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3-12-06 20:49
20231206 마태복음 강해 마19:16-22 선한일과 선한 분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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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3-12-07 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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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06 마태복음 강해 마 19:16-22 선한 일과 선한 분

다 함께 기도드리겠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요동케 하는 것 같지만, 주께서 우리의 생명을 하늘 우편에 옮기셨기에
우리를 광야 가운데로 내어 모셔서
십자가의 사랑만을 자랑하게 하시는 환경으로 인도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생명의 말씀을 통하여 주의 은혜를 깊이 알아가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나님 말씀, 마태복음 19장 16절에서 2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마19:16~22)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헬라어 성경에는 ‘그리고’라는 접속사가 있고요. 그리고 ‘보라’라는
뭐라고 할까요? 놀라운 어떤 그 사건이 진행되는 그러한 내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앞서 나온 본문과 연결되어 있어요.
어린 아이와 같은 자가 천국을 들어간다. “천국이 어린 아이와 같은 자의 것이다.”
이 말씀을 놓치게 되면 오늘 본문을 이해를 할 때 무엇이 나오게 되느냐? 하면
행위가 나와요.

행위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게 왜 그러냐?
이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이 악마에게 사로잡혀 있어요.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말씀이라는 것이 나를 위한 말씀이지 십자가를 위한 말씀은 아니라고 생각을 해요.
조금 더 깊이 들어가게 되면 십자가조차도 ‘나를 위한 십자가’로 생각을 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을 제대로 보게 된다면 그 모든 것들이 무너지게 되어 있어요.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묻습니다.
시험하는 건 아니에요?
앞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시험을 했지만 이 사람은 자발적으로 찾아왔어요.
앞서 어린아이는 자기는 놀고 싶은데 부모가 데리고 와서 안수하여 주기를 원하니까
억지로 왔어요. 꼭 우리 유이나 수아 같잖아요. 언이나.
원하지 않아요. 아이들은.

그런데 그들과 달리 이 사람은 예수님께 찾아와서 묻습니다. 그 묻는 의도는 분명합니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렇게 질문을 했죠.
무슨 선한 일을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본인이 답이 없어서 묻는 건 아닙니다. 답이 없어서 묻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사람도 제가 부자 관원이라 얘기하지 않아요. (누가복음에는 부자 관원) 
지금 여기서는 “어떤 사람”이라고 이야기를 마태복음에서 강조하기 때문에
이 사람이 지금 답을 모르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확신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없는 것도 아닌데 왜 묻느냐? 라고 하면 들리는 소문. 그 소문이 무엇이냐?
예수라는, 나사렛 예수라는 인물이 있는데
사람들이 그리스도라고도 하고, 엘리야라고도 하고, 예레미야라고도 하고
이 모세가 예언한 그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도 하고,
죽은 세례요한이 살아났다라고도 하는 그 사람에 대한 말을 들은 거예요.

예수님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그 확신에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이 영생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었는데
혹시, 혹시 내가 모르는 영생에 이르려면 부족한 바가 있는지,
혹시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가 나에게 뭔가 한 수 더 가르쳐 주실 것이 있는지 혹시 모르잖아요.

이 얘기가 무슨 얘기인가? 하면
여러분이 진리의 복음을 여러 차례 들었잖아요. 그렇죠? 그죠?
등산을 해보면 보이는 그곳이 정상인 줄 알았는데 올라가 보니까 더 높은 곳이 있고
또 올라가 보니까 또 더 높은 곳이 있고.
신앙생활을 할 때도 처음 교회를 갔을 때는
‘야 이제는 구원을 얻었구나. 이것이 영생의 길이구나’라고 생각을 했는데
들어보니까 안 맞아.

그래서 또 다른 산으로 올라가죠. 올라가 보니까 거기가 맞는 것 같아.
또 아니에요. 또 다른 산을 찾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정보란 정보를 다 끌어모은 겁니다. 다 끌어모아서.
‘혹시 나에게 누수된 부분이 없을까? 천국 가는데 빠진 부분이 없을까?’를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러다가 ‘이제야 찾았다’라고 해서 한 10년 동안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를 했는데
거기가 아니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 시점이 되면 모든 게 무너지게 돼 있어요.

그다음부터 나오는 게 뭔가? 하면 객기가 나와요.
‘이제는 내가 안 흔들리리라.’
혹시 우리가 그런 객기가 있을지도 몰라요.
객기가 있으니까 의심이 있을 것 아닙니까. 객기니까.

받은 것 같으면 감사가 되는데
자기가 계속해서 찾아냈잖아요. 그래서 물이 새는 곳을 계속 틀어막는 겁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몰랐던 거예요. 그 새는 곳이.

틀어막고 틀어막으면서 영생을 얻는 그 비법을 찾은 거예요.
이 사람은 이미 정답을 알고 있죠. 그 당시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율법의 스승들이잖아요.
힐렐 학파와 샤마이 학파가
우리는 그들의 가르침이 엉터리라고 하지만 그 시대에는 그게 진리예요.
갇혀 있으면 못 빠져나와요.
신천지에 들어간 사람 빠져나오기 불가능합니다. jms에 들어간 사람 못 빠져나와요.

왜 못 빠져나오는가? 빠져나오면 모든 게 무너져요.
지금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아시겠죠? 빠져나가면 무너진다고 생각해요.

결국은 그 신앙을 찾는 이유가 뭐냐? 할 때는 안 무너지기 위해서 찾은 거거든요.
이 사람은 지금 율법이 가르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율법을 꿰뚫고 있는 거예요. 꿰뚫고 있는데

혹시 모르잖아요.
하나님이 보내신 엘리야라고도 하고 그 선지자라고도 하고,
그러면 ‘그런 사람 정도 된다면 선생님, 랍비 정도의 수준에 있지 않을까?’
우리도 많은 스승을 두잖아요. 디모데후서에 보면 마지막 때에는 이 많은 스승을 두거든요.
많은 스승을 두는 이유가 뭔가? 하면 막아보려는 거예요. 막아보려는 것.

내 귀의 즐거움도 있지만,
나의 지적 충족에 대한 욕구도 있지만,
혹시 저 목사가 전하는, 오늘 제가 설교하는 정 목사가 하는 설교가 다가 아닐지 모르잖아요.
이 사람이 지금 찾아온 이유는 답이 없어서 찾아왔다기보다는 불안한 겁니다.
혹시 모르니까.
불안하니까 더 확실한 인정을 받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렇게 질문을 해요.
우리는 답을 아니까 ‘선생님이라고 불렀으니까 벌써부터 출발이 잘못되었다.’
제발 그렇게 성경을 보면 안 돼요. 그럼 제자들은 제대로 불렀나요?
‘주’라고 불러봤자 뭐라고 합니까? 그 주가 무슨 주예요? 십자가 없는 주인데.

왜 ‘선생님’이라고 부르느냐?
겸손한 태도입니다. 한 수 배우겠다는 거예요. 가르쳐만 주면 듣겠다라는 거예요.
예수님이 선생님 맞죠? 선생으로서 가르쳤잖아요. 예수님이.
갑자기 선생님이라 하니까 선생님이 아닌 것 같은데
예수님은 선생님도 되고 다 되시잖아요.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혹시 빠진 부분이 있다면 내가 채우겠다.’
그러나 내가 지금 아는 바에 의하면 빠진 부분이 없어요.
왜냐하면 뒤에 나오는 내용을 보면 ‘십계명을 다 지켰다’라고 나오기 때문에 그래요.

십계명 안에 나머지 모든 계명이 들어갑니다. 세분화된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또 손을 들고 ‘그렇게 지킬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묻고 싶잖아요.
여기 있어요. 지금. 사도 바울도 있었고.
요즘도 있잖아요. 그 정통 유대인들은 종일 말씀을 묵상하잖아요.
돈은 누가 버느냐? 와이프가 벌고.
그 이스라엘이 먹여 살려주거든요.

우리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할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이 한번 보세요.
자기가 몸을 불살라서 무슨 공양? 소신 공양한대요. 세상에 그런... 자살해가지고... 그런 사람 말고.
자기 몸을 불살라서 그죠? 민주화를 이루려고 하고.
자기 목숨 하나 버리는 거 아깝지 않게 여기면서 신군부에 대적하다가 죽고 집안이 몰락하고...
그런 게 가능하다니까요.

이 사람이 지금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렇게 질문하는 이유는 구약을 보는 그 안목이 어떤 안목이냐? 라고 하면
영생을 얻으려면, 축복을 받으려면, 아니면 저주를 받는다면
그 원인이 어디에서부터 출발하느냐? 라고 하면 ‘나’로부터 출발을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렇게 질문을 하는 거예요.
“내가”

어디서 많이 듣던 질문 아닙니까? 보던 질문.
‘내가 어떻게 해야 됩니까? 내가 어떻게 해야 됩니까?’
‘내가’라는 말이 등장을 했다라는 말은 이 율법을 보는 안목이 육이라는 거죠.
육인데 육이라고 말하기 전에
먼저 이 율법을 연구한 자들이 왜 이렇게밖에 볼 수 없느냐?
그 이유는 이 구약에 나오는 율법이 애매해요.
애매하다고 하면 좀 오해를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율법 안에 뭐가 있습니까?
제사법이 같이 들어있죠. 율법 안에 제사법이 같이 들어 있거든요.

출애굽기 19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올 때부터 제 삼월 곧 그 때에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
출애굽한 이후에 한 3개월 정도 걸린 겁니다. 그 광야 길이 있었죠.
그 가운데 일어난 일들이 만나 사건이고 그 쓴물이 단물이 되는 그 사건들이 일어난 그 내용이
여기에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그들이 르비딤을 떠나 시내 광야에 이르러 그 광야에 장막을 치되 산 앞에 장막을 치니라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며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말씀이 뭔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무엇이 이상합니까? 앞부분에 4절에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했잖아요.
보았다라는 것은 구경만 했다라는 거죠.

이들이 출애굽할 때 어떻게 출애굽을 할 수 있었어요?
자신들이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해서 출애굽을 했습니까? 아니죠.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발랐다는 것은 순종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만일에 그런 논리라면 그들이 홍해 앞에 있을 때 원망하고
그다음 계속해서 물이 쓸 때 원망한 그것은 순종입니까? 아닙니까? 순종이 아니잖아요.

“독수리 날개로 업어 너희를 내게로 인도하였다.”
이 시내산으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다라는 겁니다.
여기에는 그들의 무엇이 없어요? 행위가 없어요.

20장에 가면 십계명이 주어지는데 여기도 마찬가지죠.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이렇게 말씀하세요.
“지키면 내 소유가 되겠고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어요.
그러면 우리가 이 본문을 읽으면 어떻게 읽어내겠습니까?
모순되는 내용이 지금 같이 말씀하고 계시잖아요. 모순되는 내용.

그러면 모순되는 내용이 발생하면 인간이 어디를 선택할까요?
반드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선택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나를 부정을 못 해요.
그 ‘나’가, ‘나’가 드러나려면 반드시 무엇을 해야 돼요? 행위가 나와야 돼요.
그게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은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언약을 지키라는 말씀으로 들리잖아요. 그죠?
“이 말씀을 내가 이루겠다 너희들이 보라”고 안 들리는 겁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보면 안 되고요. 왜냐하면 구약은 그림자이기 때문에
아직 이 예수님이 나타나실 때까지 갇혀 있어야 돼요.
갇혀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을 읽어낼 능력이 없어요.

이 하나님의 언약을,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살과 피로 세우시잖아요. 언약을 지키는 방식이.
그 방식을 이들은 알 수 없습니다.

여기에 이 말씀에 누구를 집어넣느냐? 라고 할 때는 ‘나’를 집어넣죠.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 상대는 ‘너희’잖아요. 너희.
이 ‘너희’는 누굽니까? 아들이거든요.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만든 아들.
그 아들에게 명령을 하시기 때문에 어느 누가 이 말씀에 대해서
‘보라 말씀을 이루실 것을 보자.’
마치 홍해 바닷가에서 “너희는 잠잠하라 가만히 있어라”
이 말씀의 의미라고 해석을 못 해요. 그 이유는 더 명확해지는데

이후에 광야 길을 지나면서 그리고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서 진멸을 당하잖아요.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서, 남유다는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을 당했어요.
그 멸망을 당한 이유가 무엇이냐? 라고 하면
우상숭배, 율법에 대한 배반이에요.

그리고 말라기는 포로에서 돌아왔는데 다시 어디로 돌아오라고 해요?
율법 세계로 돌아오라고 외치잖아요. 선지자들이.

그러면 지금 예수님 당시에 이들, 이 부자, 이 사람을 생각해 봅시다.
이 부자가 이 구약의 내용을 꿰뚫고 있어요.
구약의 내용을 꿰뚫고 있는 입장에서 방금 출애굽기 19장 말씀을 여기까지만 있으면
‘아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인도하신 것처럼 우리를 이 말씀의 세계로 인도하겠네’라고 하지만

실제 눈으로 펼쳐 보이는 게 어떤 거였습니까?
신명기 말씀대로 지키면 복을 받고 안 지키면 저주받는 내용이 눈에 계속 보였던 거예요.
물론 사실은, 실질적으로는 안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은혜가 그들 가운데 임했어요.
다윗을 보면 그렇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그들 눈에는 안 보이는 겁니다.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이 선악과를 먹어가지고 이 정신병 걸려서 그래요.
그걸 달리 표현하면 가두어 뒀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오늘날도 복음을 듣고 성령을 받았다는 사람도 성경을 보면서 그렇게 본다라는 겁니다.
그게 문제예요.

이 본문은 간단하거든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직접 이루시는데
그 이루심 속에 이 이스라엘이 그대로 어떻게 돼요? 동참을 하게 되는데,

동참하는 방식이 뭐냐? 하면 언약을 안 지키는 방식이요.
그다음에는 뭐예요? 자기들이 지키는 방식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말씀이 조금 복잡해졌죠.

그냥 하나님이 이루시면 ‘배 째라 내 마음대로 살겠다.’ 이게 용납이 안 돼요.
그런 걸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세계는 아브라함의 생애 전체를 담아내야 돼요.
다윗의 생애 전체를 담아내야 됩니다.
예수님의 생애 전체를 담아내야 돼요.
그게 믿음의 세계예요.

인간들은 끊임없이 뭘 추구합니까?
자기 구원을 추구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면 이렇게 빠져나가려고 하고 저렇게 말하면 저렇게 빠져나가려고 하는 거예요.
나 편하자고 복음을 듣고 싶은 거예요. 진짜 복음을.

이 사람도 지금 예수님께 찾아온 이유가 자기 편하기 위해서 예수님께 찾아왔어요.
난 부자는 되었고 이제 남은 것은 뭐 있어요?
지금 청년이라고 하거든요. 청년이라는 말은 흔히 40대 미만. 40대 넘었잖아요.
40이 안 됐는데 떼 부자다. 그럼 뭘 생각하겠어요? 한 부자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누가복음 12장에.
농사가 잘 되었으니까 이제 뭐예요? 이제 먹고 놀자는 거잖아요. 그 부자. 그 돈을 갖고.
요즘 30대 부자 된 사람들 있잖아요. 그 갭 투자해서. 아마 친구들 중에도 있죠?
망한 사람들도 있지만 부자 된 사람들이 많아요.
부동산 아니면 부자가 될 수 없었어요. 한 10년 좌우간에.
주식 해서 부자 된 사람은 거의 없어요. 그걸 이야기하는 그 한 사람만 부자가 되지.

그 사람들이 돈이 많으니까 뭘 합니까?
돈이 많으니까 이후의 삶은 보장이 돼 있고 그다음 천국까지도 생각을 할 가능성이 농후해요.
누구처럼? 이 부자처럼.
‘아 거기까지 생각하겠습니까?’
생각하니까 계속해서 내일을 생각하고 내일을 생각하는 거예요.

이 부자가 40살도 안 됐는데 엄청난 부자가 되었고 뿐만 아니라 율법대로 살았거든요.
이 이야기가 왜 중요하냐? 라고 할 때는
신명기 28장의 말씀대로 자기한테 이루어진 거예요.
자기가 그렇게 해석을 하는 겁니다.

물론 진짜 율법을 안다면 그런 소리가 안 나오죠.
진짜 율법을 아는 사람은 성령 받은 자뿐이에요.
바울이 성령을 받기 전과 후의 율법에 대한 이해가 달라요.
이번 주일날, 오는 주일날 할 그 로마서가 그 내용이 담겨 있는데
성령을 받기 전과 받은 후의 율법에 대한 이해가 다릅니다.

이 사람은 지금 성령을 못 받았거든요.
못 받으니까 자기 입장에서,
자기 입장이라는 말은요. 우리 모든 인간의 입장에서는 이 율법을 지킨 거예요.
‘그러면 성령 못 받지 않았느냐?’
이 성령이라는 분은 외부에서 오신 분입니다.

지금 이 사람은 구약에 대한 이해를 그렇게 하고 있는 거예요.
이 사람의 안목이 왜 이렇게 중요하냐? 하면
오늘날 교인들이, 목사들이 이렇게 성경을 보는 겁니다.

출애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뭐 했어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언약을 기억하사 모세를 보내서 구출을 했거든요.
거기에 인간들은 끼워 넣고 싶은 거예요.
‘그래도 말씀에 순종하여서 (어떻게?) 유월절 어린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지 않았습니까?
그게 얼마나 대단한 순종입니까?’

그전에 재앙을 내릴 때
그 파리부터인가 네 번째 재앙부터 그들이 원해서 고센 땅과 구별해서 하나님이 재앙을 내렸어요?
그들이 뭘 순종했어요? 그걸 미리 보여주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게.
광야 생활도 보세요. 그들이 한 짓이 무엇이었습니까? 원망과 불평밖에 없어요.
그들의 본색만 드러났죠.
바로 왕과 똑같은 강퍅한 마음만이 드러나는 기간이 40년 기간이었어요.
철이 들 만한데 철이 안 들어요.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기간조차도 그들은 철이 안 듭니다.

이 사람이 지금 질문하는 것은
우리는 이방인이기 때문에 이제는 구약을 좀 아신다고 볼 수도 있는데
구약에 바탕을 깔지 않으면 이 사람이 지금 왜 이 질문을 하는지를 몰라요.
질문을 하니까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선한 일이 뭐냐? 지금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물었잖아요.
그러면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분은 한 분뿐이다.

선한 분과 선한 일과 그다음 영생을 예수님은 지금 연결시키고 있거든요.
선한 분은 한 분뿐이라고 했을 때 이 한 분이 누구냐? 라고 할 때는
이 부자는 하나님이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 물어야 되는데, 여호와 하나님께 물어야 되는데 왜 내게 묻느냐? 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너 말 진짜 잘했다.” 완전히 엑스트라잖아요.

어떤 엑스트라입니까?
자기 구원을 위해서,
자기의 구원에 대해서 이 누수되는 부분을 막기 위해서 예수님께 찾아왔잖아요.
그래서 질문을 하는 게 선생이라고 불렀는데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하니까
“그래 너 말 잘했다. 선한 이는 한 분뿐이다.”

그 한 분이 누구예요? 이 사람들이 이걸 오해를 해요.
분명히 그 사람이 보기에는 누구예요? 여호와거든요.
그러면 여호와께서 예수님을 보냈다라는 거예요.
그 예수님을 뭘로 봅니까?
선지자 중에 한 사람 정도, 랍비 정도, 선지자가 안 되면 랍비 정도, 선생님 정도로 보는 겁니다.

그런데 그러한 안목을 가진 자가 선한 일에 대한 질문을 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이 사람을 통하여서 자기를 계시하는 겁니다.
“선한 이는 한 분뿐이다”
그러면 성령 받은 사람은 선한 분이 두 분으로 나와야 돼요.
이 본문을 통해서 성령 받지 못한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 한 분밖에 안 나와요.

그런데 성령 받은 사람은
‘선한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요’를 받고 예수님 자신임을 볼 수 있어야 된다라는 얘기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사람의 이 질문 자체가 지금 영생에 대한 질문을 했잖아요.
그러면 영생에 대해서는 누구의 관할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관할이잖아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여기에 대한 답변으로 이렇게 말씀을 하시면서
이걸로 그냥 끝내는 게 아니라
우리 같으면 ‘나 믿어’ 이렇게 나와야 되잖아요. 사랑이 넘치는 예수님이니까.
‘나 믿어’ 이렇게 나와야 되는데

예수님은 나를 믿으라 하지 않고 율법 속으로 그 사람을 몰아넣습니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이 원칙은 변함이 없어요.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야 됩니다.
계명을 지켜야 생명에 들어갈 수 있어요.

그러니까 이 사람이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말씀만 하십시오. 어떤 계명이든 제가 다 지킬 수 있습니다.’ 이런 질문이죠.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십계명의 후반부를 언급하셨는데, 후반부를 다 지켰다라는 것은 전반부를 다 지켰다라는 거예요.
율법이라는 것이 같이 엉겨 있는 거예요. 같이 엮여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이렇게 말씀을 하시니까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켰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다 지켰다라는 거예요. 그런데 아직도 무엇이 부족한 것이 있습니까?
이 질문이 앞서 말씀드린 그 내용이에요.
내가 부족한 점이 있느냐? 라는 거예요.
부족한 점이 있다면 선생님이 가르쳐만 준다면 제가 그것을 지키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사람이 알기로는 율법을 다 꿰뚫고 있으니까 새로운 게 나올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십계명이니까 그 이상 나올 게 없잖아요. 나올 게 없는데 예수님께서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데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온전하고자”라는 말씀과 지금 왜 온전하고자 한다라고 이렇게 표현을 하느냐? 예수님께서.
이 사람은 지금 목적이 뭐냐? 하면
영생을 얻기 위한 완벽한 그 행위를 지금 하고 싶은 거예요.
‘온전하고자’라는 것은 반드시 영생을 얻는다라는 얘기예요.

영생을 얻으려면 “온전하고자 할진데” 이 질문, 그래서 질문을 한 거잖아요.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라는 말은 자기가 온전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쫓으라 하시니”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을 주라는 겁니다. 꿈에도 생각을 못한 거예요.

앞서서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도 지켰다 했잖아요.
그 율법을 다 지킴으로 말미암아 부자가 됐거든요.
부자가 되었는데 예수님께서 부족한 점이 뭐냐?
‘소유를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을 주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다’라고 이야기를 해요.

갑자기 좀 이상한 이야기를 하죠? 하늘의 보화.
하늘의 보화라고 할 때, 우리는 ‘하늘에서 보화’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죽어서 받는 보화라 이렇게 생각을 하잖아요.
그런데 메시야 왕국을 기다리는 그들의 하늘나라의 보화는 이 땅에서의 보화예요.

문제는 “이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슬퍼하며 갔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왜 슬퍼했을까요? 왜 슬퍼했을까요?
이 슬픈 이유는 영생을 얻고자 하는 그 욕망이 강렬한데
선생님이라고 이렇게 불렀던 그분의 가르침을 들어보니까 도저히 못 하는 거예요. 도저히.
그래서 슬펐던 거예요. 대단하죠. 마음이.

지금 이 말씀을 갖고 사람들은 이 사람의 문제점을 지적을 이렇게 해요.
예수님의 호칭에 대한 문제라든가
아니면 이 예수님의 말씀을 불순종했다라든가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고
또 하나는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려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쫓아야 된다라는
그러한 가르침에 이 사람은 참여하지 못한 것에 대한 지적을 해요.

그래서 우리는 ‘성도로서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라고 물으면
‘모든 것을 버리고 쫓아야 됩니다.’
여러분 모든 걸 버렸습니까? 곧장 한번 해봅시다.
여러분 부자는 아니잖아요. 그죠? 그러면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재물을 다 팔고 가난한 자들에게 주십시오.’ 가능합니까?

여기에 또 갈리죠. 그 짓을 하는 사람이 있고 못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래서 어려운 거예요.
그래서 뒤에 나오는 내용이 또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쫓는 자들의 그 탐심을
주님은 또 지적하는 겁니다.

인간은 계속해서 답을 찾아내려고 하잖아요.
지금 예수님께서는 이 부자 청년을 통하여서
이 율법 세계에 속한 인간의 한계성을 드러내는 겁니다.
율법이 되었든, 예수님이 되었든,
모든 것들이 나 중심으로 움직여야 된다라는 거예요. 나 중심으로.

예수님의 말씀에 이 사람이 순종할 수 없잖아요. 돈이 많으니까. 그죠?
그러면 “불쌍히 여기소서” 하면 되잖아요. 돈은 돈대로 챙기고.

모든 재물을 내어놓으라는 건 아닙니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등장을 하잖아요.
그들의 문제가 뭐예요? 성령을 속인 거잖아요.

성령은 십자가의 사랑을 내어놓는 건데 이들은 자신들의 의로움을 내놓는 거예요.
왜? 남들이 장에 가니까 자기도 똥거름 지고 장에 가는 것과 똑같은 짓이에요.
근데 안 속잖아요. 똥거름은 눈에 확 보이지만
이 값비싼 재물을 사랑하지 않는 모습. 밭을 팔아서 절반이나 바쳤으면...
우리 중에 그런 사람이 있으면 칭찬하지 않겠습니까? (팔 밭이 없어서 그렇지만.)
얼마나 신앙 좋다고 하겠어요? 절반을 바치면.
이 말씀의 의미는 다 바쳐도 죽어야 돼요.
왜냐하면 성령을 속였기 때문에 그래요.

이 말씀이 사도행전과 연결되어야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거예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쫓으면 되느냐? 그것도 안 돼요.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콕 집어서 안 되는 부분을 공격하신 거죠. 지적하신 거예요.
불가능한 부분을 말씀하신 거예요.

그러면 이 말씀을 보면서 어느 누구도 영생을 얻을 방법이 없다라는 걸 알아야 돼요.
문제가 뭐였습니까?
이 부자 청년은 모든 율법이 누구 중심으로 해석이 되고 적용이 됩니까?
자신의 영생 중심으로 해석이 되고 적용이 되죠.

그래서 앞서 이 본문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사람들이 이 말씀을 어떤 식으로 적용을 합니까?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쫓아야 됩니다.’
이 뭐예요? 그래서 뭘 얻고자 합니까?
‘나 주님의 제자요. 나 주님 말씀대로 살았어.’
나 보세요. ‘나’가 부정이 안 돼요.
어른의 특징이 ‘내’가 부정이 안 된다는 거예요.

처음 시작할 때 이 본문은 앞서 나온 어린이와 대조적으로 보셔야 되는 거예요.
어린이는 그냥 아버지한테 부모에게 그냥 끌려왔어요.
그런데 이 사람은 자발적으로 온 거예요. 자발적으로 오니까
어린이는 안수 주면 받으면 돼요. 예수님이 안수해 주시면.

근데 이 사람은 자기가 선악을 분별하고 판단을 하고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해야 되느냐? 해야 되느냐? 라고 덤비니까 예수님이 못 할 일을 제공하는 겁니다.
불가능하죠. 이건 누구나가 불가능해요.

사람들이 오해를 하는 게 이런 부분이거든요.
‘우리는 돈 다 버리고 가지 않습니까?’ 할 때
이 사람이 지금 이 재물에 대한 애착이 말씀에 근거한 애착이에요. 큰 부자예요.

“네 부모나 처자를 버리지 아니하면 내게 합당치 않고”
이 말씀도 그 부모와 처자가 내가 정말 사랑하는 부모 처자입니다.
그 얘기를 하는 거예요. 요즘은 뭐 부모가 되었든 처와 자식이 되었든 다 남남이잖아요.
제 마음대로 살거든요. 아버지는 아버지고 엄마는 엄마고 딸은 딸이고 아들은 아들이고...
그러니 쉽게 부정할 수 있어요. 그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요즘은.
그렇게 해놓고 ‘나는 부모를 부정했다’ 하는데...

이 청년은 모든 말씀을,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나 중심으로 해석을 한 겁니다. 자기 중심으로.
자기 중심으로 해석했기에 이 사람은 지금 여기에서는 이 사람은 영생의 목적이었잖아요.
그런데 놀랍게도 이러한 인간을 통하여서
선한 분이 누구신가? 를 증거하시는 겁니다.

선한 분이 누구냐? 이 얘기예요.
여기에 이제 제자들이 훅 끼어들거든요. 그래서 제자들이 꼭 필요한 거예요.
제자들은요. 그 시대에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뛰어넘은 자들이에요.
이들의 모습이 나중에 이제 성령을 받게 되어서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이 전파되면 교회 안에서 이런 자들이 등장을 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재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쫓으면 되지 않습니까?’
그 사람에게 질문을 해봅시다. 왜 쫓느냐? 얘기예요.
지금 제자들이 예수님을 쫓거든요.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가잖아요. 왜 따라갑니까?
꿍꿍이가 있는 거예요. 꿍꿍이.
이 사람은 지금 영생이라는 꿍꿍이가 있었잖아요.
영생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간 거거든요.

근데 영생은 십자가 지신 주님이 주시는 선물이거든요.
그 선물은 홀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새 언약을 세우셔서 주시는 선물이에요.
여기에는 인간의 행위가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들어갈 수가 없고
오히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이 십자가의 원수로서 드러나는 행위로 들통이 나게 돼 있어요.

그러면 여기에 영생이든, 예수님이든 ‘나’가 들어갈 자리가 없는 거예요.
이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끌려왔듯이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으로 새 언약을 세우심으로 말미암아
거저받은 은혜로 영생을 받은 거예요.

그러니 성도는 거저 받은 그 은혜를 증거하게 돼 있단 말입니다.
여기에는 ‘나’가 어떻게 돼요?
없는 게 아니라 부정당해야 돼요.
그래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따라오라는 거예요.

부모에게 끌려온 애는요. 자기가 원하든, 안 하든 강제 부정이에요. 강제 부정.
‘제가 오고 싶어서 왔습니다. 예수님 안수해 주세요.’ 이렇게 해서 애들이 온 게 아니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장에서
“너희도 가려느냐?” 할 때
“베드로가 주여 영생의 말씀이 여기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자랑스럽게 얘기를 하거든요. 오늘날 교인들 같아요. 꼭.
‘제가 주의 진리의 복음을 아는데 절대로 떠나지 않겠습니다.’
‘뗐지! 한 대 맞아야 돼.’ 맞으면 축복이죠.

“내가 너희 열둘을 택했는데 그중에 하나는 마귀다”
이건 더 충격적이에요.
열둘을 택하면 택했지 그중에 하나 마귀라는 얘기까지 나와버리면 내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그분이 심판주가 되셔서
십자가의 피 능력으로 긍휼을 통해서 구원할 자는 구원하고
그 피 혜택을 못 받은 자들은 지옥 보내는 그분의 이 다 이루심을 증거하는 결과물들이라는 거예요.

영생이라는 것도, 율법이라는 것도, 모두가 다,
심지어는 모든 소유를 팔아 이렇게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는 것조차도
십자가를 증거하는 말씀이라고는 생각도 못 하는 거예요.
이 사람은 이걸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은 겁니다.
‘이 사람이 진짜 하나님이 보내신 선생님이라면, 선지자라면 이 말씀은 진짜 어렵구나. 참 슬프다.
나는 도무지 영생을 얻지 못하구나.’ 굉장히 양심적이죠.
우리 같으면 배팅을 한번 할 거 아닙니까? 다 던지고 따르죠.
그런 사람이 있거든요.

이 복음을 듣고 이혼도 해버리고... 막 해요. 배팅을 해요.
주님이 시키는 일을 해야 되는데
이 자기가 갖고 있는 의로움, 옳음을 갖고 ‘나 복음 모르는 아내랑 이혼하겠어.’
그때는 꼭 성경을 이용하거든요. “믿지 않는 자가 갈리자고 하면 갈리라” 이게 뭐예요? 이게.
모든 말씀은 우리를 책망하는 겁니다.

근데 그 사람은
‘됐다. 이제. 내가 정말 말씀을 말씀대로 이룰 기회가 왔구나’ 이렇게 해서 그걸 적용을 하는 거예요.
도무지 성령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계속해서 옳음, 옳음, 옳음. 옳다만 오는 거예요.
‘주님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 제가 옳죠?’

그런 사람은 그다음부터 계속 옳음을 주장해요.
계속 옳은 이야기를 한다고요. 성경을 이야기하면서 ‘이게 옳아. 저게 옳아.’
십자가 앞에서는 옳음이 없어요.

그러면 말씀은 옳음이 없습니까? 있죠. 바로 이런 말씀들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쫓으라”는 말씀은
주의 말씀이기 때문에 이 말씀은 말씀대로 살아 있으면서 우리는 죄인으로 드러나는 거예요.
이 말씀을 빼버리면 죄인으로 안 드러나요.

우리가 재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돈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이 말씀 자체가 작동을 하려면
돈을 사랑하는 ‘나’가 있어야 돼요.
안 그러면 그 말씀을 사람들은 뭘로 듣는가? 하면 ‘나 돈 뗐어.’
이건 완전히 얼마 전에 입시가 있었잖아요. 공부할 때 ‘이거 뗐어. 저것 뗐어.’ 이런 식인 거예요.
말씀 자체를 떼는 걸로 보는 거예요. 왜 뗍니까?
‘나’ 중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게 어른들의 문제예요.

그럼 이 어른을 어떻게 어린아이처럼 바꾸느냐?
그것은 성령을 주시는 방식이에요.
성령을 주시니까 그 잘난 사울을 뭘로 바꿔버립니까?
복음의 증인으로, 복음을 실어 나르는 돛단배로 바꿔버려요.

그전에는 돛단배의 사공이 자기였잖아요.
내가 끌고 막~ ‘이 배는 나를 위한 배야. 이 몸은 나를 위한 몸이야.’
이 사람도 이거 자기 몸이거든요.
그런데 성령이 와버리니까 ‘내 몸은 내 게 아니었어. 피를 증거하기 위한 몸이었어.’
그 상황 속으로 계속해서 내몰리게 되는 거예요. 내몰리게 되는 거.

어제 제가 신명기 2장 1절을 하면서 하기 전에 어떤 목사님이 전화가 왔어요.
쭉 얘기를 하면서 오늘 밤에 설교할 게 뭡니까? 이렇게 질문이 왔어요.
그러면 또 해줘야 되잖아요. 한 설교보다 더 오래 했는데.
주님께서 왜 에돔 같은 나라, 저주받은 민족이잖아요. 모압도 마찬가지고.
그들의 기업을 왜 먼저 주시고 그들의 기업을 보호하시느냐? 이 얘기예요.
축복과 저주가 전복되기 때문에 그래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는 것이 야곱에 의해서 이미 드러났거든요.
그것이 이스라엘 전체 가운데 계속해서 반복되는 겁니다.
그래서 40년 광야길 동안,
그 신명기 2장에서 1절에서 15절 사이에 두 가지 이야기를 같이 하잖아요.
40년 동안 복을 주었다라는 거고, 
또 하나는 38년 동안 하나님께서 친히 죽였다는 내용을 같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이 두 가지 세트 자체가 너희들이 바로 축복받은 증거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축복이라는 자체가 ‘언약을 위한 축복’이기 때문에 그래요.
나를 위한 축복이 아닙니다.
나를 위한 축복 자체가 없어요.
나를 위한 구원 자체가 없습니다.

“선한 분이 누구냐?”를 증거하기 위한 영생이에요.
심지어 율법도 예수님을 증거하는 율법인 겁니다.
그래서 만일에, 만일에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잖아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쫓는 분들이 있잖아요. 그죠? 또 ‘그게 어딨어요?’
있잖아요. 사도 바울.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만일에 있다면 그 일은 주의 일이잖아요.
나의 일이 아니고.
그런데 만일에 그 일을 하는 당사자가 하는 말이
‘내가 주를 위해서 말씀대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쫓았습니다’라고 한다면
이 사람은 마귀의 종입니다.

이 사람들의 문제가 뭐냐? 하면요.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아요.
자기의 행위가 돋보여요. 그리고 청중들도 다 그 행위를 보려고 하죠.
행위를 자랑하거든요.
‘우리 교회 목사님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아? 의사였는데 의사 집어치우고 복음 전하는 데 다 하고
재산이 있더라도 헌금 들어오는 걸 다 가난한 자들에게 줘.’
미국에 있는 어떤 목사가 그렇거든요.
자기는 놈팽이처럼 놀고 아내가 의사니까 그런 짓을 하거든요.

왜 그걸로 좋은 목사라고 이름을 듣느냐? 이 얘기예요.
왜 십자가가 안 나옵니까? 모두가 ‘나’ 중심이잖아요.
이 사람이 지금 예수님을 떠나가는 이유는 ‘당신은 나를 위한 당신이 아니야.’ 이 얘기거든요.
나를 위한 당신이 아니라는 거예요.
물론 슬퍼하는 이 모습은 뭔가 갸륵하게 보이잖아요.
이게 가장 악마적이에요.

복음은 우리를 위한 복음은 없습니다.
‘나’를 위한 복음 자체가 없어요.

이 세상을 살게 하는 것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주님의 피공로를 자랑케 하기 위해서 살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이 부자처럼 살아야 돼요.
십자가를 증거하는 부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찾아오셨지만 주님의 말씀을 듣고 떠나가는 부자 청년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임을 보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언제나 나만을 생각하고
나 중심으로 천국과 영생과 모든 말씀과 환경을 생각하는 그러한 죄인인데,
주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성령을 저희들에게 부어주셨기에
날마다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시고
십자가의 사랑만을 알아가게 하시고
십자가만을 자랑케 하심을 감사하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