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3-09-06 23:03
20230906 마태복음 강해 마 17:14-21 기도와 금식 외에는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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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3-09-14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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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06 마태복음 강해 기도와 금식 외에는

함께 기도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이름을 위하여 저희들을 부르셨고 우리를 홀로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주님이 친히 저희와 함께 동행하셔서
주의 이름만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삼아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몸이 나의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살아계신 주님의 것임을 늘 확인하는 인생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나님 말씀, 마태복음 17장 14절에서 21절 말씀을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17:14~21)
“저희가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가로되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다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때부터 나으니라 이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없음)”

어떤 사본에는 21절이 있습니다.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이런 유가 나가지 아니하느니라”
마가복음에는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가지 않는다” (막9:29)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거룩한 산, 그곳에서 영광을 보이셨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이 모습을 목격을 했고요.
그런 가운데서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이렇게 명하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베드로가 그렇다면 서기관들이“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이렇게 말한 것은 잘못된 겁니까? 이렇게 질문을 했을 때 엘리야가 이미 왔다고 말씀을 하셨어요.
이 사건을 바탕으로 오늘 본문을 살펴봐야 되는 겁니다.

성경을 이 생선 토막 내듯이 이렇게 갈기갈기 찢어서, 나누어서 보게 되면
그 모든 말씀들은 결국은 나를 위한 말씀으로밖에 보이지 않고요.
물론 연결해서 본다고 할지라도 성령이 없으면 마찬가지죠.

오늘 사건은 아주 어려운 내용입니다.
이게 뭐가 어려우냐? 라고 하면 육에 속한 사람들은 도무지 깨닫지 못하는 사건이고요.
더 흥미로운 점은 아랫동네에서는 제자들이 있었잖아요. 윗동네에서 또 제자들이 있었고.
거룩한 산에는 주님과 함께 있었고 밑에도 제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우리는 왜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까’ 여기에 대한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말씀대로 그냥 ‘믿읍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가? 하면
사태가 벌어진 적도 없지만,
지금까지 여러분들도 다 교회를 다녀보셨고 여러 가지 설교를 들어봤을 겁니다.
저도 어릴 때 기억나는 게 그거예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다면 이 산을 들어 저리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그 유년 주일 학교, 여름 성경학교 때 배운 노래 있잖아요.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다면 이 산을 들어 저리로 옮기고’
아이 때 얼마나 신나게 불렀습니까? 그때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이 나오거든요.
애들은 정말 그런 줄 알아요. 요즘 애들은 다 약아빠져가지고 그걸 안 믿죠.
애들이 유튜브를 보니까 너무 잘 알죠.
세상에 주님이 어디 있고 믿음이 어디 있고 이 성경은 다 구라고 가짜고
만화에나 나오는 내용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우리가 과거에, 어린아이 때, 성경학교 때 말씀을 기억을 해보면 얼마나 간절하게 그걸 믿었습니까?
그게 믿음인 줄 알았거든요.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다면.

그래서 ‘믿습니다’라고 얼마나 했습니까?
아마 여러분이 시험을 많이 해봤을 거예요.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 동네 산을 옮겨달라고. 해보셨어요?
우리 동네에 있는 그 집에서 보면 지금은 뭐 고속도로가 나고 경관이 엉망이지만
어릴 때는 앞쪽에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산이 정면으로 보였는데.
그 산을 옮겨달라고 기도해도 안 되더라고요. 그러면 믿음 없는 거잖아요.
그러면 그 부흥 강사 그 사람은 산 옮기는 거 못 봤거든요.
사람들이 속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무리에게 도착을 했는데 이 마가복음하고는 좀 다르게 기록하고 있어요.
설교를 하는 사람이나 주석을 쓰는 사람들이 유혹이 뭔가 하면
‘여기에 빠진 걸 저쪽에서 보충을 하고 저쪽에 빠진 걸 여기에 보충해서 설명하면
이 본문이 온전하게 설교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게 생각을 하거든요.
물론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다양하게 주셨기 때문에.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서기관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서기관이 등장을 하거든요.
내려올 때 서기관과 제자들이 서로 논쟁을 벌이는 거예요.
여기에서는 그 내용이 없습니다.
“예수님과 이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이르매”(마17:1)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이 인물들, 예수님과 함께한 그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들이 이르렀을 때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가로되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얼핏 보면 이 사람이 굉장히 믿음이 좋은 것 같죠?

제가 마태복음이나 다른 복음서를 말씀을 드릴 때
우리의 자녀가 이러하면 이렇게 기도 안 하겠습니까?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자기 자녀 때문에 기도원이라는 기도원은 다 다녔어요.
이 앞에 있는 여기 당사자도 할렐루야 기도원부터 그죠?
불치병을 갖고 있으니까 그 김×× 거기까지 가서 기도하고 물도 마시고...
그것만 했어요? 작두까지 탈 뻔했는데.

자식이 낫는다면 부모 입장에서는 못할 게 없습니다.
요즘이야 뭐 자식이 낫는다면 ‘니 나아라’ 자기 애도 안 보잖아요. 힘드시죠. 그죠?
얼마나 힘듭니까? 그래도 어쨌든 뭐 이미 따님이 둘이나 큰 따님이 있으니까.
근데 요즘 애를 낳은 사람들을 보면 코미디도 그런 코미디가 없거든요.

아마 그런 사람이 이런 성경을 보면 납득이 안 갈 거예요.
아마 그거는 다 빼버리고, 엄마의 심정은 다 빼버리고,
‘예수님은 병을 고치는 분이구나’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어린이집에 애가 아파요. 온도가 한 39도 올라갑니다.
엄마한테 전화합니다. 전화 안 받아요. 엄마. 이런 거 혹시 아세요?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 시간에 뭐 하느냐? 커피숍에 앉아 놀고 있거든요. 아예 전화를 안 받아요.
다 그런 건 아니겠죠. 만 분의 1 정도 그렇겠는데.

지금 이 사람이 자신의 아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는 이 모습,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이 마가복음에는 벙어리 되었고, 이런 요소들이 다 이렇게 돼 있거든요.
간질병도 있고 벙어리도 있고 우리는 뭐가 진짜냐 뭐가 사실이냐? 여기에 관심이 있는데
여러분 사실은요 돌아서면 사실이 없어요.

정치권들 말하는 거 보세요. 사실이 어디 있습니까? 거기에 주장밖에 없죠.
똑같은 화면을 똑같은 음성을 들려도 ‘날린다?’
또 하나는 또 뭐? 그런 게 있었잖아요. 얼마 전에.

이 사람이 제자들에게 온 이유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어요.
이미 마태복음 10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10장 1절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예수님께서 벌써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죠. 가룟유다도 있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다 이러한 권능을 받았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제자들이 1번 믿음이 있어서 권능을 받았다. 2번 주님이 일방적으로 주셨다.
몇 번입니까? 지금 주님이 일방적으로 주셨거든요.
제가 왜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거룩한 산 밑에 있는 제자들이 병을 못 고쳤어요.
예수님이 ‘믿음이 적은 연고이라’ 이렇게 말씀을 하니까
사람들이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면 분명히 10장 1절에는 이런 능력을 줬는데
왜 이 능력을 행하지 못했느냐?
그 이유는 믿음이 너~무 작았기 때문에 강한 믿음만 있었으면 고칠 수 있었다라는 얘기예요.

어때요? 설득력 있어요? 없어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 내가 불러와가지고 ‘한번 고쳐보라’고 그럴게요.
못 고쳐요. 그 사람들 여기 아산병원에 가가지고 이제 죽을 날 기다리는 사람 한둘이 아니잖아요.
맞죠? 애들도 죽을 날 잡아놓고 기다리는 애들이 한둘이 아니잖아요.
고쳐보라 그러세요. 온갖 변명을 다 댈 겁니다.

그리고 더 문제가 무엇이냐? 라고 하면 이 권능이 우리가 볼 때는 분명히 권능이죠.
그러면 이것이 제자들이 나타내는 권능이 예수님의 권능이 되려면
이 권능은 누구와 맞지 않는 권능입니까?
마귀가 마태복음 4장에서 시험한, 예수님을 시험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러한 능력을 보이라’는 그 권능과는 대척점에 있어야 돼요.

분명히 제자들이 이러한 능력을 행했습니다.
근데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제자들은 이 권능을 어떻게 받았느냐?라는 거예요.
어떻게 이해를 했느냐? 라고 하면 어떻게 이해를 했을까요?

성령을 못 받았잖아요. 그러면 간단합니다.
이 권능은 누구의 권능이라 생각하는가? 하면
누구의 사고와 동일한 권능이 되느냐? 라고 하면 악마와 똑같이 돼요.

나중에 요한계시록 가면요 이 거짓 선지자들이 하늘에서 불을 내리고 권능을 행하거든요.
데살로니가 전후서로 가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독특한 것은 초기에는 누가 권능과 능력을 행하느냐? 라고 하면
예수님이 권능을 행하고 예수님의 사도들이 능력을 행합니다.
병을 고치고 죽은 자도 살리고 이러한 일을 행하는데.

이것이 이제 계시가 완료되는 그 시점에 돌입하게 되면
(그 시점이라 할 때는 우리 시점이 아니에요. 주님의 시점인데.) 이것이 완전히 역전이 되어 가지고
이제 말씀만 남고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말씀을 전하고
가짜 복음을 전하는 거짓 선지자들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요소들을 계속해서 제공을 하거든요.
이 계시가 완료되었을 때 요한복음이나 요한일서에 보면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진 바 된 모든 것들이 어땠습니까?
봐도 소용이 있었어요? 없었어요? 없었죠.

더 놀라운 것은 지금 10장 1절에
모든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고
가룟유다도 이 일을 했을 거 아닙니까? 성경에 일일이 다 기록하지 않지만.
그 일을 다 해놓고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을 팔아먹죠.
상상이 갑니까? ‘나는 안 그럴 것이다’ 뭘 안 그래요?
이 말씀을 우습게 봐요. 그리고 악마를 우습게 보죠.

지금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들은 성도들에게 하시는 말씀이거든요.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어떤 말씀도 아멘이 안 됩니다.
모든 말씀이 성령 받은 사람은 아멘으로 화답을 하게 돼 있죠.
요거는 내 거 아니고 이거는 내 거고 이거는 마귀 거고
이렇게 말씀을 우리가 골라낼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
말씀이라는 자체는 항상 오늘 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에 이것을 성도는 관람할 수 있는 자격이 안 돼요.
말씀에 참예시키시지,
말씀을 관람하면서 ‘야 이거 뭐 재미있네. 구경하자’ 이렇게 되는 게 아니거든요.

사람들은 이 구원론을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에 이 구원론을 확보해 주고 싶어 하거든요.
이렇게 힘들게 이렇게 수요 예배까지 오시는데
‘여러분은 이미 구원받았습니다.’ 이 얘기를 하면 얼마나 좋아요. 기분이.

지금 10장 1절에서 이 제자들에게 이러한 권능을 주셨는데
왜 이들은 행하지 못하느냐? 그 이유가 뭐예요? 예수님의 말씀대로 믿음이 적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적다라는 말은 믿음이 없다라는 말이에요.

그러면 예수님이 왜 적다라고 표현하느냐? 불쌍히 여기신 겁니다.
근데 성령을 받고 보면 말씀은 불쌍히 여겼는데 우리가 얼마나 (좀 과격한 표현을 쓰면) 쪼다길래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이렇게 말씀을 해 주셨을까요?
성령을 받기 전에는 믿음이 적은 연고라는 이 말씀 자체가
‘아 믿음을 더 키우면 되겠네’ 이렇게 생각을 하는데

성령을 받게 되면 믿음이 적은 연고가 어떻게 들려요?
믿음이 있다라고 하는, 오히려 이 적은 걸 갖고 있는 게 문제였죠.
왜냐하면 그 적은 걸 갖고 있는 것이 예수님을 부정하고 저주하고
예수님을 팔아먹는 믿음이었다라는 겁니다.

로마서에 나오는 믿음을 알지 못하면
지금 여기에 나오는 믿음 자체가 어떻게 이해가 되는가 하면요 사람의 믿음, 신념으로 이해가 돼요.
보세요. 지난 주일 낮에는 제가 여당을 공격합니다.
오늘은 야당을 공격하면 살기 위해서 밥 안 먹잖아요.
그 믿음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거 왜 하겠어요?
그렇게 하면 여론이 주목을 하고 사람들이 이 국민들이 자기를 지지할 것이라는

그리고 상대 누구예요? 대통령이 좀 마음에 양심에 조금
‘밥도 안 먹고 죽으면 어떡하지?’ 이런 염려를 할 것 같은데
관심 하나도 없어요. 차라리 죽는 게 소원일 겁니다. 아마 그 사람들은.
그게 믿음이거든요. 그들의 입장에서는.
자기가 믿는 바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는 자들이 그들입니다.

교사들이 지금 계속 자살한다. 그러잖아요.
이게 무슨 증후군?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입니까? 베르테르 증후군? 그거야 끼워맞춘 거고.
자기가 얼마나 의로웠으면 자살하겠어요? 그게 믿음이거든요.

그럼 성경에서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지금 사복음서를 통해서 악마가 요구하는 믿음과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는 믿음의 그 다른 점을 볼 수 있어야 되는데
사람들이 그 다른 점을 보지를 못하는 거예요.
아무도 그걸 가르쳐주지 않잖아요.

우리는 이 주님께 엎드려서 말하는 이 사람이 악하다고 보입니까? 악하지 않다고 보입니까?
어떻습니까? 어떻습니까? 여러분. 뒤에 볼게요. 16절에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이건 어떤 의미예요? 누구를 고소하는 겁니까? 주님의 제자들을 고소하는 거예요.
‘저 인간들이 당신 제자 맞아?’ 저는 그렇게 보이거든요. 지금.
‘진짜 당신의 제자라면 내 아들을 고쳤어야 된다’라는 거예요.

‘그래 저 사람들은 실력이 보아하니까 선생님보다 못하구나. 그래 믿을 것은 선생님뿐이지.’
마침 변화산상에서, 거룩한 산에서 내려온 예수님과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보고 누구한테 갑니까?
예수님께 꿇어 엎드리죠.
우리 같으면 누구한테 무릎을 꿇을까요? 변화산 보고 왔잖아요. 물론 이들은 모르지만.
베드로한테 무릎 꿇겠죠.

카톨릭이, 성당이 그 짓하고 있잖아요. 주님께 무릎 안 꿇어요.
누구한테 꿇었습니까? 그 성당 들어가는 입구에 여기 길동 성당 앞에 가면 누가 보고 있어요?
거기에는 예수님이 보고 있어요. 마리아가 없더라고요. 내가 깜짝 놀랐어요.
그게 무슨 예수님이에요? 우상이죠. 거기만 있습니까?
요 옆에 큰 대형교회 가면 뭐가 있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 지는 장면, 부조를 다 해놨잖아요.
들어가기 전에 한번 만져보고

어차피 예수님 안 보이고 지금 여기에서는 제자들은 못 고친 거예요.
그리고 소문은 들었고 어쩌면 목격했을 수도 있고
그래서 자기 아들을 고쳐달라고 왔는데 지금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굉장한 실망과 지금 불평을 늘어놓는 거예요.

여러분이 다급하잖아요. 다급할 때는 제자들이 분명히 권능을 행했거든요.
그러면 제자들도 병을 고쳤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그런데 막상 제자들한테 데리고 오니까 못 고쳤어요.
지금 이 사람은 한시라도 급하잖아요. 이 엄마 마음을 좀 헤아려 줍시다.
얼마나 다급하겠어요? 오죽하면 작두 위에 올라간다는데 보내려고 하겠습니까?
오죽하면 되도 않은 그 논입니까? 그 논에 샘물 나오는 그걸 파가지고 생수라 해가지고
전국에 땅을 얼마나 많이 소유했는지 몰라요.
죽을 때 돈 한 50억 기부했다는데 제가 볼 때는 그거 새발의 피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제가 사는 동네 그 부근에도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그 재산이.

복음을 안 전했는데 그 돈 꼴랑 100억, 그거 뭐 다 나눠주고 갔다고 훌륭하다?
그 십자가가 뭐가 돼요? 그러면.
주님의 피 흘리심을 뭘로 다 바꿔치기 하려고 합니까? 선행으로 바꿔치기 하려고 하죠.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지칭을 하잖아요.
그럼 여기에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는 누구를 이야기하느냐?
이 논쟁이 기독교 역사에서 치고받고 싸웁니다.

여러분 보시기에는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가 누구예요? 예수님 외에 모든 사람입니다.
여기에서는 특별히 누구예요? 특별히, 특별히 자기 아들을 고쳐달라는 이 사람.
이 사람이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의 대표 주자요.

또한 이 거룩한 산에서 여기에 초막 셋을 짓고 여기에서 삽시다라고 하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
그리고 그 아래에 있던 제자들, 모두가 다 여기에 포함이 됩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
이 말을 할 때 여러분은 이 아들의 부모라면, 엄마라면, 아버지라면
이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를 누구로 지칭한다고 생각돼요? 제자들이죠.
못 고쳤잖아요.

제가 기억으로 어렴풋이 어릴 때 기억으로 이 성경을 보면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를 제자로 봤어요.
왜 그런가? 하면 뒤에 보면 눈이 있어도 까막눈인 것 같아요.
뒤에 보면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했으니까
‘제자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구나. 그래서 믿음을 더하면 되는구나’ 이렇게 봤는데
말씀을 보면 그게 아니죠.

지금 예수님은 누구를 향해서 말씀하시는가? 하면
이 자기 아들을 고쳐달라고 하는 이 사람을 대표자로 세워서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 그리고 그 주위에 있는 무리들,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이 로마서 5장으로 이야기하면“한 사람이 범죄하여서 모든 사람이 범죄함이라”
죄인이 되어서 사망이 왕노릇하는 세계, 그걸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못 받아들이죠.

뭘 못 받아들이는가? 하면 지금 이 한 사람은
‘예수님은 나를 불쌍히 여기시면 자기의 아들을 고칠 수 있다’라고 믿고 있잖아요. 맞죠?
그러면 이 논리를 뒤에 가서 나오는 말씀을 그대로 당겨와 봅시다.
이 여인에게 믿음이 있었죠. 그러면 아들 고치면 되잖아요.
왜 그거 못합니까? 제가 너무 이상하게 해석하나요?
병은 꼭 제자만 고쳐야 돼요? 아니잖아요.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지금 이 말씀을 읽어나가면서
이성을 갖고 있는 자들이 뭔가를 배운 자들이 이 말씀을 읽어 나갈 때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맞지 않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겁니다.
누가 봐도 ‘불쌍히 여기소서’ 이것은 구원받은 자들이 보이는 특징이잖아요.
‘불쌍히 여기소서’ 어떻습니까? 이것이 하나의 멘트가 된 거예요.

불쌍히 여겨 달라는 사람들을 주님께서 불쌍히 여겨주니까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면 불쌍히 여겨줄 줄로 믿고 온 거예요.
재미있지 않습니까? 성경이. 그래놓고 도리어 큰소리를 쳐요.
“당신의 제자들은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이 말 속에는 뭐가 들었습니까? 꼭 누구 이야기 같아요?
마태복음 4장에 나오는 마귀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로 떡덩이 만들어라’
‘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면 천사들이 너를 지킬 거다.’ 그렇게 해보라는 거예요.
‘네가 진짜 예수가 메시야고 예수가 그리스도고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병을 고칠 수 있어야 되지 않느냐?’ 이 얘기예요.

여러분들도 ‘우리도 복음을 전할 때 이런 소리를 많이 들어야 됩니다.’
그러면 무슨 생각을 하는가? 하면 ‘내가 믿음이 없어서 저 사람 못 고치나?’
그 사람이 요구하는 바가 뭐예요? 악마가 하는 일을, 악마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아들다운 면모
그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의 제자라면 그 메시야의 제자다운 면모를 보여야 되는데
못 고쳤다라는 이야기입니다.

본인의 지금 주제를 파악을 못하고 있죠.
그런데 우리가 얼핏 보면 예수님께 무릎을 딱 꿇었어요.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합니다. 이 정도 태도라면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불쌍히 여기소서.’
이 태도와 맞먹는 태도 아닙니까?
그러니 성경을 좀 제대로 보셔야 된다는 거예요.

복음을 좀 들으면 뭔가 정답을 갖고 와서 그 정답을 갖고 ‘주여 죄인입니다.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면 자기가 구원받을 줄 아는데
이 여인을 보게 되면 어떻습니까? 그 모습이 가장 악마다운 모습이에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내가 말씀대로 불쌍히 여겨달라고 했고 죄인으로 인정했으니까
나를 구원하라’라는 얘기잖아요.

‘에이 목사님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우리와 상관없는 말씀 아닙니까?’
우리와 상관없는 말씀이라면 이 얘기 듣지 맙시다. 찢어서 버리시죠.
성도에게 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에
성도가 이 말씀 속으로 합류를 당하면 이 사태와 똑같은 사태 속으로 내몰리게 되어 있어요.

구약 이스라엘을 보면 그렇잖아요. 원치 않는 곳으로 인도함을 당할 때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원치 않는 곳으로 인도한다’라고 했잖아요.
원치 않는 곳으로 인도하니까
‘주여, 가겠습니다.’ 이래 나오는 거예요? 목숨 버리겠다고?
안 그래요.
자기가 원치 않는 일을 하게 되어질 때 그게 주의 일이 되거든요.

‘우리는 이 여인과 같지 않을 거라’ 맨날 그러잖아요. 불쌍히 여겨달라고.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왜 불쌍히 여겨달라 해요?
배운 게 있고 배운 게 있고 들은 게 있잖아요.
그러면 그 속에 뭐가 드러납니까? 이 여인과 같은 노림수가 드러나죠.
‘주님 제가 불쌍히 여겨달라고 했지 않습니까?
근데 왜 내 형편이 내 상황이 내 모양이 이 모양 이 꼴입니까?’
‘왜 내 기도 안 들어주십니까?’ 이 얘기거든요.

예수님은 이 변화산상에서 누구를 악하고 패역한 세대로 드러내셨는가? 하면
이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악하고 패역한 세대로 드러내심과 동시에
그들의 질문을 통해서 이 서기관들과 함께 모든 자들을 악하고 패역한 세대로 규정을 하셨습니다.

왜 그러냐? 라고 할 때는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잖아요.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올 것을 이야기를 했잖아요. 알고 있다니까요.
마태복음 2장에 보면 동방박사들이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고 물으니까
서기관들과 이 바리새인들이 정답을 딱 제시하잖아요. 미가서를 갖고
‘베들레헴입니다.’ 그래서?

정답을 안다니까요.
문제는 내가 아는 정답과 그 정답 속에 이것은 하나의 언어죠.
하나의 틀이라면 그 틀 속에 집어넣은 내용물이 다르다는 얘기입니다. 내용물이.
그들이 꿈꾸는 메시야, 기다리는 메시야가 따로 있는 거예요.

지금 이러한 어떤 사건 속에서 내려오시니까
실제로 이 땅 아래에서 어떤 모습들을 보이느냐? 라고 할 때 참으로 특이하잖아요.
이 여자가 예수님을 믿어요? 안 믿어요? 믿죠.
이게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믿는다니까요.

그러면 저 산 위에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 믿었어요? 안 믿었어요? 믿었죠.
그 영광스러운 모습을 뭘로 봤습니까?
자기가 기대하는 메시야로서의 영광스러움을 봤지, 십자가의 영광으로 그걸 보지 못한 겁니다.
변화산 상에서의 영광은 영광이 맞아요.
그런데 그 영광은 십자가의 영광입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은 영광이 아니에요.

지금 제자들은 십자가 없는 영광을 상상하고 있죠.
반드시 모든 성도는 십자가를 경유해서 그 영광에 참예하게 돼 있어요.
분명히 성도가 부활을 하거든요. 첫째 부활에 참예했기에.
그러나 그 부활에 참예하려면 반드시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않을 것으로 거둬야 돼요.
반드시 우리가 겉 사람은 후패해져야 돼요.
십자가만 남기기 위해서 우리는 늙어 가야 된다니까요.
이 땅에서 흙으로 돌아가야 돼요. 그래야 십자가만 남거든요.
그런 자에게만 썩지 않을 것으로 신령한 몸을 얻게 되는 겁니다.

지금 이 사건 속에서는 이들은 십자가를 몰라요.
예수님만이 알고 계시죠.
이 변화산 상의 영광은 십자가의 영광임을 예수님만이 알고 계시고 나머지는 알지 못합니다.
이 변화산 상의 변화된 모습, 그 영광스러운 모습이 땅으로 내려오니까 어떤 모습입니까?
병 고치는 모습이잖아요. 병 고치는 모습이에요. 죽은 사람 살리는 모습이라니까요.
인간들은 매치를 그렇게밖에 못 시켜요.

사람들이 걸핏하면
‘주님이 살아계시다면 병을 고쳐주세요. 주님이 살아계시다면 우리 집 부자 되게 해주세요.
주님이 살아계시다면 우리 자녀 합격하게 해주세요.’
그걸 구약에서 보면 다 우상이거든요.

지금 이 여인이 무릎을 꿇고 불쌍히 여겨 달라라고 하면서 입으로 나오는 게 뭐였는가? 하면 뭡니까?
‘당신의 제자들이 능히 고치지 못했다’라는 얘기예요.
여기에 대해 예수님께서 악하고 패역한 세대여 그다음 하시는 말씀이 이런 겁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이 말씀이 참 중요한 말씀이거든요.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언제까지 함께 있고 언제까지 참습니까? 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까지.

죽으실 때까지 인간들은 뭘 요구하는 거예요? ‘병 고쳐달라. 죽은 자 살려달라’
요한복음 11장 보면 마리아 마르다의 오라버니 나사로가 죽었을 때 땡깡 부리잖아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지 않는 한 인간들은 어떤 메시야를 원했느냐? 라고 하면
마귀가 원한 메시야를 원했는 겁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는 뭘 원하죠?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다고 할 때 베드로가 뭐라고 합니까?
“절대로 그 일이 당신에게 미치면 안 된다”라고 막아서잖아요.
그걸 여기에 그대로 갖고 오면 어떻게 해석이 되는가? 하면
‘예수님은 영원히 죽지 마세요. 죽지 마시고 살아계셔서 우리 아들 고쳐주시고
제자들은 이 메시야 왕국을 이 예루살렘에, 시온산에 세우셔서 모든 열국이 우리를 섬기는 자로
만들어 주옵소서’
십자가 지면 절대로 안 된다’라는 그 요청이 여기에 깔려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라고 말씀을 하는 거예요.
이걸 역으로 표현하면 “죽여라” 이야기입니다. 죽여라.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실 때 사람들이 다 돌아서잖아요. 제자들은 먼저 도망가버리고.

그 십자가 지실 때
“네가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메시야면 너도 구원하고 나도 구원하고 우리도 구원하라”
이렇게 조롱을 하잖아요.
그들이 원하는 것은 죽으면 안 되는 메시야,
내려와서 살아서 계속해서 이전에 행했던 그 일들을 우리 눈앞에서 보여달라는 겁니다.
근데 재밌는 것은 이렇게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 살려도
그들은 왜 이렇게 예수님을 적대시하느냐? 라고 할 때는 자기와 관련이 없거든요.

지금 미국의 로또가 2조? 20조? 그거 당첨되는 사람이 있다 칩시다.
그거하고 뭔 상관 있어요? 매주 로또 당첨되잖아요. 몇 십억 짜리가.
그거하고 여러분하고 관련 없잖아요.
똑같은 이야기예요. 나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겁니다. 그들에게는.

지금 이 여인을 통하여서 이 전체 세대,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똑같아요.
‘여기에 초막 셋을 짓고 여기에서 그냥 삽시다.’ 이 이야기나
지금 이 여인이 무릎을 딱 꿇고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가 보기에는 다르잖아요.
이 여인이 애처롭지 않습니까?
애처로우면 예수님께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이 말하면 돼요? 안 돼요? 안 되죠.

믿음이 있잖아요. 예수님이 고칠 것을 믿고 있잖아요.
근데 왜 믿고 있는 그에게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합니까?
특히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저의 아들을 불쌍히 여겨달라” 이렇게 간절히 간구하는 자를.
이걸 보면 새벽마다 ‘불쌍히 여겨주소서’라고 기도하는
그렇게 기도할 때 이 말씀을 읽었으셔야 돼요.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아멘, 이렇게 나와야 돼요.
그래야 십자가가 밝히 보일 것 아닙니까?
맨날 말씀을 읽고 백독을 하고 맨날 성경 쓰기 하고
그 일을 사람들이 하면서 이런 말씀은 안 보이는 거죠.

왜? 그들의 목자가 어떤 목자입니까? 양의 탈을 쓴 이리거든요.
양의 탈을 쓴 이리들은 뭘 제거합니까? 십자가를 제거하고.
뭘 주려고 합니까? 마태복음 4장이나 누가복음 4장이나
마가복음에 예수님을 시험한 그 마귀가 원한 메시야 상을 계속해서 제공하는 겁니다.

여기서도 똑같은 거예요.
이 여인이 원하는 바는 내 아들을 고쳐달라는 거예요.
예수님은 네 아들을 고치러 온 게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오셨어요.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주시기 위해 오셨어요.

아들은 고쳐봤자 지옥 갑니다. 이게 굉장히 위험한 발언인데, 아들은 고쳐봤자 지옥 가요.
십자가의 피 능력을 덮어써야 천국 백성이 됩니다.
이 여인이 지금 원하는 것은 아들이 고침을 받는 거잖아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걸 원했습니까? 아니죠.

왜 그러냐? 하면 이 여인은 여전히 어디에 속해 있어요? 구약에 속해 있죠.
구약에 속해 있으니까 이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저주를 받은 자가
애굽에 내린 모든 질병을 내린다라고 출애굽기에서 말씀을 하셨거든요.

그 부분을 누가 해결해 주느냐? 라고 할 때 이사야를 보게 되면
“저는 자가 걷게 되고 눈 먼 자가 눈 뜨게 된다”라고 하니까
“여호와의 종이 오시면 메시야의 종이 오시면 그렇게 된다”라고 하니까
그걸 액면가대로 보자라는 거예요.

복음을 전해보면 사람들이
‘목사님, 목사님은 왜 자꾸 성경을 성경대로 안 봅니까?’라고 이야기하는데
제가 지금 성경대로 보는 거잖아요.
그 사람이 하는 말이 뭔가? 하면 ‘성경대로 믿어야 된다.’라는 거예요.
그럼 뭘 믿습니까? 이 여인이 믿어요? 안 믿어요? 믿고 있는데.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면 얼마나 대단한 믿음입니까?

여러분 복음 모를 때는 불쌍히 여겨달라는 것이 여러분의 탐심인 줄 알았는데
복음을 알고 나니까 성령 받은 자가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는 것 그것 외에는 할 게 없더라
그걸 하나 배워놨잖아요. 이 여인도 하나 배운 거예요.
상대가 치기 전에 먼저 무릎을 꿇는 겁니다.
무릎을 꿇으면서 자기의 오만함과 교만함과 강퍅함과 자기의 그 뭐랄까?
자기를 높이고자 하는 그 악마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거예요.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는 것은
우리가 하는 어떤 행위도 십자가 앞에서 죄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라는 이야기예요.
왜냐하면 우리는 육체 가운데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야만 이 말씀이 복음이 될 거 아닙니까?
만일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해버리면 이 여자가 어떻게 되겠어요? 삐질 거예요. 삐져요. 삐져.

다행히 안 삐졌어요. 우리 같으면 다 삐졌어요.
왜 안 삐졌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이 아들을 고쳐주셨거든요.
고쳐줬을 때 안 삐졌다라는 말은
이 사람의 이 사람의 노림수가 뭐였는가가 다 나오는 거예요.
이 전체 사건 자체가 뭔가? 하면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고쳐줬으니까 믿지 않습니까?’ 병 고침을 받아서 믿음이 생기는 경우는 없습니다.
이 사람은 보세요. 병 고침을 받지 않았는데도 믿었잖아요. 예수님을.
뭘 어떤 분으로 믿었어요? ‘병 고쳐주실 분으로 믿습니다.’ 했잖아요.
그러니까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죠. 제자들도 그런 일을 행했으니까.

그런데 제자들이 병을 못 고쳐주니까 예수님 앞에 무릎을 딱 꿇고
‘제들은 수준이 너무 낮아’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이야기하면
주석가들이 그리 이야기하거든요. 목사들이.
‘제자들은 믿음이 너무 딸려’ 지금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0장 1절에서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아내며 약한 자를 고치고 권능을 주셨다라고 했을 때
그걸 어떻게 듣는가? 하면 그건 주님의 능력이거든요.
주님의 능력이 그 식으로 작동이 되면 그 작동되는 자리에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가? 하면
성령이 없는 자들은 악마의 속성들을 다 고스란히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지금 이 사람이에요.

여기에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권능을 주셨는데
그 권능이 누구 소유입니까? 제자 소유입니까? 주님의 소유입니까? 주님의 소유죠.
아니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셨으면
증인 되는 게 주님이 주도권을 갖고 계시고 주님이 친히 하시는 일이지
인간이 하는 게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주님이 산에 계실 때 이 사태를 몰랐을까요? 아시죠?
아시는데 못 고치게 하니까 완전히 멋진 상황이 펼쳐진 거예요.
“언제까지 내가 너희를 참으리오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느냐?”

예수님이 함께 계시면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가? 하면 계속해서 이들은 어디에 빠져서 살게 돼요?
악마 속에서 악마의 종으로서 예수님을 믿고 사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이 이들에게는 진정한 축복이 돼요.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때부터 나으니라”
사람들은 이걸 보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냈지 않느냐?’
그래서? 그래서? 나았는데 그래서? 그다음 봅시다.
나았는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어요?
지금 누가 더 귀신 들렸어요? 누가 더 귀신 들렸어요?
이 여인, 엄마가 더 귀신 들렸어요.

그게 어디에 나옵니까?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다라 지방에 가셨을 때
이 귀신 들린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소리 지를 때 돼지 떼로 넣어달라고 요청을 하죠.
와~ 진짜 예수님이 귀신의 기도를 들어줍니다. 마귀의 기도를.

왜 들어주시는가? 하면요. 지옥 보낼 자는 지옥 보내야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 돼지 떼가 몰살을 하니까 그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합니까? 추방을 하죠.
왜 추방합니까? 돈이 안 된다라는 겁니다.

이걸 오늘날로 말하면 재수 없다는 거에요. 재수 없다.
‘복음을 듣고 난 뒤 되는 일이 없어. 재수가 없어’ 이거보다 큰 손실이 있습니까? 없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을 쫓아내는 거예요.
그러면 누가 제대로 된 귀신 들렸어요? 둘 다 제대로 된 귀신 들렸는데

예수님이 비유를 말씀하셨잖아요.
귀신이 나갔다가 갈 곳이 없으니까 돌아와 보니까 어떻게 돼 있어요?
소제가 돼 있어요. 깨끗하게.
그래서 소제가 청소가 (소제라는 말을 쓰는데) 청소가 깨끗하게 돼 있으니까
일곱 귀신이 들어온 겁니다.
일곱 귀신 들어온 모습이 지금 이 사람들이에요. 점잖하게 ‘나가주세요.’

물론 군대 귀신 들리면 지 정신도 아니고...
군대 귀신 들린 자의 특징이 뭔가? 하면 발악을 하는 거죠.
나중에 발악을 하는 모습이 어떻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겁니다.

지금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때부터 나으니라”
그다음 이 여인의 반응이 없잖아요. 성경에. 왜 없는지 이제 아시겠죠?
우리 같으면 기록 안 하겠습니까? 이 여인의 반응이.
당연히 나오겠죠. ‘신이 나서 돌아갔더라’ 그게 끝이에요.
왜? 그게 그에게 필요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거예요.

여러분이 언제 기도합니까? 아쉬울 때 기도하잖아요.
그 기도 이루어지면 그다음 기도합니까? 안 합니까?
제가 복음을 모르는 사람한테 질문하는 게 아니라 아는 사람한테 질문을 해요.
모르는 사람은 탐심이 끝이 없기 때문에 기도가 쉬지 않거든요.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부터 시작해가지고.
그러니까 그들의 기도를 보면 영원히 이루지 않을 기도만 하는 겁니다.

이 귀신을 예수님이 쫓아냈으니까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보라 이분이 진짜 귀신을 쫓아냈지 않느냐?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세요’
그 전도를 받은 여인이 이 여인이에요.
그래서 무릎 꿇고 제자들한테 왔는데 ‘새끼 제자는 안 돼. 왕초한테 가야 돼. 왕초한테’
이런 코미디도 없어요.

나중에는 예수님께서 성령을 주시면 그 사람이 어떠하든지 간에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소자일지라도 그가 전하는 복음은 생명의 복음이 되고 심판의 복음이 돼요.

“이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한번 보세요. 지금 질문 자체가.
지금 질문이 제대로 된 질문입니까? 잘못된 질문입니까?
지금 이 사태를 전혀 파악을 못하죠.
이제 여러분들이 이 제자들의 질문이 파악이 되죠.
제자들이 지금 어디에 관심 있어요?
귀신 쫓아내는 데 관심이 있지, 십자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께서 답변을 하시는데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이 부분은 앞서도 말씀드렸죠.
믿음이 적다고 하면 우리는 뭐라고 해석하겠습니까? 지금도 똑같거든요.
정말 사람들이 이상한 게 이미 마태복음이 다 기록돼 있고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다 기록돼 있는데
누구처럼 성경을 해석하는가? 하면 제자들처럼 해석을 해요.
그 말은 성령을 못 받았다는 확실한 증거예요.

‘우리는 왜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지금 너 질문이 잘못되었다. 질문.
나중에 한번 봅시다.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거든요. 사도행전에 보면.
병을 고치죠. 근데 그 귀신 쫓아내는 데 주목합니까? 십자가에 주목합니까?
제자들은 어디에 주목을 해요? 십자가를 주목하죠.

이미 출발 자체가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여기부터 출발을 합니다.
그러면 이것을 이야기하기 위한 이 능력과 권능과 귀신 쫓아냄이에요.

이미 사복음서에 이러한 믿음들은 이것을 보고 믿는 믿음은 다 가짜라고 다 들통이 났습니다.
사도행전도 그와 다르지 않아요.
그러면 왜 그러한 능력을 보여주는가? 라고 하면 이들은 사도권 때문에 그래요.
주님이 특별히 그렇게 사용하는 겁니다.
그러면 지금은 병 고치는 거 없습니까? 있죠. 의사들도 병을 고쳤잖아요.
근데 진짜 믿음이 있는 의사라면 뭐라고 하겠어요?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면 상대는 ‘야, 기술이 뛰어난데요.’
그러면 의사가 뭐라 하겠어요? 주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대화가 안 돼요. 믿음 있는 사람들하고는.
십자가를 자랑하거든요.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이렇게 돼 있거든요.

나중에 마가복음에 보면 “너희들이 나보다 더 큰 일을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뭐 ‘독사가 물어도 상하지 않는다’ 이런 표현을 했거든요.
바울에게 실제로 적용이 됐는데 그 말씀의 의미를 사람들이 오해를 해요.
예수님의 영이 오면 고린도후서 6장 1, 2절에 나오듯이 주님과 함께 일하는 자가 되잖아요.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후6:1~2)

그러면 나는 뭐예요? 들러리거든요.
어떤 들러리? 세례 요한 같은 들러리.
그는 흥하여야 되겠고 나는 쇠해야 되는 그 들러리입니다. 복음 전파자죠.
그 복음 전파자가 하는 모든 일들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을 전하는 그 증인이고
지금 예수님은 아직까지 십자가에서 다 이루지 않았어요.
성도들은, 사도들은 완성태를 증거하는 자들이에요.
그래서 “나보다 더 큰일을 하리라”라고 말씀을 하신 겁니다.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산을 옮긴 사람 아무도 없어요. 지금까지. 맞죠?
그러면 예수님이 옮겼습니까? 예수님도 옮기지 않아요.
“너희들이 말하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라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지난 주일날 아브라함의 믿음을 지금 계속 말씀드리고 있잖아요.
그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떤 믿음입니까?
약속을 박살내는 믿음이, 진짜 믿음으로 인정받는 믿음으로 바꿔치기 당하죠.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여기서도 똑같이 작동이 됩니다.
누구에게? 제자들에게, 그래서 제자들이 사도가 되는 거예요.
시몬이 베드로로 바뀌듯이, 그 내용을 담는 겁니다.
‘성령을 받게 되니까 한 겨자씨 만한 믿음도 없다’라는 것이 확정적으로 드러나게 되죠.
그래서 죄인 중에 괴수가 되는 거예요.

로마서에 나오는 그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 믿음인 겁니다.
‘눈꼽 만큼도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도 나에게는 없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느냐?
아버지께서 자기를 두고 맹세하신 그 맹세를 이루신 분.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주신 그분,
그분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시니까 그분이 성령을 주시니까 그들이 못할 것이 없었어요.

이 표현도 참 재미있습니다.
자기가 못할 게 없는 게 아니라 주께서 그야말로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제자들이 되는 거예요.
이 제자들은, 사도들은 이 내용을 다 품고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21절은 어떤 사본에는 있고 어떤 사본에는 없다라고 돼 있는데
이 마가복음도 있기 때문에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이런 유가 나가지 아니하니라”
굉장히 이것이 우리를 이 옭아매는 올무입니다.
얼마나 유혹을 많이 당했어요? “기도와 금식 외에는 이런 유가 없느니라.”
기도가 아니면 안 된다. 그 기도해보세요. 되는지.

예수님께서 이 사본을 집어넣어도 돼요.
물론 의도적으로 인간의 행위를 집어넣고자 했지만, 여기에 안 통하죠.
왜 안 통하는가? 하면 이 여인은 벌써 간절한 기도를 하고 있었잖아요.
‘예수님만은 이걸 고쳐줄 수 있다’라고 믿고 있었잖아요.

너희의 기도, 너희의 금식은 안 통한다 이 얘기입니다.
예수님의 기도, 예수님의 금식은 십자가 사건과 연결이 되어 있어요.
기도와 금식을 집어넣더라도 한번 보세요.
이 여인이 얼마나 확실한 믿음을 갖고 있습니까?

‘기도와 금식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가지 않는다’라고 하니까
‘아 우리도 할 수 있다. 우리도 할 수 있다’ 뭐만 하면 돼요? 기도하고 금식하면.
그래서? 사투리를 좀 쓰면 뻐떡하면, ‘심심하면’이라고 할까요?
어떤 그 계기만 있으면 기도원으로 달려가요. 기도원으로.
왜냐하면 이 말씀 때문에 기도와 금식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가지 않으니까.

자기도 한번 능력을 받고 싶다라는 거죠. 권능을 받고 싶다라는 겁니다.
그 모습 앞에 예수님이 뭐라고 합니까?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오”
이 사람들은 뭘 원하는 거예요?
‘예수님 십자가 지시면 안 됩니다. 죽으시면 안 됩니다’를 계속해서 요구하고 있는 거예요.

근데 이미 십자가 사건이 일어났죠. 그 이야기는 못하고.
그래서 어디로 넘어갑니까? 십자가를 빼버리고 부활의 주님을 믿는 모습으로 확 바꾸는 겁니다.
그 모습이 바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의 모습인 거예요.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불쌍히 여겨 달라는 이 모습이야말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의 모습이요.
주님이 십자가 지지 말고 영원히 살아서 나를 구원하고 나를 축복해 주기를 소원하는
그 사단의 모습임을 말씀을 통하여 들려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저희들을 십자가 사건 속으로 합류시켜 주셔서 우리의 본 모습이 어떠하며,
십자가만을 자랑케 하기 위해서
우리를 말씀의 사람으로 날마다 삼아줌을 감사하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관리자 23-09-14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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