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4-06-09 20:56
20240609 로마서 강해 69강 롬 9:27-29 남은 자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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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4-06-10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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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9 로마서 강해 69강 롬 9:27-29 남은 자

하나님 말씀, 로마서 9장 27절에서 29절 말씀을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롬9:27~29)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아멘

지난 시간에 호세아 선지자의 예언을 갖고 와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부분에서 앞부분(롬9:25절)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이 말씀을
인용을 하시고요. 호세아 2장에 나오는 말씀이죠.

그리고 뒷부분(롬9:26절)에는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이렇게 말씀하심으로 말미암아
앞부분은 백성에 대한 이야기라면 뒷부분은 장소에 대한 이야기예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내 백성이라 일컬음을 받는다”
자 이 원칙이 창세기부터, 아브라함 때부터 지켜졌습니까? 안 지켜졌습니까?
다시 말씀드리면 그 롬9장 6절에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라는 이 말씀이
아브라함 언약에 해당되느냐? 되지 않느냐?라는 거예요.

아브라함을 선택을 할 때 여호수아 24장 2절에 보면
그 조상들이 우상을 섬기고 있을 때,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섬기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해서 불렀습니다.
아브라함의 선택은 내 백성 아니었는데 내 백성으로 만든 거예요.
그러면 이 원칙, 지금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약속의 씨라야 약속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는 이러한 원칙.
‘아니오’에서 ‘이다’라는 이 이게 언약이거든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십자가라는 자체는 ‘아니오’를 담고 있고
그 ‘아니오’를 ‘이다’라는 것으로 바꾸는 그 내용이 화목제물이에요.

선악과를 먹은 인간들은 선을 찾아요.
제가 그 페이스북에 ‘사람들은 성경 해석을 지금까지 유대교부터 시작하여서 기독교가 구원론 중심으로 해석해 왔다.’ 그러니까
‘그 증거를 대라’고 이야기를 해요.
성경에 보면 증거가 명확하게 나오죠. 어디에 나옵니까?
화염검으로 막았죠. 막으니까 막은 그 동편에 가인이 에녹성을 쌓잖아요.
그게 성경에 있어도 사람들은 그걸 깨닫지 못해요.

그 에녹성을 쌓는 이유는 에덴 동산으로 들어가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그 전쟁을 펼치는데 그 방식을 알지 못하죠.
알지 못하니까 자신의 방식으로 에녹성을 쌓고
그다음 가인이, 가인의 후손인 라멕이 등장하여서 라멕이 사는 그곳, 그 성을 뭘로 만들어 버립니까?
에덴 동산으로 만들었어요.
그러면 우리는 ‘그게 무슨 에덴 동산이냐?’ 하는데
라멕에게는 에덴 동산이에요. 금지할 법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 세계에.
라멕이 다스리는 그 세계에 금지할 법이 있어요? 없어요? 없죠.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이 7배인데, 자기를 상하게 하는 자는 벌이 77배라.
칠십이레. 칠십이레가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누구도 자기를 건드릴 자가 없어요.
그 라멕의 자리에 모든 인간이 가고 싶은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여서 선악과를 먹었잖아요.
그러면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느냐? 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자기를 계시할 때
“나는 하나뿐인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같이 된 인간이 하나님을 타자로 여겨서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하는 그 모습 속에서 하나님과 대등 관계로 과연 끝날 것이냐? 라고 하면
결코 끝나지 않는다라는 거예요.
그게 바벨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시험한 마귀도 마찬가지죠.
니가 나에게 절하면 내가 세상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라는 거예요.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으로 절대로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 구원 얻습니다’라는 이 복음은 맞아요.
근데 복음에 대한 정의가 다 달라요.
그 구원이 무엇입니까?
어떤 분이 제가 이런 식으로 설교를 하니까 저에게
‘그렇게 어렵게 설교를 해서 누가 알아듣느냐?’ 하는데
예수님 말씀은 쉬워서 못 알아들었어요? 어려워서 못 알아들었어요?
예수님의 말씀은 쉬워서 못 알아들었어요? 어려워서 못 알아들었어요?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구약을 싹 무시하고 말씀하셨습니까? 아니죠.
구약 전체를 깔고, 구약의 성취자로서, 율법의 완성자로서
인간들의 모든 논리를 담아와서 말씀을 하셨거든요.

문제는 예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육은 육으로 났기 때문에 영의 말씀을 알아듣지를 못하는 거예요.
개가 사람의 말을 못 알아듣잖아요.
근데 보면 개가 알아듣는 것 같잖아요. 그게 알아듣는 겁니까? 먹을 걸 줘가지고 종 삼아놓고.
개 길들이는 거, 이 음식밖에 없어요. 개가.

예수님에 대해서 생각하는 바가 그런 거죠.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
그러면 사람들이 ‘믿으면 안 됩니까?’라고 이야기를 하거든요.
‘그럼 믿는 게 뭐냐?’
‘말씀대로 믿자’는 거예요.
‘그래 말씀대로 믿는 게 뭐냐? 그럼 믿어서 천국 간다 치자, 천국이 뭐냐?’
‘아 천국이 믿으면 되잖아요’ 이렇게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한국교회에 적지 않아요.

왜 그러냐? 하면요.
이 한국교회의 그 바탕 자체가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라는 그 복음이 맞아요.
‘예수 천당’이라는 말이, ‘불신 지옥’이라는 말이 맞는데 문제가 뭐냐? 하면
그 내용 자체가 계시를 바탕으로 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 아니라
기존에 갖고 있던 극락사상을 끌고 와서 성경에 맞춰버렸어요.
그 이후에 물론 나름대로 똑똑한 사람들이 목사가 된 경우도 있지만요.
대부분이 엄청난 시기 동안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공부 못하고
고등학교도 인문계 고등학교 합격 못한 사람들이 신학교를 많이 갔어요. 성경학교를.
그들이 복음을 무식하기 때문에 모른다라는 얘기가 아니라

그들이 복음 전하는 방식이 뭐냐? 하면
‘믿으라’는 방식이었어요. 그 믿으라는 방식이 성경에 있는데 ‘믿으라’고 계속하고 있고
흥미로운 것은 우리 세대의 목사들조차도, 제 세대의 목사들조차도
성경에 대해서 질문을 하면 뭐라고 대답하는가? 하면 ‘기도하라’고 해요.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아무도 충격 안 받는 것 같은데
그게 신앙적인 태도라는 거예요.
묻지 말라는 거예요.

왜 ‘묻지 말고 믿으라’고 하는가? 하면요.
‘너나 나나 복받기 위해서 믿지 않느냐 그러니 니 믿을 대로 믿고 나는 내 믿을대로 믿고 그 중심에 우상 예수를 집어넣고 그냥 복받고 살자’ 이 얘기예요.
성경은 답변을 하는 순간 자기가 성경을 모르기 때문에 답변을 못해줘요.
성경에 대한 해석을 답변하는 순간요. 거기에 대해서 공격이 한 500가지가 날아와요.
왜냐하면 성경은 서로 충돌되는 구절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그래요.

지금 우리가 로마서 9장을 보더라도 앞과 뒤가 계속 충돌이 일어나잖아요.
충돌이 일어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들은 말씀을 장악할 수 있다라고 생각을 해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인간이 장악할 수 있습니까? 그게 가능한가요? 불가능하죠.

불가능하니까 또 뭐라고 하는가? 하면 ‘믿으라’는 거예요.
그럴 것 같으면 성경을 왜 주고 가르치는 선생들을 왜 세웁니까?
그 ‘믿으라’는 그 사람들 얘기를 좀 더 해보면 ‘그냥 믿자’는 거예요.
그래서 등장한 이단들이 문선명부터 시작해서 jms부터 시작해서 그런 부류들이에요.
jms의 기원이 그쪽이잖아요. 똑똑한 스카이 애들이 그쪽으로 넘어간 이유가
기존 교회에서 어떤 현실 문제에 대해서 말씀을 갖고 목사들이 답변을 해줘야 되는데
아무런 답변을 안 하고 믿으라고만 하니까 창세기만 보더라도 궁금한 게 얼마나 많습니까?

신천지가 왜 흥했습니까?
무료 신학원을 만들어 가지고 기존 교회의 나름 교사, 교수, 판검사도 있는 걸로 제가 알고 있는데
그 똑똑한 (제가 보기에는 다 무식하지만) 자기들은 똑똑하잖아요. 자기들은 똑똑한데
어쨌든 그들이 성경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질문을 하면
목사들이 ‘기도해라’

질문을 하면 지금 성경에 보면 질문하는 자와 질문받는 예수님이 있으시고
예수님도 질문을 하고 상대가 대답을 하잖아요. 그 방식으로 답변을 해줘야 되는데
목사들이 무식하기 때문에 성경 말씀에 대한 답변을 못해요.

그리고 질문이 왔을 때 모르면 모른다고 하면 되는데
지금까지 자기가 주님의 종 행세를 했잖아요. 종 행세를 했으니까 그걸 인정을 못해요.
그러니 좀 성경을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은 공부하러 가는 겁니다.
갔는데 또 그들은 아가리를 벌리고 있죠. 이단들은.

어떤 아가리를 벌리고 있습니까?
그들이 교회에서 불만을 갖고 있던 그 비판적 요소들을 다 지적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자기들이 옳은, (옳지도 않는데)
성경에 대한 그들이 갖고 있는 수준에서 옳은 해석을 해내는 겁니다.
그래서 신천지로 갔거든요.

원인이 교리를 가르친 교회에 있는 거예요.
교리도 (뭐예요?) 믿으라는 거예요.
교리를 따지면 뭐라고 하는가? 하면 ‘믿어야 되지. 왜 안 믿느냐?’는 거예요.

‘삼위일체를 설명해달라’고 하면 설명도 못하는 주제에
어떤 인간도 삼위일체는 설명이 안 돼요. 왜 안 되는지 아세요?
하나님을 인간이 어떻게 설명해요?
왜냐하면 삼위일체라는 자체에서
예를 들어 삼위가 하나인데 요한 일서에 나오는데
삼위가 하나이신 분이 요한복음에서도 나오는데
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가 십자가 지신 주님에 의해서 하나가 되거든요.
십자가에 의해서 하나가 되거든요.
이렇게 소개를 하면 삼위일체를 믿는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가? 하면요.
‘그것은 너무 성자 중심이다’라고 이야기를 해요.

방금 이게 성자 중심입니까? 계시 중심입니까? 계시 중심이죠.

그러면 반대로 그 사람들은 삼위일체,
창세기 전부터 계셨던 아들 하나님이 있고 아버지 하나님이 있고 성령님이 계셨다라고 주장을 하는데
그러면 제가 질문할게요.
‘설명해 보세요. 창세기 전에 계셨던 하나님을 설명해보라고요.’

자기들 스스로가 ‘계시된 하나님 외에는 다 우상이라’고 신학교에서 가르칩니다.
계시의 종교라고 해놓고.
계시의 바탕 하에서 말씀을 해석해야 되는데
하나님이라는 것을 계시해놓으니까
그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갖고 와서 자기들이 생각하는 하나님 개념을 다 만들어버렸어요.

요한일서 자체도 엉터리 해석이죠.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누가 말했습니까?
사도 요한이 성령을 받은 이후에 한 말이에요.
그러면 태초에 계신 그 말씀은 성령 받은 사도 요한이 하는 말씀으로 이해를 해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해석이 달라지죠.

유대인들은 창세기를 뭘로 봅니까? 십자가로부터 출발하지 않죠.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잖아요.
그런데 사도 요한은 창세기를 뭘로 봅니까?
십자가로부터 출발해요.

그게 로마서에도 똑같이 적용이 되는 겁니다.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하는 이 말씀이 한 번만 해당되느냐? 아니냐?의 문제예요.
근데 기존 신학에서는
신약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기 때문에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했으면
이제 그때부터는 나의 백성이라고 주장을 하는 거예요.
이게 구원파입니다.

그래서 구원파들은 극단적인 구원파들은 다락방이나 아니면 이 박옥수 이 계열은
‘십자가에서 다 용서하신 것을 믿어버리세요. 더 이상 죄책감도 가지지 마세요. 주님이 다 용서하셨습니다. 그 믿음이 있는 자는 앞으로 어떤 짓을 해도 용서를 다 받았기 때문에 진정한 자유인입니다.’
이렇게 가르쳐요.
순복음도 구원파...
그 영향이 개혁주의 교회도 똑같이 들어왔어요.

그러면 그 교리나 신천지 교리나 뭐가 달라요?
‘에이 우리는 성경적이고...’
‘성경적이라’고 이야기를 하려면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죠.
사도행전에는 정리를 해놨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누가? “하나님이”
순서가 이렇게 돼 있거든요.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나사렛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라고 하니까
또 삼위일체 믿는 이 인간들,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으니까 예수님보다 하나님이 더 높은 데 있으니까
그 하나님은 또 따로 상정을 해요.

이미 요한복음에서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봤고,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자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한다 하심으로 말미암아
너희들이 갖고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여서 한 아들 개념은 엉터리임이 드러났어요.

이미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의 말은
“아버지가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말은
너희들은 모르는 세계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그분의 아버지만이 유일한 아버지라는 거예요.
그럼 유일한 아버지를 믿는 방법은 딱 하나예요.
예수님을 믿는 방법밖에 없어요.

예수님을 믿고 경외하는 것이,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방식이에요.
왜? 아버지를 기쁘게 한 분은 예수님뿐이었기 때문에 그래요.

문제는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하는 이 원칙이 바뀌느냐?
안 바뀐다라는 겁니다. 이게 문제예요.
‘목사님 십자가에서 주님이 다 이루었으면 이것은 안 바뀌어야 되지 않습니까?’
맞아요. 안 바뀝니다. 뭐가 안 바뀌느냐? 하면요.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라는 이 말씀이 안 바뀌어요. 이 말은 이해하셨죠?
“내 백성 아니라 한 곳에서 내 백성이라”는 이 말씀이 불변하다라는 거예요.

말씀은 영원하려면 “내 백성 아닌 곳에서 내 백성이라”하는 이 말씀이 영원하다는 겁니다.
여기에 내 구원이 어디 들어갑니까?
이 말씀을 위한 인간 구원이 들어가죠.
처음부터 아브라함 언약은 이 내용이었어요.
그런데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여서 이삭, 야곱, 나중에 이스라엘 모두는 어디에 관심이 있느냐? 하면
내 백성 아니라는 것은 내 백성이라 했으니까 우리는 누구다?
‘하나님의 백성이다’라는 주장을 펼치기 시작한 게 야곱입니다.

두 번째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이죠. 약속의 땅입니다.
땅의 개념이 바뀌어져요. 땅의 개념.
이 말씀도 마찬가지죠.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내 백성이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이 말씀도 바뀔까요? 안 바뀔까요? 절대로 안 바뀝니다.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마태복음 2장에서 성취를 하셨죠.
그러면 예수님이 계신 곳이 곧 약속의 땅이 되는데, 예수님의 몸이.
그러면 이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되면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라는 이 내용이 성도 속에 담겨 있게 돼요.
사건이 담긴다는 거예요.

인간들의 문제는 사건을 이야기하면 지식으로 바꾸잖아요.
지식으로 바꾸면 그 정보를 지식이라는 것은 하나잖아요. 하나. 그걸 내가 챙기게 돼 있는데

복음은 지식으로 절대로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10장에 가면 복음을 전하고 지식으로 주거든요.
그러면 그 방식이 없느냐? 반드시 있어요.
그 방법으로밖에 복음을 못 전해요.

그렇게만 전하면서 주님은 그 지식 정보의 전달을 무엇으로 부정하느냐? 하면
성령을 통하여서 내가 이걸 들어서 믿는 게 아니라
십자가에서, 주님이 십자가의 피로 다 이루셨기 때문에
그 십자가의 능력이 나를 구원한다라고 바뀌어져요.

주님이 지금 살아계셔서 친히 구원하는 거예요. 자기 백성을.
사도행전에는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하니까
‘복음을 전하니까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이 있으니까 내가 전하니까 믿더라’ 이 생각을
사람들은 많이 하는데 그게 아니라

사도바울이 전했죠? 믿었죠? 영생 주신 자는 다 믿었죠. 이 말은 뭐예요?
바울이 전해서 믿었습니까? 주님이 직접 믿게 했습니까?
인간의 눈에는 바울이 전해서 믿었잖아요. 맞죠.

근데 이 원리가 왜 중요하냐? 하면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에 직접 복음을 전하셨죠.
전해서 믿었습니까? 못 믿었습니까?
그 정보가 믿게 못해요.

그러면 무엇이 믿겠습니까?
주님이 십자가 지시고 주가 되셔서 성령을 주시니까 믿었잖아요.

‘아니 목사님 성령 받은 자가 올바른 복음을 전하면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시지 않습니까?’
‘성령께서 깨닫게 했다’라는 말은
‘니가 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서 저 사람이 믿은 게 아니라’는 이야기예요.
만일에 그게 그렇게 된다면 주님이 십자가에서 덜 이룬 거예요. 덜 이룬 거.
주님이 십자가에서 10분의 9 정도는 이루어 놓고 10분의 1 정도는 사람에게 맡긴 거예요.
그게 무슨 주님입니까?
주님에 대한 설정을 우리들이 하는 거예요.

마치 여러분이 여리고성 전투에서 아간이 한 행동을 잘 기억해야 돼요.
사람들은 그 본문을 ‘아간이 전쟁에서 물건을 빼돌렸다’ 뭐 이 정도로 보는데
자세히 보게 되면 하나님이 7바퀴 돌게 하고 7일째는 7바퀴를 또 돌게 하죠.
돌게 해서 소리를 지르고 무너뜨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전쟁하는 방식이 뭔가? 하면
우리 같으면요. 무너뜨리고 싹 다 그 자리로 심판해버리면 돼요.

그런데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군대로서 여호와 전쟁에 참여시킵니다.
참여시켜서 그 전쟁을 하게 하죠. 하게 되면 어떤 인간이 나오느냐? 하면요.
원래는 아간이 다 인간들인데, 모든 인간들인데.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자기 공로를 챙기게 돼 있어요.

여호와 전쟁은 언약궤를 앞장세워서 오로지 여호와 홀로 싸우시고 이기신다.
이미 앞장서 가서 저들을 다 진멸한다 약속하셨잖아요.
직접 말씀하셨으면 그렇게 해버리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말씀 속으로 집어넣는 거예요.

집어넣는 이유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로 새롭게 창조하는 새 피조물이
주님의 증인이 될 때 어떤 모습으로 드러날 것인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사람들은 ‘주님이 다 하신다’ 하면
‘우리는 안 해도 되느냐?’ 이런 생각을 많이 하잖아요.
주님이 다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다 해야 돼요.
이렇게 말하면 ‘목사님 그건 믿지 않는 거 아닙니까?’
그러면 제가 반문할게요.
여러분 안 하는 게 뭐가 있어요?
주님 믿는다고 주님이 다 한다 해놓고 안 하는 게 뭐가 있냐고요.

목사들이 사기를 치는 거예요. ‘여러분 주님이 다 하시니까 믿고 기다리세요.’
믿고 기다리는 인간 아무도 없어요.
맨날 로또를 긁든지 남에게 어떤 사기를 치든지 그렇게 해요.
여호와 전쟁이 그런 거예요. 참여시킵니다.

참여시키니까 아간이 이 전쟁의 공로를 자기가 챙깁니다.
전리품을 챙기는 거예요. 전리품을 챙긴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살렘왕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린 것과 정반대 개념이에요.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취하지 않거든요.
그러면 약속의 땅 전쟁은 아브라함과 같은 전쟁을 해야 돼요.

그런데 한번 여러분 상상해 보세요.
여러분이 아브라함이라면 롯을 구하기 위해서 그 팔레스타인 전역, 유대 땅 전역을 저 북쪽까지
올라가서 목숨을 걸고 전쟁을 했으면 내 공로 챙기고 싶지 않겠습니까?
뭐 남의 이야기니까...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살아왔잖아요. 애쓰면서 살아왔으면
그게 여러분들의 돈입니까? 여러분의 건강입니까? 여러분의 가족입니까?
아니면 주님이 주신 은혜입니까?
쉽지 않죠.

아간이 왜 전리품을 챙겼느냐? 하면요.
아간이 특별한 것이 아니에요. 아간이 행했다는 것은 이스라엘 전체가 그 사고를 가졌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아간이 그 범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같으면 아간을 곧장 죽여버리겠죠.)
다른 사람들을 아이성 전투에서 죽이십니다. 전쟁은 그런 거예요.

전쟁에 참여했는데 한 게 아무것도 없다라는 말이 아니라 한 게 있는데,
‘한 게 있는데 나는 하지 않았고
오로지 언약궤로 인한 여호와께서 친히 싸우신 전쟁으로서 승리했습니다’라는 고백이에요.
그게 여호와 전쟁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전쟁은 공로를 누구한테 돌리느냐의 전쟁이에요.
이게 신약으로 오면 십자가로 승리했을 때
십자가의 피로 승리를 하셨다면 그 피공로를 덮어쓴 자들은
이 전쟁 승리의 공로를 누구에게 돌려야 돼요?
피 흘리신 분께 돌려야 되잖아요.
피 흘리신 분께 돌려드리려면 나의 믿음을 내세울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라는 게 로마서 4장 이야기예요.
또 반복을 하면 재미가 없으니까
그리고 장소 개념이 계속해서 바뀌고요.

그리고 이제 오늘 본문으로 넘어오는데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도 또 뒤집습니다.
사도 바울이 독특해요. 우리 같으면 순차적으로 인용하면 좋은데
꼭 뒷 것을 인용하고 앞에 것을 인용해요. 호세아도 마찬가지고.
지금 계속 그런 식으로 인용을 해요. 이유가 다 있습니다. 봅시다.
(롬9:27)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라”

이 본문은 이사야 10장 22절에 나옵니다.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20절부터 보면 이스라엘을 친 앗수르도 심판을 하고 이스라엘도 심판을 하고
그 이후에 하나님께서 이제 어떻게 말씀하셨느냐 (사10:20절)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뢰치 아니하고” 여기에 보면 이스라엘의 ‘남은 자’라고 하죠. 남은 자. 남은 자.

그러면 이스라엘의 남은 자가 누구냐가 이제 고민이 돼요. 뒤에 좀 더 봅시다.
사10: 22절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훼멸이 작정되었음이라”
이렇게 나와요.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을 때
이 ‘남은 자’가 단수라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돼요. 약속의 씨도 단수거든요.
그러면 머리 좋은 사람은 ‘이스라엘도 단수지 않습니까?’ 라고 나올 거예요.
다 맞는 말이에요.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 이사야 선지자가 10장에서 인용한 이 내용이 어디에 나오는지 혹시 아시나요?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이 내용이 어디에 나올까요?
창세기 22장입니다.

지금 로마서가 창세기 출애굽기 이렇게 넘어가면서 선지서까지 넘어왔는데
다시 창세기로 가요. 창세기로 가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 창세기 22장으로 가느냐? 하면
틀림없이 인간들이 무슨 주장을 하게 되느냐? 하면
‘로마서 4장에 나오는 그 믿음을 창15장에서만 인용한 건 맞지만 창22장의 믿음을 포함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아브라함의 믿음은 진짜 믿음이지 않습니까?’라는 주장을 펼치는 인간들이
남은 자 유대인입니다. 남은 자 유대인을 너무 얕잡아보는 거죠.

봅시다. 22장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시험하는 그 시험에 말려들어서 아들 이삭을 바칩니다.
그 바치는데 창22:15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하늘의 별과 같고”라는 표현은 어디에 나옵니까?

창세기 15장에 나옵니다. 조금 봅시다. 5절에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이 뭇별에 대한 이야기는 제가 알기로는 15장에 나와요. 별과 같이 하고

그다음 나오는 내용이 뭐냐? 하면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요 “바닷가의 모래와 같다”는 이 부분만 지금 이사야 선지자가 따온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하늘의 뭇별이나 바다의 모래나 그게 그거 아닙니까?’ 이렇게 생각을 하잖아요.

그런데 로마서 4장은 창15장을 갖고 왔다면
지금 로마서 9장은 창22장을 갖고 오는 거예요.
이사야로 하여서 이사야는 선지자니까 선지자를 건너서 어디까지 갑니까? 율법으로 가잖아요.
그러면 거기로 가서 지금 이 “바다의 모래와 같을지라도” 이 얘기를 왜 하느냐? 하면
22장에 아브라함이 독자를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두 가지를 동시에 말씀하셔서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게 하리라 했으면,
그러면 그전에는 15장에서는 어쨌든 제대로 된 믿음이 아니니까
그 약속이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오해한 약속으로 봤다 칩시다.

그런데 이제 22장 17절에 오게 되면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된 믿음을 보였잖아요.
야고보서에 나오거든요.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버려요.
그러면 여기에서 아브라함이 이 정도의 믿음을 보였으니까
“모래와 같을지라”라고 추가를 함으로 말미암아
이 “모래와 같을지라”는 이 말씀은 영원불변한 말씀이 되어야 된다라는 겁니다.
왜? 아들 이삭을 바쳤잖아요.

오늘날 흔히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야기할 때
로마서 4장을 이야기해도 사람들이 그 4장을 어디를 갖고 옵니까?
22장을 갖고 오거든요. 아들을 바친 그 믿음. ‘그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아 우리가 믿자’
아무튼 사람들이 이상해요.
로마서를 이야기하면서 로마서는 분명히 창세기 15장을 갖고 오고 있고
야고보서는 창세기 22장을 갖고 오는 그 이유를 알아야 되는데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죄들이 달라요.
죄들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방법으로 설명을 하는 거예요. 십자가를.

그런데 조직 신학이나 기존 신학자들은 정답을 찾으려고 하는 거예요.
‘믿음이 뭐냐? 행위가 있어야 되느냐? 아니면 믿음으로만 되느냐?’
백날 이야기해도 믿음은 내 믿음뿐이에요.
그게 로마서의 믿음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제 9장으로 넘어오면
‘그래 그래 알겠어. 15장은 그랬다 치자. 그랬다 치는데 그래 야곱도 그랬다 치자’
근데 어디로 와버립니까? 이사야까지 와버렸거든요.

약속의 땅에서 그들이 심판을 받고 난 뒤에 “남은 자만 돌아오리라”고 하면서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그러면 이 바다에 모래 같은 자들이 누구냐? 하면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독자를 아끼지 않는 그 신앙을 보인 이후에 받은 약속이에요.
그러면 그 약속은 폐해져야 됩니까? 아니면 지켜져야 됩니까? 이 얘기예요.
폐해져야 됩니까? 지켜져야 됩니까?
반드시 지켜져야 되죠.

지켜져야 되는데 지금 이사야 선지자로 가면 어떻게 됩니까?
“많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온다”라는 거예요.

말씀이, 언약이 바뀌었느냐?
바뀌지는 않았는데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죄인들이 죄를 드러내게 되면 언약이 새롭게 그들에게 계속해서 다가가게 돼요.
새롭게 다가가게 되면 그들이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언약 개념으로는
그 언약이 해석이 안 되는 거예요.

지금 이렇게 약속을 하셨으면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 나중에 바다의 모래같이 많아졌잖아요.
그러면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이 약속이 성취되어야 되잖아요.
실제로 열왕기상 4장 20절을 한번 봅시다. 솔로몬 왕이 통치할 때인데요.
“유다와 이스라엘의 인구가 바닷가의 모래같이 많게 되매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였으며”
아무튼 말씀이요. 만만치 않습니다.
딱 여기에는 뭐만 갖고 오는가? 하면 “바다의 모래 같이”
우리 같으면 하늘의 별, 별도 가져 올 거 아닙니까? 모래같이만 딱 갖고 와요.
그러면서 쭉 읽어볼게요.

왕상4:21절 “솔로몬이 하수에서부터 블레셋 사람의 땅에 이르기까지와 애굽 지경에 미치기까지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므로 그 나라들이 공을 받쳐 솔로몬의 사는 동안에 섬겼더라.”
이 내용이 왜 중요하냐? 하면요.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아 왕국이 이러하다라는 것을 미리 보여줍니다.
이사야가 예언하는 메시아 왕국,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아 왕국의 모델이에요.

좀 더 볼까요? 왕상4:22절
“솔로몬의 일일분 식물은 가는 밀가루가 삼십석이요 굵은 밀가루가 육십석이요 살찐 소가 열이요 초장의 소가 스물이요 양이 일백이며 그 외에 수사슴과 노루와 암사슴과 살찐 새들이었더라”
물론 솔로몬이 자기는 이렇게 잘 먹고 잘 사는데 백성들은 어려웠어요.
그런데 메시아 왕국은 완벽한 왕이기 때문에 왕만 잘 먹고 잘 사는 세계가 아니라
제자들이 자기들도 한 자리를 차지하는,
왜냐하면 모든 열국이 조공을 갖고 오거든요. 예언의 완성이.
그러니까 자기들도 이 솔로몬 왕처럼 잘 먹고 잘 산다는 기대를 품고 있는 게 메시아 왕국입니다.

조금 더 봅시다. 왕상4:24~25절
“솔로몬이 하수 이편을 딥사에서부터 가사까지 모두 다스리므로 하수 이편의 모든 왕이 다 관할한바 되매 저가 사방에 둘린 민족과 평화가 있었으니 솔로몬이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안연히 살았더라”
요 구절이 바로 에덴 동산 같은 하나님 나라예요.
이 내용이 스가랴에서 그대로 예언이 됩니다. 이 시절이 올 것이라고.

분명히 바다에 모래와 같이 많아졌잖아요.
그러면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독자까지 바쳐서 받은 약속이라면 솔로몬에서 끝내야 되죠.
끝내야 되잖아요. 저만 그렇게 생각합니까? 약속을 지켜야 될 거 아니에요.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그림자라는 겁니다.
그림자로서 이들이 범죄하고 심판받아서 이 약속이 장차 올 다윗의 자손,
다윗 언약에 의하면 하나님의 아들이죠. 그 하나님의 아들이 오시면
우리가 말하는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
다윗의 혈통으로 오는 후손이니까 그 후손이 와서 왕이 되면
이제 이때 완성하지 못한 최종적인 하나님 나라를 이룰 것이라고 기대를 한 겁니다.

그 기대를 한 상황에서 지금 이 말씀을 본 유대인들은 어떻게 보겠습니까?
왜 실패했는지를 따질 것 아닙니까?
그러니 계시를 뭘로 보느냐? 하면 역사로 보는 거예요.
실패한 이유를 찾아내는 겁니다. 찾아내어서
우상을 섬겼고 성전에서 우상을 섬겼고 법대로 안 했고.
그래서 법대로 하면서 메시아 왕국을 그들이 기다린 거예요.
그런 이후에 메시아가 오셨죠.

지금 로마서는 이미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주라는 것이 이미 전파된 이후입니다.
예수님이 주님인데
그러면 예수님이 주님이라는 이 말씀과
그러면 구약에 나오는 이 말씀 이사야 말씀과 연관이 있느냐? 없느냐?라는 이야기예요.
이거 옛날 이야기 같으면 사도바울이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하나의 ‘그랬었다’라고 하면 이사야 이야기를 할 필요 있어요? 없어요? 필요 없어요.

이사야가 창세기 22장을 인용을 하면서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라”고 함으로 말미암아
남은 자가 실제로 돌아옵니다. 바벨론에서 1차 포로 귀환이 있고
1차 포로 귀환이 BC 537년 정도 되거든요. 586년에 망했으니까. 37년 정도 되죠.
그리고 BC 536년경에 성전 기초 공사가 이루어지고
그리고 BC 516년에 스룹바벨 성전이 완공이 됩니다. 1차 2차 3차 그래서 3차에 또 돌아오고
느헤미야를 통해서 함께 돌아오는데 이들을 ‘남은 자’라고 하는 거예요.
그럼 남은 자가 단수입니까? 복수입니까? 집단적으로 복수잖아요.
그들이 남은 자로서 철저하게 ‘말씀 중심으로 돌아가자’라고 외치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잖아요.
왔을 때 지금 이 이사야의 예언을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들었을 때
이 남은 자가 누구냐라는 것을 알까요? 모를까요? 이 문제예요.
당연히 안다라고 봐야 되죠.
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잖아요. 로마서 앞부분에도 얘기했잖아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는 말에 (제가 로마서 앞부분을 할 때)
다윗도 들어가고 아브라함도 들어간다 했잖아요.

의인은 없어요. 의롭게 된 자만 있어요. 이걸 구별을 해야 돼요.
의인은 없고 의롭게 된 자만 있습니다. 의로운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지금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남은 자가 예수님임을 알아요.
그러면서 예수님임을 알고 예수님께서 자기 피로 양자의 영을 주셔가지고 백성을 만들었죠.
그걸 교회라고 하는데

그 백성을 만든 그들과 지금 이사야의 이 예언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라는 거예요.
이미 다 지나갔잖아요. 구약은.
“남은 자만 돌아오리라” 했을 때
‘남은 자가 그래 예수님이 맞다. 그래 참 이스라엘은 예수님뿐이다.’
왜냐하면 아들은 예수님뿐이었잖아요. 거기까지는 다 알아요.
성경이 어려운 이유가 거기에 있는 거예요.

지금 로마에 있는 교인들이 복음을 들을 때는 누구를 뛰어넘었나? 하면
유대교를 뛰어넘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남은 자인 걸 알고 유일한 한 분뿐인 걸 알아요.
지금 이 이사야 예언도 똑같거든요. 독특하게

로마서 그 뒷부분 봅시다. 롬9장 29절이죠.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라”
이게 씨도 이렇게 표현되는데 이 이사야 1장을 봐야 됩니다.
아까 1장을 봐야 되는데 제가 엉뚱한 걸 찾았는데

이사야 1장 9절을 봅시다. 이 부분은 9절을 인용했는데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이렇게 돼 있거든요.
“조금”이라는 것은 복수예요.

그런데 지금 로마서에서는 단수로 이야기해버립니다.
“우리에게 씨를 남겨두시지 않았더면”
‘씨’라고 이야기를 해버려요. 아예 노골적으로.
이 씨는 누굽니까? 앞부분에서 약속의 씨. 예수 그리스도예요.

지금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지금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복음을 아는 자들의 사고 방식이
지금 누구의 사고 방식으로 바뀌기 시작했냐? 하면
유대인들의 사고 방식으로 바뀌었어요.

‘남은 자는 예수님인 걸 인정해.
그리고 그 남은 자 속에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우리가, 남은 자가 들어가지’라는 이야기예요.
그러니까 그다음 뭐라고 주장하겠어요? 그럼 그다음 뭐라고 이야기하겠어요?
‘우리는 (뭐라고 할까요?) 남은 자다’를 이야기하겠죠.

그럼 이들에게서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한 이 내용은 빼버리고
‘내 백성인 자’만 남은 거예요.
“모래와 같이 많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었다”라는 이 말씀 자체가
누구한테 남아 있어야 되느냐? 하면 성도에게 남아 있어야 돼요. 이 말씀 자체.
변화된 내용이 성도에게 남아 있어야 되는데

선악과를 먹은 자들은 선이라는 지식을 낚아채서
‘모래와 같을지라도 남은 자 예수님만 구원받았고
예수님이 양자의 영을 주셔서 우리도 구원받았다’만 남은 거예요.
이렇게 되면 구약 필요 있습니까? 없습니까? 천지 필요 없는 내용이잖아요. 지금.

그러면 사도바울이 이 이야기를 왜 해요?
‘야 너희들 이거 알아라’ 이 이야기하는 겁니까? 아니죠.
말씀은 항상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죠.

말씀이 계시라는 말은
주님이 지금도 친히 살아계셔서 오늘 우리에게 창세기 1장을 말씀하시고
지금 오늘 로마서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지식을 아는, 선악을 아는 지식을 가진 자들은 이게 지식이 되면
인간은 모든 지식을 뭘로 해석합니까? 과거 역사로 해석을 하잖아요.
역사 해석법은 모두가 다 교훈으로 받아들이죠. 그러면 과거는 다 지나가 버리잖아요.

그런데 십자가는 영원해요.
십자가 사건은 2천 년 전에 단 한 번의 사건이지만
그 한 번의 사건을 히브리서에서는 영원한 사건으로 못 박아버렸죠.
그 방식은 어떻습니까? 독특하죠.
하늘 우편에 가서 대제사장으로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거예요.

간구하시는 그 내용은 실제로 자기 백성과 동행하면서
자기 백성 속에 십자가 사건이 반복되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복음을 전하는 곳이 예수님이 못 박히신 곳이 돼요.
그게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지식으로 받아들이면 이해가 안 돼요. 이게.
복음이라는 것이 꼭 양자 얽힘의 세계와 거의 흡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도 그렇게 표현하거든요. 동시성을 이야기해요.
“너희들이 죽였지만 하나님이 예정하신 대로 일을 하셨다”
인간은 이 둘을 해결을 못해요. 밸런스를 못 잡는다고요.

그러니까 ‘에라 모르겠다. 다 믿자.’ 이래 나오는데 다 믿는다고 해결 안 돼요.
왜냐하면 성경은 십자가를 전하면 우리는 말씀 앞에, 말씀이 복음이잖아요.
그럼 복음 앞에 우리는 죄인으로 드러나면 되는데 인간들은 죄인으로 드러날 마음이 없어요.

그래서 지금 이 사도바울이 이사야서를 인용해서
“모래와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라” 이 말씀을 싹 당김으로 말미암아
지금 이 말씀을 듣는 자들이 이렇게 책망을 하는 겁니다.
이 책망이 먹히면 성도고요. 안 먹히면 성도 아닙니다.

‘에이 목사님 나중에 먹힐 수 있지 않습니까?’ 그 말은 누구만 할 수 있느냐? 하면
그 말 하는 당사자가 주님이라면 그 말씀을 할 수 있어요.
“너희 중 하나는 마귀니라”라는 이 말씀은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에요.

근데 우리는 예수님 편에 서가지고 자기가 마치 주가 된냥
‘그래 마귀는 처음부터 지옥 가기 위해서 선택받지 않았느냐?’
죄인 주제에 말씀을 감히 자기가 장악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성경을 보는 관점 자체가 엉터리라는 거예요.

“빛이 있으라” 할 때 빛이 ‘충성’하고 나타났습니까?
없는 데서 있게 됐잖아요. 그 말씀도 마찬가지예요.
“너희 중 하나는 마귀니라”라는 말은 없는 데서 있게 만드는 마귀예요.
그들 눈에는 마귀가 없어요.
제자들, 12제자 중에 어느 누구도 마귀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다음 이 내용이 어디에 나옵니까? 창세기 32장이죠.
창세기 32장 사람들이 짜증 내는 이유가 뭐냐? 하면 복음을 전하는데 계속 반복을 하거든요.
이 성경을 읽으면서 ‘목사님 짜증 나니까 그 얘기 그만하고 결론만 얘기하세요.’

이 과정이 들어가야 우리의 죄가 나와요. 지금 창세기 22장에서 야곱으로 넘어가요.
근데 32장 12절입니다. 야곱이 지금 에서와의 대면을 앞두고 초조해해요.
불안에 뜹니다. 불안에 뜨는데 기도가 나오는 거예요.
원래 코너로 몰리면 기도해요. 우리도 다 믿음이 좋아서 기도 안 하다가요.
코너로 몰리면 ‘주여~’ 기도 절로 나오죠. 그걸 부르짖음이라고 합니다.
물론 응답은 십자가만 밝히 보이게 해요.
돈을 많이 벌게 해주든지 쫄딱 망하게 해주든지 가정이 화목하게 해주든지 완전히 풍비박산이 나든지
십자가를 위한 세상이기 때문에 그래요.

여기에 보면 야곱이 뭘 갖고 뻐기느냐? 하면 창세기 32장 11절부터 봅시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하옴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냄이니이다”
자기와 처자를 치는 게 왜 겁내느냐? 하면
자기와 처자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그 약속의 성취물이기 때문에 그렇다라는 거예요.

그 내용을 12절에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정녕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지금 야곱에게 직접적으로 이 말씀을 하신 적은 없어요.
큰 민족을 이룰거다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 구절은 방금 읽은 창세기 22장에 있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을 끌고 왔어요. 자신의 정당성.

그러니 지금 자기의 처자와 자신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약속하신 약속의 성취가 아닙니까?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는 그 말씀의 성취가 아닙니까?
지금 그런데 형 에서가 우리를 쳐버리면 하나님의 약속은 뭐가 되느냐 이 얘기예요.

논리가 어때요?
제대로 된 기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기도해요.
‘약속을 붙들고 기도하면 들어줍니다.’
약속을 붙들고 기도하면 들어주시죠.
그 약속의 성취가 십자가니까 같이 죽자 이거예요. ‘너 죽어라’ 이렇게 응답을 해요.

그런데 대체로 ‘약속을 붙들고 말씀대로 믿고 기도하면 들어줍니다’라고 하면 그들은 뭘 이야기해요?
하 목사들이... 내가 화가 나는 게 왜 화가 나느냐? 하면
복음을 실컷 이야기해 놓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 이걸 가르쳐요.
자기가 지금 무슨 말 하는지도 몰라요.

제가 이 얘기를 왜 하느냐? 하면
기도를 할 때 모든 기도, 다윗의 기도나 모든 기도가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로 수렴이 돼요.
수렴이 되면 그다음은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할 때
모든 기도들이 구약에 나오는 그 기도들이 다 나와요. 제자들의 기도까지 다 나옵니다.
우리가 코너로 몰리면.

그러면 그 기도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경유해 버리면 어디로 갈 겁니까? 응답이?
십자가로 올 거 아니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완료했다 해도 사람들은 그걸 못 받아들여요.

지금 야곱이 약속을 붙들고 기도하면 응답해 주셔야 되죠. 응답합니다.
다 보내놓고 혼자 얍복 강가에서 있을 때 누군가 나타나서 뭔가 시비를 거는 것 같은데,
여기에 보면 그 창32:22절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나루를 건널새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네며 그 소유도 건네고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어떤 사람이 왜 등장했는지는 몰라요.
그런데 야곱에게는요. 자기 앞에 걸리적거리는 것은 다 자신의 대적자입니다.
자신의 대적자는 곧 누구의 대적자입니까? 언약의 대적자, 약속의 대적자예요.

붙었어요. 붙어서 이겼습니다.
이겼는데 날이 새려고 하니까, 간다라고 하니까 눈치챈 거죠.
그전에 마하나임을 만났잖아요. 마하나임을 만났으니까 얼마나 신이 나서 싸웠겠어요?
사람들이 밤새도록 기도하고 주님이 승리할 거라 할 때
주님이 내 편이라는 그 그렇게 되면 에너지가 확 올라가잖아요. 지금.

이겨버렸어요. 이겨버렸는데 상대가 누구였어요? 하나님의 천사였어요.
누구인지도 몰랐어요. 나중에는 브니엘이라 하죠.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였으나 살아남았다는 겁니다.
왜 이렇게 싸웁니까? 방금 기도했던 그걸 지키기 위해서.

그런데 기도의 응답이 뭐예요? 쳐버립니다.
이 환도뼈를 쳤다라는 것은 남자 구실 끝났다라는 거예요.
지금까지 야곱이 형을 속이고 한 모든 것들이 원천을 제거한 거예요.
그래서 야곱이 복을 다 받았다 했잖아요. 아브라함의 복을.
분명히 기도할 때 복을 다 받았다 했는데 복을 달라는 거예요.

그리고 여기에서 야곱은 복이 그게 아니라는 걸 눈치를 챈 겁니다.
그래서 축복해 달라는 거예요. 축복의 내용을 한번 보세요.
이 말이 안 되거든요. 이름을 바꿔요.
“야곱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여기에서 또 신이 나잖아요.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겼다’라고 할 때
과연 이기는 것이 이기는 거냐? 안 그러면 죽는 게 이기느냐? 라는 거예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는 것은 분명하게 실질적으로 에서가 야곱을 섬긴다는 말씀이 맞는데
예수님으로 오게 되면 큰 자 되신 예수님이 섬기는 자가 되셔서
섬기는 자가 큰 자로 드러나요.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이 해석을 못해요.

인간은 그 말씀을 단일하게 해석을 해서 명확한 정답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잖아요.
이 야곱이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얻어터지고 울며 간구하여서 받은 축복이 이름이 바뀌었어요.
이름이 바뀐 이후에 이스라엘의 모습, 꼴을 여러분이 잘 아시죠?
어떻습니까? 이름이 바뀐 후에 야곱의 생애가 어땠어요?

이름이 바뀌기 전에 야곱의 생애는 그야말로 승승장구했습니다.
그런데 이름이 바뀐 이후는 어떻습니까? 꼴아박죠.
어디까지 꼴아박습니까?
아브라함의 약속이 자기 가운데 성취가 되었다면
약속의 땅을 차지하여서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자의 모습을 보여야 되는데 어디로 가버려요?
애굽으로 가버려요. 충격적입니다.

지금 이사야 선지자가 창세기 22장을 끌고 왔죠. 그다음 32장을 끌고 왔습니다.
이들이 이 내용을 다 알아요.
그런데 아는 게 소용없는 게 뭐냐? 하면
지금 아브라함도 부정하고 이삭도 부정하고 계속해서 지금 부정하면서
남아 있는 말씀만이 영원하다. 이사야가 그 예언을 하거든요.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여호와의 말씀은 영원하다”라고 할 때
이스라엘의 사람들은 자기들을 남은 자 위치에 두어서
‘그래 말씀은 영원하니까 나는 구원이 될 거야. 이스라엘은 구원이 될 거야.’라고 생각한 거예요.

근데 그 생각을 누가 또 갖고 있는가? 하면
‘예수님이 남은 자로서 약속을 성취했으니까 나는 구원되고 나는 천국 갈 거야’라는 사고 방식을
로마에 있는 교인들이 하는 겁니다.

그냥 잔소리하기 위해서 이 말을 할 것 같으면 그냥 잔소리잖아요.
근데 사도바울이 지금 자기 생명이 (어느 정도로?)
내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마음으로 지금 로마서를 쓰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이사야 로마서 9장 27절에서는 이사야 10장을 인용하고
로마서 9장 29절에서는 이사야 1장을 인용하면서
“모래 같을지라도”라는 이 내용을 강조하는 거예요. 강조하면서 남은 자만,

그리고 29절에서는 조금 남겨두었다라는 이야기를 바꾸었거든요. 29절은
“조금 남겨두지 않았더면 소돔과 고모라와 같았으리라” 하는데,

롬 9:29절에서는 “우리에게 씨를 남겨두지 않았다면” 단수를 이야기를 해버려요.
왜 이렇게 가는지 눈치를 채야 됩니다.

이 씨는 약속이신 예수 그리스도 뿐이에요.
그분만을 남기기 위한 남은 자들이 돼요. 그래서 말씀이...
인간은 자기 구원의 확정성을 위해 보기 때문에
언약이라는 것을 붙들고 구원은 불변할 것이라고 보잖아요.

다시 뒤로 가게 되면,
접붙여진 감람나무가 만일에 복음에 합당하지 않으면 잘라버린다는 이 말씀이
언약대로 한다라는 이야기예요. 왜?
남은 자가 모래와 같이 많을지라도 씨만 남기는 겁니다. 씨만.

‘나’라는 것을 인간은 부정을 못해요. ‘나’라는 자아를 부정 못합니다.
이 ‘메타 자아’가 되면 메타 자아가 무한대가 되거든요.
‘내가 믿는다’라고 할 때
‘나를 믿는 나’를 부정할 수 있느냐? 하면 ‘부정할 수 있다’라고 하면,
‘나를 믿는 나’를 부정하는 그를 부정할 수 있느냐? 하면 부정을 못해요.
육이 있는 한 나는 무한대로 확장이 돼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는 이 말씀은
니가 할 일이 아니고 십자가의 피로 할 일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십자가 사건을 성도의 몸에 확 덮어씌워버리면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르는 모습이 돼요.
그게 십자가를 자랑하는 모습인 겁니다.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것은
나는 아니고, 피 흘리신 그분만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고,
그분의 주되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거예요.

사람들은 십자가 십자가 이야기하니까 죄를 용서하는 도구로만 생각하는데 그거 아니에요.
십자가 자체가 신구약 성경 전체를 다 삼키고 있습니다.
그 안에 다 응축이 돼 있어요. 온 우주를 다 담고 있습니다.
그게 지금 로마서에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로마서가 옛날 구약 이스라엘이나
아니면 복음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지금 이 구절들을 끌고 오는 이유가
바로 지금 복음을 들었다고 하는 자들의 사고도 이들과 다르지 않다라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님 왜 다르지 않습니까? 성령을 줬으면 달라져야 되지 않습니까?’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겠죠.

성령은 뭘 하십니까? 책망을 하죠.
‘변화를 받는다’라는 것은 그 변화라는 것은
우리는 변화를 받아 뭔가 새사람이 된다 했을 때는
바뀌어서 더 이상 십자가의 피가 필요 없는 인간이 된다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런데 성령을 받게 되면 변화를 받는데
그 변화된 성도들은 십자가의 피만을 증거 하는 자리로 내몰립니다.
내몰리는 자리가 구약 이스라엘이, 야곱이 믿었던 그 믿음을 반복해요.
인간은 그 구조에서 못 벗어납니다.

복음을 제대로 듣게 되면 그 복음을 받아들여서 믿게 돼요.
그 믿음은 인간은 포기를 못해요.
‘나는 안 믿고 아는데요.’ 알아도 믿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바뀌느냐? 하면
지금 남은 자들이죠. 남은 자들이 등장한 때가 종말이니까.
그들이 가진 사고 방식으로 성도들이 똑같이 흘러가게 돼 있습니다.
그래야만 십자가만 자랑해요.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도 바울을 한번 봅시다.
사도 바울이 ‘나는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라고 했어요.
죄인 중에 괴수라 했잖아요.
그러면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라는 이 말을 했다면 그는 어느 위치에 있는 겁니까?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하는 그 위치에 있는 거예요.
이게 구원입니다. 이게 구원이에요.

“내 백성 아니라 한 곳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그 위치에 있는 자가 사도 바울이에요.
그런데 인간은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 속으로 들어가기를 싫어해요.
구원을 챙기고 싶어 하는 겁니다.

그것도 지금 이때도 환란이 있었지만 네로 황제가 등극하면요.
흥미로운 게 이런 거예요. 이 십자가 사건으로 확 몰아 넣어버려요.
이때는 그래도 약간 네로 황제 때보다 덜했잖아요.
좀 있으면 네로가 등장하거든요. 등장하면 확 밀어넣어버립니다.
말씀 속으로 집어넣어버려요. 집어넣어버리면 십자가의 증인이 돼요.
‘내 구원받았다’가 아무 소용없습니다.
죄인 중의 괴수로밖에 안 드러나요.

심지어 내가 주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 하더라도 뭐라 합니까?
고린도전서 13장에서는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 해요.
그 말씀이 응한 자가 주를 위해 순교당한 자예요.
자기가 주를 위해 죽으면서 십자가가 최고지 내가 죽는 거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내 죽음이 무슨 복음에 유익이 됩니까?
그 내용을 지금 말씀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죄인 중에 괴수라.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
이 말이 사람들은 뭘로 듣느냐? 하면
왜 십자가만 자랑하느냐라고 그걸 봐야 되는데, 상황을 봐야 되는데,
사건 속에서 왜 그 고백이 나오는가를 봐야 되는데
‘십자가만 저는 자랑합니다. 십자가만 믿겠습니다.’ 그건 무슨 말이에요?
십자가라는 걸 구원 용도로 끌고 온 거예요.
김성수 목사가 몰랐던 게 이거예요.

왜냐하면 정답을 찾은 거예요. 정답을.
왜냐하면 어릴 때부터 배운 게 정답 찾는 것밖에 못 배웠거든요.
근데 십자가라는 것은 사건이거든요.
사건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을 못하는 겁니다.

한 번만 더 말씀드릴게요. 아브라함이 15장에서 믿었잖아요.
그 믿음이 엉터리임이 16장 17장으로 가서 사건 속에서 들통 나버렸잖아요.
그러면서 22장으로 가면 믿음이 괜찮은 것 같잖아요. 이삭을 바쳤으니까.

이삭을 바친 것은요. 아브라함 자기 믿음이 없다라는 고백이에요.
왜냐하면 아들이 자기를 구원하기 때문에.
‘그게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한다면
약속의 씨가 아브라함을 구원하잖아요. 이런 것도 진짜 어려워요.

이삭을 바쳤다라는 것은
내가 믿어서 구원된 게 아니고
약속의 자손이 내 믿음 없는 자를 (로마서에 의하면) 아들의 믿음으로 구원했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게 창세기 22장 이야기예요.

근데 야곱은 어떻게 해석을 합니까?
‘믿었으니까 약속을 받았으니까 모래와 같이 많아야 된다’는 거예요.
사건 속으로 또 집어넣어버리죠.
사건 속으로 집어넣으니까 정리된 그 약속이 어떻게 됩니까?
박살나버리죠. 누가 누구를 공격합니까?
그 약속을 믿는 자가 약속을 깨는 당사자가 돼요.

로마서가 어려운 이유가 구약을 다 깔고 있고 사복음서를 다 깔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사도 바울이 왜 이렇게 말씀하느냐?
성도는 책망을 받는 자들이에요. 책망을.
복음을 아무리 안다고 해도 그 앎이 아무 소용 없어요. 그게 구약이에요.

심지어 체험을 했잖아요.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체험해도 안 돼요. 체험해도 안 돼요.
눈앞에 불기둥 구름 기둥 보고 있어도 배고프면 이 웃기는 일 아닙니까?
우리가 지금 여기에 불기둥이 있으면 배고프다고 말하겠습니까?
아마 자신만만하게 ‘말 안 한다’ 하겠지만 천만의 말씀이에요.
불기둥은 익숙해지면 끝입니다. 만나도 신나지만 며칠은.
익숙해지면 끝이에요.
그게 인간의 탐심이 작동하는 몸이에요.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친히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서
우리와 동행을 하셔서 직접 십자가에 다 이루신 일을 우리 몸속에 이루어 내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선악을 아는 지식을 소유했기에
복음조차도 지식으로 만들어서 정보로 만들어서 뇌 속에 집어넣고
말씀의 사건 속에 합류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증인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 구원을 챙기는 그러한 죄인으로 밝혀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 속에 던져놓으시고 흩어놓으신 이유가
십자가 사건 속에 합류하여서 십자가만 자랑케 하기 위한 주님의 증인으로,
주의 백성으로 날마다 드러나게 하시기 위함임을
날마다 믿고 감사하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말씀의 사건 속에 합류하기를 소원하는 주의 백성에게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