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4-05-19 21:09
20250519 로마서 강해 66강 롬 9:14-18 긍휼히 여길 자를, 강퍅케 할 자를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92  
https://www.youtube.com/live/fLl_u8qpv4w?si=ApTlLJHUEsubnmST

관리자 24-05-20 20:00
답변 삭제  
20240519 로마서 강해 66강 롬 9:14-18 긍휼히 여길 자를, 강퍅케 할 자를

하나님 말씀, 로마서 9장 14절에서 18절 말씀을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롬9:14~18)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아멘

오늘 본문을 모르는 사람은 없죠.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들이라면 누구나가 다 아는 하나님 뜻, 주권, 아니면 하나님의 선택,
이런 것들을 말하려면 반드시 오늘 본문을 언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언급하기 전에 반드시 해야 되는 말이 있어요.
그게 지금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거든요. 9장 1절부터 13절까지
사도 바울이 자기 자신이 골육 친척이 만일에 구원을 얻는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
자기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고 했거든요.

8장에서는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라고 했다면 사도 바울의 자리를 어디에 둬야 됩니까?
미리 아신 자, 부르신 자, 영화롭게 하신 자에 둔다면
사도 바울의 구원은 취소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야 되죠.

3장에서 율법 외에 한 의가 나타났다라고 할 때, 율법 외에 한 의가 나타났으니까
화목 제물 되신 그분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라고 했을 때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그 구원이 취소될 수 있느냐? 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말씀을 대할 때 말씀뿐만 아니고요.
불교 경전을 대하든 세상에 어떤 종교의 것을 대하든 간에 나의 구원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자의 모델이 누구냐? 하면요.
로마서에서는 첫째 아담 안에 있는 남은 자 유대인이에요.

그냥 첫째 아담만 제가 언급하는 게 아니라 왜 남은 자 유대인을 이야기하느냐? 하면
지금 사도 바울이 이스라엘을 언급하거든요. 남은 자 유대인을 언급하는 거예요.
그 첫째 아담을 이야기하려면 남은 자 유대인을 이야기를 해야 돼요.

남은 자 유대인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믿고 언약을 이룰 것을 확신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구원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 구원의 종류는 두 종류예요.
하나는 ‘나의 구원’이고 하나는 이스라엘이라는 ‘국가 구원’입니다. 굉장히 중요해요.
선악과를 먹은 인간들은
나의 구원에 대해서도 굉장한 열망을 갖고 있거든요. 나의 구원.

남은 자 유대인들 중에 이 바리새인들이 세리와 창기들을 향해서 뭐라 합니까?
‘저들은 지옥 갈 자라’ 하거든요.
그래서 이것은 개별 구원이 이루어지고
그 개별 구원 안에 그 개별 구원을 받은 자들이 국가적으로, 민족적, 단체 구원이죠.
단체 구원을 꿈꾸는 자들이 남은 자 유대인이었다라는 겁니다.
이 두 가지 요소의 공통점은 구원이에요.

그러면 이 구원이 어디에서 왔느냐?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창세기 11장에 보면 바벨탑 사건이 나오죠.
이 바벨탑 사건과 창세기 4장 19~24절에 나오는 그 라멕 사건.
라멕의 경우에는 개인적이거든요. 이 라멕 같은 경우에는 ‘나’가 하나님과 대등한 자리에 올라서
하나님처럼 행세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11장으로 넘어가면 바벨탑 사건이 등장을 하는데
이 바벨탑 사건은 특이하게도 니므롯 같은 영웅호걸, 하나님 앞에서 특이한 사냥꾼
이렇게 옛날 성경은 돼 있는데 ‘하나님과 겨루어도 결코 뒤지지 않는 용맹한 사냥꾼’이라는 뜻이에요.
이들이 집합체가 되는 게 바벨탑 사건입니다.
그래서 나온 게 ‘우리 이름’이라는 게 나와요.

아니 개인적인 그 영광을 받는 것과 이 집단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라고 하면
이게 선악과 먹은 이후에 인간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방식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찾아오시는 방식이
이들이 추구한 그 방식대로 들어와버려요.
개인 구원과 집단 구원을 같이 갖고 옵니다.

제가 지금 이 얘기를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들은 내 구원이 가장 시급해요. 내 구원이.
이 구원이라고 하면 천국 가는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어려운 인생의 문제예요.
우리 각자가 닥치는 그 문제를 해결하고 싶잖아요.

지금 이 시대가 과학 시대라고 사람들이 떠들어대는데
이 시대보다 무속 신앙이 많은 시대가 없어요.
길거리에 가보세요. 대학 거리 앞에 가면 타로점부터 시작해서 가관이잖아요.
인간들이 갖고 있는 의식 구조는 과학이라는 것도,
과학적 사고를 한다는 것도 이익이 되니까 하는 거예요.
그 이익 되는 차원에서 타로점을 본다든가 별점을 본다든가 아무튼 그러한 행위들을 다 하는 겁니다.
나에게 이익이 되면 무슨 짓이든 하게 되는 거예요.
내가 지금 당장 앞날이 불확실하고 불명확하니까 의지하고 싶은 상대가 필요한 거예요.

특히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요.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고 싶어해요.
여러분 교회 오래 다녔잖아요. 오래 다녔는데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고 싶지 않습니까?
‘에이 목사님 뭐 그런 거에 관심이 나는 없는데...’ 관심이 없는 게 아니고요.
사람들은 자기가 양자의 세계에 살지 못하면서 동시성이 안 되거든요.
그래서 동시성이 안 되니까 구원이라는 것은 확보해놓고
그다음 내가 어떻게 살든 구원된다라는 걸 챙기고 싶어해요.
그래서 이 구원에 대한 소망을 주고 구원에 대한 확신을 주는 교회를 찾아 나서는 거예요.

특히 이 오늘날 정신병자가 대다수잖아요.
여러분 정신병원에 가서 우리 검사 한번 해볼까요? 저부터 시작해서 다 정신병자입니다.
과거에는 정신병자 기준이 한두 개밖에 없었는데
이 의사들이 생기면서 병자를 계속 나눕니다. 조금 있으면 진짜 5만 가지가 돼요.
그러니까 다 병원 가야 돼요. 애들 보면 다 정신병자, 환자예요.
그래서 똑똑한 사람은 ‘돈벌이하기 위해서 병을 만들었다’ 이렇게 얘기해요. 돈벌이 하기 위해서.

제가 왜 정신병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인간은 도달할 수 없는 지점이 있죠.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그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서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고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는 거예요.

특히 오늘날 같은 경우에는 이 옛날보다 훨씬 잘 살거든요.
저만 그렇습니까? 여러분 삼시 세끼 다 드시잖아요. 옛날에 못 드셨죠?
왜냐하면 서울하고 달라요. 서울의 판자촌만 가난한 게 아니라
그 당시에 판자촌 수준이 한 40~50년 전, 30~40년 전 판자촌 수준이 농촌 수준이에요.
다 잘 살잖아요.

흥미로운 것은 애들이 유아 교육을 유치 교육을 못 받아서 정신병원 가는 게 아니에요.
유치원 없을 때는요. 정신병자가 거의 없었어요.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이야기합니다. ‘유치원이 정신병을 만들었다’
왜? 그 사람이 타당한 이야기를 하는 게
엄마와 교감을 해야 되는데 교감을 못한 애들이 학교로 들어가니까
이 뭐가 생기는 거예요? 정서적인 공감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정신병이 많이 생겼다는 겁니다. 굉장히 타당해요.

그다음에 유모차가 있을 때와 없을 때를 비교하면 그 사람은 그런 얘기하는데
유모차는 애와 엄마가 안 봐요. ‘너는 니 거 보고 나는 휴대폰 보고’
여러분 한번 보세요. 엄마들 정말 재밌어요.
죄송합니다마는 엄마들은 이렇게(아이 손잡고 폰 보면서) 가고요.
애는 가면서 애는 이렇게 이렇게 궁금한 거 묻고 싶은데요.
옛날에 띠 했잖아요. 안든지 없든지. 엄마하고 밀착돼 있잖아요.

제가 이런 얘기를 왜 하느냐? 하면 요즘 사람들이 너무나 불안하다라는 거예요.
돈이 있어도 불안해요. 그 원인을 못 찾죠. 죄인이 되면 자유하거든요.
예수님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라고 했을 때
그 진리라는 것이 십자가잖아요.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 되면 자유한데 그 자유가 없는 거예요.

악마가 쳐놓은 그 덫에 걸려서 계속해서 이것만 얻으면, 이것만 얻으면, 이것만 확보하면
뭔가 안정을 찾고 불안을 해소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 선진국가에서 (우리나라도 벌써 선진국이 됐는지 모르겠지만) 평생교육이라는 게 있거든요.
다 알죠. 요즘은 다 평생교육하잖아요.
우리나라에서 생긴 게 아니고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이 다 해왔어요.
한국이 하는 거 새로운 게 하나도 없어요.
그리고 문화도 새로운 게 하나도 없고요.
교회도 삐까뻔쩍하게 짓는 것도 새로운 게 하나도 없습니다.
유럽이나 미국이 다 했어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옆에 있는 이 대형 교회가 술집이 될 겁니다. 안 될 수가 없어요.

거기에 맞추려면 뭐가 돼야 돼요? 설교가?
그들의 원하는 바를 들어줘야 되는 겁니다.
그들이 요구하는 바를 들어줘야 돼요.
고리타분하게 말씀만 전하면 안 통해요.

지금 로마서라는 본문을 갖고 오늘 본문을 읽어보면 다시 한 번 볼게요.
이 사도바울이 상대를 다 읽고 있습니다. 심지어 이들이 누구냐? 하면 성도들이에요.
그 성도를 규정할 때 어떻게 규정하느냐? 라고 하면요.
이렇게 보시면 돼요.
예수님의 12제자가 12 제자가 맞죠? 맞잖아요. 가룟유다까지 12 제자잖아요.
12 제자를 교회로 보게 되면 이게 교회인데
교회가 어떤 교회냐? 아무것도 없는 교회예요. 없는데
새롭게 생긴 자들이 11 제자가 거기에 합류하잖아요. 가룟유다는 버림을 당하고.
이게 교회예요.

왜 그러냐? 하면
우리는 갖고 있는 교회 개념이 ‘주님의 피로 사신 교회’라고 이렇게 이야기하잖아요.
그럼 그 언어에 사람들이 매입니다. ‘피로 사신 교회니까 교회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라고 말하잖아요. 하나님의 피로 사신. 안산홍의 피로 산.

그 하나님의 교회라는 용어를 왜 그렇게 자랑스럽게 쓰느냐? 하면요.
하나님의 교회가 먼저입니까? 순복음이 먼저입니까?
이 ‘하나님’이라는, 원래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였거든요.
‘예수교’라는 교단 하나를 이단 취급하니까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성회’
더 거룩해 보이잖아요. 이거 마귀 새끼거든요. 이건.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밖에 없어요.

왜 그러면 ‘하나님의 교회’라는 용어를 쓰느냐?
그런 용어를 씀으로 말미암아 안산홍 ‘어머니 하나님’이 포근하거든요.
예수님 이야기하면 십자가가 먼저 떠오르잖아요. 그걸 제거해야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지금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는데 한번 보세요.
사도바울이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이스라엘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아브라함의 씨가 다 아브라함의 자녀가 아니요. 약속의 자녀가 자녀다’라고 이야기를 해버리면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가? 하면
우리들은 말씀을 ‘믿자’라고 이야기하지만 제발 좀 믿자라고 하지 마세요.
그 ‘믿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자기를 믿는 거예요.
지금 보면 이 복음은요.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논리를 다 갖고 옵니다.
철학자들이 똑똑하다고 백날 얘기하지만 성경한테는 게임이 안 돼요.

라캉이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그게 성경에 나오잖아요.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그 욕망의 마지막 타인이 누구예요? 하나님이거든요.
하나님이 마지막 타인이 아니에요.
유대인들은 마지막 타인이, 최후의 타인이 하나님이 되면 여호와 하나님이 되면

예수님이 십자가로 완료하게 되면 마지막 타인이 누구냐? 하면 십자가 지신 예수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가 되고 싶어 하는 거예요.

철학자들이 뭐 한다고 사람들이 대단하다 하는데
김용옥 같은 경우에는 ‘사도바울이 예수를 이야기 안 했다’하는데
자기가 아무것도 몰라요. 그 사람은.
왜냐하면 김용옥이라는 이런 사람들이, 똑똑한 사람들이 특징이 뭐냐? 하면 니체도 마찬가지지만.
성경을 무슨 수준으로 보는가? 하면
그 시대에 갖고 있는 뭐 교조주의자라든가 아니면 권위주의자들,
이런 주의자들이 해석한 성경을 갖고 해석을 하는 거예요.
젊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속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지금 사도바울이 이런 논리를 펴면 당장 나와야 되는 게 뭐냐? 하면요.
“하나님이 어떠하시냐 불의하시냐” 이 얘기가 나와야 돼요.
앞서 지난주 설교가 나오면 우리들 마음속에는 ‘불의하냐?’ 가 나와야 돼요.
왜냐하면 앞뒤가 안 맞잖아요. 앞뒤가 맞아요?

“네 씨로 말미암아” 약속을 했으면 아브라함 쪽에서 생각한 것은 잘못됐다 치더라도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약속의 자녀라” 했으면 에서와 야곱 둘 다 약속의 자녀가 되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라고 선언을 하니까 안 맞잖아요. 논리가.
(저 혼자 흥분하는지 모르지만...) 안 맞잖아요.

그래서 바로 손들고 나오는 게
유대인들이 자기들이 이 질문을 해야 되는데
유대인들은 거기까지 못 가요. 지금 오늘 본문까지 못 가요.
왜냐하면 성령을 못 받게 되면 성령을 못 받은 자의 특징이 뭐냐? 하면요.
내 구원의 불변성을 주장해요.
이 말은 ‘나의 믿음이 나를 구원한다’는 걸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지금 사도바울이 누구한테 이야기하는 거예요?
로마에 있는 성도들한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불의 하뇨?”
들어보니까 불의하잖아요.
이게 ‘불의’라는 단어가 ‘거짓되었다’ 헬라어로 그런 식의 의미도 있거든요.
‘거짓되었느냐? 하나님이 거짓말을 했느냐?’

아니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라면 한 번 내뱉었으면 어떻게 해야 돼요?
지켜야 되잖아요. 그게 인간들이 갖고 있는 신이에요.
인간들이 갖고 있는 신이 뭐냐? 하면
‘하나님은 영원 불변하시다’ 이게 인간들이 갖고 있는 신이에요.
이게 유대교입니다.
유대교 언약의 하나님은 불변합니다. 약속한 분은 반드시 이루어요.
인간들이 갖고 있는 그 개념이에요.

그런데 창세기만 보더라도 하나님이 불변합니까? 변합니까?
지금 사도 바울이 창세기를 갖고 와서 이제 출애굽기로 넘어가거든요.
창세기에서 갖고 왔을 때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그 의식을 완전히 박살내버립니다.

그러면 로마에는 누가 있습니까? 이방인들이 있죠.
이방인 중에 유대교로 들어온 사람도 있을 거고
유대교로 들어와서 예수 믿는 사람도 있을 거고
아니면 아예 이방인 중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도 있을 거 아니에요. 나름대로 서울 사람이잖아요.
서울 사람들은 다 깍쟁이잖아요. 깍쟁이는 따지잖아요.
이렇게 사실적으로 이야기하면 안 돼요. 저도 서울 사람이잖아요. 이제 2년밖에 안 됐지만.
따지거든요. 나름대로 똑똑하잖아요.

그러면 논리성을 갖고 그전까지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그들이 나름대로 잡고 있는 겁니다.
잡고 있으면서 로마에 있는 성도라고 특별하다고 보지 마세요. 제발.
고린도에 있는 성도라고 특별하다고 보지 마시고,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가 특별하다고 보지 마세요. 그들이 똑똑해요.

그리고 흥미로운 지점은 히브리서와 로마서는 달라요.
히브리서는 마치 네로 황제에 의해서 핍박을 받는 그 시대를 연상을 하고
로마서는 아직 그 시대가 도달하지 않았어요.

한가할 때 무슨 노릇합니까? 한가할 때.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논리가 맞는지? 그 싸움을 해요. 인간은 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생활 자체가 바쁘고 주변 환경이 몰아칠 때는
‘진리가 무엇이고 자시고...’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아요.
그게 히브리서입니다.

로마서 같은 경우에는 한가해요.
싸움의 치열한 전쟁이 이 대부분 보면 내적 전쟁이에요.
나와의 전쟁이 있고 교회 안에서의 전쟁이에요. 교회 안에서의 전쟁.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 그건 내가 알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 그것도 내가 알지.’
근데 그 앞에 뭐가 있었어요?
“이삭의 씨라야 약속의 자녀다”라고 했잖아요.
그러면 당장 손을 들고 “하나님이 불의하지 않느냐?”
사도 바울이 뭐라는지 아세요? 그 하나님이 우상이라는 겁니다.
지금 그 얘기로 넘어가는 거예요.

인간들은요. 하나님을 제가 늘 이야기하잖아요.
인간은 선악과를 먹기 때문에 하나님 상을 정해놓습니다.
정해놓는 게 뭐냐? 하면 유대인들을 통해서 나타났어요.
그게 언약의 하나님이에요.

그런데 그 언약의 하나님이 새 언약을 체결해버려요.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 아들의 아버지가 진짜 아버지라”고
소개를 하는 거예요.
이거는 구약 자체를 산산조각 내는 거예요.

그래서 이단들이 나타났거든요.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예수님이 다르다’고.
그들은 뭘 모르냐? 하면요.
‘신약의 예수님은 진짜 예수님’ 이런 인간도 있고
아니면 ‘구약에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 이건 유대교고

이런 인간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요.
모두가 다 나의 구원의 확정성을 담보로 잡으려고 해요.

그러면 구약과 신약을 플러스 한 자들이 누구냐? 오늘날 구원파들이잖아요.
오늘날 구원파들이 누구냐? 구원파 아닌 인간들이 없어요.
우리가 구원파 속에서 살았어요.
개혁주의가 되었든 장로교회가 되었든 감리교회가 되었든 순복음이 되었든 신천지도 마찬가지예요.
다 구원파예요. 구원파 아닌 자들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복음을 듣는 우리들도 못 벗어나요.
그래서 복음을 어떻게 전하느냐? 하면 육체 가운데 살면서 복음을 전해야 돼요.
그런데 이 인간들은, 마귀의 자녀들은 뭘 원하는가? 하면
제발 육체 가운데 살지 말고 당신만은 육체에서 벗어나서 복음을 전해달라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을 뭘로 만듭니까? 신으로 만드는 거예요.
그 사람을 신격화시키는 이유는 간단해요.
왜 안산홍을 믿느냐? 하면 예수라는 사람이 50명 정도가 된대요. 우리나라에.
왜 그런 사람을 믿느냐? 하면
단월드. 하이브 하고 지금... 그 단월드 만든 사람도 아나운서인가 뭐 그랬다 그러더라고요.
자살해버렸거든요. 그 사람이. 맞죠? 자살해가지고...
그 사람이 기독교 갖고 오고 불교 갖고 오고 다 해서 자기가 예수님 만났는데...
옛날에 백백교입니까? 백백교 만든 그 사람이나
아무튼 모든 이단들의 공통점이 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예수님 만났다’ ‘형제다’
‘내가 형님이고...’ 뭐 어쩌고 이런 소리를 하는 사람들인데
그들의 공통점은요.
‘내 말 들으면 구원 얻는다’는 거예요.

오늘 아침에 그걸 조금 자료를 보니까 ‘뇌 성경’이라는 게 있대요. 뇌 성경.
그러니까 뇌에 성경이 있는데 그게 이제 작동을 하는 시대가, 이게 뭐 AI가 들어온다는 겁니까?
그런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이렇게 됐든 저렇게 됐든
그들 모두가 주장하는 게 ‘나의 구원’이에요.
그런데 이미 그런 짓을 유대인들이 다 한 거예요.
로마에 있는 성도들도 그 생각을 갖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사도바울이 이삭의 자녀라야 약속의 자녀라고 했다면
이삭으로부터 난, 이삭 혼자가 아니었잖아요. 이삭과 리브가에서 낳은 아들이 에서와 야곱이잖아요.
‘그러면 그들이 약속의 자녀가 되어야 되는데 왜 안 되느냐?’ 라는 여기에 대한 질문을
아직까지 계시가 예수님에 의해서 완성되기 전까지는 해결하지 못한 거예요.

해결하지 못하면 거기에 갇혀 있는 자들은 어떻게 해석을 하는가? 하면
심지어 세례요한조차도 에서와 야곱 이야기를 해놓고 자기를 어디에 두느냐? 하면
철저하게 야곱 편에 둡니다.
야곱 편에 두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불의하냐?’라는 반박을 못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방인들이 이 내용을 보면
‘이 하나님 말도 안 되네. 약속을 해놓고...’ 이게 웃기는 일이에요.
유대인들은 이게 안 보이죠. 왜? 자기 구원 속에 빠져 있으니까.

그런데 사도바울이 눈을 번쩍 뜨게 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오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이건 불의잖아요. 불의.
이삭의 씨라야 약속의 자녀라고 했다면 반드시 이 말씀대로 시행을 해야 되는데
이삭의 씨를 갈라버려요.

갈라버렸다는 말은 인간들의 시각에는 불의하게 보이죠.
왜 불의하냐? 하면 선악과를 먹었거든요. 그 아비가 마귀예요.
마귀이기 때문에 마귀는 말씀을 해석을 할 때
말씀 중심으로 해석을 하지 않고
말은 말씀 중심인데 그 말씀 중심에 누가 가장 중심을 차지하고 있냐? 하면
내가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라는 겁니다. 내가.

우리도 복음을 들으면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목사님 나는, 나는 복음을 아는데요’ 그 말을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복음 자체를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나 중심’
나 주위를 둘러싼, 태양계로 치면 내가 태양이라는 거예요.

사실은 태양이 말씀이라면 그 말씀 중심의 그 역할로서 이 원 운동이 아니잖아요.
똥파리가 돌아가듯이 이렇게 돌잖아요. 모든 태양계에 있는 그런 행성들이.
그렇게 그 역할을 하고 어떤 것은 삐져나가서 불에 타고 가루가 되고... 그 역할을 하면 되는데.
모든 사람들은 나 중심으로 사고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로마서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야기를 딱 하는 순간
“하나님이 불의하냐” 이게 나와야 돼요. 맞잖아요. 우리의 논리로.
제가 억지부립니까? 아니 한 번 말했으면 지켜야 되잖아요.

이 논리를 왜 이렇게 강조하느냐? 하면요.
“하나님이 선택한 자는 반드시 구원한다”는 이 말씀이 옳아요.
옳은데 문제는 그 말씀을 나의 말씀으로 믿어버리면
사도바울이 9장 1~3절에서 하는 말들을 삭제, 부정해버려야 돼요.

제가 지금 신명기 계속 설교를 하잖아요.
신명기의 내용은 새로운 말씀을 주시는데 ‘말씀은 말씀대로 한다’라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은 그 말씀을 말로 바꿔버리잖아요.
말로 바꿔버리니까 ‘내가 지킨다’는 거예요.
말씀이 말씀 되게 하기 위해서 인간들이 말로 바꾸게 하신 거예요.
그 말로 바꾼 자들이 예수님을 살해하거든요.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오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다”라고 해요.
그럴 수 없다.
“내 형제가 구원을 얻는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해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이렇게 말하는 사람만 ‘그럴 수 없다’라고 해요.
왜? 자유인이거든요. 이게 진짜 자유인이에요.

사람들이 무엇에 화를 내는가? 하면
내 구원이 담보 잡히지 않으면 예수 믿을 필요가 무엇이 있느냐라고 질문을 해요.
그러면 방금 말 잘했죠.
당신 구원이 없다면 예수 믿을 필요가 없다라고 한다면
‘예수는 당신을 구원해 주는 분이네요. 그럼 당신을 위한 분이네요.’
그러면 그 예수님은 당신의 시다잖아요.
그러면 구원해주면 그다음에 예수님을 어떻게 해야 되죠? ‘안녕히 계세요’ 하고 어디로 가면 됩니까?
능력의 하나님께로 가면 되는 거예요.

‘아니 목사님, 이 어려운 복음을 어떻게 압니까?’
예수님이 가르쳐줘도 못 알아먹어요.
이것은 주께서 깨닫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사람은 나 중심에서 못 벗어나는가?
말씀이 알려주잖아요.

15절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아~ 갑자기요...
제 마음은 이런 거예요.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이 출애굽기를 인용할 때
차라리 뒤에 나오는 “바로를 강퍅케 했다”라는 이 17절,
이걸 먼저 뒀으면 참 좋지 않겠느냐라고 생각을 하는데,

방금 이 15절 내용은 출애굽기 33장 19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 나오는 17절 내용은 출애굽기 9장 16절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이걸 뒤집어 놨어요.

우리가 볼 때는 그냥 뒤집은 것 같죠?
그냥 뒤집은 것 아닙니다.
지금 무엇을 박살 내느냐? 하면 유대인 중심의 구원론을 박살내버립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바로를 강퍅 했다’만 기억하죠. 바로를.

그러면 이 지금 출애굽기 33장 19절을 먼저 갖고 왔잖아요.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노라”
출애굽기 33장을 한번 봅시다. 손가락 거기에 넣어놓으시고
32장에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사건이 나와요.
모세가 첫 번째 돌판을 받기 위해서 올라갔을 때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늦추십니다.
늦추니까 땅에서 어떤 사태가 벌어지느냐? 하면
이 애굽에서 어린 양의 피로 구출받은 자들이, 10가지 재앙을 목격한 자들이, 홍해의 역사와
그다음 불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함을 받은 이들, 심지어 불 가운데서 율법을 받은 그들이
어떤 여호와를 생각하고 있는가? 그 이름이죠. 이름.
‘여호와의 이름이 어떤 이름인가?’에 대한 인간의 본심이 나오는 대목이 이 대목이에요.

그러면 황금 송아지를 만든 것을 “바로를 강퍅케 했다” 하셨잖아요.
그러면 황금 송아지를 만든 그들을 강퍅케 하셨습니까? 아닙니까?
강퍅케 하셨죠. 지금 이걸 깔고 있는 거예요. 성경은.

왜 지금 이 말씀을 하시느냐? 하면요.
지금 성경 전체의 흐름이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신다”는 거예요.
지금 로마서 흐름이 그렇게 돼 있어요.

주도권을 십자가 지신 주님에게서 절대로 떠나지 않게 합니다.
성령을 주셔서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한다”라고 했을 때
지금 이 말씀을 사람들은 ‘믿습니다’ 하면서 주도권을 내가 갖고 온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내가 갖고 와서 ‘말씀을 제대로 알면 그 말씀대로 내가 살아갈 수 있다’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중에 하나가
‘말씀의 의미를, 십자가 복음의 의미를 정확하게 깨달으면 내가 천국에 갈 수 있다’라고 생각을
하는데,

사도바울은 뭐라고 이야기하는가? 하면
앞부분에서는 “이삭의 씨라야 약속의 자녀라” 해놓고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고
이제 넘어오면 15절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이 얘기를 하는 거예요.

여기에 ‘하나님의 주권’ 집어넣으면 안 돼요.
주권이라는 말은 맞는데 지금 사도바울은 성령을 받았잖아요.
그럼 여기에는 무엇이 깔려 있습니까?
구약 같은 경우에는 아들의 죽음이 깔려 있는 거예요.
그냥 불쌍히 여겨서 구원하는 게 아니에요.

그 ‘불쌍히 여김’에는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 담겨 있는 불쌍히 여김이에요.
그렇게 되면 불쌍히 여김은 무엇을 위한 불쌍히 여김이냐? 하면
아들의 피를 자랑케 하기 위한 불쌍히 여김이에요.

송아지를 왜 만들었습니까?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은 여기에 대해서 가만히 있습니까?
출애굽기 32:9절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그들을 다 진멸하고 모세를 통해서 큰 나라가 되게 하겠다라고 할 때
모세가 기도하죠. 11~14절
“모세가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 하게 하려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을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를 가리켜 그들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나의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왜 안 내렸습니까?
‘여호와의 이름’을 위해서예요.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 때문에.

그러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32장 31절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지금 이 내용이 로마서 9장 이야기거든요.
그러니까 9장에 나오는 이 내용과
지금 뒷부분에 사도 바울이 출애굽기 33장 19절을 인용하는 것이 우연이 아니에요.
다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지금 모세가 생명책에서 지워버려 달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그러면 왜 통하느냐? 하면
이게 새 언약을 세우시는 그분과 일치되기 때문에 그래요. 일치되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들과 동행을 하시는데 특이한 점은 이겁니다. 출애굽기 32장 33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버리리라”
이 말씀이 취소되느냐? 안 되느냐? 이 얘기예요.
지워버립니다. 실제로.

이 말씀과 무엇이 함께 있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사해 달라고 할 때
내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달라는 이 내용과 함께 있어요.

인간이 무슨 수로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장악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이걸 이론으로 만들어버리면서
인간의 이론은 항상 하나만 주장해야 되거든요.
‘하나님은 생명책에서 이름을 안 지울 거야.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야.’
근데 그 신학을 유대인들이 갖고 있었다라는 겁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예정론, 창세전 언약.
십자가로 세우신 새 언약을 통해서 ‘구원받은 자는 절대로 지옥 가지 않는다’ 이 신학이
‘여호와 하나님’에서 ‘예수’ 이름으로만 바뀌어버렸지,
그 실체 내용을 들어가면
나의 구원의 영원성, 불변성을 주장하는 그 신학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말씀을 준비하면서 참 갈등이 생기더라고요. ‘이런 설교까지 해야 되느냐? 이런 말씀까지...’
차라리 한 8장까지 끝내버리고 그만하면 성도들이 좀 신이 날 것 아닙니까?
근데 9장으로 넘어오면 이건 너무 심각해져요.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걸로 끝내면 얼마나 좋습니까?

근데 9장으로 넘어오니까 어떤 사태가 벌어집니까?
‘정죄함이 없지. 맞아! 그러니까 자유인’이라는 거예요.
‘목사님 모순되지 않습니까?’ 우리는 모순되는데 말씀은 모순이 안 돼요.

말로는 “말씀은 영원하고 우리는 풀이고 꽃이라” 해놓고
“말씀이 영원하다” 하면 손들고
‘그럼 내 구원은요?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여기에 지금 화를 내는 거예요.
예수님을 살해한 이유가 거기 있어요.
뼈 빠지게 약속한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 하고....
여러분 바리새인처럼 살아봤습니까?
그 정도 살았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하는 말이 “그게 바로 마귀 짓이야”
누가 용납하겠어요?

사람들은 로마서 9장을 별로 주목하지 않는 것 같아요. 퉁치는 거예요. 지금.
흐름이 점점점점 깊이로 들어가거든요.
“이스라엘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그건 맞지. 예수님을 죽였으니까.’

근데 지금 사도 바울이 누구한테 하는 이야기입니까? 성도들한테 하는 이야기예요.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너희들은 십자가의 증인이지, 구원의 증인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다 자기 구원을 자랑해요.
구원을 자랑하면 그 구원 나도 받고 싶어 해요.

근데 십자가를 이야기하면요. ‘아 그런 이야기 왜 하느냐?’ 이야기입니다.
제가 볼 때는 사도바울이 어쨌든 로마의 환영을 받긴 받는데
이 로마서를 제대로 이해했다면 사도바울을 환영하기는 정말 불가능해요.
왜냐하면 성도라고 하는 자들에게 폭탄을 던져버렸잖아요.

그들은 어렴풋이
‘구약은 그림자고 모형이고 신약은 예수님에 의해서 완성되었으니까 우리는 진짜 교회일 거라’
이 예상을 하고 있고 그 예상대로 지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서 하나님이 마치 불의한 하나님처럼 설명을 하는 겁니다.
그다음 봅시다. 조금 더.
그래서 출32장 32절에서 모세가 자기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달라고 하는 그 내용,

그리고 나중에 출32:33절“내게 범죄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버리리라”
이게 예수님이 실제로 당한 이야기 일입니다.
아버지가 버렸잖아요. 실제로 이 일을 당한 거예요. 예수님이.

그러면서 33장 넘어가서 봅시다. 17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의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의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모세가 가로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지금 이 말씀을 사도 바울이 로마서 9장 15절에서 하고 있다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넘어가느냐? 하면
이 말을 해도 못 알아들어요. 무슨 말인지.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이걸 어떻게 연결시키는가? 하면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고” 이렇게 적용시켜요.

무슨 얘기냐? 하면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강퍅케 할 자는 강퍅케 한다’ 하잖아요. 예를 들어. 뒤에 연결하면.
그러면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고’ 이거랑 이거랑 같지 않습니까?라고 이야기를 해요.
같은 건 같은데,

창세기와 그다음 출애굽기로 넘어가게 되면 이 구도가 바뀝니다.
야곱과 에서에서 그다음에 이제 애굽으로 내려간 자들이 누굽니까?
야곱의 후손들이죠. 히브리 민족이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출을 받습니다.
구출을 받았을 때 한번 보세요.
그들 속에 야곱적 속성이 있습니까? 이스라엘적 속성이 있습니까? 어떤 속성이 있습니까?
여러분 출애굽기 보시잖아요.

4대 만에 돌아온다 할 때
그 1장에 노예 생활을 할 때
그들이 야곱적 속성을 갖고 있습니까?
아니면 야곱이 이스라엘이었잖아요. 이스라엘의 속성을 갖고 있습니까?
이런 질문은 잘 못 받아보죠. 왜냐하면 출애굽기 1장은 그냥 확 넘어가니까 대부분.

흥미로운 지점은 아무것도 없어요. 먹고 살기 바빴어요.
노예이기 때문에 괴로웠다라는 거예요. 그냥 부르짖는 거예요. 언약의 하나님을 찾는 게 아니에요.

야곱은 약속을 받았잖아요.
약속을 붙들고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애를 썼고
그 야곱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그 야곱이 하나님과 붙어서 이겼잖아요.
이겨서 울며 축복해 달라는 이름이 이스라엘이잖아요.
그러면 그 이스라엘의 후손이라면
400년 동안 이스라엘적 요소,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는 모습이 나와야 되는데
아무 모습이 없어요. 신기하지 않습니까?
그런 자들을 애굽에서 구출해 내는 겁니다. 어린 양의 피로 구출해내는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 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철저하게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라는 이 말씀에서 더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겼다”가 거기에 더 들어가는 겁니다.
야곱이라는, ‘나는 야곱이니까 이스라엘의 후손이니까 나는 구원받을 수 있다’라는
이런 논리가 통하지 않도록 하시는 거예요.

32장에 이 우상숭배 해서 레위인들이 칼을 차고 다 죽이잖아요. 자기 형제를. 제거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뭐냐? 하면
긍휼히 여길 자는 긍휼히 여기고 강퍅케 할 자는 강퍅케 하는 거예요.

그 출애굽하는 그들을 보면 야곱도 아니고 이스라엘도 아니고
근데 그들을 뭘로 만들어 버립니까?
어린양의 피로 하나님의 아들로 만든 이스라엘이 되게 하는 거예요.

그 만드는 과정이 이제 출애굽기 9장에 쭉 나오죠. 그다음 봅시다. 로마서 9장 16절
지금 이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지금 이건 성도들한테 하는 얘기이기 때문에 성도들에게 없어야 될 요소가 뭐냐? 하면요.
원하는 것, 그다음 달음박질하는 것, 이 두 가지가 있으면 성도가 아니라는 거예요.
지금 사도바울이 살짝 끼웠거든요. 33장과 9장 사이에 이걸 집어넣어버려요.

하나님의 언약은 철저하게 원하는 자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오.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도 아니라는 게 담겨 있어야 돼요.
그런데 모든 인간은 구원을 원하잖아요.
구원을 원하기 때문에 구원에 이르는 그 생명의 도를 얻기를 원하잖아요.
이것을 지금 사도 바울이 날려버립니다.
이건 성령으로 시작했는데 육으로 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잖아요.

왜 그러냐? 하면
이게 복음을 들었는데 갑자기 이 자세가 바뀌어버려요.
처음에는 은혜라고 하잖아요. 실제 우리 보면 사람들이 ‘은혜로 구원받았다’ 하잖아요.
그다음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내가 믿잖아요’ 이 얘기를 하거든요.
이 성도의 몸에서 지금 이 복잡한 이 상황들이 계속해서 반복해서 일어나기 때문에
성도의 몸에는 항상 십자가 사건이 반복되어야 되는 몸인데

사람들은 십자가 사건이 반복되면 싫어해요.
왜? 안정을 추구하거든요.
그게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입니다.

아까 개인적 욕망과 집단적 욕망이 있잖아요.
개인적 욕망은 자기가 권력의 끝자리로 차지하는 개인적 욕망에 오르고 싶지만
그것이 안 되면 집단 지도 체제를 원해요.
집단을 통해서 뭘 이루려고 하는가? 하면 안정을 이루려고 하는 거예요.

이 교회가 ‘개인 구원’을 철저하게 강조하는 데가 있고
아니면 ‘집단적인 교회 체제’를 강조하는 데가 있죠.
이 두 가지밖에 없어요.
‘우리는 복음을 아니까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라고 한다면 없어요.
그 속에 복음이 전파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러한 것을 추구하면서 그 욕망을 갖고 들어오는 자들에게
이 사도바울의 복음은 핵폭탄이죠.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이 복음을 위해서 달음박질 하잖아요. 달음박질 안 합니까?
그러면 달음박질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말씀을 보면서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아멘’ 해야 돼요.

그러면 사람들이 뭐라 하는가? 하면
‘나 원하지 않아. 원하지 않은데 주님이 불러주면 믿겠어.’ 이게 뭐예요?
이게 자기가 신이라는 이야기예요.
제가 설교할 때 가끔 그런 이야기하잖아요.
‘하나님이 하게 하시면 하겠어.’ 사람들이 그런 신앙을 많이 갖고 있잖아요.
그 신앙에 대해서 비난하고 비판하면서 뜬 사람이 박영선 목사거든요.
‘기도만 하고 앉아 있지 말고 성도는 치열하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싸워야 된다’
그게 뭐냐? 하면
‘출애굽은 하나님이 하셨지만 약속의 땅은 우리가 들어가야 된다’는 거예요. 그 말이 맞아요?
가장 악마적이에요.

피만을 증거하기 위해서 40년 광야 생활을 만든 거예요.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를 안 보는 겁니다.
아모스 선지자의 외침을 안 보는 거예요.
한 번도 주님을 제대로 섬기면서 예배한 적이 없는 시절이 광야 시절입니다. 한 번도.
근데 어떻게 들어갔느냐? 언약 때문이에요. 언약 때문에.

그런 식의 논리라면 죽을 때까지 애를 써야 돼요. 천국 들어갈 때까지.
그러면 본인이 나중에 교통사고 나서 이렇게 기억력을 잃어버리면 그 뉴스에 보면 이렇게
뇌가 잘려나간 사람도 있잖아요. 치매에 걸리면 그런 사람은 어떻게 해요? 어떻게 애를 쓸 겁니까?

“원하는 자로 말미암지 않고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지 않는다”는 이 말을 이런 겁니다.
그 빌립보 감옥에 있는 간수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습니까?’라고 질문을 했잖아요.
그러면 “주 예수를 믿으라” 했잖아요.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는다” 했을 때
실제로 그 사건이 일어났잖아요.

그러면 그 사건을 이 말씀을 그대로 한번 집어넣어보세요.
진짜 그 간수가 구원을 얻었다면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겠습니까?’ 뭐 이런 질문 자체가 뭐가 되죠?
죄가 돼요. 원하는 자로 말미암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요.
근데 예수 믿는 방식은 그 방식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10장으로 넘어가면 그 얘기를 하거든요.
복음을 전하는 자가 있고 전하는 자에 의해서 듣는 자가 있고
듣는 자가 마음으로 화답하는 이 과정을 다 거쳐요.
이 내용과 이 내용이 같이 있는 거예요. 같이.
중첩으로 쌓여 있는 겁니다.

‘아 원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구나.
어린 양의 피를 자랑케 하기 위해서 이 사건을 일으켰고,
주님이 지금도 친히 살아계셔서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시기 때문에
지금 주님의 십자가 사건의 완료성이
이들이 복음을 전함으로 말미암아 이 자리에 일어났구나’를 알아가게 되는 거예요.
이미 안 거죠.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기름부음이 있기 때문에.

기름부음 없는 자들은 알아간다라는 말을
조금씩 조금씩 알아가게 되면 자기가 어떻게 된다는 거예요? ‘다 안다.’
그런데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는 자는 알아가게 되면 알아갈수록 뭐가 되죠?
방금 설명했잖아요.
죄의 깊이가 나오면서 십자가를 자랑하게 돼 있어요.
‘출애굽할 때 그들이 원하지도 않았고 달음질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내용을 담고 있어야 돼요.

그러면 이 원리가 계속해서 작동한 게 출애굽기 32장 33장이에요.
원하는 자로 말미암지 않았고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겼기 때문에 심판할 자를 심판하셨고 강퍅케 하신 거죠.
강퍅하게 하여서 심판을 하시고 살려줄 자를 살려주신 거예요.

그다음 나오는 게 롬 9:17절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이 바로 이야기잖아요.

출애굽기 9장 16절을 봅시다. 9장 16절을 보면 이 말씀을 그대로 말씀을 하는데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라” 이 말씀이 바로에게 하신 말씀이잖아요. 그죠? 바로에게 하신 말씀이잖아요.
그러면 이 바로의 자리에 이스라엘을 집어넣어보세요.
응용이 됩니까? 안 됩니까? 야~ 이거 어렵죠.
이스라엘을 집어넣은 게 똑같아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을 강퍅케 해서 진멸해버렸거든요. 광야에서.
그러면 남는 건 뭡니까?
여호와의 이름과 능력만 남아요.

그래서 출애굽기 33장을 먼저 이야기를 하고 출애굽기 9장으로 온 거예요.
여기에 사람들은 ‘바로는 강퍅케 했으니까 이스라엘은 긍휼히 여기지 않았느냐?’ 이 논리를
지금 펴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지금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이야기하는 이 시점은
그 출애굽을 한 자들이 남북 유다가 갈라지고,
남유다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칠십 이레의 그 완성을 기다리는 자들, 그들에 의해서
예수님이 살해당했거든요. 그때를 담고 있어요.

그러니까 지금 이 출애굽기를 이야기를 할 때
그냥 단순히 ‘그때 그랬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 그 사건이 오늘날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적용을 해야 돼요. 적용을 이렇게 안 하고 관람을 하게 되면
‘그래 맞지. 바로는 강퍅케 하고 긍휼히 여길 자는 긍휼히 여기셨으니까.’
그 바로 자리에 누가 들어가요?
남은 자 유대인들이 들어가거든요. 이거 충격적입니다. 오늘 오후 예배 설교하겠지만.
이 남은 자 유대인들이 강퍅케 돼요.
강퍅케 되니까 어느 자리에 올라갑니까? 바벨론 왕의 자리에 올라가요.
바벨론 자리에 올라갑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살해하는 거예요.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야~ 이 충격입니다. 충격.
자 ‘주권을 믿습니다’라는 것은 벌써 무엇이 깔려 있어요?
‘믿는 내’가 깔려 있죠.
그런 믿음은 “이삭의 자녀라야 약속의 자녀다”라는 것을 믿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 맞죠?
‘나 그거 믿어요’ 지금 이 믿음을 박살 내는 게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하고자 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는 자를 강퍅케 한다”는 거예요.
‘니 믿음 소용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속이 상해요.
사람들은 계속해서 ‘믿는다’고 해놓고 ‘자기를 부인한다’고 해놓고 자기 믿음을 포기를 안 해요.
지금 이 말씀이 이 김성수 목사가 9장까지 했는가 모르겠어요.
9장까지 끝내고 자살했어요? 몇 장까지 했어요? 9장 다 했어요?
아마 알아요. 아는데 이 자기가 똑똑하니까, 똑똑한 사람은요. 이걸 이렇게 봐요.
똑똑한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요. 굉장히 문학적으로 보거든요.
문학적으로 보면 논리적으로 봅니다. 물론 이 정도는 안 가지만.

근데 이렇게 봐버리면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가? 하면
로마서 8장까지 자기가 주장한 그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게 다 무너져버려요.
‘제발 너 믿지 말라’ 이야기예요.
또 이렇게 말하면 ‘나 안 믿어요’ 또 이래 나오니까...
지금 성령이 함께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사도바울이.

이걸 히브리서로 돌려버리면 아까도 얘기했지만
“영원한 대제사장이 항상 살아계셔서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느니라”
그게 로마서 7장에 나오잖아요.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아들이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한다”는 이 얘기를 사람들은 뭘로 봐요?
‘믿습니다’ 라고 해결해버립니다. ‘나 믿습니다’

사도바울이 성령 받았잖아요. 그거 눈치 못 챌까요?
그 내용이 필요 없는 게 아니라
그런 내용들까지 집어넣어야 죄의 깊이가 어느 정도까지 나오는지 보이죠.

사도바울이 복음만 전했잖아요.
복음만 전하니까 복음 갖고 이단 만들잖아요. 말귀를 못 알아들으니까.
왜 못 알아듣습니까? 모두가 다 어디에?
‘아 달음박질 해야 되지. 원해야 되지.’

사복음서를 볼 때 다 원하는 자들이 많았잖아요.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예수님 앞에 가면 우리를 불쌍히 여겨달라 해야 됩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해서 병 고치고 다 하잖아요.
그러니까 그걸 로마서로 오면 “원하는 자로 말미암지 않았다” 이야기해버리면 뭐가 돼요?
‘니가 바로 예수님을 살해한 죄인이다’가 돼요.
근데 어느 누가 그걸 인정합니까?

그런 사람들이 뭘 이야기합니까?
‘주님이 내 병을 고쳤다’를 이야기하잖아요.
‘주님이 나를 구원했다’를 이야기하거든요.

주님은 자신을 구원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들만 구원했어요.
이 말이 사람들한테는 진짜 싫은 말이거든요.

지난번 제가 그런 말씀드렸는데
‘아들만 구원했습니까? 우리는 구원하지 않았습니까?’
‘당신 구원 안 했다’ 이야기합니다.
‘그럼 성경에 우리를 구원했지 않습니까?’
‘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예요.’
그 우리 속에 ‘나’를 집어넣는 순간 유대교라는 거예요.

지금 오늘날 기독교가 왜 유대교냐? 2천년 기독교가 왜 유대교냐? 하면
나를 부정한 적이 없어요.
나를 부정해버리면 복음이 전파 안 됩니다.
제가 진짜 위험한 설교를 하잖아요. 나를 지금 부정하는 설교를 하는데
‘그럴 것 같으면 왜 헌금하고 기도하고 예배 드리러 왜 나옵니까?’
이거 사람들은 그것밖에 몰라요.

‘지금까지 은혜로 했습니다. 주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서 했습니다. 인도하심으로 했습니다’라는
말들이 다 어떤 말이 되느냐? 하면 유대인들의 말이에요. 딱 올라와서
‘하나님 아버지 저는 하나님께 감사하나이다. 저 세리와 같이 사기치지도 않고...’ 그거거든요.
그 논리를 갖고 있는 거예요.

이 사도 바울이 제가 볼 때는 진짜 정신이 온전하지 못해요.
정신이 온전하면 이런 편지를 쓰면 안 됩니다.
물론 계시기 때문에 이렇게 쓰는데 뒤를 안 보죠.

“너희가 보내줌으로 말미암아 내가 스페인으로 가기를 원한다”
이것도 사도바울이 왜 썼느냐? 하면
자기 죄도 드러내고요. 주님의 일하심이 자신의 뜻대로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차원입니다.
그렇게 되더라도 마찬가지고요.
왜냐하면 성도는 내일이 없어요. 죄송한 이야기지만 내일이 없어요.

어떤 사람이 그러거든요. 목사님은 왜 내일 없는 설교를 하느냐?고
내일이 어디 있어요? 우리에게.
‘목사님 그래도 내일 걱정하고...’
다~ 하세요. 다~ 하는데 내일 없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합니다.

문제는 지금 자기 구원을 놓지 못하니까
지금 로마서를 읽으면서 자기 구원이 더 확고해지는 겁니다.
로마서를 제대로 읽으면 다 날아가요. 흐물흐물해요. 액체인간이에요. 액체인간. 그야말로.
물 같은 인간이에요. 물 같은 인간. 이랬다 저랬다 뭐 줏대도 없는 것 같고.

“인간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은혜로”라는 그 말씀이
‘은혜를 내가 받았다, 내가 믿는다’ 이것조차도 부정하는 내용이 지금 오늘 본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긍휼히 이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는 자를 강퍅케 하신다” 할 때
이것을 오늘날 그대로 갖고 와버리면 다음 주는 더 더 심합니다. 지금. 그다음 구절은.
이게 더 강력하게 들어가거든요.

이걸 그대로 가져와버리면 앞부분 로마서 7장에 나오는,
그리고 사복음서로 들어가면 예수님이 세상 끝날 때까지 함께하는 거예요.
주님이 사복음서 때 공생애 기간에 하신 일처럼 직접 그 일을 하는 거예요. 십자가의 완료성을 갖고.
그 긍휼히 여긴 자를 하고자 했기 때문에.

그러면 여기에 뭘 이야기해야 되는가? 하면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는 ‘하고자 하시는 분’을 증거해야 될 거 아니에요
그 어린 양의 피를 자랑해야 될 거 아닙니까?

근데 이렇게 이야기하면
‘하고자 하시는 분이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는 분을 나는 믿습니다.’
그다음 하는 말이 뭔가? 하면
‘그래 하고자 하는 자는 주님이 다 구원합니다.’
그 말 누가 못해요? 그거 하나마나한 이야기예요. 그 말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하고자 하는 자를 다 구원하는데 이 내용이 십자가로 증거되는 거예요.

십자가로 증거되면 십자가 앞에서는 모든 인간이 뭐가 돼요?
죄인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십자가를 위한 세상인 거예요.

인간의 논리는 다 무너져야 됩니다.
그래서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게 신학이라고 했잖아요.
신학 체계라는 게 필요 없다가 아니고. 좀 오해를 하지 마시고 누구나가 다 신학이 세워져요.
제 설교도 세우면 신학이 돼요.
근데 문제가 뭐냐? 하면
이것을 사람들은 낚아채가지고 구원의 용도로 써버린다라는 겁니다.

십자가 지신 주님이 친히 자기 이름을 증거케 하기 위해서 구원하셨어요.
그러니 나의 구원은 죽을 때까지 없습니다.
그래서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는 게
그냥 믿기 전만 아니라
말씀은 영원해야 되잖아요. 죽을 때까지 심지어 요한계시록에 보면 죽임 당한 그들이
면류관을 돌려드리잖아요. 자기를 부인하잖아요.
그러한 능력 속에 살아가는 자가 성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주시니 말씀을 낚아채서 나의 구원의 확정성으로 삼으려고 하는 자들에게
십자가로 다 이루시고 십자가 사건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가운데
인간의 구원성을 책망하시고
십자가 지신 주님이 친히 십자가의 피 능력으로 긍휼히 여기셔서 구원하는 현장으로 이끄심을
말씀을 통하여 들려주심을 감사드립니다.

긍휼히 여기시는, 하고자 하시는 십자가 지신 주님만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십자가에서 말씀을 다 이루신 주님만을 증거하기 위한 인생으로 살아가기를 소원하는
주의 백성에게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