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2-07-31 17:13
사도행전 85강 행 19:21-22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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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sq2yhec6jaQ

관리자 22-08-01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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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85강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나님 말씀, 잠언서 22장 9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잠22:9) 선한 눈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이니라 (아멘)

기도하시겠습니다.
주께서 저희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셔서
주님이 주신 하늘의 양식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삼아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 시간도 저희들을 긍휼히 여기사 주님의 은혜 속으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 말씀, 시편 43편 1절에서 5절까지 교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시43:1~5)
1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치 아니한 나라에 향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2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어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3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 나를 인도하사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
4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단에 나아가 나의 극락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이 시간 오준석집사님 기도해 주시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저희들은 이 자리에 구원을 받고자 왔는데 저주의 십자가를 알게 하셨습니다.
이 땅에서 육신의 병이 낫고자 왔는데 생명은 십자가의 피에 있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부자 되고자 찾아왔는데 나를 위해 살아가는 모든 것이 지옥 갈 이유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의인이 되고 싶었는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죄인임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신앙심 종교심으로 나의 인생을 찾고자 보상받고자 왔는데
나는 없고 이 세상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위한 세상임을 보게 하셨습니다.
아버지, 오늘도 살아가는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임을 알게 하여 주시고
사나 죽으나 십자가 안에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 말씀, 사도행전 19장 21절에서 22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행19:21~22)
21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22 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간 더 있으니라

에베소에서 마술하는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온 그 사건이 있었습니다.
말씀 자체가 권세가 있기 때문에 말씀 자체가 허망하게 했고
그 세력을 말씀 자체가 넓혀가는 그러한 것을 사도바울이 목격을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사도바울이 어떤 계획을 세우는 겁니다.
그 계획이란 여기에 방금 우리가 읽은 이 말씀대로

(행19:21)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가로되)
              (내가)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이렇게 계획을 세운 겁니다.
이렇게 계획을 세운 것이 바울 스스로 계획한 것이냐?
아니면 성령 안에서 한 것인가? 두 가지 다 그렇다라고 말을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지금 사도 바울이 이렇게 계획을 세우는 것이 성령 안에서 세운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계획을 세웠다고 했을 때 그 계획대로 과연 이루어질 것이냐?
이 얘기가 중요하죠.
사도 바울의 여기에서의 계획은 마게도냐 아가야 그리고 예루살렘 이렇게 지금 계획을 잡은 거예요.

다른 본문에 보면 고린도후서 1장에 보면
마게도냐에 갔다가 다시 고린도로 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 갔다가 고린도에 왔다가
예루살렘으로 가는 이런 어떤 계획을 세웠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았죠.

계획은 어떻게 되어지느냐?라고 할 때는
사도바울이 계획한 대로 되지 않고 마게도냐에서 고린도로 갔다가 곧장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그러한 어떤 과정들. 그러한 어떤 여정이 펼쳐지게 된다라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이런 계획을 세우는 것이 필요하냐? 안 하냐? 이 얘기예요.
앞서서 말씀이 권세가 있었다. 했잖아요.
그러면 말씀이 계속해서 지금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 말씀을 이루어 나가고
약속대로 계속해서 진행해 나갈 때 사도바울의 계획이 여기에 들어갈 필요가 있느냐? 얘기입니다.

얼핏 보면 사도 바울이
주께서 하시는 그 일들을 목격한 상황에서 자신감이 생겼다라고 볼 수 있어요.
자신감이 생겨서 이제 앞으로 내가 어떻게 할 건지,

(행19:21)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이런 계획들을 세웠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계획이 여기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앞서서도 그러한 계획들이 있었다라는 사실이에요.
로마서 15장 22절에서 29절을 보면

(롬15:22)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번 막혔더니
(롬15:23)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여기에도 보면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번 막혔다‘라고 하죠.
계획을 세운 거예요. 로마로.
계획을 세웠는데 여러번 막혔다라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사도행전을 보면 하나님의 성령이 막았죠.
다른 본문을 보면, 마귀가 막았다라고도 이야기를 해요.
주님께서 막았다라고도 표현하고, 마귀가 못 가게 막았다라고도 표현을 합니다.

(롬15:23)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계획이 또 나오죠. 스페인으로 가려고 하는 겁니다.
당시에 땅의 끝은 스페인이라 이렇게 얘기를 하니까.
스페인으로 가려는 그 계획 중에 로마에 들리겠다라는 그러한 계획을
지금 로마서를 쓰면서 이야기하고 있어요.

로마서는 우리가 다음에 보겠지만 (사도행전)20장에 보면 그 시점에서 로마서를 기록하거든요.
고린도인가 거기서 로마서를 쓰는 거거든요.
별로 이 시차가 별로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보는 본문과

에베소에서 나중에 빌립보 갔다가 고린도로 왔거든요.
거기에서 로마서를 쓰거든요.
이것은 여기에서 보더라도 사도 바울은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라고 볼 수 있죠.
그러면서 24절에

(롬15:24)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줌을 바람이라

로마 성도들이 스페인까지 보내주기를 바랬다라는 겁니다.
표현이 참 자기가 뭔데 보내주기를 바라느냐? 이렇게 나오는데
이미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이기 때문에
바울을 영접하고 주의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리라‘ 하셨잖아요.
그 말씀대로 바울을 이 스페인까지 보내주기를 원했다라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계획대로 됩니까? 안 되죠
그리고 봅시다.

(롬15:25)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지금 이 19장 우리가 오늘 읽은 그 본문에 보면
(행19:21)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이런 표현을 하잖아요. 그래서

(행19:22) 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서

보냈다했을 때, 이 예루살렘에 기근이 들어가지고 그곳에 할 연보와 관련되어서
지금 준비하는 차원에서 이들을 보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입니까? 거기에 보면 후서인가 보면
’이 연보를 미리 미리 매 주일 모일 때마다 준비하여야 하리라’ 이런 표현을 쓰고 있어요. 26절에

(롬15:26)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롬15:27)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롬15:28)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를 지나 서바나로 가리라
(롬15:29) 내가 너희에게 나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줄을 아노라

이렇게 확실하게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쓰면서
너희를 지나서 스페인으로 가겠다라고 계획을 세웠어요.
뜻대로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죠.
고린도후서 1장을 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15절에서 22절입니다.

(고후1:15) 내가 이 확신을 가지고 너희로 두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고후1:16) 너희를 지나 마게도냐에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제가 순서를 바꿔 얘기했는데 고린도로 갔다가 마게도냐, 마게도냐가 어디예요?
베뢰아 데살로니카 그쪽 지역이거든요. 그 북쪽
아가야 지역은 고린도 아테네 이 지역이고요.
그래서 고린도에 갔다가 어디로 갑니까?
마게도냐로 갔다가 다시 고린도로 오겠다라는 그런 계획을 세웠어요.

그런 계획대로 안 되었거든요. 안 되니까 시비가 난 거예요. 신뢰성이 확 떨어지죠.
지금 갑자기 당황스러운지 모르겠지만
사도 바울이 성령이 인도하심을 따라서 지금 복음을 전하잖아요.
그러면 그가 계획을 세울 때 절대로 사사로이 한 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거든요.
여기에서도 보면 17절입니다.

(고후1:17) 이렇게 경영할 때에 어찌 경홀히 하였으리요
                (가볍게 내가 계획을 세웠겠느냐?)
                예하고 아니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었겠느냐

주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계획을 세웠다라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가볍게 세우지 않고 신중하게 세웠다는 거예요.
신중하게 세웠는데 그게 그 계획대로 안 되니까
사도바울의 이 계획을 들은 사람들이 바울을 향해서 뭐라고 하겠어요?
‘네가 성령 받았고 계획을 세웠다면 그 계획대로 실행하는 것이 주의 뜻이 아니냐’
주의 뜻대로 계획을 세운 거잖아요.

우리가 쉽게 말하기를 이거는 바울이 주의 뜻과 상관없이 자기 계획을 세웠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쉬워요.
그러면 바울이 공격받는 것은 당연한 거고요.
그런데 사도 바울이 계획을 세울 때 결코 가볍게 세운 게 아니라
주님의 뜻에 맞추어서 세운 거예요.
세웠는데 문제는 그 계획대로 안 되었다라는 게 문제가 된 겁니다.

목사님 그걸 갖고 왜 그렇게 열내면서 지금 말씀합니까?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합니까?라고 생각을 하시죠.
그게 왜 중요한가 하면요.
사람들의 관심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다 이룬다라는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사도바울이 말을 했다면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뜻대로 진행되어야 된다라는 거예요.

진행이 될 때 네가 말한 것이 정말 성령 안에서 한 말이고 계획이지 않느냐라는 거예요.
근데 그 신뢰성을 잃게 되면
나머지 모든 복음을 전하는 것조차도 신뢰성이 무너지게 된다라는 거에요.

가령 목사가 뭔가를 계획하고 약속을 했잖아요.
약속을 했는데 안 지켜요. 안 지키면 사람들이 그다음부터 뭐라고 하겠습니까?
약속을 할 때 당신이 가볍게 약속을 한 게 아니지 않느냐?
정말 주님께 기도하고 그 말을 내뱉은 것이 아니냐라고 말을 하면서
했으면 지켜야지 이렇게 나올 거 아닙니까?
그러면 그다음 어떻게 돼요? 안 지키면?
교인들이 목사 말을 들을까요? 안 들을까요? 신뢰성이 확 떨어지죠.
안 그럴 것 같죠. 여러분. 확 떨어지게 돼 있습니다.

지금 바울이 이 문제를 거론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거예요.
우리가 볼 때는 바울이 계획한 것이 제대로 안 되었기 때문에
예상대로 안 됐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이렇게 들어갈지 모르지만,
바울의 입장에서는 공격을 받는 거예요.
‘네가 사도라면 정말 사도라면 네가 하는 계획 하나하나가 주님의 뜻에 부합해야 되고
주님의 뜻에 부합하다면 그 계획대로 진행이 되어야 된다’라는 거예요.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 그렇게 계획대로 못 갔거든요.
말씀이 되게 어려워집니다. 고린도후서 1장 17절에서 보면

(고후1:17) ~예하고 아니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었겠느냐
(고후1:18)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너희에게 한 말 이 계획은 예하고 아니라 함이 없다라는 겁니다.
주님에 대한 순종인데
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그것과 관련지어서 사도바울이 지금 말하고 있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미꾸라지처럼 지금 빠져나가려고 한다는 느낌이 확 들거든요.
아니 계획대로 못했으면 잘못했으면 잘못했다라고 하면 되는데
거기에 대한 변명처럼 말을 하는 겁니다. 좀 더 봅시다.

(고후1:19)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자기가 한 그 경영 그 약속조차도 어디로 몰아넣어버립니까?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한 약속이고 어그러짐이 돼요.
그러면 사도 바울은 자기가 ‘나 죄인입니다.’ 이렇게 나오는 게 아니라
자기가 죄인됨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주님의 조치로 그것을 몰아 넣어버리죠
우리가 이렇게 말하면 뭐 궤변을 펼치느냐? 이렇게 나오는데
지금 사도 바울이 궤변을 펼치고 있는 거예요.

모든 만물이 주님이 지으시고 주를 위하여 창조되고 주를 위하여 돌아가죠.
그러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일들이
주님께는 ‘예’가 되죠. ‘아니라’함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여러분 그거 다 알고 있잖아요.
알고 있는데, 내 마음에 안 드니까 이게 어긋났잖아요.
그러면 ‘그건 아니오’ 이래 나오는 거예요. 표현을 하면서

‘모든 것이 십자가를 위함입니다. 코로나를 걸린 것도 십자가를 위함입니다.’ 이러면
사람들은 비겁한 변명입니다. 이래 나올 거 아니에요.
그렇지 않나요? 코로나 걸려서 겁이 나서 안 나온 것도 주를 위함이에요.
나온 것도 주를 위함이에요.
그럼 주를 위함이며,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려면 십자가가 나와야 되죠.
그러면 죄인이 되어야 되는 겁니다.

‘아 나는 코로나가 저 목사가 지금 침 튀기는 게 다 코로나 병균이 날아갔는데
이 말씀을 들으러 왔기 때문에 나는 믿음이 좋다’라고 나오면
그거는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는 게 아니라
자기는 ’예’했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아니라 자기가 ‘예’가 되는 거예요.
그럼 자기 의가 튀어나오겠죠.

(고후1:20)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무엇이든지 ‘아멘’이 돼버려요. 무엇이든지.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성령 안에서 계획을 했는데 그 계획이 어그러졌는데
어그러짐조차도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돼버리죠.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버리면 모두가 다 죄인이 되잖아요.

사도 바울이 자신만만하게 계획을 세웠어요. 그런데 이 계획대로 전혀 안 되거든요.
원래 뒷 본문을 다 봐야 되는데 고린도전서 1장을 한번 볼게요.
다음 주에 또 봐야 될 것 같은데
고린도전서 16장 3절입니다. 여기서도 똑같이 나오거든요. 조금 읽을게요. 3절부터

(고전16:3) 내가 이를 때에 너희의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고전16:4)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저희가 나와 함께 가리라
(고전16:5) 내가 마게도냐를 지날터이니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나아가서
(고전16:6) 혹 너희와 함께 머물며 과동할듯도 하니
                이는 너희가 나를 나의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니라

원래 계획은 오순절까지 예루살렘에 도착하는 계획이었습니다.
근데 여기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하면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문다‘ 해요.
지금 사도행전에 보게 되면 오순절까지 도착하려고 하거든요.
근데 이 편지는 이 고린도전서는 겨울을 지나고 오순절까지 거기에 머물려고 한다는 거예요.
봅시다. 여기에 7절 봅시다

(고전16:7) 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주께서 만일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유하기를 바람이라
(고전16:8)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유하려 함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기를 원해요. 지금 이 편지를 에베소에서 썼거든요.
그래서 방금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을 경유하여서 로마로 가겠다는
계획을 세웠잖아요. 계획을 세울 때 오순절까지는 에베소에서 머물기를 원한 겁니다.
왜 오순절까지 머물기를 원했느냐?
그 뒤에 보면 9절입니다.

(고전16:9) 내게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이 열리고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니라

이 이유 때문에. 마술사들이 자신의 책들을 다 태워버렸잖아요.
그 태우고 주께 돌아오는 일들이 많아진 상태에서
지금 사도 바울이 계획을 세운 게 오순절까지 어디에 머물겠다?
에베소에서 계속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겠다라는 계획을 세운 겁니다.
그러면서 이제 로마까지 가겠다는 그 계획도 같이 이야기를 한 거예요.

왜 에베소에 머물려고 하느냐?
내게 크고 효과를 이루는 문이 열렸다(내게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이 열리고)라는 거예요.
이게 비유적 의미인데,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큰 문이 열렸다‘라고 볼 수 있어요.
이미 앞서서 많은 마술사들이 책을 태우고 주께 돌아왔기 때문에 이 얘기를 하는 겁니다.
큰 문이 열렸다는 겁니다.
열렸으니까 물 들어올 때 고기를 잡아야 된다라는 논리 비슷한 이야기를 펼치는 거예요.

동시에 또 ’대적하는 자가 많다‘라고 하죠. 논리가 이상합니다.
문이 열렸고 대적하는 자가 많기 때문에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겠다라는 이 얘기가 뭔가 앞뒤가 좀 이상해요. 성경을 읽어도.
이런 거죠. 대적한 자가 비록 많지만, 마술사들이 원래 대적자였잖아요.
근데 그들이 돌아왔잖아요. 돌아왔기 때문에 바울은 내심 희망을 걸고 있는 겁니다.
’대적자가 많지만 복음을 전하여서 주께 돌아오는 자가 있지 않겠느냐‘라는
기대를 갖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한 명도 구원 못 해요.
소요를 일으키죠.
소요를 일으켜서 자칫 잘못하면 바울이 죽을 뻔한 그런 어떤 사태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얼른 바울이 그곳을 에베소를 떠나게 돼요.
사도행전 9장을 보면 주님께서 사도바울을 부르시잖아요. 9장 15절에 보면, 사도 바울을 불렀을 때

(행9:15)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사도바울을 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택한 그릇으로 불렀거든요.
주님의 계획 속에 사도바울은 담겨 있죠.
담겨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계획하는 바는 이 말씀 속에 들어가죠.
들어가는데,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바울이 계획하는 바와 주님이 이 말씀을 이루는 방식이 서로 안 맞다라는 겁니다.
그 과정 속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모든 것이 ’예‘가 된다라는 것을 증거하는
그러한 어떤 사도 바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라는 겁니다.

우리들은 이런 생각을 갖죠.
’주님이 다 하시니까 나는 계획을 세울 필요가 없네요.‘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의외로. 주님이 다 하시니까.
주님의 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는 일로 나타나게 되거든요.
십자가가 나오지 아니하면 주님의 일이 아니에요.
계획을 세울 때 함부로 세웁니까? 안 세웁니까? 안 세우죠. 기도하고 세울 거 아닙니까?
기도하고 세우는데,
우리는 주의 뜻대로 세웠기 때문에 이 일들이 주의 뜻 가운데서 이루어질 거라고 믿죠.
말은 맞아요. 주의 뜻 가운데 이루어져요.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까.

사도바울 자신은 완전히 부정당하면서
십자가만 돋보이는 그러한 계획이 된 거예요. 실제 이루어졌을 때.
사도바울의 경우는 이미 부르심을 받았을 때 주님의 계획 속에 들어있죠.
계획 속에서 그 계획을 펼쳐 나갈 때,
여지없이 자신의 계획이 무너지면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약속의 말씀이 이루어진다라는 사실입니다.
이와 달리 요나서를 한번 보겠습니다. 요나서는 상당히 독특하죠. 요나가 선지자거든요.

(욘1:1) 하나님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요나가 모르는 게 없어요. 다 알아요.
하나님께서 자기를 불러서
’니느웨 성에 가서 그들을 쳐서 외쳐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다‘라고 지시를 내릴 때
요나 머릿속에는 하나님은 자비로운 분이기 때문에 혹시 내가 가서 외쳤을 경우에
그들이 회개를 한다면 그들이 심판을 받지 않고
구원을 받는 일이 일어날 것까지도 알고 있어요. 그래서 다시스로 도망을 갑니다.

그 정도 알면 도망가더라도 끌고 갈 것도 알 거 아닙니까?
근데 인간은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하다가 생각해요.
가다가 풍랑이 일죠. 풍랑이 이니까 ’아 주님께서 못 가게 다시 잡았구나‘
그래서 자기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 정도로 대단한 선지자에요.
그래서 ’나를 저기 바다에 빠뜨리면 너희들이 살 수가 있다‘라고 이야기를 해요.

주님께서 계획하신 바와 전혀 다르게 요나는 계획을 했지만,
요나의 계획한 바를 멱살을 잡고 끌고 와서 배에 타게 하고, 타게 했는데, 빠져 죽게 하는데,
물고기 뱃속으로 집어넣었습니다. 집어넣으면 철이 들 것 같죠?
집어넣으면 철이 드는데 얼마나 말씀을 잘 아는지 한번 봅시다. 2장 1절에

(욘2:1)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욘2:2)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으었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고래 배 속에서 조금 죽을 지경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면서 좀 반성을 해요.
무슨 반성을 하는가? 하면 제일 뒤에 보면 9절에 보면

(욘2:9)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하니라 (이렇게 나오거든요.)
   
선지자로서 뭔가 서원을 했겠죠.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하겠다.‘
아무튼 그런 모습을 지금 여기에서 보여줍니다. 여기에 보면

(욘2:3) 주께서 나를 깊은 속 바다 가운데 던지셨으므로 큰 물결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욘2:4)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욘2:5) 물이 나를 둘렀으되 영혼까지 하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웠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쌌나이다
(욘2:6)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나중에 뒤에 보면요. 요나가 죽여달라고 하거든요. 죽여달라고 하는 모습을 보면
이러한 어떤 이 고래 뱃속에서 하는 기도도 좀 뭐라고 할까요? 진심이 담겼다고 할까요?
어쨌든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욘2:7)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그 성전은 죄를 용서하는 기능이 있죠.
죄가 용서되니까 어떻게? 주께서 자기를 구원하신다라는 겁니다.
그런 상태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욘2:8) 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욘2:9)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지금 이 얘기가 여기서 왜 나와요?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다라는 이야기를 왜 해요?
고래 뱃속에서도 지금 니느웨를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심판해야 된다는 논리를 펴고 있는 거예요.
아 (고래)뱃속에서까지 어떻게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느냐?
주님의 계획을 다 알아요. 요나가.
다 아는데, 당하면서도 자기의 그 의지 있죠. 의지.
니느웨에 대한 그 미운 감정, 그것은 절대로 버리지 않는 겁니다.
나중에 이 짓거리를 한 자가 자기 자신이거든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고발하지 않습니다. 앞부분에 자기가 다 회개를 했기 때문에. 어쨌든 지금

(욘2:8)~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욘2:9)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나이다 하니라

말은 다 맞는데, 누구만 구원해야 돼요? 나만. 나는 구원해야 되고,
이스라엘은 구원해야 되고, 저 이방 나라는 구원하지 않아야 된다라는 게 이 요나의 논리입니다.
결국 이 요나를 니느웨 성으로 보내가지고 외치게 합니다.
외칠 때 왕부터 시작해서 모든 동물들이 회개를 하죠.
왕이 왕의 옷을 벗고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합니다.
그러자 여호와 하나님께서 심판을 내리지 않으시죠. 4장 1절입니다.

(욘4:1)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욘4:2)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고국에서 나를 부를 때, 성경에는 안 나오지만,
’저들이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심판을 돌이킨다라고 제가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제가 도망갔지 않습니까?‘

요나의 태도가 어때요? 대단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진노를 내리지 않은 것에 대해서 싫어하고 분노를 해요.
이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이게 선지자예요.
이런 자 위에 하나님의 긍휼이 덮여 있는 거예요. 그게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누구보다 더한 자들입니까? 니느웨성 사람들보다 더 악한 자들이에요.
하나님께서 처리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손 들고 시비 거는 자들이라는 겁니다.
그걸 대표로 요나가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욘4:2중)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욘4:3) 여호와여 원컨데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우리가 보면 ’하나님께 어떻게 이런 말을 하겠느냐‘ 그런 생각이 들죠.
근데 인간은요 자기가 자신을 몰라요.
이 사건을 통하여서 요나의 본심, 이스라엘의 본심이 드러나는 겁니다.
자기들은 하나님의 긍휼로 구원을 받아야 되고, 구원받는 이유가 뒤에 나오죠.

(욘2:9) 나는 감사의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고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그렇게 살았다라는 어떤 그러한 표현으로 지금 자기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는, 저주받지 않는 그 이유의 정당성을 말하고 있는데,
지금 여기에서 이 니느웨성에 심판을 내리지 않는 모습을 보고
죽는 것이 낫겠다. 내 생명을 취해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정도로 이 이방 나라에 대해서 자기 나라를 괴롭혔기 때문에 그 정도로 싫어하는 거예요.
너의 성냄이 어찜이냐? 어찌 합당하냐?

(욘4: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의 성냄이 어찜이냐 
(욘4:5) 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되

대화가 끝났죠. 어떻게 그게 성내는 것이 합당하냐? 이래 물었어요.
그래도 꺾지 않습니다. 절대로 꺾지 않고, 이제 나가 가지고 저 언덕 위에 올라가지고
성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초막을 짓고 심판이 되는지를 두 눈으로 확인해야겠다. 이렇게 나옵니다.
그때 주께서 박넝쿨을 준비하여서
아마 머리가 대머리였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그럴 가능성이 높은데

(욘4:6) 박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 괴로움을 면케하려 하심이라

그러자 요나가 이 박넝쿨로 인하여서 아주 기뻐했습니다.
완전히 조루증 환자 같은데, 화를 냈다가 죽여달라 했다가 기뻐했다가...
주께서 일하시는 방식에 대해서 인간이 보여주는 태도입니다.
자기 중심으로는 얼마든지 이 일에 대해서 박넝쿨이 주어지니까 기뻐하다가,
벌레를 통해서 박넝쿨이 사라지니까 또 어떻게 합니까? 더워서 죽겠다 그래요.

언약은 생각도 안 해요.
모든 것이 ’내가 기쁘냐? 내가 괴로우냐?‘를 중심으로 해서
하나님께서 심판을 내리든지 말든지 해야 된다라는 거예요.
고래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와도 철이 안 들어요.

어떤 사람이 간증을 할 때
’주님이 나에게 이런 체험을 주셨는데, 그 체험 때문에 내 신앙이 이렇게 유지된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거짓말입니다.
요나 같은 체험 해보셨나요?
고래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와 본 적이 있느냐? 이 얘기에요.
그래도 자기의 즐거움과 기쁨을 포기하지 않죠.

(욘4:9중)~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니이다
(욘4:1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니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널쿨을 네가 아꼈거든
(욘4: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나중에 결국은 니느웨도 멸망당하거든요. 나훔서에 보면 멸망을 당합니다.
이걸 통하여서 주님께서는 무얼 말씀하시려고 하느냐? 이 얘기에요.
이스라엘의 현 상황이에요.
내가 그만큼 너희들을 사랑한다는 겁니다.
그 사랑은 긍휼로써 보여주고 있고,
그 긍휼이 나오는 자리는 하나님의 희생이죠.

오늘은 그 내용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지금 요나 자체는 사도 바울과 조금 다르죠.
사도 바울은 ’예 가겠습니다.‘
그래서 계획을 세워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계획을 세워서 가는데,
주께서 그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게 하죠.

반대로 요나는 하나님의 계획에 투입시키려고 하는데, 도망을 가죠.
도망을 가는데 끌고 와서 언약 속으로 집어 넣어버립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의 방식이 이런 거예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나는 이 말씀과 벗어나서 내 뜻대로 가겠습니다.‘ 백날해도
끌고 와서 주님의 죽으심에 참예시켜요.

이와 달리 자원하여서
’나 주님의 뜻에 순종하여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오늘은 여기를 가고 내일은 저기를 가고...‘
계획을 세우는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뜻대로 안 해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게 해버려요.

이 두 부류의 사람을 보게 되면 우리는 누가 더 마음에 들어요?
요나가 마음에 듭니까? 이 바울이 마음에 듭니까?
바울이 마음에 들거든요. 그래서 바울을 본받으려고 해요.
본받을 수 없어요. 이거 주의 일이기 때문에.

그런데 성령을 못 받았으니까
사람들은 이 그리스도 안에서 ’예’만 된다라는 이 내용은 생각지도 않고
자기가 ‘주의 뜻에 순종하겠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뜻대로 안 되면 뭐라 합니까?
‘뭔가 제가 잘못을 했습니까? 제가 계획을 잘못 세웠습니까?
내가 주의 일을 하면서 뭔가 부족한 것이 있습니까?’
이 자기 반성에 들어가요. 자기 반성에 들어가니까 바꿀 거 아닙니까? 개선을 할 거 아닙니까?
개선을 해서 그걸 성공하면 누구의 공입니까? 누구의 공?
자기의 공입니다. 자기의 헌신의 공이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하는 거예요.
제가 요나를 언급한 이유는
사도 바울이 요나잖아요. 같은 이야기입니다. 같은 이야기.
사도 바울이 자기를 위해 살았잖아요. 요나도 자기를 위해서 한 거거든요.
자기의 기쁨과 자기의 즐거움을 위해서 살았단 말이에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맞아요. 저는 말씀을 안 듣고 알겠지만, 요나처럼 주님이 끌고 가면 가겠습니다.‘
또 이렇게 계산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예가 돼요. 죄인이 되겠죠. 예가 된다라는 거는.

그 사람은 끌고 갈 때만 생각을 하잖아요. 끌고 갈 때만.
안 듣는 자체에서도 예가 되면 죄인이 되고, 십자가를 자랑하게 된다. 이 얘기입니다.
그 사람은 뭔가 머릿속에 어떤 끌고 가는 그 장면을 머릿속에 두고 있는 거예요.

요나는 구약의 인물이잖아요. 구약의 인물이니까 구약 인물답게 구약에 속한 선지자답게
이 모든 말씀을 이스라엘 중심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요나를 보게 되면 이스라엘 중심이 아니라
언약 중심으로 요나가 지금 거기에 휘말려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볼 수 있는 거예요.

사도 바울은 성령을 받았죠.
그럼 성령을 받았기에 사도 바울은 계획하는 모든 것이 주님의 뜻에 부합하겠죠.
주님의 뜻에 부합한다라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된다는 이야기예요.
부합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라는, 계획대로 된다는 얘기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뭔가 되어지는 일이든지 안 되어지는 일이든지 왜 이럴까요?라고
질문을 나오겠죠. 나오면 아까 고린도후서 1장에 나오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기 때문에 모든 어떤 것은 ’예‘가 되는 거예요.

왜 코로나 걸리게 하고, 왜 이혼하게 하고, 왜 자식이 빨리 죽고, 사업을 망하게 하고...
그리스도 안에서는 다 예가 돼요.
우리의 계획들은 뭐예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계획이 되죠.
그러면 십자가를 자랑케 하기 위한 주님의 조치라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감사하지 않을 게 뭐가 있어요?
우리 여기 모이다가 좋은 장소 모이다가 망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는 거예요. (아멘)
놀랍습니다. 아멘 하셨어요.

그리스도 안에서는 예가 아닌 게 없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의 얘기를 들어보면 ’아 쟤가 완전히 자기 변명하고 있네‘
그래서 복음 안에 있는 사람이 복음 밖에 있는 사람과 대화를 하면, 대화를 할 수가 없어요.
’너 또 변명하네‘
사도 바울이 완전히 미꾸라지 같다. 했잖아요. 제가.
제가 이렇게 설교하면 아마 목사들이 저를 공격 엄청할 거예요. ’어떻게 미꾸라지...‘
한번 읽어보세요. 완전히 미꾸라지예요. 빠져나가요
빠져나가는 게 아니라 자기가 죄인의 자리로 들어가는 겁니다.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얼마나 이거 좋은 슬로건입니까?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그러면 돈 내라 얘기거든요.
이런 제목을 갖고 ’여러분 큰 꿈을 가지세요.‘
’스페인도 보아야 하리라‘ 이렇게 하지. 왜 또 로마로 보아야 하리라’ 이 얘기를 갖고 오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스페인은 실패했거든요. 로마는 성공을 했으니까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근데 그 과정이 어땠습니까? 자기 뜻대로 계획대로 갔어요.
이상하게 엮이죠. 사건이. 예상하지 못한 사건에 엮여버립니다.
물론 대적자들이 있는 것은 알지만,
그 대적자라는 것은 자기가 이 로마에 상고를 했기 때문에 고소를 했기 때문에
로마 법정으로 가는 거예요.
복음을 그런 식으로 전하게 하고,
자기 계획을 주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주께서 사도바울을 끌고 가는 겁니다.

제가 아까 이 회사를 이야기했지만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오늘 죽으면 그리스도 안에 ‘예’가 되는 거고, 모든 게 ‘예’입니다.
‘예‘가 아닌 게 없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내가 계획을 세울 때 사사로이 하지 않았다라는 거예요.
사사로이 가볍게 하지 않았다는 말은 또 생각하고 생각하고 그 얘기가 아니에요.
여러분 오해하지 마세요.

‘어떤 일을 계획을 할 때 한 100번은 생각하고 하세요.’ 그렇게 이야기를 하잖아요.
100번을 하든, 한 번을 하든 성도에게는 사사로이 한 게 없습니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계획한 바이기 때문에.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되면 십자가로 말미암아 감사하는 상황으로 몰아가는 거예요.
다시 사도행전 오늘 본문 19장을 다시 보겠습니다.

(행19:21)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우리가 볼 때는 굉장히 성급하게 계획을 했다. 이렇게 판단할 수 있죠.
그렇게 하면 돼요.

‘아니 자기가 주님도 아니면서 왜 계획을 세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 하면
주님의 뜻에 부합하게 세워서 자기가 하는 모든 일들이 계획대로 되어질 때, 사람들이 볼 때,
‘이건 주의 뜻이야. 주님이 하신 일이야.’ 이걸 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
간증이 다 그런 거 아닙니까?
‘내가 주님께 기도해서 주님께서 이렇게 이루어졌더라’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면,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 이렇게 나와야 되잖아요.

그런데 뭘 자랑합니까? 그들이?
‘기도하고 주의 뜻 안에서 계획을 세워서 해보니까 이렇게 축복을 주더라’ 이야기잖아요. 논리가.

이 본문을 갖고 선교사를 갔다 칩시다.
그러면 그들이 가서 계획을 세워서 갔는데 돌아와서 뭘 자랑해야 돼요?
‘그리스도 안에서 예만 됩디다’
‘십자가 피의 능력만이 드러납디다’
‘십자가 피 외에는 자랑 할 것이 없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와야 될 거 아닙니까?

우리는 사도바울처럼 ‘사도바울도 가볍게 경홀히 이렇게 계획하지 않았다.’ 했을 때
그런데도 어긋났잖아요. 그럼 우리는 한 수 배웠잖아요.
그럼 조금 더 신중하게 계획을 해요. ㅎㅎ

지금 계획된 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지만,
지금 우리 이렇게 모이는 것도 계획된 게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계획된 대로 안 되는 것도 마찬가지지만,
그러면 사람들의 논리가 그러면 ‘무계획으로 갑시다’ 또 이렇게 나오잖아요. 논리가.
이 자체가 노림수가 있다. 이 이야기입니다. 계속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예만 되면 되는데,
‘계획을 세웁시다’라는 쪽이나 ‘그럼 계획을 세우지 맙시다’ 쪽이나 뭔가 노리는 바가 있는 거예요.
십자가 피를 제거하려고 하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오히려 계획한 바를 마귀를 통하여서 막아버립니다.
막아버리면서 십자가 지신 주님이 친히 살아계셔서
죄인인 바울을 갖고 일하심을 친히 증거하시는 겁니다.

우리의 삶이 그러한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 마음껏 그리스도 안에서 계획을 세우시고,
차근차근 해나가시면서, 어긋나시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예’만 되는 인생을 사시길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계획을 세우든 세우지 않든
그리스도 안에서 예만 되게 하는 성도로 저희들을 불러주셨기에
십자가만 자랑하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그리스도 안에서 예만 되는 인생을 살기를 소원하는 주의 백성에게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김기대 22-08-02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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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장로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