거예요.

“빌 바를 알지 못한다” 하면
우리는 빌 바를 알지 못하는 자로 계속해서 드러나야 되는데
“무엇을 구하든지 주의 이름으로 구하고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하니까
주워 들은 건 있어가지고 ‘그래 주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지’
그 말이 틀린 건 아니란 말이에요.

그런데 계속해서 우리는 죄인 되기를 거부하고 정답을 찾아서 의인 되려고 한다는 겁니다.
로마서 읽어버리면 완전히 다 무너져야 돼요.
하나님의 저주가 하늘로부터 내려온다 했잖아요.
그 저주가 아들을 통해서, 복음을 통해서 이 심판이 이루어지는데
그 심판에서 벗어날 인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잖아요. 어느 누구도 없었잖아요.
다윗도 아니고 아브라함도 아니잖아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그들을 구원한 거잖아요.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롬8:17)
야 상속자라는 거거든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다’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그리스도가 나와 대등이다.’ 이 얘기가 아니라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예요. 지체이기 때문에 성도는 자기 이름이 없어요.
누구 이름으로 삽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는 겁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살기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한 상속자입니다.

상속자가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당했습니까?
예수님이 포도원 비유했잖아요.
주인이 포도원에 종을 보내니까 처음에는 때려서 돌려보내다가
나중에는 포도원 품꾼들이 상속자를 어떻게 합니까? 죽여버리죠.
‘저놈을 죽이면 우리가 이 포도원을 영원히 차지할 거라’
그 상속자 개념이 여기에 지금 들어가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상속자 얼마나 신납니까?
원래 상속자는 누굽니까? 아들이잖아요.
그 아들이 이 땅에서 어떤 일을 당했습니까?
모든 사람들로부터 미움받고 조롱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어요. 그게 상속자예요.
지금 사도 바울이 그 이야기를 하려고 지금 여기까지 끌고 온 거예요.

‘목사님 아까 로마서 7장에서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러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하리로다. 이걸로 끝나지 않습니까?’ 천만에요.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감사하니까 나오는 게 뭐가 나옵니까?
피가 나올 거 아니에요. 피가 나오니까 성령께서 피를 증거하는 인생으로 끌고 가는 거예요.
끌고 가니까 이제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건 내부적이잖아요.
내부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거는 도인이고요. 내부적으로 끝난다면.

그러한 자를 주님께서는 어디로 끌고 가는가? 하면 주님의 고난.
이게 왜 중요하냐? 하면요.
그 내부적인 것은 생각이에요. 생각의 괴로움이에요.
그런데 이제부터는 무엇과 관련돼 있는가? 하면
외부적인, 육체와 관련돼 있어요.복음은 반드시 육체를 통해서 증거가 됩니다.
육이 없으면 복음을 못 전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거예요.

앞서서 요한일서 이야기했잖아요.
육체로 오신 것을 부정한다는 것은 그걸 부정해버리면 얼마나 쉬우냐? 하면
그걸 부정해버리면 나는 예수님이 했던 그 기도를 안 해도 되고요.
나는 그냥 답을 다 아니까 고난 속에 안 들어가도 돼요.
그냥 상속자면 되는 겁니다. 상속자.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근데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으려면, 상속자가 되려면 반드시,
그 나라는 피의 나라잖아요. 어린 양의 피의 나라라면 그 피에 참예해야 돼요.
참예하는 자가 상속자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얘기하죠. (롬8:17)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이렇게 나오죠.
“영광을 받기 위하여” 로마서 계속해서 반복했습니다.
주님과 함께 죽었다면 그가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미래로 계속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 죽었다면, 그 죽었다라는 내용이
믿음의 내용이잖아요. 예수님과 함께 못 박혀 죽은 내용.

근데 그 내용이 실제로 우리 육체 가운데 지금 드러나는 현장으로
이 후사니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다면, 하나님의 영을 받았다면,
양자의 영을 받아가지고, 양자가 되는 영을 받아서
다시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는 자로 살아가는데
그러하기에 성도는 상속자예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가 되어 가지고
하나님의 후사가, 상속자가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인데

놀라운 것은 이거를 빼먹으라는 게 아니라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
왜 ‘그와 함께’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빼먹으려고 하잖아요. 인간들은.
영광을 받기 위해서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된다 이야기예요.

‘아니 복음을 전하는데 왜 고난받습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이 세상은 누가 장악하고 있어요? 이 세상 권세와 영광은? 마귀가 장악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이 뉴스를 보면서 상황을 보면서 룻처럼, 의인 룻처럼 괴로워해야 돼요.
우리는 뭐가 괴로우냐? 하면 내 편이 공격받는 게 괴롭잖아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미움받고 핍박을 당했잖아요.
세상을 뭘로 봅니까? “너희 아비는 마귀라” 마귀라 했잖아요.
그럼 마귀들이 쏟아내는 말에 대해서 우리는 탄식을 해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는 이 양자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다시는 두려워하지 않는 영을 받은 거예요.
그 과정 속으로 성도는 집어넣었습니다. 그러니까 보세요.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다. 그 고난 속으로 몰아넣으면 어떻게 됩니까?
부르짖죠. 아빠 아버지~.

인간이 다시 말씀드립니다마는 우리가 얼마나 악하냐? 하면
지금 부르짖을 타이밍인데 나는 복음을 아니까, 나는 죄를 아니까 안 부르짖어요.
뭘 하고 싶은 거예요? 도대체.
죄인이 되면 되잖아요. 죄인 되는 게 그렇게 어렵습니까?
죄인이 안 되려고 해요. 죄인이 안 되려고 하니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될 것이라.
‘나 고난받는 거 즐거워’ 예수 믿는 거 아니에요. 이 사람은.
그렇게 죽는 사람 얼마나 많습니까?
노회찬도 억울하니까 죽었잖아요. 그거 가능해요.

근데 주님께서 우리의 이 육신을 통해서 증거시키고 싶은 것은 어린 양의 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다시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은 자가 아니라
양자가 되게 하는 영을 저희들에게 주셨기에
예수님과 함께한 상속자로서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그대로 반복하게 하심을
감사하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아들과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에 기꺼이 감사함으로
참예하기를 원하는 주의 백성에게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