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4-06-23 14:35
20240623 로마서 강해 71강 롬 10:1-4 율법의 마침, 목적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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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4-06-24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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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3 로마서 강해 71강 롬 10:1-4 율법의 마침, 목적

하나님 말씀, 로마서 10장 1절에서 4절 말씀을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롬10:1~4)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아멘

‘율법의 완성, 율법의 마침’이 무엇이냐?
지금 우리 성경에는 마침, 율법의 마침이라고 번역이 돼 있죠.
이 헬라어 단어의 의미 속에는 목적이라는 의미도 들어있습니다.
히브리 헬라어 하는 사람들이 원어의 뜻은 어쩌고 저쩌고 말을 하잖아요.
그 당시에 이 한 단어가 갖고 있는 의미군이 조금밖에 없었어요. 언어학이 원래 그래요.
옛날에는 그만큼 많은 종류의 단어들이 필요하지 않았어요.
전라도에 가면 뭐 ‘거시기’라고 합니까? 다 알아들어요. 자기들이.
근데 전라도를 벗어나면 다 못 알아들어요.

그러면 그 속에 있는 사람이 밖으로 나오면
그 단어들의 의미들을 온갖 것들을 다 끄집어내죠. 상황 속에서.
그러니까 원어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왜 악마적이냐 하면 그들은 성령을 부정해요.

‘아니 목사님 헬라어 히브리가 원어지 않습니까?’
원어가 어디 있어요?
말은 언어가 맞아요. 원어가 맞는데 해석해 들어가면 다 무슨 말로 다 바뀌어버립니까?
원어를 말하는 사람이 원어 강의를 하잖아요. 그럼 무슨 말로 다 바뀌어요?
원어로 합니까? 자기 말로 합니까? 자기 말로 하잖아요.

자기 말로 한다라는 것은
이미 그 원어에 대한 의미에 대해서 자기가 정답을 갖고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있죠. 이건 제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을 하셨어요.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요. 사람에게부터 나오는 모든 것은 뭐라고 합니까?
악하다라는 거예요. 거기에서 탐심, 음욕 이야기하는데
그다음 예수님이 말씀을 안 하셨는데 그중에 하나가 뭐예요? 말이에요 말.

오늘 잠언서를 보면서 칭찬이 사람을 이렇게...
이 잠언서가 어려운 게 그런 거예요.
‘칭찬이 인간 만든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이런 듯한 느낌이 굉장히 강한데,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오면 어떤 사태로 바뀌었냐? 하면요.
우리가 지금 수요일날 마태복음 23장을 보고 있죠. 칭찬이 뭘 만듭니까?  인간을 악마로 만들어요.

애들을 칭찬하면요. 마귀 새끼가 돼요. 칭찬을 계속해 보세요.
지금 세대가 독특한 세대거든요.
지금 20대 30대 우리 30대 그 세대는 모두가 다 경제적으로 대부분이 부족함이 없고
(어렵게 산 사람도 있지만) 주는 대로 ‘오냐 오냐’ 했어요.

그러니까 걔들이 어떤 위치에 있느냐? 하면요. 판단자의 위치에 있어요.
어떤 선생님이 그런 게 있대요.
견학을 가게 되면 정부에서 나오는 돈이 있고 그 돈은 딱 하나만 지원한대요.
정부도 문제가 많아요. 교육부도. 극장 관람을 하게 되면 관람비만 준대요.
이 정책 하는 사람들이 진짜 단세포죠. 애들이 가려면 차비도 들죠.
그러면 거기 가면 팝콘도 먹어야 되잖아요. 애들은 팝콘 먹으러 영화관 가거든요.
콜라 마시러 영화관 가는데, 정부에서는 그것만 주니까 선생님이 이제 보고서를 쓴 거예요.
써가지고 실수를 해가지고
‘차비 얼마, 팝콘 먹을 사람은 자비 부담’ 이런 걸 안 써서 보냈는데

가서 이제 애들한테 ‘그래 팝콘비는 너희들이 내고 차비도 내가 없으면 빌려줄 테니까 나중에 나한테 갚아라’ 하니까 애들이 뭐라고 하는가? 하면
‘선생님 우리를 2년 동안, 3년 동안 가르쳐놓고 그거 하나 못 삽니까?’ 이래 나오는 거예요.

별거 아닌 것 같은데 이 사고가 무슨 사고냐? 하면요.
애들이 자기들이 책임질 거는 다 빼버리고 판단만 하는 거예요. 판단만.
이게 바리새인의 모습이라 생각하면 돼요. 애들은 자기 잘못 하나도 없어요.
애들은 자기 잘못 하나도 없어요.

제가 지난번에도 언급했죠. 20~30대가 교회를 안 오는 이유가 뭐냐? 하면요.
그들은 자기들이 판단자예요. 그래서 인기 있는 교회는 뭐냐? 하면요.
수요 예배 없는 교회, 주일 오후 예배 없는 교회,
오전 예배 설교를 저처럼 1시간 10분 20분 하면 안 와요.
그리고 모든 가족이 와서 함께 즐길 수 있는 리조트 같은 교회, 어릴 때부터 영어 수업을 하고...
교회가 문화센터가 됐거든요.
그 유럽이 다 했어요. 미국이 다 했어요.

그렇게 다 하니까 교회가 뭘로 바뀝니까?
시대를 못 따라가요. 교회는.
처음 우리나라에 서울 쪽에서 뭡니까? 복음성가라 해가지고 기타 치면서 그룹 사운드라고 합니까?
만들어서 전국으로 퍼졌잖아요. 그러면 젊은이들이 온다 했잖아요.
그 젊은 세대들이 다 어디로 갔어요? 지금?
지금 뚝섬 유원지에 가 있다니까요. 거기가 훨씬 즐거워요.

지금 이 ‘율법의 마침’
이 잠언서가 지혜서거든요. 지혜서는 십자가의 지혜로 그 지혜가 밝혀집니다.
그런데 방금 우리가 읽었잖아요.
금을 도가니에 넣어가지고 연단을 해서 정금이 되잖아요.
풀무불을 갖고 은, 순수한 은을 만들잖아요. 이 논리가 다 맞죠? 맞잖아요.
이 맞는 이 만물의 법칙이, 자연 법칙이
율법의 마침이 되시는 분이 와버리면 모두가 다 무엇으로 규정되느냐? 하면요.
죄로 규정이 돼요.

오늘 아침에 어떤 목사님이 이런 글을 올렸어요. 페이스북에.
목사님인지 교인인지 초짜들 같아요. 페이스북에 보면 목사들은 좀 조심을 하는데...
자기가 공원에 가서 하나님을 봤대요. 그러면서 이제 로마서 1장을 갖고 오는 거예요.
만물 속에 하나님의 신성을 보여줬다라고요.

여러분 그런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맞네.’ 이렇게 가요.
우리들은 여기 있는 분들은 금방 분별하잖아요.
‘하나님을 봤다’라고 하는 순간 마귀 새끼죠. 왜 마귀 새끼입니까?

만물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려요.
만물은 지금 보이는 게 무엇밖에 없습니까? 십자가밖에 없어요.

로마서가 1장에서 출발해서 8장으로 넘어가면 만물이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잖아요.
그러면 그 만물 속에 인간들은 하나님을 알아야 된다 했을 때
그 하나님을 앎 자체가 무엇으로 뒤바뀌어야 되는가? 하면
‘만물 속에서 하나님을 안다’라는 자체가 악마적이라는 걸 알아야 돼요. 그게 이방인이잖아요.

그러면 유대인들은 어떻습니까?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잖아요.
그 영광 중에 영광이 누굽니까? 사람이죠.
근데 그 사람을 중심으로 그들이 율법을 해석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해석한 결과
누구를 죽여버립니까? 하나님의 형상인 하나님의 아들을 죽여버려요.

지금 1절 요 부분은 조금 이따 하고요.
뒤에 보면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쫓은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말씀을 하거든요.
“지식을 쫓지 않았다.” 호세아서도 보면 저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진멸당했다라고 하거든요.
알지 못하긴 뭘 알지 못해요?
선지자들이 계속 알려주죠. 알려주는데 알지 못해요.

지금 오늘날 교인들의 문제가 뭐냐? 하면
자기들은 호세아 선지자가 외치는 그 시절보다
‘예수님이 오셨으니까 자기들은 거기에 나오는 호세아가 외쳤던 그 시절의 북이스라엘이나 남유다와는 달리 그 외침을 알아들을 수 있다’라고 생각을 해요.
우쭐댄다는 겁니다.
‘나는 저들보다 훌륭하기 때문에 잘 알아들을 수 있다’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 “지식을 알지 못했다”라는 것이 우리가 지난 시간에 봤잖아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할 때
그게 호세아 예언이거든요. 호세아 12장에 나오는 예언인데
분명히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가 예수님에게 적용이 되면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는 그 말씀이 예수님의 몸 중심으로,
몸에서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니까 이 몸 중심으로, 출애굽 사건이 완전히 다 바뀌어버립니다.
완전히 다 바뀌어버려요. 어떻게 바뀌어버립니까?

지리적인 애굽이 아니라 이제는 ‘예수님이 계신 곳’ 외에는 다 애굽이에요.
정반대로 해석을 해버려요. 예수님의 몸 중심으로.

우리가 보기에는 예수님이 애굽에 갔으니까 애굽에서 아들을 불렀다 하니까
‘애굽은 애굽이 아니지 않느냐?’ 이렇게 해석을 하지만
이미 1차적으로 애굽은 애굽이었음이 구약에서 다 밝혀진 거예요.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호세아서 예언은 분명히 출애굽 사건을 갖고 오는데
그 출애굽 사건을 근거로 하여서 예언을 이야기하면서
그 예언이 예수님 몸에 이루어지면
우리들이 기존에 갖고 있던 모든 해석이 와장창창 무너져 버립니다.
유대인들의 해석이 다 엉터리가 돼요.
그러면 지리적 의미가 사라지죠.

하나님 나라, 메시아 왕국에 있어서, 다윗 왕국에 있어서 땅의 의미가 사라져요.
그래서 갈라디아서나 사도행전에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받기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 했을 때
‘아버지께서 약속한 게 뭐냐?’라고 할 때는요.
메시아 왕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게 뭘까요?

이것도 어려운 게 뭐냐? 하면
이미 유대 땅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왕으로 믿는 자들이 적지 않죠.
적지 않고 그다음 왕을 믿는 백성들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죠.
그러면 무엇만 있으면 돼요? 땅만 있으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할 때, 성령을 이야기할 때
성령을 무슨 개념으로 받아들이냐? 하면
약속의 땅의 회복으로 알아들어요.

‘아니 목사님 거기에 어디 그런 게 나옵니까?’ 그게 나와요. 그게.
그런데 성령이 와버리니까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모습 자체가 약속의 땅 안에 있는 모습으로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주되심을 증거하는 주의 백성이 되는 거예요.
이것은 인간이 예상하는 모든 것들을 깨어버리는 거예요.

‘왜 부활 시점에, 부활한 몸을 보면서도 그들은 끝까지 이스라엘의 회복을 사수했는가?’를
계시를 보는 성도들은 알아라는 이야기예요.

성령이 안 오면, 성경의 모든 지식을 다 동원하면
그 지식이 지혜가 될 수 없고 지식으로 머물기 때문에
그 지식은 나를 위한 지식으로 다 교체가 돼요.

지금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었잖아요.
그러면 열심이 있는 자들의 이 열심이 어떤 열심입니까? 하나님께 열심이 있었는데 어떤 열심이에요?
자 소득의 십일조를 합니다. 사복음서에 나오잖아요.
예수님이 그것을 ‘외식한다’라고 했는데 그 말은 제가 또 한 번 더 할게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외식’과 ‘인간이 말하는 외식’이 달라요. 앞서도 말씀드렸죠.

사람에게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들이 거짓이기 때문에 인간이 말하는 참 말도 다 거짓말이에요.

그러면 이제 머리 더 똑똑한 사람은
‘목사님 지금 복음을 전하는 것도 거짓말이죠?’라고 이제 공격하겠죠.
그 정도까지 못 따라옵니까? 논리가?
사람의 말은 다 거짓말이라 했으니까 거짓말이에요. 그래야만 성령이 일을 해요.
그게 안 되면 어떤 문제가 발생하느냐? 하면
내가 옳은 말을 했으니까 옳은 말을 듣고 깨닫는 일이 발생해요.
그러면 누구 종이 되느냐? 하면요.
지식을 제대로 가진 사람, 목사의 종이 돼요.

이렇게 되면 제가 말씀을 더 많이 깨달았잖아요. 더 많이 깨달았으니까
‘나는 거짓말 안 해. 나는 진짜 십자가의 복음의 참말을 이야기해.’
‘그러니까 내 말을 들으라’는 거예요.
이 논리가 어떻습니까?
이게 세상적 논리잖아요. 세상에는 선생이 있잖아요.
마태복음 할 때 아직, 이번 주 수요일 할지 모르지만
“너희 중에 누구든지 선생이 되지 말라” 했거든요.
선생은 누구밖에 없습니까? 예수님뿐이에요.

그런데 뒤에 가면 선생 노릇하거든요.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가르치라 하고.
그 선생의 의미는 ‘나는 선생이 아니라’는 선생이에요.
근데 누가 선생이 되려고 합니까? 야고보서(3:1)에 보면
너희 중에 선생이 되려고 하지 말라라고 하죠. 더 큰 심판을 받는다.
왜 선생이 되려고 할까요?
사람을 종으로 삼으려고 그러는 거예요.
말씀이라는 것이 우리를 빠져나가게 못해요.

이 복음을 안다는 인간들의 문제가 뭐냐? 하면
저를 비롯해서 모든 그 인간들의 악마성은, 가장 큰 악마성이 거기에서 드러나요.
‘나는 이제 복음을 아니까 이제 너희들은 나한테 배워라’는 거예요.
자기가 십자가 안 졌잖아요.

이들의 문제가 뭐냐? 하면 주님이 지금 살아서 친히 일을 해요.
근데 우리는 안 믿잖아요. (여러분은 다 믿으시겠지만...)
성령이 일하시는 걸 안 믿어요.
이 사도신경의 문제가 뭐냐? 하면 (다 엉터리지만)
우리는 거꾸로 신앙 고백하잖아요. 기회가 되면 한번 해야 되지만.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해서 하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계시다가’라는 이 표현이 어떤 의미예요? 일을 한다는 말입니까? 안 한다는 말입니까?
‘앉아 계시다가 이제 오시니까’ 그런 의미가 되게 강해요.
‘니는 앉아 있어. 우리가 일을 할 테니까...’ 이런 의미가 굉장히 강해요.

주님은 “앉아 계시는” 의미가 주의 자리예요.
주님의 자리니까 아버지께서 일하시는 방식으로,
아버지께서 어떻게 일했어요?
인간들이 보기에는 일 안 한 것 같잖아요. 창조하고 난 뒤에 뱀이 들어오고...
아무것도 안 한 것 같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그 아버지의 일이 아들의 일로 다 바뀌어버리면
아들의 일은 인간의 눈에 포착이 잘 안 돼요. 어느 정도 안 되는가? 하면요.

한번 봅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오늘 밤에 네가 낙원에 있으리라” 이거 포착됩니까? 여러분 한번 설명해 보세요.
우리들은 다 미쳤기 때문에 그 말씀이 믿겨지는데
미친 상태에서 정상으로 좀 돌아와서 자 “오늘 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낙원’ 본 사람 있습니까? 말뿐이잖아요. 말.
예수님의 일이 이런 일이에요. 오른편의 일이.

그런데 스데반 집사님은 죽을 때 오른편에 서 계신 주님을 보잖아요.
‘주님을 봤다’라는 것은
이미 그 스데반 집사님이 일을 할 때, 복음을 전할 때 주의 능력이 함께했다라는 겁니다.
그런데 상대가 볼 때는 뭐밖에 안 돼요? 논쟁밖에 안 돼요. 논쟁.
변론하잖아요. 스데반 집사하고 치열한 변론을 해요.
우리가 치열한 변론을 해야 돼요.

변론하는데 누가 이깁니까? 변론하면?
남대문 가본 사람이 이깁니까? 안 가본 사람이 이깁니까?
이 세상에는 안 가본 사람이 이겨요.

그런데 복음을 보게 되면 복음 안에는 가본 사람이 이겨요.
왜냐하면 이 말씀이라는 것은 모든 이론을 파해요.
여러분 말씀을 만만히 보지 마세요.
성경을 믿음으로 봐야 되니까 과학자들이 주장하는 그런 논리를 다 못 깬다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다~ 깹니다.

이들이 지금 “힘써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쫓은 것이 아니다.”
도대체 “지식을 쫓는다”는 게 뭐냐? 할 때는 우리는 이 지식이 뭘까요?
한번 봅시다. 지금 이것을 사도 바울은 중의적으로, 다의적으로 표현하거든요.

지금 우리 성경에 로마서 10장 1절에 보면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이스라엘을” 이라 할 때 작은 글자로 써놨잖아요.
작은 글자로 한 이유가 있어요. 이 단어가 없어요.

이미 9장에서 ‘이스라엘’이 누구냐? 할 때는
이스라엘을 다의적으로 써요. ‘혈통적 이스라엘’도 있고
조금 더 들어가면 이제 이스라엘이 되잖아요.
예수님이 참 이스라엘로서 그 피로 만든 이스라엘도 들어가요.
이건 단순히 과거 역사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로마에 있는 성도들, 오늘날 이 말씀을 보는 모든 성도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지식을 쫓지 않았다” 했을 때 여러분, 이 지식이 어떤 지식입니까? 1차적으로.
1차적으로 만일에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을 보게 되면 이들이 지식을 쫓지 않았죠.
‘그러면 무슨 지식이냐?’를 따져야 되죠. 어떤 지식일까요?
‘사도바울이 말하는 지식’과 ‘성령받지 못한 사람들의 지식’이 달라요.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지식은 어떤 지식이었습니까?
십계명이잖아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그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잖아요. 맞죠?
그게 지식을 쫓은 겁니까? 안 쫓은 겁니까?

사도바울은요. 복음을 전할 때 ‘알아들을 자만 알아들으라’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성령이 아니고는 십자가의 능력 속에 들어올 수가 없어요.
만일에 지식으로 가능하다면 설득을 합니다.
로마서를 보면 설득을 하는 것 같지만 철저하게
나중에 뒤로 넘어가면 11장 가면 뭐라 합니까?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아무도 모른다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무도 모르니까
‘그러면 은혜 받으면, 성령 받으면 믿어지겠네요. 믿음은 단순하지 않습니까?’
그 말이 맞는데, 단순한데,

문제는 단순한 믿음이 얼마나 복잡하냐? 라고 하면
인간의 죄성이 그 속에 다 담겨 있어요.
‘믿으면 구원되죠.’ 말은 맞아요.
뭐 그렇게 될 것 같으면 성경을 두껍게 줄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러면 이들의 지식이 도대체 얼마나 (제가 엉터리라고 해버리면 엉터리로 보기 때문에)
말씀을 찾아봅시다. 레위기 19장 14절입니다. 구약 성경 175쪽인데요.
“너는 귀 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소경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여호와께서 율법을 주셨어요. 어떤 율법을 주셨냐? 하면
귀 먹은 자에게 저주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게 율법입니다. 이것이 이웃 사랑하는 거예요. 맞죠?

그다음 소경 앞에 장애물, 거치는 돌을 두지 말라는 거예요. 이게 율법이에요.
그러면 이 말씀을 하신 하나님이 이 율법을 지켜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은우 뭐라고? 지켜야 되지? 아니 아빠가 ‘너 휴대폰 그만 봐’ 하면
아빠도 휴대폰 그만 봐야 되잖아요.

지금 하나님께서 귀머거리에게 저주하지 말고 소경 앞에 장애물을 두지 말라 했으면
여러분이 이제 율법을 알았어요. 그럼 지식을 쫓는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라고?
‘귀머거리에게는 절대로 저주하지 않고 소경 앞에는 절대로 장애물을 두지 않는 분이다.’
그런 하나님 맞죠? 제가 지금 함정이 있는 게 아니라 성경대로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가 뭐냐? 하면 로마서 9장 32절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여기에 보면 ‘부딪히는 돌’ 걸림돌, 올무를 누구? 어디에? 시온에 뒀다라는 겁니다.
이거 이사야 8장에 나오는 거거든요. 이사야 8장으로 가봅시다.
오늘 성경이 조금 왔다 갔다 하는데 그럴 수밖에 없어요.
로마서는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다 담고 있기 때문에.
8장에 가면 어떤 사건이 벌어지느냐? 하면

자 이거부터, 먼저 결론부터 얘기해 봅시다.
이사야를 성전에서 불러서 “누가 나를 위하여 갈꼬?”라고 할 때,
제가 가겠다고 할 때 “무엇이라고 외칠까요?”라고 물었죠.
물었을 때 하나님께서, 여호와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하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사야 6장 10절에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데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이사야 선지자가 가서 외치는 순간 그 외침은 귀머거리 만들고 소경 만드는 일이에요. 맞죠?

그러면 이사야 8장에 나오는 이 사건은 귀머거리에게 소경에게 무엇을 둔 거예요? 소경 앞에?
장애물을 둔 거예요. 이 히브리어 단어가 똑같아요. 레위기에 나오는 단어랑.
성경을 대충 보면요. 이런 충돌 지점을 발견을 못해요.

대충 보는 자들의 문제가 유대인들의 방식인데요. ‘하나님은 무조건 옳다’라는 거예요.
그 옳다라는 개념 자체가 우상이라는 걸 알아야 돼요.
하나님은 인간이 옳다라는 그 옳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지금 오늘 본문이 의로운 거거든요. 의로움. ‘율법의 마침’인데
그게 지금 오늘 설교 주제인데

자 여기에 의하면 분명히 이사야 선지자에 의해서
그들은 모두가 다 소경이 되었고 귀머거리가 되었잖아요.
그런데 그 귀머거리 된 자에게 하나님이 뭘 주셨어요? 소경된 자에게?
걸림돌을 앞에 놓은 거예요.
여러분 이 본문을 어떻게 해결하겠습니까?

이제 여기에서 8장을 좀 더 봅시다. 이사야 8장에서
앗수르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이들을 심판한다 할 때 그 심판의 물결이, 홍수가 몰려오니까
그 홍수 속에 잠긴 자들이 뭐라고 외칩니까?

사8:8절 “흘러 유다에 들어와서 창일하고 목에까지 미치리라 임마누엘이여 그의 펴는 날개가 네 땅에 편만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이 여러 가지로 나오는데 지금
“임마누엘이여” 임마누엘에게 지금 기도하는 건데, 간구하는 건데

“그의 펴는 날개가” 이 ‘그’가 누구냐?를 갖고 이제 해석이 분분해요.
이 그가 3인칭 단수라 해가지고 당신이라 해서 하나님이냐?
왜냐하면 뒤에 나오는 단어가 날개잖아요. 날개 하면 독수리 날개가 떠오르잖아요.
하나님께서 독수리 날개로 너희들을 업어 구원하셨다라는.
그래서 이 ‘그’라는 이 단어를 하나님이라고 이렇게 해석하는 경우가 많아요.
근데 제가 보기에는 그가 잘못됐습니다.
그래야만 뒤에 나오는 ‘그가 펴는 홍수가 미친다’라는 거예요.

‘그’가 누구냐? 하면 이 앗수르예요. 짐승의 나라입니다.
짐승의 나라에게 사로잡혀 와서 죽을 지경이 되니까
마치 애굽에 있던 그 히브리 민족들이, 야곱의 후손들이 부르짖는 식의 부르짖음이 일어나는 거예요.
물론 이때의 부르짖음은 다르죠.
임마누엘에게, 약속을 믿고 부르짖는 부르짖음이에요.
‘이 외침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겠느냐’라는 거예요.
그게 메시아 왕국을 기다리는 자들의 사고방식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지금 짐승의 지배하에서 죽을 지경이잖아요.
그러면 무엇을 믿고 기도하겠습니까? 약속을 믿고 기도하겠죠.
그 이사야가 예언을 했잖아요.
‘이렇게 기도할 거라’ 그리고 임마누엘이 어떻게 할 거다?
‘저들에게 대해서 또 심판할 거다’ 뭐 이런 내용이 쭉 나오잖아요.
‘너희를 구원할 거다’ 이런 내용이 나오니까
이들이 당한 형편에서 기도를 하는 겁니다.
이 기도가 뭐가 잘못됐어요? 말씀을 따라서 하는 기도잖아요.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내 이름으로 기도하라” 할 때 우리가 기도하잖아요.
그렇게 기도하는 게 뭐가 잘못됐느냐? 라는 거예요.
문제는 그렇게 기도하는 자들이 누구냐? 하면 남은 자 유대인입니다.

그래서 지금 다시 이사야 8장 12절 봅시다.
“이 백성이 맹약한 자가 있다 말하여도 너희는 그 모든 말을 따라 맹약한 자가 있다 하지 말며 그들의 두려워하는 것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로 너희에게 두려워하며 놀랄 자를 삼으라”
그러니까 놀랄 자를 삼는 거예요. 진짜 두려워할 분이 누군지. 삼는데 그다음 나오는 말씀이

사8:14절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라 ”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는 그 시점이 어떤 시점이냐? 하면요.
여호와만이 두렵다라는 거예요.
여호와만을 두려워하는 그들에게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체가 이사야 6장 예언에 의하면, 말씀에 의하면
소경입니까? 아닙니까? 소경이죠.
아직도 우리 사람의 논리로는 지금 이해가 안 되시는 것 같은데
이사야 6장 지금 8장을 넘어왔잖아요.

저들이 아하스 왕이 그 이사야 예언의 징조를 구하라 할 때 안 구했잖아요.
안 구한 이후에 징조를 알려주고

이미 이사야를 읽은 사람들은 이사야의 예언대로 다 되어진 사실을 확인하고 있어요.
확인한 상태에서 이들은 ‘그래 우리가 진짜 두려워해야 될 것은 여호와다’라는 거예요.
여호와라고 두려워하는 그들에게 뭘 주느냐? 하면
걸림돌과 거치는 반석을 주는데
중요한 것은 이 말씀 자체가 그들을 소경 만드는 일이라는 거예요.
자기들은 소경이라고 생각을 못해요.

지식을 쫓은 게 아니라고 했을 때 지식을 따른 거예요.
따른 그들에게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분명히 “소경 앞에 장애물을 두지 말라”고 하셔놓고
소경 만든 그들에게 장애물을 둔 거예요. 이걸 어떻게 해석할 거냐? 이 얘기예요.
이런 말씀만 있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죠.
그러면 천지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는 거잖아요.
“모든 만물에 보여 알게 되나니” 했잖아요.
그런데 그 창조주 하나님이 자기를 부정합니다.
어떻게 부정해요?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창조주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여호와는 ‘유일하신 하나뿐인 하나님’이거든요. 맞죠?
그런데 하나뿐인 하나님인데 예수님이 뭐라 합니까?
“나를 믿는 자는 아버지를 믿는 것이고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봤다”라고 해버려요.
그러면 하나뿐인 하나님이 부정되죠.

삼위일체로 접근한 사람들은요. 이걸 이해를 못해요.
그들은 시간 속에서 계시한 걸 시간을 다 빼버려요.
다 빼버리고 정답을 뽑아내가지고 ‘이건 이거고 이건 이거고...’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렇게 할 수 있는 분은 누구밖에 없어요?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지식을 끌어당겨서 자기가 하나님 행세를 하는 거예요.

지금 이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이 지식을 쫓지 않았다라고 했을 때
사람들이 보는 관점은 뭐냐? 하면요.
‘이 지식은 잘못된 지식일 거야. 그들이 아는 지식은 엉터리 지식일 거야’ 라고
우리가 먼저 생각을 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마태복음 23장에서
“저들이 말하는 것은 듣고 행하되 저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 하거든요.
이 말씀도 정말 어렵잖아요. 말하는 게 다 맞다라는 겁니다.
맞는데 그 말하는 모든 율법이 뭘 증거하고 있어요?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다라는 거예요. 이게 말이 안 되잖아요.

방금 우리가 레위기 19장을 읽었잖아요.
“소경 앞에 장애물을 두지 말라” 할 때
이 말씀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말씀이라고 예수님이 선언을 해버립니다.

이러면 대화가 돼요? 안 돼요?
지금 대화하자는 말입니까? 하지 말자는 말입니까? 대화가 안 되잖아요.
아니 하나님 소경 앞에 장애물을 두지 말라 했잖아요. 그래놓고
본인은 소경 앞에 장애물을 두잖아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 답다면
성령 앞에 장애물을 두지 말고, 십자가라는 걸림돌을 두지 마시고, 모두가 다 소경이니까
십자가라는 진리의 그 길을 주님께서 그들에게 다 제공하셔서 천국으로 인도해야 되잖아요.
그게 율법이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인간들이 갖고 있는 하나님 개념이에요. 사고 방식이.

그런데 예수님은 “이 율법이 내게 대해서 전한다”라고 해버려요.
“내게 대해서 전한다”라고 할 때는 율법 안에는 이게 이제 중요한데
율법 안에는, 율법이 주어졌을 때는 이미 범죄한 이후입니다.
율법 안에는 심판이 있어요. 심판적 요소가 있어요.

그다음 또 하나의 요소는 뭐냐? 하면
사랑의 요소가 있어요. 심판과 이 구원, 이 요소죠. 두 가지 요소인데

이제 이스라엘로 들어가게 되면
이 심판과 구원이 이스라엘은 다의적으로 또 작동을 해요. 중첩적으로.
심판과 구원인데 이스라엘 안에 또 심판과 구원이 또 담겨 있어요.
그게 로마서 9장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이야기고.

심판과 구원.
달리 말하면 이 율법에 의해서 의롭게 된다고 했을 때는
그 의롭게 되는 것이 뭐냐? 라고 할 때는
우리들 입장에서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의(義)이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을 하거든요.
그런데 율법을 지키는 게 의가 아니에요.

창세기 15장을 다시 봅시다.
지금 로마서 4장을 이해를 못하면 로마서 전체가 이해가 안 되거든요.
창세기 15장 5절에 보면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이렇게 나오거든요.
‘의’ 이 ‘의’. “의로 여기셨다”고 했을 때 이 의가 뭐냐? 라고 할 때
아브람의 믿음이 의잖아요. 그러면
‘그래 믿는 게 의롭지 않느냐? 예수님의 피를 믿는 게 의롭지 않느냐?’
우리는 단순히 그렇게 생각을 해요.
근데 그게 의가 아니에요.

이 ‘의’라는 것은 여호와의 이름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의’입니다.
그런 게 어디 있느냐? 그런 게 있습니다.
신명기를 한번 보겠습니다. 신명기 6장 25절입니다.
“우리가 그 명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 이렇게 나오거든요.

“삼가 지키면” 율법을 제대로 지키면 그것이 우리의 의로움이 된다라는 거예요.
이 말은 맞습니까? 틀립니까?
이 말씀을 해석함에 있어서 사람들은
‘아 율법을 지키면 우리의 의로움이죠.’ 이렇게 나오는데 지킬 인간 없습니다. 없고

“지켜서 의로움이 된다”라는 이것은 율법을 지키는 분은 예수님이에요.
그럼 예수님이 율법을 어떻게 지키느냐 하면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지켜요. 이게 코드가 달라요. 코드가.

맹목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구약에 나오는 이 하나님과 신약의 예수님이 연속성을 갖는다’라고 무조건 믿어요.
그런데 좀 똑똑한 사람들은요. 신약과 구약이 첨예하게 대립이 돼요.
달라도 너무 달라요. 오죽하면 구약을 부정하겠습니까?
마르시온 학파는 그런 걸 부정해버리거든요.

그들은 뭘 모르느냐? 하면
왜 구약에서는 ‘여호와의 이름’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나타내시다가
신약의 종말이 되어서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오셔서 자기를 나타내시는가? 그 이유를 모르는 거예요.
그 이유를 몰라요.
모르니까 그들은 ‘진짜 하나님’을 찾아내려고 하는 겁니다. 진짜 하나님.

진짜 하나님을 찾아내니까 어떤 사람은 ‘구약의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다.’
어떤 사람은 ‘신약의 예수님이 진짜 하나님이다.’

‘진짜 하나님을 찾는다’라는 것은 벌써 문제가 발생했죠. 자기가 뭐하는 거예요?
‘진짜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라는 거잖아요.

성령이 임하면 십자가가 밝히 보여요.
십자가 사건의 현장 속으로 성도는 인도함을 받아요.
그런데 그들은 십자가 피조차도 무엇으로 생각하느냐? 하면
올바른 지식. 하나님께 나아가는 제대로 된 길이라고 봐요. 그 지식을.
그게 문제라는 겁니다.

신명기 9장 4절을 봅시다.
9장 4절은 앞부분에 나온 말씀과 약간 달리 설명을 하시는데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나의 의로움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얻게 하셨다 하지 말라”
여기 보면 ‘나의 의로움’이잖아요. 나의 의로움.
이 나의 의로움은요. 잘 보세요. 지금 로마서에도 나오지만
내가 율법을 지켜서 내가 의로우면 의롭다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의롭다로 끝나는 정도가 아니라 의롭게 내가 어떤 자리에 올라가는가? 하면요.
심판주의 자리에 올라가게 돼 있어요.

왜 그러냐? 라고 물으면 선악과를 먹어서 그래요.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배후에 마귀가 있잖아요. 마귀는 누구의 자리를 노립니까?
심판주의 자리를 노려요. 자기가 최종 판단자예요.
그 마태복음 4장에서 마귀가 최종 판단을 하잖아요.
이 관람자의, 그 인간의 모습을 너무 적나라하게 나와 있어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면 이거 해. 그러면 내가 믿겠어. 이거 해. 내가 믿겠어.”
자기가 판단자예요. 그게 유대인들이었거든요.

이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나의 의로움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말하지 말라.”
그렇게 말씀을 하시죠. 왜? 이건 인간의 본성이에요.

희한하게도 사람들이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습니다’라고 복음을 전하면요.
그 들을 때는
‘맞아요. 저는 죄인입니다. 아무 나의 행위가 없고 오로지 주님의 피로만 구원받습니다’라고 해놓고
이제 그다음 한 주도 지나지 않아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내가 믿어서 의롭게 되었죠.’ 이런 이야기를 해요. 처음부터 가짜였죠.
아니면 성경적으로 표현하면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신으로 마치는 거예요.

약속의 땅에 어떻게 들어갔느냐?
신6:4절 하반절에 보면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얻게 하셨다 하지 말라 실상은 이 민족들이 악함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니라”
야~ 충격적입니다. 악함을 인하여서 쫓아내는 겁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방식은 “악함을 인하여서 쫓아내고” 그들을 심판하고

그러면 그들만 심판받은 것이 아니라 이미 광야에서 이들이 심판을 받았잖아요.
심판받은 그들이 그 속에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약속의 땅은 여호와의 의로움만 드러내는 곳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신 9:5절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아니요, 아니요, 라는 말을 계속 쓰죠. 이 신약도 똑같아요.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쫓으라”는 거예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따르는 게 아니에요.
그냥 ‘예수님만 따르겠습니다. 나 십자가만 믿겠습니다’ 이거는 자기 부인이 아니에요.
구약도 똑같습니다. ‘아니요.’

그러면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는 이들이 반드시 보여줘야 되는 것은
‘나의 의로움이 아니요, 나의 마음의 정직함도 아니요.’
저들의 악함 때문이고 그다음 나오는 게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신9:5절 하반절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이 맹세를 이룸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드러내는 겁니다.
맹세를 이룸으로 말미암아.

그 맹세를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벌이셨습니까?
잘 들어보세요. 이게 중요합니다.
들어가는 게 목적이 아니고,
“맹세를 이루기 위해서” 창세기부터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약속을 하시고, 언약을 주시고
그다음 그들이 어디로 내려갑니까? 애굽으로 내려가죠.
그러면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그들을 구출하죠.
구출을 하여서 구출 당한 그들을 누구처럼 들통냅니까?
너희들이 강퍅한 바로와 똑같다라고 40년 동안 끄집어내어서 그들을 진멸하죠.

진멸한 이후에 다시 요단강을 어떻게 건넙니까?
언약궤를 앞장세워서 건너거든요. 제2의 출애굽이라는 말이 맞아요.
‘언약궤를 앞장세운다’는 것은
그들은 어린 양의 피로만 약속의 땅에 들어갔다라는 겁니다. 이 과정 전체.

그리고 들어갔을 때 그들과 싸워서 승리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너희들이 의롭고 정직해서가 아니라 저들이 악하기 때문이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자기들은 뭐냐라는 거예요. 자기들은.
전쟁한 자기들은 뭐예요?
그 맹세를 보여주기 위한, 맹세를 이루기 위해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뭐예요?
졸(卒)이라는 거예요. 졸. 그걸 다르게 표현하면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겁니다.

근데 거기에 만일에 자기의 행위를 가미시키잖아요.
우리들이 보기에는 아간도 전쟁을 했잖아요.
‘하나님이 일을 할 때 혼자 다 해버리지 왜 우리를 사용합니까?’ 사람들의 불만이 그건데

자기 백성을 통하여서 여호와의 이름이 어떤 전쟁을 펼치셨는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래요.
그래서 아간 같은 자들을 제거시켜버리는 겁니다. 이 전체가 뭐냐? 하면
‘여호와의 의로우심’이에요. 의로우심이 이거예요.
그걸 십자가예요. 그걸 달리 표현하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안에는 무엇이 담겨 있습니까?
십자가 안에는 십자가가 의라면 심판이 담겨 있죠.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심이 담겨 있죠. 그리고 심판받을 자는 심판받는 내용도 담겨 있죠.
그런데 다 지옥 가야 되는데 주님이 대신 심판받으셔서 함께 죽이시고
새롭게 살리신 새로운 피조물이 그 속에 들어있죠.
이 전체가 ‘의’예요. 의.
그러면 이 전체를 증거하기 위한 성도라는 겁니다.

문제는 무엇이냐?
“지식을 쫓지 않았다” 했을 때
‘지식’이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그 지식이냐? 라고 하면 그 지식이 아니에요.
요한복음 5장에서도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잖아요.
“모세가 내게 대해서 증거하고 있다, 성경은 내게 대해서 전한다, 증거한다” 라고 할 때
사람들은요. 충격을 받았습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모두가 다 누구를 증거해요? 누구를 증거합니까?

로마서를 보겠습니다. 1장 2절에
“이 복음은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아들에 관하여 미리 약속하신 것이 이 내용이고요.

3장 21절을 봅시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라고 하니까
우리가 오해하는 것은 ‘율법과 다르다’라고 자꾸 생각을 해요.
율법 자체가 하나님의 의를 증거하는 말씀입니다.
그게 이제 로마서 10장으로 오면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 율법의 목적이 되셨다”라고 하는 거예요.
누가? 그리스도.
하~ 이런 용어도 진짜 중요하거든요.

왜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 라고 하느냐?
‘예수가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라고 하지 않느냐? 라고 하면
그리스도가 그 기능이 담겨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리스도라고 하면 어떤 내용까지 다 담겨 있는가? 하면
나사렛 예수님이 말씀대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대신 화목 제물이 되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분이 그리스도라는 거예요.
그게 사도행전 2장입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 되어지면 성도는 어떤 인생을 사느냐? 하면
율법의 목적이 드러나는 인생을 살아야 돼요.
‘목적이 이끄는 삶’ 말은 참 좋은데
이미 목적이 들어와버렸어요. 우리 몸 자체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몸이 된 겁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할 때 어떤 내용이 담겨야 돼요?
하신 일이 담겨야 되잖아요. 하신 일.
그 일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한 단어로 쓰면 피, 십자가예요.
그 피 공로를 증거하는, 자랑하는 자로 살아가는 게 성도예요.

지금 “율법과 선지자들의 증거를 받았다” 했을 때
사람들이 생각하는 율법과 선지자들의 증거니까
‘아 율법이라는 것이 계속 지속되는 세계가 아니냐?’
지금 로마서 뒤에 가면 엄청난 행위들을 요구하거든요. 행위들을 요구할 때
‘율법이 지속되는 세계가 아니냐’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게 지식을 쫓음이 아니라는 이야기예요.
고린도전서에서는 십자가의 지혜라 하죠.
십자가의 지혜를 쫓아야 되는데 지식을 쫓으니까 결국은 ‘자기의’밖에 안 나오는 겁니다.

‘그럼 목사님 우리가 지식을 쫓아서 신앙생활하면 되겠네요’ 라고 우리가 생각을 하잖아요.
이게 문제라는 거예요. 왜? 그 지식, 십자가의 지혜는 소유권이 누구한테 있어요?
주께 있죠. 성령께 있잖아요.
그래서 로마서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논리를 다 언급을 하면서 주님은 어디로 빼돌려버리냐? 하면
성령의 일로 빼돌려버려요.

롬11장에 가면 36절입니까?
거기 가면 모든 것이 주로부터 출발해서
주님이 하시는 과정 속으로, 주님이 이끄는 결과 속으로 이렇게 빼돌려버려요.

그러면 사람들이 ‘그래 나는 주님이 하시는 걸 믿지.’ 이게 안 통해요. 성경에서는.
그 ‘믿지’라는 자체가 행위예요.
믿는다는 내용, 행한다는 내용을 다 끌어와야 돼요.

아까 창세기 15장을 다시 봤잖아요.
믿음의 의로 여겼다 했을 때 아브라함이 믿어서 어떤 사태가 발생했습니까?
믿어서 이스마엘을 낳았잖아요. 믿는 자가 누구를 공격해요?
하나님의 천사를 공격하죠.
나중에는 믿는 자들이 진짜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버립니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지 않는 사람은 구원을 못 얻어요.

우리는 이런 생각하잖아요.
‘모든 인간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그래 그건 누구나 다 알지.’
그런데 누구만 그걸 인정하죠? 성도만 인정을 해요.
성도 아닌 자는 ‘나는 못 박아 죽이지 않았다’라고 해요.

율법을 보는 태도도 마찬가지죠.
‘율법이 내게 오니까 탐심이 이루어지더라’ 맞죠?
탐내지 말라 하는 그 탐심이 이루어졌는데 사도바울 자신의 이야기예요.
율법이 오기 전에는 어땠어요? ‘나는 탐내지 않았다’라고 하잖아요.

율법이 오니까 탐심이 이루어졌는데 그 탐심은 어디까지 향하고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면서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면서 자기가 영광받겠다는 그 탐심을 누가 알아요?
성령 받은 사람만 인정하고 아멘을 해요.

그런데 지금까지 율법을 해석하는 방식이 뭐냐? 하면
‘그건 믿지 않는 자들이 율법에 대한 생각이야’
믿지 않는 자들이 누가 그걸 인정합니까?
정반대죠. 성령이 오니까 율법이 말하는 그 탐심이 어디까지 향해 있는가를 알게 됩니다.

누가복음 16장을 보겠습니다.
‘율법의 마침’이라는 것이 얼마나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냐라는 이야기예요.
굉장히 유명한 말씀이죠. 불의한 청지기에 대한 말씀이 나오는데, 16장 1절부터 보면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냐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이 불의한 청지기가 진짜 불의했어요.
주인이 알기 전에도 장부 조작을 했어요. 회사 하는 사람들 장부 조작 알잖아요.
장부 조작하면 돈을 떼먹는 이 일을 알아가지고 ‘이제 너는 이번 달 말로 그만두라’고 하니까
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뭐예요?
장부 조작밖에 없어요. 그래서 장부 조작을 했어요.
‘장부 조작을 하면 저 사람들이 나를 내가 여기에서 이제 너 이제 해고야 할 때 나를 영접하지 않겠느냐?’
그 사람 영접할까요? 안 할까요?

지금 비유가 정말 이게, 예수님 비유가 사실은 논리적으로 따지면 말이 안 돼요.
탕감을 해줬어요. 그럼 이 사람이 고마워할까요? 안 할까요? 그 순간은 고마워해요.
그런데 지나면 뭐예요? 돈 아까워요. 이게 인간이에요.

근데 지금 예수님이 비유를 갖고 바리새인들의 비웃음을 지금 유발시키는 거거든요.
그러면 바리새인들이 비웃었다고 하면요.
이 성경을 읽는 우리 모두도 비웃어야 돼요.
근데 예수 믿는 사람은 안 비웃어요. 왜? 자기는 불의한 청지기가 아니라는 거예요.
근데 불의한 청지기가 아니면 지옥 갑니다.

예수님이 지금 율법을 지키는 바리새인들에게 지금 이 말씀을 하시잖아요.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지킨다는 율법 속에는 뭐가 있습니까? “저울을 속이지 말라”
이 선지자들이 외친 게 그거였거든요.
이 가난한 자들에게 속여가지고 어떻게 했어요? 자기 배를 채우는 자들이 가득했잖아요.
그래서 심판을 받았거든요.

근데 예수님이 뭐 이런 비유를 갖고 오신 거예요.
그래 너희들이 속여가지고, 주인을 속여서 배를 불렸지?
그러면 주인에게 들켰으면 그다음 어떻게 해야 돼요? 정직해야 되잖아요.
그게 누구의 논리입니까? 바리새인의 논리예요.
지금 그들은 말씀대로 사는 겁니다. 누구와 다르게? 조상들과 다르게.

제가 누누이 말씀드렸잖아요. 말라기 선지자가 바리새인들 앞에 오면 외칠 게 없어요.
말라기 선지자가 바리새인 앞에 오면 외칠 게 없다니까요.
세례요한이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합당한 열매가 뭐였습니까?
군인들은 남의 것을 강탈하지 말고 세금을 함부로 더 거두지 말고...
그거 누가 다 합니까?
바리새인들이 다 해요. 그러니까 회개할 게 없는 거예요.

지금 예수님이 이 비유를 하잖아요.
그래서 이 사람이 장부 조작을 다 해서 자기 살 길을 찾았어요.
그러니까 주인이 뭐라고 이야기하는가? 하면 눅16:8절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빛의 아들들”이 누구냐? 하면 이 남은 자 유대인이에요.

그런데 남은 자 유대인들은 빛의 아들들이기 때문에
방금 이런 장부 조작하는 자들을 용납합니까? 용납하지 않습니까?
장부를 조작해서 멸망당했거든요.
그러면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들은 장부를 조작하면 돼요? 안 돼요?
안 돼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어야 돼요. 사도바울처럼.
그래야 칭찬을 받을 거 아닙니까?

그런데 이 주인이 무얼 칭찬합니까?
‘이야~ 정말 너 장부 조작 잘해서 니 살 길을 얻었네. 너 진짜 지혜롭다’ 칭찬하는 거예요.
이게 지혜입니까? 여러분 보시기에?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뭐라 합니까?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하니까 여기는 그냥 비웃었다 이래 나오지만
속으로 뭐라고 생각했겠어요? 예?
조롱하는 거예요. 조롱.

이것은 무엇과 같으냐? 하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유대인의 왕’이라고 썼잖아요. 그게 주의 자리거든요.
주님이 하는 일은 무엇밖에 없는가? 하면 여러분 잘 보세요.
인간의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일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일밖에 없어요.
그리고 뭐밖에 없습니까? 말뿐이에요.
아까 “낙원에 있으리라” 했을 때 말뿐이잖아요. 말. 아~ 이거 정말 중요한 말인데.

말뿐이에요. 그런데 이 한 편 강도는 말뿐으로 들은 게 아니라
이 말이 무엇과 연결됩니까? 요한복음 1장에 의하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빛을 창조하신 말씀으로 그에게 다가가 버렸어요.

그러면 이 강도와 불의한 청지기와 한번 같이 적용을 해 봅시다.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불의한 청지기이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어요.
그러면 옆에도 불의한데 왜 그 사람은 못 받았냐?
불의하다고 천국 가는 건 아니에요.
그게 로마서 9장에 나오는 ‘선택’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어떤 논리를 갖느냐? 하면
불의한 청지기가 칭찬을 받았으니까 그다음 뭐라고 주장하겠어요?
‘우리도 불의하자’ 이 얘기예요. 논리가. 그거 안 통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안 통하는데 그게 통한다는 거예요.
인간이 그럼 이 말씀에 장단을 맞출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맞춰요. 절대로.

근데 인간들은 맞춘다라고 상상을 해요. 생각을 해요.
‘내가 불의한 청지기가 되면 되지. 죄를 지으면 되지.’
로마서에서 그걸 다 박살내버리죠.
“은혜를 더하기 위해서 죄를 더 지으면 되겠네” 이런 것부터 시작해가지고
니가 하나님이면 그 말 할 수 있다라는 거예요.
피조물인 주제에 하나님 행세하는 겁니다.

말씀의 세계는요. 인간들은 계속해서 입을 다무는 그 세계예요.
그래서 지금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세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라”

예수님이 오셔서 이 세대가 악하다고 했잖아요.
예수님이 오셨잖아요. 이 악한 세대에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빛 되신 예수님의 앞에서 지혜로운 자는 누구밖에 없느냐? 하면
불의한 자밖에 없어요. 이게 진짜 어려운 이야기인데

‘그러면 우리는 다 사기만 치면 안 됩니까?’ 이게 이제 인간들이 갖고 있는 한계성인데
앞서 제가 설교를 시작할 때 말씀드렸잖아요.
인간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들이 뭐다 했습니까? 악하다라는 거예요.
그러면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자신이 복음을 전하더라도 어떤 자가 돼요?
불의한 청치기예요.
근데 선악 구조에 있는 사람들은 불의한 청지기라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여러분들 주위에 주님을 위해서 선교사 한 20년 하고, 50년 하고, 그리고 가난한 자를 돕고...
그런 사람들한테 물어보세요. 그게 불의하냐고.
제가 알기로는, 물론 복음을 아는 사람은 그렇지 않겠지만
복음을 모르는 사람은 100이면 100이, 아마 대부분 모를 겁니다.

뭐라고 하는가? 하면 ‘주님 말씀대로 했습니다’
말은 무익한 종인데 무익한 종 자체가 뭐냐? 하면
‘주를 위해서 내가 지사충성(至死忠誠)을 했다’라는 거예요.
우리 대학원 이게 그거가 지사충성인가 하는데 말귀를 못 알아듣죠.

그래서 분명히 이들은 지식을 쫓음이 아니라 로마서 10장을 앎에도 불구하고
이 지식 개념을 뭘로 새롭게 또 바꾸느냐? 하면
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걸 갖고 와서 지식으로 바꾸죠. 그 이 지식이 되면
‘불의한 자만 지혜롭게 인정을 받고 천국 가니까 우리도 불의하자’ 이런 논리를 펴는 거예요.

지금 이게 왜 중요하냐? 하면
율법에 대한 해석 자체가 예수님이 지금 엉터리죠. 아까 레위기도 제가 언급했지만
‘소경을 만들어놓고 소경 앞에 장애물을 놓는다면 그게 하나님이냐?’ 라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이에요.

왜냐하면 그 하나님이 어떻게 드러났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주가 되셨거든요.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한 율법이에요.
그 율법의 완성이 십자가예요.

인간들의 논리, 지식 구조는 a에서 b로 가서 b에서 c로 가서 c에서 d로 가서... 이래 가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논리 구조는 어떻게 돼 있는가? 하면
십자가부터 출발해서 십자가 안에서 모든 걸 재해석해 버립니다.
중간에 이 공백이 뻥뻥 뚫려 있어요.

여러분 교리가 공백이 가득 차 있는데
인간들은 그 교리를 외우면 공백이 없다라고 의식해요. 자기가.

복음 자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로마서 10장만 하더라도 “지식을 쫓음이 아니라” 하면 이걸 좀 인정을 해야 되는데
지식이 뭔지를 몰라요. 지식은 철저하게 ‘말씀대로’예요.
그러면 이 논리를 그대로 오늘날 우리들에게 적용을 하면
‘너희들의 구원은 신앙 고백을 통해서가 아니요’라고 해야 돼요.
만일에 신앙 고백을 통해서 구원이 된다면 그들은 지식을 쫓은 게 아니에요.
신앙 고백을 해서 구원이 돼버리면 신앙 고백한 나를 통해서 구원이 되는 거잖아요.
나로부터 출발하는 것은 다 죄입니다.

눅16:9절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이게 비유를 하셨으니까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방식은
예수님 앞에서는 모두가 다 불의한 청지기의 모습이 돼야 돼요.
예수님만이 유일한 친구거든요.

예수님과 친구 되는 방법은 불의한 청지기가 되는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내가 할 수 없다라는 겁니다. 내가.
내가 하게 되면 지식을 쫓음이 아님이 돼요.

‘왜 이렇게 복잡하냐?’
이렇게 또 물으시면 말씀이 복잡한 게 아니라 말씀을 듣는 우리가 복잡한 거예요.
악마의 그 지식이 다 들어와 있기 때문에.
그러면 주님이 우리가 갖고 있는 죄악의 요소들을 다 끄집어내는 겁니다.
그게 복음이에요.
그 끄집어 나오는 그 즐거움. 그게 성도의 기쁨이고 감사예요.

눅 16장 14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죠.
“바리새인들은 돈을 사랑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아~ 정말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은 돈을 사랑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비웃거늘” 이것은요.
‘성령 받은 누가’의 입장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성령 받기 전에는 이걸 몰라요. 성령 받기 전에는 이 바리새인의 마음을 몰라요.

예수님이 지금 이들을 보는 안목입니다.
“너희들이 결국은 율법을 지키는 이유가 내 비유를 들어보니까 말도 안 되지? 웃기지? 그러니까 너희들은 돈을 사랑하는 인간들이야” 이렇게 해석하는 거예요.

주님은 극단적이에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못 섬기거든요. 뒤에 나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못 섬기잖아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 말씀 앞에 어떤 태도를 취합니까?
아멘하면 될 문제인데 선택을 하려고 해요. 자기가.
한 사람은 두 주인을 못 섬겨요.
그래서 이 두 자리에서 성도는 죄인으로 드러나는 거예요. 계속해서.

그런데 마음은 어때요? 육이 있으니까.
계속해서 주님만 섬기고 싶잖아요. 그것도 안 돼요. 인간은 죽을 때까지.
봅시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눅16:15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불의한 청지기의 그 비유를 들으면 우리도 다 비웃잖아요.
그런데 그 비웃는 태도 자체가 사람에게 높임을 받는 태도라는 거예요.
와~ 이게 진짜 비약을 해도 너무 비약을 하잖아요.

왜 사람에게 높임을 받느냐? 하면
사람들은 선악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일에 대해서는 욕을 하잖아요.
(그 정치 얘기 안 하려 했는데) 천공의 영향력이 그 윤석열 대통령에게 미치잖아요.
안 미친다고 할 수 없어요. 그 인과관계가 다 돼 있으니까.
그러면 사람들이 거기에 대해서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옳지 않다라고 이야기를 하잖아요.
대통령이면 대통령답게 해라는 거예요.
이런 말에 대해서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하면
너희들은 사람에게 높임을 받고자 한다 이렇게 얘기해버려요.
이 반대도 똑같아요. 하나만 이야기하면 또... 이쪽 윤석열을 옹호하는 것 같잖아요.

근데 인간들이 갖고 있는 이 마음 씀씀이가 옳음을 주장하는 자체가 그런 거예요.
사람에게 높임을 받고자 하는 겁니다.
거기에서 어떤 인간도 못 벗어납니다. 그게 십자가예요.
근데 십자가의 영을 못 받은 자들은 자기는 벗어날 수 있다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다음 나오는 말씀이 이렇습니다. 눅16:16절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율법과 선지자가 예수님을 전하거든요.
그러면 예수님이 ‘율법 외에 하나님의 의’가 되잖아요.
그 의 안에는, 의라는 것은 하나의 시스템입니다. 시스템.
이 제사법이라는 시스템이 있잖아요. 쉽게 말하면. 언약이라는 것은 하나의 시스템이에요.

율법과 선지자는 이 ‘율법 외에 한 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인데 로마서에서는 아들에 대한 복음이라고 하거든요.
이 아들이 자기의 피로 새 언약을 세우셨어요.
그러면 새 언약의 시스템이 작동을 하게 되면 그 속에 들어가는 자들은 이게 천국인데
그 천국에 들어가는 자들은 여기에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이것도 괜찮아요.
이게 왜냐하면 구약의 전쟁이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 이들이 침입해 들어갔거든요.
이 방식을 그대로 끌고 오는데 피동을 해도 되고 그거는 상관이 없는데

지금 언약 시스템 안에 들어가게 되면
방금 불의한 청지기의 이 비유 말씀이 들어간 자들은
감사가 넘쳐요. 감사가 넘친다고요. 이 비유를 듣는 사람들은.
왜 그러냐? 하면
십자가 안에 들어와버리니까 죄 아닌 게 없어요.

‘죄 아닌 게 없다’라는 말은 뭘 하더라도 인간들은 어떻다라는 거예요.
십자가 안에 들어왔기 때문에 ‘나는 나를 안 높여’가 아니고
들어왔기 때문에 무엇을 하더라도 나를 높이려고 하고, 나의 영광을 받으려고 하고,
나의 의로움을 내세우려고 하는 그러한 죄들이 드러난다라는 거예요.
그런 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투하는 겁니다.
정반대의 상황을 말씀하신 거죠.

성령을 주시니까 성령 받은 자들이 그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거죠.
주님의 십자가로 승리한 그 전쟁에 참여한 자가 된 거예요.
그래서 율법과 선지자는 십자가를 증거한 겁니다. 그게 의예요.

그래서 ‘의’라는 걸 이야기할 때는
단순히 죄인이었는데 이 사람을 의인으로 만드는 의가 아니에요.
그래서 제가 얘기한 게 창세기 15장을 이야기한 거예요.
“아브람이 믿으매 의로 여겼다” 했을 때
그 아브람의 믿음의 실체가 예수 그리스도잖아요. 로마서에 의하면 아들이거든요.
아들의 죽음 자체가
이 언약 시스템, 새 언약 시스템을 전부 담고 있는
이걸 달리 표현하면 여호와의 이름이 제대로 증거되는 자리가 십자가거든요.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가?’ 하나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겁니다.
드러나기 때문에
그 의로움은 반드시 지옥 갈 자는 지옥 보내야 돼요.

지옥 보내는 게 의로움이 드러나는 자리고
그리고 지옥 가도 마땅한데 그 지옥 가는 자를 자기의 피로 화목 제물로 구원하셔서
그 구원은 그 사람이 구원이 아니고
그는 죽이고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게 하는 구원을 통하여서
새로운 피조물을 만들어서 주님의 증인으로 삼는 이 전체가 의로움입니다.

그런데 기존 기독교에서는 이 의로움을 자꾸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죄를 지었는데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의로움’이라고 생각했어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의로움이에요. 그 내용을 지금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율법과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증거했어요.
그것은 율법과 선지자가 누구에 대해서 전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했다라고 말씀하잖아요.
그러니 유대인들이 난리를 칠 수밖에 없는 겁니다.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쫓은 것이 아니라”
열심을 말씀대로 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목사님, 우리가 열심을 안 내도 됩니까?’
‘아니면 열심을 낼 때 지식을 제대로 쫓으면 됩니까?’ 이렇게 나오는데 간단합니다.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쫓음이 아니라”는 것이 계속해서 우리가 드러나야 돼요.
이렇게 말하면 궤변이라고 이야기하는데

궤변이 아니라 사도 바울을 보세요.
열심을 다해서 정말 목숨을 아끼지 않고 복음을 전했잖아요. 맞죠.
근데 왜 십자가만 자랑합니까? 이 말씀이 현장이 되잖아요.

이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우리는 정답을 요구해요.
정답을 요구하니까 이런 얘기를 못 알아들어요. 사람들이.
궤변처럼 들리는 거예요. 왜?
‘예수 믿으면 의롭고, 우리는 모두가 다 지식을 따랐기 때문에 나는 괜찮다’라고 이야기하고 싶잖아요.
지식을 따랐기 때문에.
그걸 성경은 용납하지 않는다라는 거예요. 왜?
지식을 따라서 나는 괜찮다가 되면 무엇이 사라지는가? 하면 의가 사라져버려요.
‘의’ 안에는 너를 구원시켰다는 것도, 의롭게 되었다는 것도 들어있지만
그 되게 하신 주님의 죽으심이 또 담겨 있어야 돼요.
그 죽으심이 담겨 있고 또 심판의 내용도 같이 담겨 있어야 돼요.

사도바울에게 적용하면요. 완벽합니다.
만일에 사도바울이 자신이 열심히 복음을 전해서 버림을 받을까 두려워하지 않았고
열심히 복음을 전했는데 나는 죄인 중에 괴수로라고 하지 않고
‘정말 나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았다’라고 했다면 이 말씀은 그렇게 해석해도 돼요.

‘우리는 지식을 쫓음이 아니라 힘써 일했는데 지식을 쫓지 않고 제대로 된 지식을 쫓았다’
이런 얘기를 할 수 있잖아요. 그렇잖아요. 아닌가요?
근데 사도 바울이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잖아요.
자기가 이렇게 말해놓고 이 말씀 속에 자기가 열심을 내어서 복음을 전하면서 합류당해버립니다.
그래서 남기는 게 이 “율법 외에 한 의”
율법과 선지자들이 증거한 의, 십자가를 외치는 거예요.

롬10:1절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라”
구원이라는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이 구원이 목표냐? 아니면 이스라엘이 목표냐?
지금까지 계속해서 보게 되면 이스라엘, 혈통적 이스라엘이나 아니면 사람의 구원이 목적이었다면
로마서 9장은 버려야 됩니다. 왜냐하면 계속 바뀌기 때문에.

바뀌잖아요.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면
야곱을 끝까지 구원해야 되는데 그 야곱의 자손들 중에 어떻게 돼버립니까?
또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 이 사태가 벌어지잖아요.

철저하게 십자가의 완료성을 증거하는 거예요.
그래서 11장 끝에(33절) 가면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 지식의 지혜의 부요함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 모든 내용, 인간들이 갖고 있는 구원론,
성경을 철저하게 바탕으로 한 그 구원론을 다 끄집어내면서
하나님의 지혜, 십자가의 지혜가 얼마나 대단한가를 지금 드러내는 겁니다.

“너희의 구원을 위함이라” 이러니까
‘아 구원받기 위해서 지금 이 얘기를 하는구나’ 이 구원 아닙니다. ‘나의 구원’이 아니라
아들의 피로 세우신 그 구원.
그러면 그 구원은 ‘율법 외에 한 의’를 다 드러내는 구원이죠.
율법 외에 한 의. 하나님의 의로움을 다 드러내는 구원이라는 겁니다. ‘나 천국 간다’는 게 아니라.

그래서 구원받은 자의 모습을 보게 되면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어요. 이 로마서에 나오는 거예요. 14장에 가면.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다” 해버려요.

‘우리의 구원’이라면
‘아 이제 구원 얻었으니까 (누구를 위해 살아야 돼요?) 나를 위해 살아야 되죠.’
근데 우리를 위한 구원이 아니라는 게 명확한 게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다”
그러니까 구원을 챙길 수 있단 말입니까? 없단 말입니까?
챙길 수 없어요.

구원은 챙길 수 있는 게 아니라 구원의 능력이 성도 가운데 역사합니다.
그게 십자가의 능력이에요.
그 능력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를 가만 안 둡니다. 성도를.
성도를 광야로 내몰죠. 성도가 사는 자리가 광야예요.
내 어려운 형편만 광야가 아니고
편안할 때도 광야예요. 왜냐하면 이 몸은 가만히 있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한 번 더 정리를 하면 롬10:2절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쫓은 것이 아니라”
이 지식은 인간이 장악할 수 없는 겁니다.
철저하게 성령에 의해서 역사하는 지식이고요.

롬10:3절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소득의 십일조를 하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그 모습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어떻게 했다는 거예요?
“힘써 복종하지 않는 것이” 어떤 일이다?
“말씀대로 사는 거다” 하죠. 정반대의 해석을 하죠.

이것이 사도바울에게 다시 한 번 적용하고 마치겠습니다.
뭐냐 하면 사도 바울이 힘써 주의 일을 했죠.
그러면 주의 일을 한 그가 이 본문과 한번 연결을 한번 시켜봅시다.
그러면 이 본문과 관련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복종했습니까?
아니면 주님의 의를 세우려고 힘써 복종한 겁니까? 이게 굉장히 중요해요.
왜냐하면 하나의 말씀 안에 두 요소가 동시에 담기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는 시키는 대로 했어요.
성령께서 몰아붙이는 대로 열심히 했어요. 했는데 말씀이 우선이죠.
그럼 말씀이 뭐라고 하냐? 하면
모든 인간의 열심은 어떤 열심입니까?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하는 열심이라”
근데 이게 자동이에요. 육이라는 것은. 육이라는 것은 그렇게 해보면 그 자리에 자기가 서 있어요.

지난 수요일도 그런 얘기했잖아요.
여러분들이 주일날 한 번도 안 빠지고 말씀을 다 듣고 소득의 십일조 정도 꼬박꼬박 다~ 해보세요.
1년만 해보세요. 1년도 하는 사람도 없지만...
한 10년 정도 해보라고요. 하면 이 육이라는 이 자체가 (이거 육이잖아요. 몸 자체가)
육이라는 자체가 그걸 잊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주님이 폭탄을 주는 겁니다. 그 사건을 만드시는데

사도바울은 자기가 이런 얘기를 할 때
‘나 잘랐다’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자기도 이 말씀 속에 합류당해요.
단순히 유대인들이 “자기 의를 세우려고 열심을 냈다” 이 얘기만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와 동행하기 때문에 우리 자신도 이 말씀 속에 해당 사항이 있다라는 이야기입니다.

롬10:4절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율법의 목적이 되었다면
이 목적만이 드러나는 성도의 몸이어야 되죠.
목적만이 드러나는 성도의 몸이 된다면 이 말씀 속에 사도바울 자신도 합류당해야 돼요.
그래서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라는 거예요.
얼마나 놀랍습니까?

여러분들이 만일에 주를 위해서 엄청난, 사도바울이 여행한 그 경로, 터키 한번 가보세요.
버스 타고 다녀도 힘들어 죽어요.
그 먼 거리를 강도의 위협과 강의 위협과 매를 맞고 다 했으면요.
우리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 하면
‘성령이 하게 하셨기 때문에 그건 나는 아니오라고 할 수 있다’라고 상상을 하잖아요.
그걸 망상이라 합니다.

성령은 성령대로 일을 하시고요.
성령은 궁극적으로 뭘 하는 분입니까?
책망을 하죠. 십자가만 밝히 보이게 하세요.
사람들은 성령이 자꾸 하는 일만 생각하는데
일을 하게 해서 십자가를 증거하는 사태로 몰아가요.

그러니 사도 바울이 그 모든 일을 한 이후에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라는 겁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 기쁜 세계 속에 참예한 걸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이 유대인을 치는 것 같지만 우리의 본모습이며
성령을 받았기에 이 말씀에 아멘하게 하시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목적 되신 그리스도, 십자가만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삼아주심을
감사하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율법과 선지자들의 목적인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살아가기를 소원하는
주의 백성에게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