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4-07-07 21:29
20240707 로마서 강해 73강 롬 10:9-11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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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4-07-08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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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7 로마서 강해 73강 롬 10:9-11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 말씀, 로마서 10장 9절에서 11절 말씀을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롬10:9~11)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아멘

‘율법의 마침이 그리스도가 되신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고요.
그러면서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가 그리스도에 의해서 완성이 되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6절에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말해요.
여기에 대해서 이제 사도 바울이 신명기 30장을 갖고 오는데
구약을 인용할 때는 필요해서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 자체의 완성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해석하는 것이 구약에 대한 제대로 된 해석이 됩니다.

그래서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는 거예요. 롬10:6~7절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내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이 말씀의 의미는 이거예요.
십자가 사건은 단회적입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영원한 제사’죠. 한 번에, 단번에 드린.
이 말씀에 대해서 이후에 이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말했잖아요.
그러면 모든 말씀, 믿음의 말씀이라.
‘믿음의 말씀’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느냐? 라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생뚱맞게 신명기 30장을 우리가 예상하는 것과 달리 해석해버렸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시고, 육신이 되신 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죽으신 분이 음부에 내려가시고, 내려가신 분이 3일 만에 부활하셔서 주가 되신 내용에 대해서
지금 ‘말씀’이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말씀을 하느냐? 라고 하면요. 지금 이 얘기가 지난 시간에는 제가 이렇게 설명을 했죠.
하나의 기적적인 요소, ‘눈에 보여야 믿는다. 십자가 사건을 눈으로 보여달라 그러면 믿겠다’
뭐 이런 식의 믿음도 공격하고 있지만

오늘 본문에 연결된 내용은 무엇과 연결돼 있느냐? 하면요.
‘말씀’이라는 것이 ‘믿음의 말씀’이라는 것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느냐? 라는 거예요.
성경 전체가 말씀이죠. 그죠?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라고 하면 사람들이 오해하는 게 뭐냐? 하면
‘그래 말씀이 육신이 되셨네.’ 이렇게 생각을 하는데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라는 말은
그 육신이 되신 내용을 다른 단어로 표현하면 ‘그리스도’라는 말이에요.
그러면 ‘말씀’이라는 것이 우리는 흔히 하나의 인격체로 생각을 하잖아요. 그죠?
말씀을 인격체로. ‘성자’로 생각해요. 요한복음 1장에 의하면.

그런데 그렇게만 볼 수 없는 게 뭐냐? 하면
창세기 1장 1절부터 시작되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자체도 뭐가 되느냐? 하면 ‘말씀’이 돼요.
이것이 ‘말씀’이 되면 이 ‘말씀’이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느냐? 라고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것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셔서 주가 되신 내용을 담고 있다라는 거예요.

“믿음의 말씀이라” 하니까 여기에 보면 이렇게 나오죠.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다”라고 하죠. 입에. 지금 오늘 본문에 보면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라 시인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거거든요.
이게 쉬워요? 어려워요? 우리 한번 시인해볼까요?
예수님을 주라 시인하면 구원을 얻어요.

‘에이 목사님 뒤에 마음에 믿어야 되지 않습니까?’
지금 시인이라는 말은요. 헬라어 단어로서 고백이에요. 고백. 입으로 고백하는 거예요.
우리 신앙 고백했잖아요. 입으로 그냥 나불거리는 게 아니라
이것이 우리 마음속으로부터 나오는 고백이에요.

이 마음과 입을 사람들은 나누려고 하거든요.
‘여러분 입으로만 시인하지 말고 마음으로 믿어야 됩니다.’
그런 사람들의 문제가 뭐냐? 하면 성경 본문의 의미를 파악을 못했어요.
이 말씀의 수준을 자기 수준에서 해석을 하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은 왜 그런 말을 하느냐? 하면요.
‘입으로 시인하는 것과 마음으로 믿는 것이 차이가 있다’라는 거예요.
차이라면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결국은 행위예요. 행위.

지금 “입에 있으며 마음에 있다” 했거든요. 이건 병열입니다.
“네 입에 있고 마음에 있고”
이것은 예레미야 31장 31절에 나오는 ‘새 언약’과 관련된 내용이에요.
그 믿음의 말씀이 입에 있는 거예요.

그러면 입에 있는 그 내용이 도대체 뭐냐? 라고 하면
“예수를 주로 시인한다”라는 겁니다.
우리는 이방인이죠. 이게 잘 들으세요. 말씀이 왜 어려우냐? 하면요.
그림을 조금... 그러니까 여기가 창세기부터 지금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전체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흔히 이 역사를 가로로 연결하죠. 이렇게 연결하거든요. 이렇게 봐도 되고 이렇게 봐도 되는데
이렇게 보더라도 복음이 나와야 되고, 요렇게 보더라도 복음이 나와야 되는데

지금 너희가 입이죠. 입. 이 입으로 고백한다 하죠. 고백.
입으로 뭘 고백하느냐? ‘예수님이 주라는 것을 고백한다’라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 이방인이잖아요. 예수님이 주님이라고 고백하기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종교를 갈아타면 돼요. 부처를 믿다가 누구로 갈아타면 되죠?
예수님이 주님이라고 갈아타면 돼요.

그러면 로마서에서 말씀하는 이 내용이 그렇게 쉽게 하시는 말씀이냐? 라고 하면
쉽게 하는 말씀 맞아요. 왜냐하면 여기에 성령이 개입되었기 때문에 그래요.
“성령이 개입되면 누구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라고 말씀합니다.

잘 들으세요. 성령이 개입되면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어요.
그러면 ‘성령께서 다 가르쳐줬기 때문에 성령 받은 사람은 주로 시인하면 다 알겠네.’라고
우리는 생각을 하잖아요. 맞죠? 성령이 가르쳐준다 했으니까. 다 알아요? 몰라요?
지금도 여러분 다 알아요? 몰라요? 모르죠.
‘그러면 요한일서에 나오는 말씀과 안 맞지 않습니까?’ 안 맞는 게 아니고요.

성령께서 오시면 우리의 성령은 어떤 이해를 갖고 있는가? 하면
‘성령이 우리를 다 깨닫게 했다’라는 이해를 갖고 있죠. 그게 선악과를 먹은 인간이기 때문에 그래요.

성령이 임하면 분명히 다 알려주셨어요. 다 알려주신 방식이 뭐냐? 하면요.
간단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잖아요. 3년 동안.
데리고 다녔을 때 제자들이 알았어요? 몰랐어요? 예수님을 몰라봤죠.

그럼 성령이 임하니까 어떻게 돼요?
거꾸로, 3년 동안에 예수님의 가르친 말씀을 다 하나씩 하나씩 알아가게 되죠.
그것만 알아갑니까? 아니에요.
이후에도 계속해서 성령께서 다 알게 하신 내용들을 상황과 형편에 따라서 알아가게 합니다.
제가 지난주 금요일날 헌금에 대해서 설교를 했잖아요.
고린도전서 9장을 이야기했잖아요. 다 들었습니까?

로마서만 듣지 마시고 마태복음도 좀 들으시고 신명기도 좀 들으세요.
어떤 분이, 우리 동영상 편집하는 목사님이 ‘목사님 성도님들은 설교 한 5번씩 듣죠?’ 이러더라고요.
왜냐하면 본인이 그 편집하기 위해서 7시간 8시간을 원고를 다 읽고 줄을 다 치고
그걸 다 이렇게 연결해서 준비를 하거든요.
그 정도 하니까 ‘이제 조금 무슨 말씀인지 알겠다’ 이렇게 얘기를 하더라고요.

지금 “성령께서 아신다”고 할 때 사람들의 오해는 뭐냐? 하면
‘나 성령 받았으니까 알아.’
우리들도 마찬가지죠. 아는 얘기를 해보라 하면 다 딴 소리 하죠. 지금도 똑같아요.
우리 교회에 와서 동일한 말씀을 듣지만 복음을 나눌 때 한번 얘기해 보세요.
각자 다 달라요. 그래서 모이게 하는 거예요.
십자가 앞에서 하나가 되는 거지
설교 들었다고 해서, 동의한다고 해서 같은 내용이 안 나와요.

왜냐하면 각자가 갖고 있는 그 악마성이 왕이거든요. 왕.
형편이 다 달라요. 그러면 죄인 되는 기쁨이 있어야 되는데
사람들은 ‘내가 이거 옳은 걸 알았다’라는 기쁨을 갖고
‘너도 요거 알았느냐? 그러니까 우리는 한 편’이라는 걸 좋아해요.

제가 지난주 금요일날 고린도전서 9장 헌금 이야기하면서 예수님의 명령은 뭐냐? 하면요.
복음을 전하는 자는 복음으로 살아야 돼요. 이게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바꿀 수 있어요? 없어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분의 명령이잖아요.
사람들은 이걸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면
‘예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지켜야 된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에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했잖아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함께 천막을 만들어가면서.
그런데 ‘바울을 보니까 연보하는 사람이 없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아야 되는데
아내도 데리고 다닐 특권이 있다라고 해요. 거기에 보면. 복음을 전하는 자의 특권이에요.
이제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제 정 목사 이제 기존 교회로 돌아가네.’

그게 아니고 잘 들어보세요.
특권이 있는 이유가 예수님이 그렇게 명령을 하셨어요. 제자들을 파송할 때.
그러면 ‘말씀대로 믿자’라고 하는 자들은 그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라고 하면요.
예수님 이전에 구약의 해석은 잘못되었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말씀대로 믿어야 된다라는 거예요.
이 원칙을 고수한 자들이 바울을 향해서 비난하는 자들입니다.
‘니가 진짜 사도라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아야 되는데 결혼도 안 하고 사례도 못 받고 그게 무슨 사도냐?’라는 거예요.
이 기준이 누구 기준이라고요? 예수님의 말씀이 기준이에요.

우리 같으면 여기에 반박할 게 있어요? 없어요? 반박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예수님 말씀이 기준이니까....
요즘 목사들도 그래요. ‘사례 제대로 못 받지? 당신 주의 종이 아니다.’ 이래요.
요즘 흔한 얘기가 뭔가? 하면
‘개척한 지 3년 만에 자립 못 하면 그거 목사 때려 치워라.’ 해요
교회가 무슨 사업장입니까?

이 얘기를 왜 하느냐? 하면
예수님의 말씀 자체를 이 사도바울에게 그대로 적용시키는 겁니다.
근데 사도바울이 뭐라고 이야기하는가? 하면
내가 그럴 권리가 없는 게 아닌데 있다라는 거예요.
있는데 나는 그 권리를 행사하지 않겠다라고 합니다.

그러면 ‘말씀대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뭐라고 이야기하겠습니까?
‘너 왜 예수님 말씀대로 하지 않느냐?’ 이렇게 공격을 할 거예요. 지금 따라오시고 계시죠?
‘말씀대로’라는 의미가 얼마나 이게 악마적인가? 를 드러내는 장면이 고린도전서 9장이에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하필, 헌금을 잘 안 했어요. 데살로니가 갔을 때나
안 그러면 그 빌립보 교인들도 헌금을 해도 제대로 많이 못하니까
어쩔 수 없이 그런 돈을 벌어가면서 하니까 이제 시비가 붙은 거예요.
이 사건은 성경 해석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사건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예수님이 십자가로 다 이루었으니까
그냥 ‘그래 예수님 말씀은 진리야. 예수님 말씀을 믿자.’ 이런 논리를 펼 때
예수님의 말씀에 정반대의 모습이 나오는 사도바울을 통하여서
너의 그 주장이 과연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의 취지를 알고 있느냐? 라는 거예요.
취지를 모른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은 그걸 어떻게 해석해 버립니까?
그걸 안 쓰는 게 복음을 전하는 거라고 해버려요.
이게 얼마나 엄청난 해석인지......

목사들이 이 본문을 어떻게 해석합니까?
사례를 받아야 된다는 정당성으로 해석을 하잖아요. 정당성으로 해석을 하는데
그 정당성이 맞다라고 하면서
그 정당성이 십자가를 전하지 않으면 그 정당성은 엉터리라는 이야기를 함과 동시에

그다음 또 똑똑한 목사들은 뭐라고 합니까? ‘자비량 목사가 최고야’ 이야기해요.
지금 사도바울은요. 자비량으로 내몰렸어요.
내몰렸다는 것은, 원래 예수님 말씀대로 안 된다는 것은 모두를 책망하는 상황이에요.

말씀은 책망하는 것이지,
십자가만 밝히 보이게 하는 말씀이지, 정답을 찾으라는 말씀이 아니에요.

그런데 이 본문을 갖고 사람들은 또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면
‘진짜 목사다우면 자기가 돈 벌어서 살아라’는 거예요.
이걸 누가 좋아한다고요? 교인들이 좋아하죠. 왜? 돈을 사랑하잖아요.
십일조를 하고 복을 받는다고 할 때는 십일조를 다 해요. 감사 헌금을 다 합니다.
근데 ‘십일조를 해도 복 못 받는다’ 하면 안 해요.

여기에 이제 옳은 말을 하는 목사들이 등장을 해가지고
‘목사도 자기 돈 벌면서 하는 게 최고야.’
어디 본문? 한 본문(고전9:4~11절)을 끄집어내서. 본문의 의미가 그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누가 좋아하죠? 교인들이 좋아하죠.
왜? 공짜로 교회 가서 설교 한 편 듣고, 천국 가고, 헌금 안 해도 되잖아요.

성령을 받게 되면
자 보세요. 분명히 고린도 교인들도 복음을 들었죠? 그럼 성령을 받았잖아요.
그러면 다 알아야 되잖아요. 다 아는 게 맞는데
요한일서에 의하면 다 아는 게 맞는데 성령께서 알게 해 주셨는데
알게 했다라는 것이 사건과 상황 속에서 알게 하는 거예요.
그렇게 돼버리면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가? 하면요.
쪼개져버립니다.

만일에 사도바울이 이렇게 이야기를 했을 때
고린도 교인들 중에 ‘바울 너 사도 아니야’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어떻게 될까요?
죄인으로 드러나면 하나가 되겠죠.

그런데 ‘너 봐! 예수님 말씀대로 니가 안 하니까 자기 변명... 웃기고 있네. 변명하고 앉았네.’
이렇게 나오게 되면 갈라져 버립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이 우리의 예상과 달라요.
제가 그저께 목사님들한테 강의를 하는데 어떤 분이 이런 질문을 했어요.
‘성령을 받으면 사람이 변화를 받고 변화를 받으면 (사람이 어떻게 되죠?) 괜찮은 인간이 된다’
이렇게 생각을 해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목사님, 그거 성경에 나오는 성령론 아닌데요.’
성령론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을 하는 거예요.

우리도 다르지 않아요. 말씀을 봐야 되는 이유가 우리는 이 말씀이라는 게 살아있잖아요.
살아있는 이유가 어떻게 살아 있느냐? 하면 실제로 살아있고요.
이 살아있는 말씀이 우리가 처한 환경과 감정과 형편에 따라서 작동을 해요.
근데 인간들은 선악과를 먹으면 어떻게 하는가? 하면
성경 알아버리면 ‘난 알아요’ 하고 서태지가 돼요. 전부. 요즘 세대는 서태지가 누군지 모르죠.
‘난 알아요’ 되면 성경 덮어버려요. 말씀 안 들어요.

설교 들을 때도 복음 처음 들을 때는 얼마나 집중합니까?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죠.
설교 처음 들을 때 얼마나 집중합니까? 그런데 나중에 얼마 지나면 ‘이미 다 알아요.’
그러면 이제 설교 시작할 때는 집중했다가 삼천포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데...
그거야 어쩔 수 없지만,

성령께서 일하시는 방식이 우리와 달라요.
철저하게 우리의 예상과 빗나갑니다. 그 내용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요.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에도 나오지만
구약 이스라엘을 보면 출애굽을 예상하고 약속의 땅을 예상한 그들에게
불과 기둥이 구름 기둥이 어디로 인도합니까? 원치 않는 곳으로 인도를 해요.

왜 그러냐? 하면
‘어린 양의 피를 증거하기 위한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는다” 라고 했을 때
우리는 성령을 받으면 그 말씀의 세계 속으로 합류를 하는데
합류하니까 ‘이제 난 이제 예수 믿으니까 구원받았다’ 이게 안 통해요.

왜냐하면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다” 할 때
‘주의 이름을 위한 구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에서 갈라져요.

그러면 제가 그림을 그렸는데 여기에 층들이 있잖아요.
이 층들이 있는데 지금 로마서는 이 자리에 위치가 있어요. 이 자리에 위치가 있다고요.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이것을 겹칠 수 있는데
이렇게 시간 순으로 보면 이렇게 차이가 난다 치면 요 이전이 뭐냐 하면 구약이에요. 구약.
오늘 이 얘기를 해야 되거든요. 구약인데

구약에 ‘주’ 개념이 나와요. 구약에 주 개념이 나와요.
이 주 개념을 모르면 이 주가 어떤 주가 되느냐? 하면 우상이 됩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우리 이방인이죠.
이방인이 주님을 이야기할 때 어떤 주를 이야기해요? 왕을 주라 하잖아요. 주군.
그러면 주군이 어떻게 합니까? 시키는 대로 하잖아요. 그죠?

그러면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다’ 하면
어떤 생각을 갖습니까? 우리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다면.
주님이 시키는 대로 해야죠.
근데 이 사고 방식은 이방인이든지 유대인이든지 똑같은 사고 방식이에요.

그런데 지금 앞서서 “네 입에 네 마음에 믿음의 말씀이 있다”라고 할 때
이 믿음의 말씀의 내용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그 말씀이 육신이 되심과 죽으심과 3일 만에 부활하심과
주되심의 내용을 담고 있는 내용들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이방인이 기본적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습니다.’ 이러면
‘아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으니까 나 이제 천국에 넣어주겠네요.’
이런 생각들 전부 다가 어디로 합류당하느냐? 하면 유대교로 합류 당해요.
지금 로마서가 그 얘기를 하고 있어요.

로마서 1장부터 출발을 할 때 이방인과 유대인들을 막 섞어놨어요.
섞어놨는데 신학자들은 이걸 찢으려고 해요. 지금 9장 10장도 마찬가지거든요.
마치 혈통에 대한 구원을 이야기하면서 이스라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이스라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에요.
그럴 것 같으면 우리가 이 본문을 볼 필요가 뭐 있습니까? 맞죠?
우리는 이방인이니까 천지 볼 필요가 없어요. 이 본문을.

아 관람하기 위해서, 구경하기 위해서 한번 보자?
만일에 그렇게 본다면 이게 무슨 살아있는 말씀이 됩니까?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라고 할 때는
어떠한 본문도 어떠한 구절도 빼낼 수가 없는데.

사도 바울이 이렇게 이야기하죠.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이 ‘우리’라는 표현을 하거든요.
이 로마서에 이러한 표현들이 여럿 나오는데 간단하게 몇 가지로 말씀드리면 이렇게 돼 있어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많이 들어봤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이렇게 표현할 때 지금 여기에서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라 시인하면”이렇게 나오잖아요. 표현이.
이렇게 나올 때 사람들은 ‘아 그래 믿을게.’ 이래 나올지 모르지만
“예수님이 주이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사도행전 2장 36절에서 말씀하고 있어요.

사도행전 2장 36절을 한번 봅시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이렇게 돼 있죠.
“이스라엘 온 집” 이렇게 돼 있어요. 이스라엘 온 집.
“정녕 알지니 너희가(이스라엘 온 집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누가?)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라고 해요.

여기에서 해석할 게 너무 많죠. 뭐부터 해석해야 됩니까?
이 ‘하나님’ 이 하나님 개념 자체가 ‘유대인의 하나님’과 ‘예수님의 아버지 하나님’이 다르죠.
사복음서에 이미 대충돌이 일어났잖아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이유가
유대인들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님의 아버지가 달라서 그래요.

그러면 여기에서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라고 할 때는
이미 이 ‘하나님’ 개념은 유대인들이 믿는 하나님이 아닌 거예요.
누구의 하나님이죠? 자 보세요. 이 말씀이 얼마나 어려우냐? 하면
출발이 이렇게 돼 있죠.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하면 주도권은 하나님이 갖고 있죠.

그런데 요한복음이나 사복음서에 들어가면
“나를 본 자가 하나님을 봤다”라고 하고
나를 믿는 것이 아버지를 믿는 것이 돼요.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게 됩니다.

사도행전은 순서를 이렇게 이야기를 했지만, 이 순서 자체가 사복음서에서는 뒤집어졌어요.
그러면 이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할 때
유대인들이 ‘그래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네요.’ 이런 식으로 믿어버리면
어떤 사태가 발생하는가? 하면 그 하나님은 우상이에요.

‘아니 목사님 왜 그렇게 복잡합니까?’ 복잡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주 개념이 흘러나오는 과정이 구약 전체를 깔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아니 목사님 우리한테는 그런 거 필요 없지 않습니까?’
왜 필요 없어요? 그게 로마서 5장이잖아요.
“한 사람이 범죄하였으므로 모든 사람이 범죄했다” 해요. 여기 반대하는 사람 있습니까?

그러면 그 “한 사람이 범죄하였으므로 모든 사람이 범죄하였다”는 것을 다르게 적용해 봅시다.
‘이스라엘이 범죄하였으니까 모든 이방 민족이 범죄하였다.’
논리가 맞아요? 안 맞아요? 맞잖아요.

이미 우리는 우리 아비가 마귀이기 때문에 ‘마귀가 알려준 주 개념’
예수님이 메시야다 했을 때 ‘그리스도 개념’ 이게 다 있어요. 불교에도 다 있잖아요. 미륵불도 있고
다~ 있어요. 웬만한 종교에는 다 있단 말이에요.
그리고 그 조로아스트교나 마니교나 이 어둠의 권세, 악마와 싸우는 이런 이야기도 다 있어요.
왜 있는지 알려드릴게요.

왜 있느냐? 하면 마귀는요. 구약에 보면 마귀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이잖아요. 맞죠?
그러면 하나님을 알아요? 몰라요?
알죠. 어둠이 뭔지도 다 알아요. 마귀가 모르는 게 딱 하나 있어요.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님이 주라는 사실을 몰라요. 그러면 이거 빼고는 마귀는 다 알아요.
따라오셨습니까? 이거 빼고는 다 알아요.
그거 빼고 다 아는 내용이 ‘구약 이스라엘’이에요.

여기에는 뭘 모르느냐? 하면
구약에 계시된 여호와 하나님은 죽는 하나님이 아니에요.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 그리스도라는 내용이 성경에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구약에 그리스도를 예언하지 않았습니까?’
예언했죠. 예언을 했는데
시편 2편에 나오는 그 그리스도나, 안 그러면 시편 110편에 나오는 그 내용은
다윗 언약에 근거하면 모두가 다 혈통적으로 난 자들이에요. 다윗의 후손이에요.

물론 예수님께서 자기 후손으로 오실 분을 어떻게 주라 하느냐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해석을 완전히 뒤집어주는데 육에 속한 자들은 그 해석이 안 돼요.
그렇게 알려줘도 이해를 못합니다.

다시 로마서로 가서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라 시인하면”이렇게 나오거든요.
이 부분을 앞부분 9장을 통해서 조금 더 확대해 보겠습니다.
9장이 이해가 돼야 이 10장에서 하시는 네 입으로 주로 시인한다는 게 무엇인지 명확해지거든요.

롬9:24절에 보면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그 앞부분 롬9:18절에 보면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이렇게 나오거든요. 이건 구약 이야기인데
자 하고자 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는 자를 강퍅하게 여기시는데
이 일을 누가 하십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은 예수님이 심판주가 되셔서
하고자 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는 자를 강퍅케 하십니다.
예수님이 천국과 지옥 보낼 권세를 갖게 돼요.

그래서 방금 이 로마서 9장 18절에 나오는 이 내용이 구약을 인용했지만
실제로 구약을 완성한 분이 율법의 마침이 되시는 분이 예수님이기 때문에
율법에는 ‘심판주가 누군가?’를 증거하기 위한 율법이에요.
그 완성자 되신 예수님이 심판주가 되거든요.
그래서 그 주님께서 이 그릇을 선택한 거예요.

그래서 롬9:25절에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이게 예언이죠.
예언이 실제화됐다라는 거예요.

실제화되었으니까 롬9:27절에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그다음 나오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로마서 9장 28절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지금 이 본문이 이사야 10장을 인용한 본문인데요. 10장 20절을 한번 볼까요?

이사야 10:20절 “그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뢰치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여호와를 진실히 의뢰하리니”
여호와를 진실이 의뢰한다 하죠. 예수님을 의뢰한다가 아니에요.
‘그게 그거지 않습니까?’ 그게 아니에요.

그다음 봅시다. 이사야 10:21절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하나님께로 돌아온다 하죠.
예수님께로 돌아와야 됩니까?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됩니까?
이사야 예언은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돼요.

그다음 봅시다. 이사야 10:22절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훼멸이 작정되었음이라 이미 작정되었은즉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
이 말씀이 땅 위에서 이룰 것이라(롬9:28절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는 이 말씀을 이렇게 바꾼 거예요.
그러면 누가? ‘주 만군의 여호와’죠? 주 만군의 여호와,
주라는 용어는 같이 쓰는데 ‘만군의 여호와’가 되면 여호와의 다른 호칭이 주거든요.
그러면 주가 누구냐? 하면 ‘여호와’가 주예요.

그런데 로마서 9장 28절에서는
‘주 만군의 여호와’를 갖고 오는 게 아니라 ‘주’만 갖고 와요.
‘그거 뭐 인용할 때 실수했잖아요?’ 실수한 게 아니라

여기에서 말하는 내용은 뭐냐? 하면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라고 바꿈으로 말미암아
이 말씀을 누가 이루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다 이루신 거예요.

그래서 조금 전에 사도행전 2장 36절을 봤잖아요.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라는 거예요.
그러면 ‘주’ 그 주가 어떻게 땅 위에서 다 이루었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다 이룬 거예요.
다 이루니까 남은 자가 돌아오고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는 일이 일어났다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로마서 9:29절에는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바 만일 (여기에는 또)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라 함과 같으니”
여기에는 ‘만군의 주’를 인용해요. 만군의 주.
왜 ‘만군의 주’를 이야기할까요?

이 두 차이!
원래 주는, 구약의 주는 ‘여호와’예요.
여호와만이 강퍅케 할 자를 강퍅케 하고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길 수 있는
이 심판권의 권세를 가지신 분입니다.

그런데 누가 주가 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분이 주가 되십니다.

‘그분이 주가 되었다’라는 말은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느냐? 하면
유대인들이 보기에 ‘여호와 하나님’을 주로 믿고 있고
그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약속하신 것을 이룬다라는 것을 믿는 자들은 우상 숭배자들이라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무서운 말이냐? 하면
‘구약 말씀대로 믿자’라고 하는 그 주장이 우상숭배자들이에요.
그들이 누구를 죽였느냐? 하면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죽여버립니다.
놀라운 것은 그렇게 죽임을 당한 분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가 되게 하신 거예요.

그리스도의 자리, 주의 자리는 죽고 부활하신 자리죠.
이것도 이제 구분을 좀 해봅시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는
이건 어디에서 일어났어요? 땅에서 일어났죠. 그죠?

그러면 “주와 그리스도가 된” 자리는 어디에서 일어납니까?
부활해서 하늘 우편에 올라가야 주가 되잖아요. 이거 하늘 사건이에요.

하늘에서 부활하신 주와 그리스도가 된 것이
땅에서는 주와 그리스도의 모습이 어떻게 드러난다는 거예요?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모습으로 드러난다는 겁니다.

지금 이 말씀이 우리는 단순히 예수님을 주라 시인하면
‘아 시인하는 것이 뭐가 어렵습니까?’ 이래 나오잖아요.
주로 시인한다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 하나님이 주가 되게 하셨다라는 거거든요. 그죠?
그러면 주가 되게 하신 것을 시인한다는 말은 자기 인생을 어디로 꼴아박겠다는 겁니까?
이 땅에서 예수님이 당하신 그 고난 세계속으로 들어간다는 이야기예요.

물론 처음 믿을 때는 예수님을 주라, 믿습니다라고 할 수 있죠.
할 수 있는데 성령께서 이미 다 알려줬기 때문에
그 주라 시인한다라는 그 의미가, 입으로 고백한다는 의미가 어떠한가를
말씀을 통하여서 이제 하나씩 하나씩 확인해 가는 거예요.

그저께 저희 집 동네 앞에 뚝섬 유원지에 금속 탐지기를 갖고 이렇게 ‘잃어버린 반지를 찾습니다’
깜짝 놀랐어요. 잃어버린 반지를 찾기 위해서 금속 탐지기 있잖아요. 쭉 쭉 보고 이렇게...
그거와 같은 거예요.

‘주 예수를, 예수님을 주라 시인하면, 고백하면 구원을 얻는다’라고 했을 때
이렇게 ‘아멘’할 것 아닙니까? 이것도 금속 탐지기지만
그다음,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서 이제 말씀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창세기부터 들어가면
모든 말씀이 십자가 지신 주님을 증거하기 때문에 인간을 위한 구원 자체가 다 날아가거든요.
날아가기 시작하면 금속 탐지기가 처음에는 삐리리~ 반응을 했다가
그다음 어떻게? ‘이거 금이 아니네. 버려. 못이네.’ 그런 식으로 주님이 일을 해요.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가? 하면
‘예수를 주라 시인하면 그냥 구원 얻지 않습니까?’ 그런 생각이 강하잖아요.
지금 로마서 10장에서 분명히 이렇게 말하거든요.
여러분 구원파들이 다 이렇게 이야기하고요. 전도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다 그렇게 이야기해요.

근데 그들에게 마태복음 7장 2절을 한번 얘기해볼까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이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졌죠.

그러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을 증거하는 자가 주님의 증인이죠.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을 증거하려면 자기는 어떤 자로 드러나야 돼요?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냈다’고 할 수 있어요? 없어요? 없죠.

근데 할 수 없으려면 반드시 뭘 해야 돼요? 말 좀 잘 들어야 돼요.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도 천국 못 간다’라고 하니까
사람들은 ‘나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안 할래’ 이런 논리를 펴요.

안 한 사람은 ‘나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한 적이 없습니다’라는 말을 못해요.
원래 안 했는데 무슨 자기를 부인해요?
주님은 일을 시키고, 일을 시킨 이후에 십자가 사건 속에 그 사람을 집어넣어서
자기를 부인하는 능력 속에 거하게 해서 십자가를 자랑합니다.
십자가를 자랑하려면 한 것이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아까 제가 그 얘기하다가 말았는데
‘자비량 목사가 가장 훌륭하다’라고 했을 때 문제가 뭐냐? 하면
이 인간들은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옳은 걸 추구해요.
제가 유튜브에 인기 끌려면 한쪽을 쳐야 돼요. 한쪽을 치고 ‘이것이 옳다’라고 이야기를 해야 돼요.
‘기존 교회 목사가 사례받고 하는 것은 이건 악마적이야. 정말 진짜 목사라면 사도바울을 닮아가지고 자비량해서 복음을 전해야 돼. 그게 진짜 전도자야’
이렇게 하면 모이는 무리가 꽤 생겨요.
왜? 편이 생겼잖아요. 옳은 이야기를 하잖아요.

근데 복음은 옳은 이야기를 합니까? 복음을 전합니까?
복음을 전하죠.
그래서 아까 그 9장 이야기가 엄청나게 중요한 거예요.
성경 해석에 있어서 거의 시금석이 되는 본문입니다. 헌금 문제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인간들은 계속해서 성경을 연구하면서 옳음을 추구하죠.
신앙 고백에 대한 제대로 된 신앙 고백, 그 옳음이잖아요. 그죠?
그러면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신앙 고백한 니가 십자가 졌냐?’ 이러죠.

‘아 그러면 목사님 고백 필요 없네요?’ 맨날 아는 게 그것밖에 없어요.
‘필요 없네요. 교회 모일 필요 없네요. 헌금할 필요 없네요...’
그럼 뭐 하는데요? 그러면? 신앙 고백 안 하면 뭐 해요?
찐찐찐이야 이 노래 부르고 앉았죠. 이 노래 어떻게 아는가? 하면
우리 동네 앞에 분수대에 가면 맨날 그 노래 나오거든요. 제 운동하는 시간에 가면...
그 노래 부르고 앉았어요.

옳음을, 옳음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사람들은 옳은 교회를 찾아내려고 하는 거예요. 그게 무슨 복음입니까?
십자가 앞에서는 죄 아닌 게 없는데.

‘그러면 목사님 그 돈을 사랑하는 목사들에 대해서 아니라고 해야 되지 않습니까?’
당연히 아니죠. 거기도 아니고 자비량하는 목사도 아니에요.

오늘 아침에 어떤 목사님, 유명한 100주년 교회 담임했던 그 목사님 설교를 듣는데
교회는 투명해야 된다는 거예요. 재정도 투명해야 되고 모든 게 투명해야 된다 해요.
그게 무슨 복음입니까?

투명한 데가 어디예요?
주식 상장한 데가 제일 투명해요. 여러분. 몰랐어요? 거기에는 이 금전 거래가 깨끗해야 돼요.
교회는 십자가를 전하는 곳입니다. 죄인들이 모인 곳이에요.

가장 큰 문제는 교회가 ‘십자가 앞에서 죄 아닌 게 없다’라는 선포를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교회에 오는 사람들은 머물러 있어야 되잖아요.
그러면 온 사람들에게 방금 언급한 그런 본문을 갖고 얘기해버리면 다 죄인이잖아요.
헌금한 사람도 죄인이고 안 한 사람도 죄인이고 자비량 한 사람도 죄인이고
십자가 앞에서는 자랑할 것이 없잖아요.
그러면 자기 뽐내기 위해서, 자기 신앙 뽐내기 위해서 교회에 오는데 누가 교회 와요?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아이 더러워라. 그럼 니 혼자 잘 먹고 잘 살아라’
‘너 사례 안 받고 먹고 사는지 한번 보자’ 이제 본심이 나오죠.
왜 본심이 나옵니까? 지금까지 주님이 먹여 살렸는데.

오늘 잠언서 우리가 읽어봤잖아요.
부지런히 양털을 깎아요. 그러면 옷에 도움이 돼요.
근데 그 양털이 영원합니까? 안 합니까? 안 해요. 여러분.
제가 어떤 드라마를 봤는데 감명적인 게 이거예요. 어떤 사람이 미래를 갔다 왔어요.
미래를 갔다 왔는데 자기 애인이 몇 날 몇 일에 죽더라는 겁니다.
오늘이 7월 7일이니까 딱 7월 9일이네요. 7월 9일에 죽더라는 겁니다.

근데 그 여자가 죽는 날을 모르니까요. 신나게 살아요.
근데 죽는 날을 아는 순간 죽을 맛이에요. 이런 코미디가 어딨습니까?
오늘 밤에 우리 영혼 데리고 갈지 모르는데. 제일 어리석은 게 그거거든요.
‘당신 이제 두 달밖에 못 삽니다.’
여러분 두 달밖에 못 사는 그 사람들보다 먼저 간 사람이 저기 어디야 종로입니까?
창창한 사람들 40대 30대 먼저 갔어요. 권사님이 먼저 갈 줄 알았죠?
장로님이 먼저 가실 줄 알았잖아요. 인간들이 생각하는 거는 그 정도밖에 안 돼요.
말씀을 우습게 여기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이 우리를 먹이고 살린다 이러면 믿죠.
믿기는 뭘 믿어요? 내 손과 내 땀을 믿죠.
이스라엘이 그러한 이유가 있어요.
인간이라는 그 한계성 속에서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은 십자가를 증거하는 것이지
우리의 의로움과 잘남과 어떤 행위의 괜찮은 것들을 말씀하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으면 다 이룬 것만 나와야 됩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로마서 9장에서 주의 자리가 바꾸어집니다.

주의 자리가 바꾸어지면 어떤 사태가 일어나는가? 하면 한번 보세요.

구약에 나오는 ‘만군의 여호와’는 만군의 여호와는 전쟁하는 여호와거든요.
오늘 오후 시간에 조금 할 생각인데
지금 구약에 나오는 주는 어떤 주입니까? 어떤 주입니까? 사실은 조금씩 비춰졌거든요.
이스라엘에 의해서 철저하게 조롱당하고 멸시당한 여호와였거든요. 사실은.

근데 그것이 이 표면적으로는 나오지 않잖아요.
표면적으로는 그러한 자들을 어떻게 했습니까? 심판을 했죠.
로마서 9장에 나왔기 때문에 바로에 대해서 심판을 하고 강퍅케 하고
이스라엘을 어린 양의 피로 구원하는 분이 주예요.
이런 여기에 나오는 주는 ‘죽는 주’가 아니에요. 세상에서 군림하는 주입니다. 맞죠?

그런데 잘 보세요. 이게 구약입니다.
그러한 주 개념이 다른 이방 나라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죠.
바로 왕이 있고 느부갓네살 왕이 있고 아하수에로 왕이 다 이 개념이에요. 이 주 개념입니다.
무시무시한 의미예요. 지금 이거.

하나님께서 자기를 계시를 하실 때 하나님의 자기만의 독특성을 갖고 계시를 하는 게 아니에요.
인간이 죄를 범하였을 때 인간의 죄성이 담고 있는 그 주 개념, 왕 개념을 그대로 계시를 해줍니다.
다윗 왕도 똑같잖아요. 주변 나라와 차이점이 뭐예요?
솔로몬 왕도 차이점이 없어요.

그러니 남은 자 유대인들이 천국을 기다릴 때 그 다윗 왕국,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면, 그분이 왕이 되시면 어떤 나라가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을 합니까?
간단하죠. 로마 제국이잖아요.

이제 계속 반복합니다마는 로마 카톨릭이 만든 게 그거예요.
예수님이 주라 하면, 주님은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죠.
그럼 주의 자리에 누가 올라가야 되죠? 황제가 올라가든지 교황이 올라가야 돼요.
이 말은 어차피 예수님은 없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 주라고 했잖아요.

그러면 ‘주’라는 이 의미가 이 내용을 담고 있죠.
이 흥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주라는 의미가 이 내용을 담고 있어야 주예요. 이 내용이 없는 주는 주가 아닙니다.

그런데 로마 카톨릭 같은 경우에는 이 주 개념을 어떻게 이해를 하느냐? 라고 하면
지금 로마서에서 “너희가 입으로 주라 시인하면”이라고 하면
이런 것도 구원을 얻는다. 그래서 이걸 교리로 만들어요.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습니다’ 이렇게 가르치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들이 주 개념, 구원 개념을 다 누구 입장에서 해석을 할까요?
내 입장에서 해석을 하죠. 내 입장에서.
여러분도 그런 생각을 안 합니까?
‘나 예수 믿고 구원 얻었다’ 했을 때 어떤 구원을 상상합니까?
말씀에 나오는 구원입니까?
아니면 내 나름의 상상한 구원을 성경 구절과 끼워맞춘 구원입니까?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 했죠? 제가 글 하나 썼잖아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면
그리스도가 어느 자리에 있어요?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으니까.
그리스도가 살면 성도는 어느 자리에 있어요?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 자리에 있어요.

그러면 이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고 핍박을 당하는 그 세계 속에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리스도가 아니죠. 아니니까 우리도 예수님을 핍박하는 자리에 있는 거예요.
우리를 그리스도라 안 하잖아요. 그리스도가 산다고 하지. 양자라고 하고.
그래서 로마서 8장이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아들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아들이 맞는데 양자인 거예요.
양자는 맏아들을 증거하는 아들이에요.
강조하지만 나는 진짜 아들이 아닙니다. 그래야만 십자가를 증거하는 양자가 돼요.

마찬가지예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았지 않느냐?’ 맞죠?
제가 목사님들한테 그랬어요. 그저께 강의하면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자’라고 교회에서 가르치죠. 여러분 다 배웠잖아요.
그러면 그리스도의 형상이 어떤 형상입니까?
이제 이때부터 온갖 망상을 다 펼치죠.

‘그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야기해보라’ 하면 다 어디에 도달할까요? 부처에 도달해요.
성경에 나오잖아요.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는 어떻게 돼요?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거예요.

그러면 ‘그리스도를 닮았다’라는 것은
우리들도 그리스도의 영이 임했기 때문에 무얼 자랑하겠어요?
십자가의 피를 자랑하기 때문에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갈까요?
미움받고 왕따당하는 인생을 산다는 거예요.

‘예수를 주라 시인하면 구원을 얻는다. 입으로’ 말은 맞죠?
주로 시인할 때 이것은 일차적으로 무엇이 날아가야 되는가? 하면
이 말씀 안에 자기를 부인하는 내용이 담겨 있어야 돼요.
그 내용을 지금 로마서 1장부터 10장 앞부분까지 쫙~ 펼쳐놓은 겁니다.

후반부는 이 구원에 미쳐 있는,
심지어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십자가의 피로 용서받은, 과거에 죄,
부르신 자를 아시고 아시는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셨다는 걸
다 믿는 자들에게 폭탄을 던지잖아요.
“이스라엘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이런 말씀이 왜 있느냐? 하면요.
아까도 고린도전서 9장을 이야기했지만 십자가 사건을 증거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예수를 주라 입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주님으로 우리 안에 들어와버렸죠. 이게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했잖아요.
그걸 다르게 표현하면 주님이 사시는 거잖아요.
주님이 살게 되면 우리는 어떤 인생이 되느냐? 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살아간 인생으로 계속해서 반복되는 인생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가 십자가를 자랑하는 거예요.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는 현장이 되는 겁니다.
내가 핍박하고 주님이 핍박당하는 내용도 있지만
동시에 핍박당하는 주님을 전했기 때문에 내가 또 핍박을 당하는 그 세계 속에 들어가는 거예요.

단순히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습니다’
제가 페이스북 하다가 요즘 글을 안 쓰잖아요. 바쁘니까.
근데 거기에서 사람들이 다 하는 얘기가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면, 입으로 고백하며 구원을 얻는대요’ 그 말은 누구도 부정 안 하죠.

문제는 그다음 이야기를 해줘야 되죠.
‘니가 믿는 주가 어떤 주인데?’
그 주를 추적해 들어가면 모두가 다 구약의 주예요.
왜냐하면 구약의 주는 우리한테 딱 맞아요.
아침마다 이렇게 걸어오면 여기 침례 교회가 하나 있는데
‘여호와는 만군의 주시오. 여호와는 나의 주시오’ 이렇게 나오거든요. 그걸 왜 좋아해요?

구약의 여호와의 주는 어떤 주입니까? 내 인생 문제를 해결해 주는 주예요.
사실 구약에도 해결 안 해주는데, 자기들이 조작을 하는 거예요.
‘만군의 주’를 내가 믿기 때문에 구약의 이스라엘을 권능과 능력으로 구원하였듯이
나도 이 어려운 형편과 상황에서 여호와께서 구원해 줄 거라 그걸 좋아하는 거예요.
그게 우상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그 내용을 지금까지 담고 있고
본인이 여호와를 주로 믿고 있었죠? 여호와를 주로 믿고 있었잖아요.
주로 믿고 있는 그는 뭘 추구했습니까?
자기 영광과 자기 의로움을 추구했죠. 그리고 자기 행위를 의지했죠.

그런데 자기가 핍박한 주님이 찾아와버렸어요.
‘예수님을 주님으로 입으로 시인한다’라는 것은 ‘주님이 찾아왔다’라는 거예요.
찾아왔다라는 것을 다르게 표현이 된 겁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을 주님이라 시인하면 구원을 얻습니다”라는 방식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거예요.

우리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 하면
복음을 전할 때 믿을 때 모두가 다 사도 바울처럼 찾아오기를 바래요. 맞죠? 안 그렇습니까?

근데 주님은 그렇게 일을 안 해요.
평범하게 일을 해요. “말씀이 니 눈앞에 있다”라고 해버려요.
그래서 말씀을 전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이렇게 전해요.
이렇게 전했는데 상대가 믿잖아요. 상대가 믿는 내용이 그 내용을 뜯어보면 어떤 내용이냐? 하면
사도행전 9장의 내용이라는 거예요. 달리 말하면 그 내용을 뜯어보면
사복음서에 나오는 열한 제자의 그 인생이 다 담겨 있는 구원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목사들이나 교인들이 성경을 읽을 때 이 본문을 볼 때
그러한 예수님을 주라 시인한다라고 봅니까? 안 봅니까?
안 보죠. 왜 안 봅니까? 자기가 신인데,

내가 신이기 때문에 그래요. 신이기 때문에 ‘믿으라 하면 내가 믿겠다’라는 겁니다.
‘내가 믿으면,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지 않느냐?’라는 이런 논리를 누가 갖고 있어요?
자기가 갖고 있어요.
그러니 자기 부인이 돼요? 안 돼요? 안 되죠.

‘예수님 믿으면 죄를 사하고 구원을 얻는다’ 했을 때 이 말씀이 맞잖아요.
예수님이 화목 제물이 되어서, 율법 외에 한 의가 되어서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라고 했잖아요. 그 말이 맞잖아요.
그러면 그 말씀 안에는 무엇이 담겨 있습니까?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담겨 있죠. 베드로가 예수님을 뭐라 했습니까?
“당신은 그리스도시요”라고 했잖아요.

요한복음에서는 “주여 영생의 말씀이 여기 계시매 뉘게로 가오리까”
예수님을 주라고 했어요. 주라 시인했다니까요. 주라 시인했는데
주라고 시인한 그가 누구를 살해합니까?
예수님을 모른다 하고 부인하고 팔아먹고 죽여버립니다.

‘베드로가 안 죽였잖아요?’
베드로가 안 죽인 게 아니고 아까 로마서 5장을 이야기했잖아요.
한 사람이 죽였으니까 모든 사람이 죽인 거예요.
그러니까 젊은 애들 ‘나는 십자가 사건 때 없었다’ 하지 마세요. 말씀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주라고 해도
그 고백 자체가 자기 부인이 없는 주 개념이에요.
로마서 10장에서 하는 얘기는 이 두꺼운 층을 담고 있는 주 개념이에요.

‘목사님 그거 어느 세월에 다 압니까?’
성령께서 알게 해 주셨어요.
‘그럼 성령께서 알게 해 주셨으니까 성경 배울 필요가 없네요?’ 이 말은 말이 안 돼요.
성령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이것을 알려주신 겁니다.
그래서 제가 아까 금속 탐지기라고 했잖아요. 진짜 금인지 아닌지 가짜 금인지
처음에 반응을 했어요. 반응을 했는데 ‘진짜 금인 것 같아.’
근데 땅을 파보니까 뭐더라? 이게 녹쓴 못이 있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아웃!
그게 말씀의 전파 과정입니다.

데마 같은 경우에는 뼈 빠지게 고생했잖아요. 복음을 전하면서.
사도바울과 고난을 함께 했잖아요. 근데 왜 세상을 사랑하여 갈까요?
이 금속 탐지기에 걸렸어요. 어떤 상황?
계속 내몰리니까 ‘이게 무슨?’
희망을 갖고 있었던 거예요. 마음속에.

목사들도 마찬가지죠. ‘복음을 전하면 뭔가 교인들이 모이지 않겠느냐?’
이 복음을 아는 목사들도 그런 얘기를 해요.
자기가 ‘지금까지 복음을 전했는데 언젠가는 주님이......’
안 모이게 해요.
주님은 일을 그렇게 안 합니다. 그건 자기의 야망을 숨기고 있는 거죠. 고진감래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 복음 전파는 없어요.

롬10:9절 다시 가서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지금 이 내용이 병행이에요.
마음으로 믿는 것과 입으로 고백하는 것이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주로 시인한다는 내용이 뭐냐? 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이 내용이
예수님을 주라 시인하는 거예요.
우리 신앙 고백할 때 옛날에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 이래 나오는데
죽은 자 가운데가 다 복수예요. ‘죽은 자들’이에요. 옛날 성경은 다 단수로 돼 있거든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살아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지금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니 마음이 믿으면”
이 내용을 하는 이유가 요 죽었다라는 내용과 살렸다라는 이 내용이 ‘주’잖아요.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라는 거예요.
여기에는 반드시 뭐가 들어갑니까?

“이스라엘 온 집아 정녕 알지니~” 사도행전 2장 36절에.
그러면 그 본문은 ‘이스라엘 온 집’만 이야기하는 겁니까? 아니면 모든 인간을 말하는 겁니까?
모든 인간을 말하는 거예요.
성령께서는 놀랍게도요. 이방인들을 구원시켜버리면 구원받은 그들은 이스라엘과 동일시가 돼요.
그래서 구약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보이는 겁니다.

그런데 목사들은 성령을 못 받고 보니까 ‘구약은 이스라엘한테 하는 얘기고...’
그런 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거예요.
그리고 여기에 로마서에 나오는 유대인들을 향한 이런 말씀들이
‘아 그건 유대인들한테 하는 이야기고...’
이게 앞뒤가 막 이게 섞여 있어요. 10장으로 넘어가면.
유대인 이방인이 섞여 있다고요.
사도 바울이 ‘너희들 중 유대인들, 너희들 중 이방인들 들어라~’ 가 아니에요.

최종적으로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예수님만이 유일한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모두가 이방인이 돼요. 모두가 이방인이에요.
이방인이 아닌 자는 구원을 못 받아요. 왜 그렇습니까?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한다 했잖아요.

이 말씀의 논리의 층이 굉장히 복잡하게 돼 있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들은 계속해서 십자가 사건 중심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중심으로 본문을 해석하기 때문에 그래요.
‘왜 이리 복잡하냐?’ 물으신다면 인간의 악마성이 그만큼 깊다라고 보셔야 돼요.
달리 말하면 ‘이렇게 자꾸 이야기하면 너무 부정적이지 않습니까?’
어제 어떤 분이 이런 이야기했어요.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이라서 난 좀 싫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만큼 깊다’라는 거예요. 용서하심이.
용서하심이 그만큼 깊으니까 사랑이 그만큼 크다라는 거예요. 사람들은 그걸 싫어해요.
사랑이 큰 걸 싫어하고 뭘 좋아하죠? 사랑은 없는 걸 좋아하죠. 없는 걸.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
이 마음도 골치 아픕니다. ‘마음이 어디 있습니까?’ 물으면요.
‘마음은 물질일 뿐인데 마음이 있긴 어디 있어요?’
또 어떤 사람을 해석할 때 ‘입술은 입술이고 마음은 마음이고...’ 그래서 아까도 했지만
‘사람이 입술로만 시인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 마음으로 믿어야 됩니다’라고 하는데
지 마음 어디 있어요? 니 마음?
내 마음? 나를 알아요? 몰라요? 어때요? 하루에도 5만 번도 바뀌는... 마음이 어디 있어요?

이 말씀조차도 뒤집어집니다. 죄인으로 드러나요.
물론 믿는다 하죠. 또 그저께 목사님들 모여서
‘믿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물으니까 들은 풍월은 있어가지고
‘믿음 없습니다’라고 얘기를 하는 거예요.
로마서 4장 할 때 우리는 ‘믿음 없다’ 했잖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훌륭하다라고 하는데
제가 또 나가서 얘기했죠. ‘그게 가장 악마적입니다’
왜? 정답을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은 반드시 믿음이 있어야 돼요.
믿음이 있어야 ‘믿음이 아니오’라는 이야기를 할 수 있어요.
십자가는 반드시 있는 것을 부정하면서 일어난 사건이에요.

우리는 뭔가를 안 하려고 하잖아요. 안 하면 부정할 게 없어요.
아까 제가 마태복음 7장 22절 언급할 때 
사람들이 누가 그런 말씀을 제일 좋아합니까?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이 제일 좋아해요.
어차피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해도 주님 모른다고 하니까.

그래서 그 자리에 사도바울을 딱 집어넣었잖아요.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했는데 사도바울은 뭐라 합니까?
‘십자가를 자랑하는 나는 죄인 중에 괴수’ 이 얘기 꼭 해야 돼요.
죄인 중에 괴수라는 말은 죄인으로서 한 일들이 있다라는 이야기예요.
그게 복음 전하는 거였고요. 복음 전하면서 핍박받는 거였어요.
아무것도 안 하고 죄인은 없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라고 할 때
부인할 거리를 반드시 주님이 우리 세계 속에 만듭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을 보면요. ‘하라’와 ‘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돼 있어요.
신약 성경도 마찬가지예요.

왜 하라, 하지 말라는 명령을 하느냐? 하면
인간들은 ‘하라, 하지 말라’ 안 하면 자기 마음대로 해요. 기준이 자기예요.
그런데 성경은 ‘하라, 하지 말라’는 기준을 탁 던져놓고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는 현장으로 만들어버려요.

히브리서에 보면 “날마다 모이기를 힘쓰라” 하거든요.
오늘날과 딱 맞잖아요. 오늘날 모이기를 힘 안 쓰죠.
왜? 집구석에 가면 행복한 게 한두 개가 아니잖아요.
유튜브에만 앉아 있어도 되잖아요. 왜 번거롭게 모입니까?
모이면 사람들이 짜증 나잖아요. 냄새도 나고 얼굴도 안 맞고... 그죠?

그러면 사람들이 시비를 걸죠. ‘예수님만 믿으면 되지 왜 모입니까?’
근데 제가 그런 분한테 하는 말이, 이전에 한 번 제가 공격을 당했거든요.
그 얘기하니까 ‘저 봐. 자기가 목사니까 목회하려고 한다.’
목회하려고 그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살아있는 말씀이 작동하게 되면요. 죄인으로 드러나야 돼요.
왜 안 모이려고 해요?

그러면 반대로 ‘우리가 무조건 모입시다.’
복음이 없는데 왜 모입니까? 복음이 없다면 모이면 안 돼요.
십자가가 선포된다면 모여야죠. 주님이 흩으시면 흩어져야 되고요.
모든 기준이 자기인 거예요.

그래서 지금 “네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으면”
이미 성령이 들어왔기 때문에
아까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이 내용을 하는 이유가
고 말씀 안에 이미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사건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사건과 부활한 사건이 작동하는 몸이에요.
왜 자꾸 이 얘기를 하느냐? 하면
인간들은 “주로 믿으면(시인하면)”이라고 하면 믿어버리죠. 그 단어를 믿어버려요.

그런데 성령은요. 십자가 사건을 우리 속에 넣어줍니다.
생전 잘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인데.
십자가 사건을 우리 속에 집어넣어줘요.

인간들은 믿죠. ‘충성!’, 이래 나오는데
‘그래 너 믿었니?’
성령이 작동하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
니 입술로 고백한 내용을 니 몸에 사건을 통해서 일으켜 버립니다.
‘니 믿음 가짜이지 않느냐?’ 들추어내시고요.
주님의 죽으심만이 유일한 생명의 길임을 계속해서 알아가게 하는 거예요.
그게 이 육신의 몸이 사건에 머무는 몸으로 봐야 돼요.

이스라엘을 보면 어린 양의 피로 구출해버리고 끝내버리지
왜 그 광야 40년 길, 약속의 땅, 그 긴 세월을 집어넣었느냐?
우리가 그 인생을 살기 때문에 그래요.
그 모든 말씀이 성도 속으로 다 들어오죠. 왜 그렇습니까? 왜 그게 들어와야 돼요?

구원이 목적이 아니라
구약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주되심을 증거하기 위해서니까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의 주되심을 증거하기 위한 인생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들은 몰랐지만, 오늘날 성도들은 그걸 알고 있잖아요.

롬10:10절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또 마음, 계속해서 반복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의’와 ‘구원’을 또 구분하려는 인간들이 있는데 이 성경이라는 것은 표현을 그렇게 하는 거예요.
앞서서는 ‘입술로’ 이야기하고 마음과 뒤집어 놨잖아요.
입으로, (8절에서)“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라고 해놓고

(9절에서)“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라 시인하면
(이게 ‘고백하면’ 이라 하거든요. 그리고 요 내용을 병행을 해서)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잖아요.
이걸 이제 뒤집는 겁니다.

10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얘기해요.
‘마음이 먼저입니까? 입이 먼저입니까?’ 이제 또 따져요.
따져도 소용없어요.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마음과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얻는 이 내용,
이제 이 내용이 무엇과 연관돼 있냐? 하면
8장과 연관이 돼 있어요.
마음으로 믿는 이 내용을 이야기하면 내부적이잖아요. 그죠?

내부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로마서 7장 사건이죠. 7장 사건에서
“나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속 사람은 또 다른 법과 싸워서” 이깁니까? 집니까?
사도바울이 100전 100패라 했잖아요. 성령이 동행하니까 100전 100패예요.
성령이 없는 사람은 100전 100승입니다.
이건 완전히 기존 교회와 정반대죠.

사도바울이 성령과 동행을 하잖아요. 주님과 동행하니까 100전 100패입니다.
100전 100패여야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한다는 게 나와요.
100전 100패라고 하면 ‘무조건 진다’라고 이렇게 보지 마시고
복음을 전하고, 전한 이후에 이긴 것 같은데 다시 지는 거예요. 계속해서.
이 텀(term, interval)이 있는 거예요. 계속해서. 사건이라는 거는.
이게 내부적입니다.

이 내부에 일어난 것을 외부로 발산하는 게 뭔가? 하면 입으로 고백하는 거예요.
이제 복음이 나올 것 아닙니까? 복음은 뭐가 나옵니까? 복음.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을 이야기하죠.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해버리면 우리 인간들의 모든 행위가 십자가 앞에서 뭐가 되죠?
죄가 되죠.

죄가 되니까 사람들이 가만히 두겠습니까? 가만히 안 있죠.
우리 자신도 나에 대해서 가만히 안 있어요. 뭐냐? 하면
모든 게 죄라고 했는데 여러분들이 오늘 교회에 오셨잖아요.
‘교회 온 것도 죄’라고 하면요. 내가 나를 용납 못해요.
‘그게 무슨 죄냐? 내가 지금 시간도 아까운데, 이 더운데 후덥지근한데 교회 왔는데 이게 왜 죄냐?’
이거예요. 그 상황 속으로 주님이 몰아갑니다.

복음이 없는 데는 이렇게 얘기하죠.
‘여러분 정말 마귀와 싸워서 오늘 교회에 잘 오셨습니다.’
그러면 이 인간의 행위가 의롭다는 거잖아요. 그게 무슨 복음입니까?
‘여러분 어려운 중에도 연보를 했으니까 정말 하나님이 기뻐할 겁니다.’
이게 무슨 복음입니까?
‘어려운 중에도 연보를 했는데 그게 바로 죄입니다. 여러분.’

롬10:11절“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이 내용만 해도 엄청나게 해야 되는데
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부끄러운 자리입니까? 영광스러운 자리입니까?
오늘 짧게 하겠습니다. 부끄러운 자리입니까? 영광스러운 자리입니까? 한번 생각해 보세요.
부끄러운 자리죠.

왜 부끄럽습니까?
공생애 기간에 죽은 자 살렸어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장정 5천 명을 먹였어요.
그러면서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스스로 인정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어요.
근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 뭐밖에 안 했습니까?
말만 했다 했죠? 말만. 말만 하셨잖아요.
근데 우리는 그거 말씀이라고 보잖아요.

이 말씀과 말의 차이예요.
인간의 눈에는 말뿐이에요. 말. 아니 “오늘 밤 네가 낙원에 있으리라” 말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하시는 말씀이 “내가 그리스도다. 내가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다”
부끄러워요? 안 부끄러워요? 예?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 볼까요?
여러분 복음 아는 교회를 다닌다. 근데 여러분 지금 형편이 어때요?
제가 보니까 다 고만고만하잖아요. 잘 사는 사람 없고...
그러면 주변 사람들이, 잘 사는 사람들이 명절날 모였다 그러면 뭐라고 해요?
‘에이 그런 교회 다니니까 니 집안 꼴이 그렇고, 니 그런 교회 다니니까 사업이 망하고, 니가 그런 교회 다니니까 자식들이 말 안 듣지.’
그 사람들은 뭐가 안 부끄러워요?

구약에 보면 이 ‘부끄러움’을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하면요.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이 아담과 여자가 부끄러워했다 해요.
부끄러우니까 자기들이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서 그 부끄러움을 가립니다.

이후의 부끄러움은 이 에스라입니까? 에스라서나 여기에 보면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것이 부끄러워요.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것이. 그러면 하나님 앞에 범죄했고
이사야 45장이나 이런 곳에 가면
“우상숭배하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한다”라고 나오거든요. 우상숭배하는 자들은.

여호와를 섬기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해요? 안 당해요? 안 당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구약에 의하면 부끄러운 게 뭐가 부끄러운 겁니까?
범죄했기 때문에 박살 났잖아요. 박살 났으니까 부끄러운 거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이 나무에 달려 돌아가실 때 이건 부끄러운 겁니까? 자랑스러운 겁니까?
부끄러운 거죠. 구약에 의하면.

그런데 그 부끄러운 십자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를 해요.
어떻게 이렇게 청개구리같이 주님이 말씀을 적용을 하시는지...
우리도 답답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확 내려와서 하나님의 아들다운 면모를 확 보이고
보인 이후에 “이 십자가를 믿는 자는 부끄럽지 않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으니까
그 이후에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신 이분이 성령을 준 자들은
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 내용을 다 빼버리고
주가 된 자리에서 행세를 하면 안 부끄러울 거 아닙니까? 그게 로마 카톨릭이에요.
동방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입니다. 오늘날 교회죠.

‘예수 믿는, 내가 쭈글시러워서 어떡하냐? 부끄러워서 어떡하냐?’
‘예수 믿는 내가 가난해서, 예수 믿는 내 자녀들이 잘나지 못해서, 혹시 뭐 아파서 이러면 부끄러워서 어떡하냐?’
부끄러운 개념이 달라져 버렸어요. 예수 안에서는.
예수 밖에 있는 게 부끄러운 거예요.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부끄럽지 않습니다.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 했을 때,
이 부끄러움은 최종적으로는 십자가의 피로 용서함을 못 받은 게 부끄러운 게 돼요.
이거는 성령 받은 사람만 알아요.

성령 못 받은 사람은 무얼 부끄러움으로 여기느냐? 하면
장로님을 부끄러움으로 여기죠.
제가 직설적으로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자꾸... 교인들이 떠나가니까.
사람들이 주변 사람들이 부끄럽게 여겨요.
‘니가 그렇게 복음을 전하고 니가 그렇게 복음을 안다면 왜 현재 사는 게 그 모양 그 꼴이냐?’라는
거예요.

그들의 안목은 어떤 안목이냐? 하면 육의 안목이에요.
예수를 주라 시인했는데 그 예수가 어떤 예수냐? 하면
구약에 여호와를 믿는, 여호와를 주로 믿는 자들에 의해서 살해당한 예수가 아니에요.
그들은 여호와의 주도 살아있고, 예수님도 주도 되는 예수님을 믿고 있어요.
부끄러움이 뭔지를 몰라요.

부끄러움이 뭔지를 모르니까 계속해서 어떻게 하려고 합니까?
부끄러움을 가리려고 하잖아요. 가리려고.
십자가 앞에서는 죄 아닌 게 없어요.
아까 교회 재정을 투명하게 해도 부끄러운 겁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오죽 내세울 게 없으면 재정을 투명하게 하겠어요?
피를 내세워야지.

피를 내세우면 교회 오겠습니까?
투명할 게 없어요. 우리 보세요. 투명할 것 없잖아요.
부끄러움의 의미를 모르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복음을 안다’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세상의 악마가 우리를 가만 안 두죠.
‘야 그게 부끄러운 게 아니야. 이게 부끄러운 거야’ 끊임없이 속삭이잖아요.

‘십자가 안에 있다’라는 것은 예수님의 기준으로 모든 게 바뀌어버린 거예요.
바뀌었기 때문에 부끄럽지 않다라는 의미가 어떤 의미인지를 알아요.
무엇이 ‘부끄럽지 않다’라고 하느냐? 하면
죄를 안 지은 것이 부끄럽지 않은 게 아니에요.
십자가를 자랑하는 게, 이게 부끄럽지 않다는 거예요.

여호수아가 새까마니까 마귀가 고소를 하잖아요.
‘죄를 짓지 말라’는 게 아니라 우리는 죄밖에 못 짓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해도 죄밖에 안 돼요. 죄밖에 안 되는 것을 감사해야 돼요.
화를 안 낼 수가 없어요.

싸움 일어나야 되죠. 부부가 사는데 안 싸울 수 있습니까?
그저께 제 아내가 제 강의하는데 처음 따라갔거든요. 처음 따라가니까 이제 묻는 게 뭐냐? 하면
어떤 사모님이 ‘사모님은 목사님하고 안 싸웁니까?’
‘매일 싸운다’라고 얘기했어요. 복음이거든요. 복음.

근데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뭘 이야기하는가? 하면 이 싸움의 의미도 다 다르지만
‘그거 부끄럽지 않냐? 복음 전하는 목사가.’
부끄러움의 의미를 몰라요.
십자가를 자랑하는 게 부끄럽지 않아야 돼요.

근데 사람들은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에 대해서 부끄럽게 여기죠.
그래서 ‘나 이제 십자가 자랑 안 할래’
그래서 어떻게 사는가? 하면
다시는 안 싸워요. 이제 부처가 되는 거예요. 목사가.
교인들도 마찬가지죠. 다시는 다투지 않아요.

뭐가 부끄럽기 때문에? 십자가 부끄러워요.
나무에 달린 예수님이 너무 부끄러운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 제발 내려오세요. 내려오세요. 필요 없어요. 필요 없어.’
필요 없으니까 ‘내가 죄 안 지을게요. 앞으로. 착하고 선하게 살게요.’
요즘 그런 기독교가 가득합니다. 적지 않아요.

롬10:11절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누구든지’라는 이야기를 했죠. 누구든지.
‘누구든지’라는 말은 로마서에 의하면 ‘이방인과 유대인’입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가 되면 모두가 다 누구가 된다고요?
이방인이 되고 내 백성 아닌 자가 돼요.

놀랍게도 내 백성 아닌 자가 내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이들은 자 여기에서 중요합니다.
내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 되게 한 십자가를 자랑하는 거예요.
그게 부끄럽지 않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계속해서 어떤 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느냐? 하면
내 백성 아닌 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어요.
‘아니 목사님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지금 설교 듣는데도 지금 딴 생각하잖아요. 온전히 우리가 주님을 생각 못해요.
그래서 말씀을 부지런히 듣고 모이기를 힘쓰라는 거예요.

안 모이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혼자 보면 되죠.’ 혼자 보면 자기가 교주가 돼요.
같이 모여서 말씀을 한번 나눠보세요. 얼굴을 붉히죠.
제가 어떤 목사님도 강의하고 저도 강의하고 질문을 하니까 이제 주변 사람들이 불안에 떠는데...
싸워야 돼요. 다퉈야 돼요.
복음을 전하는데 안 다툴 수 있습니까? 뭐 정경 발표자입니까? 영적 전쟁인데.
상대가 분노를 일으키죠. 당연히.

그러면 나는 ‘허허~’ 이럴 수 있어요?
죄인으로 드러나야 되죠.
복음은 복음대로 전파되고, 죄인은 죄인으로 드러나고.
어떤 것도 핑계 삼을 수 없습니다.

진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이 말씀이 현실화 되는 자리가 성도의 몸이에요.
그래서 그리스도를 우리 속에 두시는 거예요.

다르게 표현하면 십자가 사건을 우리 속에서 일어나도록.
이게 달리 표현하면 우리를 성전이라 하잖아요. 이것만 이야기하고 마칠게요.
성전은요. 여러 요소들이 같이 있어요.
우리가 아는 것은 ‘성전이니까 거룩하다’ 이것밖에 없잖아요.

거룩하려면 희생물이 이 속에서 나와야 되잖아요.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나오잖아요.
성전이니까 생수의 강이 나오잖아요. 생수의 강이 십자가잖아요.
십자가가 나오려면 나는 어떤 자로 드러나야 돼요?
죄인으로 드러나는 거예요.
그 세계 속으로 우리를 날마다 인도하심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을 주님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악마가 만들어준 부끄러움의 세계 속에 살고 있는 저희들을 십자가의 피로 용서하셔서
이 말씀의 현장이 되는 몸으로 날마다 만들어주셔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자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자로
날마다 만들어 주심을 감사하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기에 십자가에 못 박힌 주님만을 증거하기를 소원하는
주의 백성에게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