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3-11-21 08:45
20231120 신명기 강해 2강 신 1:2-3 열하룻 길과 사십년 십일개월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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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3-11-21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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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20 신명기 강해 2강 신 1:2-3 열하룻 길과 사십년 십일개월

하나님 말씀, 신명기 1장 2절에서 3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신1:2~3)
“호렙산에서 세일산을 지나 가데스 바네아에까지 열 하룻길이었더라 제 사십년 십일월 그 달 초일일에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자기에게 주신 명령을 다 고하였으니”아멘

열 하룻길 정도면 애굽에서 출발하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의 땅까지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데스 바네아에서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40년 11개월, 40년 광야길을 걷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이 본문을 읽으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별 생각이 없을 수도 있지만 ‘열 하룻길 만에 갈 길을 40년 걸렸다’라고 하면
이 두 갈래의 길에서 어디를 선택하겠습니까?
열하루 만에 약속의 땅에 도달하는 길을 선택하겠습니까?
아니면 40년이 걸리는 길을 선택하겠습니까?

물론 제가 질문이 잘못되었죠. 선택 사항은 없는데.
문제는 인간이 판단을 한다라는 거예요.
선택을 한다라는 겁니다.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명기를 읽게 되면 그 읽을 때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반성을 하겠습니까?
아니면 ‘야 참 언약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셨구나’ 그렇게 생각하겠습니까?

이 본문에 대해서 시간이 나시면 설교를 한번 들어보세요. 뭐라고 설교를 하는지.
구약을 설교할 때는요 교훈적 설교가 아니면 할 게 없어요.
그런데 교훈적으로 설교를 하게 되면 십자가가 안 나와요.
모든 게 인간의 행위로 귀결이 됩니다.

40년 광야 길은 그 원천이 따로 있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것을 위한 40년이에요.
40년 이 광야길이 예수님의 광야 40일간의 시험이죠. 그것을 위한 40년이고요.

그 40일은 공생애 3년이 되는 겁니다.
40일이 어떻게 또 3년이 됩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40일 동안 주리시고 금식하실 때 마귀가 시험을 하잖아요. 그것이 광야였고.
본격적인 광야는 이제 자기의 제자들을 부르시고 3년 동안 복음을, 천국 복음을 전하시는 그 기간과
그리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겁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이런 거죠.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심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언약을 위해서 모세를 보내었다면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애굽에서 구출하자마자
곧장 열 하룻길 정도밖에 되지 않는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셔야 된다라는 것이 우리들의 생각이에요.
그게 약속이거든요.

분명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언약을 기억하사”라고 했거든요.
언약이 성취되어야 약속이 주어지거든요.
그런데 ‘언약을 세웠으니까 하나님은 약속을 이룰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겁니다.

약속은 반드시 언약을 드러내게 돼 있어요.
좀 쉽게 말씀드리면 성령이 약속이거든요.
그러면 성령이 약속이기 때문에 그 약속을 받은 성도들은 십자가 새 언약을 증거한다라는 겁니다.
그럴 것이라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상상도 못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본문을 보면서 열 하룻길과 40년의 그 기간,
40년 11개월 되는 이 기간을 비교하는 겁니다.
하필 딱 비교를 해놨거든요.
그럼 이 본문을 읽게 되면 당연히 회개하겠죠. 반성을 하고.
왜 그렇습니까? 40년 광야 생활이 싫은 거예요.

구약을 읽으면서도 예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유대인들이 유대교죠. 유대인들이 성경을 해석하는 방식으로 해석을 하는 거예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40일 광야에서 예수님이 시험받으신 것을 위한 40년이 되려면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돼요.

그런데 인간들은 자꾸 반성하려고 하고
‘우리는 저들처럼 불순종하지 말아서...’
왜 불순종하지 말아야 돼요? 광야 생활이 싫은 거예요.

세상이 십자가 지신 주님을 위한 세상임을 원치 않는 겁니다.
나를 위한 세상이어야 되는 거예요.
선악과를 따먹을 때 마귀가 이미 유혹을 했잖아요.
뱀이 말을 걸었다라는 것은 이미 악마가 들어왔다라는 거거든요.
들어오니까 내가 만들어졌어요. 자아가 생깁니다.
그 자아는 어떻게 발동하는가? 하면 눈으로부터 발동을 해요.

그전까지는 말씀을 먼저 들었죠.
눈으로부터 시작을 하면서 그다음 무엇이 생깁니까?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정도로 보였던 거예요.
누구를 그렇게 한다는 겁니까? 나를 그렇게 한다는 거죠.
그러한 나가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을 대하는 모습도,
꼭 말씀을 이렇게 골라잡아서 탐스러운 거, 먹음직스러운 것만 골라 먹으려고 하는 거예요.

요한복음 17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데요. 14절부터 보겠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아버지의 말씀을 저들에게 주었기 때문에 세상이 저희를 미워했다.
아직까지는 제자들을 미워하지 않거든요.
성령을, 약속의 성령을 이제 열한 제자들에게
그리고 예수님이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에게 주시게 되면 세상이 저희를 미워한다는 거예요.

우리는 이런 말씀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성령을 주시면
세상이 우리를 안 미워하도록 조치를 하시면 좋지 않으냐?
그 미워하는 기간이 없기를 바라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굉장히 실망스러운 그 말씀을 하시는데 15절입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데려가는 게 좋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의 기도는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기도하시는 것은
악에 빠지지 않게 보존하기를 기도해요.

그럼 이 말은 예수님의 말씀이 이들 속에 들어있기 때문에
세상이 미워할 요소들이 주님의 기도에 의해서 계속해서 튀어나온다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미움당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미움 당하는 그들을 데려가는 게 목적이 아니라
‘미움 당하게 하기 위해서 이들을 만들었다’라고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미움 당하면서 그 악에 빠지지 않게 보존하기를 위함이다.

악에 빠지지 않게 보존이 되면 어떻게 되느냐? 라고 하면 예수님처럼 죽어요.
핍박을 받아요. 미움을 받아요. 그 순서는 아무도 모르죠.
야고보가 가장 먼저 죽임을 당하잖아요.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닐 때 무엇을 기대했느냐? 라고 하면
하나님 나라를 기대했어요.
약속의 나라, 메시야 왕국을 소망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돌아가시기 전에 이러한 기도를 하시는 거예요.
이러한 내용을 이들이 듣게 되면 이건 원치 않는 거거든요. 그다음 보면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세상에 속하지 않으면 세상이 어떻게 됩니까?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죠.
예수님이 세상에 속했습니까, 속하지 않았습니까? 속하지 않았죠.
예수님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자기들 무리 군에서 예수님을 추방해버립니다. 제거해버리죠.
왜냐하면 세상에 속하지 않는 분이 와서 이 세상을 악하다라고 하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가 심판주인데 자기를 악하다라고 심판하는 사람이 등장할 때 인간은 가만히 안 있어요.
특히 우리 자신을 보더라도 그렇잖아요. 착하게 살고 올바르게 했는데 모함을 당한다.
아마 지옥 가는 자들이 가장 화내는 대목이 그런 것일 거예요.
내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했는데
‘주님은 모른다’ 하는 거예요.
그게 세상이거든요.

세상 사람들은 그 말씀을 못 알아듣죠.
그 정도로 했으면 인정을 해줘야 되는 것이 세상인데 그걸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 제자들은 성령을 받게 되니까 예수님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약속을 받았었기 때문에
그들은 이 세상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십자가를 계속해서 자랑하고 증거하는 겁니다.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라고.

온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 하면 십자가 중심으로 보는 거예요.
예수님이 ‘세상을 악하다’라는 그 기준이 우리는 말만 악하다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게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다’라는 것 자체가 ‘세상이 악하다’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나 기적이나 모든 것들은 세상이 악하다라고 증거하는 거예요.
그중에 하나가 “너희 아비는 마귀다”라는 거고요.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서 십자가를 지셨다라는 것은 세상이 악하다라는 겁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은 이 사도들, 그리고 성도들의 등장은
그들이 이 세상에서 예수님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던 것처럼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로서 주님의 증인이 돼요.
그래서 이들로 인하여서 또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생긴다라는 것을,
발생된다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여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제자들이 지금 예수님을 주님으로,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목적이 뭐냐? 하면
메시야 왕국에 들어가고 싶은 거예요.
메시야가 오시면, 다윗왕만 오시면 다윗 왕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거든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을 때 그런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셨잖아요. 주가 되셨잖아요.
그러면 그다음 우리는 주가 되신 그분의 덕택에 그냥 어떻게 살면 되죠?
나의 행복을 위해서 살면 되나요? 그런 걸 꿈꾸거든요.
그 예수라는 그 이름 자체가 오늘날 교회에서는 우상하고 똑같아요.
복주머니하고 도깨비 방망이와 똑같은 그런 우상에 불과한 겁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서 곧장 데려가지 않는 이유가 뭔가 하면요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주님의 증인 삼기 위함이에요.
그래서 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출했을 때 그들은 그림자잖아요.
그림자거든요.
그림자라는 것은 실체가 등장하면 그 그림자의 그 모습이 실체와 바꿔치기 됩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예수님이 40일 동안 광야에서 주리시고 마귀에게 시험을 받았듯이,
3년 동안 공생애 기간에 이 땅에 살다가 고난받고 핍박받고 죽임을 당했듯이
그 코스를 똑같이 걷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광야길이 즐거운 거예요.

뭐 즐겁다는 말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즐거움이 아니고 감사가 넘치는 광야길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런 길이 아니면 십자가를 증거할 수가 없어요.

또한 그와 달리 이 제자들은 성령을 받게 되어서 십자가를 자랑하거든요.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광야에서 원망한 그 이스라엘 백성과 동일하다는 겁니다.
그걸 자랑하니까 희한하게도 핍박을 당해요. 미움을 당하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주님이 천국을 만들어서 그러한 천국으로 곧장 넣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이름을 위하여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사용하신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그 열 하룻길과 40년 길을 목격을 할 때
우리는 우리의 죄악이 그 말씀을 통해서 고스란히 튀어나와야 되면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그 일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도 똑같이 40일, 40년 광야의 그러한 삶을 살아야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욕망은 당장 천국 가고 싶지만
실상 그 천국이 지옥임을 오늘도 말씀을 통하여 들려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주께서 저희들에게 성령을 주셔서 천국 백성으로 삼아주셨기에
주님이 이 땅에서 당하였던 그 일들을 십자가의 피만 자랑하는 죄인이기에 똑같이 당하게 하셔서
주님이 십자가의 피로 구원하신 자들을 다시 불러 모으시는
그 일에 사용하심을 감사하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