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4-02-18 23:11
20240218 로마서 강해 53강 롬 8:10-13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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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4-02-19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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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18 로마서 강해 53강 롬 8:10-13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다 함께 묵상 기도드리겠습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 고백하겠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 말씀, 잠언서 26장 27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잠26:27)
“함정을 파는 자는 그것에 빠질 것이요 돌을 굴리는 자는 도리어 그것에 치이리라”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우리의 본성상 타인을 이용하여,
나의 이익으로 삼고자 하여 함정을 파면서 살아가는 저희들을 부르셔서
생명의 길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삼아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저희들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사망으로 이끄는 거짓된 복음이 아니라
생명으로 이끄는 십자가의 복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시편 85편 1절에서 13절까지 말씀을 교독하겠습니다.
[고라 자손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시85:1~13)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땅에 은혜를 베푸사 야곱의 포로 된 자로 돌아오게 하셨으며
주의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고 저희 모든 죄를 덮으셨나이다(셀라)주의 모든 분노를 거두시며 주의 진노를 돌이키셨나이다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분노를 그치소서 주께서 우리에게 영원히 노하시며 대대에 발분하시겠나이까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으로 주를 기뻐하게 아니하시겠나이까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보이시며 주의 구원을 우리에게 주소서 내가 하나님 여호와의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대저 그 백성, 그 성도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저희는 다시 망령된 데로 돌아가지 말찌로다 진실로 그의 구원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가까우니 이에 영광이 우리 땅에 거하리이다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하감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 의가 주의 앞에 앞서 행하며 주의 종적으로 길을 삼으리로다”

이 시간 주민자 집사님 대표해서 기도해 주시겠습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지혜로운 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고, 미련한 자의 마음은 잔칫집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저의 마음은 그러나 늘 잔칫집에만 있습니다.
미련한 자들을 초상집 문 앞으로 끌고 가 인간의 실체를 바로 보게 하시는 지혜로우신 주님은
살아있다고 나대지만 실은 죽은 자임을 알게 하십니다.
어둠은 빛을 싫어합니다. 저는 언제나 어둠입니다.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는 어둠의 골짜기에 주님의 긍휼이 임하셔서
십자가 아니면 주님과 아무 상관없는 자라고 오늘도 살아있는 말씀으로 끌려나왔으니
세상은 간데없고 주님의 십자가만 바라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나님 말씀, 로마서 8장 10절에서 13절 말씀을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롬8:10~13)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아멘

10절 말씀을 다시 보면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아멘’ 이렇게 하면 끝나버릴 문제잖아요. 이것을 무슨 수로 증명하겠습니까?
여러분에게 ‘그리스도께서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었고, 영은 의로 인하여 살았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이해되지도 않는,
수학 공식같이 1+1=2다 이렇게 말씀을 하면 참 쉬울 텐데
굉장히 추상적이라는 이런 느낌을 지울 수가 없죠.

특히 여기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거하신다”
증거를 대보세요. 증거를.
이 말씀보다 무서운 말씀이 없거든요.
‘나는 확신합니다.’ 확신하는 사람한테 우리가 기가 죽거든요.
구원파들이 그렇게 하잖아요. 확신하는 거. 신천지 애들도 마찬가지고 확신하는 거,
다락방도 마찬가지고 확신하는 거, 다 확실해요.
광화문에서 데모하는 사람들도 확실합니다.

‘그 확실한 증거를 대라’ 하면 다 땅의 것이에요.
자기 중심으로 증거를 대는 겁니다. 자기 중심으로.
나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들은 부정당해야 되는데
부정당한다라는 말은 내가 그 증거물이 될 수 없다라는 겁니다.
증거물이 될 수 없기에 증인이 되는데

이런 말씀들을 사람들이 이렇게 읽게 되면
본능적으로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지식이라는 것을 낚아채는 겁니다. 낚아채요.
이게 지금 지식이거든요.
‘아니 목사님 어떻게 지식입니까? 이게 현실이잖아요.’
맞아요. 현실인데, 현실인데 지식이잖아요. 이 현실과 지식이 겹쳐져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돼 있느냐? 하면
“빛이 있으라” 하면 그 말씀이 언어잖아요. 언어가 실제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면”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이미 그리스도께서 성도 안에 거한다라는 말이거든요.
거한다라는 말인데 문제는 내가 이것을 어떻게 확정할 수 있느냐라는 거예요.

이단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요. 할 수 있는 것을 다 뽑아내는 겁니다.
이단들의 공통점은 딱 하나예요. 지식입니다.
왜냐하면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지식 외에는 구원받을 길이 없다라고 생각해요.

‘목사님 믿음에 행위가 있잖아요?’
그 행위조차도 들어가게 되면 지식을 바탕으로 깔고 있습니다.
지식이 되었든 행위가 되었든 그 모든 것들이 나로 인하여서, 나로 말미암아,
나에게로 돌아오는 내용들이 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은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합니다. “귀 있는 자는 들어라.” 이 구약하고 똑같아요.
예수님의 말씀과 동일합니다. 못 알아들을 사람은 못 알아들으라는 거예요.
못 알아들을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두 가지가 나와요.
지식을 낚아채든가 아니면 성경에 나오는 그 행위를 내 몸을 통해서 끄집어내려고 해요.

지금 주님은 이 두 가지 요소를 다 필요 없다고 합니까? 있다고 합니까?
지금 있다고 하잖아요. 설교를 사람들이 거꾸로 듣는 경향이 있어요.
제가 지금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지식이 필요 없네요. 행위가 필요 없네요.’
모든 만물이, 그 만물 안에 언어도 다 들어가 있습니다.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모든 만물이 주로 말미암고 주를 위하여 창조되었어요.
‘필요 없다’가 아니라 반드시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두 요소가 반드시 필요해요.

문제는 뭐냐? 하면 인간이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이 말씀을 갖고 자기가 소유화하려고 한다는 게 문제인 거예요.
그래서 로마서를 이렇게 읽어가면 남는 게 죄인 중에 괴수로 남아야 되는데
지식이 남고 행위가 남는 거예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거니까 여러분 행위로 구원되는 것 아닙니다.’
이것 갖고 피 터지게 싸우거든요. 지금도 피 터지게 싸웁니다.
‘아니 아니야 행위로, 반드시 행위를 해야 구원을 얻어.’

여러분은 어느 쪽에 서 있습니까? 어느 쪽에 서 있어요?
제가 이미 답을 말씀드렸죠. 두 가지 다 있어야 돼요.
근데 신학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우냐? 하면
이 중에 하나를 택해가지고 구원용으로 쓰기 때문에 그래요.

근데 성경에 보면 믿음도 있고 행위도 있어요.
야고보서에 의하면 사실은 행위 자체가 믿음이고요. 믿음 자체가 행위예요.
이게 분리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단들이 이걸 분리한다라는 거예요. 분리.

왜 분리할까요?
예수님께서 인간의 모든 행위를 부정하죠.
부정을 하고 십자가의 피로 구원을 했다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그러면 나오는 게 뭐예요?
‘내가 어떻게 살아도 되겠네’ 이 논리가 나오거든요.

왜냐하면 구약과 (잘 보세요. 여러분 논리를 보세요.)
구약에는 우상숭배하였고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서 멸망을 당했다면
이 사도 바울, 예수님을 만나기 전 사울 같은 경우에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모습으로 살아서 예수님을 살해했거든요.
두 요소가 다 예수님을 살해했다면,
그다음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구원만 된다면
우리의 어떤 행위로도 구원받을 수 없죠? 이 말씀이 맞아요? 틀려요? 맞잖아요.

그다음 나오는 인간들의 행태가 뭐냐? 하면
‘그러면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되겠네’ 이 논리가 튀어나와요.
어차피 피로 구원되잖아요.

우리의 행위로 천국과 지옥이 나누어집니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람은 ‘아닙니다’라고 주장할 것 아닙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행위에 따라 천국과 지옥을 가요.
이제 엄청나게 헷갈리게 하죠. 지금 헷갈리게 하는 게 제 목적이에요.

왜냐하면 이 악마성은 하나의 그 체계를 잡고자 하거든요.
마치 국민의 힘과 더불어민주당을 둘 다 인정 못하잖아요.
혹시 둘 다 50% 50% 인정하는 사람 손 한번 들어보세요. 저밖에 없네요.
불가능해요. 인간은.
인간은 죄인 되고 싶은, 예수님 앞에 죄인 중에 괴수로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끝까지 무엇을 놓지 않느냐? 하면 ‘구원’을 놓지 않아요.
그래서 이런 10절 말씀을 읽으면서 나름대로 해석을 하는 겁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믿읍시다. ‘몸은 죄로 인하여 죽었습니다.’
사실은 몸은 죄로 인하여 죽었다라는 이 내용이
구약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현장 속에서 드러나거든요. 이게 관념이 아니고 실제 이야기예요.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자의 모습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그대로 보여줍니다.
이해가 잘 안 되시나요?
아브라함의 생애 자체가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이 영은 제가 중첩으로 얘기했죠. 성령도 되고 사람의 영인데
왜 이 내용을 애매하게 사도바울이 표현을 했느냐?
인간은 하나를 낚아채려고 하거든요.

그게 아니라, 지금 복음을 전하는 것이 목적이에요.
사도 바울이 인간에게 제대로 된 명확한 용어를 써서 주님께서
‘야 너희들이 이 개념을 정확하게 알아야 돼. 그러면, 이걸 알면, 이걸 믿으면 천국 가.’
이렇게 성경 계시를 주셨다라고 사람들이 생각을 하는 겁니다.

이 본문은 ‘성령 안에 있는 자가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이래 돼 있거든요.
의라는 것은 ‘율법 외에 한 의’잖아요.
‘율법 외에 한 의’로 성도가 살림을 받았을 때 그 사람을 성령의 사람이라고 하거든요.
살림을 받은 겁니다.
물론 성령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어요.
‘성령은 의로 말미암아 생명으로 드러난다’ 뭐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이론이냐? 실제냐?의 문제예요.
인간은 말로 하는 순간 다 이론이 돼요. 말로 하는 순간.
모든 행동을 언어로 표현하잖아요. 그 언어로 왜 표현합니까? 하나님 흉내내는 거거든요.
언어로 표현하면 그 모든 것을 어디에 넣을 수 있어요? 내 머릿속에 넣을 수 있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누굽니까? 그 테슬란가? 뭐 만든 사람 있잖아요. 지금 실험했잖아요.
머리에 장치를 넣어가지고... 이제 다 서울대 갑니다. 이제 게임 끝났어요.
이제는 시험 치러 갈 때 뭘 보는가? 하면 ‘머리에 인식했는지 안 했는지’ 그걸 볼 거예요.
금방 옵니다. 그런 거. 지금 휴대폰 못 들고 들어가잖아요.
옛날에는 휴대폰 먹통인데 그거 들고 들어간다고 누가 뭐라 합니까?

앞으로는 들어갈 때 삐리리삐리리 뇌에 뭔가 인식됐다.
‘아파가지고 인식됐다’ 하면 그것 때문에 시험 못 칠 수도 있는 시대가 오는데...
사람들이 그걸 계속해서 꿈꾸는 문제가 뭐냐? 하면
그냥 단순하게 ‘영원히 살고 싶다.’ 그것도 있지만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거예요.
AI가 갖고 있는 정보를 내 머릿속에 다 넣고 처리 연산이 우리가 즉각적으로 반복할 정도만큼
그렇게 이 반응이 나온다면....
제가 보기에는 죽어야 돼요. 머리 아파서 어떻게 삽니까? 그거.

“의를 인하여 산 것이라”
이 그리스도께서 안에 계시기 때문에 이 현장을 성도의 몸에서 만들어 내시겠다는 거예요. 이 현장을.
‘몸은 죽은 자로, 영은 의로 인하여 산 자로.’ 이거를 달리 표현하면
십자가만 자랑하는 자로 만들었다라는 겁니다.

그러면 너희 안에 그리스도께서 없다면 이 두 요소가 안 나온다라는 거예요.
죽은 자의 모습과 다시 살림을 받은 이 모습이 안 나온다는 겁니다.
이 두 용서가 다 나와야 돼요. 그리스도께서 안에 사시면.

제가 왜 자꾸 두 요소를 이야기하는지 아시겠죠?
우리 인간들은, 신학은 뭘 요구하는가? 하면 한 요소만이 나오기를 원해요.
이미 육은 “몸은 죽은 것이나 영은 산 것이다.”
우리는 ‘살았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살았다’라고 이야기를 신학적으로 계속 가르치니까
사람들이 그걸 좋아하잖아요. 그게 본성이고.

오늘 기도하실 때 초상집 이야기했거든요.
주일날 교회를 오는데 초상집에 옵니까? 잔칫집에 옵니까? (초상집에 와요.)
아~ 고것 수상합니다. 초상집에 온다는 게 수상해요. 잔칫집에 왔는데 초상이 나야 되거든요.
말씀이라는 게 그 정도로 어려워요.
‘나는 초상집에 간다’라고 할 때는 이미 초상집이 잔칫집이 된 거예요.

말씀은 뒤바꿈이 계속 일어나거든요. 이 초상집을 우리는 원하지 않아요.
원하지 않으니까 선수칩니다. ‘나 초상집에 가. 나 이미 죽었어.’ 선수를 먼저 쳐요.
물론 성도도 똑같아요. 선수를 칩니다. 그러면서 한 대 얻어터지죠.

‘나 죽었다’ 백날 이야기해도 ‘그래 맞아. 너 죽은 거 맞아.’
‘이미 주님의 십자가에서 다 완료했기 때문에 죽은 거 맞아. 의로 인하여서 산 것도 맞아.’
그래 그것이 너에게 정말 그리스도께서 거하신다면 이 코스...

이 코스 때문에 그래요. 어떤 코스? 예수님이 가신 코스.
그래서 지금 로마서 8장에서는 ‘하나님의 성령, 그리스도의 성령, 성령’을
지금 복잡하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성령만 있습니까? 그리스도가 계십니까? 성령이 계십니까?
하나님의 성령이 계십니까? 한번 답해보세요. 누가 계십니까?

이렇게 이야기하면 우리는 하나만 이야기하고 싶잖아요. 하나만.
우리가 다 그런 경향이 있어요.
‘이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의 성령을 증거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하나로 엮자.’
이게 우리의 악마성이에요.

왜 하나로 자꾸 집어넣으려고 하느냐? 라고 하면
이것을 하나로 만들 때 나한테 유리해요.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 20절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번 볼게요. 16절.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다른 보혜사’라고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로마서 8장에 나옵니다.
이 내용이 예수님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고 도우시는 자거든요.
성령님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다른 보혜사라고 하는 거예요.
‘이만희’가 다른 보혜사가 아닙니다. 이 이만희가 말하는 다른 보혜사는
왜냐하면 지금 신천지가 너무 많이 교회 속에 들어와 있잖아요.
이만희가 왜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하느냐? 하면요.
저 같은 설교를 녹취해서 다 올리잖아요. 그걸 연구를 해서 다 끌어모아요.
다 끌어모아서 자기 논리, 일관성 있게 다 집어넣습니다.
(다녀오셨으니까 아시죠? 다녀오신 분들 있거든요.)

너무나 맞는 말을 쏟아내거든요. 그런데 거기에 왜 먹히느냐? 하면
앉아 있는 모든 인간들이, 여기 있는 우리들이 ‘옳은 지식’을 원하기 때문에 그래요. ‘옳은 지식’
본문을 풀면 맞는 말을 하거든요.

그런데 또 다른 보혜사는 정반대의 일을 합니다.
‘그래 너 알았느냐? 안 것이 소용없느니라’ 얻어터지죠.
왜? 안 자체가 죄로 드러난 요소이기 때문에 그래요.
‘십자가의 피를 알았느냐?’ 그래서 한 대 맞자 이거죠. 왜? 안다는 나는 죄인이 아니잖아요. 벌써.
믿은 나는 죄인이 아니거든요.
근데 성령께서는 날마다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어서 십자가의 증인으로 삼는 거거든요.

‘증인’이라 하니까 무슨 문화센터 만들어가지고 우리 동네 걸어다니면 신천지나 그거 하거든요. 요즘.
문화센터 비슷한 게 교육하는 거. 자동차 있으면 잘 몰라요. 걸어다니면 알지.ㅎㅎ
걸어 다니면 그런 문화센터를 열거든요. 거기에 들어가면 낚아요. 낚아가지고 나중에
‘그래 우리 조금 더 뭔가 진지한 걸 한번 얘기해 볼까?’
그러면서 이제 성경 얘기를 서서히 하는데 교회의 틀린 점을 다 공격해요.
여러분 남 욕하는 재미보다 더 즐거운 재미가 없어요. (가보니까 그렇죠?)
교회가 틀린 이야기를 하면 다 맞아요. 그 틀린 얘기가.
제 설교 때도 똑같은 그 얘기를 했거든요.

틀린 얘기를 다 하니까 그 말이 사람들이 보기에 맞고
그다음 틀린 얘기를 하면서 이것은 이러하다 이것은 이러하다 가르쳐주는 거예요.
그 ‘또 다른 보혜사’라는 것이 마지막 자리에 가서 그 소리 하는데 지금은 그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또 다른 보혜사거든요.

왜 그러냐? 하면 말씀을 이만희가 가르친 걸 자기가 다 전수를 다 받았어요.
지금 이해 안 되세요? 무슨 말인지?
이만희를 또 다른 보혜사라고 하는 순간 내가 또 다른 보혜사가 되는 겁니다. 이해 가시죠?
아니 수능 만점 받은 애가 있는데 점수를 받아요. 만점 받는 비법을.
그러면 내가 만점 맞아버리면 내가 만점 맞는 자가 되잖아요.
그 악마성이 노출되는 거예요.

거기에 왜 교수들이나 판사들이나 검사 이런 사람들이 왜 거기에 혹하느냐? 하면
아는 게 그것밖에 없어요. 인간은. 거기에서 못 벗어나요.
그들은 고상하게 생각하거든요. 막 이렇게 춤추고 기도하고 이것도 엉터리라고 하면서
‘그런 거 아니다. 정말 진리의 보혜사는 말씀을 제대로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는 사람이다.’
그걸로 멈추는 게 아니라 행위까지 해야 되겠죠. 그걸 이야기를 하는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진리의 보혜사는 우리가 규정할 수가 없어요.

왜 규정이 안 되느냐? 하면 성령은 바람이거든요.
바람이 일을 하실 때는 그 모양이 너무 달라요.
다른데 결과만, 결과만 이렇게 톡 튀어나와요. 결과만. 7장에 나오듯이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하리로다.”
요 결론만 툭 튀어나오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님 그것도 흉내낼 수 있지 않습니까?’
흉내내야죠. 그것도 흉내내야 돼요.
흉내 내는 자의 특징이 뭐냐? 하면 자기 부인이 안 돼요.
자기 부인이 안 된다고요. 자기 부인은 인간은 할 수가 없어요.

그런 사람은 ‘자기 부인은 내가 할 수 있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성령의 일을 멸시하는 겁니다. 조금 더 볼게요.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뭐냐? 하면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거하셨잖아요. 함께 동행을 하셨거든요.
그 성령이 오시면 너희 가운데 거하게 되는데
이 ‘거한다’는 말이 자리를 잡고 완전히 장막을 친다는 거거든요. 그건 요한복음 1장에도 나오거든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그 얘기와 지금 성령을 주시는 이야기와 일치시키고 있는 겁니다.

문제는 육에 속한 자들은
‘이게 무슨 말이지?
성령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너희 속에 계시겠다? 뭐지? 이 계시면 어떤 걸까?’
그러면 이제 무슨 작업에 돌입하느냐? 하면 신학 작업에 돌입해요.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
성경에 나오는 요소들을 다 뽑죠. 뽑아가지고
방언을 하는 요소를 뽑아내든가 그러면 성령이 나한테 거한다
아니면 이웃 구제하는 그런 모습이 나에게 나온다면 이것이 바로 성령 받은 모습이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은 이 말씀을 갖고 조작을 하는 겁니다. 조금 더 보겠습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놀라운 말씀이거든요.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는다는 거예요.
성령을 받게 된 자는 ‘나는 고아였다’라는 것을 늘 바탕색에 깔고 있어요.
성령 없는 사람은 내가 고아였다는 걸 몰라요.
사도바울이 독특하게 ‘죄인 중에 괴수’라는 말은 어떤 의미입니까?
자기는 계속해서 이 고엘 사상을, 그 도우심을 받아야 되는 위치에 있다라는 거거든요.

성령이 오신다는 것은 ‘오늘도 너 고아네’ ‘오늘도 너 고아네’
그래서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음이 계속해서 드러나는 현장이 되는 거예요.
근데 우리는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는다라고 하니까
‘나는 고아가 아니오’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제가 기존 성경 해석과 너무 다르게 하죠. 다르게 할 수밖에 없어요.

이 말씀 자체를 인간은 자기 소유화시키거든요. 계속해서.
‘아니 목사님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데 어떻게 내가 고아입니까?’
주님이 함께 거하기 때문에 (어떤 자가 돼요?) 죄인 중에 괴수가 된다고 말은 해놓고
죄인 중에 괴수라는 말이 고아잖아요. 긍휼이 없으면 도무지 용서받지 못하는 죄인이라는 말이잖아요.
우리가 말씀을 보면서 얼마나 엉터리로 봤느냐 얘기입니다. 조금 더 봅시다.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니라”
이 ‘본다’는 의미가
‘부활한 몸체를 보는 거냐? 아니면 주님과 동행하는 자체냐?’ 이 문제가 또 거론이 되겠죠.
예수님이 1차적으로 부활한 몸체를 보입니다. 부활한 몸체를 보이는데
문제는 그 보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라는 거예요.
오히려 성령이 오시는 것이 주님과 동행하는 겁니다. 성령이 오는 것이.

우리는 성령이 오시는 게 좋습니까? 부활한 주님이 계속 계시는 게 좋습니까?
이 본문만 보더라도요. 우리가 얼마나 탐욕적인지를 알 수 있어요.
성령을 받으면 그다음부터는 우리는 이 육적. 육적으로 주님을 만나야 되고 뭔가 체험해야 되고...
이렇게 가는데 부활한 주님 만나도 지옥 갑니다. 물론 부활한 주님 만나서 지옥 간 사람이 없는데.

그 성경에 보면, 만나도 만난 자들의 관심이 딴 데 있어요.
그래서 주님이 주가 되셔서 성령을 보내주시는 겁니다.
성령을 보내주시게 되면 그들은 주님과 동행하는 거예요.
심지어 “너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 하잖아요.
갈라디아서 2장 21절도 마찬가지죠. “나는 죽고 내 속에 그리스도께서 산다”라는 거예요.
이걸 쫙 펴 봅시다. 여러분 속에 누가 사시는 거예요?
그리스도께서 사시니까 지금 주님이 살아계신 거예요.
이걸 갖고 또 이용하는 인간들이 있죠. 대구교회라고. 작은 예수라고 하면서.
그 얘기가 아니에요. 지금. 조금 더 봅시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예수님이 오셨을 때는 분명히 성령께서 충만하게 예수님께 임했죠.
그리고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내가 일한다”라고 했어요.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할 때 이미 예수님 자신을 통해서 보여주셨다 했잖아요.
그러면 예수님 안에 아버지께서 함께 계신 거거든요.

그런데 성령을 주시게 되면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이 구조가 어떻게 돼 있습니까?
원 하나를 그리면 “내가 아버지 안에” 그다음 “너희가 내 안에” 똑같은 원이죠.
그다음 “내가 너희 안에”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하나가 된다는 거예요. 하나.

‘하나가 된다’하니까 사람들은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하나님과 우리는 하나가 되었으니까 나, ‘나’가 어떤 사람이 된 거죠?
지금 그 생각으로 흘러가요. 지금 로마서에서 그 얘기를 하거든요.

사도행전에 보면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그 성도들이
어떻게 살았습니까?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성령을 받고 아버지가 하나 되어서 어디로 가셨어요?
본디오 빌라도를 ‘야 너 까불지 마! 이번에 투표할 때 자유통일당에 투표해.’
‘이 나라는 주님의 나라이기 때문에 목사가 정권을 잡아야 돼’ 이 논리인 거예요. 이 논리.

예수님이 그렇게 했습니까?
제가 정치적 발언을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살해당한 이유가 정치적 발언 때문이에요.
정치적으로 예수님을 죽였거든요. 권력 다툼해서. 그게 그걸 우습게 보면 안 돼요.

복음을 전해야 되지.
정치적 영역에 들어가가지고 ‘나는 좌파니, 나는 우파니...’
성도는 복음만 전해야 됩니다.

예수님을 보면 헷갈리는 사람이잖아요. 마치 가난한 자들과 있을 때는 좌파잖아요. 그죠?
민중 운동하는 사람.
그런데 권력 앞에서 뭘 합니까? 깨갱하죠. 안 붙잖아요. 이건 뭐예요?
좌파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지금 예수님께서 성령을 주시게 되면 제자들은 못 알아듣습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할 때
그 증인의 모습이 어떤 모습으로 이 땅에 드러나느냐? 할 때는
예수님이 성령을 받아서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신다 했잖아요.
그분이 십자가의 길을 갔어요.

그러면 너희들이 성령을 받으면 예수님은 자기 증거를 하다가 십자가 지셨잖아요.
그러면 성도들은 자기를 증거하는 게 아니라 누구를 증거합니까?
‘내 안에 계신 분’을 증거하잖아요. ‘내 안에 사시는 분’
한마디로 말하면 십자가를 증거하거든요.
십자가를 증거하기 때문에 성도는 예수님이 걸어가신 코스를 걷는다는 이야기를
지금 로마서 8장 11절에서 하는 겁니다. 다시 보겠습니다.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영은 하나님의 영이에요.
‘어! 하나님의 영인데 우리가 성령 받은 거 아닙니까?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거 아닙니까?’
맞아요. 근데 이걸 (우리가 지금 말씀이 우선이잖아요.)
우리가 이걸 하나로 단일화시킬 수 없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영이 어디로 끌고 갔습니까? 십자가의 길로 끌고 갔거든요.
끌고 갔는데 그리스도의 성령이 그 일을 그대로 하는 거예요.
지금 십자가 사건 속에 성도의 몸이 빨려들었다라는 것을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우리 언어로는 이게 해석이 안 돼요. 이 자체가.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령, 그리스도의 성령, 성령이 어디 계세요?’ 이렇게 나오거든요.
근데 이것을 어떻게 봐야 되는가? 하면
방금 말씀드린 것 같이 기능으로 봐야 돼요. 활동하시는 내용으로.

그래서 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그 하나님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앞서서는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했다가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면’ 했다가
이렇게 자꾸 언급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들은 지식을 갖고 구원을 얻고자 하잖아요.

근데 주님은 성령을 주셔가지고 그를 자신의 증인으로 삼고자 하는 겁니다.
모든 만물을 지으신 목적이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위한 창조잖아요.
주님을 위한 세상인데
인간들은 말씀을 보면서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은
자기 구원용으로 말씀을 해석하려고 하는 겁니다. 11절 거기에 보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거하시면 만약에’
이미 로마서에서 뭐라 했습니까? 이미 성도들이라 했잖아요. 그리스도께서 택함을 받은.
성도들이라 했으면 ‘만약’이라는 말을 왜 씁니까? ‘너희 속에...’
우리도 그러고 싶지 않아요. 오늘 이렇게 성도님들이 모였는데
‘여러분 속에 성령이 계십니다.’ 이 얘기를 하면 얼마나 좋아요?

근데 ‘여러분 가운데 성령이 거하신다면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죽을 몸도 살릴 겁니다.’
‘이미 거하기 때문에 여러분을 살릴 겁니다.’라는 말 필요 없이
확정적으로 얘기하면 되잖아요. 확정적으로.
근데 사도 바울은 지금 그런 식으로 말을 하지 않아요. 확정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는.

그러면 ‘확정적이 아니니까 그러면 창세전에 선택함을 받은 자는 구원이 취소될 수 있습니까?’
이 질문하는 사람에게는 취소될 거예요. 자기가 무슨 질문 하는지 모르니까.
지금 온 우주를 자기 구원 중심으로 모는 겁니다.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이것도 이중적이죠. 앞부분에 보면
“몸은 죽은 것이나” 이렇게 나오잖아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 나오고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이렇게 나오잖아요.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몸’이라는 것이 하나의 의미로 설명되는 건 아닙니다.
“이 죽을 몸도 살리실 것이다.”
예수님이 살아나셨잖아요. 죄 없으신 분이 죽으셨으니까.
그 사망이 그를 이렇게 장악할 수 없었습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죠.

그러면 여기에서 어떤 코스를 이야기하느냐? 라고 하면
성도는 이미 죽은 자인데
산 자로서 (뒤에 나오는 바에 의하면) 살리심을 받는 자로 이 땅에서 죽어야 돼요.
되게 복잡하죠. 성경이 그렇게 돼 있습니다.

성도는 이미 죽은 자예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어요.
그런데 주님과 함께 이미 살림을 받았어요. 주님과 함께 왕노릇하고 있습니다.
왕노릇 하고 있으니까 이 땅에서 어떻게 될까요? 죽어야 돼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다 죽습니다. 주님이 강림하기 전에.
강림하신다면 산 채로 가겠지만.
그런데 그 죽는 것이 죽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지금 이 내용이 지식입니까? 현실입니까? 현실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실제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들을 다 인간은 뭐라고 이야기하는가? 하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하니까
‘나 믿습니다.’ 이렇게 다 바꿔버려요. 그러니까 신천지가 날뛸 수밖에 없는 거예요.
다락방이 날뛸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 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므로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지금 우리가 보기에는 이론 같은 내용이 어떻게 작용하느냐? 라고 하면
실제로 성도의 몸에서 작동을 한다는 거예요.
정답을 미리 말씀드리면 7장에 나오는, 사도바울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하리로다.” 이 사태 속에
주님이 몰아넣는 내용을 지금 이렇게 풀어내는 겁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또 생각해야 되는 게
이 신학적으로 논쟁하는 게 피동이냐? 능동이냐? 의 문제예요. 여기에 보면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이렇게 나오거든요.
여기에서 영은 성령이거든요.

그러면 성령으로 너희의 몸의 행실, 몸의 행실이 뭡니까?
이것부터 이야기해야 되죠. 육신이 뭐예요?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라” 할 때 이게 가능합니까? 불가능합니까?
육신대로 안 사는 게 가능해요? 불가능해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했거든요. 벌써.
벌써 앞부분에 얘기한 거 다 잊어먹었어요.
‘목사님 예수 믿는 자는 거기에 포함 안 되잖아요?’
여러분 거꾸로입니다. 예수 믿는 자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는 말씀에 ‘아멘’을 해요.
예수 안 믿는 사람은 그런 말씀을 ‘아멘’ 절대로 안 합니다.

“빚진 자로되”라는 표현을 할 때
이미 로마서 1장 14절에서 “복음에 빚진 자라” 했거든요. 그걸 끌고 오는 겁니다.
성도는 원래 복음에 빚진 자인데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목사님 우리가 불가능을 이야기를 하면 그러면 우리가 능동적으로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라”는 이 말에 대해서 어떻게 해석을 해야 됩니까?’ 라는
질문이 나오잖아요. 맞죠? 그러면 또 우리가 머리가 좋잖아요.

그 사람이 왜 그 질문을 할까요? 그걸 물어보면 돼요.
지금 웃으신 분이 계시죠? 이미 다 이해한 거죠. 왜 그 질문을 합니까?
‘능동, 피동’을 끌고 와서 자기 구원을 확정하고 싶은 거예요.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버리면 능동 피동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이기 때문에

그래서 사도바울은 마치 십자가의 피로, ‘우리의 행위로 의롭게 될 수 없다’라고 해놓고
“화목제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다” 라고 해놓고 하는 말이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이런 식으로 표현을 해요.
불가능하다 해놓고
마치 인간이 능동적으로 이 육신의 행실을 죽일 수 있는 듯이 말을 하죠.
사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렇게 밖에 복음을 못 전해요. 인간은.

인간은요. 피동을 이야기하면요. 피동 갖고 빠져나가고요.
능동을 이야기하면 능동 갖고 빠져나가요.
신학을 공부한 목사님들은 이걸 너무 잘 알잖아요. 피동이냐? 능동이냐?
그거 다 무너져야 됩니다.

왜 무너뜨려야 되느냐? 하면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세요.
아브라함을 불렀죠. 하나님이 먼저 불렀잖아요. 순서가. 맞죠?
불렀는데 그게 피동입니까? 능동입니까?
피동 능동이 분간이 안 가죠. 나중에 가면.

왜냐하면 환경이 어떻게 합니까? 환경이 어렵게 만드니까
계속해서 남쪽으로 애굽으로 내려가잖아요. 그럼 그건 피동입니까? 능동입니까?
‘그건 주님이 하셨으니까 다 피동입니다.’

그럼 여러분한테 물을게요.
여러분이 지금 돈 버는 게 피동입니까? 능동입니까? 예?
여러분이 지금 이 자리에 온 게 피동입니까? 능동입니까?
피동 능동을 하면 뭐가 안 되는가? 하면 죄인 중에 괴수가 안 돼요.
왜냐하면 ‘주님이 하게 하셨습니다.’ 이래 되면 뭐가 되죠?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죄인 중에 개수라는 차원에서 주님이 하셨다는 이야기가 돼야 되는데,

주님이 하셨다라는 얘기가 뭐가 되느냐? 하면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옳다’라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용어가 무서워요. 용어에 사로잡힌 사람들은요.
복음을 못 듣습니다. 특히 제 설교는 못 들어요. 용어를 다 깨버리거든요.
신학이 그걸 만들었어요. 계속해서.

‘지식’이라는 것이 성경에는 분명히 있습니다.
율법이라는 것을 배우잖아요. 배우는데 그게 지식이죠.
지식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작동을 하거든요.
작동을 하는데 이건 내 속에서도 작동을 하지만
로마서에 넘어오면 “탐내지 말라 하지 않았으면 탐심을 알지 못했다” 하거든요.
거기까지 이제 들어오는데

이 율법을 하나님께서 주셨잖아요.
주시면 그냥 율법을 주셔서 ‘열심히 연구해라. 고민해라’ 이렇게 나오는 게 아니라
그 율법을 팍 퍼뜨려버리잖아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지금 신명기가 그 내용이거든요. 제가 신명기 설교할 때 얘기했잖아요.
불 가운데 내리는 그 말씀이
지금 그들의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모세를 통해서 말씀해 달라는 겁니다.
그래서 두 돌판을 주는데 그 첫 번째 돌판은 깨어지고
두 번째 돌판, 땅에서 만들어지고 하나님이 친히 글을 쓰셔서 주어진 그 돌판을 주시는데
특이하게도 그 돌판을 주시자마자 어디로 집어넣어버립니까?
언약궤 안으로 집어넣어버려요.

언약궤 안으로 집어넣음으로 말미암아 이제 말씀이 언약궤 안에 갇혔습니까?
아니면 확산됩니까? 가르치라 했잖아요. 신명기에 보면.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 하거든요.
이제는 그 돌판에 있던 말씀들이 마음 판으로 들어가요.
그게 신명기 내용입니다. 그쪽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이 율법이라는 것이 이론입니까? 실제입니까? 라고 하면
사람이 살려지는 현장에서 율법의 실효성이 드러납니다. 율법의 실효성이.

우리가 볼 때는
단순히 뭐 지켜라, 안 지켜라, 지키면 복 받고, 안 받고... 
‘아 그거야 가봐야 알지’ 그렇게 되잖아요.

그런데 그 말씀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넣어주는 그 과정 속에서 그 말씀이 이론이 아니라 실제임을 말씀하는 겁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 실제인데 이 실제를 누가 먼저 적용한다는 거예요?
아브라함을 보면 약속을 먼저 주죠. 그건 지식이잖아요.
“너로 강대한 나라가 되게 하겠다.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라고 할 때
그 지식을 주면 그 지식을 누가 먼저 누가 해석을 합니까?
아브라함이 능동적으로 해석을 해요. 능동적으로 해석을 하는데
그 능동적으로 해석하는 그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만듭니까?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는 피동적으로 만들죠.
이걸 우리가 장악 못한다는 이야기를 제가 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까 피동 능동을 갖고
‘야 나는 이제 진리를 알아서 우리의 사는 세계는 다 그리스도 안이기 때문에 뭘 해도 피동이야.’
이게 수상한 거예요.

물론 설교할 때는 그 얘기를 할 수 있습니다.
피동이라는 말을 할 때는 반드시 죄가 나와야 되고
능동이라는 이야기할 때도 반드시 죄가 나오면서 십자가가 드러나야 돼요.
그것이 빠져버리면 뭐가 되느냐? 하면 우리의 구원을 위한 피동과 능동이 되는 겁니다.

말씀은 철저하게 그들의 삶의 현장 속으로 집어넣어요. 이게 중요합니다. 말씀은.
로마서는 이론이 아닌 거예요. 이론이 아니라
실제 우리의 삶 속에 이 말씀이 작동을 하는 겁니다.

“우리가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고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이 말씀이 현장이 되는 성도의 몸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목사님 이제 우리가 육신대로 살지 않고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되겠네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수도원 들어가든지...
또 어떻게 합니까? 결심을 하는 거예요. 결심을. 여러분 다 해보셨죠? 결심. 그죠?
‘아내한테 화 절대로 안 내겠다.’ 은혜를 알았으니까. 결심을 하는데 어때요?
화 안 내려면 제일 좋은 방법은 피하면 됩니다. 회피.
‘사람들과 분노를 안 내겠다.’ 그럼 안 만나면 되죠. 지금 이 말씀을 이해를 못 하는 겁니다.
이 말씀이 세트로 돼 있다라는 사실을 이해를 못해요. 세트라는 사실을.

그래서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언급을 했잖아요.
지금 아브라함의 믿음 안에 이 내용이 다 담겨 있죠. 그럼 아브라함이 어떤 믿음을 가졌습니까?
하늘의 별을 보고 “네 자손이 이렇게 많을 것이다”라고 할 때
아브라함이 보고 믿었잖아요. 맞죠? 그 믿고 난 뒤에 뭘 했습니까? 언약까지 체결을 했는데
문제는 그다음 그 믿음이 “별 보러 나와라” 이게 수동입니까? 피동입니까?
부르는 것은 하나님에 의하면 피동이고 가는 거는 능동이고 그죠?

근데 재밌는 것은 그다음 보세요. 말씀을 받았죠.
받았는데 그 약속을 믿으니까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는 겁니다.
우리는 이 이스마엘을 낳는 짓을 안 하려고 해요.
지금 아브라함의 믿음에 그게 들어있다니까요. 아브라함의 믿음에 그게 들어 있어요.

왜 그게 들어 있어야 되느냐? 하면 아브라함의 믿음 안에는
나의 믿음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증거하는 믿음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예수님은 자기의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주셔서 화목 제물이 되셨잖아요.
그럼 화목 제물을 증거하는 아브라함이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님 성도는 다 이 말씀과 이 말씀에 대적하는 육신에게 지는 자로 삽니까?’
이렇게 질문하잖아요. 맞죠? 그러면 지는 자로 삽니까? 육신에게 져서? 그리 살 것이 아니라 했는데?
다 지는 자로 살잖아요. 못 이겨요.
노력하고 애써서 이기더라도 이긴 게 아니에요.
지금 주님은 이 말씀의 세계로 우리를 몰아넣는 겁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계속해서 배우려고 하고 이 말씀을 적용하려고 하잖아요.
그게 안 돼요. 그게 악마예요. 악마. 마귀에게 속는 겁니다.
이런 본문도 마찬가지죠.
‘성령이 있으면 우리가 육신에게 져서 그 육신을 따라 살지 않아야 되지 않느냐?’
성령이 없으면 육신을 따라 사는 게 뭔지도 몰라요.
다시 반복할까요?

사도 바울이 예수님 만나기 전에 어떻게 살았습니까?
교회에 얼마나 열심히 왔는지 몰라요. 율법의 의로는 흠없이 살았어요.
소득의 십일조를 냈어요. 안식일을 지켰어요.
그 모습이 어떤 모습이라 했습니까? 육신으로 사는 모습이라고요.
그러면 이것을 확장해버리면 거기에서 (나중에 로마서에 나옵니다.)
자기 의를 세우려고 했다라는 거예요.

근데 이 ‘자기 의’를 세우는 것이
지금 여기에서는 누구한테 하는 얘기입니까? 복음을 들은 자.
십자가 복음을 제대로 아는 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는 겁니다.
우리는 자꾸 말씀을 볼 때 저 멀리 있는 엉터리, 그런 집단들을 자꾸 떠올리는데
그게 아니라 이 복음 자체는 오늘 이 말씀을 읽고 듣는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에요.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런 겁니다. 그 믿음의 실체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을 로마서 7장으로 오면 사도 바울이 보세요.
마음으로는 뭘 원합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잖아요. 그래서 했는데 그 한 짓이 뻘짓이예요.
그것이 옳아도 마찬가지예요. 옳아도.
‘아 오늘 복음 들으러 왔다. 복음 들으러 왔고 복음을 들었다.’ 이것조차 복음 앞에서 부정당합니다.
그게 부정 안 되는 사람은 이 말씀 속에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런 사람은 이 말씀을 이해를 못하는 자입니다.

“육신에게 져서 육신으로 살 것이 아니오”라는 이 내용을 반드시 담아야 돼요.
예수님이 말씀하셨잖아요.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했거든요.
이 말씀이 처음 따를 때만 해당됩니까? 아니면 계속해서 해당됩니까?
계속이잖아요. 계속. 계속 아니면 그 본문 찢어버리세요. 여러분.
그거 왜 들고 있습니까? 과거인데 다... 다 이미 뗐는데....
십자가 이야기해도 다 찢어버리세요. 목사들이 지금 그걸 원하거든요.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는 이 말씀의 현장이 될 때만 주님의 증인이 돼요.
우리는 주님의 증인이 된다하니까
내가 오롯이 괜찮은 인간으로서 주님의 증인으로 드러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은 나는 아니고 대신 죽은 분을 증거하는 거잖아요. 그게 증인이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계속해서 자기 부인을 안 하려고 하죠.
자기 부인의 능력은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목사님은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냥 사시면 돼요.
근데 로마서에서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성령을 따라 행하면 돼요. (제가 지금 뭐 틀린 말을 합니까?)

갈라디아서 5장 16절을 한번 봅시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쫓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라 육신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나오거든요.
여기에 보면 성령을 쫓아 행하라 하죠. 똑같습니다. 로마서랑.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라디아에 있는 성도들한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여기에는 이단들에게 소속된 자들도 있고
거기에 유혹을 받는 자들이 있고 성도들이 있을 거 아닙니까?
그러면 이 말씀은 누구한테 하는 이야기입니까?
모든 말씀은 성도에게만 해당 돼요.

그러면 “성령을 쫓아 행하라”는 말을 한다는 자체가
듣는 대상은 성령을 쫓는다는 말입니까? 안 쫓는다는 말입니까?
‘너 똑바로 앉아. 예배 시간에 왜 자세를 삐딱하게 앉아?’ 이 말을 왜 합니까?
아니 삐딱하게 앉았으니까 하는 말이잖아요.
우리는 근본적으로 성령을 쫓아 행하는 자들이 아니에요.
말씀을 너무 만만하게 봐서 그렇습니다.

이 로마서 후반부도 나오거든요.
“서로 용납하라 주께서 우리를 용납한 것 같이 용납하라” 그 말을 왜 하겠습니까?
죽어도 용납 안 해요. 우리는.

그러면 어떻게 용납하는 사태가 발생합니까?
죄인으로 드러날 때예요. 죄인으로 드러날 때.
사람들은 성령을 쫓아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다라고 하니까
그러면 육체의 욕심이 안 나오면...
또 나왔죠. 육체의 욕심. 또 질문해야 돼요. 그 ‘육체의 욕심’이 뭐예요?
술 마시고, 간음하고, 살인하고, 도둑질하고, 미워하고... 이것만 육체의 욕심입니까?
아니면 주일 예배에 한 번도 안 빠지고, 오전 오후 예배에 다 참석하고, 수요 예배 안 빠지고...
우리 교회 이야기잖아요. 그죠? 그런 분 몇 분 계신데 그 분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그러면 그렇게 살고 화도 안 내고 늘 웃어. 분노도 안 내요.
(누구 집사님이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그런...)
그러면 이 사람은 육신을 쫓는 겁니까? 성령을 쫓는 겁니까?
벌써 다 잊어버렸잖아요.
인간에게 나오는 모든 것들은 육신을 쫓는 겁니다.

그러면 이 말씀 앞에 모든 사람들은 책망을 받게 돼 있어요.
책망을 받게 되면 죄인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죄인으로 드러나는 거예요.
문제는 이 성령을 쫓아 행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이 논리를 보세요. 이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이단들이 말씀대로 살아야 된다는 거거든요.

성령을 쫓아 행한다면 그다음 나오는 게 뭐예요?
‘어떻게 살아야지’가 나오죠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성령을 쫓아 행하면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어떻게 살아야 돼요?
간단하잖아요. 아브라함처럼 살면 돼요. 다윗처럼 살면 되고요. 믿음의 선진처럼 살면 돼요.
그 히브리서에 쫙 나와 있어요.
그래 살면? ‘그러면 좋겠다’ 좋죠. 마지막은 어디예요? 다 죽음입니다.
톱으로 켜는 거고요. 굴에 갇히는 거고... 그 내용이 담겨 있거든요.

그런데 성령을 쫓아 행하면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라고 하면
‘탐심이 없어야죠.’ 이건 초자들이에요. 초자.
물론 성경에서는 ‘탐내지 말라’고 나오죠. 탐심은 우상숭배를 했잖아요. 
그 말씀을 왜 하는지를 못 알아듣는 겁니다.

왜 그 말씀을 합니까? ‘또 다른 보혜사’ 때문에 그렇잖아요.
또 다른 보혜사를 주님께서 보내셨기 때문에 그 보혜사를 받은 사도 바울이
‘탐심은 우상숭배고 술 취하는 자나 음행하는 자나 약간 가지려고 하는 자들도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못 받는다’라고 당당하게 얘기해버립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가 말한 것에 대해서 모순을 띠면서 말하는 것 같잖아요.
상대가 못 알아듣는 거예요. 그걸.

그래서 신학자들은
앞부분은 이 제대로 된 교리,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율법에 의한 의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교리를 이야기했다면
뒤에는 바울이 권면으로... 걱정된다는 거예요. 권면한다는 말은.
‘그렇게 이야기해버리면 저거 마음대로 개판으로 살 거 아니냐?’
그래서 권면한다는 거예요.

아닙니다. 권면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앞에 내용의 현장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뒤에는. 현장.
그 현장에 들어가야 여러분이 배웠고 듣고 믿었던 게 뭐로 드러납니까?
뽀록 나잖아요. 뽀록.
안 그래도 어떤 분이 그러시더라고 다 알겠는데 내 현실이 너무 어렵다는 거예요. 현실이.
그 현실이 어려울 때 복음이 위로가 될까요? 안 될까요?
1번 된다, 2번 안 된다. 2번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안 되니까 위로라는 거예요.

우리는 평소에 그 생각을 갖고 있는 거예요.
어렵고 힘들 때 복음이 위로가 돼야 된다는 거예요. 위로.
근데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잖아요. 그게 무슨 위로입니까?
살아있는 자들에게 그게 위로가 돼요? 같이 죽자고 하는데...

현장으로 몰아넣는 이유가 뭐냐? 하면 너는 아니오예요.
심지어 ‘목사님 저는 아니오까지 아니까 저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이것도 아니요. 이야기예요.
그게 현장이에요.

‘아니 목사님 그러면 광야로 내몰린 그들이 물이 없다고 원망한 그들은 지옥 가지 않습니까?’
이제 이 본심이 나왔죠. 그죠? 아직 이해 못했습니까?
본심이 나왔잖아요. 물이 없다고 원망했으니까 그러면 지옥 갔지 않습니까?
그러면 성도는 맞죠. 지옥 가야 되죠. 지옥 가도 마땅하잖아요.
그게 성도예요.

지금 우리는 이런 로마서나 갈라디아서 이런 말씀을 보면서
성령을 쫓아 행하고, 육신의 소욕을 따르지 않고... 이 이야기를 하니까
계속해서 나에게 유리한 것들을 취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성도가 어디에 삽니까? 세상 속에 살아요. 세상 속에.
세상 속에 살면 저들과 다를 바 별로 없습니다.
여러분 종교적으로 경건한 자들은 그들이 더 잘해요.
금요일 날 우리 집 뒤에 산보하면 그 교회에 사람들이 기도하러 얼마나 많이 모입니까?
그 사람들이 할 일 없어 와요? 나름대로 경건하거든요.
약아빠진 사람들은 시간이 아깝다고 그러지만 그 사람들은 그 차 빠질 때 한번 보세요.
대형교회 맞죠? 차 빠지는 데 몇 시간 걸립니까? 10분 만에 다 빠집니까?
1시간 2시간 3시간 빠져요.

주님은 우리에게 그러한 노림수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절대로 우리가 잡을 수 없는, 소유할 수 없는, 장악할 수 없는 성령을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너희들 몸은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고, 성령이 거하시고,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는 몸이다. 알겠느냐?”
그래서 나온 게 ‘내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이 얘기거든요. 그것도 또 엉터리로 쓰지만.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의 것이 되는 거예요. 사나 죽으나. 무엇을 하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이런 말씀들이 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더라도
십자가만 자랑하는 그러한 죄인으로 주님이 만들어내시겠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23장을 보고 마지막으로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3장 29절부터 보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이렇게 저주를 퍼부으시는데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리니”
지금 이 얘기가 왜 나옵니까? 자기 반성이 되잖아요.
근데 예수님은요. 그 말씀은 자기 반성하라고 준 말씀이 아니라는 거예요.

너희들이 그 속에 합류하라고 주신 말씀이에요. 그래서 합류하라고 주셨으니까
너희들이 그런 식으로 해석한다는 거예요.
지금 말씀에 대한 해석법이에요.

말씀은 우리가 읽고 듣고 이해해서 지킬 수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면 아니니까 배우지 말아야 됩니까? 그러면 그 말씀을 갖고 우리가 애쓰지 말아야 됩니까?
아니에요. 열심히 애써요. 애쓰는데
지금 이 말씀에 의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너희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을 죽인 짓과 똑같다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런 태도를 갖는 거예요.
자기 반성을 해요.
자기 반성을 하면서 정말 회개를 했다면 내가 무엇을 하더라도, 복음을 열심히 듣더라도,
기도를 열심히 하더라도, 연보를 하더라도, 열심히 모이더라도, 설교를 복음적으로 전하고,
복음 설교를 듣는다 하더라도 죄인 중에 괴수로 드러나야 되는데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자들이
‘과거에는 내가 엉터리 복음을 들었지만 이제는 진짜 복음을 제대로 듣고 있어.’
‘과거에는 내가 우상을 쫓았지만 이제는 제대로 된 신을 쫓고 있어.’
누구 얘기입니까? 지금.
화 있을진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이야기예요.

자기가 성경을 읽으면서 마태복음 23장을 읽으면서 이걸 과거로 돌려버려요.
주님은 과거로 돌리지 않고 이 말씀을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돌려버리죠.
성령을 주시니까 이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와버리면
우리가 이 말씀에 대한 책망을 듣는 자가 돼요.
왜냐하면 인간은요. 역사 속에 살거든요.
근데 십자가는 묵시 세계입니다.

역사 속에 사는 자들은 계속해서 자기 반성을 합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를 하죠. 그 비교를 하는 가운데 불쑥불쑥 이런 태도가 나옵니다.
근데 ‘내 과거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그때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근데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조상들의 양을 채워라” 하시죠.
‘에이 목사님 저는 조상들의 양을 안 채우는데...’
그러면 말로는 맨날 죄인 중에 괴수라 하고 십자가의 원수라 했으면
십자가의 원수가 무슨 짓 했습니까? 예수님을 찌른 자들도 본다 했잖아요. 누가 찔렀어요?
그 군병들만 찔렀습니까? 제자들도 찔렀잖아요.

자기가 말하는 것도 엉터리란 말이에요.
죄인 중에 괴수라면
내가 “조상들의 양을 채워라”는 이 말씀 속에 합류된 자요.
십자가 피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자로 나와야 되는데 그게 안 되는 거예요.

왜 그게 안 됩니까?
말씀을 자기 구원으로 보기 때문에 그래요.
지금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런 태도를 취하고 있거든요.
로마서를 해석하는 사람들이 그런 태도를 취하는 겁니다.
계속해서 정답을 찾아내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정답은 십자가라는 거예요.
십자가는 성령에 의하면 바람이라는 겁니다. 바람은 우리가 장악할 수 없죠.
장악할 수 없습니다. 장악할 수 없으되 이 성령께서는 말씀이라는 요소 요소 하나를
계속해서 언급을 합니다. 언급을 하면 인간이 탁탁 건들어져요.
건드러지면서 자기 백성에게는 죄가 흘러나오면서
십자가에 용서하신 그 은혜가 쏟아지는 현장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제대로 알고 듣고 믿고 따르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성령의 말씀 세계 속으로 우리를 인도하셨기에
이 말씀대로 우리를 다루시고 이끄시기에 우리에게 명령하시고 지시한다는 사실을
이 시간 알려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말씀을 부지런히 묵상하는 가운데
주님이 이 말씀을 십자가에서 어떻게 다 완성하셨는지를 증거하는 자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육신의 소욕을 죽이며 성령을 쫓아 행하기를 소원하는 주의 백성에게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