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4-05-27 07:50
20240526 로마서 강해 67강 롬 9:19-23 토기장이와 십자가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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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4-05-27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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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26 로마서 강해 68강 롬 9:19-23 토기장이와 십자가

하나님 말씀, 로마서 9장 19절에서 23절 말씀을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롬9:19~23)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아멘

로마서를 이렇게 읽어보게 되면 복음 앞에 반박을 하는 그러한 어떤 자들이 계속해서 나옵니다.
반박하는 자들이 누구냐? 하면
사도바울은 ‘불특정 믿지 않는 자들’이라고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지만, 오늘 본문도 그렇죠.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힐문하느뇨?”
‘비판, (조금 더 들어가면 로마서 3장에도 나왔거든요) 어떻게 심판할 수 있느냐?’ 이 얘기입니다.

왜 이런 반박을 합니까?
‘아니 하나님이 하고자 하는 자를 강퍅케 하시고 하고자 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심판할 자격이 있느냐?’ 이 얘기입니다.
자기 혼자 북 치고 장구 치잖아요. 여러분 그런 생각 안 해보셨습니까?
지난주 설교가 끝나면 마음속에 이게 나와야 되거든요.
‘하나님 홀로 북 치고 장구 치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판단하는 것이, 과연 심판하는 것이 가능하냐?’라는 거예요.

그러면 조금 더, 그다음 나오는 게 뭐냐? 하면
그러면 “누가 하나님을, 그 뜻을 대적하겠느냐?”
이 말을 왜 하느냐? 하면
심판받는 자가 하나님을 대적했기 때문에 심판을 받았거든요.
뱀이 여자를 유혹했잖아요.
그럼 여자가 선악과를 따먹었죠. 아담도 따먹었죠.
그러면 이들이 따먹은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뜻대로입니까? 아니면 자기들이 따먹었습니까?
이제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해야 돼요.

‘하고자 하는 자를 강퍅케 하시고 하고자 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면
선악과도 하나님이 따먹게 했네요’
“누가 거기에 감히 하나님을 대적하느냐” 이 얘기예요.
그러면 그다음 나오는 논리가 뭐냐? 하면 ‘어떻게 심판할 수 있느냐?’ 이 얘기예요.

우리도 많이 들었잖아요.
선악과를 하나님이 따먹게 했다라고 들었잖아요. 그죠? 그 말이 틀린 게 아니에요.
그런데 제가 지금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면서 강조하는 바가 뭐였습니까?
옳은 것이 복음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계속 강조를 해요.

십자가는 인간의 옳음을 비껴갑니다.
왜 그러냐? 하면
마귀가 처음에 뱀을 통하여서 이 여자를 유혹을 할 때 그 말은 바꾸지만
“네가 이것을 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된다”라고 했잖아요.
그 말이 거짓말입니까? 진짜였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급히 “큰일 났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막은 거잖아요.

그 말씀에 대해서 우리는 심각하게 봐야 되는 게
로마서 9장 정도로 오면 사람들이 말씀에 대해서 굉장히 깊이 들어갔다고 보셔야 돼요.
이 정도 들어오면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다’ 하잖아요.
‘주권 믿는다고 하는 자들’에게 질문하는 거예요. 거꾸로.

“그러면 하나님이 어떻게 판단하겠느냐?”
‘아 그거 주권이지 않느냐?’
그런 주권은요. 유대인들도 다 인정해요.
그 주권을 믿는 자들이 왜 그렇게 열심히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 살았습니까?

여러분 구약 읽어보면 이 강퍅케 하신 것도 하나님이잖아요. 맞죠?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는 것도 구약에 다 나와요.
그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걸 다 알아요. 되는 걸 다 아는데
그들의 시각에는 무엇이 보여졌는가? 하면
뜻대로 되는 것은 아는데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어떻게 합니까?
심판을 내렸다라는 거예요.

주권을 인정 안 하는 게 아니에요. 주권을 인정하지만,
말씀을 보니까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된다’라는 것이
구약에 심판받은 자기들 조상들 세계에서, 선지자들의 활동 속에서 다 드러났다라는 겁니다.

주권 신앙이 엉터리예요.
기껏 주권 주장해놓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된다 합니까?
성화론이 튀어나오잖아요. 거기에.
이건 같잖지도 않잖아요. 주권을 인정한다면 성화론 나오면 안 돼요.

지금 오늘 본문 우리가 읽은 것은요.
말씀이 굉장히 어려운 게 뭐냐? 하면
주권을 믿고, 예정을 믿고, 예지를 믿는 자들을 다 박살 내는 본문입니다.
사실 공동 번역 같은 경우에는 이걸 좀 제대로 번역이 돼 있는데
이 다른 성경을 보면, 우리가 논리적으로 뭘 갖고 있느냐? 하면요.
긍휼히 여길 자와 강퍅케 여길 자가 정해져 있죠. 안 그렇습니까?
예정을 하면, 선택을 하면 긍휼히 여길 자와 강퍅케 여길 자를 정해놨잖아요.
저만 그렇게 생각합니까?
예정론을 이야기할 때,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택했다”고 하면
어떤 사람은 천국 가기로 결정해놓고 어떤 사람은 지옥 가기로 결정했다라고 이야기를 하잖아요.
그 말씀이 틀렸습니까? 맞아요.

맞는데 그 말씀이 역사 속으로 들어오게 되면
우리가 믿는다라고 하는 그 믿음을 다 박살 냅니다.
그래서 로마서가 굉장히 흥미진진한 게 한 편의 드라마 같아요. 어떤 드라마냐? 하면요.
이 1장부터 11장까지 진행이 되는데
인간에게로부터 나오는 모든 복음에 대한 반박성이 다 나와요.
미리부터 조금 얘기하면, 12장부터 사람들이 제 설교에 대해서 관심 있는,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은
‘그래 12장부터 어떻게 설교하는지 한번 보자’ 이 얘기거든요.

왜냐하면 그래도 11장까지는 나름대로 교리 이야기니까
12장부터는 어떻게 보느냐? 하면 미리 얘기를 하자면요.
12장부터 진행되는 내용을 보면요. 그냥 일상생활을 이야기합니다.

왜 일상생활을 이야기하느냐? 하면요.
사람들이 11장까지 교리,
‘그래 모든 것이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가는 걸 믿습니다’라고 했잖아요.
그러면 사람들은 그걸 믿으니까 주권을 믿으니까 그걸 챙깁니까?
아니면 그 믿음 속으로 자기가 들어가야 돼요?

지금 로마서 설교를, 로마서를 제대로 읽은 사람은
믿음이, 아브라함이 믿음이 있어요? 없어요?
없다고 하면 안 돼요. 성경에 있다 했으니까.
있는데 없죠.

여러분이 설교를 들을 때 자꾸 오해하지 말아야 되는 게 뭐냐? 하면
제가 ‘믿음이 없다’ 하면 듣는 사람들은 그걸 낚아채요. 자꾸.
‘믿음이 없어요.’ 그렇게 들어가면 안 되고
제가 설교를 하잖아요. 말씀에 대해서.
믿음이 있어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여김을 받았잖아요.
그러면 믿음이 있는데 그 믿음은 믿음이 없어요.

그러면 로마서 11장까지 왔으면 “모든 만물이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서 나오고 주께로 돌아간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으면 그다음 아멘 하면 돼요. 그냥.
아멘 하면 되는데 문제가 뭐냐? 하면 내가 이 말씀을 믿어버려요.
그러면 아브라함의 믿음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들어가잖아요. 지금.

제가 이렇게 큰소리를 내니까
‘목사님 얼굴은 잘생겼는데 왜 설교가 강하냐?’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는데
지금 영적 싸움이잖아요. 이 피 흘리는 싸움보다 더 강렬한 싸움이에요.
여러분들이 일상생활에 매여서 돈 벌기 바쁘고 이러면요. 거기에 피 흘리잖아요.
여러분 돈 벌기 위해서 지금 모든 걸 다 바치고 있잖아요.
그런데 그보다 더 심한 싸움이 영적 싸움이에요.
거기에서는 죽어버리면 육신은 끝나지만 영적 싸움은 죽는 게 안 죽어요.

로마서를 읽어도...
제가 왜 이렇게 하느냐? 하면 오늘 설교가 끝일지 모르기 때문에 하는 거예요. 항상.
제 마음은 늘 ‘로마서는 끝내고 이 모임이 없어지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하지만
그건 주님이 하실 일이고, 그건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가게 돼 있으니까.

문제가 뭐냐? 하면 이 “주께로 돌아간다”라는 이걸 믿는 자들이 12장부터 넘어가버리면
사실 쑥대밭이 되어야 되는데, 쑥대밭이 되지 않고
쑥대밭이란 뭔가? 하면요. 구약 이스라엘을 어린 양의 피로 구출을 하잖아요.
구출을 해서 광야로 몰아넣으면 뭐밖에 안 나옵니까? 남는 게 뭐였어요?
어린 양의 피만 남기고 다 진멸당하죠.

성도가 어린 양의 피만 남기기 위해서 이 세상을 살게 하는데 그게 교회예요.
지금 12장부터는 교회 이야기를 하거든요. 모든 서신서가 교회 이야기를 해요.
왜 교회 모임을 이야기하느냐? 하면
모임이 되어야만 모든 율법이 이스라엘 가운데 상호 작용해요. 그게 확장이 되잖아요.
이방인한테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똑같습니다. 교회 안에 이 얘기가 들어가기 시작하면
우리가 탄탄하게 로마서 1장부터 11장까지
논리적으로 믿어왔던 것들이, 알았던 것들이 소용 있다? 없다?
‘소용없다’라는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거예요. 왜 그러냐?
성도는 십자가의 증인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그럴 것 같으면 이 얘기를 왜 하느냐? 하면
영지주의자들이 있잖아요. 지식을 쫓는 자들이 있어요.
사도바울이 로마서에도 이야기하거든요. 거꾸로 이야기합니다.
“지식을 쫓지 않았고 행위에 의지하였다”라고 이렇게 표현하니까
사람들은 ‘지식을 쫓아야 돼’ 이게 아니잖아요.
고린도전서로 가면 십자가의 지혜를 이야기합니다.
십자가의 지혜는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어리석다라고 규정을 해요.
인간들이 갖고 있는 그 악마성을 철저하게 노출시켜요.

그러면 11장에서 클라이막스에서 12장으로 내려가느냐? 하면 더 올라가요.
근데 우리들의 인식 구조는 논리적 신학적 형성이 11장까지 제대로 쌓였으니까
12장부터는 만만하게 보입니다. 저만 그런지 모르겠어요. 제가 이렇게 설교를 하니까
‘목사님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그런 분도 있어요. 그러면 감사하죠.

근데 제가 설교하면서 이렇게 말씀드린 이유는 신학 자체가 그렇게 구성되어 있어요.
더 어려운 게 12장 이후입니다.
나중에 16장 가면 “문안하라” 하거든요.
서로 문안할 때, 집사님하고 저하고는 무난할 수 있잖아요. 근데 교인들끼리 이렇게 지내다 보면
우리 꼴랑 2년 만났잖아요. 2년 만나니까 서로 관계가 어때요? 어떻습니까?
열 받아서 나간 사람도 있고... 별별 사람이 다 있잖아요.
그런데 “서로 문안하라”고 하는 거예요.

아이 이렇게 친하게 지낸 사람은 문안할 수 있잖아요.
우리는 그런 걸 만만하게 생각하잖아요. 안 만만해요.
왜냐하면 문안할 정도가 되면 내가 죽어야 돼요.

내가 죽는 방법은 나를 숙이라는 얘기가 아니라, 겸손을 떨라는 게 아니라
십자가를 내밀어야 돼요. 그러면 상대가 십자가로 와야 돼요.
그러면 죄인끼리 만남이 되는 거예요.

정말 흥미로운 게 이런 거잖아요.
복음을 제대로 알았는데 사람들이 무엇 갖고 삐집니까? 내 감정을 건드리면 삐져버립니다.
제가 지금 한 30년 40년 복음을 들었는데 나간 사람들이 대다수가 그 경우예요.
그래서 ‘십자가 복음은 감정을 못 이긴다’ 이런 유명한 말이 나왔어요.

근데 저는 로마서를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드느냐? 하면
십자가 복음이 감정을 못 이기는 게 아니라 진짜 복음의 현장은 12장부터예요.
우리가 살아가는 현장이에요.

지식은 서로 공유가 돼요. 맞잖아요. 그렇죠?
그 모든 것을 성도들이 그런 자기의 강렬한 신학적 지식을 내놓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걸 내놓을 때가 있고
그런데 그런 걸 내어놓으면서 죄인으로 인정하는 것은 쉬워요.

우리가 계속해서 광야 생활이라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사람들은 이걸 뭘로 자꾸 생각하느냐? 하면
‘별것 아니다’라고 생각을 해요.

지금 다시 로마서 9장으로 다시 돌아와서 보면
하나님이 지금 논리가 얼마나 치밀한가? 하면요. 앞부분에
이스라엘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고
아브라함의 씨가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하고
약속의 자녀라야 약속의 자녀라고 하고
그다음에 약속의 자녀인데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 했잖아요. 맞죠?
근데 그걸로 끝난 게 아니죠.

그다음 단계는 또 어떤 단계입니까?
그다음 단계는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는데
강퍅케 할 자는 강퍅케 하고 긍휼히 여길 자는 긍휼히 여겨요.
야곱 속에 다시 “강퍅케 할 자는 강퍅케 긍휼히 여길 자는 긍휼히 여김” 여기까지 따라온 거예요.

지금 따라온 자들이 “그러면 하나님이 어떻게 심판하겠느냐?” 이 논리가 나오는 거예요.
근데 대부분 제가 알기로 신학자들은 목사들은 여기까지 못 따라와요.
왜 못 따라오는가? 하면
앞부분을 뭘로 다 퉁 치는가 하면 ‘하나님의 선택, 하나님의 일방적 주권’으로 다 퉁 쳐버려요.

지금 선택, 선택, 선택... 계속 반복하거든요. 맞잖아요.
이스라엘을 선택했잖아요. 아브라함을 선택했는데 그 아브라함 속에서 누구를 또 선택합니까?
이스마엘을 날리고 그 전에 또 누가 있습니까? 다메섹 엘리에셀이 있고
그다음 이스마엘이 있고, 그다음 이삭이 있고,
그 이삭을 선택했는데 또 누구를 선택합니까? 야곱과 에서가 있는데 야곱을 선택하죠.
그러면 야고보를 선택했는데 또 누구를 선택합니까?
긍휼히 여길 자와 강퍅케 할 자를 또 선택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제 짜증 나죠. 서서히.

‘한 번 선택은 영원한 선택이라 했는데 계속 분화가 되면 어쩌란 말입니까?’
이 말이 나와야 돼요.
왜 이 분노가 쏟아져 나오느냐? 하면
말씀을 대할 때, 하나님의 선택을 대할 때 ‘나의 구원’으로 대했기 때문에 그래요.
선택의 끝 지점이 나의 구원이에요. 나의 구원입니다.

지금 로마서는 그걸 철저하게 깨는 겁니다. 구원이 남으면 안 돼요.
예수님이 “성경은 내게 대해서 전한다” 하면
십자가만 남아야 돼요.

십자가만 남기 때문에,
그 십자가 때문에 이 ‘구원’이라는 것이 만들어진 거예요. 그런데 이 주객이 바뀐다는 겁니다.
바뀌는 자리가 유대교예요.
유대교는 여기까지 따라올 수 있어요.
선택, 선택, 선택, 선택... 다 따라옵니다. 왜냐하면 역사가 그랬잖아요. 맞죠? 아닌가요?
여러분 성경 아시잖아요. 다시 한 번 더 설명할까요?
아브라함으로 선택했죠. 다메섹 엘리에셀 아니었죠.
‘아 그거는 아브라함이 선택한 거고’ 그렇다 칩시다.
그럼 이스마엘? 그것도 그래 아브라함이 했다 칩시다.

그러면 이삭은? 그건 하나님이 약속의 자녀로 낳게 해줬잖아요.
그러면 에서와 야곱은 약속의 자녀의 자녀잖아요. 그 선택이 또 갈라지죠?
그다음 선택이 또 갈라집니다.

왜 갈라졌습니까?
약속을 받고 출애굽했는데 진멸 당했잖아요.
그다음 선지자들이 외쳤는데 안 들었죠. 계속해서 선택이 바뀝니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 없어요. 누구에게? 유대인에게.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자신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지만 세리와 창기는 천국에 못 들어간다고 생각한 거예요.
혈통적 이스라엘이라면 적어도 혈통적 이스라엘뿐만 아니고 그들은 남은 자예요.
세리와 창기가 남은 자인 걸 아십니까? 여러분.
선지자들에 의하면 포로에서 잡혀서 돌아온 자들이에요.

그 남은 자라면 구원받아야 된다라고 생각을 하는데
왜 그들은 구원 못 받는다고 생각하느냐? 하면 구약 역사를 꿰뚫어 보는 거예요.
통찰력이 진짜 탁월합니다. 이 정도는 다 따라온다라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가 뭐냐? 하면
예수님의 이 복음, 십자가 복음을 들은 자들이 이들과 과연 다르냐?라는 거예요. 다를까요?
다르지 않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보는 거예요. 유대인들과 다르지 않아요. 우리가.
왜?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육신을 입은 자들은 유대인들이 했던 그 모든 짓이 다 나옵니다. 무엇 앞에? 복음 앞에.
안 그러면 이렇게 할 필요 없잖아요.
‘목사님 어차피 강퍅케 할 자를 강퍅케 하고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니까
(그다음 뭐예요?) 교회 올 필요가 뭐 있습니까?’
맞죠. 시간 아깝잖아요. 지금 교회 와서 여러분 이렇게 예배드리는 것보다 돈 버는 게 더 낫잖아요.
안 그렇습니까? 학원 여는 게 주님이 마음을 안 주니까 안 열지만, 주일 열면 시간당 얼마입니까?
애들 5명만 오더라도 한 사람당 한 시간에 얼마 받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올 필요가 뭐 있어요?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강퍅케 할 자를 강퍅케 어차피 그럴 건데...
여러분 그런 생각 안 들어요?
‘기도를 왜 합니까? 어차피 주님 뜻대로 할 건데...’ 그런 생각 해보셨죠?
저만 해봤습니까?
‘왜 합니까? 어차피 주님 뜻대로 할 건데...’ 이렇게 비아냥대는 사람들이 많아요. 의외로

주님은 죄인을 부르러 왔는데 죄인이 될 마음이 없는 거예요.
이 마음도 주님이 주셔야 되죠.

이 ‘주권을 믿는다’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강퍅케 할 자를 강퍅케한다”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이제 이런 말은 안 하죠. “그러면 하나님이 어떻게 심판하겠느냐?”
이거는 양심적으로 이야기 못해요. 왜냐하면 자기가 믿으니까.
‘그래도 하나님이 심판할 거야’ 그건 믿죠. 믿으면서 어떻게 행동을 합니까?
방금 말씀드린 대로 ‘기도할 필요가 뭐 있느냐? 복음을 전할 필요가 뭐 있느냐?’
‘어차피 (뭐예요?) 구원할 자 구원하잖아요’
제가 성경에 틀린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맞다니까요. 맞는데 문제가 뭐냐? 하면
그 맞는 말을 마귀도 하고 주님도 하신다라는 거예요.
주님이 맞는 말씀을 하시게 되면 십자가가 나오고
마귀가 맞는 말을 하면 나를 주의 자리로 올리게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11장까지 알아버리면 12장을 무시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자기는 다 안다는 거예요.
지금 11장까지 ‘아는 게 아무 소용없다’고 얘기를 해도
아는 게 아무 소용없는 정도가 아니라 뭐까지 소용없습니까?
아는 걸로 따지면 사도바울보다 아는 사람이 우리 중에 없잖아요. 저도 턱없고요. 비교도 안 됩니다.

그러면 믿음을 따진다면
아브라함의 믿음보다 좋은 사람이 어디 있어요? 믿음의 조상이 아브라함인데.
아무 소용없어요. 믿음도 소용없고 아는 것도 소용없어요.
높은 자리에 앉는 것도 소용없습니다.
그 말씀을 지금 계속해서 하고 계시는데

사람들은 이 로마서 11장까지 말씀을 공부를 하면서 강렬한 지식 체계를 세우는 거예요.
그걸 뭘로 바꿔치기 합니까? 믿음으로 바꿔치기 하는 거예요.
그게 무슨 믿음입니까? 로마서 믿음이 아니잖아요.

허물을 가리우심을 받는 자가 복되다 했잖아요.
그러면 그 말씀에 현장성 속에 있는 자가 성도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 본문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면
‘나 허물의 가리우심을 받았어.’ 해석을 해요. 받았어.
받았으니까 더 이상 그 허물 죄를 용서할 화목 제물은 필요 있습니까? 없습니까?
지금 로마서 9장까지만 와도 화목 제물 필요 있어요? 없어요? 필요 없잖아요.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자들인데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화목 제물로 내어주셔서 어떻게 하셨어요?
우리를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셨잖아요.
의가 되게 하셨으니까 이제 이 모든 것들이 누구의 뜻입니까?
긍휼히 여기시는 분의 뜻이잖아요.

그러면 이 말씀을 이해할 때 이 ‘긍휼히 여기시는 분’ 요 내용과
방금 이 내용이 겹쳐져 있어야 되는데 인간은 동시성이 안 돼요. 문제는.
말씀은 하나거든요. 이게 겹쳐져 있는데
인간들은 이 과정을 지나와 버리니까 그다음 마지막에 남는 게 뭐냐? 하면
지식 덩어리만 남는 겁니다. ‘그래 화목 제물 했지...’

제가 페이스북에 목사님들을 엄청나게 연결해 봤거든요. 글들이 많이 올라오잖아요.
거기에 나름대로 그 사람들이 옳은 이야기를 합니다.
근데 복음 이야기하는 사람을 못 봤어요. 아직까지.
옳은 이야기를 계속하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이 십자가의 현장성을 그들은 현장성으로 보지 못하고
지식으로 보기 때문에 옳은 이야기를 계속하는 거예요. 옳은 이야기를.
그러니까 로마서가 앞부분에는 화목 제물 실컷 이야기하다가
“율법외의 한 의” 이야기하다가
뒤로 가면 뭐가 나오는가? 하면
‘아 모든 만물이 주로 인하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끝나버려요. 이 내용이
로마서 1장 2장, 3장 4장 내용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
만두피가 있다면, 이걸 피라고 할 수 있어요. 만두피인데
이 주의 의미가 이 안쪽에 가득 채워져 있는데 사람들은 안쪽에 들어가면 피곤해요.
그걸 만두피라 하니까 맛있는 걸 생각하지만

여기에 인간을 집어넣어보세요. 온갖 더러운 것들이 다 들어가잖아요.
여러분 복음 알고 난 뒤에 단순하게 살고 싶지 않습니까? 그죠?
단순하게 살고 싶어요. 그게 누구의 꿈이었는가?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꿈이었어요.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로.

근데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도요 지겨워서 못 살아요.
여러분 그거 간단한 문제가 아니에요.
‘아 나한테 돈벼락이 떨어졌으면 좋겠다’ 하는데
돈벼락 떨어진 사람 중에 제대로 사는 사람 몇 프로 없다고 하잖아요. 그죠? 로또 맞은 사람 중에.
왜 그래요? 지루해서 못 살아요.
그래서 조금 머리 좋은 사람은 자기 직장생활 하면서 사는 사람도 있는데...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쓰면서, 물론 주님의 말씀인데
복음을 전할 때마다 반박하는 자들이 계속 튀어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 앞에서는 반박자들이 나와야 돼요.

로마서 3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반박들을 조금 보셔야 되는데 그 과거 이야기가 왜 그렇게 중요하냐? 하면
그게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 이야기거든요.
제가 앞서 좀 말씀드렸지만 2장 28절부터 보면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이렇게 얘기를 했거든요.

이러면, 자 여러분 아브라함 때부터 생각하지 말고, 이 죽은 자 생각하지 말고,
여러분이 유대인이라면 1살부터 50살까지 살았다 칩시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 유대인이라면 남은 자들이잖아요. 남은 자는 구원 받는다 했잖아요.
근데 이제 와서 하는 말이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야’라고 이야기하면
여러분 어떤 생각 들어요? 감정이 공감이 전혀 안 되는 내용인가요?

그러면 우리를 예를 들면 여러분들이 오래 믿은 사람은 10년 20년 믿었는데
복음을 듣기 전에는 다른 복음을 따랐잖아요.
다른 복음을 따랐고 열심히 헌금하고 봉사하고 기도를 다 했는데
‘그것이 믿는 게 아니요’라고 하면 어떤 마음이 듭니까? 감사한 마음이 듭니까? 분노가 생깁니까?

지금 유대인들은요 대대로 이어온 겁니다.
그런데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하고
할례는 마음에 하라고 해요. 이 얘기는 구약에 나와요. 마음의 할례를 하라고.

근데 마음의 할례는 어떻게 하는가? 하면
“성령 안에서만 마음의 할례가 된다”라고 이야기를 해요. 29절에서.

아니 그러면 신명기에서 처음부터 ‘성령으로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된다’라고 했으면
그다음 어떻게 할까요? 사람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규정하는가? 하면
‘나 성령으로 마음의 할례 받았다’고 얘기해요.
순 복음에서 하잖아요. 성령 받았다고 랄랄랄 해가지고...
그거는 순복음에서만 그런 거 하는 게 아니에요. 어떤 집단도 그 얘기를 해요.
그러니까 이 말씀이 저 유대인들 쪽에서 보게 되면 말도 안 되는 말씀이죠.
지금 오늘날 교인들은 이걸 따라 해버리면 되니까.

근데 이들은 철저하게 혈통적 유대인들로 유지된 상태에서 할례를 행했잖아요. 육신의 할례.
그 ‘육신의 할례’라는 것은 이 당시에 굉장히 중요했습니다.
중요했는데 ‘그것이 할례가 아니라’고 하는 거예요.
마치 이런 겁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시간을 내어서 예배를 드리러 왔는데
‘이건 예배가 아니야’라고 해보세요.
그다음 뭐라고 할까요? 그다음 나오는 마음이 뭔가? 하면
‘그러면 내가 미쳤다고 교회를 가?’ 이런 논리가 나올 가능성이 100이면 100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요. 자기가 행한 것에 대해서 인정을 받고 싶어 해요.
그걸 뭐 인정 욕구라 하죠. 한 것에 대해서.
근데 인정 욕구의 문제가 뭐냐? 하면 선악과 때문에 그래요.

선악과의 특징은 뭐냐? 하면요.
내가 뭔가를, 행위를 통하여서 하게 되면
거기에 대한 반드시 대가를 준다라고 생각하는 게 선악과예요.
그것이 율법과 만나게 되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죠.
‘율법은 철저하게 지키면 복을 받고 안 지키면 저주받는다’하니까 선악과하고 딱 맞아떨어져요.
그래서 율법을 주신 거예요. 죄 아래 가두기 위해서.
너희는 선악 구조에서 못 벗어난다. 그게 로마서 이야기잖아요.
“이방인들에게는 양심이 있다” 하잖아요. 양심.

양심이 뭐라 했습니까? 판단자라는 거예요. 양심은.
여러분들이 법이 없어도요. 다 판단을 합니다.
여러분이 외국에만 한번 가보세요. 여러분이 외국에만 가봐도 여러분의 양심이 작동을 합니다.
물론 한국 법을 갖고 작동을 할지 모르지만, 법이 없어도 나름대로 작동을 해요.
어떤 사람은 측은지심, 사양지심 뭐 이런 이야기를 하잖아요.
그게 다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측은지심 없는 사람은 뭐예요? 나쁜 놈.
사양지심이 없는 사람은 교만한 놈. 이렇게 되는 거예요. 판단을 하는 겁니다.

“마음의 할례” 이건 “성령 안에서만 되는 할례가 진짜 할례다” 라고 하면서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이렇게 말을 할 때 ‘나 그거 안다’라고 하지만
“칭찬이 하나님에게서”라고 할 때는
어떤 의미가 담기는가하면 성령 안에서의 마음의 할례는 누가 합니까?
내가 하는 게 아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해서 할례를 하게 하시죠.

그러니 “칭찬은 하나님에게서니라” 할 때 그 칭찬은 누구한테 돌아가는 칭찬이에요?
주께로 돌아가는 칭찬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똑같이 생각해요. ‘아 하나님이 칭찬할 거야.’
똑같이 칭찬할 거라고 생각을 해요. 하나님이 영광 받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재미있는 것은 흥미로운 지점은 “영광받는다.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을 받는다” 할 때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그 영광이 궁극적으로 누구한테 돌아오게 되는가? 하면
자기에게로 돌아와요.

그래서 로마서 11장 끝부분에서 “주로 인하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간다”라고 하는 거예요.
이 차이점이 얼마나 큰가?
이것은 성령이 아니고는 이 차이를 분별을 못하게 돼 있어요.

그 분별 지점은 계속해서 지금 로마서를 통하여서 사건을 발생시키잖아요. 글이 아니에요.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는 현장으로 인도하는 겁니다.
그래서 3절에 나오는 게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이런 식으로 표현을 했지만
제가 좀 다르게 표현할게요.
‘사도바울님 그렇게 말할 것 같으면 유대인의 나음이 뭐고 할례의 유익이 뭐냐?’ 얘기해요.
왜 유대인을 선택했느냐? 이 얘기잖아요.
이럴 것 같으면 차라리 어떻게 살겠다? (우리의 논리에 의하면) 어떻게 살면 돼요?
지금 힘들게 예수 믿을 필요가 뭐 있어요? 교통사고 나고 죽을 때 ‘예수 믿는다’ 해버리든지...
‘어차피 선택할 자는, 천국 보낼 자는 천국 보내는데 어렵게 신앙생활할 필요가 뭐 있습니까요?’
‘왜 이 부딪히는 사람들과 만나야 되고 이런 모임을 해야 됩니까?’

필요가 없잖아요. 유대인들이 얼마나 화가 나겠어요?
지금 몇천 년 동안 이어온 신학이잖아요.
누가 줬어요? 이걸? 할례와 유대인 선택을 누가 했어요?
하나님이 하셔놓고 “그거 아니야”라고 이야기를 해요.
정말 이 정도 대목이 되면 놀라야 되는데 요즘 성도들 워낙 믿음이 좋아서 안 놀라요.
‘그거 당연하지 않습니까?’ 당연한 게 아니라니까요.

이것은 교회 안에서 똑같이 반복이 됩니다.
12 제자가 똑같잖아요. 선택을 했잖아요.
예수님이 선택해서 예수님의 제자라면 반드시 그들을 어떻게 해야 돼요?
‘에이 목사님 하나는 긍휼히 여길 자고 하나는 강퍅케 할 자로 선택했지 않습니까?’
그래 그 얘기를 지금 로마서에서 9장에서 하는 거예요.
근데 그 니가 말하는 그 말이 맞긴 맞는데
그래 그 말을 지금 로마서 9장 앞부분에 한 얘기와 적용해보자. 적용을 해보면 어떻게 돼요?
그것이 앞부분에서 드러났습니까? 안 드러났습니까?
안 드러났죠. 이스라엘이잖아요. 12 제자잖아요.

그런데 12 제자에서 누구는 사랑하고 누구는 미워합니까?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잖아요. 그게 해당되었잖아요.
그게 해당되는데 그 내용을 제자들이 계속 나중에 제자들이 또 복음을 전하잖아요.
복음을 전하면 데마 같은 경우에도 또 떨어져 나가거든요.
이것들이 계속해서 반복이 됩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제자들은 자기 구원의 증인이 아니라
십자가의 증인이기 때문에 그래요.

화가 나죠.
“그러면 유대인의 나음이 뭐냐 할례의 유익이 뭐냐?”
이건 누구 관점에서 보는 거예요? 내 관점에서 보는 겁니다.

근데 우리는 항상 이 생각을 하죠. ‘그러면 나한테 그게 무슨 도움이 되느냐?’
그래서 11장에서 “주로 인하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는 항상
‘나에게 무슨 도움이 되느냐? 나에게 그게 도대체 무슨 이익이 있느냐?’ 이렇게 따져 들어가죠.

3장 5절에도 마찬가지죠. 3장 5절이 진짜 이제 화가 더 나는데 4절부터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시편 51편을 인용했잖아요. 시편 51편은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의롭다 하시고 이기는 방식이 뭐냐? 하면
죄인을 (어떻게 해버립니까?) 꺾으신 뼈로 의롭게 만들어버려요.
이렇게 되면 다윗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 거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을 드러낸 거잖아요.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다면 그다음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가? 하면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은 불의하시다’
여러분 그런 생각 안 듭니까?
지금 로마서를 따라가야 돼요. 진노를 내리라 하는 것이 불의하잖아요. 안 그래요?

아니 불의한 자를 의롭게 해놓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는 의롭다함을 얻으시고 판단받으실 때는 이기려 한다”라고 하니까
이 말씀을 위해서 그렇게 했다하니까
‘하나님은 진짜 우리의 불의가, 다윗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냈으니까
진노를 내리신 하나님은 불의하다’는 거예요.

진노는 누구에게 내려야 됩니까? 죄인에게 내려야 되잖아요.
그러면 다윗은 죄인인데 왜 안 내립니까?
사울과 똑같은 입장인데 왜 다윗은 사랑하고 사울은 미워합니까?

사도 바울은
“결코 그렇지 아니하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리요”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러니까 이 이야기를 알려면 9장 10장 11장까지 넘어가야 돼요.
그런데 수긍을 안 하거든요. 단계별로 수긍을 하긴 하는데 계속해서 반박해요. 반박.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이렇게 비꼬는 거예요. 사람들이.
맞잖아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그러잖아요. 비웃거든요.
‘아 십자가의 피가 구원을 하고, 하나님 뜻대로 한다면, 그 피를 자랑케 하기 위한 복음이라면
나는 (어디로 갈 수 있다?) 천국 갈 수 있다’

복음을 전해야 이런 소리를 들어요. 복음을 안 전하는 사람은 이 소리를 못 듣습니다.
지금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이러한 논리를 갖고 반박을 당하는 거예요.
자기 스스로 지금 말하고 반박하지만
지금 이렇게 반박하는 사람들의 그 수근거림이 모든 인간이 갖고 있는 수근거림이에요.
우리도 이 상황 속으로 가끔 내몰릴 때가 있습니다.
‘내가 미쳤나? 하나님이 진짜 불의하네.’
‘죄인을 구원할 것 같으면 죄만 더 지으면 되지.’ 그렇게 뒤에 나오거든요.

8절에 “또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야 정말...
‘다윗을 본받읍시다’ 어떻게?
‘남의 아내를 빼앗고 그 남편을 죽입시다. 그래야 하나님의 선을 이룰 수 있지 않습니까?’
이 논리가 나오는 거예요.
이런 사람들 적지 않습니다. 복음을 들은 사람들 중에.

제가 중국에 처음에 갔을 때 복음을 전하니까
모일 때는 깔끔해요. 향수도 엄청 뿌리고...
저는 처음에는 몰랐어요. 나중에 안 일이지만
술 잘 먹고 담배에 찌들린 사람들이 교회 올 때 꼭 하는 게
향수 뿌리고 스킨, 로션 듬뿍 뿌린대요. 제가 담배 피우는 사람한테 들었어요. 그 얘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성경 공부 끝나고 맨날 밤에 술 먹으러 간대요.

그러면서 말하는 게 ‘뭐 죄인을 구원하는데...’
‘뭐 정 목사님은 막 살아라 하던데?’ 그때는 제가 전도사였는데.
성령이 없으니까 성령을 쫓을 마음이 없어요.
그러니까 복음이라는 것을 이용해서 내 마음대로 살겠다는 거죠.
로마서에 이게 다 나오는 겁니다.
선을 이루기 위해서 악을 행하자는 거예요.
공부 좀 한 사람들은 이 수준에서 반박을 하죠.

근데 로마서는 이걸로 끝이 아니에요. 3장 9절로 가면
“그러면 어떠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이렇게 들어가요. 우리도 이 범죄에서 벗어납니까? 안 벗어납니까? 못 벗어난다는 얘깁니다.
이 우리가 누구냐? 하면 사도바울을 포함한 모든 성도들이에요.
지금 앞부분에 마치 비아냥거리는 자들이 따로 있는 것 같았는데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아는, 성령을 받은 자들이라고도 볼 수 있고 사도바울은 받았으니까.
받았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는데
성령 받은 사람만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왜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요.
요 이야기를 딱 하면 사람들이 어떤 반론을 하는가? 하면
복음을 안다는 사람은 ‘나는 그렇지 않다’라는 거예요.
‘나는 이렇게 안 비웃고 나는 죄를 짓자라고 말하지 않는다’라는 거예요. 선을 이루기 위해서.
복음 아니까.

근데 사도 바울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가 나으냐? 아니라는 이야기예요.
논리가 이쪽에 있는 자들이 악마이기 때문에
‘어떻게 복음 아는 자들이 악마입니까?’
복음을 아는 자니까 악마임을 알아요.
복음을 모르는 자는 자기를 악마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악한 마귀라고 인정하지 않아요.
이해하시죠?

복음을 모르는 자는 자신을 악마로 절대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이 지금 담대한 이유가 뭐냐? 하면 성령이 함께하기 때문에.
우리가 사도신경 할 때 성령의 교통하심 이야기했잖아요.
성령이 교통하니까 자유롭게 복음을 전하는 거예요.
성령이 교통하니까 이들이 생각할 수 있는 여지가 여기까지 오는 거예요.

저쪽은 ‘선을 이루기 위해서 악을 행하자’라는 주의자들도 있고. 그러니까 이들은 아니라고 쳤잖아요.
그러면 이쪽에 있는 자들은 뭐냐? 하면
‘우리는 그런 마음을 안 먹어요.’
‘그래?’ 그래서 사도바울이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는 겁니다.

그럼 어쩌란 말입니까?
뭘 어쩌란 말이에요? 말씀 앞에 죄인이 되면 자유인이 되잖아요. 이 쉬운 걸...
문제는 자신이 너무 똑똑하다는 거예요.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계속 선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방인의 양심을 이야기하니까 그들이 양심을 우습게 여기잖아요.
그 양심이 우리 속에 그대로 끌려들어옵니다. 복음이라는 걸 갖고.
복음을 갖고 선악을 따지잖아요.
방금도 선을 이루기 위해서 악을 행한다는 자들에게 공격을 했으니까
‘나는 그렇지 않다’라고 주장하면서 자기를 선 쪽에 둔단 말이에요.
선 쪽에 두는 우리도 그렇지 않고 저들과 똑같다라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다시 복음 이야기를 하고요. 그다음에 6장을 봅시다. 6장 1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이제 이 논리가 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왕 노릇하고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은혜가 왕노릇하고” 그러면서

5장 19절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함과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지금 이 말씀의 의미를 어떻게 듣느냐? 하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고 하니까 이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을 못하니까
나오는 게 뭐냐? 하면
‘은혜를 더하기 위해서 죄를 짓자. 더 거하자’라는 논리가 튀어나오는 거예요.

왜냐하면 사도바울은 지금 복음을 전하고 있는데
듣는 당사자들은 계속해서 선악을 구분해요.
무슨 말씀이 옳으냐 그르냐를 계속 따지는 겁니다.
그래서 옳은 게 뭐예요? 논리를 따져봅시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 하면 그다음 나오는 게 뭐예요? 아까 3장에 나왔듯이
‘그러면 은혜를 더하기 위해서 죄에 거하자’라는 논리를 펴는 겁니다.
로마서가 끝나면요. 우리는 숨 막혀 죽어야 돼요.
그게 십자가입니다.

로마서는 그런 게 아니라 복음 자체가 그래요.
성경이 내게 대해서 전한다 하잖아요. 그러면 성경 전체를 보게 되면 우리는 숨 막혀 죽어요.
표현을 그렇게 하는 겁니다. 십자가 아닌 곳이 없기 때문에.
이것까지도 죄고 저것까지도 죄고... 죄 아닌 것이 없어요.

6장 15절 봅시다. 또 넘어가서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성도는 은혜 아래 있다 하거든요.
그럼 법이 없으니까 어떻게 해야 됩니까?
법이 없으니까, 은혜 아래에 있으니까 나오는 논리가 뭐예요?
은혜와 맞물려 있는 이야기가 뭡니까? 자유죠. 예수님이 말하는 자유와 달라요.

은혜 아래 있으니까 이 은혜의 원천이 누굽니까? 화목 제물이죠. 그죠?
그러면 화목 제물을 증거하는 은혜라면
우리는 ‘죄를 짓자’가 아니고 계속해서 죄인으로 드러나야 돼요.
근데 법이 없으니까, 인간들이 갖고 있는 율법 조항이 없으니까 어떻게 삽니까?
우리 오늘날 복음을 듣는 우리들을 보게 되면 법이 없잖아요.
‘십일조가 예수님이 완성이다’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어떻게 합니까?
십일조 안 하죠. 그죠? 여러분 이전에는 열심히 하셨잖아요. 왜 했습니까?
복받으려고 했잖아요.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라고 했기 때문에 했잖아요.

그런데 법이 없으니까 어떻습니까?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나 신천지나 왜 법을 만드는지 아세요?
법이 있으면 죄가 있고요. 법에 따라서 그 사람들이 행한 행위들이 차등이 납니다.
거기만 있는 게 아니고 순복음도 다 있잖아요. 법이.

근데 법이 없어버리면 사람들이 뭐가 없어져요? 기준이 없어지죠.
그러면 성도는 성령이 함께하잖아요. 주님이 동행을 하잖아요.
동행을 하면 죄 아닌 곳이 없죠. 그게 로마서 12장 이후입니다.

죄 아닌 것이 없는데 문제가 뭐냐? 하면
‘법이 없다’라고 하니까 사람들은 ‘그럼 죄 지어도 되겠네.’ 논리가.
십자가가 만만한 게 아니에요.

은혜 아래 있는데 은혜 아래 있으니까 사도바울이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음행하는 자와 술 취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하는 겁니다.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예?
이 말씀에 의하면 몇 프로가 하나님 나라에 못 갑니까?
우리들은 술을 안 마시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마는 목사들 중에도 술 마셔요.
복음을 안다는 사람도 제가 제일 열받은 게 그거거든요.
복음 이야기를 술 마시면서 해요.

‘술을 안 마시면 천국 간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말씀 앞에 책망을 당해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말씀을 말씀이 우리를 숨 막히게 한다 했잖아요. 말씀을 안 읽으니까
안 읽고 로마서 1장에서 11장까지 딱 읽고 답을 딱 낚아채니까 어떤 태도가 나와요?
교만이 나오는 거예요.
오만이 나오는 겁니다.
은혜가 뭔지를 몰라요.

은혜가 뭔지를 모르니까 사도바울같이 스데반 집사님같이 산 사람은 불쌍한 사람일 뿐이에요.
‘어차피 천국 갈 자는 천국 가고 지옥 갈자는 지옥 가는데...’
말씀이 우리한테 매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말씀을 자기 소유화한 거예요.

7장 5절을 봅시다. 여기에 보면 또 반박이 나오거든요.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지금 이것은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이 말씀에 아멘을 못해요.
근데 대부분의 제가 알기로는 목사들이나 신학자들이 이 부분을
계속해서 자꾸 안 믿는 사람에게 적용을 하려고 해요.
안 믿는 사람은 이걸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말씀대로 율법대로 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율법대로 살았잖아요.
율법대로 살 때는 자기가 죄인 줄 압니까? 모릅니까? 모르죠.
성령이 오니까, 진짜 율법이 찾아오니까 어떻습니까?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했다”라는 것을
비로소 아는 겁니다. 그 율법이.
그 모습이 뭐예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게 사는 거예요.

7장 6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이렇게 얘기하니까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율법이 죄냐”
이제 율법에 시비를 거는 거예요. 율법에 시비.
“그럴 수 없다” 라고 하는 거예요.

율법을 주니까 성도 아닌 자는 지금 이 뒤에 나오는 이 말씀,
이 “율법이 탐내지 말라 아니하였으며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이 말은 성령 받은 사람만 아멘을 해요.
상대 쪽에 있는 사람은 탐내지 말라 하면 탐 안 내요.

예를 들어 아까 십일조 얘기했잖아요. 십일조를 해버려요.
해버린 사람에게 그게 탐심임을 몰라요. 그들은.
그런데 율법이 진짜 그에게 들어가 버리면 십일조 한 것이 탐심 중에 탐심이에요.
왜? 주님의 십자가의 완료성을 자기가 지금 뺏어내는 거거든요.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다 주셨는데
뭘 노리고 십일조 합니까? 왜 감사 연금을 해요? 뭘 노리느냐는 거예요.
근데 성도는 노리는 게 없어요. 왜냐하면 모든 게 은혜이기 때문에.
그런데 인간은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노림수가 있어야만 행동에 옮깁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예요.
복음이라는 것이 나에게 유익이 되는 것은 분명한데
그 나에게 유익이 된다는 것을 로마서의 믿음을 갖고 그대로 적용해보면
나에게 유익이 되는데 유익이 하나도 안 돼요. 그게 유익라는 거예요. 복음이라는 게.
제 논리가 과한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교회라는 것이 나에게 유익이 되어야만, 이익이 되어야만 온다라는 겁니다.
그 예수님을 왜 버립니까? 왜 버려요? 이익이 안 되니까 버리는 거예요.
십자가는 이익이 안 돼요.

7장 13절을 봅시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니라” 말씀이 되게 어렵습니다.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래놓고 “나를 죽게 만들었다” 이 이야기를 해요.
죽음 이야기를 두 가지로 이야기해요.
그러니까 죽게 만들었는데 죽게 만들었고, 사망이 안 되었다라는 거예요.

그 앞에 논리에 의하면 ‘선한 것이 나를 죽게 만들었다’고 해놓고 ‘나는 죽었다’ 이야기해요.
‘죽게 만들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상대에게 계속해서 시비를 거는 겁니다.
이제 그다음 나오는 게 9장 14절인데요. 조금 더 봅시다.
9장 14절 지난 시간에 본 거죠.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이제 이 시비가 나온 거죠. ‘하나님이 불의하다’
화가 난 겁니다. 이제.

앞부분에 나온 것과 똑같아요.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판결 자체가 문제가 있지 않느냐?’ 이거예요.
지금 논리가 한 번 말씀하셨는데
선택, 또 다른 선택, 또 다른 선택, 또 다른 선택으로 계속 바뀌었잖아요.

지금 오늘 이 설교하면 제가 이단이 돼요.
왜냐하면 지금 기존 신학에서 말하는 선택은 불변하는 선택이거든요.
그래서 이단으로 고소하면 좋겠어요.
복음을 전할 기회가 생기거든요.

근데 자기들도 알아요. 아니까 공격을 못해요.
역사가 증명하잖아요.
만일에 그런 논리라면 어디까지 올라가야 되는가? 하면 하나님이 창조했으면 버리면 안 돼요.
아담과 하와를 구원했잖아요. 그러면 그 아들들 가인을 지옥 보내면 안 돼요.
오죽하면 바르트가 ‘다 구원한다’ 이런 논리로 가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사람은 천재예요.
성경을 보면서 어쨌든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보는데 문제가 뭐냐? 하면
그걸 은혜로 봐야 되는데, 성경을 통해서 봐야 되는데
그걸 학문으로 본 거예요. 논리로.

논리에 매이기 시작하면요. 인간의 논리로 복음을 끌고 와요.
“모든 것이 주로 말미암고 주로 돌아간다” 그러면 주님께 영광이 되잖아요.
그러면 이 주라는 분은 십자가 지신 주님이거든요.
십자가가 나타나는 것으로 하나님이 영광을 다 받는데
이걸 그렇게 받으려면 지옥이 영원해야 되는데 여기에 또 어디로 가버립니까?
‘지옥은 영원하면 안 된다’ 존 스타트가 그런 얘기하거든요.
우리 대학 다닐 때 엄청 유명했어요. 맞죠? 그렇죠? 우리 다 읽어봤잖아요. 그때 신앙생활한 사람.
자기 누나인가 여동생이 안 믿고 죽으니까 고민이 생긴 거예요. 얼마나 웃깁니까?
말씀이 중심이어야 되는데 자기 주변이 우선이에요.
아마 그런 사람 엄청 많습니다. 처음에는 말씀 말씀해놓고 주변 상황이 발생하면요.
말씀을 어디로 끌고 가는가? 하면
자기 현장 속으로 끌고 와서 거기서 다 해석을 해요.

주의 영광을 사람의 영광으로 바꿔치기 한 거고
주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오해한 거예요. 이 십자가의 영광이 주님의 영광인데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보는 거예요. 하나님의 영광.
그러니까 하나님을 부인할 수 있어야 되는데 하나님을 부인을 못해요.

하나님은 자신을 부인했거든요.
아들을 통해서 계시하셨잖아요. 이것을 말씀하는 순간
‘나는 유일한 하나인 하나님이라’는 이 선언이 깨집니다. 왜 깨어져야 됩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으면 깨어져야 됩니까? 안 깨어져야 됩니까?
사람들이 바보 같아요. 심히 좋았잖아요. 사람을 만들었을 때.

그러면 심히 좋았다면 그게 지속이 돼야 돼요? 깨져야 돼요? 똑같은 논리잖아요.
심히 보시기에 좋았다면,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라면 그걸 깨야 돼요? 안 깨야 돼요?
왜 깨는지 아시죠? 왜 깨는지 아시죠?

그 이유는 선악과를 먹은 자들이 악마의 지배를 받았잖아요.
악마가 어디에서 왔습니까? 하늘에서 왔죠.
하늘에서 온 악마는 하나님을 알아요? 몰라요? 나름대로 알고 있어요. 근데 누구를 몰라요?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몰라요. 그게 욥기예요.

욥기도 마찬가지예요.
자기가 하는 짓이 무슨 짓인지 몰라요. 그 하나님 상에 대해서 다 끄집어내야 돼요.
그래야만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이 유일한 주님으로서 영광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진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그러한 영광의 자리로 가기 때문에 그래요.

이제 오늘 본문으로 가서 이제 나오는 게 또 그러죠. 롬 9: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 하시느뇨”
이거 좀 어려운 단어인데 ‘우리를 비판하면서 판단을 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이제 끝장까지 오는 거예요. 거의 이제.
옛날에 노무현 대통령이 그랬잖아요. ‘이제 이 정도 되면 막가자는 말입니까?’
이게 막 가자는 말이에요. 지금. 논리가 맞잖아요.
누가 대적하고 그러면 하나님에 대해서 여기에 보면

“하나님이 어찌해서 심판할 수 있고” 심판이 불가능하죠.
모든 것이 어떻게 됩니까? 논리 흐름이?
인간이 선택할 여지를 하나도 안 주잖아요. 이 지금 흐름을 보게 되면.

그리고 심지어는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잖아요.
이 말을 하는 이유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그럼 우리는 뭐냐?’ 이거예요.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우리가 로봇입니까?’
자기가 로봇이 아닌데 자꾸 로봇이라고 해요.

이제 AI가 발달하니까 이제 진짜 자기를 로봇으로 규정하죠. 그런 거 안 봅니까?
AI가 발달하니까 사람들이 어떤 상상을 합니까?
인류 문명이 워낙 발달을 해가지고
AI와 이제 뉴럴링크가 연결이 된 인간이 신의 자리에 도달을 해가지고
‘뉴럴링크’가 뭔지 알죠? 제가 어제 영화를 우연히 한번 봤는데 흥미진진합니다.
뉴럴링크가 걸리면 이 기계와 나가 하나가 되어서 상호 호환이 일어나가지고
시너지 효과가 한 10배 정도가 아니고 몇천 배로 올라가요.

그 신의 경지에 올라가는 겁니다. 그런 인간이 지구를 만들었다는 거예요.
그런 걸 믿는 사람이 있잖아요. 톰 크루즈입니까? 그걸 믿잖아요.
물론 가입비는 꽤 셉니다. 1단계 올라가려면 최소한 천만 원,
한 5단계 가려면 최소한 한 10억 한 100억 정도 내야 돼요. 모든 이단들이 다 동일합니다.

복음의 이 단계를 왜 자꾸 두느냐? 하면
인간들은 뭔가 신비한 것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신비한 것을 둬야만 그 조직에 머물게 돼요. 신비한 것을 둬야만.

그래서 복음이라는 것이 왜 인기가 없느냐? 하면
복음은 신비한 게 없고요. 없어요. 처음부터 다 까발려버렸습니다.

지금 20절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하나님을 책망하느냐 이 얘기죠. 이 말씀이 진짜 어려운 게
이제 제일 어려운 지점에 도달했습니다. 뒤에 가면 또 더 어렵지만.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뇨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이 없느냐”
여기까지 보게 되면 우리는 어떤 논리에 딱 막혀 있느냐? 하면
귀히 쓸 것, 천히 있을 것. 이 논리에 막혀 있잖아요.
근데 사도바울이 말하는 게 지금 이 이야기를 하는 겁니까?
아니면 앞부분의 내용의 선택의, 선택의, 선택의 선택을 이야기하는 겁니까?
앞부분을 이야기하는 거죠.

앞부분의 내용을 갖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걸 두고 “귀히 쓸 그릇, 천히 쓸 그릇” 이야기해요.
근데 우리는 이걸 볼 때 어떻게 들어가는가? 하면
‘처음부터 귀히 쓸 걸 만들었다. 처음부터 천히 쓸 걸 만들었다’ 이렇게 들어가요.
근데 그 말이 맞습니까? 틀립니까?
맞아요. 아~ 정말 이게 어려운 거예요.

아니 틀렸다 해버리면 우리가 문제가 뭐가 되느냐? 하면
틀렸다 해버리면 사람들은 제 설교가 다 녹취가 되잖아요. 그거를 또 낚아채요. 정답을 찾기 때문에.
그 말이 맞다니까요.
창세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한 자는 반드시 구원을 합니다.
그리고 빌립보서에 보면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반드시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루어요”
그거 못하는 주님이 아니에요. 언약은 불변하기 때문에.

문제는 이 언약의 말씀을 나의 소유로 갖고 오는 순간 악마의 말이 돼요.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이 그걸 갖고 오는 순간 인간의 말로 바뀌어버립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라고 했잖아요.
그러면 모든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의 활동으로 봐야 되는데
인간들은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말씀을 주셨으니까 그 말씀을 다시 뭘로 바꿉니까?
말로 다 바꿔버려요. 그게 신학이에요.

사도 바울이 이 “귀히 여길 그릇, 천히 여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겠느냐?” 그러면
모든 사람이 신을 인정하거든요.
‘다 믿지요.’
‘그래 믿은 그 믿음을 유대인들을 통해서 한번 뚫고 들어가 볼까?’ 들어가 보니까 어떻습니까?
이스라엘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아브라함의 씨가 다 아브라함의 씨가 아니요
약속의 자녀가 다 약속의 자녀인 건 맞다라고 인정을 하면서
그다음 사실은 말이 나와야 되거든요.

근데 사도바울이 왜 그 얘기를 하지 않느냐? 하면
약속의 씨라야 약속의 자녀다라는 이야기는 예수님과 직결이 되기 때문에
그다음 하는 말이 약속의 씨라도 다 약속의 자녀가 아니라는 얘기를 안 하는 거예요.
그 얘기는 이미 앞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라는 겁니다.

이 내용이 뭐냐? 하면
귀히 쓸 그릇, 천히 쓸 그릇을 만들었다는 얘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갖고 있는 논리와 너무 다르잖아요.

우리는 처음부터 귀히 쓸 그릇이라면 처음부터 귀히 만들어야 되는데
뒤에 나오는 내용이 뭐냐? 하면
처음에는 천히 쓸 그릇이었다는 거예요.
천히 쓸 그릇이었는데 하나님의 영광과 긍휼을 나타내기 위해서
귀히 쓸 그릇으로 바꿔버렸다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천히 쓸 그릇은 천히 쓸 그릇으로 만들고 귀히 쓸 것은 귀히 쓸 그릇으로 만들었다’라는
복음이에요. 이 십자가 복음 앞에
누가 ‘하나님 제가 복음을 알겠습니다. 이제 믿겠습니다’ 설 수 있느냐? 이 얘기예요.
없다는 이야기를 로마서 4장에서 하는 겁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을 이야기하면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야기하면서 하필 창세기 몇 장을 갖고 옵니까?
이삭을 바친 장면을 안 갖고 오잖아요. 제가 로마서 5장 할 때 했잖아요. 어디를 갖고 옵니까?
15장을 갖고 오잖아요. 15장 맞죠?
아브라함이 믿으매 의로 여겼는데 그 믿은 이후에 뭐라 합니까?
하갈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낳고. 이런 모습이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믿음이 있어야 돼요. 없으면 안 돼요. 자꾸 답을 찾기 때문에.
믿음이 있어야 되는데, 우리도 지금 복음을 듣잖아요. 그러면 알아요.
아는데 ‘난 아무것도 모릅니다’ 이러면 이거보다 교만한 게 없어요.
왜냐하면 노림수가 다 보이기 때문에.

그래요. 믿음이 있어요. 여러분 다 믿음이 있잖아요.
그런데 믿음이 있는데 이 믿음은 가짜 믿음이라는 겁니다.
진짜 믿음은 아들의 죽으심입니다.
그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십자가의 증인으로서 사망에서 생명을 옮긴 겁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하나는 천히 쓸 그릇, 하나는 귀히 쓸 그릇’ 이것을 이야기를 할 때
유대교 식으로 이야기하면 안 돼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선택한 선민이잖아요.
그 방식이 무너진 게 지금 로마서 9장 19절 이하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구약을 모르면 지금 로마서 자체가 해석이 안 돼요.
제가 설교할 때마다 마태복음 할 때 그랬잖아요.
바리새인과 서기관, 유대인들의 신학을 목사들이 모른다 했잖아요.
모르니까 오늘날 교회가 유대교라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가능하면 페이스북에 예수 믿는 사람을, 연결을 쭉 한번 해보세요.
그 사람들 글들을 보시고 한번 보시란 말이에요.
인터넷 들어가면 귀찮으니까 그냥 올라오잖아요 계속.
그들이 십자가의 피 흘림 중심으로 설명하는 사람은 없어요.
기껏해야 십자가의 피로 구원 이야기를 해요.
그리고는 대부분 목사라는 사람들은 하나님 이야기를 합니다. 왜? 그래야 페이스북 친구가 많아져요.
그래야 후원이 들어와요.

롬9:22절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야~ 충격적이죠)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지금 이렇게 넘어가니까 옛날 성경은 헷갈리는 게 뭐냐? 하면
진노의 그릇 따로 있고 긍휼의 그릇 따로 있고 이야기하는데
지금 이게 연결돼 있어요.
본래 하나님께서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시고자 하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은 대상이 누구냐? 하면
뒤에 보면 이들이 ‘우리’라 해요. 우리.

사도 바울이 그 이야기하거든요. 24절에 보면 “이 그릇은 우리니”
이 그릇은 어떤 그릇입니까?
긍휼과 진노가 같이 담겨 있는 긍휼의 그릇.
그러면 그 긍휼의 그릇은 진노와 긍휼이 같이 담겨 있어요.

논리가 어마어마하죠. 신학적으로 탄탄하게 깔았습니다.
왜 유대교가 중요하냐? 하면
유대교 신학이 구원론이거든요.
그러면 복음을 들은 자들도 신학을 어떻게 형성하느냐? 하면 구원론으로 형성을 해요.
그러면 구원에 대한 확신만 생기면 사람들은 자유인이 돼요.
그래서 구원파가 활개를 치는 겁니다.

‘언제 믿었어? 몇 시에 믿었어?’라고 물으면 당황하잖아요. 안 그렇습니까? 당황 안 해봤습니까?
‘당신 구원받았습니까?’ 이래 물으면 당황하잖아요.

그거 왜 당황하는가? 하면
모든 인간들이 구원을 갈망하기 때문에 그래요. 구원을 갈망하기 때문에.
근데 그들에게 ‘당신 구원받았어?’ 물을 때 ‘도를 아십니까?’ 그러지 말고
‘십자가의 도를 아십니까?’ 이렇게 물어보세요.
도를 아십니까? 묻는 사람에게 거꾸로 ‘십자가의 도를 아십니까?’ 라고 한번 물어보세요.
당황할 겁니다.

십자가의 도는 도를 소개해가지고 사람을 어디로 끌고 갑니까? 결국은 자기 행복인데 망합니다.
근데 십자가의 도는 원래 망하게 돼 있어요.
‘네 인생의 자리가 복받은 자리야. 십자가의 피가 우리의 죄를 용서했으니까.
그 피를 증거하기 위해서.’
지금 사도바울이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이 두 구절.

저도 이 본문을 많이 읽었지만 워낙 우리가 프레임에 갇혀 있거든요. ‘신학’이라는 프레임.
선택 교리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안 보였어요.
이렇게 되면 ‘목사님 그러면 구원이 왔다 갔다 할 수 있습니까? 이거는 완전히 행위론자하고 똑같은 거 아닙니까?’
천만의 말씀이에요. 지금
행위론자들이 있잖아요. ‘믿어야 구원 얻는다’는 자들은 더 악한 자들이에요.
근데 그 더 악한 자들보다 더 악한 자들이 이 진리를 믿는 자들입니다.
구원, 선택, 하나님의 선택,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자들이 더 악한 자들이에요.

왜냐하면 이들은 믿어버리기 때문에 십자가 자체를 완전히 삭제해버립니다.
그래서 항상 복음 이야기하면 뭐라고 하는가? 하면
‘아직도 십자가냐?’ 이야기해요.

여러분 십자가 이야기해 보세요.
‘난 그거 뗐다’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목사님들 만날 일이 별로 없잖아요. 목사들 만나면 ‘아직도 그 자리에 있니?’
그럼 지는 어느 자리에 있는가? 하면요.
사례 잘 나오고 좋은 차 타고 퇴직금 나오는...
우리 나이 때는 거의 다 이제 담임 목사니까 노회장 되고 이제 조금 있으면 총회장 되는,
이제 동기들이 그런 나이거든요.

‘아직까지 십자가냐?’ 할 때
‘니는 그럼 뭐냐?’ 물으면 ‘나는 교인 200명이다.’
‘내가 개척교회 한 지 한 10년 됐는데 교인 500명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지금
말씀의 깊이 속으로 들어간 성도들입니다. 이게 성도들에게 하는 편지니까.
성도들이 이 악마가 옆에서 어디까지 속삭이는 지를 유대인들을 통해서 낱낱이 밝혀주는 거예요.
근데 이걸 ‘나 안다’라고 하는 사람은 깨닫지 못해요.

제 설교를 듣는 사람이 뭐 한 100명은 되거든요.
근데 제가 염려하는 게 그거예요. 설교를 들을 때는요. 일단 현장에서 들어야 되고
유튜브로 듣는 분들한테 제가 말씀드리는데
유튜브로 들으려면 설교 현장에서 듣듯이 들어보세요.
차 타고 듣는 사람은요. 설교 들었다고 말하면 안 돼요.
왜냐하면 안 들리기 때문에 그래요. 듣고 싶은 거만 들어요. 그거라도 들으면 좋긴 좋은데...
제가 적지 않은 사람을 만나봤어요. 그분들도 이야기를 해요.
다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직접 들어보니까 전혀 다른 이야기인 거예요.

사람은 자기가 아는 것만 듣고요.
자기가 싫어하는 것만 귀에 쏙쏙 들어와요.
그리고 이런 본문들도 답을 갖고 읽으니까 천만 번 읽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답을 갖고 읽으니까.

그래서 지금 사도 바울이 시비 거는 자들에게 시비 못 걸게 만들어버립니다.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심판을 하고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철저하게 하나님은 뭘 보이고자 하기 위해서입니까?
오래 참으심을 보이고자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심판을 드러내기 위해서
지금 너희들이 생각하는 구원을 주지 않는다라는 거예요.

그러면 성도에게 남아야 되는 건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핍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죄를 드러내는 거예요.
‘너 이거 알지? 이거 알아야 돼. 이거 알겠지? 이거보다 더 높은 수준에 가야 돼.’
수준에 가봤자 반박밖에 안 나와요.
반박이 나오고 그냥 ‘내가 믿는다’밖에 안 나와요.
지금 그 내용을 로마서에서 다 담아놨습니다.

그래서 지금 긴 시간 동안 반박하는 내용들을 제가 몇 구절을 살펴봤잖아요.
그러한 반박들이 우리 속에 그대로 내재돼 있어요.
근데 이것이 순서적이 아니라 뒤죽박죽이 됩니다. 왔다 갔다도 해요.
그런데 최종적으로는 사도 바울이 뭘로 가버립니까?

11장을 먼저 보게 되면 끝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십자가 지신 주님께 영광을 세세에 돌리기 위한 화목 제물 되심이라는 거예요.

다시 한 번 22절 23절 읽고 마치겠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그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이라 하면 천국 가야 됩니까? 지옥 가야 됩니까?
지옥 가야 되죠.
그런데 이게 다 뒤집어지잖아요.

왜냐하면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는데
이 말씀을 말씀 되게 하기 위해서 고스란히 누구한테 적용시킵니까?
야곱에게 야곱의 자손인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적용을 시켜버려요.
그래서 말씀만 남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말씀을 남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남기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진노의 그릇이라면 지옥 가야 되는데
놀랍게도 관용을 알게 하여서 참고 기다렸다가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긍휼의 그릇으로 바꿔버린 거예요.
그게 사도바울인 거예요.

사도바울도 지금 여기에 해당되잖아요. 주님을 공격하고 핍박하고 미워했잖아요.
그러면 진노의 그릇 맞죠. 근데 이 진노의 그릇을 왜 그렇게 만들었냐?
하나님의 그 관용하심, 사랑의 부요함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인내하심이 어떠한가를 알게 하기 위해서
그 진노의 그릇을 참으셨다가 때가 되매 긍휼의 그릇으로 바꿨다라는 겁니다.
그러니 너희들의 신학을 갖고, 성경을 배운 걸 갖고
주님이 지금도 살아계셔서 하는 일, 히브리서에 의하면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살아계시잖아요.
그분이 하시는 일을 너희들이 낚아채지 말라는 거예요.

성경은 구원론이 아니에요.
십자가 지신 주님만을 남기기 위한 복음입니다.
이게 우리에게 진짜 기쁜 소식이에요.

기도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까지 인간이 만든 신학에 얽매였기에
지금도 친히 살아계셔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을 우리 가운데 친히 행하고 계심을 놓쳐버렸습니다.
주님 저희들을 긍휼히 여기시사 십자가의 피 공로, 그 사랑만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를 말씀의 사람으로, 말씀의 자리로 인도하심을 감사하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말씀 안에서 날마다 우리 자신이 부정당하며 삶의 현장 속에서
십자가만 자랑하기를 소원하는 주의 백성에게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