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3-12-08 23:49
20231208 신명기 강해 10강 신 2:16 진멸당한 여호와의 군대와 이스라엘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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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3-12-09 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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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08 신명기 강해 10강 신 2:16 진멸당한 여호와의 군대와 이스라엘

하나님 말씀, 신명기 2장 16절 한 절만 읽겠습니다.

(신2:16)
“모든 군인이 사망하여 백성 중에서 진멸된 후에”

앞서 15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손으로 그들을 치사 진 중에서 멸하신 고로 필경은 다 멸절되었느니라”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친히 자신의 손으로 이들을 멸절시키셔야 하는가? 입니다.
그냥 그들을 이렇게 깨우쳐서 데리고 들어가시면 되지 않는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고요.
또 하나는 그들은 그들이고, 멸절된 자들은 멸절된 자들이고,
그 후손들은 그들과 다르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예수님이 자신의 피로 만드신 천국에는 죽은 자만 갈 수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장사지낸 바 되지 않는 자들은, 매장되지 않은 자들은 천국의 들어가지 못합니다.

여호와께서 친히 손으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군대를 진멸시켰다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미리 결론을 말씀드리니까 흥미를 잃으셨나요?
창세기 32장을 보면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나기 전에 홀로 얍복 강가에 남았었는데 24절입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말이 좋아 씨름이지 싸움입니다. 싸움인데.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
얼마든지 야곱을 이길 수 있는 분이죠.
나중에 보면 하나님의 천사 임을 알 수 있고요.
이 하나님의 천사는 32장 12절에는 하나님의 군대에 속한 천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힘이 없어서 야곱에게 진 것이 아니에요.
야곱이 지기는 싫어하는 겁니다.
왜 지기 싫어할까요? 그게 선악과를 먹어서 그래요.
자신이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그 마음이 야곱 속에 그대로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어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자신이 싸움에서 지면 결코 안 된다라는 겁니다.
야곱이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싸움이었어요.
이 엄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싸움을 했죠.
발꿈치를 잡고 나왔잖아요.
그 이후에도 이 장자권을 받기 위해서 나름대로 싸움을 한 겁니다.
그리고 삼촌 라반의 집에 가서도 싸움을 한 거예요.

제가 왜 싸움이라 이렇게 말씀드리느냐? 라고 하면요.
이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하여서 삼촌 라반의 집으로 갈 때
벧엘에서 하나님의 천사들이 사닥다리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그것을 본 이후에
그가 서원을 합니다. (창세기 28장) 18절에 보면

“야곱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본 이름은 루스더라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십분의 일이 뜬금없이 나온 게 아니에요.

창세기 14장을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서 아브라함과 함께하는 이 동맹군과
집에서 길리운 삼백 십 팔인을 거느리고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죠.
돌아올 때 이 지극히 큰 하나님의 대제사장 살렘왕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줍니다.
십분의 일이라는 것은 전쟁에서 승리했다라는 거죠. 완료성입니다. 완료성인데.

이 야곱이 할아버지 때죠.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한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겁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그 과정은 야곱의 입장에서는 전쟁이라 그럽니다. 전쟁.
이 세상은 나와 나 아닌 사람과의 투쟁이라, 그거 성경적이에요.
나와 나 아닌 사람, 나와 나 아닌 사람이 최종적으로 누구냐? 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입니다.

자신이 주가 되기 위해서 싸움을 하는 겁니다.
야곱은 이 축복을 얻기 위해서 싸움길에 나선 거예요.
그래서 누구에게도 질 수 없는 겁니다.
지고는 못 배기는 사람들 있잖아요.
이 야곱이 그러해요.

왜 그러냐? 하면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축복을 받았기 때문이예요.
축복은 받았는데 소유한 게 없잖아요.
그러면 그것을 싸워서 이겨야 되는 겁니다.
그것이 삼촌 라반을 속이는 방식이고 형을 속이는 방식이었던 거예요.

이 많은 재물을 이끌고 돌아오는 도중에 창세기 32장 1, 2절을 보면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들 곧 하나님의 군대를 만납니다.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마하나임 유명하죠. 마하나임의 뜻은요. 두 진영, 두 군대입니다.
진영 군인들의 무리가 두 진영이라는 거예요.

목사들은 여기를 보면서 하나님께서 야곱을 지금까지 보호하셨듯이 앞으로도 보호하실 것이라.
에서를 만날 것인데 보호할 것이라 이렇게 해석을 하는데,
보호를 하면 하나님의 천사가 야곱과 싸울 일이 있습니까?

야곱은 계속해서 오해를 하는 겁니다.
마하나임이라 이렇게 이름을 지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두 진영 이 군대가 나를 지킬 것이라 생각을 한 거예요.
왜 하필 이 하나님의 군대의 두 진영이 나타났느냐?
그것이 이제 언제 밝혀지는가? 하면 방금 우리가 읽어본 32장 26절 이하에서 나오는 거죠.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야곱이 많은 재물을 얻었잖아요.
그러면 받을 만큼 축복을 다 받았는데 이 싸움을 한 이후에 이겼어요.

호세아 12장 4절을 보면 “이기고 울며 간구하였다” 이렇게 나오거든요.
상대가 누군지 눈치를 챈 겁니다. 그래서 이건 축복이 아니라는 거예요.
축복이 아닌 축복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않겠다라는 거예요.

아니 이 이삭 아버지로부터 유일한 축복을 다 받았는데
무슨 축복을 또 원하고 있느냐? 이 얘기예요.
본인이 오해를 한 겁니다.

어떤 오해를 했느냐?
앞서 32장 1, 2절에서 마하나임이라는 하나님의 군대를 두 군대를 만났잖아요.
군대의 진영이 두 개입니다.
왜 두 개냐라는 거냐?
이 군대는 누구 누구를 칩니까? 에서도 치고 야곱도 치는 거예요.

이걸 좀 소급 적용하면 삼촌 라반도 치는 과정이었고 야곱도 치는 과정이었다라는 겁니다.
지금까지 야곱이 걸어온 그 과정들을 보게 되면
하나님의 약속은 그런 식으로 이루어져요.
약속이 있으니까 나는 약속을 받았어. 축복을 받았어.
그러면 그 축복을 챙기면 되는 게 아니죠.
마치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라고 할 때 그걸 챙기는 것은 축복받은 게 아니에요.
챙겼는데 사건이 일어나야 돼요.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죠.
그러면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괴로워 이겼음이니라”
여기에 대한 해석이 분분한데요.
하나님과도 이겼어요.
사람과도 이겼죠. 에서와도 이겼고 삼촌 라반과도 이겼어요.
이 내용을 품고 있어야 돼요.
그 내용이 광야길입니다.

그 품고 있는 이 야곱이 축복을 받게 되니까
야곱의 이름이 부정당하고 이스라엘로 바뀌는 겁니다.
이름이 독특하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긍정적으로만 해석해버리면 문제가 발생해요.
야곱 안에 이스라엘이라는 이 의미를 담아야 되고 이 의미를 담은 자가 한대 얻어터진 거예요.
죽었다라는 겁니다.
그 죽음을 담고 있는 이스라엘이 이 잡신들과도 싸우고
그 잡신들을 믿는 이 가나안 땅에 있는 자들과 싸워서 이긴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뒤에 보면 이름을 묻죠.
이름을 묻는데 30절에 보면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멋진 말이죠.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존되었다”
생명이 보존되는 게 목적이 아니에요.

그 이전의 생명과 이후의 생명 달라진 게 있죠.
그 이전의 생명은 야곱의 속성,
즉 하나님과 이 사람과 싸워서 이기는 그 속성이 드러났는데, 이러한 자는 죽어야 돼요.
죽고 다시 이스라엘로 살아난 겁니다.

생명의 보존이 목적이 아닙니다.
생명의 보존이 목적이 되면 야곱을 위한 축복이 되잖아요.
그런데 이후에 펼쳐지는 사건들을 보면 이스라엘을 위한 축복인가요? 아니죠.
언약을 위한 하나님의 축복이 착착 진행되어 그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과 대면하였으나 내 생명이 보존되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출을 하신 이후에 광야 길을 통하여서
그들을 불순종 가운데 두셔서 진멸시키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이라고 이미 이름이 지어졌다 할지라도
야곱이 이스라엘 되는 과정이 담기지 않으면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그곳의 전쟁은 반드시 야곱이 이스라엘 된 자만 차지할 수 있는 땅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 전쟁의 방식이 그 싸움의 방식이에요.
오히려 자신의 힘으로 얻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져 주셨잖아요.
하나님의 본체 신데 종의 형체를 가져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겁니다.
그 내용을 이들이 담아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반드시 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손에 진멸당해야 하는 겁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앞 세대와, 부모 세대와 광야 세대와 그다음 출애굽 세대를 나누는 것 같지만,
나누는 게 아니에요.
나눠버리면 광야 생활 자체가 헛것이 되잖아요.
그 광야 생활을 그들 속에 그대로 집어넣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여호와의 손으로 그들을 멸절하셨다.
군인이 사망하였다.
이 군인이 도대체 40년 동안 누구와 싸운 겁니까? 여호와 하나님과 싸웠죠.
마치 야곱이 축복을 받기 위해서 에고와 싸우고 아버지와 싸우고 속였어요.
삼촌 라반과 싸우고
그 모든 싸움이 누구와의 싸움이었느냐? 여호와 하나님과의 싸움이었던 거예요.
저쪽은 또 따로 칩니다. 두 진영이기 때문에.
자기를 치는 과정이었다라고 생각을 못하는 겁니다
.
하나님께서 먼저 그들을 멸절시키시고 야곱이 이스라엘에 되었듯이
이 한 나라, 이 아들을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만드는 그 과정 속으로 집어넣으셔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너의 싸움이 아니었다라는 것을 분명히 하시는 겁니다.

성도를 십자가의 피로 죄를 용서하고 구원만 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주님과 함께 죽여버립니다.
왜 죽이시느냐? 왜 매장시켜버리느냐?
그리고 왜 성도 안에 주님이 친히 사시느냐?
내가 아니요.
왜 그렇게 하시느냐? 그 이유는 십자가 지신 주님이 다 이루었기 때문에 그래요.
그걸 증거하기 위해서 증인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예수님만 죽으시고 나는 그 죽음의 희생을 챙기면 된다.’
이런 논리는 성경에 없습니다. 그게 오늘날 기독교잖아요.
‘인간 구원을 위한 십자가, 인간 구원을 위한 예수님’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성탄절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
예수님은 심판하러 왔어요.
그 심판하러 오신 분이 먼저 심판을 당하신 겁니다.
그 심판 속에 참여한 자가 심판 주가 누군지,
바로 십자가에 피 흘린 그 예수 그리스도가 심판 주심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주님과 함께 죽이시고 일을 시작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십자가가 홀로 지신 십자가로 끝나신 것이 아니라
주의 백성을 동일하게 십자가에 합류시키셔서
십자가의 증인으로 저희들을 불러주심을 감사하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음을 감사하며
우리 속에 주님이 살아계시기에
주님의 피로 살리신 그 피 능력만 저희들 가운데 나타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