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4-06-30 13:37
20240630 로마서 강해 72강 롬 10:5-8 믿음의 말씀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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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4-07-01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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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30 로마서 강해 72강 롬 10:5-8 믿음의 말씀

하나님 말씀, 로마서 10장 5절에서 8절 말씀을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롬10:5~8)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아멘

4절에 보면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고,
2~3절에서는 이 유대인이죠. 유대인들, 남은 자 유대인들입니다.
항상 사복음서나 서신서를 볼 때
이스라엘 유대인을 이야기할 때는 ‘남은 자들’이라고 명심을 하시고 보셔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로마서를 읽을 때나 지금 말씀을 들을 때
‘아니 말씀이 그렇게 복잡해서 어떻게 구원을 얻습니까? 아니 무식한 사람은 어떻게 그 많은 말씀을 이해해서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라고 반문을 하거든요.

방금 이 사람의 문제가 뭐였어요? 방금 반문한 사람의 문제가 뭡니까?
‘구원 얻는 비법’에 관심 있는 거예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기에 관심이 있어요.
‘설교를 할 때 왜 그렇게 어렵게 하느냐?’

지금 제가 어려운 게 아니라 사도 바울이 어려운 거예요. 아니 하나님이 어렵죠.
‘하나님 창세기가 뭐가 필요합니까? 지금 십자가의 피로 구원받으면 되잖아요.
율법 외에 한 의를 우리에게 주셨고 화목 제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하셨으니까
오늘 본문에도 이것을 믿으면 의롭게 되고 구원을 얻습니다. 요 세 줄, 세 줄도 필요 없죠.
예수천당 불신지옥 이걸로 성경을 끝내시지,
왜 이 긴 성경을 우리에게 주셔가지고 머리 아프게 합니까?’
지금 이런 목사들이나 교인들이나 한둘이 아니에요.
여러분들도 아마 그런 생각을 가질지 몰라요.
‘아니 그냥 예수 믿고 천국 가는데, 그 십자가의 피로 구원받는데, 그걸로 끝내면 되는데
뭘 그렇게 복잡하게 이야기하느냐? 결론만 얘기해달라’는 거예요.

결론을 왜 알고 싶어요? 제가 반문하는 게 그거거든요.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갖고 있거든요.
‘왜 이렇게 복잡하게 하느냐?’

하나님께서 그냥 구원하면 되는데 왜 창조를 하셨다가
그다음 노아 홍수 심판 이후에 그들을 모두 다 어떤 상황으로 내몹니까?
바벨탑을 만드는 상황으로 내모셨다가,
우상숭배 가운데 있는 아브람이라는 그 사람을 선택해서
그리고 이후에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맹세를 하시고 그 맹세를 이루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만드시고
그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하시고...
‘이런 긴 이야기가 왜 필요하느냐?’
‘다 거두절미하고 생명의 길만 우리에게 제시해 달라’는 게 오늘날 기독교인입니다.
유대인들이죠. 표현을 하면.

이게 왜 그러냐? 하면요.
인간이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지식으로 구원을 얻고자 해요.
플라톤적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아리스토텔레스도 마찬가지입니다마는.
정답을 알려달라는 거예요. 정답을. 정답을.

유대인들 이야기를 왜 해야 되느냐? 하면요.
방금 “율법 외에 한 의가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화목 제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다”라고 할 때
이 사실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거든요. 의롭게 되고.
그런데 이 사실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을 얻었다 했을 때
이 내용 자체가 두 쪽으로 나누어진다라는 거예요.
한쪽은 지옥 가고 한쪽은 천국 간다는 겁니다.

‘아니 목사님 그런 게 성경이 어디 있습니까?’
지금 9장부터 계속 그 이야기하잖아요. 이스라엘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오라고 했잖아요.
이스라엘은 분명히 하나님이 선택한 선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죠. 근데 그들이 이스라엘이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 했을 때 그것도 마찬가지죠.
분명히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는데 야곱의 후손들이 다 구원을 받습니까?
아니죠. 야곱의 후손들이 남은 자 유대인이잖아요.
그들이 예수님을 죽여버립니다.

성경을 사람들은 두꺼운 걸 싫어해요. 요즘 대부분이 이 한탄하는 게 뭐냐? 하면
Shorts를 좋아하잖아요. 왜 Shorts를 좋아하느냐? 하면요.
보는 게 다 유튜브고 짧은 것밖에 안 봐요. 왜 그것밖에 안 보느냐? 하면요.
그건 취미 생활이기 때문에 그래요.

돈이 되는 거는 10년이고 20년이고 투자를 해요. 돈이 된다면.
복음도 Shorts로 가야 돼요. 저도 올리잖아요. 설교를 길게 하면 안 들으려고 해요.
‘시작!’ 하는 순간 이제 자기 시작하는 거예요. ‘결론만 얘기해라’는 거예요.

결론만 얘기하면, 그 결론을 낚아챈 자들은 지옥 갑니다.
왜냐하면 성경 전체가 필요 없어지는 거예요. 그것은 무엇과 관련돼 있느냐? 하면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죠. 그러면 3년 동안 공생애를 겪으셨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알기로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으니까 십자가에서 생명이 나오고
그 피가 우리의 죄를 용서한다면 공생애 3년 동안이 필요합니까? 필요하지 않습니까?
아니 그 3년 동안이 왜 필요합니까? 필요 없잖아요.
그 공생애 기간 전체를 확장시키면 구약 이스라엘이거든요. 4천년 역사가 돼요. 확장을 하면.

‘그 긴 시간이 왜 필요합니까? 다 때려치우시고 주님,
십자가 피만,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영단번 제사를 드려서 우리의 죄를,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를 다 용서했으니까 그것만 우리에게 주세요’라는 게 구원파들의 주장입니다.
여러분들이 구원파들이 주장하는 성경 구절을 다 보면요.
틀린 말이 없잖아요. 성경 구절인데.

어느 누가 성경 구절을 부정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그 피로 말미암아 죄 용서함을 받고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렇게 이야기하면 다 맞는 말이잖아요.
여기에 대해 반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신에 여기에 대해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가 지옥 갑니다”라고 딱 던져보세요.
상대가 본심이 나옵니다.

만일에 그 사람이 그 말씀을 제대로 믿었다면 방금 제가 말한 말을 아멘을 해야 돼요.
아멘을 하고 그 세계 속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 그 사건이 나오겠죠. 십자가가 나와야 되거든요.

방금 그 얘기도 “이스라엘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로마서가 지금 누구한테 하는 이야기입니까?
‘옛날 옛적에 이스라엘이 있었는데 그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는데 그것도 아니고, 그래 이런 이야기가 있었었었었어...’
그 이야기를 하려고 지금 로마서를 이렇게 복잡하고 길게 쓰겠습니까? 아니에요.

인간이 자기 아버지가 마귀거든요.
그 악마성이 이 성도들 속에서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너희들은 이들의 악마성과 별개야’가 아니라
본문에 나오는 이 악마성이 다 끄집어 나와야 돼요.
그래야 무엇을 자랑하게 되느냐? 하면 십자가의 피 공로만을 사랑하게 돼 있어요.
복음을 알아도 마찬가지예요.

복음을 들어도, 복음을 듣고 난 뒤에 그다음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보면 복음이 어떻습니까?
나한테 도움이 되나요? 도움이 안 돼요.
지난주 수요일날 제가 그런 설교를 했잖아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지식이에요. 지식은 힘이 돼요.
근데 십자가의 지혜는 힘을 다 빼버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찾는다’라고 하고 말씀을 바르게 배우려고 하잖아요.
바르게 배우려고 할 때는 이게 확 올라가요. 에너지가. 새로운 걸 들으니까.
들으면서 누구와 비교됩니까? 타인과 비교가 되잖아요. 많이 우리 박 집사님 해봤잖아요.

근데 막상 그 마지막 길을 아니까 어떻게 합니까? 목사 안 하죠.
목사 할 이유가 없잖아요. 왜? 돈이 안 되잖아요.
자기가 힘이 되고, (자기)편이 생기고
그리고 이 상대와 비교했을 때 우위에 놓이는 그 상황이 되면 말씀을 부지런히 배워요.

근데 예수님이 십자가 진다고 하니까 어떻습니까?
지금 말씀은 저쪽 동네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이 바울을 영접하긴 했는데 그다음 어떻게 됐을까요? 로마 교회가?

로마 교회가 뭘 합니까? 그다음에.
시간이 지나잖아요. 그다음 이제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공인을 합니다. 공인을 하는 순간,
그전부터 개판됐거든요. 그전부터. 속사도 교부부터. 그 말하는 내용을 들어가 보면 복음을 몰라요.
복음을 모르고 법이 남아 있어요.

왜 그러냐? 하면
우리가 사도행전을 보게 되면 예루살렘 교회가 벌써 조직화되잖아요.
여러 번 언급을 했잖아요.
야고보가 예수님의 동생인데 그 사람이 예루살렘 교회에 있을 때 시간이 꽤 지났잖아요.
한 20~30년이 지났을 때, 교회가 자리를 잡고 힘이 생깁니다.
사도바울이 왔어요. ‘우리 중에 유대인들로부터 이 예수 믿는 사람이 수만 명이 된다’
그러면 게임은 끝나요. 거기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도 똑같아요.
우리 중에 헌금을 예를 들어 한 십일조를 한 500만 원 하는 사람이 세 사람이 된다 그러면
교회는 끝났어요. 왜? 세 사람 중심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과연 복음을 전할 수 있느냐? 그건 주께서만 가능해요. 사람은 불가능합니다.

지금 유대인들 이야기를 언급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 유대인들은 열심히 있었어요.
이 열심이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열심을 냈다라고 하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과연 의를 알고 열심을 내느냐?’라는 거예요.
요즘은 희한해요.

복음을 전하면 “의를 모르고 열심을 냈다”라고 하면 ‘의를 아니까 열심을 내지 말자’라고 해요.
희한해요. 세상이.
의를 모르고 열심을 낼 때는 목숨까지 바칩니다. 그런데 의를 알게 되면 열심을 안 내요.
왜 안 낼까요?
인간은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내가 열심을 냈을 때는
그 열심에 대한 보상이 올 때만 열심을 냅니다. 이거는 우리가 죽을 때까지 못 벗어나요.
그래서 날마다 복음을 듣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동네에 가 있을 가능성이 100%입니다.
성령이 우리와 함께 동행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오늘 제가 잠언서 27장 22절 말씀을 하면서 기도를 했잖아요.
거기에 보면 이 미련한 자는 절구로 찧어도 안 된다고 하거든요.
절구로 찧으면 우리는 된다라고 생각하잖아요. 그죠?

성경에 보면, 잠언서에 보면 초달을 하지 못하는 부모는
애를 (어떻게 하는 거예요?) 망치는 거라 그러잖아요.
그러면 그 성경 말씀에 의하면 ‘초달을 하면 인간이 된다’라는 논리로 접근을 하죠.
초달해서 인간이 된 자들이 누구냐? 하면 유대인들입니다.
어릴 때부터 부모가 먼저 본을 보입니다.
늘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그 모습을 보여야 돼요. 이걸 안 보이니까 애들이 볼 게 없잖아요.
뭘 배우겠어요?

오늘날도 마찬가지잖아요. 자녀들한테 아버지는 돈만 벌어주는 거예요.
돈만 벌어주니까 나중에 애들 크면 어떻게 합니까?
엄마하고 한편이 돼가지고 ‘안녕히 가세요. 아저씨’ 이래 되는 거예요.

유대인들이 이 말씀대로 초달을 했어요. 그래서 키웠어요.
키우니까 얘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버립니다. 이게 유대인들이거든요.

이들이 열심이 있는데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라고 이야기를 하면 이 말씀에 잘 들으세요.
누가 아멘을 하느냐? 라고 하면 성도만 아멘을 해요.
우리는 성경을 거꾸로 보는 그 습관이 있어요.
‘이놈들은 하나님께 열심이 있었는데 의를 모르고 열심을 냈구나’ 그러면서 손가락질을
저쪽으로 가거든요.
근데 사도바울이 지금 누구 이야기하고 있어요? 자기 이야기하고 있어요.
성령을 못 받으면요. 이걸 몰라요.

제가 로마서 할 때 여러 번 이야기했잖아요.
“율법이 죄를 더욱더 죄로 드러내게 한다” 라고 이렇게 말씀을 하셨을 때
이 말씀은 누구만 아멘합니까? 성령 받은 자만 아멘을 해요.

성령 받지 못한 사람은 “율법이 죄를 더 짓게 한다”는 이걸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면요.
성철처럼 해석을 해요. 자기가 죽을 때 ‘죄인이다.’
그게 무슨 죄인입니까?
‘나는 지옥 가도 마땅하다. 지옥 간다.’
그런 거는 성철 정도는 다 할 수 있는 거예요. 모든 인간들이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죄 아닌 게 없어져요. 완전히 다릅니다.

어떤 것도 죄냐? 하면 화목 제물을 믿는 것도 죄가 돼요.
이런 말씀들을 왜 아멘을 못하느냐? 하면
그들은 모든 성경이, 온 우주 만물이 십자가를 증거하잖아요.
그러면 이 전체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전체 내용을 갖고 말씀을 봐야 되는데
그 내용 중에 하나 내가 필요한 구원론을 끌고 와서 보기 때문에 이런 말에 대해서 동의를 못해요.

‘아니 주를 위하여서 충성을 했는데 그게 어떻게 죄가 되느냐?’ 라고 이야기해요.
왜 죄가 되는가? 하면 십자가의 영이 왔기 때문에 그래요.

그들은 ‘십자가의 영’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성령, 그리스도의 영이 왔으니까 ‘내가 이제 변화가 되어 가지고...’
이 변화, 거룩이라는 이 의미도 유대교적 방식이죠.
거룩하게 되어서 하나님의 뜻을 내가 수행할 수 있다라고 생각을 해요.

그럴 것 같으면 예수님이 십자가 왜 지겠습니까?
말씀이 육신이 될 이유가 없잖아요. 그냥 성령만 줘버리지. 지식을 깨닫도록.

지금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이게 사도바울의 말이거든요. 그러면 사도바울의 이 말 속에는 어디부터 출발합니까?
창세기부터 출발해야 되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 언약부터 시작해서 모세 언약을 지나서
다윗 언약을 경유한 모든 내용을 다 담고 있어요.
그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게 뒤에 나옵니다. 제 주장이 아니고.

사도바울은 이 시점에서 성경을 보세요. 창세기에 갔다가 선지서로 갔다가 왔다 갔다
막 넘어가잖아요. 넘어가니까 우리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 하면
‘한 부분을 뽑아내서 인용한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데

사도바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예수님이 “율법과 선지자가 내게 대해서 전한다” 했거든요.
“모세가 내게 대해서 전한다” 했잖아요.
그러면 모세의 이야기를 했다라는 것은 이미 선지서 모든 내용을 다~ 끌고 온 거예요.

‘그러면 모세의 율법과 그다음 선지서 내용을 모르면 복음을 모릅니까?’ 라고 이렇게 물으면
몰라요.
‘그러면 목사님 그 지식으로 그러면 아는 겁니까?’
그게 아니에요. 제 이야기는.

“율법과 선지자가 예수님을 증거한다” 라는 이 말씀 속에는 무엇이 담겨 있느냐? 하면
성도가 성령을 받게 되면 율법과 선지자들이 증거한 그 내용 속으로 다 들어가게 되어서
거기에서 ‘네 믿음이 아니야. 니가 알고 있는 이 믿음이 아니야’라는
계속 부정적인 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 말씀 속에서 오롯이 남겨지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 피 흘리심만 남겨지게 돼요.

인간은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복음을 듣는 순간 엑기스대로 받아들일 능력이 없어요.
그러면 ‘그러면 엑기스대로 못 받아들이는데 어떻게 구원을 얻습니까?’
주님이 구원을 하지, 우리가 엑기스대로 다 받아서 구원되는 게 아니에요.

아까 제가 기도할 때 사람들이 당황했을 수가 있죠.
“우리가 끝까지 미련한 자다”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아닌데요. 난 성령 받아서 이제 미련하지 않은데요’
이 사람은 십자가의 지혜라는 게 뭔지를 몰라요. 이 동행을 뭔지를 모르잖아요. 동행.

‘동행을 한다’ 라는 것은 ‘너는 끝까지 미련하다’라는 거예요.
그래야만 참 지혜 되신 십자가 지신 주님만을 증거할 수 있어요.
대부분 사람들이 철학자들과 동일하게 자신을 선악과 먹은 자들이 그러하잖아요.
신이 되고자 하는 그 욕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신이 되고자 하는 그 욕망에 사로 잡혀 있기 때문에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면
‘나는 미련한 자였는데 이제 지혜로운 자가 되었다’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

주님은 이렇게 표현하죠. 지혜로운 자가 된 건 맞아요.
맞으니까 지혜로운 자는 자기를 어떻게 규정합니까?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라고 하죠.
그러면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라고 하면 자기는 어떤 자로 규정되는 거예요?
미련한 자로 규정되잖아요.
아이 이렇게 단순한 쉬운 복음을 왜 못 받아들이냐? 하면
우리가 선악과를 먹어서 악마가 우리를 지금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지금 사도 바울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셨느니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잖아요. 그러면 율법 전체가 누구를 증거하는 거예요?

요한복음 5장을 한번 봅시다. 39절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성경에만 구원을 얻는 길이 있다’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 말이 맞아요? 틀려요?

그건 유대교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뭐라고 반박하느냐? 하면
‘유대인들은 잘못 알았다’는 거예요.
그러면 제가 묻겠어요. ‘뭘 잘못 알았느냐?’ 라고 물어보세요.
그러면 그들이 뭐라고 얘기하겠어요? ‘율법 외에 한 의를 몰랐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그러면 율법 외에 한 의를 내가 믿음으로 구원이 되네요’라고
그 사람들이 얘기할 것 아닙니까?
근데 그 믿음이 로마서에서는 무슨 믿음입니까? 엉터리 믿음이죠.

로마서 4장을 이야기해도 못 알아들어요.
아브라함의 믿음이 왜 15장에서 12장부터 시작하면 계속 엉터리잖아요.
아니 우리들도 한번 보세요. 예수 믿는다는 우리들도 ‘예수 믿으면 복 받습니다’라고 하면
복의 개념이 성경에 의해서 계속 새롭게 바뀌거든요. 이것도 참 어려운데...

뭐냐 하면 복이라는 개념이 우리가 갖고 있는 복이 따로 있어요.
아무리 십자가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나는 게 복이라고 말을 해도, 그것을 우리가 아멘을 하더라도,
우리는 나름대로 또 다른 복을 갖고 있다고요.

그래서 말씀 속으로 들어가면
이 생명의 말씀이라는 것이 우리를 계속해서 부정해 가면서
그 피로 만들어진 천국의, 하늘의 신령한 모든 복이 아닌 것과 대조되면서 드러나게 돼 있어요.
독특해요. 하나님 일하시는 방식이.

이것은 구약부터 똑같습니다.
하나님이 창조를 아시잖아요. 창조한 이후에 인간이 범죄하잖아요.
범죄한 이후에 약속을 줍니다.
약속을 주면 약속을 받은 그들이 약속에 대한 해석을 먼저 해요.
아담과 여자가 먼저 해석을 한다고요. 약속에 대한 해석.
그게 가인이고 아벨이거든요. 하와란 말입니다.

그 해석에 의해서 하나님의 약속은 짓밟히어요.
짓밟히는 그 세계 속에서 짓밟히는 것이 아님을 드러내면서
진짜 약속을 드러내는 방식을 하나님이 행하세요.

왜 그 방식을 취하느냐? 하면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과 똑같아요.
인간이 선악과를 먹은 이후에 인간들은 누구의 종입니까? 마귀의 종이죠.
마귀는 하나님을 알아요.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그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를 인간이 고스란히 갖고 옵니다. 갖고 오는데

진짜 하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모습으로 이 땅에 와버려요.
이거는 정말 선악과 먹은 자들의 머리에서는 못 나옵니다.
이런 식이 되면 하나님은 마치 인간이 일을 잘못 처리해서 뒤처리하는 분처럼 행세하는 거예요.
십자가가 그렇게 돼 있잖아요.

‘인간이 범죄했기 때문에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다.’
이 논리식으로 인간들은 이해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논리를 갖고 있는 인간들에게 십자가는 정반대로 치고 들어가 버리죠.

너희들의 해석은 너희가 죄를 범했기 때문에
‘내가 너희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진 것 같지?’ 라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자들은 다 지옥 갑니다.
왜냐하면 그게 우상이기 때문에 그래요.

구약이 긴 이유가
너를 위한 우상이 어떻게 차곡차곡 쌓여져서 나타나느냐 하면
마지막 유대인들, 사도바울을 보세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모습으로, 하나뿐인 여호와만 섬기는 자로서 자기를 숭배한 거예요.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그 말씀을 하신 거예요.

너희가 성경을 연구할 때 영생을 얻고자 하여서 연구했지 않느냐?
이것은 예수님의 어떻게 보면 일방적 주장이에요.
물론 율법사들이 와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습니까라고 질문을 한 겁니다.
그런데 그들이 바보가 아니잖아요. 바보가 아니라 뭐냐? 하면
구약을 보면 “여호와의 이름을 위해서”
그걸 누가 가장 많이 말을 했습니까? 모세잖아요. 모세.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구원하신 자들을 진멸해버리면 여호와가 어떻게 평가를 받겠느냐” 그런 기도를 하잖아요.
그 기도를 다 뺏깁니다. 후대들은.

단순히 영생 얻는 게 목적이 아니에요.
여호와의 이름을 위해서 그들은 말씀대로 산 겁니다.

그 결과가 뭐냐? 라고 하면 영생이라는 거예요.
그럼 왜 영생이라는 결과를 추구했느냐? 라고 하면
누가 저주받고 싶습니까? 여러분 저주받고 싶은 사람 손 들어보세요. 아무도 없다니까요.

저주받고 싶은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뿐이에요.
어느 누구도 저주받고 싶은 사람이 없어요. 그게 유대인입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거든요. 역사를 공부해 보니까
이걸 계시로 안 보고 역사로 보기 때문에 역사가 아니거든요.
역사를 통해서 계시가 되어지면 이것은 확정적이에요.
이거는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걸 역사로 보는 순간 이 말씀들을 뭘로 다 바꿔버립니까?
‘나를 위한 말씀’으로 바뀌어버려요.

이게 계시가 되면 십자가 지신 주님을 위한 역사가 돼요.
유대인들은 이걸 계시로 본 게 아니라
계시는 계시인데, 누구를 위한 계시? ‘나를 위한 계시’가 된 거예요.
신학교에서나 신학자들이 목사들이 성경을 계시를 할 때 100이면 100이 ‘나를 위한 계시’예요.

말은 ‘예수님을 위한 계시’라고 하는데
그러면, ‘예수님을 위한 계시라면 구원 얻는 자가 없어도 되지 않습니까?’라고 하면
아멘 해야 돼요.
구원 얻는 자 없거든요. 성경에는 구원 얻는 자가 없어요.

근데 누가 구원을 얻습니까?
주님이 십자가의 피로 새롭게 창조한 자들, 새로운 피조물들이 구원을 얻거든요.

그러면 사람들이 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들이 구원 얻지 않습니까?’
그들은 당신이 말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들에게는 나의 구원이 없어요.
당신이 말하는 구원에는 ‘나의 구원’이 있어요.

근데 예수님이 새롭게 창조한 새 피조물의 구원에 있어서는
나는 없고 내 안에 누가 삽니까?
야 이거 정말 이거 놀라운 비밀이잖아요. 그리스도가 살아요.
그리스도가 살아버리면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어떻게 되셨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요 내용물을 증거하고
그렇게 죽은 분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고 주되심을 증거하기 때문에
그 인생은 그리스도를 위한 인생이 돼버려요.
그걸 뭐라고 하는가? 하면 주님의 증인이라고 하는 겁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로마서 10장에서 그들의 열심이 누구를 위한 열심이었느냐?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에요.
이게 왜 중요하냐? 하면 여러분들이 글을 읽을 때나 목사들의 설교를 들을 때 잘 들어보세요.
열심이 있는데, 십자가도 이야기하는데, 어디를 지향하는가? 를 보면
그 사람의 탐심이 드러나게 돼 있어요.

목사들은 교회를 성공시켜야 되잖아요. 그죠?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이렇게 모였는데
이제 3년도 못 돼서 돈이 없어서 모임을 못한다 그러면 모세의 기도가 절로 안 나오겠어요?
그러면 설교자의 설교가 어떻게 바뀌어야 돼요?
사람들이 올 수 있는 설교를 해야 되잖아요.
아니면 구원론 중심으로 사람들이 설교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하면
“성경은 내게 대해서 전한다” 내게 대해서 전하고 “나에게 영생이 있는데 내게로 오지 않는다”라고
하죠. 왜 예수님께 안 갑니까?

요한복음5장 43절에 보면 그들은 사람의 이름으로 오면 영접한다는 거예요. 야~ 정말...
왜 이만희가 이야기하면 영접하느냐? 어떤 목사가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그 말을 잘 받아들이느냐?
라고 하면 사람의 영광을 서로 취하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볼 때는, 신천지 가는 사람들이 이만희를 막 영광스럽게 하는 것 같잖아요.
근데 위에 있는 윗대가리들은 갖고 노는 겁니다. 누구를? 이만희를.
갖고 놀면서 그냥 이게(돈) 많잖아요. 그리고 그 지파장 같은 경우에는 얼마나 본때가 납니까?
여러분 목사가 되고 싶습니까? 감독이 되고 싶습니까? 똑같은 거예요.

중요한 것은 그들 모두가 서로 영광을 취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거예요. 사람의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는 겁니다.
왜? 그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의 구원을 이야기하는가? 하면
‘너의 구원’을 이야기해 주는 거예요. 나의 구원을.

그런데 예수님의 이 복음은 누구의 구원이냐? 하면
‘예수님 자신의 구원’을 이야기해요. 예수님 자신을 소개하고 있어요.
예수님 자신의 구원 속에 누가 포함되느냐? 하면 새로운 피조물이 포함돼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예수님 믿을 것 같죠? 안 믿어요.
왜냐하면 사람은 자기가 주인공이 되고 싶지
들의 풀처럼 잡초처럼 되기를 아무도 원하지 않습니다.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처럼 되기를 원하는 인간은 아무도 없어요.

‘아니 성령 받으면 그렇게 안 됩니까?’
성령 받으면 그렇게 되는 게 아니라 성령이 그렇게 만들어요.
자기도 방법이 없습니다. 성도는.

말이 달라요. ‘성령 받아서 그렇게 된다’라고 해버리면 자기가 누구처럼 사는 거예요?
안개처럼 살았으니까 안개처럼 산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겁니까?
그런데 성령이 안개처럼 만들어버리면 아무것도 없어요.
남는 것은 말씀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뿐이에요.

지금 자기 영광을 취하면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겁니다. 자기 영광을.
그 방식이 뭐냐? 하면 이제 앞으로 그런 세계가 펼쳐질 거예요.
지금도 그렇고요.
사람들이 기복 신앙은 아닌 건 알고 그다음 뭘 원하겠어요? 성경의 올바른 진리.
그게 신천지가 치고 들어간 거거든요. 성경을 어쨌든 기존 교회보다는 나름대로 제대로 해석해 왔고
그다음 또 뭐가 필요하냐? 하면
그것보다는 정말 그런 어떤 사이비적이 아니라
말씀을 공부해가지고 말씀의 지식으로 충만한 그런 집단을 사람들이 원해요.

근데 이것도 사람들이 또 모이면 피곤하잖아요. 인터넷으로 끝냅니다. 유튜브로 끝내요.

그다음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5:44절. 이 이야기를 지금 꼭 해야 되는데
“하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하늘로부터 오는 영광은 말씀이 육신이 되시는 거예요.
만일에 예수님이 다니엘서 예언처럼 구름 타고 왔다면 예수님을 영접했겠죠.
지금 이것도 연관이 돼 있습니다. 오늘 로마서 본문과.

그런데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태어난 분으로서 지금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지만
나사렛 사람으로서 뭔가 기적과 능력을 행할 때는
어쨌든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는데 이쪽 부류가 따로 있고
지금 바리새인과 이쪽 계열들은 그런 것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신앙 수준은
일반적인 민중들이 갖고 있는, 기적을 보고 믿는 신앙과 달라요. 레벨이 달라요.
여러분들이 만일에 부자고 건강하다면 기적 보고 예수 믿겠습니까?
안 믿는다니까요. 그 레벨 자체가.
오히려 말씀에 더 충실하여서 말씀에 근거하여서 평가를 하게 돼 있어요.

요한복음 5:45절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모세가 이들을 고발을 하는데 왜 고발하느냐? 하면
모세가 누구에 대해서 증거하느냐? 하면 여기에 보면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모세를 믿었다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예수님의 표현이 정말 충격적입니다.
모세를 믿어야 돼요? 모세의 말을 들어야 돼요?
예수님이 라임을 쓴 거거든요. ‘믿음’이라는 라임을.

왜 이렇게 써버렸냐? 하면요.
이들은 지금 모세의 말을 듣고, 마태복음 23장에 나오잖아요.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율법대로 가르치고 율법대로 살려고 한 거예요.
그러면 그 최종 목적이 뭐냐? 하면 자기의 구원입니다.

자기 구원은 무엇과 연관돼 있다고 했습니까?
‘영광받는 것’과 연관되어 있죠. ‘내가 영광 받는 것’
그 영광 받는 것과 연결돼 있기 때문에 모세의 율법을 연구를 하면
인간들이 반드시 가야 되는 그 길이 뭐냐? 하면 ‘자기 영광’을 구한다는 겁니다.
그게 모세의 율법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이에요. 이 땅에 주신 목적.

어느 누구도 모세의 율법을 통해서 예수님으로 넘어갈 수가 없어요.
넘어갈 수 있다면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 필요도 없고 성령을 주실 이유도 없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상대가 ‘너희들이 무식하지? 좀 알아라.’ 그래서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의 대표자가 남은 자 유대인이거든요.
그들이 율법을 연구한 결과 자기의 구원과 자기 영광을 위하더라. 이게 끝이에요. 이게 종말입니다.
어느 누구도 여기에서 못 벗어나요.

그러면 이 본문이 우리에게 그대로 있다라는 것은 이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죠?
아닌가요? 교인들은 이런 말씀을 어떻게 보느냐? 하면
‘이건 내 이야기가 아니고’라고 봐요.
내 이야기가 아니라고 보니까 필요한 게 뭐예요? ‘예수 믿으면 구원 얻는다.’

그 구원 얻었으니까 그다음 필요한 게 뭐예요? 다락방에서 뭘 이야기합니까?
이미 죄를 다 용서했으니까 그다음은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상관이 없고,
이제는 어디를 지나가야 돼요? 화염검으로 둘린 에덴 동산의 길을 뚫었으니까
내가 사는 곳을 뭘로 만들어야 돼요? ‘에덴 동산으로 만들어야 된다.’
그러면 에덴 동산과 같은 것들을 만들기 위해서는 성경에 필요한 구절들을 다 뽑아오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런 본문은 다 삭제해버리죠.
왜? ‘이거는 복음을 모르는 자들이 읽어야 될 것’ 이라는 거예요.

“성경이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한다” 이러면 어떤 예수님입니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증거하잖아요.
그러면 모든 본문 하나하나가 성도와 만나게 되잖아요.
만나게 되면 성도의 죄가 드러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그 피 공로가 본문을 통해서 드러나는데
그들은 이런 데 관심이 없어요.
피를 증거하는 데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주의 이름을 증거하는 데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나의 영광과 나의 영생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5:47절에 보면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그 앞에 보면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했다” 라는 거예요. 내게 대하여.
사도 요한이 지금 기록한 거잖아요. 성령 받아서.
“모세가 예수님에 대해서 기록했다”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하는 순간 이미 예수님은 제거 대상이에요.
모세의 율법에 예수님이 어디 나옵니까? 안 나와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믿음 좋다는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 예수님 나오지 않습니까?’
찾아보라고요. 어디 나옵니까? 안 나온다고요.
인간들의 논리적 순서에 의해서 추적해 들어가면, 과학의 방식으로 따져 들어가면,
예수님이 안 나옵니다. 안 나와요.
그러니까 이 남은 자 유대인들의 사고가 인간의 입장에서는 옳은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내게 대해서 전한다”
그러면 그 ‘나’가 누구냐? 하면
그게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라는 이 내용을
모세가 전하고 있었다라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로마서에서 계속해서 그 이야기를 하고 있거든요.

다시 로마서10장 5절로 가서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지금 다시 사도바울이
“모세가 기록한 내용은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였거니와” 이 내용을 어떻게 해석해야 되느냐? 라는 거예요.

레위기 18장 5절을 봅시다. 1절부터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너희는 그 거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쫓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너희는 나의 법도를 쫓으며 나의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
분명히 여호와께서 주신 법도와 규례를 지키면 이로 인하여 살리라고 했잖아요.
그러면 “이로 인하여 살리라”고 해서 산 자들이 누굽니까?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유대인들이죠.
그래서 뭘 추구했다는 거예요? 그들은 영생을 얻고자 했다는 거예요.
그들의 해석이 옳아요? 틀려요? 옳다라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말씀을 누구에 대해서 증거하는 말씀이냐? 하면
이 말씀 자체가 예수님 자신에 대해서 증거하는 말씀이라는 거예요.

제가 지금 이 얘기를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로마서 10장 5절에 나오는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라는 말씀을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지금 증거하는 말씀으로 보입니까?
안 그러면 다시 돌아가서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행함으로 말미암아 산다’
라는 그 얘기를 하고자 하는 걸까요?
제가 질문을 잘 못했습니까? 

지금 로마서 10장 6절과 이 본문을 비교하는 것 같잖아요.
6절은 뭐냐? 하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라고 이야기를 하거든요.
그러면 5절은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이 말씀과 여기 접속사가 “데”로 돼 있는데
이 “데” 가 ‘그러나’라고 대부분 해석을 합니다. 역적 접속사로 해석을 하는데,
그런데 이 헬라어에서 접속사는 ‘그러나’도 되고, ‘더우기’도 되고, 문장에 따라서 마음대로입니다.

지금 제가 이 얘기를 왜 하느냐? 하면
헬라어의 단어를 이야기할 때 그걸 한 의미로 사용해버리면 본문이 어떤 상태로 바뀌느냐? 하면
내가 보고자 하는 대로 보는 거예요.
대부분 사람들은 5절과 6절을 반대되는 이야기를 해요.
5절은 ‘아~ 율법으로 말미암아 그 의를 행하는 자들은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 의롭게 되어서 살 것이다’라고 해석을 해요. 물론 그 내용도 들어가 있습니다.

그 내용이 들어가 있음과 동시에 이 본문은 누구를 증거하느냐? 하면
십자가를 증거해요.
저는 지금 그렇게 보겠다라는 거예요.

왜 그렇게 봐야 되느냐? 하면
지금 사도 바울이 행위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잖아요. 지금.
지금 이 본문을 유대인식으로 해석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신명기 30장을 끌고 오거든요.
레위기 18장에서 이 본문을 인용했다가 뒤에 보면 신명기 30장을 끌고 와버려요.
완전히 도약을 해버립니다.

이것이 연결이 돼 있는 거예요. 본문이.
그래서 사도바울이 지금 이 얘기를 하는 게 이 본문이,
롬10:6절에 나오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해서 소개한 말씀이 레위기 18장 5절이라는 거예요.

자꾸 우리는 ‘믿음과 행위, 믿음과 행위...’를 지금 대조시켜가지고 사람들이 오해하는데,
‘믿어야 구원을 얻는데...’ 이것도 말이 안 돼요. 로마서에서는.
왜 말이 안 되느냐? 하면 안 믿은 게 아니라
뒤에 보면 믿었는데 구원 못 얻어요. 이게 10장으로 넘어가면 이게 뒤죽박죽이 돼요.
자꾸 행위와 믿음을 대조를 하거든요. 사람들이.

지금 예수님의 십자가의 완료성을 이야기를 하면서
지금 사도바울이 레위기 18장 5절을 끌고 오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의 잘못된 해석들이 그 속에 담겨 있죠.
그 엉터리가 담겨 있음과 동시에
이 말씀은 예수님의 화목제물 되심, 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말씀임을 증거하는 말씀이 돼요.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한번 봅시다. 롬10:6절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내리려는 것이요” 이 완전히...
신명기 30장을 봅시다.
신명기 30장 말씀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느냐? 뭐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복과 저주를 그들에게 두셨는데 그들이 불순종해서 멸망당한다는 겁니다.
멸망을 당한다는 내용이 29장에 나오거든요. 멸망을 당해서 포로로 잡혀갈 건데
잡혀가서 돌아오는 내용을 담고 있어요. 30장에. 자 그러면 잘 보세요. 신명기 30장 1절 봅시다.

“내가 네게 진술한 모든 복과 저주가 네게 임함으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 쫓겨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
이렇게 말씀하거든요. 그러면 이 말씀을 알려면 약속의 땅에 들어갔죠?
들어가서 불순종해서 쫓겨났죠? 쫓겨나서 그다음 단계가 뭐예요?
말씀이 기억이 났어요. 돌아왔잖아요.
다니엘이 기억을 하고 회개를 하잖아요. 돌아왔습니다.
돌아와서 에스라 느헤미야가 회개를 하죠. 돌아왔잖아요. 회개를 했어요.

회개를 한 다음이 어떠냐? 라는 거예요. 그다음이.
그러면 그다음 단계는 어떤 단계예요?
‘말씀대로 살자’라는 단계예요. 그게 종말입니다.

지금 봅시다. 신명기 30장 2절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것을 온전히 따라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게 누구예요? 지금 돌아와서 순종하는 자들이 누구예요?
방금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유대인들입니다. 사도 바울이에요. 주님을 만나기 전.

그다음 신30:3~4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네 포로를 돌리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 너의 쫓겨간 자들이 하늘가에 있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모으실 것이며 거기서부터 너를 이끄실 것이라”
지금 이 시점은 어떤 시점이에요?
메시아가 왔을 때 이것이 완성이 되는 시점이에요.
그러면 메시야가 오기 전에 이들은 돌이켜서, 여기에 보면 재미있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긍휼히 여기사”
‘긍휼히 여기신다’는 말은 그들은 말씀을 순종한다는 말입니까? 안 한다는 말입니까? 논리적으로.
안 한다는 말이거든요.

그런데 인간들은 이렇게 해석을 못해요.
‘긍휼히 여겨서 돌아왔으니까 우리는 말씀에 순종해야 된다’는 논리예요.
이걸 뒤집어버리면
‘내가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켜서 우리를 긍휼히 여겼다’가 돼요.
그게 예수님 당시에 남은 자들입니다.
이들이 신명기 30장을 모르는 게 아니에요.

그다음 좀 더 봅시다. 신 30장 4~5절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네 열조가 얻은 땅으로 돌아오게 하사 너로 다시 그것을 얻게 하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또 네게 선을 행하사 너로 네 열조보다 더 번성케 하실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라”
이것을 어떻게 해석할까요?
이미 이들은 마음의 할례를 행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행했다니까요. 누르면 율법밖에 안 나옵니다.

신천지가 이걸 그대로 뺏긴 거거든요. “새 언약을, 마음의 할례, 마음에 말씀을 부어준다” 하니까
자기들이 외워버리죠. 다 외운 겁니다.
말씀을 외웠기 때문에 이들은 자신들은 영생을 얻은 것은 당연한 거고요.

그다음에 이 말씀이 성취가 되잖아요.
아직까지 로마 제국하에 있으니까
메시야가 시온산에 천국을 세운다면, 하나님 나라를 완성한다면, 이 모든 말씀이 비로소
이루어질 거라는 것을 그들은 믿고, 지금 그들은 거기에 어느 위치에 있을까요?
중심의 자리에 차지한다는 게 바리새인들의 신학이고 예수님의 제자들의 신학이에요.

좀 더 봅시다. 신30:8~10절
“너는 돌아와 다시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그 모든 명령을 행할 것이라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여 이 율법책에 기록된 그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네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몸의 소생과 네 육축의 새끼와 네 토지 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되 곧 여호와께서 네 열조를 기뻐하신 것과 같이 너를 다시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
지금 이 말씀에 해당되는 자들이 부자 청년입니다. 부자 청년.

그런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면” 이것이
로마서나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이 주가 됨을 믿어라”가 돼버려요.
“믿어라”가 돼버리면 복을 받는다는 게, 복의 개념이 완전히 바뀌어버립니다.
주님의 증인됨 자체가 축복이에요.
스데반 집사님처럼 돌 맞아 죽는 게 축복이고요.
거지 나사로처럼 평생 거지로 살면서 남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사는 게 축복이에요.
이게 바뀌어버립니다. 십자가에서.

그런데 유대인들은 육에 속했기 때문에 육에 속한 자들은 ‘말씀대로’를 주장하거든요.
‘말씀대로’라면 하나님께로 돌아왔잖아요.
돌아왔으니까 이제 우리에게 비로소 축복을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부자 청년이 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돌아갔습니까? 고민했습니까?
부자이기 때문에 그런 거거든요.
근데 그 부가 어디로부터 왔습니까?
신명기 약속으로부터 왔거든요. 약속으로부터 왔어요.
약속으로부터 받은 걸 포기하고 싶습니까?

로마서 9장에서는 사도바울이 주님의 피로 영생을 얻었잖아요.
영생을 얻었고 생명책에 기록됐는데 어떻습니까?
자기 이름을 제거해달라는 겁니다. 충격 아닙니까?
육에 속한 자들은 도무지 흉내내지 못할 말씀이 기록돼 있는 거예요.

그다음 이제 신30:11~14절입니다.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와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이 말씀에 의하면 여러분이 신명기를 보셨잖아요.
신명기를 읽어보면 집에서나 길에서나 자기 전이나 잔 후에 항상 가르쳐라 했잖아요.
가르치니까 사람들이 입에서 줄줄줄줄 나오는 겁니다.

지금 하늘을 이야기하고 바다를 이야기하는 것은 비유예요.
저 하늘 멀리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바다 건너에 있는 게 아니라는 게 신명기 말씀 이야기예요.
이 말씀대로 누가 지금 살고 있어요?
바리새인들입니다. 서기관들이 이 말씀을 지금 붙들고 있는 거예요.
여기에서, 신명기에서 하시는 말씀은 네 옆에 말씀이 있다라는 거예요.

그런데 로마서 10장을 다시 가봅시다. 10장 6절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이제 말씀을 틀어버리죠. 말씀을 트는 이유가 뭐냐? 하면 왜 트느냐 하면요.
이 구약을 알아야 돼요. 지금 신명기에 의하면 말씀이 바로 옆에 있다 했거든요.
그러면 옆에 있으면 말씀대로 살면 되잖아요. 맞죠? 말씀대로 살면 되는데

사사기를 보게 되면 말씀대로 삽니까? 안 삽니까?
안 살죠. 안 사니까 누구를 동원시킵니까? 사사들을 동원시켜서 어떤 능력을 보입니까?
“태양아 멈추어라” 우박을 내리죠. 그죠?
신비한 신적 능력을 행합니다. 삼손같이. 괴력을 가진 소유자에 의해서 구원을 시킵니다.
그런 능력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해요.

자 그러면 사람들이 이 사건들을 보면서 “말씀이 네 옆에 있다”라는 것을 좋아할까요?
아니면 강력한 힘을 소유한 자가 우리를 구원하는 걸 좋아할까요?

말씀이 옆에 있으면 시시하잖아요. 안 그래요? 말씀이 우리를 살린다 이러면 시시하잖아요.
그런데 능력들을 한번 경험했습니다. 그러면 그 능력들을 요구를 하거든요.
그게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아주 흥미로운 지점은 이 왕이, 사울 왕이
말씀이 눈앞에, 네 옆에 있다, 네 입에 있다라고 하는데 사울 왕이 율법을 모르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되는 게 사울왕이 율법을 몰라서 율법을 배반하는 게 아닙니다.
사울 왕이 사무엘이 죽고 난 뒤입니까? 그 전후에 어떤 일을 벌입니까?
이 신접한 자들을 다 제거하잖아요. 율법을 알고 있다니까요. 율법을 모르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이 사울 왕이 어떤 일을 진행하느냐? 하면 사무엘상 28장입니다.
사도 바울이 구약을 다 꿰뚫으면서,
신명기 30장을 출발해서 사사시대 왕정 시대를 지나와서 지금 로마서 10장을 얘기하거든요.
그래야 지금 이 말씀의 의미를 이해를 해요.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사들을 통해서 구원하잖아요.
사울 왕도 여전히 사사시대의 마지막이거든요. 마지막인데 사무엘상 28장 3절에

“사무엘이 죽었으므로 온 이스라엘이 그를 애곡하며 그의 본성 라마에 장사하였고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쫓아내었었더라 블레셋 사람이 모여 수넴에 이르러 진 치매 사울이 온 이스라엘을 모아 길보아에 진 쳤더니 사울이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 그 마음에 크게 떨린지라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시므로 사울이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그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
자 여러분이 이 말씀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지금 율법대로 살았다면 지금 이런 사태가 벌어집니까? 안 벌어집니까? 안 벌어지죠.
안 벌어지니까 하나님께서 꿈으로도 계시하지 않으시고,
사실 꿈이 필요 없거든요. 지금 이해되셨죠?

우림과 둠밈으로도 말씀할 필요가 없어요. 사실은. 율법대로 되어지니까. 율법대로 되어지잖아요.
어찌 되었든 하나님께서 이들의 죄악의 깊이만큼 긍휼을 베풀어서 대답을 해주셨어요.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도 어떻게 할 것인지를 알려주셨습니다.
그렇게 알려주셨다는 것은 그만큼 죄가 깊다는 거예요.

그런 상황에서 이 신접한 자들을 다 제거했는데
막상 어떻습니까? 닥치니까 누가 필요해요? 정답을 알려줄 사람이 필요해요. 정답을.
죽으면 되는데... 망하면 되잖아요.
살아있을 때 사무엘이 얘기했잖아요. 끝났잖아요.
이미 왕위를 뺏어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에게 준다고 했으면 아멘 하면 되는데
인간이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누구를 찾습니까?

엔돌의 신접한 자를 찾아갑니다. 이 여자가 숨어 있는데
어쨌든 이 정보력이 원래 권력자가 정보력이 뛰어났잖아요. 그래서 찾아냅니다.
찾아내 가지고 재미있는 것은 죽은 사무엘을 불러올립니다. 이것도 난제 아닙니까? 이 본문이.
‘무당이 죽은 자 불러올 수 있습니까?’ 이것부터 시작해가지고 질문이 끊이지 않죠.

지금 이것은 무엇과 봐야 돼요? 신명기와 봐야 되죠.
율법이 옆에 있는데 누구를 찾습니까?
죽은 사무엘을 불러올려서 사무엘이 하는 말이 무슨 말이에요?
살아있을 때 하는 말과 똑같아요. “너를 버렸다. 끝났다” 이 얘기를 하는 거예요.
이 얘기를 하면 우리는 이 본문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해야 됩니까?
말씀대로 되어지죠. 말씀대로 되어지는 겁니다. 사울 왕이 끝났다라고 하는데

지금 제가 여기서 하고 싶은 얘기는 이거예요.
분명히 신명기 30장에서는 “하늘에 올라갈 필요도 없고 바다 건너갈 필요도 없다”라는 것이
로마서에 의하면 “신적인 기적을 보여달라”는 식으로 해석을 해버려요.

분명히 “말씀이 옆에 있다”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신명기에서는.
로마서에서는 “하늘로 올라가면 그리스도를 모셔내리려는 것이다” 이게 무슨 얘기냐? 하면
지금 구약을 지나서 예수님 시대를 지나게 되면 인간들은 뭘 요구하는가? 하면 뭘 요구합니까?
기적과 능력을 요구하는 거예요.
사울 왕이 지금 그걸 원하는 겁니다. 말씀이 옆에 있는데.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이사야 선지자로 가면
이 아하스 왕이 “징조를 구하라” 할 때는 또 어때요? 징조를 구합니까? 안 구합니까?
구하지 않습니다. 정말 희한해요.
얼핏 보면 ‘말씀대로 믿는다’라고 하는데 말씀을 믿는 게 아니라 뭘 믿어요? 힘을 믿죠. 힘.
앗수르 라는 이 강력한 그 나라의 힘을 믿고 있기 때문에 징조를 구하지 않는 겁니다.

아쉬울 때는 징조를 구하고, 능력이 필요하고... 아쉽지 않을 때는...
율법은 계속 항상 옆에 있었어요. 율법대로 되어지는 거잖아요.
그러면 이 이스라엘은 당하기만 하면 돼요.

근데 인간이라는 것이 당하고만 있지 않거든요.
당하고만 있지 않으니까 율법이 옆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사무엘 선지자가 얘기한 것은 이미 ‘율법대로’잖아요.
그런데 어쨌든 불러올려서 뭔가 신기한 답변을 얻고자 하는 거고
그다음에 아하스 왕 같은 경우에는 원치 않는다라고 하고.

그다음 재밌는 것은 역대야 18장입니다.
아합 왕이 남유다 여호사밧 왕에게 ‘연합군을 결성해서 길르앗 라못을 빼앗자’ 이렇게 얘기를 할 때
선지자들이, 가짜 선지자들이 와서 (가짜인지 진짜인지는 우리는 알지만 그들은 모르죠.)
이구동성으로 승리할 거다라고 얘기하니까
여호사밧이 딴 사람은 없느냐 하니까 미가야 선지자를 소개하는데

이 미가야 선지자가 신기한 이야기를 하잖아요.
처음에는 사신(내시)의 말을 듣고 ‘올라가라 승리할 거다’ 이렇게 얘기하다가
이제 진짜 얘기를 하죠. 하늘의 천상 회의를 이야기를 해요.
근데 우리들이 조심해야 되는 게 뭐냐? 하면 천상 회의의 내용이 ‘율법대로’입니다. 율법대로예요.

천상 회의가 뭔가 특별한 게 없어요.
‘율법대로’ 아합이 우상을 섬겼으니까 당연히 멸망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멸망할 것인가? 거기에 대한 내용인데, 실은 율법대로입니다.

이 과정을, 이 과정을 누가 다 알고 있는가? 하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다 알아요. 구약을 다 알아요.
그러면 신명기 말씀에 의하면 이때는 아직 바벨론 포로 가기 전이거든요.
가기 전이고 지금은 돌아왔으니까 이제는 무엇 중심으로 가야 돼요?
기적 중심으로 가야 됩니까? 말씀 중심으로 가야 됩니까?
말씀 중심으로 가는 겁니다. 그게 바리새인과 서기관이에요. 얼마나 신앙이 대단합니까?
말씀 중심으로 가는 거예요.
그런데 이 말씀 중심인 이들이 예수님을 살해합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더 생각해야 되는 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이 얘기를 왜 언급하느냐? 하면
인간들 중에는 반드시 뭔가 눈으로 기적을 보고 믿고자 하는 그런 인간들이 있다라는 거예요.
그게 요한복음 6장이잖아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장정 오천 명을 먹였어요.
이것은 예수님이 보여준 표적이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표적이잖아요.
그러면 그걸 보고 그냥 믿으면 되는데, 내 살과 내 피니까
‘충성! 예수님이 하늘 올라가시는지 한번 보겠습니다. 우편에 계신지 보겠습니다. 보고 와서 내 믿겠습니다’ 아니면 ‘진짜 지옥 갔는지 보고 오겠습니다’ 이런 인간들이 생긴다는 거예요.
이 기적이라는 내용이 사복음서에 담겨 있는 겁니다.

복음은 굉장히 시시하게 전파돼요.
계시가 완성이 되면 그냥 너희 앞에 있는 이 복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내용으로 복음이 전파돼요.

그런데 사람들은 계속해서 뭘 요구합니까? 신비한 능력을 요구하는 거예요.

그러니 지금 사도 바울이 신명기 30장을 인용을 하는데
인용하는 내용이 신명기부터 시작해서 어디까지 다 관통해버립니까?
선지서를 다 관통해 와버려요. 중간기까지 다 관통해 와서 지금 얘기를 하는 겁니다.
이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입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합니까?
믿음이 없는 자들은 확인하려고 하고 체험을 하려고 하죠.

그런데 주님은 성령을 줘버립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자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해요.
그러면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자는,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면, 그리스도의 영이 있다면, 믿음이 있다면
뭘 내놓을까요? 받은 걸 내놓겠죠. 받은 걸.
뭘 받았습니까? 은혜를 받았으면 은혜를 내놓을 건데

그 은혜가 출처가 어디입니까? 십자가죠.
그러면 은혜가 나오는 모든 자리가 십자가를 자랑하는 자리가 돼요.

사람들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뭔가 대단한, 뭔가 눈으로 보고 확인하고 그런 식으로 믿으려고 한다는 거기에 대해서
지금 사도 바울은 공격을 함과 동시에
앞부분에서는 뭐라고 얘기했습니까?
“율법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그 의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함으로 말미암아
요 부류들, 바리새인 부류들을 공격하고
뒷부분은 사복음서에 나오는 두 부류죠.
기적을 보고 믿겠다라고 하는 그 부류들도 공격을 하는 거예요.
복음을 전하면 반드시 이 두 부류가 나오는 겁니다.

그다음 하시는 말씀이 롬10:7절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이게, 사람들이 정말 이걸 알고 싶어 하잖아요.
‘한번 보고 싶다. 내가 내려가서 보고 왔다’
그래서 천국 갔다왔다는 사람 간증이 통하는 이유가 악신 들려서 그래요.
지금 로마서에 보면 이미 답이 나와 있거든요.
성경은 두렵지 않고 간증은 두려워해요. 희한하죠. 인간이.

아니 말씀이 생명의 말씀인데 생명의 말씀은 우습게 여기고
어떤 사람이 병 고쳤다 하면 ‘와~ 대단하다’ 지옥 갔다왔다 하면 ‘대단하다’ 해요.

이 창세기부터 예수님이 오시는 종말까지를 이렇게 다 뒤져보게 되면
인간이 갖고 있는 그 신앙, 모든 종류의 신앙들이 다 나옵니다.
그래서 십자가 영,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것은 흉내를 못 내게 해버리는 거예요. 아예.

상대가 보기에는 ‘너 봤니?’
보기는 뭘 봐? 주님이 찾아와 버렸는데.
물론 사도바울이 주님이 찾아온 걸 얘기했잖아요. 맞죠?
근데 그것도 진짜 어려운 게 그거예요. 얘기해도 누가 봤습니까?
주변에 있는 사람도 우뢰가 울었는지 천사가 말했는지 이 사도행전조차도 왔다 갔다 하잖아요.

롬10:8절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와 정말 놀랍잖아요.
말씀이 육신이 되셨죠? 말씀이 육신이 되셨는데
지금 로마서에서는 육신이 되신 그분이 또 뭐가 돼요?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으로 바뀌어버렸어요. 다시 말씀으로 바뀌어버렸어요.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이 말씀은 어떻다고 합니까?
“살아서 운동력이 있다” 라고 하죠.

인간이 보기에는 이 말씀이 그냥 언어에 불과하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갖고 자신이 살아계심을 친히 증거합니다.

어떤 쪽은 ‘말씀대로 살아서, 우리는 행해야 의롭다’고 주장하는 인간들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쪽은 ‘한번 보여달라, 보고 믿겠다’라는 자들이 있어요.

사도 바울은 그 인간의 그 악마성을 고스란히 드러내면서
지금 믿음의 말씀의 능력을 말씀하고 있는 거예요.
갑자기 시시해져 버렸어요.

왜냐하면 9장에서 출발하게 되면 ‘하나님의 선택’이 나오고
‘태어나기도 전에 사랑하고 미워했다’ 이런 게 나오니까 뭔가 신비한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이제는 우리가 전하는 이 믿음의 말씀,
“이 믿음의 말씀이 역사하는 현장이 여기다”라는 거예요. 다음 주에 살펴보겠지만 롬10:9절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면 네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갑자기 어디로 와버립니까?
너무나 평범하게 와버려요.
그게 말씀의 능력이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주셔서 인간의 악마성을 다 드러내시고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이 말씀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의 주되심을 증거하는 말씀으로 드러내시고,
주께서 그리스도의 영을 주신 자들을 통하여서 믿음의 말씀으로 복음을 전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주께서 저희들을 긍휼히 여기사
살았고 운동력이 있는 말씀의 세계에서 십자가만 자랑하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지금도 믿음의 말씀으로 전파되는 복음 앞에 십자가 사건이 반복되며
십자가가 밝히 보이기를 소원하는 주의 백성에게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