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3-11-26 16:21
20231126 로마서 강해 41강 롬 6:19-23 연약한 육신과 엔트로피 법칙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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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3-11-28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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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26 로마서 강해 41강 롬 6:19-23 연약한 육신과 엔트로피 법칙

다 함께 묵상 기도드리겠습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 고백하겠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 말씀, 잠언서 26장 9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잠26:9)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은 술 취한 자의 손에 든 가시나무 같으니라”

기도하겠습니다.
우리들의 입에서 쏟아내는 모든 것들은
결국 우리를 죽이는 그러한 말들임을 주께서 저희들에게 말씀을 통하여 들려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육체가 죽을 때까지 십자가만 자랑케 하기 위해서 미련한 자의 입술을 주께서 허락하시고
주님의 증인으로 삼아주심을 감사하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시편 78편 65절에서 72절 말씀을 교독하겠습니다.
[아삽의 마스길]
(시78:65~72)
“때에 주께서 자다가 깬자 같이, 포도주로 인하여 외치는 용사같이 일어나사 그 대적을 쳐 물리쳐서 길이 욕되게 하시고 또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산을 택하시고 그 성소를 산의 높음 같이, 영원히 두신 땅 같이 지으셨으며 또 그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젖 양을 지키는 중에서 저희를 이끄사 그 백성인 야곱, 그 기업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 이에 저가 그 마음의 성실함으로 기르고 그 손의 공교함으로 지도하였도다”

이 시간 김기대 집사님 기도해 주시겠습니다.

죄의 종으로 태어나 죄의 종 노릇하다 불심판 받고 지옥으로 던져져야 할 죽어 있던 자들에게
생명의 말씀으로 찾아오셔서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하는 불의한 종으로 삼아주시니 감사합니다.
오직 참 빛이신, 십자가 지신 참 하나님이신 주님을 위하여 세상을 흑암으로 만드시고
여기 모이게 하신 소경들에게서 끊임없이 배출되는 배설물들로 죄의 깊이와 십자가의 사랑의 깊이를 알아가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 시간 주님의 사자를 통하여 주시는 생명의 말씀으로
우리 안에 숨겨져 있는 가룟 유다를 발견케 하시고
십자가를 증거하는 도구로 사용하시니 감사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려드립니다. 아멘.

하나님 말씀, 로마서 6장 19절에서 23절 말씀을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롬6:19~23)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아멘.

선악과를 먹은 인간들의 특징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겁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는 그 방법은 하나님과 똑같은 흉내를 내는 방식으로 하는 거죠.
그 방식이 뭐냐? 지난 수요일도 말씀드렸습니다마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말로 바꾸는 방식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기 전에 하신 말씀이 있죠.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이 말씀을 선악과를 먹은 목사나 신학자나 교인들이 해석을 할 때 어떻게 한다고 했습니까?
선악과 먹은 주제에 그걸 해석하려고 덤벼들죠.
그래서 그 본문을 어떻게 해석합니까?
‘인간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었는데, 선택할 수 있었는데...’
눈빛을 보니까 수요 예배 설교를 거의 안 들으신 것 같은데.

자유 의지가 있다라는 거예요.
여기에서 인간들은 이미 에덴 동산 안에 선악을 아는 인간으로 하나님이 만들었다라고
전제를 깔아버리죠. 그게 자유 의지를 주장하는 인간들의 본모습입니다.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자유 의지 자체가 의미가 없어요.
그러면 반박을 하겠죠. ‘그러면 어떻게 선악과를 따먹게 되었습니까?’
이미 마귀의 세력에 장악당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라” 했었을 때
아담이 “충성!” 이렇게 나옵니까? 군인 아저씨. 그렇게 안 나오죠?
바다의 물고기가 “충성! 제가 피라미로 고래로 만들어지겠습니다.”
이렇게 한 적이 있느냐? 이 얘기예요. 없죠. 말씀대로 되었어요.
말씀대로 되어진 세계가 이 선악과를 먹기 전의 세계죠.

그런데 선악과가 들어온 이후에 인간들은 그 말씀을 어떻게 바꾼다 했습니까?
아담이 여자를 만들어 오니까 (여자라고 이름 안 지었죠. 아담이 여자라고 짓는데)
‘내가 있고 너가 있다’ 합니까? 아니죠. 우리는 한몸이라 하잖아요.
남편과 아내, 이 말은
창세기 2장에서 하시는 말씀과 그 이후에 하시는 말씀이 달라요.

갈비뼈를 취하여서 (이름도 없잖아요. 이때는) 여자를 지으시고 데리고 오니까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
여러분 남편에게 그 얘기합니까? 아내에게? 말로는 하잖아요. 말로.
근데 여기에는 경쟁 관계가 없고 책임에 대한 회피가 없는 거예요. 그런 부부 봤습니까?

그런데 선악과가 그들을 장악하게 되죠.
장악하게 되니까 이 여자도 마찬가지고 남편도 마찬가지고 말씀도 어떻게 바꿔버립니까?
하나님과 경쟁 관계로 바꾸었다라는 거예요.
그게 창세기 2장에서 3장으로 넘어오는 과정입니다.

근데 우리는 나름대로 자기가 똑똑하기 때문에
‘목사님 선악과를 따먹기 전과 후를 구별해야 되지 않습니까?’라고 덤비잖아요.
따먹기 전에 여자가 한 말은 어디 말에 이미 포함된 거예요?
뱀의 말에 포함된 거예요.

이미 두려움이 있다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그 세계 속에서 벗어났다라는 겁니다.
죽음을 알아야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의 의미를 알 거 아닙니까?
선악 구조가 이미 그를 장악한 겁니다.
장악하게 되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똑같이 갖고 와서 약간 비틀지만, 비틀어도 마찬가지예요.
어떤 목사들은 ‘이 뱀이 간교하니까 말씀을 살짝 비틀었다’ 하는데
살짝 비튼 게 아니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안 비틀어요.
‘말씀대로 믿자’라고 하거든요.

마태복음 4장에 나오는 그 마귀가 구약을 꿰뚫고 있잖아요.
‘하나님의 아들답다’라는 것은 구약 성경을 바탕으로 해서 명확하게 드러나는 겁니다.
그게 ‘이스라엘다움’이에요.

이 마귀가 이 세상을 장악했죠.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늘에서 싸움이 있었는데 내어 쫓기는데 하나님께서 이 땅으로 내어 쫓기게 하신 거죠.
그 마귀가 이 세상을 장악하게 되니까
이 마귀가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인간들에게 무엇을 주느냐? 라고 하면
창세기 3장에 나오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줘요. (안 믿으시는 표정인데.)
예수님을 시험할 때 말씀을 줬잖아요.

예수님께서 ‘내가 바로 모세가 증거한 당사자라’ 할 때
그 말을 누가 알아들었습니까? 우리도 못 알아들어요.
여러분들이 만일에 구약의 모세 오경을, 지금 우리가 신명기를 보고 있는데
그걸 지금 저처럼 설교하면 정신병자라고 하죠.
‘제발 성경대로 좀 보자’라고 할 것 아닙니까?
그 성경대로 보자고 주장한 자들이 바리새인과 서기관입니다. 그들이 말씀을 갖고 온 거죠.

그 마귀가 이 말씀을 갖고 오니까, 이 말씀을 갖고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
처음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거예요.
여기에서 질문 들어갑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입니까? 무질서의 하나님입니까?
예배시간 전에 어떤 분이 ‘걔는 진짜 자기 마음대로 한다.’ 손자 손녀인지 모르지만...
질서를 잡아야 된다고 했어요. 질서를.
그 말의 원천이 어디냐? 하면 악마예요.

근데 목사들이 뭐라고 하는가? 하면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질서의 하나님이라’고 이야기를 하거든요.
근데 십자가 안에 들어가 버리면 질서가 잡혀집니까?
목사들이나 교인들이 서신서를 보면서 ‘질서 잡기’로 들어가죠. 그죠?
성경에 다 나옵니다. 그런 말씀도.

그런데 질서를 잡는 방식이 뭐냐? 하면
말귀를 못 알아들으니까 말씀대로 살아가는 방식이라고 가르치죠.
제가 그때 이런 얘기를 했죠.
그 언어를 갖고, 이 말을 갖고 이 하나님 자리에 오른 니므롯이 등장했다 했잖아요. 창세기 11장에. 그 집단이 북한이고요. 오늘날 이동관이잖아요.
제가 비판적인 그 입장이 아니라 예화가 적절한 거예요. 언론을 장악하면 언어를 장악하잖아요.
그 언어를 장악하면 인간들은 말을 듣게 돼 있어요. 이 구조가 희한해요.

성령을 받은 사람은요. 인간의 말을 안 들어요.
누구의 지시를 따라 삽니까? 주님의 지시를 따라 살죠.
그런데 이 육에 속한 자들은 인간의 말을 듣는 거예요. 과거부터 그렇잖아요.
1984년 그 소설을 봐도 이 언어, 이 말을 장악하는 게 그들의 핵심이에요.
근데 이것이 우연한 게 아니고요. 집에서도 말로 질서를 잡잖아요.
‘어디 아버지한테 감히?’ 그러다가 전세가 역전이 되면 부모가 이제 굽신굽신 해야 되죠.
그 모든 게 언어예요. 언어.
그 말을 갖고 질서를 잡으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들이 교회에 똑같이 들어온 거죠. 똑같이.
똑같이 들어오는 방식이 뭐냐? 하면 ‘말씀대로 가르쳐야 된다’라는 겁니다. 말은 맞아요.
제가 계속 반복해서 말씀드립니다마는 마귀는 말도 안 되는 걸 갖고 옵니까?
아니면 말씀대로 갖고 옵니까? 말씀대로 갖고 와요.

그러면 우리는 성령 받았으니까 말씀대로 이야기를 하면 반드시 어떤 사태가 발생합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살해해버립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말씀을 갖고 와서 ‘말씀대로’ 주장하면서
질서 체계를 잡으려고 해요.
교황이 있고 뭐 추기경이 있고 신부가 있고... 이런 것들이 다 질서 체계거든요.

교회라는 것은 목사가 있고 감독도 있다 칩시다. 어쨌든 다 필요 없다가 아니라 다 있죠.
여러분들 다 호칭이 있잖아요. 이름 자체가 이미 호칭인데,
성경에서 본래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는 게 목적이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이 되려면 말씀을 통하여서 모두가 다 죄인으로 드러나야 되잖아요.
죄인으로 드러나는 것이 하나예요.

근데 죄인의 모습은 100명이 모이면 100가지의 모습을 갖고 있어요.
한 사람은 성질이 급하고 한 사람은 성질이 안 급하고
어떤 사람은 착하게 보이고 어떤 사람은 악하게 보이고 별별 인간들이 다 모여 있잖아요.
그러면 말씀 앞에 찔러 쪼갬을 당하면
자기가 자기 몸을 불살라 내어 준다 할지라도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라고 고백할 때
하나가 되는 거지
만일에 ‘내가 이웃을 위해서 전 재산을 바쳤습니다’라고 하게 되면
그 말이잖아요. 그 말을 통해서 사람들이 성령이 없게 되면 그 사람 중심으로 모이게 되어 있어요.
세상은 그러한 뉴스를 계속해서 생산해 내는 겁니다.

과학에 ‘엔트로피 법칙’이라는 게 있습니다.
여러분 다 들어보셨죠? 열역학 제2 법칙. 저도 잘 몰라요.
근데 그 사람들의 주장은 시간이 지나면 점점점 질서에서 무질서로 간다라는 거예요.
질서에서 무질서로 가는 걸 우리는 원합니까? 원하지 않습니까? 원하지 않죠.

그런데 이 인간들은 질서에서 무질서로 가니까 이걸 어디를 끌고 오는가? 하면
창세기를 끌고 와요.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창조하실 때는 질서였다라는 거예요.
질서였는데 이게 범죄한 이후에 무질서가 된다라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성경을 잘 보세요. 누가 무질서를 만듭니까?
라멕이 등장했을 때는 질서 체계가 잡혀요.
군소리가 안 나옵니다. 라멕이 힘을 갖고 있을 때는. 왜?
군소리가 나오면 어떻게 합니까? 죽여버리거든요.
압수수색하잖아요. 군소리 나오면.
제가 야권 성향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가장 적절한 예입니다. 그게.
접대를 받아도 압수수색 안 하잖아요. 휴대폰을. 그죠? 윤석열하고 아주 친한 사람.
야당 성향인 사람은 신이 납니다. 이 설교...

하나님의 질서 세계를 인간이 무질서로 만들었으니까 인간들은 질서 세계로 돌려야 된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에도 질서가 잡혀야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그런 생각 안 해요?
우리의 본심이 그거예요.
그런데 이 사고 방식이, 이 과학적 사고방식이 성경에 그대로 나와 있어요.

아까 이야기했던 걸 좀 더 하면 이 바벨탑을 쌓을 때 얼마나 질서 잡혔습니까?
전 세계가 하나예요. 전 세계가 하나.
여러분 그런 세계를 원하지 않습니까? 복잡한 세계 싫잖아요.
‘독재가 싫다’라고 여러분이 그렇게 욕을 하지만
독재가 다스리는 세계보다 편한 세상이 없어요. 먹을 것, 입을 것만 해결해 주면.
그게 해결되려면 한 10분의 9는 죽여야 돼죠.
우리가 그러한 자리를 원하는 겁니다. 왜? 우리는 마귀의 종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 악마의 종은 어느 자리를 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보다 더 높은 자리를 탐하고 있어요.
그러면 그 자리에 올라가려면 뭘 갖고 와야 돼요? 말씀을 갖고 와야 돼요.
가장 악마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 말씀이 있는 곳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악마성이 이스라엘 남 유다를 포로로 잡아가지 않을 때는 그 악마성이 안 나타나요.
그럼 우리는 악마성을 뭘로 봅니까?
김정은, 김일성, 누굽니까? 또 김정일. 이런 사람들을 악마로 보잖아요.
그들은 악마 축에도 못 들어요.

예수님이 나타났을 때 누가 가장 악마적이었습니까? 그 유명한 베드로.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이 지시한 것을 친히 수행하면서도
완전히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그 악마성을 드러낸 거예요.
복음을 듣지 않는 사람들은 이 악마성이 결코 드러나지가 않습니다.
오늘 기도하셨듯이
우리가 얼마나 악한가, 그러한 죄인인가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만 드러나게 돼 있어요.

그런데 인간들은 복음이 없는 곳에 악마가 드러난다고 생각해요.
이재명, 윤석열 그쪽은 악마 축에도 못 들어요. 악마의 똘마니 중에 똘마니.
그러면 누가 가장 악마의 우두머리냐?
복음이 전파될 때 복음을 훼방하는 자들이에요.
그들에게는 복음이 전파되지 않으니까 훼방을 안 하잖아요.
그 악마성이 복음을 듣는 쪽에서 나타난다는 겁니다.

제가 지금 이 이런 얘기를 왜 하느냐? 하면
로마서를 읽고 해석을 할 때 이미 인간은 엔트로피 법칙이 작동하는 세계 속에서
거기에 대해서 반감을 갖고 있어요. 질서를 잡아야 된다라는 겁니다. 질서를.
컵이 깨지는 게 좋아요?
물을 마실 수 있는 컵으로 유지되는 게 좋습니까?

여러분 가정에 혹시 명품 커피잔이 (아무도 없는가 보네요) 있으면
그걸 마시다가 탁 깨뜨렸다 쳐보세요.
‘이 컵잔이 깨졌으니까 내가 오늘 감사 헌금해야 되겠다’ 이런 마음이 듭니까?
그걸, 컵잔을 우리 몸으로 한번 바꿔봅시다.
우리 몸이 명품 컵보다는 더 가치가 있죠.
이 몸이 엔트로피 법칙에 의해서 계속해서 늙어가고 있잖아요. 분해되어 가고 있고
그들은 ‘무질서화 되어 간다’는 거예요.

무질서화 되어 가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용납합니까? 안 합니까?
지금 약 다 드시고 있잖아요. 비타민 먹고 있고, 저도 비타민 먹고 있고...
발악을 하는 거예요. 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라
이 무질서화 되는 것에 대해서 인간은 용납하지 못하는 겁니다.

특히 이 우리를 구원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에 대해서
성경에 보면 “혼잡케 하지 말라” 하거든요.
“혼잡케 하지 말라”는 말을 육으로 받아들이니까 말씀을 혼잡케 하는 것은
말씀의 질서 체계, 교리화시키는 것에 대해서 멸시한다 그걸 부정한다라고 해석을 하는 거예요.
가장 교리를 제대로 세운 자들이 바리새인과 서기관이잖아요.

이 질서. 말씀을 갖고 질서를 잡으려고 하는 그 악마성이
오늘날 우리가 이전에 교회를 다니면서 들어왔던 복음이라는 그 세계 속에 다 담겨 있습니다.
제가 설교할 때마다 이단에 대해서 계속 언급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우리도 다 그런 집단이 되고 싶고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자리만 싹 바꾸면 되잖아요.
이만희처럼 ‘나는 계시를 받았다’ ‘제2의 사도 요한이다’ 이런 말만 빼버리고
진짜 말씀대로 잘 가르쳐서 ‘누구든지 내게 오라 내가 진리의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겠다.’
이 욕망들이 우리 속에 꿈틀거리고 있는 거예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오늘 본문에 “육신이 연약하다”라는 겁니다.
육신이 연약하다라고 할 때 오늘 본문은 지금까지 해석하는 것과는 저는 전혀 반대로 해석을 합니다.
“육신이 연약하다”라는 이 말을 하는 이유가 뭐냐? 이거예요. 육신이 연약하다는 이유가.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복음을 들은 자들이 육신이 있죠. 육이 있잖아요.
우리가 죽을 육체에 살고 있잖아요.
그리고 이 육이라는 것이 십자가를 대적하는 요소들이 계속해서 솟아 나오잖아요.

육신이 연약하다 할 때
이 육신이 연약한 것을 ‘와 이것보다 복음이 없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느냐? 이 얘기입니다.
이 본문을 읽을 때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하여튼 헬라어 성경도 되게 어려워요.
사람에게 말하듯이 말한다 하니까 사람들이 귀를 쫑긋 세우고 뭐라고 생각하는가? 하면
이 사람을 첫째 아담이라 생각하면 박수칠 일인데, 첫째 아담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이미 앞서 5장에서 첫째 아담이 나왔잖아요. 첫째 아담 이야기가.

그러면 육신이 연약하다 했을 때 지금까지 이 로마서를 성도들에게 보낼 때, 그들이 읽을 때
인간들은 뭘 추구합니까?
연약한 육신이 연약하지 않는 자리로 가는 것을 추구하죠.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어떤 말을 해요?
성도라고 하는 사람들이 뭐라고 한다 합니까?
“그러면 은혜를 더하기 위해서 죄를 더하자” 이 말이 뭐예요?
말씀에 합당한 삶을 살겠다라는 거거든요.

제가 거꾸로 해석을 했는데 진짜 말씀에 대해서 이렇게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은혜를 더하기 위해서 죄를 더하자’라고 이야기를 해요.
우리는 그런 사람이 없을 거라 생각하죠.
복음을 제대로 들으면 그런 사람이 가득 만들어집니다. 그게 확장이 되면
‘우리는 십자가에서 모든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에 무슨 죄를 지어도 죄가 아니다’라는
주장을 하는 거예요.

그런 주장을 왜 하느냐? 하면 뭐가 되고 싶은 거예요? 연약한 육신이 되기 싫은 거예요.
연약한 육신이 우리가 로마서를 지금 6장까지 다 읽어왔잖아요.
읽어오니까 어떻습니까? 복잡해요? 복잡하지 않아요? 복잡하죠.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되느냐? 이 얘기입니다.

목사님 로마서 강해를 한 40강 41강 했으면 뭔가 로마서의 의미를 확 알아야 되는데
머릿속에는 뭐가 들어있는가? 하면 질서 잡는 게 들어있어요.
육신이 연약하다는 말은 이 육신이 연약하기 때문에
너희들은 욕망이 어떤 욕망을 갖고 있는가 하면 질서 잡기를 원하는 욕망을 갖고 있는데
복음은 절대 너희의 연약한 육신에 의해서 질서를 잡을 수 없다라는 겁니다.
이것보다 신나는 게 어디 있습니까?

십자가라는 것은, 십자가라는 것은 최종 상태거든요.
최종 상태는 항상 이 불꽃놀이 할 때 올라갔을 때 빵빵 터지잖아요.
성도들에게 그 최종 상태가 계속해서 터지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터지는 그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서 그 과정까지 질서를 다 잡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야 말씀을 내가 소유할 수 있죠.

소유해서 어디에 써먹으려고 합니까?
말씀을 소유해야 다른 사람을 모두 다 내 종으로 삼을 수 있는 겁니다.
‘너는 모르지? 나는 알아.’
사도바울이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죠.

그러면 이 말은 너희들은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식으로 질문을 했을 때
못 알아듣는다 이거예요. 육신이 연약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해서 그러면 사도 바울이 말도 안되는, 애들 옹아리처럼 내뱉느냐? 그게 아니에요.
철저하게 인간들이 갖고 있는 그 논리를 갖고 하나님께서 이 복음의 내용을 전하게 하는 겁니다.
‘마귀가 말씀을 장악했으니까 우리는 말씀을 버립시다.’ 이런 논리를 펼 인간들이 또 있거든요.
그런 사람은 말귀를 너무 못 알아들어요.

말씀을, 주님께서 일을 하실 때는
먼저 주님이 창조를 하시고 그 창조 세계 속에 악마가 들어오면
악마가 그 창조 세계를 누구 중심으로 바꿔버립니까?
하나님 형상 중심으로 바꾸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나 중심’으로 바꿔버려요. 나 중심으로.
그 ‘나 중심’이 복음을 들은 우리에게도 똑같이 작동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교회에 먹히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들잖아요. 만들 때 보면 원했지 않았잖아요. 아브라함이.
‘제가 고민을 해보니까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저기 가나안 땅에 가서 새로운 왕조를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제가 깨닫고 지금 보따리 싸고 가겠습니다.’ 이렇게 했습니까?
아니잖아요.

여호수아 24장에 보면, 우상숭배하고 있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그를 부른 거예요.
사도 바울을 부르신 것과 똑같아요.
그래서 불러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만드실 때도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니까 만들어졌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혈통을 이용해서 이 혈통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이스라엘을 새롭게 만드신 거예요.

그들에게 말씀을 주시니까
이 말씀을 맡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살해하잖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또 어떤 생각을 갖는가? 하면
‘그러면 율법 말씀을 버려야 되겠네.’
심지어는 그런 이단들이 있거든요. 구약은 버려야 된다고.
왜 버려야 되느냐? 하면 성경을 읽으면서 나에게 좋은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로마서를 말씀을 전하면 ‘그러면 성경 읽어볼 필요가 없겠네요.’
보세요. 성경을 안 읽음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중심으로 질서 체계를 찾겠다는 것밖에 없어요.
그럼 그 자기는 누굽니까? 나는 누굽니까? 나는 주변 환경이 만든 나잖아요.
내 아들이 없을 때 ‘나’라는 게 어땠어요?
아들에 대한 애착이 있었나요? 그런 것 자체가 없었다니까요.

말 안 듣는 딸이 있을 때 어떻습니까? ‘나’라는 게 없잖아요.
결혼하기 전과 후가 하늘과 땅 차이잖아요. 그죠?
결혼을 안 한 사람은 결혼한 사람을 몰라요. 인간의 경험상.
‘나’가 없기 때문에. ‘아내가 있는 나’가 없기 때문에.
그리고 세금을 내는 사람과 안 내는 사람, 집이 자기 이름으로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이 ‘나’가 다 달라요.
저 같은 사람은 집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빨리 폭망해서
집값이, 서울의 강동 여기 집값이 한 채에 1억. 32평. 그 정도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저기 강남에 현대 무슨 아파트는 80 몇 억에서 70 몇 억이라 그러잖아요.
거기 있는 사람의 ‘나’는 뭐예요? 나는 그걸 원치 않죠.
계속해서 돈을 건설 쪽에 투자를 해가지고 집값을 붙들어서 올라가게 하는 ‘나’거든요.
아니 우리 다 그런 인간들이에요.
말씀을 날려버리면
말을 누가 장악하게 되느냐? 하면 이 주변 환경이 장악해요.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우리 한글 성경을 읽으면
‘이전에는 너희들 이렇게 했는데 지금부터는 이렇게 하라’ 이렇게 들리잖아요. 그죠?
다시 읽어볼까요? 그렇게 안 들리는지? 들리는지?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이렇게 말해놓고
사람의 예대로 말했으니까 ‘사람이 알아듣는 말을 한다’라고 생각을 하잖아요. 우리가. 그죠?
알아듣는 말을 하니까 “너희가 전에”
‘전에’라는 단어가 없어요. 원래 헬라어 성경에는.
이렇게 집어넣었어요. 여러분 성경에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전에는 그랬는데
“이제는”
“이제는”이라는 단어는 있거든요. 성경에.
그 ‘이제는’ 나오니까 뒤에 나오는 동사가 어떻게 돼요?
미래로 가야 돼요? 아니면 현재나 미래로 가야 돼요? 과거로 가야 돼요? 동사가?
현재나 미래로 가야 되잖아요.
그런데 헬라어 성경을 보면 둘 다 과거예요.

제가 헬라어 문법을 잘 몰라서 그런지 모르지만,
문법이고 무엇이고 간에 그것은 이후에 만들어졌는데
문제가 뭐냐? 하면 인간들의 의식 구조는요. 상향 구조로 돼 있어요.
무질서를 용납하지 못합니다. 무질서.

근데 주님 쪽에서는 무질서를 그대로 두자는 거예요.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는 것은, 밝히 보인다라는 것은
너희들은 죄인으로 그대로 있으라는 얘기예요.
‘있으라’는 것도, 이것도 좀 어폐가 있지만 할 수 없습니다. 표현의 한계상.
주님은 무질서를 두겠다는 거예요. 그냥.

근데 인간들은 무질서를 못 견뎌요.
특히 성령을 받았다라고 하고, 아까 이제 질문을 하셨잖아요.
지금 로마서를 잘 따라오세요. 성령 받은 게 어떤 의미인지가 나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게 어떤 의미인지가 계속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성령을 받았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다 악마적이라고 보시면 돼요.

왜 그러냐? 하면 그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가 보면 다 질서예요.
‘사람의 예대로 말한다’고 하니까 ‘아 이제부터는 이전과 달리 좀 쉬운 말을 하지 않겠느냐’
앞에도 어려웠거든요. 앞에도 모순되는 이야기를 했잖아요.
“이미 너희는 죄에 대해서 죽었으니까”
죽은 사람한테 무슨 말을 해요? 말을 못 알아듣는데.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새 생명 가운데서 살게 하려 함이라”
‘그렇게 살아라’ 나오거든요. 논리가. 이게 앞뒤가 안 맞아요.
그러니까 연약한 육체라는 겁니다.

연약한 육체는 말씀을 받을 때 자기 논리와 자기 언어로 받는다라는 거예요.
이게 복음이에요.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도 못 알아들었죠.
그런데 놀라운 것은요. 성령을 받기 전에는 다 알아들었다라는 거예요. 다 알아들었다니까요.
비유를 모르니까 질문하고 “예 이제야 알겠습니다.”
알기는? 뭐 해요? 알았으니까 어떻게 합니까?
“십자가 지면 안 된다”는 거거든요.
말씀을 제대로 보셔야 됩니다.

성령을 받기 전에는 다 알아요.
그런데 성령이 오니까 모든 말씀은 십자가를 전하잖아요.
그러면 내가 어떤 자가 돼요?
잠언서에 계속해서 무지한 자 이런 미련한 자들이 계속 등장을 하는데
그 미련한 자가, 무식한 자가 그것은 어떻게 바뀌어버립니까?

십자가 안에 들어와버리면 모든 인간이 미련해요.
그 미련한 중에 어리석은 자 중에 가장 어리석은 자가 누군가? 하면 말씀대로 사는 자입니다.
이제 조금 더 넘어가면 복음을 알았다고 하는 자.

근데 알았다라고 하는 자들에게 이 어려운 로마서를 던져버리죠.
던져버리면 이 성령의 할례를 받은 자가 반응을 할 거예요.
‘아니 목사님 아니 성령의 할례를 받았으면 이런 갈등 구조 속에 우리가 없어야 되지 않습니까?’
또 보세요. 또 자기 중심으로 질서를 잡죠.
자기가 신이 되고 싶은 거거든요.

사람들이 왜 기도원 가서 기도합니까? 금식하면서.
이 갈등의 문제를 해소하고 싶잖아요. 그런 거 아닙니까? 기도원 가보셨죠?
옛날에는 엄마 따라 쫄래쫄래 갔지만 스스로 가보셨습니까? 우와 스스로도 가보셨네.
왜 갔습니까? 답답하고 끌끌한 심정이니까 가는 것 아닙니까?
제가 나이는 얼마 안 됐지만 부흥회에 많이 가봤어요. 가서 속 시원해지고 싶잖아요.
그럼 속 시원해지면 누가 좋아요? 내가 좋은 거예요.

아니 근데 바울은 복음을 전하니까 속이 시원해졌어요? 복잡해졌어요?
복음 전한 그 교회들 모습 한번 보세요.
완전히 질서가 잡힌 것 같은데 완전히 무질서가 되잖아요.
온갖 각종 이단들이 다 등장하거든요.

주님의 질서는 십자가 안에서의 질서예요.
그리스도 안에서의 질서예요.
그리스도 안에서의 질서가 되려면 복음이 전파되면
그 순간은 은혜를 받아서 십자가 안에서 하나가 되지만
십자가 안에서 하나 되었다라는 그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서, 증명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돼야 되요?
십자가만 나오는 그러한 군상들이 계속 왔다, 갔다, 모이고...
밥도 따뜻한 거 먹다가 뜨거운 것도 먹고... 별별 일들이 다 발생해야 되는 거예요.

나중에 믿는 자들이, 바울이 전한 그 복음을 전한 자들이, 아시아 교회도 떠나가고
데마도 세상을 사랑하여 떠나가고 몇몇 사람만 남지 않았잖아요. 사람들은 그걸 싫어해요.
내가 목회를 50년 했는데 이제 다 떠나가고 나밖에 없더라. 아내도 떠나가고 자식도 떠나갔더라.
이게 축복이잖아요.
얼마나 십자가만 밝히 보이는 세상입니까?

‘니는 말로는 그렇지. 실제로 그래 한번 당해봐.’
내가 만일에 당한다면 싫어하죠. 나는.
나는 원치 않잖아요.
그래서 성경에 요한복음 21장에서 “네가 원치 않는 곳으로 인도한다” 했잖아요.
그 원치 않음이 기쁨이고 복이 되는 세계로 들어오는 게 성도예요.

질서를 계속 잡으려고 하잖아요.
문제가 있으면요. 지금 대입 시험 쳤잖아요.
우리 성도님 지금 그거 기다린다고 아마 암세포가 무럭무럭 자랄 겁니다.
왜냐하면 성적 결과가 나오고 거기에 대해서 본인이 가고 싶은 대학이 있고 학과가 있고 지금...
그거 안 당해본 사람은 그걸 몰라요. 합격과 불합격을.

그러면 기도할 것 아닙니까?
그러면 우리 성도는 ‘아 이렇게 우리가 질서를 원하는구나.’
이 십자가가 폭발하는, 불꽃이 팍 튀는 그 세계 속으로 주님이 인도하셔야 되지만
지식밖에 모르니까 인도하시는구나 이렇게 알아가면 되는데 인간들은 그렇게 안 돼요.

그래서 십자가 이 사건을 십자가를 사건이라 하는 겁니다.
외부에서 주시는 거예요. 외부에서.

우리는 계속해서 무질서한 세계를 원치 않아요.
그래서 말씀을 읽을 때도 자 사람의 예대로 육체가 연약하니까 그래서 어떤 번역은
‘너희가 이해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한다’ 해요.
그 이해력이 떨어지니까, (진짜 그렇게 번역돼 있어요. 다른 성경에.)
그러면 이해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이게 말도 안 되잖아요.
예수님의 말씀은 영이잖아요.

그것은 왜 이렇게 표현하느냐? 할 때는
말씀을 할 때 상대가 누굽니까? 상대가 인간이잖아요.
인간이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동일한 표현을 하는데 성령으로 말씀하시는 것과 육으로 말하는 의미가 달라져 버립니다.
그러면 육에 속한 자들은
‘이제부터 우리가 이해력이 부족하니까 좀 사람이기 때문에 이해력이 떨어지니까
좀 쉬운 말을 하지 않겠느냐?’ 하는데 더 어려워져 버렸어요.

왜냐하면 한 문장 안에 “이제는” 이라고 해놓고 과거에는
“너의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렸다” 할 때 부정과 불법은 이렇게 보시면 돼요.
불법은 율법 위반이고요.
부정은 이방인들이 하는 모든 짓거리라고 보시면 돼요.

이미 앞서서 다 나왔잖아요.
왜냐하면 성도들 중에는 이방인도 있고 유대인들도 있잖아요.
그러면서 최종적으로는 “모두가 다 율법 위반자가 되었다.”
“불법에 이르렀다”라는 거예요. 불법에.
이 ‘율법 위반자’의 의미도 뭔지도 잘 모르죠.

‘이전에는 그랬다’라는 거예요. 이 과거형으로 돼 있거든요.
그럼 이제는? 이제는 나오죠.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이렇게 해석하니까 쉽잖아요.

그런데 이게 과거형으로 가버리면
‘이제는 너희 지체가 의에게 종으로 거룩함에 이르렀다’가 돼버려요.
명령형을 빼버리고.

왜 이게 명령형으로 나오느냐? 제가 곰곰히 생각을 해봤어요.
상승 개념이거든요. 성화론자들이 이런 본문을 그렇게 해석할 가능성이 높아요.
아니 설사 명령형으로 했다 쳐봅시다. 그러면 ‘목사님 제대로 번역해야 돼요?’
그건 별 의미가 없어요.

성령을 받은 자들은 말씀을 통하여서 우리가 지시를 따르고 할 그 상태가 아님을 이야기해요.
지금 로마서 자체에서는 계속해서 앞뒤가 맞지 않는 이 내용,
모순적인 내용을 계속 얘기를 하고 있거든요.

앞뒤가 왜 안 맞는지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이 조치를 우리가 바꿀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죄의 삯은 사망이라’ 했잖아요.
그러면 첫째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은 사망이 왕 노릇하는 세계에 살았잖아요.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그럼 은사는 우리가 원한다고 받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잖아요.
‘아니 그러면 우리는 뭐 하면 됩니까?’ 이 질문을 해야 되잖아요.
지금 이게 모순이에요.

마치 우리에게 뭔가 주도권이 있는 양 말씀을 하는데
주도권이 있죠. 인간의 눈에는. 주도권이 있는데 주도권을 행세하면서
이 주도권이 뺏기는 방식으로 주께서 우리를 인도한다는 거예요.

만일에 머리가 좋은 사람은
‘그래 우리가 죄의 삯은 사망이요. 오케이 정답. 그럼 어느 누구도 은사 쪽으로 넘어올 수 없다.
율법의 한 의가 없으면 이 은사를 받을 수 없다. 그러면 나는 뭐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 몸은.

그러면 이 말씀, 모든 말씀들은 누가 듣고 있어요? ‘나’가 듣고 있잖아요. ‘나’가.
그러면 듣는 나는 이 말씀을 확정을 짓기 위해서는 가만히 있으면 돼요.
근데 인간이 가만히 있습니까? 연약한 육체거든요.
만약에 연약한 육체가 아니라면 이 말씀을 딱 받고 난 뒤에 가만히 있어야겠죠.
어떤 생각도 하지 않고 사고부터 시작해서, 행동을 하지 않는 겁니다.

지금 이 23절에서 이 말씀을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성도는 증인이라는 거예요.
“성령을 받게 되면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고 했잖아요.

그 증인이 되게 하는 방식이 뭐냐? 하면
복음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제대로 가르쳐 줍니다.
가르쳐 주게 되면 지금까지 없었던 죄가 튀어나와요.
어떤 죄가 튀어나옵니까? 복음을 갖고 질서를 잡으려는 죄가 튀어나오는 거예요.
얼마나 충격적입니까?

23절만 있으면 속이 시원하잖아요.
어차피 우리는 아무것도 못한다하니까.
아무것도 못하는데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렸다”
‘드렸다’라는 것이 이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뒤에 보면 또 미래형으로 나오거든요.
과거형만 나오는 게 아니라 미래형, 현재형이 다 나와요.

그러면 왜 이렇게 복잡하게 말씀하시느냐?
연약한 육체이기 때문에 연약한 육체를 통해서
주님은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십자가의 증인으로 삼으려고 하는 거예요.

‘주님 이런 고통 없게 해 주옵소서’
로마서에서 뭐라 합니까?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이 말이 안 되잖아요.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라는 것을 제대로 보여주는 자리가
지금 우리가 거한 자리예요.

사람은 지식을 갖고 이 모든 현실을 부정하려고 해요.
그런데 이 육체는 엔트로피 법칙에 의해서 계속해서 사라지고 분해되어야 됩니다.
이 뇌에 의해서 우리의 생각과 사고들이 계속해서 복잡해져야 돼요.

그런데 말씀을 통하여서 계속해서 정답을 찾으려고 하죠.
정답을 찾으면 이 복잡한 세계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벗어날 수 있다라고 생각해요.
그게 뭔가 하면 신천지에 들어가는 거예요.
하나님 교회에 들어가는 겁니다.
안 그러면 개혁교회에, 제 친구가 있거든요.
화란에 가서 유학 갔다 와서 여기 남양주 그쪽 동네에서 개척교회를 하는데 사람들이 꽤 모여요.
그러면 거기에 가서 그걸 외우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갈등이 하나도 없어요.
천국에 대해서는.

근데 세상 사는데 그게 됩니까?
그러면 뭐가 되는가? 하면 교회가 도피처가 돼요. 도피처가.
복잡하지 않는 도피처.
왜냐하면 모여 있으면 모두가 다 동일한 신앙 고백을 하고 동일하게 인정을 하니까.

근데 여러분 성경을 보세요.
이 요한계시록만 보더라도 칭찬을 하면서도 동시에 공격을, 책망을 하죠.
그런 걸 눈치 못 챕니까?
서신서에도 똑같아요. 교회를 칭찬하면서 동시에 책망을 해요.

우리는 칭찬했으니까 책망하는 것은 기꺼이 받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인간은요. 자기가 신이기 때문에 안 받아요. 그걸.
그래서 그들은 그런 질서 체계로 들어가서 이 복잡하게 사는,
괴롭게 사는 이 몸을 탈출하고 싶은 겁니다.

오죽하면 자살하겠습니까?
주님이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내 형제나 부모나 처자를 버리고 따르지 아니하면 제자가 못 된다”라고 하니까
그들은 그 말씀을 정반대로 해석을 해요.
상대 쪽에서 복음을 너무너무 듣기 싫어서 ‘호적에서 파자’ 이렇게 나와야 되는데
자기들이 먼저 파버리죠. 왜? 속 시끄럽잖아요.
‘너 거기 들어가지 마. 빨리 집으로 와’ 이런 소리가 싫은 거예요.
신천지 간 애들, 이렇게 찾는 부모들이, 부모들이 버렸어요? 자기가 버렸어요? 지가 버렸죠.
그러니까 말씀에 딱 맞는 겁니다.
저것들은 말씀도 엉터리지만 성경 배워서 내가 신이라는 거예요.
모든 결정은 내가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도를 보게 되면 성도는 말씀에 의해서 휘둘려요.
이스라엘 백성들을 우리가 보고 있잖아요. 보면 어떻습니까?
광야 길로 인도하면 율법이 그들을 중심으로 잡고 있으면서
율법에 의해서 계속해서 흔들리는 환경으로 몰아가면 모두가 다 어떻게 됩니까?
의지할 것 없는 인생이 되죠.
흙으로 돌아가는 즐거움 속으로 그들은 휘말린 거예요.

문제는 인간들이 예수 믿는다고 하는 사람, 구원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은 답을 자꾸 원해요. 답을.
흔들리지 않는 시몬스 침대를 원하거든요. 안정적인 것.
그 안정은 언제 안정을 얻는가? 하면 우리 목숨이 끊어지면 안정을 얻어요.
물론 성도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에 안정 속에 들어갔어요.
안식 속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히브리서에서도 또 모순되는 이야기를 하죠.
“이미 안식에 들어갔는데 안식할 때가 남아 있다”라고 또 이야기를 해요.
이 미치는 겁니다. 왜? 연약한 육이기 때문에.
약한 육은 뭘 추구합니까? 이 연약함과 반대되는 질서를 갖고 와야 돼요.

사도 바울이 이 과거형으로 이렇게 얘기를 해버리면
과거형인데, “이제는”도 과거가 되면 “우리는 종으로 드려서 거룩함에 이르렀다”가 되죠.
그럼 여기에서 무엇이 꽃이 핍니까?
무궁화 꽃이 피는 게 아니라 십자가가 꽃이 확 피는 거예요.

말씀을 책망으로 보지 않고 말씀을
‘아 요거 이해하면, 이거 받아들이면 더 분명하고 확실한 진리에 도달할 수 있겠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귀신 씌였어요.
그래서 제가 그런 말씀을 드렸잖아요.
왜 2천년 기독교가 유대교를 베꼈느냐? 라고 하면
성령은 안 보여요. 주님이 세상 끝날까지 동행한다는 것은 안 보이죠.
그러면 동행하는 ‘나’는 보이죠.
그럼 내 중심으로 말씀을 정리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실수하지 않고 완벽한 교리를 만들어내려고 해요.
그럼, ‘여기가 바로 14만 4천이 들어올 집단이다.’ 모든 교회가 그 생각을 하거든요.
성령의 역사는 철저하게 배제해버립니다.

사도 바울은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잖아요.
로마서를 제대로 연구를 하면 신비주의자가 된다 했잖아요.
근데 신비주의자를 용납합니까? 안 합니까? 용납하지 않죠.
이것도 용납하지 않고 저것도 용납하지 않으면서 철저하게 말씀으로 끌고 와요.
왜냐하면 인간은 언어를 갖고 신이 되고자 하기 때문에.

그 언어를 갖고 신이 되고자 하는 그 자리로 말씀을 집어넣어주면
그 속에서 어떤 사태가 일어나느냐? 하면 십자가 사건이 일어납니다.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이 구절도 재밌습니다. 다 미래형으로 돼 있어요. 둘 다 동사가.
실제로 그렇게 살았죠. 그다음 21절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게 ‘그때’라는 이런 용어가 등장을 하는데
여기에 ‘얻었다’라는 동사가 미래형으로 돼 있어요. 재밌습니다. 이게.
“그렇게 된다면 무슨 열매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라고 질문을 하는 거예요.
어떤 사고? 앞에 나왔잖아요.
“은혜를 더하기 위해서 죄에 거하자”라고 주장하는 자들에 대한 이야기예요.
이걸 갑자기 사도바울이 완전히 돌려가지고 처음 복음을 믿기 전 이야기를 하는 것도 맞지만
지금 이 내용은 이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요.

“그렇게 되면 무슨 열매를 얻겠느냐?” 얘기예요.
죄의 삯은 사망이죠. 그것밖에 안 나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이야기 해요.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한다”라는 거예요. 이제는.
여기는 현재형으로 되어 있어요. 지금.
지금 언제? 이 말씀을 듣는 지금.

복음이 들리니까 부끄러워하는 거죠.
뭘 부끄러워합니까? ‘은혜를 더하기 위해서 죄를 더하자. 죄에 거해야 되겠네.’ 이런 논리들.
그러한 논리들에 대해서 부끄러워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부끄러워한다”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인간은 무엇을 부끄러워합니까?
선악과를 먹었을 때 이 자기가 벌거벗었으므로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렸죠. 그 부끄러움.
그 부끄러움을 가리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만든 피조 세계를 처음에는 무화과 나뭇잎에 불과했지만
모든 우주 만물을 자기의 것으로 옷을 입어야 돼요.
완전히 예수님이 하신 일과 정반대예요.

그래서 수요 예배 시간에도 그런 얘기했잖아요.
우주 만물, 모든 것들을 자기의 이 악세사리로 치장을 하는 겁니다.
주님이 만든 만물의 그 세계가 돌아가는 그 법칙들이 있잖아요.
그 법칙들도 전부 다 나를 위한 것으로 다 바꿔치기하는 거예요.

오히려 이들은 부끄러워해요.
뭘 부끄러워하느냐? 하면 지금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한다” 할 때
“아 은혜를 더하기 위해서 죄에 거하자”라는 이 말이 부끄럽다라는 거예요. 거꾸로.

원래는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은 안 부끄러운 거잖아요.
말씀했으니까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하니까
그러면 ‘죄에 거하자 죄를 더 짓자’라는 것이 이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한 도구잖아요.

그런데 그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한 그 도구를 확 뜯어버렸어요.
오히려 그게 부끄러운 거예요.
조금 쉽게 이야기하면 사도 바울이 주님을 만나기 전에 어떻게 살았습니까?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게 살았거든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으로.
안식일을 지키면서 소득의 십일조를 하는 그 모습이 어떤 모습이냐? 하면 부끄러운 모습이죠.
주님을 만난 이후에. 그죠? 그걸 부끄러워하잖아요.

그런데 그것만 있나요? 아니에요.
복음을 들은 이후에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하니까
사람의 논리가 뭐가 들어옵니까? ‘아 그러면 죄를 더 지어야 되겠네.’
이것도 뭐가 되죠? 인간의 행위가 되는 거예요.

지금 로마서를 읽게 되면 인간은 끊임없이 육에 속한 자들은 행위를 내려고 해요. 행위를.
말로는 믿음이라 해놓고, ‘믿는 행위를 내놔라’고 이야기를 하거든요.

성도는 말씀을 듣는 가운데 그 일을 부끄러워하는 겁니다.
뭘 부끄러워합니까?
십자가는 부끄럽습니까? 안 부끄럽습니까? 안 부끄럽죠.
그러면 이 행위들은 십자가를 부끄럽게 여기는 행위잖아요.

왜 십자가를 부끄럽게 여깁니까?
십자가 앞에 서 버리면
내가 아는 것, 믿는 것, 체험한 것 모든 것들이 뭘로 드러납니까? 어둠으로 드러나죠.

주의 영께서 인도하지 않으면 그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요.
당당하게 여기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를 말씀 앞으로 인도하셔서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서
우리를 그러한 일들, 진짜 부끄러움이 뭔지를 아는 겁니다. (저기 또 왔어요.)

성령을 받기 전에는 십자가가 부끄러워요.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다” 하잖아요.
그러면 표적과 지혜가 사람들이 보기에는 받아들일 만하잖아요. 표적과 지혜.
지식으로 받아들이고 표적을 보고 믿는 게 뭐가 잘못됐습니까?

그런데 성령을 받아보니까
지식으로 믿고 표적을 보고 믿는 모든 것들이 성령을 받기 전에는 어땠습니까?
‘야, 진짜 메시야다. 진짜 하나님이 보내신 다윗의 자손이다’라고 생각을 했는데
성령을 받게 되니까 표적으로 보고 옆에서 말씀을 듣던 모든 것들이 뭐가 돼요?
십자가 앞에서 어리석음으로 드러났다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희한한 게 사복음서 때는 그때도 십자가 이야기하지 않지만,
고린도전서만 가도 모든 지식을 부정하거든요.
고린도전서도 어려운 게 그런 거예요.
고린도전서를 읽어보면 지식이 충만하거든요.
근데 지식을 충만케 하는데 사도바울은 그 지식을 뭐로 바꿔버립니까?
십자가의 지혜로 바꿔버리죠.

이 방식은 어떤 방식인가? 하면 모든 율법이 인간들이 보기에는 지식이잖아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 했잖아요.
그런데 성령이 와버리면 이 지식이 뭐로 바뀝니까? 십자가의 지혜로 바뀌어버려요.
그러면 지식을 소유한 자들은
십자가를 증거하는 자들이 어리석고 미련하고 바보 같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로마서만 넘어오면 갑자기 사람들이 지식에 환장을 했어요.
‘로마서만 제대로 배우고 제대로 연구한다면 뭔가 알지 않겠느냐?’
그래서 로마서를 해석할 때 사복음서를 삭제해버리죠. 아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것을 삭제해버려요.

삭제를 하니까 남는 게 뭡니까? 지식밖에 안 남는 거예요.
지식을 남기려면 로마서를 해석할 때도 더 할 건 더하고 이런 짓은 함부로 못하죠.
그런 짓 하는 인간들도 있지만.
뺄 걸 빼야 돼요. 성경을 해석을 할 때.
뺄 걸 빼고 자기가 원하는 구절들, 원하는 본문들을 다 끌어모아서
뭐가 서말이라도 꿰매야 뭐가 목걸이가 된다. 이런 말이 있잖아요.
그렇게 생각을 하는 거예요. 복음을.

‘찔러 쪼갠다’라는 말씀은 십자가 지신 주님이 지금도 친히 자기 일을 하신다라는 얘기거든요.
그걸 믿는다라고 하니까, 보세요. 이게 얼마나 웃기는 이야기입니까?
우리가 믿는다고 주님의 일이 이루어집니까?
주님이 일을 하시는 방식을 그런 식으로 믿는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로마서에서 나의 믿음은 가짜 믿음이라는 것이 계속해서 드러나야 되는 겁니다.

그 마지막은 사망이죠.
그러면은 ‘목사님 우리는 그 부끄러워하는 그 일들을 안 일으켜야 되지 않습니까?’라고
또 질문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마지막은 사망이니까 .
사망인 걸 아니까 ‘이제 우리는 부정과 불법에 드리는 그러한 모습이 없어야 되지 않습니까?’라고
또 질문을 합니다.

또 보세요. 바울의 이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게 되면 주님의 말씀이 되잖아요.
주님의 말씀이 되면 십자가를 전하는 말씀이 되잖아요.
그러면 이 말씀 앞에 아멘 하면 될 문제인데, 간단한 문제잖아요.

그런데 이걸 보면서 그 마지막이 사망이니까
‘여러분 이제 우리는 부정과 불법에 우리 몸의 지체를 드리지 않아야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새 생명 가운데서 살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이 말은 다 맞는 말을 해요.) 드려야 됩니다.’ 그게 성화론이거든요.

성경에서 성화론은, 죄의 깊이를 알아가는 성화론이에요.
놀라운 것은 어떤 성화론인가? 하면 사도바울이 성령을 받았잖아요.
성령을 받으니까 과거와 전혀 다른 삶을 살죠.
다른 삶을 살 때 우리 인간들이 보기에는 주님 보시기에 기뻐하시는 삶을 살았잖아요.
복음을 열심히 전했잖아요.

그런데 성령 받은 바울 입장에서는 그렇게 전하는 것조차도 뭐가 돼요? 죄가 돼요.
그게 성화예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 거예요.

그러면 상대가 육에 속한 사람은 상대를 보고 뭐라고 하는가? 하면
‘야 여러분 복음 때문에 이 말씀 들으러도 오네요’라고밖에 얘기를 못하는 거예요.
성령이 없는 사람은.
사도 바울을 칭찬하겠죠. 사람들이 사도바울은 본받고 싶잖아요. 그죠?
젊을 때 목사 되고자 하는 사람은 다 사도바울은 본받고 싶거든요.
결말을 못 봐서 그래요.
쓸쓸한 결말을 봐야 바울이 안 되고 싶고
쓸쓸한 예수님의 결말을 봐야 예수님을 안 믿고 싶은데 그들의 머릿속에는 망상이 가득한 거죠.

나도 제대로 성경을 배우고 목사가 된다면
저런 뛰어난, 옆집에 있는 30만 교인이 될 수 있지 않겠느냐?
모든 마음이 거기에 사로잡혀 있는 거예요.

그런 꿈을 갖고 있다가 복음을 들어버리면 목사 안 합니다.
왜 목사 안 할까요? 돈이 안 된다는 걸 빨리 파악했어요.
그러면 그 사람이 처음부터 복음을 들은 목적은 돈 벌기 위해서 들은 거예요.

그런 사람 많이 봤어요. 총신 대학원까지 나왔는데 복음을 들으니까 ‘나 돈 벌러 갈래.’
제가 보기에는 핍박을 면하고자 하는 거예요.
그 아내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사모가. 돈벌이 안 되는데.
제가 그걸 탓하는 게 아니라 죄인이라는 거예요. 죄인.
죄인으로 드러나야 되는데 모든 사람들이 그 꿈을 갖고 있는 거예요.

항상 말씀이 앞서가요.
사도바울이 왜 뒤로 못 물리는가? 하면요. 자기가 복음을 전해버렸거든요.
전해버리니까 그 복음을 들은 자들이 바울을 가만히 안 둬요.
한쪽은 복음을 모르는 자들이 공격을 하고요.
다른 한쪽은 사도바울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니가 말했지 않느냐? 니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들으면 저주 받는다 했지 않느냐?’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목사들이 왜 복음을 안 전하려고 합니까?
성도들이 왜 복음을 안 전하려고 해요?
자기가 그 말을 하는 순간 자기가 그 말씀에 의해서 책망을 당하고 공격을 당하게 돼 있어요.

그런데 성경에 보게 되면 이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받은 내용을 전했는데
놀랍게도 자기가 전한 그 복음에 의해서 자기 자신이 어떻게 됩니까? 산산조각납니다.

성도가 복음을 내뱉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말씀이 앞서가기 때문에 말씀이 앞서가면
차후에 그 말씀에 의해서 우리는 오히려 책망을 받고 오히려 죄인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물론 그 기간이 길 수도 있어요. 30년이 걸릴 수도 있어요.
그건 우리가 할 일이 아니고 그건 주의 일이죠.

22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해방되고는 ‘해방되었고’입니다. 과거입니다. 과거 분사고요.
계속해서 “해방되었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서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얻었으니’ 이렇게 돼 있는데
‘얻는다’ 지금 현재형이 돼 있어요. 이거 ‘얻는다’는. ‘얻었으니’가 아니라 현재.
과거에 그렇게 됐는데 현재인데
이게 우리가 생각하듯이 단순하게 딱 정리가 되는 게 아니라
그 복잡성 속에 우리를 집어넣어버렸어요.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선악과를 먹었죠.
그러면 이 말씀을 방금 이렇게 설교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취사선택을 하려고 하죠.

그런데 성령께서는, 주님은 이 말씀 속에 우리를 집어넣어버립니다.
그래서 이 모든 말씀이 우리에게 계속해서 반복해서 해당 사항이 있는 말씀으로 작동을 해요.
제가 사람의 입으로 말할게요. 좀 어려우니까.
무슨 얘기인가? 하면 말씀을 다 들었잖아요.
들으면 우리는 과거에 그랬으니까
이제는 그 마지막은 영생이니까 그 영생의 길로 가야 된다라고 생각하면서
잘못된 것들은 삭제를 하려고 한단 말입니다. 잘못된 말씀은.

그런데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놀랍게도 주님은 자기 백성을 이 말씀 속으로 집어넣어서
이 말씀이 반복되는 현장의 몸으로 삼으신다라는 거예요.
그래야 십자가의 증인이 될 거 아닙니까.

근데 우리는 말씀을 읽어가고 이렇게 듣게 되면 마지막 결론을 원하잖아요. 결론.
결론은, 결론이 성립이 되려면 이 왔던 것들을 다 부정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성경의 결론은 뭔가? 하면
이 결론을 위해서 어떻게 합니까? 이 말씀 세계 속으로 우리를 집어넣어버려요.

그래서 23절에 가서 거꾸로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이야기를 딱 해버리는 겁니다.
‘손 떼!’ 이야기입니다. ‘손 떼!’
‘너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느냐?’ 이 얘기예요.
제가 목소리 원래 높지만, 또 또...
 ‘할 수 있는 게 뭐냐?’ 이 얘기예요.

그러면 성도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책망을 받는 가운데 죄인으로 드러나면서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임을
이 두 요소를, 동시에 보여주는 증인으로 살려지게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심판주와 같은 행세를 하고 있는 저희들에게 말씀을 주셔서,
복음을 들려주셔서 그 악마성을 철저하게 들추어내심을 감사드립니다.
복음이 들려지게 하시고 십자가만 자랑케 하셔서
우리의 삶을 말씀 속으로 다시 인도하셔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라는 그 말씀이
지금도 우리 속에서 역사하고 있음을 드러내시면서
우리들을 십자가의 증인으로 삼아주심을 감사하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말씀 앞에 십자가만 밝히 보이기를 소원하는 주의 백성에게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관리자 23-11-28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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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