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4-06-09 20:58
20240609 이사야 강해 49강 사 15:1-9 모압과 죄인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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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4-06-10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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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9 이사야 강해 49강 사 15:1-9 모압과 죄인

하나님 말씀, 이사야 15장 1절에서 9절까지 말씀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사15:1~9)
“모압에 관한 경고라 하루 밤에 모압 알이 망하여 황폐할 것이며 하루 밤에 모압 길이 망하여 황폐할 것이라 그들은 바잇과 디본 산당에 올라가서 울며 모압은 느보와 메드바를 위하여 통곡하도다 그들이 각각 머리털을 없이 하였고 수염을 깎았으며 거리에서는 굵은 베로 몸을 동였으며 지붕과 넓은 곳에서는 각기 애통하여 심히 울며 헤스본과 엘르알레는 부르짖으며 그 소리는 야하스까지 들리니 그러므로 모압의 전사가 크게 부르짖으며 그 혼이 속에서 떨도다 내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부르짖는도다 그 귀인들은 소알과 에글랏 슬리시야로 도망하여 울며 루힛 비탈길로 올라가며 호로나임 길에서 패망을 부르짖으니 니므림 물이 마르고 풀이 시들었으며 연한 풀이 말라 청청한 것이 없음이로다 그러므로 그들이 얻은 재물과 쌓았던 것을 가지고 버드나무 시내를 건너리니 이는 곡성이 모압 사방에 둘렸고 슬피 부르짖음이 에글라임에 이르며 부르짖음이 브엘엘림에 미치며 디몬 물에는 피가 가득함이로다 그럴찌라도 내가 디몬에 재앙을 더 내리되 모압에 도피한 자와 그 땅의 남은 자에게 사자를 보내리라”(아멘)

모압에 대한 경고입니다.
모압의 출발은 창세기 19장에 나오죠. 창세기 19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할 것을 말씀하신 이후에
가서 롯을 구출해 냅니다. 롯을 구출한 이유는 아브라함을 기억하셔서 구출해 내신 거예요.

‘의로운 롯’이라고 신약에서 말씀을 하시는데
‘의로운 롯’이 된 이유는 아브라함 때문입니다. 천사들이 가서 심판한다고 해도
신약 성경에서는 ‘롯이 부지중에 천사를 영접했다’ 하거든요. 천사를 알아본 것은 아니었는데.
천사가 가도 몰라봐요. 소돔과 고모라는.

천사조차도 쾌락의 대상으로 보인 겁니다.
천사가 멋진 남자로 보였던 모양이에요.
그러면 멋진 남자여서 쾌락의 대상으로, 동성연애의 상대로 봤느냐? 그렇게도 볼 수도 있지만요.
인간의 욕망은 새로운 것을 좋아해요. 갈 때까지 가면 그래요.

인간들은 새롭지 않은 것은 지루해야 합니다. 쾌락도 마찬가지죠.
그래서 마약이나 술에 취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담배도 새로운 담배를 원하잖아요. 이제는 뉴욕입니까? 뉴욕이 마약을 허용했죠.
길거리에 다니면 마약 냄새가 진동을 한답니다. 합법적이니까.
그러니 정신병자들만 모여 사는 거예요. 독일도 지금 허용한다라고 이야기를 하거든요.
우리나라도 얼마 남지 않았을 겁니다.

쾌락을 계속 추구하게 되겠죠.
여기에서 구출 당한 이 롯과 두 딸입니다.
롯의 처는 뒤돌아봐서 소금 기둥이 되었고,
롯의 사위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뭘로 여깁니까? 농담으로 여기죠. 농담.

농담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어요?
이 복음이 농담 같지 않습니까? 현실에 무슨 도움이 됩니까?
현실을 극복하거나 현실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면 농담으로 여기지 않는데
‘그것은 죽어서 가봐야 아는 거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경우가 되게 많아요.

지금 우리가 사는 현장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완성하신 천국의 현장이에요.
그 천국의 현장은 항상 둘로 쪼개집니다.
십자가 지신 분의 그 피능력이 한쪽은 긍휼의 그릇, 한쪽은 진노의 그릇이 일어나는 현장.

그럼 성도는 어느 쪽에 있느냐? 어느 쪽에 있어요?
‘나는 긍휼의 그릇이다’ 오전 설교를 들었으면 그런 소리 안 하고
십자가를 자랑하는, 진노의 그릇에서 긍휼의 그릇으로 바뀐 십자가를 자랑하는 위치에 있게 되죠.

이 놀라운 것은 여기에서 구출을 했으면 소돔과 고모라에서, 그 악한 곳에서 구출을 했다면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된다라고 생각을 합니까?
소돔과 고모라의 모습을 그대로 담아내야 됩니까? 다르게 살아야 될까요?
희한한 것은 이 두 딸들이 아버지와 동침하여 자식을 낳죠.
큰 딸과 작은 딸이 낳은 자식의 후예들이 모압과 암몬이 됩니다.

그러면 그들을 왜 번성하게 하셨느냐?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심판하기 위해서.
구원이 구원이 아니에요.

이 창세기를 보게 되면 홍수 심판 가운데 노아와 그 아들들을 구출을 했는데,
함의 자손들, 가나안 자손들이 구원을 받았는데 저주 받아요.
이 이야기가 오늘 오전 설교를 들으신 분들은 이제 이해가 되죠.
근데 구원론으로 성경을 들어가면 하나도 이해가 안 돼요.
그런 내용이 담겨 있고 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출한 것이 이 구원을 위함이냐?라고 하면
구원은 맞는데 심판을 위한 하나님의 약속의 백성들을 테클 걸기 위한 민족으로 세우기 위해서
그들을 만드시고 보호하신다라는 사실이에요.

좀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왜 예수님을 죽이는 이 로마 제국이 만들어졌느냐?’
우리는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거든요.
로마 제국이 강력한 전 세계를 지배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을 죽이는 그 사태까지,
헤롯 왕으로 인하여서 죽이는 사태까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데,
모든 세상은 말씀이 응하게 하기 위한 세상입니다.
다니엘 예언이 성취된 예언이에요.
말씀을 위한 세상이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세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 이 모압도 마찬가지죠.
모압에 대해서는 그 유명한 내용이 나오는데 민수기 22장부터 볼까요?
모압 왕 발락이 이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칠까하여서 두려움에 뜹니다.
22장 1절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또 진행하여 모압 평지에 진 쳤으니 요단강 건너편 곧 여리고 맞은편이더라 십볼의 아들 발락이 이스라엘이 아모리인에게 행한 모든 일을 보았으므로 모압이 심히 두려워하여”
이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서, 소문을 들었잖아요.
그래서 여호와보다, 이스라엘 하나님보다 더 센 발람 선지자를 먼 곳에서 초빙을 해서,
비싼 돈을 주고 초빙을 해서 저주해 달라고 했어요.
그런데 발람 선지자가 여호와께서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않는다 하면서
저주를 하지 않고 오히려 축복을 했습니다.

그 이후에 민수기 25장입니다. 거기에 가면 이제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아무튼 말씀이 퉁퉁 뛰어넘어요.
분명히 발람 선지자가 실패했는데
그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시키는 일이 끝나고. 끝나고 난 뒤에는 또 돈 받고...
이제는 이 발락의 요구를 들어줄 수 있는 상황으로 바뀝니다.
이런 것도 성경을 읽으면서 ‘어떻게 한 입으로 두 가지 말을 할 수 있느냐?’
‘발락이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다면 정신을 차리고 이스라엘을 이 여자들을 갖고 꼬셔가지고 우상숭배하도록 만들지 않아야 되지 않느냐?’라고 우리는 생각을 하는데

체험 필요 없습니다. 계시 들어도 소용없다라는 이야기예요.

갈 길을 가야 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음행케 하여서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하고,
그래서 이곳에서 하나님이 내리신 재앙에 의해서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하고
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칼을 차고 여호와의 질투심으로
음행하는 이스라엘 남자와 모압 여자를 창으로 찔러 죽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걷히는 그 내용이 지금 25장에 나옵니다.

신명기 23장 3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여호와의 총회” 여러분이 교단이라는 것은 알죠?
총회라는 말이 무시무시합니다. 총회에 못 들어간다는 말은 지옥 간다는 말이에요.
이런 것은 상식적으로 알아두셔야 돼요.
‘합동총회, 통합총회’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우리 총회 외에는 너희들 다 지옥 가라’는 말이에요.
진짜 무서운 말들입니다. 용어가.

옛날에는 그랬거든요. 종교개혁 때는 교리가 다르면 그냥 죽여버립니다.
로마 카톨릭보다 더 심한 거예요.
그쪽에서는 그냥 면죄부를 팔기 위해서 돈 거래를 하지만 살려는 주잖아요.
이 종교개혁 이후에는 자기 교리와 틀리면 죽여버려요. 전쟁에서.

지금 이 모압과 암몬이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신23:4~6절입니다.
“그들은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떡과 물로 너희를 길에서 영접하지 아니하고 메소보다미아의 브돌 사람 브올의 아들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너희를 저주케 하려 하였으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사랑하심으로 발람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그 저주를 변하여 복이 되게 하셨나니 너희 평생에 그들의 평안과 형통을 영영히 구하지 말지라”
모압과 에돔은 10대뿐만 아니라 영원히 어디에 못 들어옵니까? 너희들의 총회.
신약적으로 표현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 수 없다라는 겁니다.

이 사상이 왜 중요하냐?
느헤미야 13장을 보겠습니다. 뭐 졸리니까 빨리 끝낼게요. 13장 1절에 보면 
“그날에 모세의 책을 낭독하여 백성에게 들렸는데 그 책에 기록하기를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영영이 하나님의 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신명기 23장 말씀을 그대로 갖고 왔어요.
지금 이때가 어떤 때냐? 하면
바벨론 포로 1차에서 돌아오고 성전을 건립하다가 정지되었다가
스룹바벨 성전이 다시 세워지고,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의 등장으로 세워지고

그 이후에 에스라 선지자가 돌아와서 개혁을 하고
이후에 학사 에스라가 등장을 하고 그다음 느헤미야가 등장하여서 개혁을 하는 거예요.
성전은 이미 스룹바벨 성전은 세워진 지 한 40년이 이미 훌쩍 넘은 겁니다.
그러니까 역사적으로 말하면 거의 성경 역사서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어요.

이 느헤미야가 왜 중요하냐? 하면요.
이 느헤미야 에스라가 거의 한 40년 전후 관계인데 거의 비슷한 시기인데
이들의 사상을 따라서 유대교가 만들어져요. 유대교가.
지금 느헤미야가 이 뒤에도 또 한 번 더 또 개혁을 하거든요.

앞부분에 개혁을 하고, ‘말씀으로 돌아가자’라는 개혁을 하고
몇 년이 지나니까 또 그들이 어디로 돌아가느냐? 하면 원래대로 돌아가요.
말씀대로 말씀을 떠나는 겁니다. 그래서 또 개혁을 합니다.

지금 여러 차례, 에스라 느헤미야를 보면 여러 차례 개혁을 해요.
그래서 개혁주의가 만들어졌어요.
‘끝까지 개혁되어야 된다’ 이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십자가로 다 이루었는데 무슨 개혁을 합니까?

그 ‘개혁’이라는 용어를 어디서 갖고 오는가? 하면 히브리서에서 갖고 와요.
“개혁할 때까지 그렇게 말씀을 주셨다”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로 완료해버리면 개혁이 끝나버렸죠.
‘개혁’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말씀이라는 것은 개혁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니에요.

그 개혁주의 사상을 가진 자들이 바리새인이거든요.
지금 이 에스라 느헤미야를 읽으면
철저하게 율법으로 돌아가야 되고 말씀으로 살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들이 누구냐? 하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입니다.
사두개인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죠.

여기에서 “모압과 암몬 사람은 영영이 하나님께 들어오지 못한다”고 하니까
느13:2절에 보면
“이는 저희가 양식과 물로 이스라엘 자손을 영접치 아니하고 도리어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저주하게 하였음이라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그 저주를 돌이켜 복이 되게 하셨다 하였었는지라 백성이 이 율법을 듣고 곧 섞인 무리를 이스라엘 가운데 몰수히 분리케 하였느니라”
이게 바리새인이잖아요.
섞인 무리, 모압과 암몬 섞여버렸어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는데 그곳에 이 모압과 암몬 족속들이 섞여 있어요.
그러면, 섞여 있으면, 이 신명기 율법대로 살지 않아서 멸망당해서 포로로 잡혀갔잖아요.

그리고 포로로 잡혀가는데 그전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메시아 왕국에 대한 약속을 하셨잖아요.
근데 돌아와서 스룹바벨 성전이 세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칠십이레의 완성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근데 누군가 지도자층이, 느헤미야가 떠나버리니까 개판이 되죠.
돌아와서 다시 개혁을 하는 겁니다. 표현을 하면.

그중에 하나가 이 내용이에요. “무리 중에 섞인 자를 몰수히 분리케 한다”
우리는 이게 쉬울 것 같죠.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과 함께 사돈 관계도 맺어져 있을 수 있고 내 아내일 수 있고 남편이 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정도 없으니까 얼마든지 분리할 수 있다’ 생각하는데
주님은 정 없는 사람을 분리를 절대로 안 해요.
그거는 가만 놔둬도 분리하거든요.

이들이 지금 분리하는 것은
상대가 없어서는 안 되고 진짜 유용한데
율법으로 돌아가야만 되는 그 상황 속에서 분리하고 그들과 따로, 그들은 총회에 못 들어오니까
그들을 쫓아내는 겁니다.

이 정신을 갖고 누가, 누가 이 예수님을 맞닥뜨렸냐? 하면
바리새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이에요.
그러면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모압이나 암몬 족속들은 영원히 못 들어온다’ 했으니까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영원히 못 들어오는 겁니다.

그중에 한 무리들이 누군가? 하면 세리와 창기예요.
세리와 창기는 율법서에서도 “이방인과 같이 여기라” 이런 표현이 나오거든요.
더러우니까 그들이 하는 예물은 받지 말라 해요. 창기들의 예물은.

창기와 세리를 이방인같이 여기면서 그들은 천국에 못 들어간다고 생각했어요.
왜? 모압과 암몬과 같으니까. 그러한 자들이 머무는 곳이 종말입니다.
예수님이 등장했을 때 마지막 때거든요.
그 마지막 때 그들은 틀림없다고 생각했어요. 자기들이.

그런데 예수님이 마태복음 9장을 보면 1절 한번 볼까요?
하나님께서 “모압과 암몬은 영원히 못 들어온다” 그러면 말씀대로 지켜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언약의 하나님을 믿는다면서요? 여러분 지켜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지켜야 되죠. 그죠? 지킵니다. 영원히 못 들어와요.

그런데 누구까지 못 들어올까요?
모압과 암몬에게 누구도 귀속이 돼요? 남은 자 유대인까지도 귀속이 돼요.
너희들도 못 들어온다는 거예요.
그게 “이스라엘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라는 내용입니다.

마태복음 9장을 11절만 봅시다.
예수님께서 마태 세리의 집에 들어가서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니까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이렇게 이야기해요.
왜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에스라 느헤미야를 우리가 뭐 제가 설교할 기회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 본문을 꼼꼼하게 읽어보면 이들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를 알아요.
메시아 왕국에 대한 소망이 간절합니다.

근데 예수님은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있느니라”
이런 논리라면 에돔과 모압이 오히려 주님의 구원에 가깝다가 되죠.

그러면 느헤미야가 한 그 일은, 신명기 정신을 따라서 한 그 행위는,
민수기 23장을 갖고 개혁한 그것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소용이 있어요.
그 개혁을 함으로 말미암아 개혁한 너희들이 저들과 똑같은 자들이라는 것을 선언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읽을 때
바벨론이 심판당하고 앗수르가 심판당하고 모압이 심판당하고
에돔이 심판당하는 이런 이야기가 나오니까 유대인들처럼 신나해요.
자기들이 그들이거든요.

왜 짐승의 세계에 사로잡혀 가는가? 하면
짐승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너희들이 짐승이라는 겁니다.
짐승의 특징은 의원을 몰라본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호세아서를 인용해 합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아무리 배워도 답이 안 나와요.
호세아서에는 긍휼을 행하라는 거예요. 가난한 자들에게.
그런데 이 말씀은 누가 성취를 합니까? 예수님이 성취를 해요.

그러면 이 말씀의 성취가 되는 자리가 마태 세리를 부르신 자리가 되는 겁니다.

문제는 세리가 아니고 모압이 아니고 암몬이 아닌 자들은 이것을 인정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 목사님 그러면 죄인이 구원받기 쉽겠네요.’
네. 맞아요.

그런데 그 죄인이 누구와 똑같으냐? 하면요. 바리새인과 똑같아요.
오늘날 교인들을 보면 누가 복음 18장으로 가면
이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가 나오잖아요.
세리가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거든요. 감히 눈도 못 들고.
그러면 그 본문을 읽는 사람들은 모두가 다 바리새인의 교만성을 지적하잖아요.

그런데 그걸 아는 당사자들은 뭐라 하느냐? 하면
‘나 십자가의 피로 의롭게 됐습니다.’ 해요.
이 말은 뭐예요?
‘나는 저들과 다르다. 나는 잘났다. 감사합니다.’ 이 태도를 보이는 겁니다.

말씀이라는 것은 우리가 장악이 안 되고 말씀 속에 인간들은 휘말려요.
오전 설교도 그런 의미입니다.
말씀은 우리가 장악이 안 돼요.
국어 책이나 소설이나 역사는 우리가 장악이 되잖아요. 기억으로.
근데 말씀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분이 십자가 지시는 사건으로 드러났기 때문에
그 사건으로 드러난 그 사건의 내용을 성경으로 말씀을 하시게 되면
모든 성경 말씀은 이 땅의 사건으로 드러나요. 일로 드러나요. 일로.

지식으로 안 줍니다. 지식으로.
지식으로 받아서 기억을 하고자 하는 자들이 바리새인이에요.
오늘날 신학이 다 지식으로 만들어서 올바른 지식을 받아들여서 그걸 누가 믿죠?
‘내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
그게 교리를 가르치는 교회죠. 신천지나 하나님의 교회나 다 똑같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정보를 안 주시잖아요.
분명히 세상 끝날 때까지 너희와 함께한다 했잖아요. 함께.
이 ‘함께한다’는 자체는 ‘같이 다닌다’는 거잖아요. 같이. 사건 속에.

근데 이것조차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면
성령을 주시게 되면 ‘지식으로써 성경 계시를 다 안다’가 되어서
‘알아서 천국 간다’ 생각해요.
알아서 천국 갈 것 같으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 지실 이유가 없습니다.
성령을 주실 이유도 없고 동행할 이유도 없는 거예요.

그러면 이 “죄인에게라야 의원이 쓸데 있다”라는 이 말씀은 누구에게 해당되느냐?라고 하면
주님께서 긍휼히 여길 자로 택한 자들만 해당이 돼요. 택한 자들만.

그들은 누구를 자랑하느냐? 하면 의원을 자랑해요.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
‘우리는 죄인이니까 의사 선생님한테 가서 치료받으면 되죠.’
이런 논리로 말씀을 본단 말이에요. 대부분이 그렇게 봅니다. 여러분 그런 생각 안 해봤어요?

“죄인에게, 환자에게 의원이 쓸데 있다”하니까 ‘그래 맞지. 나는 환자야 병자야.’
그래서 예수님께 가면 어떻게?
피로 깨끗하게 씻음을 받아 (성경에 다 나오거든요.)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게 다 나와요.
그러니까 그 말을 어떻게 받느냐? 하면
지식으로 받아버려요.

그 말씀을 사건으로 받게 되면
그 말씀이 임한 현장의 몸이 성도가 돼요.
그러면 동행을 하잖아요. 주님이.
주님이 의사로서 우리와 동행하면 나는 누구예요? 그러면.
환자라는 겁니다. 환자.

새 언약은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온다’ 하거든요.
‘들어온다’라는 의미가 말씀이 육신이 되셨잖아요.
육신이 되신 분이 우리와 동행을 하게 되면
너는 계속해서 죄인이고
예수님만이 자신의 피로, 피흘림으로, 화목 제물 되심으로 이 사람을 의롭게 했다라는 그 모습을 두고
의인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의인의 모델인 사도 바울이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하면서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라고 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모압 가문이 영원히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는 그 말씀을 보면서
그 말씀을 지키면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갈 줄로 생각했던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천국 백성 만들기 위해서 만드신 것이 아니라

천국의 주인공이신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주되심을 위한 세상임을
주께서 말씀하셨기에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는 자로 죄인으로 드러나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셔서
범사에 감사하는 주의 백성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