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2-08-09 07:07
레위기 84강 레 19:31 신접한 자를 추조와는 자와 여호와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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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C9Er4txPua8

관리자 22-08-09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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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84강 신접한 자를 추종하는 자와 여호와

하나님 말씀, 레위기 19장 31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레19:31)
31 너희는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들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원을 받은 자들이죠.
그들에게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이렇게 말씀합니다.

히브리어 성경을 보면
‘신접한 자를 믿지 말며 박수를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여기에서 신접한 자나 박수는 다른 단어이지만
귀신을 불러 올린다든가, 점을 친다든가, 귀신의 세계와 관련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신접한 자를 믿지 말며’라고 말씀하실 때
이 ‘믿지 말라’는 말은 우리가 이렇게 번역되어 있는 믿지 말라는 의미라기보다는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돌이켜 신접한 자를 따르지 말라.’
‘얼굴을 신접한 자에게 향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얼굴은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 그게 중요하죠.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을 향하고 있어야 한다.
현재 이스라엘 백성들의 중심지에는 성막이 세워져 있죠.
이후에 솔로몬 성전이 세워지는데 솔로몬 성전이 예루살렘에 세워지지만
그 예루살렘 성전이 온 세계의 중심이 됩니다.

그러면 그 성전은 도대체 무엇을 담고 있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곳을 얼굴을 향해야 하며
그곳을 향한 얼굴을 돌려서 신접한 자를 향하여 얼굴을 돌리면 안 되느냐?라는 거예요.
성전은, 성막은 번제물이 태워지는 곳입니다.
희생 제물이 태워지는 곳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잊지 말아야 되는 것은
이 성막에서 성전에서 날마다 희생 제물이 불살라진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존재 이유가 이 불살라지는 희생 제물을 위함이에요. 오늘 본문에서는

(레19:31하)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임을 증거하기 위해서 너희들이 있다라는 겁니다.
그중에 하나가 무엇이냐?라고 할 때는 너희들의 얼굴이 성전을 향해야 된다라는 거예요.
솔로몬이 열왕기상 8장에서 성전을 완성한 이후에 이렇게 기도를 합니다.
누구든지 성전을 향하여 기도를 하면 들으시고 응답하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를 하죠.

성전 자체는 죄 용서를 품고 있는 겁니다.
죄가 용서되지 않으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
번제단의 불이 성전을 삼키고 이스라엘을 삼키고
그 심판의 확산으로 인하여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쫓겨간 이방의 땅도 불살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솔로몬이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죄인임을 전제로 하는 기도죠.
‘성전이 그들 가운데 있다’라는 것은
‘그들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하고 있다’라는 겁니다.

성전을 향하여서 얼굴을 향해야 되는데 그들이 성전을 등져버리고
신접한 자를 찾아 나섰다라는 것은 그들을 추종한다라는 것은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그 용서, 그 용서를 제거해 버리겠다라는 겁니다.
우상숭배도 마찬가지지만
이 신접한 자를 찾는 것도 누구를 위함이냐? 라고 할 때는 나를 위함이지요.
나를 위함이라는 것은 말씀을 제거 하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율법이 있어요.
그들 눈앞에 율법이 있다라는 것은 율법대로 하나님께서 처리하신다라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언약대로 이스라엘을 다루신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대로 다루심 속에서 살면 돼요. 뭔가 할 게 없어요.
율법을 어기는 자로 살았기 때문에
그들은 성전에서 불살라지는 속죄물의 피로 용서받은 자로 살면 되는 거예요.

문제는 인간의 탐심입니다.
인간들은 더 소유하고 싶고 더 오래 살고 싶고 나의 앞길을 앞날을 알고 싶어 하죠.
앞날을 왜 알고 싶어 합니까? 불안하죠.
왜 불안합니까? 죽는 것이 두려운 거예요. 마귀의 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이 잘나서 애굽에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에요.
에스겔 20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4절부터 보게 되면

(겔20:4~9)
4 인자야 네가 그들을 국문하려느냐 네가 그들을 국문하려느냐
  너는 그들로 그 열조의 가증한 일을 알게 하여
5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옛날에 내가 이스라엘을 택하고 야곱 집의 후예를 향하여 맹세하고 
  애굽 땅에서 그들에게 나타나서 맹세하여 이르기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하였었노라
6 그 날에 내가 그들에게 맹세하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그들을 위하여 찾아 두었던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요 모든 땅 중의 아름다운 곳에 이르게 하리라 하고
7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눈을 드는바 가증한 것을 각기 버리고
  애굽의 우상들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니라 하였으나
8 그들이 내게 패역하여 내 말을 즐겨 듣지 아니하고 그 눈을 드는바 가증한 것을
  각기 버리지 아니하며 애굽의 우상들을 떠나지 아니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내가 애굽 땅에서 나의 분을 그들의 위에 쏟으며 노를 그들에게 이루리라 하였었노라
9 그러나 내가 그들의 거하는 이방인의 목전에서 그들에게 나타나서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었었나니 이는 내 이름을 위함이라
  내 이름을 그 이방인의 목전에서 더럽히지 않으려하여 행하였음이로라

출애굽기를 보면 이 내용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있을 때 애굽의 우상을 섬겼다라고 하지 않죠.
그러나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그들이 애굽의 우상을 섬겼다라는 겁니다.

그 말씀을 출애굽기에서 하지 않는다 하여서
그들이 애굽의 우상을 섬기지 않았다고 할 수 없는 이유가?
만일에 그들이 여호와만을 섬겼다면 유월절 어린 양의 피가 필요 없는 거예요.
그들의 모습은 출애굽한 이후에 광야에서 본때를 보여주고 있죠.
애굽에서 행하던 그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숭배자여서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이 바로와 함께 애굽과 함께 멸망당해야 했지만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이방인의 목전에서 그들을 구원하셨다라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는 무엇이 담겨 있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누구에게 임했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심판받지 않고 구원을 받을 수 있었느냐?라는 거예요.
그것은 바로 유월절 어린 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구원을 받은 거예요.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구원을 받은 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오늘 이 말씀을 하고 계신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담아야 하는 것은 유월절 어린 양의 피 공로를 담아야 되는 거예요.
따라서 신접한 자를 찾아 나선다는 것은 피 공로를 제거하는 거예요.
피 공로를 제거해버리면 무슨 요소가 사라지느냐? 라고 할 때는
심판 속에서 구원받은 요소가 제거되는 거예요. 이게 어려운 겁니다.

우리 같으면 이런 잔머리를 굴리게 되죠.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구원을 받았다면 신접한 자를 찾아 나서더라도 그를 추종하더라도
하나님은 구원하셔야 된다라는 주장을 펼칠 겁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하면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드러내기 위한 이스라엘이라고 있을 때는
그 이스라엘을 구원받는 쪽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심판과 심판 속의 구원이라는
두 요소를 동시에 보여주는 역할로 이들을 택하신 거예요.
그래서 사무엘상 28장을 보게 되면 사울 왕이 신접한 자를 찾아 나서지요. 28장 1절부터 보면

(삼상28:1~3)
1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쳐서 싸우려고 군대를 모집한지라 아기스가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밝히 알라 너와 네 사람들이 나와 한가지로 나가서 군대에 참가할 것이니라
2 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그러면 당신이 종의 행할 바를 아시리이다 아기스가 다윗에게 이르되
  그러면 내가 너로 영영히 내 머리 지키는 자를 삼으리라 하니라
3 사무엘이 죽었으므로 온 이스라엘이 그를 애곡하며 그의 본성 라마에 장사하였고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쫓아 내었었더라

사무엘이 죽고 난 뒤에 사울 왕이 나름대로 말씀대로 살려고 하죠.
왜 신접한 자를 쫓아냅니까? 그 목적이 수상한 거예요.
그러니 신접한 자를 쫓아냈다고 해서 신접한 자를 제거했다고 해서
신접한 자를 추종하지 않는다고 해서 심판을 피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이것은 이후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신접한 자를 추종하지 않았죠. 우상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오직 율법대로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이 살았죠.
그들이 예수님을 살해하는 겁니다.

왜 예수님을 살해합니까? 그들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을 위한 여호와 하나님이거든요.
그런데 그들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은
온 세상이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신 심판주 되신 주님을 위한 세상이라고 외쳤기 때문이에요.
나를 위한 세상은 없었던 겁니다.
지금 오늘 우리가 본 레위기 19장 31절 말씀도 동일한 거예요.

(레19:31하)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임을 증거하기 위해서 너희를 둘로 쪼개버리죠.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한쪽은 심판으로 한쪽은 심판 속에서 구원하는 긍휼의 그릇으로

사울 왕이 나름 말씀대로 살려고 하죠.
그러나 그가 다급해질 때는 어떤 모습을 보입니까? 좀 여유로울 때는 신접한 자를 다 제거합니다.
우리들도 그렇잖아요. 여유로울 때는 신앙생활을 잘 하죠.
근데 이 여유라는 것이 많이 여유로우면 신앙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적절한 여유로움이 있다면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하죠.

그런데 이 블레셋 사람이 모여 수넴에 이르러 진 치매 사울이 온 이스라엘을 모아
길보아에 진 쳤더니 사울이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그 마음이 크게 떨렸어요.
(삼상28:4~5)
4 블레셋 사람이 모여 수넴에 이르러 진 치매 사울이 온 이스라엘을 모아 길보아에 진 쳤더니
5 사울이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그 마음이 크게 떨린지라

그러자 여호와 하나님을 찾죠. 여기 보면

(삼상28:6)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시므로

대답 안 하면 안 하는 대로 살면 돼요. 왜 응답이 없느냐?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증거하기 위한 이스라엘이거든요.
망하게 하시면 망하면 돼요. 전쟁에 패하면 돼요

근데 인간의 마음이 그렇습니까? 망하면 안 되잖아요.
전쟁에 패하면 안 되잖아요.
사울 왕이 여호와께 묻는 이유가 ‘어떻게 하면 제가 이 전쟁에서 패하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제가 죽겠습니까?’ 그걸 묻기 위해서 여호와를 찾는 게 아니거든요.
살기 위한 비법을 찾기 위함이죠. 결국

(삼상28:7) 사울이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그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

그곳에 가서 여인을 찾아서 사무엘 선지자를 불러 올리라고 합니다.
놀랍게도 이 신접한 여인이 사무엘을 불러 올려요.
사람들이 이걸 보면서 ‘야, 이 신접한 여인이 귀신을 불러 올릴 수 있구나‘
그렇게 믿으라고 이 말씀을 주신 거예요.
그렇게 믿고 지옥 가라는 겁니다.

지금 이 말씀의 근거에 의하면 이 전체를 보면
레위기 19장 말씀을 근거로 할 때 이 자체가 어떤 모습이에요?
심판받아 지옥 갈 이유입니다.
지옥을 보내시면서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무엘 선지자가 나타나서 하는 말도
하나님께서 너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여서 너와 내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삼상28:19하)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 군대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리라~

언약대로입니다. 말씀대로 심판해버려요.
이걸 보고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서 오늘도 무당을 찾아가서 죽은 사람의 영혼을 불러 올려서
누구를 불러 올리고 싶습니까? 모세를 불러 올리고 싶죠. 예수님을 불러 올리고 싶죠.
로마서에 보면 믿음이 없으니까 지옥까지 내려가서 주님을 찾아 올리려고 하고
하늘로 올라가서 예수님을 찾아내려고 하는 그런 신비주의자들이 등장하잖아요.
말씀이 눈앞에 있는데. 지금 이런 말씀을 보더라도 인간의 욕망만 작동하는 거예요.

욕망을 작동하기 위해서
이 레위기 19장에 의해서 심판받을 자, 저주받을 자로, 지옥 보낼 자로 사용하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님 신접한 자를 찾아서 추종하면 다 지옥 갑니까? 아니에요.
우리는 모두가 다 신접한 자를 찾는 자입니다.
주님을 찾지 않아요.

우리의 육 자체가 무엇을 원하고 있습니까? 나를 위하고 있죠.
그러니 우리 자체가 신접한 자를 찾는 자에요.
그런데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똑같이 신접한 자인데
여러분이 보시듯이 사울이나 다윗이나 차이가 없어요. 둘 다 율법을 위반한 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는 긍휼의 그릇이 되고요 하나는 진노의 그릇이 되죠.

오늘 말씀을 통하여서 이스라엘 속에서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 말씀을 주신 겁니다.
그러니 이 말씀을 갖고 머리 좋은 사람들은
’야 신접한 자를 추종해도 구원받는 자가 있더라. 그러면 나는 신접한 자를 추종하겠다.‘
이 말은 말씀 위에 자기가 올라가 있다라는 거예요.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한 자의 모델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그러하죠.
십자가의 피는 저주 받을 자와 저주 속에서 구원할 자를 확연히 갈라냅니다.
저주받을 자와 긍휼을 입는 자는 우리 쪽에서 택할 수가 없어요.
십자가의 능력 속에서만 나옵니다.
십자가의 능력을 내가 안다고 해서 내가 우상숭배 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없어요.
십자가 사건의 결과물이 성도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신을 지옥가도 마땅하고 저주받아 마땅하다라고 인정하면서
십자가의 사랑의 용서함을 자랑하며 사는 겁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들을 부르셨고
우리들 속에 심판과 심판 속에서의 구원을 동시에 담으셔서
죄인 중에 괴수로 날마다 만드시어 심판을 알게 하시고
심판 속에서 구원을 알게 하셔서 십자가만 자랑하는 주의 백성으로 삼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베푸신 긍휼만을 자랑하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