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4-06-02 17:38
20240602,로마서 강해 68강 롬 9:24-26 내 백성 아니라 한 곳에서 내 백성이라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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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4-06-02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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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2 로마서강해 68강 롬 9:24-26 내 백성 아니라 한 곳에서 내 백성이라

하나님 말씀, 로마서 9장 24절에서 26절 말씀을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롬9:24~26)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아멘

“이 그릇은 우리라”라고 하면 ‘내가 이 그릇이다’ 사람들은 이 말을 하고 싶어요.
사도바울이 “이 그릇은 우리라”고 할 때는요. 누가 봐도 사도 바울의 이야기지만
이것이 계시가 될 경우에는 주님의 말씀으로 바뀌어버립니다.
목사들이나 나름대로 말씀을 깨달았다라고 하는 사람들이
‘우리가, 내가 이 그릇이다’라고 주장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요.

제가 최근에 페이스북을 하는데 흥미진진한 논쟁을 했는데요.
그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해요. 자기가 계시를 받았다고.
그러니 ‘나는 참 선지자니까...’ 자기가 참 선지자라는 말은 ‘당신은 (누구라고요?) 거짓 선지자’
자기도 무슨 말 하는지도 몰라요. 제가 보기에는.

자기가 참 선지자라는 말을 하는 순간
‘너그들은 다 거짓 선지자야.’ 그러니 ‘너희들은 내 말을 들으라’는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 복음의 실체’라는 책을 썼어요. 그 사람이.
흥미진진하죠. 내용을 들여다보면요. 기존 교회의 잘못된 것들을 다 지적을 해요. 다는 아니지만
옳음을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성경 해석도 나름대로 웬만한 목사들보다 뛰어나요.
신천지도 웬만한 목사들보다 다 뛰어나잖아요.

그런데 제가 그 책을 읽고 이제 댓글을 여러 개를 달았는데
‘당신은 유대교랑 똑같다’라고 얘기했어요. 말귀를 못 알아들어요.
왜냐하면 자기가 계시를 받았기 때문에 계시를 받았다는 자들의 특징이 뭘 주장하느냐? 하면
자신의 옳음을 주장해요.

그런데 자신의 옳음을 주장하는 것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장로교회도 있고 감리교회도 있고 순복음도 있고 신천지도 있고 옛날에 또 누가 있어요?
박옥수도 있고 또 누굽니까? 박태선도 있고 박태선의 후예들이 새끼를 많이 쳤잖아요. 정명석도 있고.
이들의 공통점이 뭐냐? 하면 구원이에요.

그래서 이 사람이 복음을 뭘로 정의 내리느냐? 하면
기존에는 복음을 나름대로 십자가의 피로 용서받은 것을 복음이라고 하는데
이 사람은 영생을 복음이라 해요. 수상하죠.
그냥 아마추어들이 그 말을 들으면 신기롭게 보잖아요.
왜냐하면 틀린 것을 지적을 하고 성경 본문을 나름대로 옳게 해석을 하기 때문에.

지금 로마서에 들어오면요. 십자가 복음의 실체를 아는 자들에게 로마서를 쓴 거고요.
신구약 전체가 복음을 아는 자에게 썼습니다.
그러면 다 알고 있는데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이야기입니다. 다 알고 있는데.
왜 할까요?
인간은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 방식이 마귀가 원했거든요.
‘니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기적을 행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니까 ‘야 진짜 그리스도다’라고 박수를 치면서 따라다니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 진다고 하니까 다 떠나가죠.
그러니 기적 보고 믿었던 인간들은 다 저거 아비가 누구라고요? 마귀라는 거잖아요.
방금 언급했던 그 사람은 그것도 몰라요. 자기가 (공개적으로 얘기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카페가 있는데 거기에 추종자들이 수만 명이 있다라는 거예요. 거기에서 내가 많은 기적도 보이고...
기적 보여서 뭘 이야기하는 거예요?
영생이 얻는 길을 제시하는 것은요. 누가 그 짓을 합니까?
그 영생이 끝일까요? 영생을 얻는 것을 원한다라는 것은
인간이 갖고 있는 그 영생이 예수님을 살해했다라는 것을 몰라요.
그 영생 안에는 자기가 꿈꾸는 천국이 따로 있어요.

옳은 지식을 갖고 ‘이것이 진리야’
그 옳은 지식을 주장하는 자들의 특징이, 저도 그 특징 속에 들어가지만
아닌 것에 대한 비판을 정말 잘해요. 성경적으로.
본문을 갖고 그 옳다는 것을 변증을 해요. 그 사람 해석을 제가 다 인정하는 건 아닌데
나름대로 옳은 것도 있어요.

그러면 초자들이 보게 되면
‘야 신기하다 정말 신비롭게 해석하지 않느냐’ 뭐 이렇게 들어가는 거예요. 논리가.
문제가 뭐냐? 하면 이런 거죠. ‘내 말 들으라’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댓글을 달았습니다. 당신처럼 주장하는 자가 신천지 교주라고.
그래서 내가 썼어요. 없어지지 않을 SNS잖아요. SNS라고 합니까?
당신의 이름을 단 종교가 하나 생길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자신이 십자가 안 졌다 했어요.
어디 십자가 지지 않는 인간이 내 말을 들으라고 해요?
우리는 이 말이 교인들에게 먹혀요.
왜냐하면 교회에서 목사들이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심심하면 그러잖아요.
‘내가 주님께 기도하는 가운데 주께서 나에게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이 얘기를 대형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다 들어봤거든요.
그게 익숙한데 그걸 갖고 와서, 그 멘트를 갖고 와서
기존의 잘못된 것들을 지적하고 교회 안에 불만 불평자들이 가득 있잖아요.
부조리한 것들이 있으니까 그걸 지적하면서 옳은 이야기를 하니까
‘야 이 목사님이, 이 사람이 진짜 참 선지자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따라 나섭니까?
그들이나 이들이나 뭐가 달라요? 뭘 부정합니까?
주님이 지금도 살아계셔서 친히 일하심을 부정해요.

그래서 댓글에 있었어요.
주님이 복음을 깨닫게 하는데 내가 깨달았으니까,
내가 참 선지자니까 지적을 하니까 니가 들으라는 거예요.
말은 비슷하잖아요.

이 사람이 뭘 모르느냐? 하면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갔을 때 지적을 해도 못 알아들었어요.
‘그러면 다이렉트로 지적하면 안 알아듣느냐?’ 천만에요.
예수님이 직접 와서 지적해도 못 알아들었어요. 예수님은 참 선지자잖아요.
참 선지자가 이야기해도 못 알아듣는데 무슨 수로 깨달아요?

이걸 ‘듣고 깨닫는다’라고 할 때 이 ‘깨닫는다’라는 의미는
우리가 로마서를 이야기할 때 우리가 갖고 있는 깨달음과 전혀 다른 깨달음인 거예요.
같은 용어지만. 못 깨닫잖아요.

성령을 받게 되니까 깨닫는 게 아니라 뭐가 돼요? 죄인이 되죠. 죄인이.
그러면서 뭘 자랑합니까? 십자가를 자랑해요.
사도들이, 복음 들은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면서
‘야 내가 진짜 참 선지자니까 내 말 들어. 안 들으면 너 하나님을 대적하는 거야.’
이런 소리 했습니까?
자기도 지금 복음을 전한 후에 버림을 받을까 덜덜 뜬 사람이 누구입니까?
사도바울이에요.

그러면 또 자기가 참 선지자라고 하는 사람은 이렇게 얘기할 겁니다.
‘사도바울은 수준이 낮아서 그렇다’
계시를 자기가 만드는 거예요. 계시를 자기가 추구하는 겁니다.

왜 성경에서 “더하거나 빼면 생명책에서 이름을 지운다”라고 했는지를 모르는 거예요.
더하고 빼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기를 숭배하기 위해서예요.
그게 바리새인들의 성경 해석법이고 사두개인의 성경 해석법이에요.
마태복음 강의할 때 제가 설교를 했잖아요.
더하고 빼면 나를 숭배하기 위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구약에서는 구약을 연구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말씀대로 해석했거든요.
또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떻게 말씀대로 해석합니까? 그들이 예수님을 죽였지 않습니까?’
이 단계로 바로 넘어오면 안 돼요.
바로 넘어가버리면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가? 하면
그 논리를 갖고 그대로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그들이
그 속에, 패러다임에 갇혀 있다라는 것을 모르는 겁니다.

제가 그래서 글을 썼어요.
‘바리새인들이 성경대로 해석해서 예수님을 살해했다.’ 이거 못 알아들어요.
그 사람의 논리가 뭔가? 하면 ‘성경대로 해석 못 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요한복음 책에서 이야기했잖아요.
우리는 다 니고데모 수준을 다 뛰어넘어요.
신천지에 다니든 어디를 다니든 다 니고데모 수준을 뛰어넘잖아요.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
다 뛰어넘었잖아요. 그러면 여러분은 육으로 났습니까? 영으로 났습니까?

이거는 예수 안 믿어도 성경에 보면 다 나와요.
‘이 니고데모는 육으로 났네. 그러니까 인자가 달려야 한다. 그 십자가를 안 믿었네.’
그러면 그걸 믿으면 영으로 나는 겁니까?
영으로 나지만 나는 것이 아니에요.

왜 주님은 이렇게 말씀을 복잡게 말씀하시느냐? 하면요.
인간은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참된 지식을 자기 소유로 갖게 되면 그때부터는 뭘 제거하는가? 하면
십자가를 제거해버려요.
그때부터는 지식, 참된 지식을 끌어당겨서
‘이게 참 진리야. 이게 참 생명이야.’라는 것을 주장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로마서 9장을 읽어보면 8장에서 7장에서 이렇게 넘어오게 되면
인간이 갖고 있는 참지식을 주님이 허용합니까? 안 합니까? 허용하지 않아요.
아까 그 사람도 주장하는 게 뭔가? 하면
“세상의 지혜를 다 어리석게 한다” 고린도전서에 나오잖아요.
그러면 그 세상의 모든 지혜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자기도 이야기하거든요. ‘성경은 엉터리다.’ 그러면 그 말 속에 이 엉터리라는 말이
성경 자체가 엉터리라는 게 아니라 기존의 해석이 엉터리라는 건데

그러면 자기가 옳게 해석한 것도 뭐가 되죠? 지식 속에 들어가잖아요.
논리적 사고를 좀 따라와주셔야 되죠. 그게 지식이에요.
그래서 십자가의 지혜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십자가의 지혜를 지식으로 도배를 해버리면
사람들이 그 말씀을 들을 때 신비롭고 알아듣고 이해가 되잖아요. 논리적으로.
여러분이 기존 교회에 있을 때는 이 십자가의 지식이라는 것이 복음처럼 들리는 게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 속에 들어오면 이것이 제대로 된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되기 시작하면 차근차근 쌓여요.
이 지식이 안 쌓일 수가 없어요. 인간이 육이기 때문에.

그러면 그 지식을 갖고 와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십자가 지혜를 대체하는 거예요.
마치 기존 신학이 로마 카톨릭도 마찬가지고 기존 신학이 성령의 일을 뭘로 대체해버렸습니까?
말씀으로 대체해버렸잖아요.
근데 말씀을 다 뭘로 만들었어요? 교리와 조직 신학으로 만들어버렸죠. 그걸로 다 대체한 거예요.

그 카톨릭이나 개신교나 공통점이 뭐냐? 하면
성령을 인정한다 해놓고 성령을 부정하는 거예요.
‘아이 누가 성경을 부정합니까? 다 인정하죠.’
인정을 한다면 인정하는 게 뭔 소용이 있어요? 귀신들도 하나님을 알고 두렵고 떠는데.

성령이 내 마음대로 작동합니까? 여러분.
여러분이 성령이 함께하시잖아요.
그러면 ‘내가 말씀을 듣고 죄를 깨달아야지’ 해가지고 말씀을 깨닫는 게 그게 죄입니까?
자기 소유로 갖고 오는 순간 모든 것이 뭘로 바뀌어요? ‘나의 의’로 바뀌어집니다.
‘그러면 목사님 그거 하지 말까요?’
안 하면 뭐 할 거예요? 성경도 안 보고.

인간이 갖고 있는 논리는 어떻게든지 죄인이 될 마음은 없고 자기가 파산될 마음은 없고
계속해서 견고하게 세워지려고 한다는 거예요.

남을, 교회를, 기존 기성교회를 비판하면 얼마나 신이 납니까?
근데 그 비판하는 내용이 우리에게 똑같이 해당이 되거든요.
인간은 육을 잊고 있기 때문에 그 구조에서 못 벗어나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그 얘기를 한 겁니다. 내가 복음을 전한 후에 버림을 당할까봐 벌벌 떠는 거예요.
구원파들은 뭐라 하겠어요? ‘아이고~ 믿음도 없다.’ 로마서도 모르는 겁니다.

‘O월 O일 날 구원 얻었으면 더 이상 내가 무슨 짓을 하든지 주님이 다 용서하신다.’
그 말은 맞다니까요. 마귀가 한 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어요.
마태복음 4장이나 누가복음 4장에 나오는 그 마귀의 이야기가 틀린 게 하나도 없어요.
왜냐하면 그 마귀의 이론이 유대인들의 이론이기 때문에 그래요.

구약을 완벽하게 인간 쪽에서 해석을 하면 마귀의 이론으로 귀결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구약을 어떻게 해석합니까? 십자가로 해석해버리죠.
십자가로 해석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분이 말씀을 다 이루었다. 그 죽어버리시고 그다음 어떻게 합니까?
사라져버렸죠. 하나님 우편의 자리에 가버렸죠.

가버리니까 인간들이, 갔으니까 그다음부터 누가 중심을 자리를 차지합니까?
성령이 주도권을 갖고 있죠. 로마서도 똑같습니다.
주님이 주도권을 갖고 복음을 전해요. 주도권을 갖고 함에도 불구하고 사도바울은
주도권으로 했는데 그게 뭘로 바뀐다는 거예요?
계속해서 내 것으로 바뀌기 때문에 버림이 될까 두려워한다는 거예요.

‘에이 진짜 믿음 좋으면 그런 생각 없어야지.’ 이게 무슨 생각이냐? 하면요.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입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나 성경에서 성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말씀을 하시지만 그 아들을 뭐라 합니까?
“양자의 영을 받은 아들”이라는 거예요.
양자의 영을 받은 아들은 ‘아들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을 왜 모르느냐? 하면 구약을 모르기 때문에 그래요. 구약을 얕잡아보거든요.
구약 전체가 아들로 만들었는데 아들 아니라는 겁니다.
‘아들 아니라’는 내용을 담은 자들이 누구냐? 하면 성도들이에요.
그래서 성도들은 맏아들 되신 주님의 피 흘리심을 자랑하게 되는 겁니다.

로마서 8장 30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오죠.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 말씀이 얼마나 어려우냐? 하면요. 안 맞아요. 지금 9장하고 안 맞아요.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부르죠.
여러분 말씀은 시간을 초월하죠? 아닌가요? 말씀은 시간을 초월하잖아요.
말씀은 시간을 초월한다고 하니까 또 이해 못하는 분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예수님이 말씀이잖아요.
그러면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천지창조 때 예수님께서 계셨잖아요.
그러면 이 말씀이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라고 했으면
그 부르신 자들이 구약에는 누구였습니까? 이스라엘이죠.
애굽에 있는 자들을 불렀고 아브라함을 불렀잖아요.

그러면 부르신 자들을 의롭게 하셨죠.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그다음 뭐 해야 돼요? 영화롭게 하셔야 되죠.
그러면, 이스라엘의 자손이라면 그 세계 속에, 이 말씀 속에 다 들어가야 되잖아요.
들어갔습니까? 못 들어갔습니까? 답변 중요합니다. 다 들어갔어요.

들어간 방식이 뭐냐? 하면 그들을 진멸하는 방식이에요.
‘목사님 그럼 말씀과 안 맞잖아요.’
보세요.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실제적으로 일을 하시거든요. 그거 모르는 사람 있습니까?
직접 일을 하신단 말이에요. 직접 말씀이 그렇게 하셨어요.
문제는 뭐냐? 하면 이 말씀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여서 나의 구원과 직결시키는 거예요.

지금 이게 구약 유대인들이 해석하는 방식이고 2천년 기독교인들이 해석하는 방식이었어요.
자기 구원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왜?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거든요.
그게 로마서 2장입니까? 거기 나오잖아요.
“하나님을 알되, 천국을 알되” 천국을 뭘로 바꿉니까? ‘나를 위한 천국’으로 바꿔버리죠.
천국에는 나는 못 들어갑니다. 계속 반복합니다. 나는 못 들어가요.
내가 들어가면요. 천국이 쑥대밭이 돼요. 내 기준이 따로 있기 때문에.

그런데 이사야 14장을 한번 봅시다. 우리 오후 예배 시간에 살펴봤지만 1절
“여호와께서 야곱을 긍휼히 여기시며 이스라엘을 다시 택하여 자기 고토에 두시리니”
아니 또 택해요? 이거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셨다면, 선택을 하셨다면 선택한 걸로 끝내야 되는데
두 번 선택이 어디 있습니까?
근데 성경은 두 번만 있어요? 또 선택해요.

다시 선택하여서 고토로 부르신다는 겁니다.
역사적 사건으로 반드시 일어나는 일이에요.
그런데 종말 때까지도 마찬가지고 종말 이후에도 이 땅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두고
모든 것을 바꿔버립니다. 영적인 사건으로. 영적인 사건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사건은 로마 제국의 형벌입니다.
그 형벌에 의해서 예수님이 죽었잖아요. 누가 보더라도 형벌을 당해서 죽은 겁니다.

그런데 주님의 해석은 십자가로 공중 권세 잡은 자, 모두 똘마니니까 그들과 승리한 자리라는 거예요.
그럼 우리는 뭘 낚아채고 싶은가? 하면
십자가는, 이 세상에서 제거당한 십자가는 빼고 진짜 공중 권세 잡은 자와 싸워서 승리한,
그 내용만 낚아채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이 십자가와 승리한 내용이 한 자리에 있다라는 거예요.

우리는 단순히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유대인의 왕’이라고 썼으니까
‘그게 어떻게 유대인의 왕이냐? 부활하셔야 주가 되지 않습니까?’ 이게 우리들의 논리예요.
아닌가요? 여러분들은 아니죠. 말씀을 많이 들었기 때문에.

그런데 주님이 주로서 자리에 오르신 그분이 이 땅에 등장했을 때
공생애 기간을 보세요. 고난 당하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었어요.
그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 성령을 주시잖아요.
성령을 받은 그들이 이 땅에서 왕노릇하는데 왕노릇하는 모습이 어떤 모습입니까?
미움받고 핍박받고 돌에 맞아 죽는 모습이에요.
그게 로마서 8장에 나오잖아요.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라고 할 때
환란, 핍박, 기근, 적신... 이 모습이 승리자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또 걱정이 되니까 제가 걱정할 필요가 없는데 그러면 또 우리는
‘기근으로 들어가고 적신으로 들어가야 승리자입니까?’ 그 말 아니거든요. 그 말이 아니에요.
성도의 자리는 그 세계에 들어있는 자리예요.
지금 우리의 자리가 주님께서 십자가로 승리하신 자리예요.
이걸 뒤집어버리면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 그 자리에 본인도 십자가 때문에
그 고난에 참여한 자로 이 땅에 살아가는 거예요.

‘한 번 선택했으면 끝까지 가야지 왜 두 번 선택을 하느냐?’
얼마든지 시비를 걸 수 있는 거예요. 누가? 인간들이.
그러니 로마서에 나오는 이것이 신약에서 이야기했으니까, 완성이 되었으니까
‘아 신약에서는 8장 30절 말씀은,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셨으니까 이것은 바뀌지 않을 거야.’ 바뀝니까? 안 바뀝니까?

천국 비유에 보면 다 충격적인데
신랑을 맞으러 갔잖아요. 근데 기름을 준비 안 했어요. 하나는.
준비 안 했습니까? 넉넉히 안 했죠.
그러면 사람들이 ‘넉넉히 합시다.’ 근데 넉넉히 하는 게 통하지가 않아요.
왜? 천국은 자기를 부정하는 세계이기 때문에.
양과 염소의 비유를 보면 자기가 한 걸 몰라요.

사도바울이 자기가 한 일을 몰라요? 알죠.
아는데 성령께서 책망을 하니까 이 모든 일이 뭐가 되죠?
주의 일은 주의 일로 바뀌어지고 자기는 죄인 중에 괴수로 들통나는 거예요.
이 하나의 요소를 끌어내어서 나의 구원용으로 삼고자 하는 자들이 이런 말씀을 이해를 못해요.

사람들은 신약에서 주님이 다 이루었다하니까 구약 말씀을 얕잡아보는데
신약에서 다 이루면 구약이 신약 안으로 다 들어와버려요. 다 들어온다고요.
다 들어오게 되면 모든 말씀은 십자가를 증거해요.
그러면 십자가라는 것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느냐? 할 때
한 번 선택, 두 번 선택, 두 번 선택이 있으면 세 번 선택도 들어있는 거예요.

‘목사님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가룟유다 있잖아요.
‘에이 목사님 그거는 처음부터 지옥 갈 자로 선택했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논리를 데마에게 또 들어가 볼까요?
‘그러면 처음부터...’
그러면 당신은 처음부터 아니라는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물어봅시다.
당신은 처음부터 아니라는 증거가 어디 있어요? ‘나는 믿으니까’
가룟유다가 안 믿었어요?
‘에이 가룟유다는 십자가 지기 전에 잘 몰랐기 때문에’
그러면 십자가 진 이후에 데마는 잘 믿었잖아요.

인간의 믿음도 행위이기 때문에 그래서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언급한 거예요.
아까 처음 언급한 그 사람은요. 아브라함의 믿음이 뭔지도 몰라요.
왜냐하면 희한해요. 글을 쓰면 글에 대해서 이해를 하고 반박을 해야 되는데
글을 딱 쓰잖아요. 그러면 ‘너는 틀렸어’부터 얘기하면서 ‘내 말 들어’ 이래 나와요.
제가 그걸 보면서 한 30년 전에 제가 한 짓이 생각이 나거든요. 제가 그런 식이었거든요.
아는 게 없으니까 그 소리를 하는 거예요. 해독이 안 되니까.
글을 쓰면 그 글에 대해서 무엇이 문제인지...
제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글을 올렸잖아요. 뭐 안 보셨습니까?

이제 로마서 9장 24절로 넘어가 봅시다.
“이 그릇은 우리니”라고 할 때는
이 그릇은 앞서 22절 23절에 나온 내용을 담고 있어요.
(롬9:22~23절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사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다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누가 봐도 증거의 그릇이었는데.
이건 왜 충격이냐? 하면 이게 뒤로 바뀐 경우도 있어요.
예를 들어 유대인과 이방인이 있으면 사도바울은 유대인이잖아요.
그리고 사도바울의 대필하는 더디오도 여기 들어가고, 그리고 이방인도 있을 거 아닙니까.

그러면 유대인들은 처음에는 어떤 자로 부름을 받았어요? 우리가 보기에는.
긍휼의 그릇으로 부름을 받았잖아요.
왜냐하면 바로는 강퍅케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긍휼히 여겨서 애굽에서 구원했기 때문에.

그런데 “이 그릇은 우리니”라는 것을 이 앞 구절에 적용을 해보면
한쪽은 긍휼이었다가 진노의 백성이었다가 다시 긍휼의 백성이 되었죠. 누가? 사도바울이.
‘아니 처음부터 사도 바울은 지옥 갈 자가 아니었습니까?’ 이렇게 들어가면 안 돼요.

그 얘기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말씀을, 언약을 주시잖아요. 그 언약 속에 사도바울을 집어넣어야 돼요.
그래야만 무엇이 드러나느냐? 하면
우리는 ‘처음부터 지옥 갈 자, 처음부터 천국 갈 자’ 여기에만 온 정신이 쏠려 있잖아요.

성경은 십자가를 증거합니다. 그래서 이 과정 속으로 집어넣는 거예요.
분명히 언약의 자손이라면 이 바로와 달리
긍휼히 여김을 받았는데 강퍅한 자로 드러나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알게, 드러내기 위해서 강퍅케 하면서
하나님이 인내하심을 그 속에 집어넣어가지고 바울을 불러버립니다.
이게 유대인 쪽이에요.

그러면 이방인 쪽은 뭐냐? 하면 처음부터 진노의 그릇이었어요.
이들은 구원받을 자격이 없어요.
그런데 주께서 진노의 그릇을 하나님의 관용을 알게 하기 위해서,
그 하나님의 관용은 이미 앞부분에 다 나옵니다. 화목 제물.
자기 아들을 대속물로 내어주신 그 사랑이에요.
그 사랑을 알게 하기 위해서 이방인들 중에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가 다 이 9장 22절 23절 내용을 다 담고 있는 성도들이에요.

그런데 여기에서 유대인은 하나 더 담고 있어요. 맞죠?
이들의 공통 분모는 뭐였습니까? 공통점은?
‘진노의 그릇에서 긍휼의 그릇으로 되었다’라는 게 이게 공통점이라면
유대인들은 긍휼의 그릇에서 진노로 갔다가 다시 긍휼로 온 거예요.
야~ 이거 진짜... 이 뒤에 나오거든요. 이 내용이. 미리 당겨서 얘기하면
너희들이, 우리들 다가 접붙인 감람나무잖아요.
그런데 만일에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우리를 어떻게 한답니까?
잘라버린다 하죠.

그러니 이 이야기가, 유대인의 이야기가 그냥
‘하나님이 진짜 생명의 길을 알려주기 위해서, 구원의 길을 알려주기 위해서
유대인을 이용했어. 그래서 이방인들이 구원받기 훨씬 편해.’
이런 논리가 성립이 안 돼요.

지금 사도 바울이 9장에서 단단히 이야기하고 있어요.
‘아니 목사님 그러면 우리가 행위가 있어야 됩니까?’ 이것도 다 날려버리잖아요.

제가 전제를 하잖아요.
미리 이미 이들은 예정도 알고 선택도 알고 십자가의 완료성도 다 아는 자들이에요.
우리 자신을 보면 돼요.
우리 자신이 십자가 사건 속에 머물기를 원합니까?
아니면 다 완료했으니까 완료성 속에 배 뚱뚱거리면서 편안하게 살기를 원합니까?
지금 여러분이 처한 환경을 보세요. 우리 처한 환경들이 어때요?
권 집사님 만만치 않죠? 내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잖아요. 그걸 원합니까?
완료했기 때문에 주님이 알아서 이 문제를 다 해결해 주기를 원합니까?
해결해 주기를 원하거든요.
그게 인간의 욕망이에요.

그래서 이 구원이라는 요소도
‘십자가라는 그 지식, 그 지식을 받아들여서 완벽히 해결되었다’라고 믿고 싶은 거예요.
근데 이들이 놓치는 게 있습니다.
그런 지식으로 구원받을 것 같으면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실 이유가 없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자기가 똑똑하면 그걸 이야기를 해야 돼요. 육신을 입고 왜 와야 되느냐?
그 지식을 들려주면 되지. 그 정보로 구원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이 십자가 사건이 한 번으로 끝납니까? 세상 끝날까지 지속이 됩니까?
지속이 되죠. 누구를 통하여서? 자기 백성들을 통하여서.
왜? 주님이 그들과 함께 동행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로마서를 읽는 자들이 천재라고 보시면 돼요. 다 따라왔다고 보시면 돼요.
저도 이만큼 못 따라가는데 어쨌든 다 따라왔는데
사도바울의 입장은 ‘따라올테면 한번 따라와 봐라’는 입장이에요.
과연 따라올 수 있는가? 못 따라옵니다.
왜냐하면 이 지금 내용은요. 지식이 아니라 지혜이기 때문에 그래요.
지혜라고 하면 또 우리가 세상적인 지혜를 이야기하는데 십자가 지혜예요.
십자가 지혜라는 것은 십자가 사건의 현장성 속으로 이 말씀을 통하여서 인도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유대인 중에서뿐만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라고 하는 거예요.
지금 사도바울이 노림수가 있는 겁니다. 노림수가.
이방인들도 까불어대잖아요. 뭐라고 까불어댑니까? ‘유대인들 너희들 복음 몰랐지?’
이때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왜 바보처럼 몰라봤느냐?’ 자기도 몰랐거든요.
지금도 은혜로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 세계 속에 살고 있는 주제에
유대인들을 보면서 ‘너 그것도 몰라?’ 이런 오만한 태도, 그 태도를 보이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십자가의 증인이에요.
증인과 증인이 아닌 자의 차이가 뭐냐? 하면
증인이 아닌 자는 누구의 태도를 갖느냐? 하면
바리새인의 태도를 가져요. 사두개인의 태도를 갖습니다. 심판주처럼.
‘너 이거 안 믿으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거야.’ 말은 맞는 것 같잖아요.
그런데 그 말 속에 무엇이 담겨 있어요?
‘주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말이 담겨 있습니까? ‘내 말을 들으라’는 거예요.

여러분 이단들 집단에 가보세요.
다 ‘주님의 말씀을 들으라’ 하지 ‘내 말 들으라’ 안 해요.
그 주님의 말씀을 자기 언어로 다 바꿔버리잖아요.
사도바울이 점령군의 모습으로 복음을 전했습니까? 아니죠. 어떤 모습으로 전했습니까?
실패자처럼 복음을 전하잖아요.

물론 복음의 내용에 있어서는 당당하죠.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한 복음을 전합니다.
십자가 피 복음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걸려드는 사람이 있으면 용납하지 않죠.
흥미로운 지점은 자기도 자기가 전한 복음에 의해서 부정당하는 그 복음을 전했다라는 거예요.

예루살렘에서 한 짓을 보세요. 왜 그런 본문을 남겨뒀을까요?
대부분 신학자나 목사들은 사도행전 20장 21장입니까?
거기 예루살렘에 아시아에 있는 교회 헌금을 갖고 올라갔을 때
사도바울이 서원한 것이 있어서 머리 깎는 그죠. 겐그레아에서 서원한 것이 있어서 그것도 있지만
또 거기에서 이 유대인들이 뭐랍니까? 야고보가.
우리 중에, 유대인들 중에 그리스도인들이 많으니까 올라가서, 저 서원한 자를 데리고 가서 서원한 것은 행해라, 제사를 드려라, 그런 내용이 왜 있는지 아세요?
사도바울도 부정하는 거예요. 주님의 증인이기 때문에.

갈라디아서에 의하면 자기가 갈라디아서에서 전해놓고 자기가 책망을 받아요.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이런 게.
원래 복음은 그렇게 전하는 거예요.

어떤 사람들은 ‘니가 완벽하니까 복음을 전해라’ 또 이렇게 유혹을 하잖아요.
성도는요. 완벽해서 복음을 전하는 게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을 갖고 복음을 전하는 거예요.
‘완벽해서 복음을 전하라’라는 주장을 왜 펼치는가? 하면 신처럼 되고 싶거든요.
그래서 하얀 옷 입고 (저도 허연 옷 한번 입고 와볼까요?) 허연 옷 입고 나오는 겁니다.
‘내가 깨끗하다’ 그러면 성도들도 어떻게 합니까?
‘여러분들도 참 선지자니까 허연 옷 입고 오세요. 모나미 복장하세요.’ 그런 집단이 있거든요.
제가 어릴 때 저희 엄마가 일제시대 세대잖아요. 그때부터 이단들이 설쳤잖아요.
예수님 오신다 해서 발가벗고 간 사람들도 있잖아요. 시온파인가?...
재산 다 날렸죠. 다 이 사기꾼들입니다. 돈벌이 수단이에요.
이 대제사장 집단들이 돈벌이 수단으로 그것을 했듯이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호세아 글을 인용을 하는데
우리가 신약 성경을 읽을 때 오해하지 말아야 되는 것은
호세아서를 인용했기 때문에 구약을 이야기한다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고요.
그 호세아서를 인용하는 순간 구약적 의미를 담음과 동시에
신약의 십자가 사건의 완료성을 담아버립니다.

여기서 또 한마디 할 수밖에 없는 게 뭐냐? 하면
‘성경에 예수님을 증거하는 구약은 눈꼽만큼밖에 없어’
아무튼 희한한 사람들이 다 있어요. 성경도 모르는 사람이에요.

호세아서를 여기에서 끌고 오는 이유가 있죠.
앞서서 어디서 끌고 왔습니까? 창세기에서 끌고 왔죠. 그다음 출애굽기입니다.
이거는 모세 5경이죠. 율법입니다.

이제는 선지자가 나오죠. 지금은 호세야고 그 뒤에 나오는 것은 이사야입니다.
‘율법과 선지자’ 이 말씀을 아시는 거예요.
그러면 율법과 선지자가 뭘 증거하느냐?는 거예요. 율법과 선지자가.
그 내용을 지금 여기에 담고 있습니다.

그러면 ‘율법과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지 않습니까?’
이 말도 맞죠.
지금 왜 이 세대가 어려운 시대인가? 하면요.
복음이 뭐냐 물으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면 다 인정을 해요.
그러면 저는 묻고 싶은 게 ‘예수 그리스도가 뭐냐? 어떤 거냐?’라고 묻고 싶은 거예요.

예수님을 부를 때 ‘주 예수 그리스도’거든요.
예수라는 인물은 나사렛 예수예요.
약속대로 여자의 후손으로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가 되고
그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 죄 없는 분이 그리스도로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겁니다.
그분이 주라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주님을 증거하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되죠. 이 말도 참 어렵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한 단어로 하면 ‘십자가’라는 거예요. 십자가.
십자가를 자랑하고 증거하는 것이 주님을 믿는 거예요.
‘주 예수를 믿습니다’가 믿는 게 아닙니다.
이런 짓은 이미 제자들이 다 했잖아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할 때는 자기 부인이 없잖아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하게 되면
그 증거하는 내용 속에서는 ‘나는 아니요’가 담기게 됩니다.
나는 뭡니까? 안개 같은, 주의 이름을 증거하는 증인일 뿐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는 겁니다. 롬9:25절

“호세야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하는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아무튼 사도바울이 주님의 말씀이지만
사도바울이 구약을 인용할 때 순서를 자꾸 뒤바꿔요.
지금 호세아도 인용을 할 때 2장부터 인용을 하고 1장으로 와요.
아무튼 이런 것들을 보면 참 주님이 말씀하시는 방식이 얼마나 놀라운가? 하면

이 호세야 2장 21절을 보겠습니다.
호세아가 활동하는 시기는 아모스 선지자가 활동하는 시기와 거의 흡사한데
이 북이스라엘 여로보암 2세죠. 이 왕이 통치하는 그 시기입니다.
이때가 북이스라엘의 영토가 가장 넓혀졌어요.
아람의 수도 다메섹도 점령을 하고 모압 땅까지도 이렇게 빼앗는, 영토가 가장 넓어졌습니다.
그런 때에 가장 죄악이 깊게 드러나겠죠.

호세아를 통하여서 2장 23절을 보면 이런 말씀 합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저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저희는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이렇게 인용이 됩니다.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그런데 호세아서를 보게 되면 이 1장부터 보게 되면
이 호세아 선지자에게 이 창기 고멜을 아내로 취하여서 자식을 낳으라고 합니다.
그 자식을 낳을 때마다 이름을 짓는데 그 이름이 첫 번째 이름이 이스르엘이죠.
이스르엘의 의미는 이 문자적 의미와 하나님께서 의미를 담는 것이 달라요.

예수라는 말은 그냥 구원이잖아요.
그런데 예수라는 의미 속에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한다”라는 의미를 담습니다.

이스르엘이라는 아들을 낳는데 (호세아) 1장 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 조금 후에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며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임이니라”
이스라엘 나라를 폐해버린다는 거죠.

이 이스르엘이라고 하면 나봇의 포도원이 있는 곳인데 이스르엘의 피를 이 예후 왕조죠.
이 집을 심판하겠다라는 거예요.
그게 이 창기를 통하여서 낳은 아들이 증거하는 내용입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이게. 예?
아니 심판의 이름으로, 여러분들도 우리가 자식을 낳을 때 창기를 통해서 낳은 아들의 이름이
하나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 위한 이름인데 그 이름값이 어때요?
이런 이름 짓고 싶습니까? (이름은 짓고 싶지) 근데 누구로부터 낳고 싶어요?
하나님이 말씀을 이루려면 창기로부터 낳지 말고 누구로부터 낳아야 돼요? 괜찮은 그죠?
정결한 처녀와 결혼해서 순결한 처녀와 결혼해서 낳은 아들이면 좀 말씀답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다 이 비유에 또 해당되죠.
예수님이 오심이 그러한 겁니다.
예수님이 어둠 속에, 육에 속한 자들의 후손으로 오시잖아요.
그게 다윗의 후손이거든요. 로마서 1장에서.

다윗의 혈통과 성령을 철저하게 구별하잖아요.
그러면서 성령으로 나신 그분이 다윗의 자손임을 다시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을 폐해버리면 끝나버리잖아요.
이스라엘을 폐해버리면 이스라엘 백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져야 되잖아요.

그다음 봅시다.
“그 날에 내가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의 활을 꺾으리라 하시니라 고멜이 또 잉태하여 딸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 이름을 로루하마라 하라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사하지 않을 것임이니라”
다시는 긍휼히 여겨서 사하지 않겠다는 게 로루하마예요.
그러면 긍휼히 여기면 돼요? 안 돼요?

우리가 뒤에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이 없잖아요. 그죠?
변함이 없으면 “다시는 긍휼히 여기지 않겠다”하면 긍휼히 여기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잖아요.
근데 지금 호세아는 이 말도 안 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거예요.

십자가가 말도 안 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겁니다. 십자가가. 조금 더 봅시다.

“그러나 내가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겨”
‘에이 목사님 여기는 유다 족속은 긍휼히 여긴다 하지 않습니까?’ 이게 한 통속이거든요.
이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긴다라는 말은 다윗 언약 때문에 그래요. 다윗 언약 때문에.

그러면 목사님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겼으면 남은 자 유대인들이 만들어지잖아요.
그러면 그들을 긍휼히 여겨야 되지 않습니까?
긍휼히 여겼습니까? 안 여겼습니까? 우리는 답을 알죠.
‘긍휼히 여겼지 않습니까? 열한 제자가 있지 않습니까?’ 이런 논리를 펴는데

긍휼보다 우선되는 게 뭐였습니까? 심판이에요.
왜냐하면 ‘긍휼히 여길 자들이 있다’라고 되면 무엇이 삭제되느냐? 하면
십자가가 삭제돼요. 함께 죽음이 삭제되고.
함께 죽은 자들을 다시 살린 자들을 새 이스라엘로 창조하신 내용이 삭제된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는 긍휼히 여기지 않겠다는 말씀을 강조하는 거예요.
다시는 긍휼히 여기지 않는다면 긍휼히 여기는 자가 없어야 되는데
없는 데서 있게 만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걸 만일에 유대인들이 보게 되면 어떻게 해석할까요?
유다는 긍휼히 여긴다 했으니까 우리를 긍휼히 여길 것이다.
메시야가 오셔서 메시야 왕국을 세워주실 것이다라고 이야기하잖아요.

그들이 누구를 죽여버립니까? 진짜 메시야를 죽여버리죠.
왜 죽입니까? 이 말씀을 믿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언급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우리가 지금까지 교회에서 예전에 배웠던 그런 믿음으로 해석을 한다면
십자가를 제거하게 돼 있어요.

여러분이 교회 다니는 사람들한테 십자가 이야기해 보세요.
그것도 모르느냐? 이야기를 해요. 그거 몰라요. 그거는.
‘나는 그거는 뗐고’
뗐으면 십자가만 자랑해야 되죠.
어떤 일을 당하든지 어떤 형편에 있든지 어떤 말씀을 대하든지 십자가만 자랑해야 되지,
십자가 그 수준에 머물러 있지 말라는 거예요.

그러면 뭘 이야기하는가? 하면
십자가 수준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뭔가 삶으로 보여라는 겁니다.
예수님 형상 닮으면 되잖아요. 예수님이 어떻게 삶으로 보였습니까?
어떻게 삶으로 보였습니까? 듣기 싫은 소리만 했죠.

사복음서를 다 읽어보세요.
듣기 좋은 소리 한 번도 안 했어요. 그야말로 무시해도 그만큼 무시하는 경우가 없어요.
못 알아듣는데도 일방적으로 계속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일방적으로.
자기 증거만 하시는 겁니다.

이거는 무엇과 연결돼 있는가? 하면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증거하기 위해서
아들을 통한 십자가에 지신 그분의 심판주 되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창조를 하셨는데
인간들은 선악과를 먹은 이후에 그걸 압니까? 모릅니까? 모르죠.

만물들은 안다라고 하죠. 로마서 8장에 나오잖아요.
만물들은,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한다잖아요.
근데 누구만 몰라요? 자기 집에서 키우는 개는 아는데
개를 데리고 다니는 주인이라 하는 그 인간이 모른다라는 얘기예요. 성경은.

“구원의 방식은 활과 칼이나 전쟁이나 말과 마병으로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그다음에 또 아들을 낳는데 “그 아들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이 9절이죠.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완전히 이 차단막을 계속해서 가로막죠. 삼중이죠. 삼중.
삼중살은 잠언서에 보면 찢어지지 않는다. 끊어지지 않는다 하거든요.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이 말씀을 위해서 이스라엘을 만드시고 남북 이스라엘을 찢으시고 남유다를 조금 더 연명하시고
남은 자를 돌아오게 하신 거예요.
그래서 남은 자들이 예수님이 등장했을 때가 종말인데
그 종말 때 그들은 이 말씀을 성취하는 대상이 돼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로 드러나죠.
왜? 진짜 하나님이 왔는데 영접치 않잖아요.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사람이 있습니까? 라고 물으면
우리는 또 성경을 찾아가지고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긴다 했으니까
거기에 보면 하나님 백성이 될 자가 있지 않습니까?

이 ‘있지 않습니까?’를 부정하는 내용이 요한복음 1장에 나오잖아요.
세상은 뭐라고 규정해 버립니까? 어둠이죠.
빛이 세상에 비치매 어둠이 깨닫지 못했다라는 거예요.
그러니 주님은 인간들이 갖고 있는 이 말씀에 근거한 믿음의 내용을 다 담으면서
그들을 어둠으로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제 10절에 보면 이게 이제 로마서에서 인용한 구절인데요.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측량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사신 하나님의 자녀라 할 것이라”

로마서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것이라” 이렇게 되어 있는데
그 구체적인 내용에 들어가기 전에 여기에서 보게 되면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곳에서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사신 하나님의 자녀라” 이렇게 돼 있는데
하나님의 자녀, 아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들인데
이것을 이 출애굽기 광야 시대를 들어가 보면 명확하거든요.

무엇이 명확하냐? 하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안 바뀌고 그 속에 있는 구성원들이 교체 작업이 일어나요.
이 정도 되면 이 말씀을 붙들고 ‘나는 구원받는다’라는 이 요소가 제거돼야 돼요.
우리는 주의 이름의 증인이잖아요.
그러면 십자가의 증인으로 살려지면 그걸로 다 한 겁니다.

그게 사도바울이 9장에서 하는 이야기잖아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이거 이 정도는 신나야 되지 않습니까?
이 정도로 신나는 복음을 전해야 되는데
‘아 내가 그 정도로 믿음을 갖고 전했으니까 나는 천국 갈 거야.’
귀신씌어서 그래요. 자기 행위를 못 버리는 거예요. 그게 자기 행위거든요.

믿음이라는 자기 행위,
말씀에 대해서 내가 충실하게 인정하겠다는 자기 행위,
말씀대로 살겠다는 그 자기 행위,

말씀대로 살아버리면 어떤 태도가 나온다 했습니까?
마태복음 7장에 나오는 지옥 가는 자들 태도가 나온다 했죠.
‘내가 참 선지자야. 내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했어. 너희들은 왜 구원받지 못하는지 알아. 내 말 안 들어서 구원 못 받는다’라는 이야기, 논리를 펴는 거예요.

주님은 그들을 향해서 뭐라 할까요? ‘나는 모른다’ 해요.
왜 왜 모른다라고 합니까? 이 호세아 예언의 말씀을 담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내 백성 아니라 한 곳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는 이 말씀이 우리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 하면
‘아 예수님이 오셔서 이런 식으로 우리를 나를 구원했구나’ 이렇게 적용을 하거든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데 이 말씀은 계시가 되고 말씀이 되면
살아계셔서 자기 백성에게 계속해서 활동을 하는 말씀이 됩니다.

주님이 살아계시지 않으면 이 유대인들의 오해가 뭐냐? 하면요.
천지를 창조하고 하나님이 노신 것 같잖아요.
근데 예수님이 뭐라고 하냐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는 거예요.

그럼 사람들이 그 본문을 보면서 뭘 생각하는가? 하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까 예수님도 계속 일하시는구나’ 이렇게 해서 삼위일체론적으로 들어가는데
그걸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그 말씀이 오늘날 그대로 예수님이 직접 살아서 십자가로 일을 하시잖아요.

사람들 눈에는 누구의 일로 보입니까? 사람의 일로 보일 뿐이에요.
그런데 주님은 자기 증인을 통하여서 주님이 친히 일을 하는데
그 일하는 방식이 뭐냐? 하면 자기 증인을 철저하게 부정시키는 방식으로 일을 해요.
그게 복음을 전하는 겁니다.

십자가 복음을 전하게 되면 전하는 자도 부정을 당해요.
말씀 앞에 어느 누구도 못 빠져나가잖아요.
방금 제가 “내 백성 아닌 자리에서 내 백성이라 하였다”라는 말씀이 살아있음이 되면
오늘 제가 아무리 피 복음을 전했다 하더라도
이 말씀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나는 죄인 중에 괴수로 드러나는 거예요.

이 말씀에 해당 사항이 없는 자는 뭐라고 하는가? 하면
‘그건 난 뗐고 뗐고’ 그다음 뭐라고 얘기할까요?
‘나는 이미 내 백성 아닌 자리에서 주님의 백성이 되었으니까’ 뭘 자랑하고 싶어요?
되었으니까 그다음 자기를 뽐내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안 되었느냐?
안 되었다는 게 아니라 되었다면 거꾸로 이 말씀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말씀은 살았다라는 거예요. 운동력이 있다라는 거예요.
우리를 찔러 쪼갠다는 거예요.

어디까지 쪼개는지 한번 보세요. 어디까지 쪼갭니까?
사도 바울이 십자가의 지혜를 전하면서 그 십자가를 위해서 온몸을 다 던졌는데,
그 던진 사도바울을 갈갈이 찢어버립니다.

다시 이제 로마서 9장으로 돌아와서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이 말씀이 이제 예수님에 의해서 완성이 되었잖아요.
예수님에 의해서 완성이 되면 이 ‘내 백성이라’라고 했을 때 이 바뀝니다.

원래는 하나님의 백성이었죠.
하나님의 백성이었는데 하나님의 백성인 자들이 예수님을 살해합니다.
살해하게 되면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가 되죠.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가 돼요.

단순히 호세아서 거기까지 얘기하면 시간이 너무 많이 가니까
그 호세아서에서 그들이 범죄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서 이 말씀을 하셨는데
이 말씀의 예언이 어디까지 이어집니까?
예수님에 의해서 완성이 되어지면 지금 이 말씀은 어떻게 해석이 돼야 되느냐? 하면

내 백성 아닌 자가 누구냐? 하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이것은 예수 믿는 자들이고
유대인들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들이에요.
누가 봐도 하나님의 백성이라 인정하는 자들입니다.
사람들은 이 말을 이해를 못해요.

예수님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그 유대인들이, 율법의 의로 흠이 없는 자들이 죄인임이 지적되는 거예요.
그전까지는 어느 누구도 그에 대해서 판결을 못 내렸어요.

“내 백성 아닌 자”라고 하면 사도바울을 집어넣으면 되죠.
사도바울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 오직 유일신 하나님만 경외하고 섬기면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 살았고 심지어는요. 고생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내 백성이었습니까? 아니었습니까? 내 백성이었죠.

그런데 호세아서를 보게 되면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여기에서 나는 누구예요? 호세아서를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되지만,
이제 로마서로 넘어오게 되면 이 나가 누구예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했을 때 이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 됩니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아버지가 하나님이 돼요.

제가 ‘하나님 나라’ 글 속에 이 내용을 담았잖아요. 그죠?
주의 자리가 바뀐다라는 것을 신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습니다.
왜? 삼위일체로 퉁 치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우상숭배인가를 이 사복음서를 통해서 깨달아야 되는데
깨닫지를 못하는 거예요.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이 말 속에 앞서서 말씀드린 것 같이 남은 자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우겼는데,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우기는 자, 오직 여호와만 경외한 자들에 의해서 살해당한 그분이
십자가에서 자기 백성과 함께 십자가와 함께 못 박혀 죽게 하고
다시 살린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돼요.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겠죠.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은 누구밖에 없습니까?
십자가 지신 아들밖에 없는 거예요. 논리가.

그러면 성도는, 이 백성은 십자가를 자랑하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됩니다.
십자가 지신 분을 주님으로 믿는 것이 아버지 하나님을 주님으로 경외하는 거예요.

지금 사도 바울이 호세아서를 끌고 왔지만, 이 속에 십자가 사건이 다 담겨 있는 거예요.
너희들이 기본적으로 생각하는 그 성경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엉터리인가를 지적하는 겁니다.

‘똑같은 호세아니까 거기에 나오는 하나님이나 로마서에 나오는 하나님이 같지 않느냐?’
같지 않아요. 같지 않습니다.
‘같지 않다면 그러면 그때 나온 하나님은 그러면 거짓 하나님이냐?’
참 하나님이 맞아요.

그런데 문제는 참 하나님을 계시로 주게 되면 계시 속에서는 진짜 하나님이 계시지만
그 계시를 인간이 받아서 그것을 믿는 순간 그 하나님이 우상이 된다라는 사실을
남은 자 유대인들을 통해서 가감없이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보면서 십자가가 안 보이잖아요.
예수님을 보게 되면 구약의 하나님은 십자가 지신 주님의 아버지의 하나님으로 보여줘야 되거든요.
그 하신 모든 일들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하셨잖아요.

그러면 여호와의 이름으로 하셨다면
구약의 전체가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 세계가 되어야 되는데 그게 보이지 않는다라는 겁니다.

그다음 나오는 게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하는 자라 부르리라”
단순히 호세아서나 아모스서에 나오는 그들이 음란하고 악하고
그러한 범죄 때문에 심판받은 정도가 아니라 이 음란이 구약에서는 겹치게 됩니다.

어떻게 겹치게 되죠? 구약이 되면.
구약에는 음란의 두 종류가 있죠.
우상숭배도 음란이고 육체적 음란도 음란이에요.
이게 통합이 됩니다. 왜냐하면 이 둘 다 자기 숭배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우상숭배라고 하는 겁니다.

탐심이 왜 우상숭배가 되느냐? 하면 탐심은 나를 숭배하기 때문에 그래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했을 때 이 탐심은 내 속으로부터 나오잖아요.
그러면 거기에 나는 여호와 하나님이잖아요. 구약에는.
신약에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니까 주님밖에 없잖아요.

그러면 주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않아야 되는데 우리 인간은 누구를 섬기고 있죠?
내 탐심을 따라가잖아요. 아닌가요?
오늘 교회 올 때만 해도 내가 택시를 탈까? 우리 권사님. 뭐 걸을까? 탐심이거든요.
오늘 이걸 먹을까? 말까? 교회에 올까? 말까? 모든 게 내 위주로 이릅니다.
탐심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십자가 증인이 못 돼요.

우리가 모두가 다 탐심이 작동하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이랬으면 좋겠고 저랬으면 좋겠고, 자기를 숭배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십자가 복음 속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내 숭배가 얼마나 지독한가를 알게 돼요.

십자가 복음 근처에 가면요. ‘나는 내 숭배 안 해’ 이래 나오는데
그 속으로 빨려들어가면 내가 얼마나 복음을 이용해서 나를 숭배하는 죄인인가가 들통나게 됩니다.

“사랑치 않은 자를 사랑하였다”
유대인들 쪽에서는 언약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했어. 약속했어. 지킬 거야.’
그런 자들이 사랑치 않는 자였어요.
얼마나 충격입니까? 이걸 적용을 해야 되죠. 앞서 또 적용했잖아요.
이걸 누구한테 적용해야 되죠? 예수 믿는, 복음을 아는 자에게 똑같이 적용이 돼요.

사도 바울이 지금 누구한테 이야기합니까? 지금.
복음을 아는 자들에게, 성도들에게 이야기를 하잖아요.
그러면 성도들에게 이야기하니까 듣는 사람이 다 성도냐? 아니에요.
귀 있는 자만 듣게 돼 있어요.

우리의 모습이 씨뿌리는 비유에 보게 되면 길가도 있고 돌작밭도 있고 가시덤블도 있고 옥토도 있는데
이 모든 요소가 다 담긴 성도도 있고요.
다 담긴 성도라야만 십자가만 자랑합니다.
그리고 이 요소가 담기면서 성도 아닌 자가 있어요.

많은 열매를 맺은 그 옥토가 마태복음 7장에 의하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했다”라는 자들과 일치하지 않나요?
‘에이 목사님 그건 그거 아닌데요.’
그거 아니라면 제대로 본 거예요. 옥토라는 의미가.

근데 ‘옥토’라는 이야기를 할 때는 그 7장하고 연결시켜야 돼요.
안 그러면 어떤 사태가 벌어집니까?
“내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봉사하고 헌금하고 기도하고 헌신을 했다”라는
이 주장이 옥토가 맞잖아요.
그래서 교인이 2만 명이 되었다. 이건 뭐예요? 이게. 뭘 자랑합니까?

제가 아까 예를 든 그 사람한테 제일 화가 나는 게 그거예요.
십자가만 자랑하라니까 ‘내 2만 명이다.’ 그래서 내가 댓글을 썼어요.
‘그럼 신천지는 10만 명인데’
제가 그래서 남미나 여러분 유튜브 세계 1위가 남미인가 어딘가 브라질인가 누굽니까?
그 어떤 이상한 사이비 종교거든요.
조회 수가 아침마다, 아침인지 저녁인지 모르지만 50만이에요. 50만.
그럼 그 사람도 진리겠네요?

통일교는 재산이 빵빵합니다.
감히 한국 정부가 못 건드릴 정도의 재산과 그 산업체를 갖고 있죠.
그러면 자기가 하나님 맞네요.

왜 십자가만 자랑하지 않고 자기가 가진 것들을 자랑합니까?
그 목사들이 모이면 자랑하는 게 뭔가? 하면 복음 이야기하면 절대로 안 돼요.
복음 이야기하면 화를 내거든요. ‘그거 다 알아’ 얘기해요.
그러면 뭘 자랑해야 되는가? 하면 교인 수. 개척했는지 2년 됐는데 교인 수 몇 명이냐?
이제 줄어가지고 이제 10명밖에 없다. 그럼 뭐라고 할까요? 비웃죠.
‘그래 니가 복음 이야기하더만 그래 교인 수 줄어가지고 이제 문 닫게 되었구나’ 이게 비웃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들은 뭘 자랑합니까?
‘교인 수 몇 명이냐?’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요게 로마서 8장이잖아요. 아들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아들 되신 예수님께서 화목 제물이 되셔서 양자의 영을 주셔가지고 아들로 만든 거예요.

여기에는 무엇이 배제됩니까? 유대인들은 믿었거든요.
유대인들의 믿음보다 강렬한 믿음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들이 믿었는데 지금 이 말씀이 되면 아브라함의 믿음이 이제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뭔지 알죠?
아브라함의 믿음이 예수님을 살해한 믿음이고,
야곱의 믿음이 예수님을 살해한 믿음이고 그 살해한 자를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 허물을 덮어주시고 죄를 용서하신 이 십자가의 믿음이 그 속에 덮친 거예요.

성경 해석을 진짜 사도바울은 이상하게 하죠.
논리가 그렇게 전개되는 거예요.
십자가의 영을 거기에 집어넣어버립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믿음은 믿었다라는 거예요.
믿었는데, 어느 정도 믿었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비웃을 만큼 믿었어요.

휴대폰 본다고 답이 안 나옵니다. 성경 보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비웃을 만큼 믿었어요.
그러면 이 믿음 속에 누가 들어갔어요? 사도 바울이 들어간 거예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으니까 그 모습은 뭐예요? 하나님의 약속을 비웃는 모습이에요.

그런데 주님이 찾아와 버리니까 어떤 믿음으로 바뀌어버립니까?
자기의 믿음이 주님을 조롱하고
하나님을, 진짜 하나님을 대적한 믿음으로 드러난 겁니다.

그 사람 이야기를 또 할 수밖에 없는 게 이렇게 얘기하거든요.
‘선지자가 지적하면 깨달아서 안다’는 거예요. 깨달아서.
하여튼 성경은 진짜 많이 읽은 것 같아요. 제가 볼 때는.
지적해서 깨달아 아는 것은 제가 댓글을 달았어요. 불교라고요.

근데 왜 그게 교회에 먹히느냐? 하면 교회에서 그렇게 가르치거든요.
이 복음을 성령의 역사로 보지 않고 기도, 아까 우리 사도 신경을 했잖아요.
성령의 교통하심으로 보지 않고
설교하는 자리가 주님이 홀로 친히 일하심의 자리로 보지 않고 티칭의 자리로 보는 거예요.
디다케로 보는 겁니다. 가르치는 거예요.
‘가르쳤지? 니가 돌아봐. 돌아보니까 잘못된 걸 인정하지?
그러니까 이 복음을 믿고 따라와.’ 이 논리예요.

사도바울이 뭔가 가르침을 받았습니까?
갈라디아서에서 얘기하잖아요. 내가 복음을 들은 이후에 이 누구한테 갑니까?
복음에 고수들한테 가서 배우지 않았다 하잖아요.
그 얘기를 왜 합니까?

사람들이 그 얘기를 사도바울이 하는 이유는 제자들도 마찬가지예요.
제자들이 왜 십자가만 증거하느냐? 하면
야고보는, 예수님 형제 야고보는 철딱서니가 없는 거예요.
그 나머지 제자들은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 하면
삼년이 어떠했더라? ‘헛되고 헛되고 헛되더라’라는 거예요.
그 내용을 담고 있는 거예요.

어느 정도 헛되냐? 또 반복합니다마는 사도행전 9장 10장에 나오는 고넬료와의 만남에서 만큼
꿈으로 환상을 보여주는데도 성령 체험조차도 뭐가 돼요? 헛돼요.
베드로가 갈라디아에서 외식까지 하잖아요.

근데 뭘 배워서 깨닫습니까? 도노 돈스입니까?
배워서 깨달을 때는 도노 돈스여야 된다.
성령의 은사로 확 깨달았다가 그다음은 도노 점수로 가야 돼.
날마다 날마다 말씀을 배워서 더 깊이 알아가야 돼. 불교잖아요. 불교.

성경에서 비슷한 내용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 좀 공부한 사람들은 불교로 가는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불교가 사상이 더 깊다는 거예요.

또 어떤 사람이 ‘기독교는 이상한 저 뭐라고 하더라. 아무튼 조로아스터교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배화교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 얘기를 이제 제 글에 대해서 비판을 하는 거예요.
아니 종교학을 공부하려면 제대로 하시든가, 종교학에는 답이 없어요. 비교 종교학에는.
누가 장땡이입니까? 힘센 사람이 장땡이에요.

그래서 유일신교를 이야기할 때
비교 종교학에서는 모두가 다 이구동성으로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았다’ 이야기예요.
조로아스터교의 시조가 보통 이렇게 잡아요.
BC 2천년에서 BC 6세기까지 500몇 년까지 이래 잡아요. 넓게.
왜냐하면 흔적이 없기 때문에.

그러면서 그들은 ‘원천이 뭐냐?’ 이걸 따지고 앉았어요.
원천을 지가 압니까? 가봤습니까? 창조하는 걸 눈으로 봤어요?
안 본 주제에 나타난 걸 갖고 연구를 하잖아요.

조로아스터교도 마찬가지고 불교도 마찬가지고 힌두교도 마찬가지고요.
똑같은 그 공통점이 있어요. ‘내가 신이 되어야 한다.’
힌두교에서 불교가 나왔다. 흔히 이야기하거든요.
그럼 부처가 자기가 해탈을 해서 이 저승에서 신이 되는 힌두교에서 죽은 자가 신이 되거든요.
그 신을 이 세상으로 앞당긴 게 부처거든요.

그런데 그 부처를 어디까지 끌고 갑니까? 창조주까지 끌고 와야 돼요.
예수 믿는 사람은 마치 ‘내가 예수 믿으니까 예수야’ 이 불교입니다. 불교.
창세기에 나와요.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그 욕망을 그대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주님이 우리와 하나가 된다고 하니까 이 ‘하나’ 개념을 이상하게 이해를 해요.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되니까 아들이 뭐 했습니까? 예?
창조의 능력을 발휘했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혀 힘없이 돌아가셨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어요.

주님이 우리와 하나잖아요. 기도 응답이 이루어졌잖아요.
그러면 성도는 뭘 자랑합니까? 십자가를 자랑하죠.
십자가 피만을 자랑하니까 모든 것들이 어떻게 돼요? 부정당해요.
심지어 내가 지금 닥친 현실이 가장 어려운데 내가 그 사람한테 이야기했어요.
‘제발 당신이 쓴 글과 기존 기독교에 쓴 그 목사들의 글과 비교하지 말라고. 십자가 피와 비교하라고.’
십자가 피와 비교를 하면 나는 뭐가 되죠?
그 피 앞에 죄인이 되잖아요.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가 닥친 그 현실이 가장 최악이죠.
그러면 비교를 누가 합니까? 타인과 비교해요.

그런데 성도는 말씀을 대하면서 놀랍잖아요.
“내 백성 아닌 곳에서 내 백성이 되게 했다.”
오늘도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래서 성도는 십자가만 밝히 보이는 겁니다.

여기에 보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이 말씀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는 잘 보세요.
이 세상에서는 이 땅에서는 제거당했어요.
제거당한 분이 부활하셨다라는 거예요.
부활을 하셔서 살아계시다면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활동해야 되느냐? 하면
구약적 하나님으로 활동해야 된다는 게 우리의 생각입니다.

물론 사도행전에는 마치 예수님이 행하셨던 표적과 기적과 역사를 제자들이 똑같이 보여줍니다.
똑같이 보여주는 이유는 계시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고요.
그걸 보여준다 한들 오늘날도 그러한 기적이 일어난다 한들.
계시에 의거하면, 말씀에 의거하면
그걸 듣고 보고 믿는 자들은 다 마귀의 자식이라는 것을 선언하는 내용입니다.

그 정도로 기적을 행했으면 사도 바울이 스데반이 돌 맞아 죽을 때
‘돌이여 스펀지로 변하라’ 그러면 모두가 회개할 거 아닙니까?
얼마나 간단합니까? 이렇게 생각을 못하는 것 같아요. 제가 목사들 보면.
모르겠습니다. 제가 너무 무시하는지 모르겠지만 사고를 그렇게 못해요.
기적을 그렇게 그렇게 이야기하면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고 휙 그 자리에서 죽었다가 3일 만에 일어나지 말고
바로 일어나 가지고 아니면 3일 만에 일어나셔서
누구한테 먼저 찾아가야 돼요?

‘야 본디오 빌라도 너 이리 와. 내가 죽었다가 살아난다 했지?
왜 병정으로 내 굴을 막았어? 너 백성들 다 모아. 지도자를 다 모아. 내가 주님이야’
이렇게 선언하면 되지 않나요?

‘증거를 보라’ 하는데 증거가 없다니까요.
그게 문제예요. 예수님이 증거를 다 보여주잖아요.
증거를 하나님의 아들 되신 증거를 다 보여주셨는데 아무도 그 증거를 못 믿어요.
왜? 소경이기 때문에.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살아계신 하나님이 누굽니까?
십자가에 달려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참아들이고
그 참아들에 의해서 십자가의 피로 용서받은 자들이 참 아들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참 아들은 양자의 영을 받았다 했잖아요.
그럼 양자의 영을 받은 자들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 되게 했고, 사랑치 않은 자를 사랑했다”라는
이 말씀의 요소를 안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사건을 우리 몸에 고스란히 담아서 육체 가운데 사는 저희들을
십자가만 자랑하는 주의 백성으로 삼아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왔기에 십자가만 자랑하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능력이 우리들 속에서 날마다 역사하기를
소원하는 주의 백성에게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