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2-05-18 21:35
20220518 수요모임 마 9:9-13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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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2-05-19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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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18 수요모임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말씀 앞으로 인도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을 저희들 가운데 부어 주시사
십자가의 사랑의 깊이를 알아가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 말씀, 마태복음 9장 9절에서 13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마9:9~13)
9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아주 유명한 말씀이죠.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죄사함의 권세가 예수님에게 있음을 증거하신 이후에 이제 마태를 부르시는 장면이 나오죠.
마태를 주님께서 부르셨는데 마태는 어떤 사람인가? 세관입니다.

아마 한국 같은 경우에도 이전에 세관들이 아마 돈벌이를 꽤 많이 한 걸로 알고 있어요.
권력자들이거든요. 권력자들이기 때문에 권력은 항상 돈과 맞물리게 되고
우리들이 뭐 검찰인데 그 재산을 보면 상상을 못할 정도로 많은 돈을 갖고 있잖아요. 판사인데
그런 걸 보면 부모가 원래 부자였을 수도 있는데
권력이 있기 때문에 돈이 굴러 들어온다고 볼 수 있는데

세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여기 올 때만 해도 그런 어떤 뭐랄까요?
사람들이 와서 수금하러 다니죠.
우리 김 집사님은 어릴 때부터 아버님이 일하시는 걸 봤을 때 그런 걸 목격했을 수도 있는데
마태라는 세계, 마태라는 이름은 헬라식 이름이라 이렇게 보시면 되고요. 히브리식 이름은 레위인데
 
(마9:9)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뭐 뭐라고 할까요? 도로변에 초소 같은 것을 지어놓고 지나가는 통행세를 받았는지
어떤 세금을 받았는지 어쨌든 그 세금을 거두는 사람입니다.
로마 지배하에 있기 때문에 로마 법령에 따라서 세금을 거두어서
그 세금을 그쪽 그들에게 이렇게 대신 모아서 내는 그런 역할을 맡은 세관이죠.

이 세관에 대한 설명은 뒷부분에 바리새인들의 그 말에서 다 드러나는데
우리가 이방인들이기 때문에 세리가 무엇이 문제인가?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그런 것들이 나오지 않지만 그 삭개오를 보게 되면 그런 표현들이 나오죠.
토색한 일들이 있다라고 이야기를 하고요.

이 당시의 세리들은 원래 다른 나라에 의해서 지배를 받을 때 가장 악한 사람들은 누구냐라고 하면
지배하는 나라의 백성들이 아니고 관리들이 아니고
지배를 당하는 나라의 그 밑에서 돈벌이 하는 사람들이 더 악하죠.
이건 역사적으로는 모든 곳에서 어느 나라든 증명이 되고 있습니다.
일제 시대 때 일본 사람보다 더 악한 사람이 한국 사람들이었죠. 그 앞제비들, 표현을 하면.
그런 사람들이 이제 다 부자가 된 거잖아요.
그런 어떤 모습을 이 세계가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겁니다.

로마에서 법으로 ‘얼마씩을 이렇게 바쳐라’ 이렇게 명령이 내려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죠.
이 당시에는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북 이스라엘은 이미 날아간 지 오래고요.
물론 다른 지파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마는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받아서 로마 제국에 납부하는 그런 역할을 하는데 돈벌이가 되는 직업입니다.
‘만 원을 내라 만 원을 바쳐라‘ 하면 자기가 거두는 것이 한 2만 원 3만 원 정도 거두겠죠.
원래 중간 관리들한테 뇌물이 다 돌아가야 되거든요. 곧장 올라가는 건 없습니다.
그러려면 자기도 떼먹어야 되고

예수님께서 마태가, 세리 마태가 그러한 인물임을 모르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마태 세리가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지 다 알고 계신 거예요.
특히 이 마태 세리는 그 유대 민족들로부터 가장 미움을 받는 자라 이렇게 보시면 되요.

우리들은 뭐 옛날 이야기지만 남 권사님 일제 시대에 사셨는지 모르겠네요. 아무튼
저희 돌아가신 아버지 세대는 일제시대를 살았고 제 어릴 때만 해도요.
울면 ’순사 온다.‘ 그러면서 이제 겁을 줬는데
일본 순사 온다는 그 말로 그 말을 들으면서 자라는 데
말할 때도 조심하고 아무튼 뭐 별별 뭐 그런 게 있는데

이 세리 마태 온 민족의 적이죠. 미움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세금을 많이 거두었다는 게 문제가 아니고요.
지금 현재 유대 땅은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채워져 있어요.
예수님께서 많은 병을 고치셨을 때 각 지역에서 사람들이 몰려왔죠.
몰려온 이유는 ’메시야가 아니냐‘라는 기대감을 가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세리 마태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이유가
나를 괴롭게 하기 때문에 미워하는 것은 아니에요.
왜 이런 이야기를 왜 해야 되는가? 하면요.
이 바리새인들 같은 경우에는 철저하게 말씀 중심입니다. 구약과 전혀 달라요.
말씀 중심이기 때문에 세리와 죄인들을 미워하고 그들과 거리 두기 하면서 지내는 이유가
자신들에게 해로움을 가하기 때문에 미워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들 같으면 어찌 그럴 수 있습니까? 나를 해롭게 하는데 어떻게 미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런 사람 있어요. 가끔 뉴스에 나오잖아요.
’미워하지 말라고 그러고 미워하는 감정 안 생긴다’ 바리새인들이거든요.
인간들은 백날 뭔가 훌륭한 사람이 되더라도 그들의 끝 모습은요.
가장 마지막 자리의 모습은 성경에 다 나와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서기관들

백날 산속으로 수도원으로 들어가서 산상설교를 다 지킨다고 해봤자
그 끝자락은 바리새인이에요. 예수님 살해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짓을 하는 겁니다.

지금 바리새인이 등장을 하잖아요.
이들이 마태 세리나 그 당시의 죄인들을 미워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율법에 위배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메시야 왕국을 기다리는 자의 모습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서 약속하신 그 하나님 나라, 그 천국은 누가 들어갈 수 있느냐?
1편 15편을 한번 보겠습니다. 시편 15편 다윗의 시.
항상 말씀드립니다마는 이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 유대인들은 성경 말씀이 머릿속에 가득해요.
요즘 우리 장로님이 성경 말씀을 계속 올리는데

그 성경 말씀이 가득 차 있는 자들이 누군인가? 하면 지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유대인들이에요.
그러면 우리는 또 ‘성경 말씀 그렇게 보는 건 바리새인이다.’ 또 이렇게 공격하고 싶은데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가요.
죄인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가요.
죄인의 모습이 세리와 창기로 나타나지만
세리와 창기로 나타나고 이제 그 세리와 창기의 모습이 바리새인과 서기관 사두개인들로 드러나죠.
이런 말씀들이 상당히 어려운데 15편에 보면 다윗이 이렇게 찬양을 합니다.

(시15:1)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주의 장막. 주의 성산. 사실은 이건 성소죠. 에스겔 선지자가 예언한 그 성소
그 성소의 가할 자가 누구냐? 우리들과 지금 구약의 인물들은 다릅니다.
시온산을 중심으로 하나님이 주신 그 거룩한 땅에 거할 자가 누구냐? 거룩한 산은 시온산이죠.
거기에 거할 자가 누구냐? 누굽니까?라고 물으면 여기에 나와요.

(시15:2)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상당히 맞는 말이죠. 이것은 율법에 근거한 말이잖아요.
‘정직하게 행하고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의 진실을 말하며‘
그러면 반대로 정직하게 말하지 않고 맨날 거짓말만 하는 겁니다.
그리고 공의를 일삼지 않고 맨날 편파적인 판정을 해요.
꼭 우리 같이 축구만 하면 ’대한민국 이겨라‘
한국 선수가 있으면 무조건 토트넘 응원, 손흥민 이겨라,
김기대 집사님은 축구 안 보시는 모양인데. 올림픽 하면 대한민국이 편파적 편파적.

그런 자들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진실을 말하지 않고 거짓을 계속해서 말하는 겁니다.
거짓을 말하는 목적이 뭐예요? 상대를 속여서 뭔가 이익을 취하려고 하는 거잖아요.
그런 자들은 성소에 하나님의 성산에 거할 수 있어요? 없어요?
아마 오늘날 예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도 질문을 하면 ’거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나와요.

맞죠?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어때요?
복음을 들은 여러분들은 방금 제가 하나님의 성산에 거할 자가 누구냐?라고 할 때
’공의를 일삼으며 정직하게 행하고 그 마음의 진실을 말하며‘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성산에 거할 수 있습니까?
안 그러면 정직하지 하지 않고 남을 속이고 거짓말하고
그리고 이 불의를 행하는 그런 자들이 하나님의 성산에 거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요. 우리 심권사님이 성경 읽는 게 어렵다고 했는데
성경을 읽어보면 우리가 바리새인이 돼요.
복음을 알아도 성경을 읽어 들어가면 어떻게 읽어요? 말씀대로 믿어야죠. 맞죠?
그 말씀대로 믿었는데 나중에 오늘 본문에 도달하게 되면 예수님 살인자가 돼요.
예수님을 살해하는 당사자가 된다고요.
그걸 알라고 말씀을 읽으라고 하시는 겁니다.

누가 봐도 지금 바리새인들 머릿속에는 이 내용이 담겨 있거든요.
하나님의 성산에 누가 거합니까? 세리 마태가 하나님의 성산에 거할 수 있어요? 없어요?
선지자들이 예언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어요? 없어요? 못 들어가죠.
아니 거기에 손을 들고 하나님의 성산에 거할 자는
’세리 마태와 같은 자입니다‘라고 할 사람 나와보라고 그러세요.
아마 오늘날도, 그런 얘기를 하면 그 사람에 대해서 복음을 모르는 자라 이렇게 규정할 겁니다.
좀 더 볼까요.

(시15:3)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

여기에 이 내용이 나와요. 그 이웃을 훼방한다 경멸한다 비난한다.
조금 더 들어가면 이 레위기에서 ’이웃을 억울하게 하지 말라‘ 그런 내용이 나오거든요.
’이웃을 억울하게 하지 말라.’
율법의 정신이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이잖아요.
그러면 이 마태 세리가 이웃을 사랑합니까? 이웃을 미워합니까? 미워하죠.
이것을 미워하는 마태 세리예요. 그러면 이 시편 15편에 의하면
이런 자는 하나님의 성산에 가할 수가 없습니다.
이웃을 훼방하는 자가 어떻게 성산에 가합니까? 그다음 보세요.

(시15:4)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누가 망령된 자입니까? 신성 모독하는 자들이 누구예요?
예수님만 신성 모독이 아니라 유대인인데 혈통적으로 유대인인데
이름이 레위니까 레위지파일 수도 있는데.
어쨌든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자잖아요.

(시15:4)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해야 되죠.
그러면 지금 바리새인들은 세리 마태를 멸시하는 게 당연하고요.
그들이 천국 가지, 이 멸시를 당하는 마태 세리가 천국 갈 수 있습니까?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면‘
마태 세리가 여호와를 두려워합니까? 아니면 바리새인이 여호와를 두려워합니까?
마태 세리는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죠.
여호와를 두려워한다면, 절대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곳에서 인도함을 받았고
그리고 그들이 멸망당한 이유가 이웃을 긍휼히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당했거든요.
이웃을 압제했거든요.

아모서에 보면 전당 잡은 옷을 취하여서 거기에 드러누워 가지고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라 했는데, 돌려주기는커녕 그 위에 누워가지고 술 마시고 놀고 앉았거든요.
그런 자들을 과연 천국 갈 자격이 있느냐?라고 하면 없죠.

오히려 그들과 달리 어떻게 해야 됩니까?
여호와를 두려워해야 되고 그다음 보면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라 하잖아요.
그래서 세리 마태 같은 자를 존대할 이유가 없는 거예요.

(시15:4하)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며
(시15:5) 변리로 대금치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 아니하는 자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이다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 아니하는 자니’
이걸 세리에게 적용시키면 세금을 좀 더 많이 내면 덜 괴롭히고
세리가 자기 혼자만 그 사람과 상대합니까? 뒤에 권력이 있잖아요. 무력이 있잖아요.
그런 자가 누구냐? 할 때는 바로 세리 마태인 겁니다.

이 말씀을 우리가 바탕에 두고 다시 마태복음 9장으로 들어가서 예수님께서 마태 세리를 불렀어요.
여기에서 또 특이한 것은 이겁니다. 그것을 약간 저장해 주시고요.
특이한 것은 부르시니

(마9:9하) ~나를 쫓으라 하시니 일어나 쫓았어요

여러분 많이 들어봤죠. 우리가 쫓아갈 때 군말하지 말고 쫓아야 됩니다.
그렇게 쫓아 자는 뭐라고 하는가? 하면요.
나에게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이렇게 이야기해요.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쫓으라했을 때 쫓았을 때는 그 쫓음 속에서는 무엇이 다 담겨 나오는가? 하면
예수님을 살해하는 그 죄까지 다 담겨 있는 겁니다.

지금 여기에서 주인공은 마태 세례가 아니에요.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증거하기 위한 마태 세례입니다.
사실은 이 마태 세리도 나중에는 누구의 자리에 똑같이 들어가게 되는가 하면요.
지금 예수님을 향해서 비난하는 이 바리새인의 자리에 똑같이 들어갑니다.
마지막에 뭘 내세웁니까? 제자들이
‘우리가 주를 위해 모든 것을 버렸으니까 우리가 무엇을 얻겠습니까?’
모든 것을 버렸다는 것은 자기들이 의롭다는 거고요.
의로우니까 거기에 합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다라는 거예요.
그 논리가 바로 바리새인의 논리거든요.

어쨌든 지금 예수님께서 마태를 불러서 쫓으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쫓았어요.
쫓았는데 독특한 것은 어디로 갑니까? 마태의 집으로 가죠.
예수님께서 매우 의도적으로 행하신 행동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군대 귀신을 떠올리면서 생각하면 말씀이 훨씬 더 이해하기 쉬울 겁니다.
군대 귀신의 모습이 어떠한 모습으로 계속해서 바뀌어지는가?
그 군대 귀신의 모습이 어떠한 모습으로 드러나면서
그의 정체가 이렇게 계속해서 드러나는가를 볼 수 있는 겁니다.

(마9:10하)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같이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과거나 지금이나 친밀한 거죠.
밥맛 떨어지는 사람하고 밥을 먹을 이유는 없는 거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모임에 있으면 이 사람들이 나에게 이롭고 나를 기쁘게 하고
평화롭게 하면 거기에 머무르고 싶잖아요.
그런데 나를 불편하게 하면 어때요? 나가고 싶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게 인간의 본심이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를 부르시고 그 집에 들어가니까
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님과 함께 앉았더니 같이 밥을 먹는 거예요.
우리들이야 익숙한 내용이지만, 이게 바리새인들의 입장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만일에 예수라는 그 인물에 대해서 처음부터 넌 아니야라고 했으면 상종하지 않죠.

앞서 각 지역에서 예수님의 뭘 보기 위해서 모여왔고 산상 설교를 들었잖아요.
그 파급 효과가 계속 있는 겁니다.
순식간에 저녁으로 소문이 퍼졌을 거고, 그에 대한 기대감이 다 있는 거예요.
그런 기대감에서 지금 예수님을 관찰하는 겁니다.
관찰해서 저 예수가 내가 말씀에 근거한 그 기준에 합당한지 하지 않는지를 판단하는 거예요.

마태복음 7장에서
‘비판을 받지 아니하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마7: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마7:2)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그 비판이 크리노 심판이었거든요. 판단이에요. 판단
판단자는 심판주는 십자가 지신 예수님뿐이에요.
그 어떤 사람도 판단할 수 없어요.
성도는 판단자가 아니고 증인이에요.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에요. 증인과 판단자는 다른 겁니다.

지금 여기에서 마태복음 7장에서 등장하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판단하는 자의
모습이 앞서서도 나타났지만 여기서도 똑같이 계속해서 그 판단하는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그 판단하는 기준이 뭐냐?라고 할 때는 말씀이에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의 어떤 선입견이라든가 경험을 갖고 판단하는 게 아니에요.
사실은 이런 모습이 계속해서 반복되거든요.
복음이 전파되면 마찬가지예요.

도저히 납득이 안 되고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누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볼 때. 그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왜 제자들에게 말했을까? 예수님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잖아요.
그래서 말을 할 때 사람들이 추종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윗대가리 말을 하지 않고 누구한테 말합니까?
그 옆에 있는 측근에게 이야기를 해서 말이 들어가도록 그렇게 하는 겁니다.

(마9:11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이 질문이 왜 나왔느냐?라고 하면 예수님께서 천국 이야기를 했잖아요. 산상설교에서
그 천국은 누가 들어가느냐?라고 할 때는
시편 15편에 의하면 정직하고 진실을 말하는 자 공의롭게 행하는 자들이 천국에 들어가잖아요.
이웃을 훼방하지 않는 이웃을 경멸하지 않고 이웃을 등쳐먹지 않는 그들이 천국에 들어가거든요.

시편 101편 5절에 보면
자기 이웃을 은근히 헐뜯는 자는 하나님께서 진멸한다고 했어요.
(시105:5) 자기의 이웃을 은근히 헐뜯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
정말 무서운 말씀들이죠. 이웃을 은근히 뒤에서 헐뜯는 자들
물론 여기에 이웃은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할례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고요.
오늘날로 말하면 성도들이죠.

’이웃을 은근히 헐뜬는 자는 직멸하리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으니까 바리새인들의 입장에서는
이 세리 마태의 모습은 이웃을 헐뜯는 정도가 아니라 이웃을 완전히 못살게 압제하는 자죠.
마치 뭐 아모스나 이런 데 나오는 그 당시에 제사장이나 선지자나 그런 자들이
자기 백성들을 압제하듯이 지도자들이 압제하듯이
그런 모습을 지금 보이는 그들과 함께 잡수신다라는 거예요.

천국을 소개하면 천국에 들어갈 합당한 사람과 놀아야죠. 이건 기본 아닙니까?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예수님이 천국을 소개했잖아요.
그러면 천국에 들어갈 자를 이렇게 만나려면 거기에 합당한 사람을 만나야 되는데
그 천국에 들어갈 조건은 구약에 다 나와 있거든요.

우리들이야 죄인이 들어가지 않습니까? 그렇게 생각하지만요.
그 죄인이 과연 죄인이냐를 먼저 따져봐야 돼요.
답을 안다고 천국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으면요. 다 답을 부르죠.
그럴 것 같으면 이런 얘기 다 빼버리고 그냥
‘죄인이 천국 갑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왔습니다.’ 이렇게 해서 끝내버리면 되죠.

왜 이 복잡한 이야기를 왜 합니까?
이러한 말씀 속에 우리의 악마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라는 겁니다.
이들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말씀에 근거했습니다. 율법에 근거한 거예요.
이들이 틀린 것이 하나도 없다라는 것을 명심을 하셔야 돼요.

이 성도들이 교회 다니는 사람이 문제가 뭔가? 하면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것은 다 틀렸어 외식하는 거야’ 이렇게 먼저 들어가요
자기가 예수님도 아니면서. 그래놓고 살아가는 모습 보면 바리새인으로 살거든요.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이 말 속에는 ’그러니 너희 선생은 메시야가 아니다. 랍비도 아니고 그 선지자도 아니고‘
만일에 그 선지자다라면 누구랑 놀아야 되죠?
죄인과 놀아야 됩니까? 아니면 어인과 놀아야 됩니까?
구약의 선지자들과 대치하는 자들이 죄인들이죠.
그 죄인들과 선지자들이 같이 놉니까? 안 그러면 선지자들과 죄인들이 갈랐습니까?

엘리야 선지자가 거짓 선지자들하고 같이 먹고 마시고 놉니까?
안 그러면 그들을 죽여버립니까? 죽여버리잖아요. 그죠?
그렇지 않습니까?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자들이
말이야 바알과 아세라이지만 거짓 선지자들이잖아요.

그 뒤에 또 미가야 선지자와 붙는 여호와를 믿는, ’여호와의 영이 임했다‘라는
그들은 선지자들과 함께 합니까? 함께하지 않습니까? 절대 함께할 수 없잖아요.

바리새인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이런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먹는다는 자체가 구약 성경과 전혀 맞지 않는다라는 거예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봅시다. 산상설교에 의하면 누가 천국에 들어갑니까?
산상 설교에 의하면 천국은 누가 들어갈 수 있어요?
거꾸로 해석해야 된다 했죠.
천국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피로 용서하신 자만 들어가거든요.
그 용서받은 자는 반드시 죄인이어야 되고

문제는 지금 이들이 산상설교를 들었다라고 쳤을 때 그 들었던 내용과
지금 이 말씀과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과 연결을 시킬 때 연결 고리가 안 맞는 거예요.
만일에 산상설교를 그렇게 들었으면 예수님이 이렇게 하시는 것이 당연하잖아요. 맞죠?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고 사상 설교가 그렇게 해석되어지면
이렇게 행동하시는 일이 당연한 거거든요.
그러면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에 대해서 시비를 걸 이유는 없는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그렇게 듣지 않았죠.
모세와 같은 권세를 가진 그런 어떤 사람과 동등하게 예수님을 생각했던 겁니다.
그런데 기대가 컸는지 실망도 더 커버렸죠.
이러한 배후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다음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는 거예요.

(마9: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과연 이 말씀이 구약과 일치합니까? 일치하지 않습니까?
이 과정들을 보게 되면 주님께서는 지금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를 쓸 데 있다.
이거는 맞는 말이죠. 그죠? 건강하다면 병원이 필요 없잖아요. 의사도 필요 없고
근데 예수님께서 느닷없이 이 말씀을 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은 주님의 뜻은 어디에 있느냐?라는 거죠.
병자 뒤에 보면 그 병자를 달리 펴는 죄인입니다. ’주님은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는 거예요.
이것은 구약에서도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불렀다라는 거죠.
그 다음 말씀을 보게 되면 이렇게 나옵니다.

(마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이게 되게 어려운 말씀이에요. 많이 들었지만
이 말씀이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호세아 6장 6절에 나옵니다.한번 볼까요. 4절부터 보면

(호6:4)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호6:5)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저희를 치고 내 입의 말로 저희를 죽였노니
            내 심판은 발하는 빛과 같으니라
(호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어요.
여기에 보면 나는 인내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저녁에 레위기의 강의를 듣고 계시잖아요.
레위기에서 제사를 드리라고 해요? 제사를 원치 않는다고 합니까?
이 말씀이 되게 어렵잖아요. 이게 하나님께서 한 입으로 두 말씀을 하셨거든요.
분명히 제사를 드리면 죄가 용서된다 했거든요.

그런데 이 호세아에서 와서는 ’나는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라고 하시면서
’인애를 원한다 긍휼을 원한다’라고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왜 이 말씀을 하실까요? 그 뒷부분을 한번 볼게요.

(호6:7)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내게 패역을 행하였느니라
(호6:8) 길르앗은 행악자의 고을이라 피 발자취가 편만하도다
(호6:9) 강도 떼가 사람을 기다림 같이 제사장의 무리가 세겜 길에서 살인하니
          저희가 사악을 행하였느니라

‘제사장의 무리가 세겜 길에서 살인한다‘라는 거예요.
제사장들은 제사를 지내죠. 조금 고민을 해야 됩니다.
제사장들이 제사를 지내면 자기는 어떤 자가 되죠? 의인이 되죠. 죄가 없는 자가 되잖아요.
죄 용서 받은 자가 되잖아요. 죄 용서 받은 자가 되니까
그 다음은 어떤 짓을 하는가? 하면 내가 하는 모든 일은 의롭다는 겁니다.

지금 원래 제사법의 취지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어요?
내가 하는 모든 일은 죄라는 거죠.
그런데 이 해석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면
제사를 드렸으니까 죄가 용서되었으니까 나는 의롭다라는 해석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은 누구 편이죠? 내 편이죠.
하나님은 나의 편이 되니까 내가 하는 모든 일은 누구의 뜻이 되죠? 하나님의 뜻이 되는 겁니다.
그게 북이스라엘에 있는 제사장들이 하는 짓거리에요. 이해하셨습니까?

그러면 그들 눈에 자신들의 판단을 받는
자신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자들은 모두가 다 어떤 자들이죠? 불의한 자들이죠.
제사법 자체가 죄가 용서된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이 과정 속으로 들어오면 나중에는 하나님은 번제나 속죄제를 원치 않는다고 하시죠.
히브리서에 가게 되면. 처음부터 원하지 않았다는 것도 맞아요.

맞는데 왜 원하지 않았는가? 그 내용을 알아야 돼요.
그 내용이 뭐냐? 할 때는 제사법을 그들에게 딱 주니까
그들이 그 제사법을 이용해서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자기 하나님의 백성들을 심판하고 살해하고 죽이고 등쳐먹더라 얘기예요.
그래서 지금 호세아 6장 6절에서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라고 하시는 거예요.

우리는 이런 말씀을 ’나는 처음부터 인애를 원했지 네 제사 안 받겠다. 원하지 않는다.‘
이렇게 바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바로 들어가 버리면 죄가 안 나오죠.
제사의 취지는 하나님의 긍휼이 담겨 있는 것이 제사의 취지입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덮어버리는 게 제사거든요.

그런데 인간은 그런 식으로 해석을 하지 않죠.
제사 드렸으니까 죄가 용서되었고 용서받은 내가 하는 모든 행위는 의롭다는 겁니다.
우리들은 또 그것이 율법과 위배되는데 그건 그다음 문제예요.
지금 이 구약에서는 그러면 바리새인들은 이 무리들을 어떻게 보느냐?라고 할 때는
그들은 율법대로 안 했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 말이 맞아요? 틀려요? 맞죠. 맞는데 그들이 지금 이 내용을 알아요? 몰라요? 알죠.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다시 돌아가서 마태복음 9장 13절

(마9:13상)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이걸 배우라고 한다고 배우실 수 있습니까?
로마서에 의하면 모든 사람을 죄 아래에 가두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게 하심이라.
물론 자기 백성이면 긍휼을 베푸시죠.
그렇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심판주가 누군가를 드러내시겠다는 거거든요.

그러면 그 심판주가 이 땅에 오시려면
그분이 이 땅에서 드러나려면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이 죄인이 돼야 되죠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워라‘
말씀을 한다고 알아듣겠습니까? 그럼 여러분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요.
사람들은 이걸 또 이렇게 얘기하죠.
하나님은 제사를 원치 않습니다. 긍휼을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웃을 긍휼히 여겨야 되고 죄인을 긍휼히 여겨야 되고‘
이런 이야기를 하고 앉았는데
그게 뭔가 하면, 자기 자신이 긍휼히 여길 수 있는 자격 요건이 주어졌다라는 의미거든요.

어떤 인간도요 긍휼히 이길 자격 자격 조건이 없어요.
물론 산상설교에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 하죠.
어느 누가 긍휼히 여깁니까?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고 생각하지 않고요.
어떤 생각을 갖는가? 하면
‘긍휼히 여겼으니까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하다 의롭다 당당하다’ 이렇게 인식을 하죠.

인간들은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잖아요.
‘말씀대로 긍휼히 여겼으니까 자기를 의롭다고 여기지
어느 누가 긍휼히 여긴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라고 이야기하겠습니까?

이웃을 불쌍히 여긴 사람들의 말을 한번 들어보세요.
’마땅히 해야 될 일 했다.‘ 여기까지는 가능해요. 성경 구절을 끄집어 와가지고
’마땅히 해야 될 일 했다‘는 말은 ’저는 죄밖에 안 지었습니다.‘이 얘기거든요.
그 말은 안 하거든요.
’도리를 다했기 때문에 나는 지옥과도 마땅합니다.‘ 이런 태도가 나와야 되는데,
그런 태도가 인간에게서는 안 나오죠.
말씀은 인간이 지키려고 들어가면, 결국은 예수님을 살해합니다. 복음을 배척해버려요.
그러면서 이 성경의 목적, 이스라엘을 만드신 목적 그것을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는데

(마9:13)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물론 바리새인들은 ’네가 뭔데 네가 누군데‘ 이렇게 따지겠지만
성령 받은 마태가 이 내용을 기록하고 있잖아요.
그러면 성령 받은 마태가 주님이 세리인 자신을 부르신 이유가 뭐냐?
바로 이 말씀 때문에 자기를 불렀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주님임을 증거하기 위해서 죄인인 자신을 불렀는데
그게 죄인 아니에요. 세리가 죄인, 그 죄인이 아니고

인간들이 보는 그 죄인에서 어느 죄인으로 갑니까?
예수님을 살해한 죄인으로 넘어가야 돼요.
창기라고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세리라고 구원받는 것도 아닙니다.
만일에 세리이기 때문에 구원받고 창기이기 때문에 구원받고
나 죄인이라고 인정하기 때문에 구원받는다고 하면 그 사고 방식은 바리새인과 똑같아요.
자격 요건이 갖추어졌다라는 거거든요.
예수님의 주되심, 죄인을 부르러 오신 그분을 증거하려면 반드시 죄인이 돼야 됩니다.
독특해요. 이 구조가
죄인이 아닌 이상은 예수님, 죄인을 부르러 오신 그분을 증거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먹었던 세리와 죄인들이 다 구원받았다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그들은 엑스트라입니다. 마태는 구원을 받았죠.
그들을 통하여서 예수님이 죄인을 부르러 오신 분임을 증거 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복음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우리를 구원했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라 이야기하거든요.
의인이 되고 싶어서 안달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죠.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되게 좋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잘 들어보세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했죠.
그러면 만일에 ’예수 믿고 나 십자가 복음 알고 의인이 되었습니다‘라고 하면
이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너는 아니오‘가 되죠.
제가 여러분을 겁주려고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니고
말씀의 위력이라는 것은 이 말씀의 능력 속에 성도가 담기는 거거든요.
이 말씀 속으로 들어가 버리면 성도는 항상 이 말씀 속에서
이 말씀이 작동하는 능력 속에서 어떤 자가 되느냐?라고 할 때는 죄인이 되는 겁니다.
어떤 죄인이 되느냐? 할 때는 의인이라고 주장하는 죄인이 되죠.
말장난 같이 들릴지 모르지만, 문제는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특징은 무엇인가? 하면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고 말을 하면서 그걸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를 어느 자리에 두느냐?라고 할 때는 의인의 자리에 둔다는 겁니다.
의인의 자리에 두는 순간 그에게는 십자가가 필요합니까? 필요하지 않습니까?
죄인을 부르신 주님이 필요합니까? 필요하지 않습니까? 필요 없죠.

의인의 자리에 두면 그다음은 뭐가 필요합니까? 부자 되는 거.
오늘 우리 정광훈 목사 얘기를 이렇게 글로 올리셨는데
‘여러분 복 받으려고 예수 믿으면 안 되고 예수 믿으면 복이 다 옵니다.’
그 복 받으려고 예수 믿은 거거든요. 죄인이라 인정하고 그게 목적이에요.
그러니 이미 예수 믿었으니까 의인이 되었으니까 의인에게는 축복이 가득 부어진다.

‘하나님이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할 뿐만 아니라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
CCC 전도할 때 요한복음 10장 10절입니까 그걸 언급하면서
(요10:10하)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사람들을 아주 기분 좋게 그렇게 띄워주잖아요.
다락방도 마찬가지고 순복음도 마찬가지고요 신천지도 뭐 온갖 망상을 다 버리거든요.
물론 그 윗대가리는 돈 빼기 바쁘고요. 권력의 자리를 차지하기 바쁘고
그 얼마나 웃깁니까? 천국 이야기 해놓고 자기가 왕궁 지어놓고 사는 거 보면 그 코미디 아니에요.
이전에 문선명도 그랬고 대부분 그 교주들이 그런 짓을 하거든요.
예수님은 돌아가셨는데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게 돌아가시고 머리 둘 곳 없다고 했는데
이름은 신천지 예수교 이렇게 올려놓고 하는 말이 그런 모습을 보이는 거죠.

예수님께서 이 죄인을 부르러 오셨거든요.
죄인을 부르러 왔다니까 ‘나는 죄인입니다. 그럼 저를 불러주세요.’ 그런다고 부름을 받을 수 없어요.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메시야예요.
천국은 어떤 천국이냐?라고 할 때는 십자가 안에서 만들어지는 천국이거든요.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는 천국은 구약을 연구해 보니까 말씀을 보니까
말씀대로 살아가는, 마치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3장에서
‘율법의 의로는 흠이없게 살아갈 때 주님이 메시야를 보내서
모세가 예언한 그 선지자를 보내서 우리를 에덴동산 같은 그 약속의 땅에 거하게 할 것이다.’
그런 기대감을 그들이 갖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메시야로 생각할 때
‘나는 너희들이 생각하는 메시야와는 전혀 다른 메시야’라는 이야기죠
그러니 지금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예수님은 주시지 않고
그들과 평행을 달릴 수밖에 없고 그들과 대척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는 순간 바리새인들은 자기 갈 길 가고 예수님은 자기 갈 길 가겠죠.
안 맞잖아요. 예수님이 죄인을 부르러 왔다니까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가 죄인을 부르는 메시야입니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메시야입니까? 아니죠.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는 다윗왕과 같은 메시야에요.
이 땅에서 행복하고 건강하고 축복을 가득 받으면서 살고
죽어서는 천국에서 영원히 희희낙락하면서
우리 가족도 만나고 행복하게 사는 그러한 천국을 그들은 꿈꾸고 있는 겁니다.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라고 말씀하시는 순간
그들과 예수님은 결별할 수 밖에 없는 거예요.

다시 조금 더 이 부분을 말씀드리면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고 할 때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오해를 하는 게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말씀이 그냥 내가 예수 믿을 때만 해당되는 말씀이라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러면 이 말씀을 예수 믿고 난 뒤에는 삭제해야 돼요. 그래서 지우개로 다 지워버려야 돼요.

이것은 성도에게도 똑같은 말씀이에요.
사실은 이 바리새인의 태도가 성도에게도 똑같이 나오는 겁니다.
어떻게 나오는가 하면, 그 야고보서에 보면 복음을 아는 자들의 모임이잖아요.
그런데 부자가 올 때는 환영을 해요. 근데 가난한 자가 올 때는 환영하지 않아요.
그거 왜 그럴까요? 우리는 그걸 보고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이야기하는데

지금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게 아니에요.
주께서 그런 환경을 조성하셔서 교회라는 것은 십자가만 증거되고
죄인을 부르러 오신 그분만이 증거되어야 되는 곳이기 때문에 그런 여건을 만들어내시는 겁니다.
거기에서는 누가 바리새인이 됩니까? 나는 복음을 아니까
복음을 아니까 그다음 어느 자리로 올라가요? 판단자의 자리에 올라가죠.
판단자의 자리에 올라가니까 판단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야고보서는 외모로 사람을 판단을 하죠.
우리들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복음을 이렇게 안다고 하지만 외모로 다 판단을 하잖아요.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했는데 갑자기 복음 아는 이 모임이 의인들의 모임으로 바뀌어버리는 거예요.
죄인은 도무지 한 발짝도 못 되게 해버리는 거예요.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이런 말씀들을 너무나 가볍게 여기는 거예요.
나름대로 신학이 형성되면 그때부터는 이 바리새인들처럼
그 신학을 구성하여서 거기에 맞지 않으면 언제든지 쳐낼 준비가 돼 있는 게 우리들의 모습이에요.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면 죄인을 환영하면 되죠.
그 환영하는 방식이 십자가에 피 복음을 전해야 돼요.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다 죄인입니다. ’아멘’하면 되잖아요. 뭐가 더 필요합니까?

이 바리새인의 문제는 말씀으로 무장했다는 거예요.
그게 왜 문제가 됩니까? 그게 선악 구조이기 때문이에요.
이 모습을 우리가 고스란히 담고 있어요.
우리도 복음을 듣고 말씀을 제대로 배우고 듣게 되면, 무장해 버립니다. 자동이예요. 자동
그것도 얼마나 웃기는가 하면, 지금은 AI가 발전해가지고 나중에는 이게 칩을 머릿속에 넣어버리면
그 십자가 복음에 대한 정리를 완벽하게 정리해서 말할 때마다
이제 되내울 수 있는 그런 시대가 곧 도래할것인데
주님은 그런 거에 안 속죠. 주님은 말씀의 능력으로 죄인을 만드시는 겁니다.

그래서 너는 나를 여기에 보면 ‘나를 쫓으라’ 이 말씀 속으로 세리 마태가 휘말려버리죠.
휘말려보니까 그가 어떤 자로 드러납니까?
예수님을 죽이는 자로 드러나면서 죄인으로 드러나면서
주님이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그 내용을 증거하는 증인이 되는 겁니다.

아, 그럼 목사님 성령 받은 이후에는 그렇지 않잖아요?
성령 받은 이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이 성령 받기 전에 죄인 중에 괴수라 합니까?
성령 받은 후에 죄인 중에 괴수라 합니까? 성령 받은 후에 죄인 중에 괴수라 하는 거예요.
우리가 증거할 분은 죄인을 부르러 오신 십자가 지신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우리 성도들은 날마다 죄인으로 드러나야 됩니다.
물론 주님께서 그렇게 주세요.
그렇게 인도함을 받는 자들은 십자가의 피만을 자랑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으로 무장해 보니 선악의 지식으로 가득 찼고
십자가의 피로 구원하러 오신 주님은 보이지 않고
자신의 기준에 의해서 자신의 의로움을 따라 예수님을 판단하여서
예수님을 제거하는 바리새인을 보았습니다.
우리의 모습이 그러함을 알게 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우리들을 죄인으로 만드셔서
십자가의 피 능력만을 돋보이게 하시는 주님의 능력 안에 거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하루하루를 말씀의 능력 안에 거하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