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4-06-17 06:48
20240616 로마서 강해 70강 롬 9:30-33 걸림돌 올무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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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4-06-17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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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6 로마서 강해 70강 롬 9:30-33 걸림돌 올무

하나님 말씀, 로마서 9장 30절에서 33절 말씀을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롬9:30~33)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아멘

성경을 인간 구원론 중심으로 보는 경향이 2천년 기독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보느냐?
그건 유대교의 영향을 그대로 받았기 때문에 그래요.

세상 모든 종교가 사람의 구원이 없으면 종교로 인정을 못 받아요.
구원이라는 것이 내가 해탈을 해서 신이 된다든가 아니면 기로 돌아간다든가
김용옥씨 같은 경우에는 자기가 예수라 그러거든요.
어떤 페이스북에, 제 글에 대한 댓글을 쓴 사람이
예수는 우상이고 자기가 신이라 했다가 죽었다는 거예요. 우리가 예수라는 겁니다. 자기가.

뭐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죠.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그 욕망, 오늘 잠언서에서도 읽어보았지만
그러한 욕망이 없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복음을 아니까 나는 그런 게 없다.’ 구원파 애들이 그 짓을 하거든요.
‘십자가의 피로 모든 죄를 용서했기 때문에 그것을 믿기만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라고 주장을 하는데
이 사람들은 뭘 모르느냐? 하면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가졌으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요.

하나님의 아들이 성령으로 잉태되셨잖아요.
성령으로 잉태된 분이라면 다시 성령 받을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인간들의 논리는 다시 성령 받을 필요가 없다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성령을 받으시는데 다시 받죠. 어디에서 받습니까?
물에서 물세례 받고 올라올 때 성령을 받으시잖아요.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주기도문에 의하면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그 내용을 담은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그 예수님이 성령을 받았으니까 마귀가 시험하는 광야로 누가 몰고 갑니까?
성령 충만받은 예수님을 누가 어디로 몰고 가요? 성령께서 어디로 몰고 갑니까?
마귀가 있는 광야로 몰고 가죠.

여러분이 성령 충만 받았다면요. 마귀를 만나야 돼요.
‘저 목사님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데?’
마귀가 활동하지 않는 곳에는 무엇이 없느냐? 하면 십자가가 제거돼요.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는 기독교는 ‘마귀를 없애자’는 거죠.
우리 오 집사님은 끄덕거리시는데 저도 마찬가지고요.
어릴 때부터 모태 신앙으로 이렇게 신앙생활을 할 때 올바른 신앙은 뭐냐? 하면
마귀를 없애는 거예요. 그래서 ‘마귀들과 싸울지라 죄악 벗은 형제여~’
철야기도 많이 했죠. 마귀를 없애달라고. 장로님은 지금 70이 넘으셨는데 얼마나 기도 많이 했겠어요?
교회에서 계속 그것을 가르치는 거예요. ‘마귀와 싸워서 이겨야 된다.’

성도는 마귀와 싸워서 이길 필요가 없어요. 주님이 승리했기 때문에.
그러면 주님이 십자가로 승리한 그 승리에 참여한 자가 되면
간단합니다. 그 피공로가 자랑스럽고 피공로를 자랑하면 돼요. 그게 승리자의 모습이에요.

‘목사님 그러면 피공로만 말만 하면 됩니까?’
말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십자가로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영이 성도에게 들어왔기 때문에
성령께서는 계속해서 마귀가 활동하는 곳으로 몰아붙이면서
십자가로 승리한 현장으로 성도를 인도하십니다.
그게 우리가 사는 ‘체험 삶의 현장’이에요.

마귀를 자꾸 없애려는 의도가 뭐냐? 하면 이 하나님의 주권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우리 홈페이지에 다 올려놨잖아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글을 좀 어렵지만
창세기부터 전체적으로 흐름에 대해서 한 8편 정도 올려놨는데 조금 읽어보시고요.

마귀를 없애는 이유가 뭐냐? 하면 주권을 실현해야 된다는 거예요. 주권.
하나님의 주권이 뭐냐? 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주권’이 십자가 지신 예수님에 의해서 주권이 바뀌었어요.
이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하거든요. 제가 수요일도 그런 얘기했지만

이 땅에서의 주의 모습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모습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려면
유대인들이 기다렸던 메시야 왕국으로서의 다윗 왕국의 모습을 띤 것이 하나님의 주권 인정이에요.
그러니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자들의 머릿속에는 무엇이 담겨 있느냐? 하면요.
로마 제국이 담겨 있어요. 제가 글에도 썼지만.

로마 제국이 왜 중요하냐? 하면요.
로마 제국이 예수님을 살해했거든요. 예수님이 오실 때 로마 제국이었잖아요.
그런데 그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끌고 옵니다.
국교로 끌고 와서 그 로마 제국을 하나님 나라처럼 만들었어요.
아마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은
대한민국이 그러한, ‘정말 하나님의 주권이 이 땅에 실현되는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는 어느 쪽입니까? CCC 맞죠?
‘하나님의 주권을 이 땅에!’ SFC 고신측 학생 신앙운동.
여기 간사 출신 둘이나 있는데 쫓겨나지만.

그 사람들이 머릿속에 무슨 개념을 갖고 있느냐? 하면
광화문에서 활동하는 그 의식을 갖고 있어요. 빨갱이는 다 죽이고 마귀는 다 없애고.
마귀를 다 없애면 누가 왕 노릇할까요?
자기가 왕 노릇하거든요. 이게 악마적 사고인데

이 ‘하나님의 주권 사상’이
교회에 그대로 들어왔고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갖고 있고 심지어는 죽어서 가는 그 천국 개념도
이 하나님 나라 개념을 갖고 있는 거예요.

성도들의 주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주님이에요.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당신의 설교가 톱라이트랑 비슷하다’ 얘기하는데
톱라이트가 한 20년 정도 히트를 치고 있거든요. 그 사람도 얘기하죠.
‘예수님의 주되심을 증거하는 것이 성경 말씀이다’라고 이야기를 해요. 이건 박수 칠 일입니다.
그리고 ‘바울에 대한 그 새로운 관점’ 그거는 자기 마음대로 해석한 거고요.

어쨌든 기존의 기성교회가 갖고 있던 ‘이신칭의 교리’라든가
이런 것들에 대한 그 공격에 대해서는 인정할 부분들은 많아요. 많은데 문제가 뭐냐? 하면
예수님의 주권을 이야기할 때 그 주권의 자리는 죽으심의 자리라는 것을 말을 못해요.

왜냐하면 방금 제가 설명을 했잖아요.
‘하나님 나라’의 개념이 어디에서부터 출발합니까? 우리 장로님은 읽어보셨으니까
에덴에서부터 출발하거든요. 하나님 나라 개념이.

에덴이 하나님 나라의 이미지예요. 누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는 에덴이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불교를 가든, 유교를 가든, 어디를 가든
그 에덴 동산 같은 천국을 다 이야기해요. 물론 그 에덴 동산은 다 달라요. 다 다릅니다.
이슬람도 다르고 여호와의 증인도 다르고 그 둘은 비슷비슷한데 만민중앙교회도 다르고 다 다른데

공통점이 뭐냐? 하면요. 공통점이 뭘까요? 한번 맞춰보세요.
에덴 동산이라고 할 때, 천국이라고 할 때, 모든 종교의 공통점이 뭐예요?
내가 행복하게 사는 거예요.
그런데 이 사상이 어디에 들어와 있느냐? 하면요.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신 그 약속의 자신들 속에 언약을 따라 기다리는 메시야 왕국이 있죠.
그 메시야 왕국과 일치한다라는 겁니다. 정말 로마서 이야기예요.
로마서 1, 2장에 출발할 때 유대인들은 율법이 있지만 이방인들은 뭐가 있다 했어요?
양심이 있다 했잖아요. 맞죠? 잘 들어야 됩니다. 우리 젊은 친구들.

율법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수준이 높다라고 생각을 하는데
로마서를 지금 오늘 본문이 왜 이렇게 중요하냐? 하면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다”라고 이야기를 하거든요.
그러면 바울이 9장에서 자기 친족, 유대인을 이야기하다가 이방인이 의를 얻었다 했을 때
‘이 이방인은 누구냐?’ 라는 이야기가 굉장히 중요해요. 저 혼자 흥분하는데 이게...
페이스북 가서 좀 보세요. 논쟁하는 거.
이 이방인이 누구냐라는 거예요. 여러분 보기에 이방인이 누구인 것 같아요?
백이면 백이 이 이방인을 이방인으로 봐요.

지금 로마서에서 앞서서 9장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이스라엘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라고 했죠?
아브라함의 씨가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죠. 지금 이 말귀를 못 알아들어요.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오”라고 하니까
‘이스라엘 중에 어떤 사람은 이스라엘이고 어떤 사람은 아닌 사람도 있다’라고 이렇게 생각해요.
대부분 그렇게 해석을 해요.

그런데 뒤에 가면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하잖아요.
남은 자가 되려면 내 백성 아니어야 돼요.
달리 말하면 이스라엘이 아니어야 된다라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지금 9장에서 계속해서 넘어오는 이 내용들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 하면
예수님에 의해서, 약속의 씨에 의해서 ‘모든 인간들은 내 백성 아니라’는 거예요.
지금 로마서를 이해를 하려면 사복음서를 알아야 돼요.

사복음서에 마태복음 2장만 보더라도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하시잖아요. 예수 이름을.
예수님이 어디에 왔습니까? 약속의 땅에 왔죠.
약속의 땅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을 때 그곳에 있는 헤롯 왕입니다.
마태복음 제가 설교할 때도 언급을 했지만

왜 하필 그 시대에 총독이 지배하지 않고 왕이 지배하느냐? 이 얘기예요.
약속 때문에 그래요. 뒤에는 총독이지만.
역시 지금 여기에는 왕이에요. 유대인의 왕은 누굽니까? 그 당시에?
에돔 왕이에요. 그 헤롯 왕입니다. 에돔 사람.

그 사람만 힘을 합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을 중심으로 서기관들과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 장로들이 합세하여서 예수님을 공격하죠.
그래서 호세아 예언을 이루어버립니다.
성취하는 방식이 뭐냐? 하면
호세아는 분명히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죠. 출애굽 사건을 이야기하는데
그 사건은 그림자이기 때문에 실질적인 그 출애굽 사건은 누구에게만 해당되느냐? 하면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거예요.
이 말씀이 왜 제가 이렇게 답답해하느냐? 하면 자꾸 사람들은 사람을 집어넣으려고 해요. 거기에.

이렇게 되면 어떤 사태가 벌어지느냐? 하면
약속의 땅이 애굽이 되죠. 약속의 땅이 애굽이 되고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하면 애굽이 뭐가 되죠? 애굽은 원래 애굽이었고
그러면 예수님이 계신 곳만이 유일한 출애굽의 자리가 돼요.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 전체가 애굽이 돼요.
그게 요한복음에서는 ‘어둠’이라 합니다. 어둠.

로마서에서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모두 죄 아래 가두어 두셨다’ 이렇게 하면
여기에 이스라엘이 있어요? 없어요? 없잖아요.
‘목사님 혈통적으로 있잖아요?’ 라고 하면
9장에서 ‘약속의 씨라야 약속의 자녀라’고 분명히 얘기를 했잖아요.
이미 구약에서부터 혈통을 부정해 왔습니다.

‘목사님 그런 것 갖고 왜 그리 흥분합니까?’라고 이야기하는데
지금 이런 본문 해석 하나하나가 무엇을 제거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일을 제거해요.
십자가를 뭘로 만들었냐? 하면
‘인간 구원용’으로 만들어버리고 ‘인간을 위한 십자가’로 바꿔치기 하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 이야기하다가 말았는데 ‘하나님 나라’라는 것은 에덴부터 출발하죠.
에덴부터 출발을 하게 되면 그 에덴 동산을 꿈꾸는 자들이 가인이잖아요.
에덴 동편에 성을 세우죠.
‘에덴 동편에 성을 세웠다’라는 말은 에덴을 향해서 진격하겠다는 말도 있지만
‘내가 내 나름대로 하나님 나라를 만들겠다’라는 의도가 강력합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모습이 라멕이
그 에녹성에 구성이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보여주고 이후에는 바벨탑이죠.
바벨탑은 니므롯이라는 영웅,
하나님과 한판 붙어도 이겨낼 수 있는 그러한 어떤 까불이죠. 까불이. 강력한 힘을 소유한,
그러한 집단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여기에서 이제 아브라함을 부르는 거예요.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불렀잖아요. 수메르 제국이라는 것은 여러분이 교육을 다 받았잖아요.
그러니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그 강력한 나라는 수메르 제국과 같은 나라고요.
애굽에서 구출을 받은 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 된 자는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그 약속의 땅의 개념을 애굽이라는 그 나라를 보고 모델로 삼을 수밖에 없다라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쭉 넘어와서 지금 이 얘기를 하고자 하는 게 아니고
쭉 넘어오면 마지막에 종말 때에 종말 때 로마 제국이 남은 자들을 지배하고 있을 때
그들이 약속을 붙들고 메시야 왕국을 기다릴 때 기다리는 천국은 어떤 천국이냐?라는 거예요.
로마 제국이 지배하는 그들, 그들 자리에 누구를 집어넣으면 되느냐? 하면
남은 자 유대인만 집어넣으면 돼요.

에스더를 보면 아하수에로 왕 자리에 누가 올라가면 돼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왕이 올라가고 그 아래에는 누가 한 자리를 차지합니까?
12 제자들이 한 자리를 차지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들은 주권이죠. 주권. 다윗의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왕 되심을 누구를 통해서 실현했습니까? 왕을 통해서 실현을 하거든요.
그 왕의 주권이 하나님의 주권이 실현되는 현장이에요.
말은 좋은데 실제로는요. 자기들이 왕 노릇 하겠다는 거예요.
그게 남은 자리 저들이 기다리는 메시야 왕국, 천국입니다.
이 천국 사상으로 무장한 자들이 예수님을 죽인 거예요.

그러면 이 천국 개념이 예수님을 살해했다면
살해당한 분이 만든 천국과 이들이 기다리는 천국이 일치할까요? 완전히 다를까요?
정반대라 해도 제가 마음에 안 들어요.
완전히 이쪽 개념을 떠올리는 순간 반드시 예수님을 공격하고 죽이게 돼 있어요.
왜냐하면 그들에 의해서 살해당한 분이 만드신 천국은요.
‘어린 양의 피만을 자랑하는 천국’이에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그 피는 구원용 아니냐?’
구원용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린 분을 주라고 했잖아요.
인간들이 갖고 있는 ‘주 개념’은 통치 개념밖에 몰라요. 다스리고. ‘너 이거 해. 저거 해.’

섬기는 게, 서로 섬기라 하잖아요. 성경에서.
섬기는 모습이 주님의 통치를 인정하는 모습이라는 걸 상상도 못해요.
예수님이 왜 섬기는 자가 높은 자라고 하셨는가? 하면요.
섬길 수 있는 사람은 누구밖에 없느냐? 하면요.
주님의 말씀에 의해서 책망을 받아서 자기가 십자가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날 때만 섬김이 나와요.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 될 때만 섬김이 나오지,
‘복음을 아니까 섬기는 모습을 보여!’라고 해서 보이게 되면
그거는 섬기는 게 아니라요. 지배하는 거예요. 남을 갖고 노는 겁니다.

십자가에 의해서 세워진 천국은 그 권세가 어떤 권세냐? 하면
십자가에 달려서 누구를 이겨요? 공중 권세 잡은 자를 이겨버리죠.

공중 권세 잡은 자가 꿈꾸는 천국은 어떤 천국입니까?
짐승을 통해서 다 드러났잖아요.
그러면 공중 권세자가 모르는 천국은 어떤 천국이에요?
아들의 천국이에요. 피로 만들어진 천국입니다.
그 피만을 자랑하는, 이 피의 권세가 어느 정도 대단하냐? 하면요.
지옥까지 보내요.

지옥만 보내는 게 아니라 지옥 갈 자를 이 피 권세가, 피 능력이 천국 백성으로 바꿔버립니다.
근데 그 정도로 바꾸는 게 아니라
지옥 갈 자들을 새 창조를 해버려요. 이게 요한복음 이야기거든요.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말은.

‘새 창조’라는 말은
우리는 천지 창조 때 “빛이 있으라” 할 때 대단한 것 같잖아요. 그거보다 더 대단한 게 우리예요.
근데 악마에게 속한 자들은 시시하게 보이죠. 왜?
사는 꼬라지가 너나 나나 뭐가 다르냐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공중 권세 잡은 자가 어떻게 활동을 하고, 인간에게 뭘 제공하고 있고,
어떤 가짜 하나님 나라를 제공하고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래요.

피를 자랑한다라고 하니까 ‘너는 구원밖에 몰라.’
구원 이야기가 아니에요.
그 피 흘린 분이 유일한 주기 때문에 주님 앞에서는 다 지옥 가야 돼요.
우리도 마찬가지고요.

‘어떻게 죄인이 구원받습니까?’ ‘구원받은 자는 죄인이 아니지요.’
이게 구원파 애들이 주장하는 거거든요.
구원파만 그런 게 아니라 개혁주의도 똑같아요.

주님은 죄인을 부르러 왔다 했잖아요. 이 말씀을 한번 봅시다.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게 말씀입니까? 말입니까?
성경을 보는 가장 기초가 안 돼 있어요. 인간들은.

이 용어를 창세기로 가져가봅시다.
“빛이 있으라”는 게 말씀입니까? 말입니까?
말씀이기 때문에 빛이 있죠.
근데 이게 말이 되면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가? 하면
내가 믿어버려요.
그러면 내가 믿는다고 빛이 있어집니까? 예? 내가 믿는다고 빛이 있어져요?
이 말과 말씀의 차이가 이거예요.

예수님의 말씀은 ‘말씀’이에요. 창조주의 능력이 발휘됩니다.
그러면 창조주의 능력이 발휘되는 이 말씀이 육신이 되셨잖아요.
육신이 되셔서 육신이 되신 그 최종적인 자리는 십자가거든요.

그러면 성경 전체가,
심지어 “빛이 있으라”는 그 말씀조차도
십자가에서 완성이 되면 십자가의 능력이 드러나는 현장이 돼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내용은 그냥 예수님이 이루시는 거예요. 예수님이.
어떻게? 십자가에서.

그럼 우리는 말씀을 보면서 무엇을 알게 돼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시는 걸 보게 되면 우리는 죄인이고, 나는 죄인이고
피공로만 자랑하는, 이 구약적 용어로 쓰면
여호와가 전쟁을 할 때 여호와의 공로만을 자랑하는 그러한 증인이 되는 거예요.
그게 구약의 출애굽한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을 보게 되면 무엇만 남겼습니까?
우리가 잘라서 봅시다. 사람들이 잘라보는 걸 좋아하니까.
광야길만 딱 보면 이스라엘이 뭘 남겼어요? 다 진멸당했잖아요.
여호수아와 갈렙 빼고는 다 진멸당했잖아요. 뭐만 남겼습니까?
여호와의 이름만 남겼어요. 이 충격적이잖아요.

사람들이 세상을, 천지를 창조했을 때
이 창조 세계가 예수님에 의해서 하늘의 뜻이,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라고 하니까
이 땅 자체가 천국이 된다라고 생각을 해요.
근데 예수님이 분명히 말씀하셨죠.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했거든요.

왜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느냐? 하면
아버지의 뜻은 아무도 몰라요.
누구만 알아요? 아들과 아버지만 알아요.
그러니 성도들한테는 뭐만 아느냐? 하면
아들을 통해서 이루어진 내용을 통해서 아버지의 뜻을 아는 겁니다.
그게 십자가예요.

머릿속에 우리 자신이 갖고 있는 천국 개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십자가가 너무 편협해 보일 뿐이에요.

그런데 십자가 세계 속에 다 들어가면
구약적으로 표현하면 언약궤 속에 모든 인간이 들어있거든요. 언약궤 속에.
언약궤 위가 속죄소면
언약궤 속을 펼쳐내는 자리가 성막이 있는 자리고,
성막 있는 자리를 확장시키면 이스라엘의 영토입니다.
그것이 확장이 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그 내용이
그 속에 들어가게 돼요. 이래도 십자가의 능력이 시시합니까?
십자가의 피만이 마귀를 멸하신 능력이거든요.

‘마귀를 멸하는 게 뭐가 그리 중요하냐?’
그다음 나오는 게 그거잖아요. 마귀를 멸했다면 그다음 이 세상이 어떻게 돼야 되죠?
윤리적인 세상, 도덕적인 세상.
통합측 총회장이 여자 불륜 때문에 지금 고소하고... ‘그런 거는 없어야 돼.’
그걸 공격하는 인간이나, 그걸 또 받아쳐서 아니다라고 하는 인간이나
죄인 되는 게 그렇게 어려운 모양이에요.

그걸 보면서 사람들이 이제 화가 나는 거예요.
‘어떻게 목사라는 인간이 불륜을 저지를 수 있나?’ 그러면 ‘그러는 너는?’
자기는 그 상황이 안 돼서 그래요. 옹호하는 문제가 아니에요.
십자가 앞에서는 모두 다 죄인일 뿐이에요.
복음을 전하라는 겁니다.

복음이 들어갈 자리에 옳음이 들어가게 되면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가? 하면
옳음만이 복음이 돼요. 그러면 주님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십자가 안에 들어가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여러분들이 구약을 잘 알아야 되는 게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문제가 뭐냐? 하면
언약궤 정신이 확장이 되면 자기들이 율법 앞에서 어떤 인간임이 드러나야 되는가? 하면
자기들이 첫 번째 돌판을 (자기들이 안 깼죠. 모세가 깨줬잖아요.)
모세가 안 깨줬으면 그들이 이미 지옥 가야 되죠. 그러한 인간들임을 알아야 되는데
저들은 잘 살거든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거든요.
흠이 없으니까 창기를 뭐라 합니까? 율법서에 보면.
그런 돈은 더러우니까 받지도 말라.
그러니까 자기들이 만든 천국, 기다리는 천국에는 창기가 들어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들어가는 거예요. 세리 이런 돈 떼먹는 놈 이런 놈도 천국 못 가는 겁니다.

우리는 이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남을 공격하는 데 이게 특화돼 있어요.
타인의 잘못을 지적하고 나의 의로움을 내세우는 인간들입니다.

페이스북 보면 그런 인간들이 한둘이 아니에요.
문제를 지적하면 복음을 이야기해야 돼요.
문제를 지적하고 복음을 이야기하면 모든 인간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가 돼요.
그러면 십자가만 밝히 보이는 복음이 나와야 되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들도 별로 다르지 않죠. ‘우리는 복음을 들었으니까 저들과 다를 것이다.’
그럼 복음을 들으면
‘복음을 아는 우리들은 칭찬을 받아야 되고 인정을 받아야 되고...’
못 받아요. 십자가 지신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말씀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더 죄인으로 드러날 뿐입니다.

롬9:30~32“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쫓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쫓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여기에 보면 이방인과 이스라엘을 나누죠.
근데 이미 9장 앞부분에서 이방인과 이스라엘을 나누는 것이 의미 없음이 다 드러납니다.

‘그러면 의미가 없으니까 목사님 그거 없앨까요?’
천만의 말씀이에요. 그걸 그대로 둬야 돼요.
둬야만 뭐가 나오는가? 하면 죄가 나와요.

인간들은 말씀을 하면요. 계속 하나로 획일화 시키려고 해요. 획일화.
성경도 ‘도대체 성경이 뭘 이야기하는지 한마디로 얘기해라’ 이게 인간들의 요구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이 ‘십자가의 피가 모든 죄를 용서했다’라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이 말이 맞아요? 틀려요?
맞는 말인데 이것보다 악마적인 말이 없어요.

왜 악마적이 되느냐? 하면
마귀가 하는 말은 다 맞는 말을 했거든요. 마귀는 맞는 말을 해요. 여러분 처음 알았습니까?
마귀의 화신들이 누굽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이잖아요.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저들의 말은 듣되”
저들의 말이 틀린 게 있단 말입니까? 없단 말입니까? 지난 수요일날 했잖아요. 23장에 나오잖아요.
마태복음 23장. 저들의 말이 틀린 게 있어요? 없어요?
다 맞아요. 다.

다 맞는데 문제가 뭐냐? 하면
예수님은 그 맞는 말씀이 “내게 대해서 전한다”고 하시고
자기들은 그 맞는 말씀을 누구를 위한 말씀으로 보죠?
자기들의 영생을 위한 말씀으로 보는 거예요.

‘그러면 방금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주님임을 당신은 인정하지 않습니까?’
인정해요.
인정하니까 그다음 나와야 되는 내용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내용이.

우리도 혹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댓글이나 이렇게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
답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성경 구절을 막 올리는 사람. 제가 보기에는 정신병자입니다.
그러면 제가 이거(성경책) 올리죠. 이거. 아니 구절을 왜 올려요? 이거.
성경속에 있는데 이거. 아니 그러면 그렇게 도배하지 말고 성경 전체의 내용 프로그램을 올려버려요.
그리고 말도 하지 말고. 이 이런 게 전도 아닙니까?

성경 구절을 쓰지 말라는 내용이 아니라 구절을 썼으면 거기에 대한 내용이 나와야 돼요.
왜 그러냐? 하면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는다”라고 말을 하게 되면
모든 인간은 백지가 아니기 때문에 자기 해석을 반드시 하게 돼 있어요.
자기 해석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도 오늘 이 설교를 듣고 끝나고 한번 교제를 한번 해볼까요?
동일한 이야기가 나올까요?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할 가능성이 아주 높아요.
제가 복음에 대한 설교를 10년 들었던 사람, 20년 들었던 사람 만나보면요.
자기 얘기하기 바쁘다니까요. 자기가 피를 자랑하기 위한 자기 이야기는 괜찮은데
자기가 얼마나 복음에 대한 이해가 뛰어난지를 이야기하는 경우가 대다수예요.

그리고 왜 자기 언어로 나와야 되느냐? 하면요.
인간은 복음을 듣게 되고 자기 언어를 내놓아야 죄가 나오고요.
자기 언어 속에서 무엇이 증거되는지가 보여지게 돼 있어요.

그 사람이 얘기하는 내용 속에, 글 속에
십자가만 자랑하는 내용, 자기 부인이 담긴 글들이 나오게 돼 있단 말이에요.
근데 사람들은 그걸 숨기기 위해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나 믿습니다.’ 해요. 믿습니다. 김성수 목사가 그 문제잖아요.
‘나 십자가를 붙듭니다.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그쪽 동네 사람들이 문제가 그거예요.
그러면서 뭘 다 숨겨요? 죄를 다 숨겨버려요.
그게 구원파지 무슨 구원파가 아닙니까?

교리를 믿는 쪽은 그렇지 않나요?
‘나 교리는 믿습니다. 이신칭의를 믿습니다.’
이걸 공격한 쪽이 ‘바울의 새관점’ 자들인데 ‘교리를 믿는 게 무슨 믿음이냐?’
그건 참 말 잘했어요. 교리 믿는 게 무슨 믿음입니까?

자 여기에서 아까 얘기하다가 말았는데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 했을 때는 이게 말입니까? 말씀입니까?
말씀이 되면 주님이 지금 살아계시잖아요.
살아계시기 때문에 그 말씀이 이루어지는 현장으로 만들겠다는 거예요.
그게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는 이야기예요.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하면
‘그러면 주님이 직접 구원을 할 것 같으면 왜 우리를 증인으로 씁니까?’라고 따질 것 아닙니까?
증인이 따질 그게 있어요? 풀인 주제에?

문제가 뭐냐? 하면 자기가 성령을 못 받았기 때문에
‘증인할 필요가 뭐 있느냐?’고 따지는 거예요. 성경을 볼 때 관람을 하는 거예요.
관람을 하면서 이게 피동인지 능동인지 아니면 이게 순종인지 불순종인지... 그걸 다 분석해서
자기가 거기에 판단을 해가지고 덤비려고 하는 겁니다.

아니 한번 찔러볼까요? 집사님.
찌르면 뭐라 해요? ‘아야’ 할 것 아닙니까?
성도는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나오는 게 복음밖에 없어야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러면 복음을 전했을 때 이 사람이 믿죠. 사도바울이 분명히 복음을 전합니다.
믿게 되면 그 믿는 것이 자기로부터 났습니까? 주님의 말씀의 성취입니까?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가 십자가에서 완성을 하셨잖아요.
그 완성한 것이 그에게 지금 임한 거예요.

그러면 말씀의 능력이 되죠. 주님이 친히 살아계시잖아요.
그러면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나 이제 예수를 믿었으니까 구원을 얻었다’라는 이야기를 할까요?
아니면 십자가의 증인이 될까요?

이 교인들이 너무 공부를 안 해요. 이게 상식적인 거 아니에요?
풍선에 물을 넣어놓고 푹 찌르면 안에 든 것을 자랑하지
‘나 풍선이야. 물든 풍선이다.’ 이거 자랑하는 인간은 정신병자잖아요.

말씀이라는 것은 우리가 장악 못해요.
근데 제가 말씀을 계속 드리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했을 때 그 육신은 십자가에서 이 말씀의 의미를 다 밝혔습니다.
그러면 십자가에서 말씀을 다 밝혔으면
이것은 말씀이라는 자체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 율법조차도 모든 말씀은 누구를 겨냥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 되신 예수님을 겨냥하여서 주신 말씀이고
창조조차도 십자가에 지신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기 위한 말씀임을 보여줄 뿐이에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거기에 동원됐고 이방인은 거기에 동원됐어요.

문제가 뭐냐? 하면
인간들은 이미 선악과를 먹어서 하나님과 같이 됐기 때문에
‘그러면 인간이 뭐냐?’ 그래요. 여기에 이제 화가 난 거예요.
인간이 뭐긴 뭐예요? 저거 아버지를 마귀로 둔 마귀 새끼죠.
되게 불편하죠? 이 얘기가. 그죠? 저만 불편합니까?
불편하지 않습니까? 아버지가 마귀라고 이야기하면 기분 나쁘잖아요.
그걸 못 받아들이는 거예요.

못 받아들이니까 자기는 뭐냐? 하면 성령 받았으니까 하나님의 자녀니까,
자기가 십자가 지지도 안 해놓고 성경을 다 분석하는 겁니다.
제가 설교할 때 여러 번 했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으로 감동됐다”라고 하니까
성령은 안 보이니까 이 로마 카톨릭이 그렇게 한 거예요. 성령은 없으니까
성경에 있는 진리를 뽑아내가지고 ‘이거 믿으면 천국 간다’라고 안 믿으면 어떻게 합니까?
공직에 못 나가죠. 한 자리 차지하려면 믿어야 돼요.
그 방식으로 이 성경을 이용을 한 거예요.

그걸 그대로 이어받은 자들이 누굽니까?
개혁주의자들이에요.
성경 지식을 뽑아가지고 ‘이걸 인정하면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믿으면 의롭게 된다’는 거예요.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성경에?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성경에 있잖아요?’
그래서 제가 로마서 4장을 할 때 아브라함의 믿음을 말씀을 드렸잖아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고 하면
아브라함이 믿음이 있어야 돼요? 없어야 돼요? 없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인간이 ‘믿음이 없다’라고 하면 믿음이 없어요?
있어요.
있는데 그 믿음이 뭘 생산해 냅니까?
약속의 자녀를 조롱하는 걸 생산해내요.

우리들도 만만치 않습니다. 우리도 복음을 아는 우리 자신이 십자가의 원수로 드러나요.
‘목사님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사도바울이 그랬잖아요.

지금 로마서로 다시 와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라고 할 때
이 이방인 속에 과연 유대인이 들어가느냐? 안 들어가느냐? 이 얘기예요.
들어갈까요? 안 들어갈까요?
사복음서 아까 이야기하다 말았는데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러버리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약속의 땅에 있는 남은 자 유대인들도 모두가 뭐가 되죠? 이방인이 돼요.
그래서 성경은 이스라엘, 이방인을 이야기할 때 이게 중의적으로 써요.

우리는 이 주님의 말씀을 너무 만만하게 보는 경향이 있어요.
‘설마 그 정도로 중의적으로 썼을까?’
사도 바울은 성령을 받아서 주님의 말씀을 대변하는 자예요. ‘계시’라는 말이 그런 의미예요.

계시는 어떤 특이성을 갖느냐? 하면
인간이 갖고 있는 사고 방식을 다 끌고 옵니다.
그들이 갖고 있는 모든 사고 방식을 다 추적해 들어가요.
죄 아닌 것이 없음을 다 끄집어내요.

우리는 쉽게 여기에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그러면 질문할게요. 사도바울은 어떻게 의를 얻었어요?
사도바울은 이스라엘이잖아요. 남은 자 유대인이잖아요. 어떻게 의를 얻었어요?
“믿음에서 난 의”잖아요. 맞죠? 사도바울은 “믿음에서 난 의”잖아요.

그러면 이제 여러분이 지금 움찔하는 이유가
사도바울이 믿은 적이 없거든요. 믿은 적이 없잖아요. 예수 믿는 자를 핍박했잖아요.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고 이제 다메섹으로 가서
예수 믿는 자를 잡기 위해서 공문서를 받아서 가는 중에, 안 믿었는데 찾아왔어요.
그러면 사도 바울이 뭘 믿었어요? 그전까지는? 사도바울이 뭘 믿었어요?
약속을 믿었죠.

톰라이트 얘기 더 하면 톱라이트가 사도바울을 샤마이학파라고 하죠.
보통 대부분 힐렐학파라 하거든요. 왜냐하면 자기가 가마리엘 문하에서 배웠기 때문에.
근데 그거 보면서 좀 웃었어요.
계시를, 이미 성경 계시를 뭘로 보느냐? 하면 ‘뭔가 잘못이 있다’라는 전제를 깔고 봐요.
그래서 초대교회의 역사를 연구하는 겁니다.
역사가 우선입니까? 계시가 우선입니까? 계시가 우선이죠.
그런 식이 되면 나중에는 엉망진창이 돼버려요. 바리새인이라도 다 달라요.

사람들의 착각이 뭐냐? 하면
힐렐학파이기 때문에 같은 성향을 갖는다라고 생각하는데 안 그래요.
우리 지금 모임에 와서 복음을 듣는다고 해서 동일한 복음? 그건 착각이잖아요.
복음은 동일할지 모르지만 거기에 대한 적용이라든가 실제는 다 다르잖아요.

사도바울이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고 언약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럼 그 언약을 믿는, 약속을 믿는,
앞부분에 다 이야기했잖아요. “약속이 있고 언약이 있고...”
그걸 믿는 상황에서 이 사람은 누구를 믿었느냐? 하면
이게 중요해요. 여호와 하나님의 주되심을 믿었어요.

‘여호와 하나님의 주되심을 믿었다’라는 이 내용이 왜 중요하냐? 하면요.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윗 언약을 보게 되면, 모세 언약까지 보게 되면
전체가 여호와가 주되심, 심판주 되심을 드러내는 언약입니다.

심판주를 되게 싫어하거든요. 사람들이.
우리는 원래 이방인들이기 때문에 다 지옥 가야 돼요. 바로를 강퍅했잖아요. 심판해버렸거든요.
그리고 심판 속에서 어린 양의 피로 이스라엘을 새롭게 만들어서 그들을 아들로 만들었거든요.

구약 전체가 이 ‘아도나이, 주되심’을 증거하는 내용이에요.
그래서 이름을, 이름을 먼저 안 알려주죠. 이것도 몇 번 이야기했잖아요.
모세가 묻잖아요. ‘이름을 뭐라고 할지 알려주세요’라고 하면 ‘여호와’라고 알려주잖아요.
근데 ‘여호와’라는 이름은 저들에게 익숙합니까? 안 익숙합니까?
익숙해요. 창세기에 ‘여호와’ 이름 다 나오거든요.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 뭔가 새로운 용어를 안 줍니다.
‘예수’라는 이름도 그 당시에 흔해 빠졌습니다.
마치 제 이름을 옛날 전화번호부에 치면 어때요? 한 100명 넘게 나오거든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 이름 속에 뭘 담아요? 내용을 담죠.

내용을 담으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가 되고,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어떻게 구원하느냐? 들어가 보면
말씀의 성취로써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여호와 하나님의 주되심을 믿었어요.
그 주되심을 대리로 행세하는 자가 사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우상이거든요. 우상은 제거해야 되고
제거하지 아니면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일에 문제가 생겨요.

‘그런 내용이 어디 있느냐?’
있어요.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을 보고 임금 삼으려 했거든요. 임금 삼으려.
그들은 민중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민중들이 원하는 메시야와 이 바리새인들이 원하는 메시야가 달라요.
‘그러니까 그건 뭐 엉망진창인데 어떻게 일관성 있게 말할 수 있느냐?’라고 하지만
그놈들이 기다리는 거나 이놈들이 기다리는 거나 공통점이 뭐예요?
모두가 다 ‘나를 위한 메시야’예요.

근데 예수님은 누구를 위해서 왔어요?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오셨죠.
그걸 달리 표현하면 ‘자기 이름을 위해서’ 오신 거예요.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했지 않습니까?’

이 내용 전체가 자기 이름을 증거하는 거예요.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어린 양의 피로 구출했을 때
‘여호와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해서’ 구출을 했기 때문에
그 이름을 위해서라도 그들은 어떻게 해야 돼요?

진멸해야 됩니다. 구원하는 게 목적이 아니에요.
로마서는 지금 계속 그것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도바울조차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는 것 같아요.
‘어떻게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느냐? 믿음에서 난 의요. 그런데 의의 법을 쫓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다’ 하죠. 의의 법을 쫓아간 그들이(의의 법이 율법이잖아요.) 법에 이르지 못하였다.

법에 이르는 거는 뭐예요? 율법의 성취는 뭐예요?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리신 몸이에요.
그러면 여기에 누가 들어가죠? 사도바울 자신이 들어가죠.
의의 법으로 쫓아갔잖아요. 쫓아갔으니까 이루지 못했으니까 뭐가 되죠? 자기가?
이방인이죠. 이스라엘이 아님이 드러났잖아요.

‘아니 혈통적으로 이스라엘 맞잖아요?’ 그걸 부정하는 게 아니에요.
문제는 그걸 계속해서 붙들고 있으면 말씀을 누구 중심으로 해석하기 시작하는가? 하면
이스라엘 중심으로 해석해요.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 전체가 애굽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은 있어요? 없어요? 없죠.

출애굽할 때 이스라엘을 아들로 만들었잖아요.
근데 그 아들을 종말까지 이끌어오셔서 예수님이 등장했을 때 그 아들이 예수님을 추방했거든요.
그 아들이 추방함으로 말미암아 이들은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되려면 아들이어야 돼요. 하나님 아들.

근데 하나님 아들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이때부터 이미 ‘이스라엘은 없다’는 이야기예요.
마태복음에서 “흑암에 앉은 백성들이 큰 빛을 봤다”고 하죠.
갈릴리 그 지역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니까. 이 말씀을 이사야에서 갖고 왔잖아요.
그 말씀을 사람들이 이해를 못해요.

예수님의 등장은 이 땅 전체가, 약속의 땅 전체가 어둠이고 이방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않았다”고 했을 때
그 자기 백성이 자기 백성이냐? 아니냐? 라고 보게 되면
자기 백성이었는데 그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방인과 같이 되었죠. 어둠이 된 거예요.

그래서 자기 백성이었는데, 똑같아요. 호세아에서에서 분명히 하나님의 백성이었는데,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이렇게 말씀을 하거든요.
백성이었는데 백성 아니게 만들어서 내 백성이라 함으로 말미암아
무엇을 남기기 위한 내 백성 만들기냐? 라고 하면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을 어떻게 만들었습니까? 십자가의 피로 만들거든요.
그 피를 자랑케 하기 위한 내 백성 만들기예요.

그러면 왜 그렇게 복잡하게 합니까?
아브라함을 선택해서 자기 백성 만들어놓고,
또 내 백성 아니라 해놓고,
아닌 자리에서 다시 내 백성으로 만듭니까? 라고 이렇게 말씀을 왜 하냐고 하시면
우리의 죄악이 그만큼 끈질기고 깊다라는 이야기예요.

이 논리를 그대로 갖고 오거든요.
지금 문제가 뭐냐? 하면
‘예수님 믿으니까 나는 주님의 백성이야’ 이 말을 하거든요. 예수 믿으니까.
‘주님이 죄 용서하신 걸 나는 믿어. 나는 예수님의 주되심을 인정해.’

인정하라고 구원한 게 아니에요.
‘어떻게 주가 되셨는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성도를 구원한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는 계속해서 뭘 날려버리냐? 하면
‘나는 구원받았다’를 날려버려요. 나는 구원받았다.

왜 ‘구원받았다’를 이렇게 날리느냐?
인간은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에덴 동산을 탐하고 있어요.
복음이 전파되니까 아까 로마 이야기했잖아요.
예수님이 오기 전에 로마와 예수님을 살해한 로마와 그다음 예수님을 믿은 로마가 공존을 해요.
이게 다니엘 예언이거든요.

다니엘 예언이 예수님을 죽이는 데까지만 로마가 활동하는 게 아니라
기독교를 로마 제국이 국교화해서 짐승이 어떤 모습인가?를 제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뭘 싹 제거해버려요? 로마 제국이?
교리만 남기거든요.
십자가 사건, 주님의 능력은 완전히 제거해버려요.

‘그러면 그때는 구원받는 자가 없습니까?’ 또 구원 이야기잖아요.
남은 자만 구원해요.
뒤에도 나오지만 엘리야의 착각이 자기가 보이는 게 다라고 생각해요.
말씀은요. 절대로 실패하지 않습니다.
이 짐승이거든요. 그 짐승의 모습이 그 모습을 보이는 거예요.
지금 이방인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

“믿음에서 난 의요”
자 믿음이 어디 있습니까?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을 때 믿음이 어디 있습니까?
‘백부장의 믿음’ 우리 많이 이야기하잖아요. 백부장이 ‘주여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겠습니다.’
그 이방인의 믿음이잖아요. 맞죠?
그러면 그 믿음과 사도바울의 믿음이 같은 믿음입니까? 다른 믿음입니까?
같은 믿음이어야 되죠.
아브라함의 믿음과 똑같이 돼 있잖아요.

그러면 백부장이 그 믿음이 어디에서 출발합니까?
이 백부장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요.
믿음 있는 백부장과 사도행전에 보면 고넬료가 또 등장을 하죠. 고넬료가 백부장이거든요.
이 백부장도 만만치 않습니다. 정말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사람처럼 기록돼 있어요. 사도행전에.
그러면 이런 사람은 누구 계열이에요?
사도 바울 계열입니까? 아니면 성령 받은 자의 계열이에요? 사울의 계열이죠.
다시 말씀드리면 백부장 고넬료가 정말 율법대로 살거든요.
친척들도 이 사람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를 구원한 게 아니에요.

베드로를 보낼 때 베드로에게 뭘 날려버립니까?
‘나는 태어나서부터 부정한 음식을 한 번도 안 먹었다’는 걸 날려버리죠.
이 날려버리는 것은 그를 죽이는 거예요.
사람이 자기의 쌓아온 그것들을 폐기한다는 것은요. 죽기보다 싫어요.
물론 과거가 슬픈 과거라면 빨리 제거하고 싶지요.
근데 살아온 과거가, 봉우리들이 수천 개가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중에 어느 누가 하나라도 없애고 싶겠습니까?

베드로가 성령 충만을 받았을 때, 그가 성령 충만 받은 증거를 어떻게 드러내느냐? 하면요.
율법 준수로 드러내요. 이거 이해가 안 되잖아요.
이건 간단하게 이해가 됩니다. 아까 제가 처음 출발할 때
마귀가 활동을 하지 아니하면 복음을 못 전한다 했죠?
마귀가 동행을 해야만 십자가의 증인이 돼요. 그게 성령 충만의 증거예요.

그런데 기존 교회에서는 성령 충만 받았으니까
‘마귀야 물러가라.’ 이거 ‘마니교’예요. 마니교.
마귀는요. 예수님 옆에 붙어요. 사복음서를 잘 읽어보세요.
성령을 받은 예수님께 마귀가 붙죠. 성령이 그리로 몰아붙입니다.

그러면 마귀가 떠나갔을 때 어디로 갔다 했습니까?
제자들 속에,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마귀들이 등장을 해요.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마귀가 그 얼굴을 내밀어요.
그러니까 베드로가 박살 나죠.
박살 나면서 동시에 고넬료는 그럼 어떻게 구원받았느냐? 박살 나야 되죠.
그 내용이 사도행전은 없는 것 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그가 그 행위를 했기 때문에 주님이 찾아오셨다’가 되면 어떤 문제가 되느냐? 하면
9장과 안 맞아요. 사도행전 9장과 안 맞다고요.
왜냐하면 9장에 사도바울이 그렇게 살았거든요.
사도 바울이 여호와만 믿었단 말이에요.
하나뿐인 하나님만 믿은 그 계통 중에 한 사람이 고넬료예요.
그가 약속을 기다렸다 한들 누구와 동일한 약속이냐? 하면
유대인들이 사복음서에 나오는 제자들이 기다리던 천국이었던 거예요.
그런데 베드로와 만나게 해버리니까
자기가 지금까지 믿어 왔고 행했던 모든 것들이 무너져버려요.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믿음, 없었죠. 이게 ‘없었다’라는 말이 안 되는 이유가
있었어요. 있었는데 이 믿음을 완전히 뭘로 바꿉니까?
그 믿음이 예수님을 살해한 믿음이 되고
그 살해당한 그분이(로마서에서는 아들의 믿음이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덮어씌움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그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덮어쓴 내용을 증거하는 증인이 된 거예요.
그 복음을 실어나르는 수레라고 했잖아요.

복음을 실어나르는 수레가 되려면 언약궤처럼 움직여야 돼요. 반대죠.
내부에는(내부를 외부라 해도 되는데) 죄밖에 안 나오는데 피만 자랑하는 거예요.
상대들이 뭐라 하겠어요? 조롱합니다.

그래서 지금 30절에서 말씀하는 것은 이방인들이라고 이야기할 때 “의를 얻은 이방인들”
결국은 이 로마서가 완전히 역전당하는 게 뭐냐? 하면
이방인들은 율법이 없었고 아까 양심 이야기하다 말았는데

율법을 가진 자들은 율법대로 판결할까요? 양심대로 판결할까요? 유대인들은.
우리는, 젊은 애들은 성경 읽을 때
‘율법을 가졌으니까 뭔가 이방인보다 높은 수준에서 판결하지 않겠느냐?’ 라고 생각하겠지만
예수님을 살해할 때 높은 수준에서 판결합니까? 낮은 수준에서 판결합니까?
낮은 수준. 기껏해야 자기들이 살기 위해서 판결을 해요.

그래서 율법이라는 것이 참으로 이 놀라운 게 뭐냐? 하면
율법을 주면 율법을 받은 그들이 뭘 갖고 율법을 해석하느냐? 하면 양심을 갖고 해석을 해요.
이런 해석은 또 요즘 없으니까 싫어해요.

유대인과 이방인의 동일선 지점이 십자가 사건이거든요.
그들의 양심은 뭘 추구하느냐? 하면 내가 살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율법 해석이 다 자기 양심에서 출발을 해요. 악마가 준 선악 구조.
악마가 준 선악 구조는 항상 선은 ‘내가 사는 것’이 선이에요.
그 방식으로 율법을 해석하는 겁니다.

지금 여기에서 “의를 쫓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다” 했을 때
바울을 여기에 집어넣게 되면, 아니면 제자들을 집어넣게 된다든가 그렇게 집어넣게 되면
그들이 모두가 다 의를 쫓지 않았죠.
의를 쫓지 않은 그들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 거예요.

그러면 이걸, 이 본문을 제자들한테 한번 적용해 봅시다. 그럼 제자들이 믿었죠? 예수님을.
예수님을 믿었어요. 그 믿음이 어떤 사태를 유발했어요? 예수님을 살해했죠?
살해하니까 예수님의 제자가 맞아요? 아니에요?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했잖아요.
그럼 ‘내 제자 아닌 자를 내 제자라’ 이 내용도 좀 적용이 안 됩니까?

예수님이 선택을 했죠. 이거는 이스라엘의 선택과 똑같아요. 지금 원리가.
제자로 뽑았죠? 뽑았으니까 ‘그래 같이 가자’ 이게 아니라
뽑았는데 너희들 내 제자다? 아니다?
‘제자인데 제자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제자 아니라 한 곳에서 제자로 만드는 겁니다.

제자였는데 그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었죠? 믿었으니까 어떻게 했습니까? 사탄 짓을 하죠.
십자가 지지 말라고 하고 자기 꿈을 이루어주지 않으니까 팔아먹잖아요.
‘가룟유다가 팔아먹었다’ 이렇게만 얘기하지 말고

‘12 제자가 힘을 합쳐서 팔아먹었다’라고 알아야 돼요. 왜?
로마서 5장에는 첫째 아담만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들이 수도 없이 나와도 그것은 한 아담에서 났기 때문에 한 아담이에요.

여기에 이걸 인정하지 않으면 무엇이 문제가 되느냐? 하면
“둘째 아담 안에 성도가 있기 때문에 의롭게 된다”는 이야기를 못하게 돼요.
여기에 개별화 돼버려요. 개별화. ‘니 잘 믿고 내 잘 믿고’가 돼요.

둘째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죠.
그러면 그들은 피를 자랑하죠.
근데 피를 자랑하는 그 모습들이 다 달라요. 다 다르단 말이에요.
그러면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자들도 다 다르잖아요.
우리가 보기에는 베드로가 흑흑흑... 닭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하리라 했으니까
‘흑흑흑 했으니까 이 사람은 진짜 회개했을 것이다’
여러분. 그래서 회개할 것 같으면 예수님이 주의 자리에 오를 필요가 없어요.
오를 필요가 없고 성령을 줄 필요가 없어요.

‘그러면 그거는 회개가 아닙니까?’ 회개 맞죠.
그래서 그걸 한 번은 ‘회개 아니라’고 해석해야 되고, 한 번은 ‘회개라’고 해석을 해야 되는 거예요.
12 제자의 대표자가 가룟유다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뭘 했어요? 원리가 똑같아요.
남은 자들이 예수님을, 아들인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잖아요.
제자들이 하나님 아들의 대표자로서 죽입니다.

그 죽임 당한 분, 십자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요.
하나는 지옥 보내고 하나는 천국 보내는 능력이 나와요. 십자가에서.
그러면 지옥 갈 자들은 십자가 지신 그분의 피능력을 증거하기 위해서 지옥을 가게 되고
천국 갈 자들은 피능력을 증거하기 위한 자로서 천국을 가게 돼요.

그래서 천국 안에 지옥이 있어요.
이것도 참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천국, 지옥을 자꾸 따로 우리가 생각하는 경향이 있잖아요.
그래서 심지어 비아냥거리거든요. ‘지옥에는 주님의 능력이 미치지 않습니까?’
피의 능력이 지옥을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지옥이 영원한 이유가 피능력의 영원함을 증거하기 위해서 영원한 겁니다.

그래서 지금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다. 의를 쫓지 않은 이방인들’
요 말씀에 못 들어가는 사람은요. 구원을 못 받아요.
다시 말씀드리면 “의를 쫓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라고 했잖아요.
그러면 성도는 모두가 다 이 말씀 속에 들어가야 돼요.
그런데 이 말씀에 못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죠.

뒤에
“의의 법을 쫓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행위에 의지했다는 거예요. 이 행위가 도대체 어떤 행위냐?
여기에 대해서 이제 이야기를 해야 돼요. 어떤 행위입니까? 행위가?
약속을 믿었어요? 안 믿었어요? 믿었어요.
그 믿음이 없는 게 아니에요.
그 약속을 믿고 그다음에 이들이 어떤 태도를 취했습니까?
‘하나님 나라라는 것은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자가 들어가는 나라’라고 생각을 한 거예요.

다시 말하면 율법을 볼 때
‘율법대로 사는 자는 복을 받고 율법에 불순종한 자는 저주를 받는다’라고 했으니까
여러분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 간단하게 예를 들게요.
‘여러분 예수 믿으면 천국 가고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간다’ 할 때 여러분 뭘 선택하겠어요? 예?

사람들이 무식한 이유가 목사들이
‘구약에는 율법을 지키면 복 받고 안 지키면 저주받는다’라고 하니까
이들이 지키려고 한 것이 행위가 되잖아요. 지금.

그러면 오늘날 ‘예수 믿으면 천국 가고 안 믿으면 지옥 간다’하니까 뭘 선택해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용서하심을 믿으면 천국 간다’는 게 이게 행위입니까? 믿음입니까?
행위잖아요.
지금 그래서 로마서에서 창세기 15장 아브라함의 믿음을 갖고 오고요. 다윗의 믿음을 갖고 오죠.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한 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현장이 아닌 현장은
주님의 구원이 없는 현장이에요.

그러니까 제가 계속 반복합니다마는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 의를 얻었다” 여기에만 관심이 있잖아요.
그 태도가 뭐냐? 하면 말씀을 말로 보는 태도예요.

자 보세요. 이 본문도
“의를 쫓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이게 말씀이 되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그분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이 말씀의 내용을 성도에게 집어넣어버려요.
집어넣어버리면 성도는 자기를 뭘로 인정합니까?
죄인이죠. 이방인으로 인정을 해요.
그러면서 뭘 자랑합니까? 피를 자랑하죠.
피를 자랑하는 현장이 되니까 그 사람에게 뭐가 나와요?
율법 외의 한 의가 나오는 거예요.

근데 이걸 말로 보게 되면 지식이죠.
지식을 내가 끌고 와서 내가 믿어버리면 내가 뭐가 되죠? 의인이 돼요.
말씀을 다 말로 바꿨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가 하나님도 아니면서.
자기 주제를 파악 못해요. 성령이 오기 전에는 자기 주제가 파악이 안 돼요.

성령이 오니까 자기 주제가 파악됐어요. 누가? 사도바울이.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지금 자신만만하게 얘기해요.
분명히 반론이 있을 거 아닙니까?
‘그러면 너는 이스라엘이 아니냐? 그런데 너는 어떻게 구원받았니?’
이렇게 지금 따질 거 아닙니까? 맞죠?

이 본문이 지금 자기가 말해놓고 자기 논리에 문제가 생긴 거잖아요.
‘그러면 니는 이스라엘이냐? 이방인이냐?’ 따질 거 아닙니까? 여러분은 안 따져요?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난 의를 받았다 했잖아요. 행위에 의지하지 않고.
‘그럼 니는 뭐냐?’ 이거죠.
‘나도 이방인이야’

그래서 앞부분에 계속해서 강조하는 게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이스라엘이 아니요.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요 약속의 자녀라야 씨로 여김을 받고 그다음 나오는 게 야곱과 에서는 태어나기도 전에, 선과 악을 취하여서 행하기도 전에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라는 그 말씀을 계속해서 반복을 하고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강퍅케 할 자를 강퍅케 여긴다’는 이 말씀을 반복하는 거예요.

혈통적 유대인들은 자기를 못 버려요.
자기를 못 버리는 이유가 뭐냐? 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못 버리죠. 우리는 나를 부인을 못해요. 인간은 자기를 부인 못해요.

특히 이들은, 이스라엘은 얼마나 고집이 셉니까?
지금도 한번 보세요. 이스라엘도 아니거든요. 사실은.
AD 70년에 끝났어요. 이스라엘은. 이름만 그냥 이스라엘이 있을 뿐이에요.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에 의해서 앞서 말씀드렸잖아요. 모두가 다 뭐가 됐습니까?
이방인이에요. 이스라엘 자체가 없어요.
예수님밖에 이스라엘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이제 시차적으로 이후에, AD 70년에 박살 난 거예요.

그러니까 말씀이, 십자가 사건이 한 지점에서, 한 몸에서, 한 시간대에 이루어졌는데
이 시간이 폭발을 하게 되면 창세전과 예수님의 재림까지 다 담아버립니다.
인간 세계에 나타날 때는 이것이 순차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그것이 그 순간 바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고, 말씀은 이렇게 진행이 돼요.

그래서 그다음 나오는 게 뭐냐? 하면 그 행위에 의지하였다 하죠.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이걸 이야기하면서 그러면 사람들이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 부딪힐 돌에 안 부딪히면 되잖아요?’ 이렇게 나올 거 아닙니까?
여러분 그 정도 돌아가시죠? 똑똑하시니까.
그게 통하지 않는 게 성경은 말이 아니고 말씀이기 때문에.

부딪히지 않으면 구원이 없어요.
그럼 이방인은 안 부딪혔어요? 이방인은? 이방인은 안 부딪혔습니까?
부딪혔죠. 똑같이 부딪혔는데

이 부딪히는 돌의 기능을 보면 이 부딪히는 돌과 이사야서 8장 14절을 인용하는데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이렇게 말씀했어요.
정말 이 모순적인 이야기입니다.
이 걸림돌과 이 부딪히는 반석. 이 내용을 한마디로 말하면 걸림돌입니다. 올무죠. 올무.
올무를 시온에 두는데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않는다”는 거예요.

자 이 말씀이 지식으로 보는 사람들은 이러죠.
‘그렇죠. 올무가 있으면 올무 피하면 되죠.’
근데 말씀이 되면, 말씀은 반드시 올무로써 작동을 해야 돼요. 그게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로 말씀의 성취를 보여주니까 모든 인간들이 거부를 하죠.
남은 자 유대인들이 왜 거부한다고 했습니까?
약속에 따른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님이 실제로 갖고 온 하나님 나라가 달랐기 때문에 그래요.

세례요한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더 할게요.
세례요한이 분명히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외쳤잖아요.
외쳤는데 성령이 임하는 것까지도 목격을 했어요.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고 얘기했잖아요.
그 정도 하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다 안 거 아니에요?
알기는 뭘 알아요? 하나도 몰라요. 이게 구약의 선지자예요. 선지자의 대표거든요.

그럼 사람들이 맨날 질문하는 게 ‘구약의 선지자들은 예수님을 다 알았습니까?’
이 질문 자체가 문제가 있어요.
세례 요한을 보면 몰랐는데 알게 됐어요.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죠. 몰랐는데 알게 된 거예요.

세례 요한이 분명히 하나님이 지시해서 광야에 외치는 자라 해서 외쳤어요.
우리는 이런 질문하잖아요.
‘하나님이 지시해서 외쳤으면 자기가 외친 내용을 알아먹어야 될 거 아닙니까?’
저만 그리 생각합니까?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그런 생각 안 해요?
‘내가 다 알아야 전한다’ 생각 안 해요. 제발 그 생각 좀 버리세요.
알아서 복음을 전하려면요. 우리는 죽어야 돼요.
하나님 말씀을 우리가 다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어떻게 압니까? 몰라요.

세례 요한이 분명히 명확하게 하나님 뜻을 전했는데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이까?” 물어요. 왜 그렇습니까?
당신이 내가 예언한, 그 말한 바에 따르면
내가 지금 선지자들이 예언한 하나님 나라가 지금 이 자리에서 이루어져야 된다는 거예요.
그것은 다윗 왕국입니다.
정치적인 능력을 발휘해야 돼요. 권세, 실제적인 권세.

근데 예수님이 뭐라고 답변하는지 한번 보세요. 뭐라고 답변했습니까?
“저는 자가 걷고 눈 먼 자가 눈 뜨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리라 하라”
이 얘기는요. 이미 감옥에서 다 알고 있었어요.
그게 답답해서 이야기한 거잖아요. 세례요한이.

예수님이 똑같은 말씀을 하셨죠.
그래서 요한복음에 보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 했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에요.
똑같은 내용인데, 똑같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5개인데
한쪽은, 육적 해석은 뭐냐 하면 뭐예요? 육적 해석이라고 해서 엉터리로 보면 안 돼요.
성경에 나오는 육적 해석은 약속에 근거한 해석이에요. 말씀대로 해석이에요.

그래서 그들은 그걸 표적으로 본 거예요. ‘세메이온’으로 본 거예요.
약속에 근거한 표적이기 때문에 임금 삼으려 한 거예요.

근데 영적 해석은 뭐냐? 하면
십자가에 죽으심을 증거하는 내용이에요.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거든요.

세례요한이 지금 어느 위치에 있는가? 하면 육에 속했어요. 그러면 또 질문.
‘육에 속했는데 어떻게 복음을 전하느냐?’
육에 속했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거예요. 지시대로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세례 요한이 어디로 합류합니까?
진짜 엘리아에 합류하거든요. 말라기 예언에.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을 하시니까 끝이에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세례요한이 기다린 천국은 어떤 천국이었습니까?
정치적 천국이에요. 달리 말하면 에덴 동산을 확장한 가인, 라멕, 그다음 바벨론,
그다음 어디입니까? 애굽. 애굽에서 나와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다윗 왕국,
그 이후에 짐승들의 세계, 바벨론, 페르시아 제국, 헬라 마케도니아 제국, 로마 제국
이 나라의 모형을 띤 하나님 나라를 꿈꾼 겁니다.

근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을 때 약속을 믿는 자들이 그걸 인정할까요? 안 할까요?
절대로 인정 못하죠. 왜?
다윗왕으로 오실 분은 죽으면 안 돼요. 이 땅에서는 죽으면 안 돼요.

우리는 자꾸 뭘 주장하는가? 하면
예수님이 부활하셨으니까 부활의 능력으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느냐?
제가 부활 신앙의 악마성을 글로 써놨잖아요.
이 땅에서는 제거당한 분이에요.
놀랍게도 성령의 능력을 입은 자들이 이 땅에서 똑같이 핍박받고 미움받고 제거를 당합니다.

세례 요한을 보면 명확합니다.
말씀을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는 죽어야 돼요.
그 죽는 자리가 복음을 전하는 자리인 거예요.
희한하게도 예수님의 죽으심이 주가 되시는 자리죠.
십자가에 못 박힌 그분이 유대인의 왕이에요.

왕의 능력이 어느 정도 대단한가? 하면요.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다 박살내는 자리예요. 이렇게 다 박살 낸다 그러면
짐승을 완전히 박살내는, 승리하는 자리라면 그다음 무슨 얘기가 나와야 되죠?
“니가 거기서(십자가) 내려오고 우리도 구원하라” 이 얘기가 인간이 나오는 개념이에요.
근데 그걸로 이 땅에서는 끝이에요.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주로 전하면 사람들이 싫어해요.
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이 주가 되면요. 사람들이 혐오스럽게 여깁니다.
왜? 이 땅에서는 다 누구를 닮아야 되죠?
이 땅에서 죽임당한 그분을 닮아야 되잖아요.

인간은 고난받기 싫어요.
그래서 부활한 주님을 찾는 겁니다.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이 말씀을 피해가려고 하는데
이사야 8장 14절을 한번 봅시다. 8장은 유명하죠.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이라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예언이 여기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사야 8장 10절부터 보면
“너희는 함께 도모하라 필경 이루지 못하리라 말을 내어라 시행되지 못하리라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니라”
이건 대적들에 대해서, 앗수르에 대해서
그들이 아무리 말을 내고 계획을 해도 자신들을 이길 수 없다라는 거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면 이스라엘과 남유다 이쪽에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 걸림돌이 될까요?
아니면 이들에게 걸리지 않는 이들이 환영하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이 될까요?
문장에 의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은 대적을 공격하는데,

그런데 8장 14절에 보면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니 그러나” 피할 곳이 되는데,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여기도 똑같은 이 예언을 로마서에서 갖고 온 거거든요. 로마서에서 갖고 왔는데
그분이, 임마누엘이라는 그 분이 거치는 돌과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다. 올무가 될 거다라는 거예요.

그러면 이 올무가 되는 이분을 피해갈 수 있느냐? 라는 거예요.
그 뒤에 보면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
함정, 올무, 걸림돌 아무튼...
한 고개라도 뛰어넘어도 안 되고 절대로 못 뛰어넘는 올무가 된다는 겁니다.
그게 십자가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을 뽑은 목적이 뭐예요? 올무에 걸리게 하기 위해서예요.
그런데 올무에 걸려서 어떤 인간도 구원을 못 얻게 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올무에 걸려서 부딪혔죠. 올무에 걸려가지고 못 넘어왔죠.
못 넘어왔는데 어떻게 넘어왔습니까? 믿었어요?
안 믿었어요.

어떻게 믿게 되었습니까?
주님이 찾아오셨죠. 찾아오셨어요.

그래서 다시 로마서로 가게 되면
“저희들이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했다”는 이 얘기가 어떤 의미인지가 밝혀지는 겁니다.

“믿음에 의지한다”는 이 말 자체가
‘내가 믿습니다’라는 것을 부정하는 믿음이에요.
다시 사도바울을 말씀드리면 사도 바울이 안 믿었잖아요.
로마서 4장에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세요.

그러니 지금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복음을 듣고
들으면 사람들이 그 복음의 내용을 믿어요? 안 믿어요?
믿죠. 우리도 믿잖아요. 성경 말씀을 들으니까 ‘믿는다’ 하잖아요.
그러면 그 믿음을 의지한 자들의 특징이 뭐예요?
부딪히는 돌에 안 부딪혀요.

그런데 진짜 행위에 의지하지 않고
믿음에 의지한 자들은 계속해서 이 말씀의 현장이 되기 때문에 부딪힙니다.
십자가와 부딪히게 돼 있어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자기 자신을 십자가의 원수라 하는 거예요.
죄인 중의 괴수라는 겁니다. 죄인 중의 괴수.

왜 이렇게 말씀하셨느냐? 하면
성도는 십자가의 증인이에요. 로마서 8장에서 분명하게 말씀했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만든 게 아니라 양자로 만들었어요. 양자.
양자는 아들이 아니라는 거예요. 양자는 맏아들을 증거하기 위한 아들이에요.

맏아들이 행하신 일, 그분이 오로지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일을 자랑하라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은 겁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하잖아요.
그 자녀 되는 권세가 어떤 권세인지 아시죠?
진짜 하나님 아들이 어떤 권세를 받았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왕 되심, 주되심을 드러냈어요.

그렇다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어떤 권세입니까?
복음 전하다가 죽으라 이 얘기예요.
아마 그 본문을 갖고 이런 식으로 전도했다가는 아무도 교회 안 하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줬다”하니까 사람들의 이미지 속에는 뭐가 들어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됐으니까 나는 하나님 아들이니까
(정신병자처럼) 나는 예수야. 작은 예수야. 누구든지 날 건드리지 마. 내 말 들어.’
이런 태도가 튀어나오는 거예요.

놀라운 것은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이 말씀이 나중에 또 나옵니다. “저를 믿어야 부끄러움을 당치 않는다”라고 얘기를 해요.
그러니까 인간 속에서는 과정이 반드시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얻습니다. 그분의 피가 우리의 죄를 용서 다 했습니다.
그분이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십니다.’ 그런 얘기가 다 맞아요. 틀린 게 아니에요.

다 맞는데 문제가 뭐냐? 하면
그것을 뭘로 바꿔버립니까? 내 믿음으로 바꾼다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구닥다리를 갖고 온 거예요. 이사야 8장을 갖고 왔어요. 이 구닥다리거든요.
그 구닥다리 왜 갖고 왔어요?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는데.

왜 갖고 올까요?
말씀이 현재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걸림돌과 빠질 수밖에 없는 올무를 설정하셔서
십자가 지신 주님 홀로 말씀을 다 이루시고, 믿음조차 주님 홀로 보여주셔서
우리에게 주님의 믿음을 주셔서 십자가의 증인으로 살아가게 하심을
감사하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말씀대로 되어지는 세계 속에서
십자가의 피 공로만을 자랑하기를 소원하는 주의 백성에게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