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2-04-24 15:03
사도행전 강해 71 행 17:16 우상과 바울의 분노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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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pJgJJ2X5scg

관리자 22-05-05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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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71강 우상과 바울의 분노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곳에 모아주신 형제 자매들의 다양한 환경과 이해할 수 없는 상황들이
주님이 친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허락하신
십자가 사건임을 날마다 새롭게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이 불러주신 우리의 모임은 잠시의 불편함과 혼란스러움도 믿을 수 없기에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죽은 목이 뻣뻣한 저주받은 자들 같이
지금 이 시간에도 불편함과 혼란스러움이 싫기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합창을 하고 있는,
예수님 죽인 흔적을 몸에 지닌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모임입니다.
서로의 교제 속에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에서 위로도 받고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에서 오해와 갈등으로 힘들기도 하지만
우리 모임의 공통 분모는 항상 악하고 음란하여 예수님을 핍박하고 조롱하는
어둠의 소품으로 드러내시기에 아무 할 말 없는 자들이 함께 모여
이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헛소리로 떠들며
홀로 이루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십자가만 바라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오늘도 친히 죽음의 십자가로 일하시는 주님의 선포되는 말씀으로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신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대로 깨어지고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은혜가 임하여
주님의 피로 만드신 새로운 피조물의 기쁨을 만끽하는 새 언약의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잠언서 21장 19절에서 20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잠21:19~20)
19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20 지혜 있는 자의 집에는 귀한 보배와 기름이 있으나 미련한 자는 이것을 다 삼켜 버리느니라

기도하시겠습니다.
다투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홀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지혜라고 저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참 지혜는 십자가요.
십자가가 지혜이기에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얼마나 악마적인지를 들추어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다툼 속에 싸움 속에 살기를 원치 않는 이유는
하늘 위에 자기 보좌를 만들고 홀로 잘났다고 뽐내면서 자기 영광만을 추구하기에
다툼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죄인 되기를 원치 않고 나의 의로움만 돋보이게 하려는
그러한 악마성이 우리 속에서 끊임없이 솟아 나오기에
주께서 오늘도 저희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주의 이름으로 모이게 하시고
십자가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이 시간도 저희들을 긍휼히 여기사 십자가만 오롯이 드러나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 말씀, 사도행전 17장 16절에서 20절 말씀을 제가 읽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행17:16~20)
16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
17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18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혹은 이르되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19 붙들어 가지고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우리가 너의 말하는 이 새 교가 무엇인지 알수 있겠느냐
20 네가 무슨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사도 바울이 이 베뢰아에서 쫓겨났죠.
베뢰아에서 쫓겨나서 급히 밤에 도망을 쳐서 베뢰아에서 상당히 먼 곳인 아덴, 아테네죠.
오늘날에 아테네로 도망을 쳤습니다.
실라와 디모데가 함께 할 수 없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도망칠 때 여러 사람이 움직이면 잡히기가 쉽겠죠.
그리고 어쩌면 실라와 디모데는 이 데살로니가로부터 온 그 유대인들,
복음에 대적하는 그자들에게는 별로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급히 아테네로 도망을 쳐서 그곳에서 이제 자신을 이렇게 도피시켜준 그 베뢰아 사람에게
실라와 디모데를 속히 보내달라고 요청을 하죠.
이런 말씀을 보면 오늘을 사는 우리들과는 참 맞지 않아요.
왜 맞지 않는가? 하면, 우리는 혼자 사는 게 좋아요.
제일 좋은 것은 이렇게 화면으로 보고 화면으로 끝나고 그냥 헌금도 요즘은 뭐 페이 있잖아요.
그냥 지불하고 굳이 만날 필요가 뭐 있느냐?

우리들은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가 별종이라 생각할 수가 있죠.
근데 그들도 똑같이 죄인 중에 괴수들이거든요.
그럼 바울이 왜 그들을 빨리 자기에게 보내달라고 하느냐?
그 이유를 보게 되면 성경에는 여러 가지가 나옵니다.
함께 하는 것이 힘이 되고 위로가 돼요.

우리들 같으면 주님이 동행하는데 그들이 함께 하는 게 왜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느냐?
성경을 안 읽으니까 그런 소리를 하죠.
사도 바울이 성도들로 인하여서 얼마나 위로를 받고 기뻐하는지 성도들 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위로 받고 기뻐한다는 것은 주께서 피로 사신 형제 가운데 주님의 용서하심을 보기 때문이죠.
그리고 주님의 일하심을 목격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아덴에 디모데와 실라가 곧장 도착을 하긴 해요.
그래서 성경에 읽어보면 나중에 사도행전 18장이나 데살로니가서를 보게 되면
이 실라는 빌립보로 보냈을 가능성이 높고, 그곳에 가서 연보를 받아왔다고 이렇게 볼 수 있고
이 디모데는 데살로니가 교회로 보내서 다시 돌아오는 그 내용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이들이 빨리 돌아오기를 이렇게 원했던 거죠.

지금 그런 상황에서 성경이 주님께서 누가를 통하여서 독특하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독특하냐?라고 하면요.
우리들은 항상 어디에 주안점을 두느냐? 복음 전하는데 목적을 둘 가능성이 되게 높아요.
우리의 심정상, 어디를 가든지 복음을 전해야 된다.
지금은 그런 마음이 없겠죠. 없으면 없는 건데
대체로 이 말씀을 듣게 되면 사도 바울 정도 같으면
어디를 가더라도 그 무게 중심이 본인이 복음 전파자로 부름을 받았잖아요.
그러면 복음 전하는 일에 진력(盡力)을 해야 된다라고 생각을 하는데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우선순위가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린다는 겁니다.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린다는 말을 갖고
이제 어떤 사람들은 바울의 계획 속에는 아테네에서 복음을 전할 계획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봐도 충분해요.
그렇게 봐도 되는 이유가 뭔가? 하면 복음은 주님이 전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의 일을 하니까 바울이 늘 복음을 전하기를 노력하고 애썼다.
복음은 빌립보에서도 마찬가지였죠. 데살로니가에서도 마찬가지였잖아요.
주께서 복음을 들을 수 있는 환경과 여건을 직접 만드십니다.
그 상황으로 몰아넣어서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 거죠.

여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논 곳은 아니에요.
다른 본문과 달리 바울이 아덴에 갔으면 다른 지역과 같이 유대인 회당을 먼저 찾아갔다.
이렇게 기록을 해야 되는데, 그렇게 기록하지 않고 기다리는 가운데 무엇을 보게 되었느냐?
아마 어쩌면 안식일이 아직 이렇게 되지 않았던 그 요일이었을 수도 있겠죠.

(행17:16하)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였다

지금도 아테네에 가면 그 아크로폴리스가 있고 그 산이 있잖아요.
거기에 파르테논 신전이 있고 그 아래쪽에도 신전이 여러 개 남아 있죠.
그 파르테논 신전 그 아래쪽에
오늘 여기 뒤에 본문에 나오는 아레오바고 언덕이라는 곳이 있는데

지금 성경을 보게 되면 이 아테네 자체가 우상으로 도배가 되었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저기 경주 가는 길에 대구에서 경주 가는 길에 만불상이 있는데
그 산에 올라가는데 만 개의 부처가 있거든요.
그런 부처가 둘러싼 속에 도시를 만들어 놨다. 이렇게 볼 수 있고요.

제가 사는 이 동네는 좀 관광지라 하면
부처상을 산만한 부처상을 얼마나 많이 만들어 놓는지 몰라요 .
낙산사에 있는 그런 약사 여래불입니까? 그 규모하고는 게임이 안 되는 그런 것들을 만들어 놨는데
여기도 마찬가지죠

거기에 세운 여신의 그 크기가 어마어마하죠. 상아와 금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데
이 아테네 자체가 우상으로 도배된 곳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죠.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이 주위가 우상으로 도배됐습니까? 안 됐습니까?
오늘날 신앙인들은, 사도바울이 우상으로 도배된 그 도시에서 분을 냈다.
이 분 냈다는 것은, 분노가 일어났다는 거예요.

왜 분노가 일어납니까?
자기들 세계에서 자기끼리 살고 있고
나는 신앙의 세계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분낼 게 뭐가 있어요?

여러분이 절간에 가서 분 냅니까? 세상 모두가 돈이라는 우상을 쫓고 있잖아요.
분을 냅니까? 아예 우상숭배하자라고 덤벼들잖아요.
뉴스를 보면 우상 자체죠. 모든 것이 나를 위한, 나의 행복과 나의 영광과 나의 미래
‘너희들은 우상이 되어야 돼. 너는 왕이 되어야 돼’
그런 뉴스를 보면서 분노가 일어납니까? 사도 바울이 바보가 된 거예요.

요즘 같은 시절에 이런 본문을 보면
아니 신앙생활은 이렇게 복음 듣는 이런 데서만 하는 거지
밖에 나가서 뭐 분낼 필요가 뭐 있느냐?
또 이렇게 이야기하면 또 배운 사람들은 변명하기 바쁘죠.
아이고 바울이 뭐 아무 때나 분냅니까?
그 말하라고 이 말씀을 주신 게 아니에요.
말씀을 통하여서 우리를 책망하죠.
성경 말씀을 갖고 답을 찾아가지고 요리 피하고 조리 피하고
분노가 왜 일어났느냐? 성령께서 분노를 일으켰죠.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마는 아니 신천지가 난리를 치든 다락방이 난리를 치든
그냥 대형교회가 난리를 치든 분낼 게 뭐가 있어요?
그들이 그들 나름대로 취미를 생활하는데 우리가 관여할 게 뭐가 있냐? 이 얘기입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죠. 왜 거기에 끼어듭니까? 우상숭배하면서 잘 먹고 잘 사는데
이미 이 당시에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 그 철학자들이 그 세계를 점령하고 있잖아요.
이미 행복한 삶을 살아요.
그들 나름대로의 영역을 인정하고 나는 나대로 살면 되지,
그 속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앞서 계속해서 사도행전에서 등장하지만 유대인들로부터도 핍박을 받지만요.
이들로부터도 미움을 받고 핍박을 받게 돼 있어요.

우리가 이 세계 속에서 분내지 않는 이유는 핍박받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래요.
믿음 좋은 사람은 ‘주께서 전하지 않게 하셔서 그렇다’ 이렇게도 표현하겠죠.
이 두 요소가 공존하는 겁니다. 악마적인 인간들은 자기 피할 길만 찾죠.
그러니 말씀을 보면서 책망을 받을 마음이 없어요. 자기가 먼저 꿇어버려요.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악합니다. 그러니까 나 구원받았죠. 나 복음 알죠?’

오늘 본문은 상당히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무엇을 담고 있느냐?라고 할 때는
이 우상성이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어떻게 이방까지 확장되면서
그 이방 세계 속에 있는 그 우상이
어떻게 유대교 속에 고스란히 들어와 있는가를 보여주는 말씀이에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했을 때 예수님이 유대인들 가운데 빛이셨죠.
그 유대인들 가운데에서만 빛었습니까? 아니죠. 이방 나라 전체 가운데 빛이었죠.
빛이라는 것은 이미 이 세상으로부터 공격받게 돼 있고, 제거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자신들부터 복음을 별로 좋아하지 않잖아요.
혹시 내가 이 복음대로 죽을까 싶어서 이 육에서 염려가 올라오거든요.
‘욥을 보면서 욥의 인내를 배워라’ 이렇게 말씀을 하지만 욥처럼 될까 싶어서 벌벌벌벌 떠는 거죠.

아테네 가운데 우상으로 도배된 그 도시에서 그것을 보고 분노가 일어난 그 바울이
어디에서 복음을 전하는가? 여기 보면 유대인의 회당이죠.
유대인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경건한 사람들
이 두 가지를 말하는 것은 앞서서 베뢰아도 나오고 데살로니가에도 나오지만
헬라 귀부인들이라든가 이방인인데 유대교로 들어온 사람들이에요.

그렇게 들어왔다라는 것은 유대인들은 벌써 경건한 자들입니다.
메시야 왕국을 기다리는 자들이고요.
기본적으로 바리새인 이런 모습을 띠고 있다고 보시면 돼요.
그래서 유대인들을 두고 경건하다 이렇게 표현하지 않습니다. 이미 전제가 돼 있기 때문에

그러면 이방인들이 경건하다 했을 때는 누구와 비교하죠?
다른 이방인들과 비교하는 거예요. 그럼 다른 이방인들은 경건하지 않다라는 거죠.
그래서 이 경건하다는 이 용어 자체를 십자가 복음 안에서 달리 봐야 되는 용어가 되는 겁니다.
‘경건하다’라고 하는 말은 유대인들과 동일한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는 자들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아테네 도시에 우상이 가득하니까
사도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서 무슨 설교를 했을 것 같습니까?
여러분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면 이 아테네 이 도시에 저 아크로폴리스 위에
저 아테나상을 만들어 놓고 숭배하는 그러한 것들을 왜 용납합니까?
용납하지 마시고 이 아테네를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합시다.
예수님이 다스리는 도시로 바꿉시다.
당신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렇게 살아서 되겠습니까? 이런 설교를 했겠습니까?

목사들이 분노하잖아요. 공산주의 될까 싶어서. 돈 잃기 싫은 거예요.
주님은 이 땅에서 모든 걸 빼앗기고 추방당했는데 제거당했는데 본인은 안정을 원하죠.
회당에 들어가서 뭘 얘기했겠습니까?
여러분이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면 이 우상숭배의 도시에서 왜 분노하지 않습니까?
이 얘기를 했을까요?

사람들은요 이 본문을 보면서 관심을 어디에 두는가 하면요.
뒷부분에 내용이 많이 기록된 스토아 학파, 에피쿠로스 학파, 그들과 논쟁하는 그 내용과
바울이 설교하는 그 내용에 중점을 둡니다.

그런데 이 내용이 무엇 속에 들어가 있느냐?라고 할 때는
이 유대인 회당에서 유대인들과 경건한 자들에게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과 연결이 돼 있어요.
어떻게 연결돼 있는가? 한마디로
‘유대인들 너희들이 바로 저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그 우상을 섬기는 자와 동일한 자다’
이 얘기입니다. 그게 복음이 그들에게 말하는 내용이에요.

사도 바울이 회당에서 뭘 이야기했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가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주가 되셨다.
그분이 심판주다. 그분이 그리스도다’
그것을 말하는 순간 그들이 믿는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은 우상으로 바뀌어버립니다.

이것을 보게 되면 사도 바울이 이전에는 회당에 들어가서 분노한 거죠.
복음을 전할 때 이 논쟁을 했다라고 하잖아요. 지금 여기서 다 논쟁이에요.
회당에서도 논쟁하고 아고라에서도 논쟁을 하고 치열한 논쟁입니다.
치열한 논쟁할 때 ‘내 의견은 이렇습니다. 당신 의견은 어떻습니까?‘
이게 철학자들 하는 이야기거든요.

자기들끼리 의견을 개진하는 거예요.
’그래 네 의견이 그러면 네 뜻대로 살고 내 의견이 그러면 내 뜻대로 살자’ 이게 토론이잖아요.
그런데 성경에서 토론이라는 말을 썼지만
이 토론이 아니라 한쪽은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거고
다른 한쪽은 믿어도 되고 안 믿어도 되는 내용이에요.
토론이 되겠습니까? 이게. 그래도 끝까지 붙는 거예요. 저쪽에서 쳐낼 때까지

이 아테네에서는 독특하게
회당에 들어온 유대인들 가운데 믿는 자가 나왔다라는 표현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이방인들 중에 믿는 자가 등장하거든요.
반대로 유대인들이 바울을 배척합니다. 이렇게 되면 누가 우상숭배자예요?
어디가 우상으로 가득 차 있는 겁니까? 안식일마다 모여서 말씀을 듣고
말씀만 들어요? 그들이 육일 동안 어떻게 살았습니까? 바리새인의 기도를 보세요.
이레에 두 번 금씩 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고

절간에 가서 비난이다. 비나이다. 이것만 우상숭배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교회에 가서 그들이 십일조를 드리고 감사 헌금을 드리고
오늘 부활절이라고 전부 다 돈 봉투 갖고 가서
그걸 어디에 왜 내는지 그거 왜 받칩니까?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죠.
그래서 부활절 날 무엇을 제거해버려요? 십자가를 제거해버립니다.
정말 재미있죠. 부활절은 십자가를 제거해버려요.

그런데 사도 바울이 전하는 것은 십자가 복음이거든요.
교회 전체를 우상숭배로 만들어버립니다.
사도 바울이 회당에서 유대인들에게
그리고 이방인으로부터 들어온 경건한 자들 그들이 얼마나 큰 결심을 했을까요.
그 당시에 이 철학자들이 벌써 스토아나 이런 쪽은
BC 400년 300년 200년 그전에 벌써 만들어진 거거든요.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 예수라는 분은 언제 만들어졌어요? 30년 20년 전이에요.
인간들이 보기에는 새로운 종교일 뿐입니다. 하나의 종교일 뿐이에요. 뒤에도 나오지만
불교에서 말하잖아요. 석가모니가 훨씬 이전이라고
그들이 보는 안목은 역사적 연대 기록밖에 못 보는 겁니다.

문제는 지금 유대인들이죠.
그 유대인들이 누구를 대변하고 있느냐? 할 때는 이방인들을 대변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유대인들의 신앙을 살펴보면 이방인들의 우상이 어떠한가가 가장 명료하게 드러납니다.
창세기 31장을 보면 재밌는 사건이 나오는데요.
이 야곱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믿고 삼촌 라반집으로 가잖아요.
가서 나름대로 속이는 데 선수잖아요. 그 속이는데 하나님께서 일조하시죠.

그래서 큰 재산을 이렇게 형성해서 있는 상황에서
이 삼촌 라반의 아들들과 라반으로부터 위기를 느끼니까 도망을 칩니다.
야반도주를 하죠. 그때 삼촌 라반이 추격대를 만들어서 쫓아옵니다.
그때 밤에 하나님께서 이 삼촌 라반에게 이 꿈에 나타나셔서 어떤 말씀을 하시는가? 하면

(창31:24하)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

‘선악간 말하지 말라’ 했어요.
성경에 보면 이 삼촌 라반도 여호와를 믿거든요.
여호와도 믿으면서 자기 집안 신, 드라빔도 섬기고 있고 이 시대 자체가 그래요.

‘선악간 말하지 말라’ 이 선악간 말하지 말라고 하면 자기 기준에 있어서 선악간이에요.
이 삼촌은 삼촌 나름대로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요.
야곱은 야곱 나름대로 언약의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나타나서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면 우리들 상식으로는 어떤 것도 말하면 안 되거든요.

그런데 ‘선악간 말하지 말라’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듣느냐?라고 할 때는 취사 선택을 해요.
어느 부분에 있어서, 자기 집에 일했고
자기 시키는 대로 자기와 계약관계로 그 돈 번 그 부분에 대해서
많은 재산 거부가 된 것에 대해서 ‘선악간 말하지 말라’ 이것만 딱 들어요.
딱 듣고 난 뒤에 뭘 이야기합니까?
드라빔을 내 신을 도적질했다. 도적질한 사람은 내가 가만두지 않겠다.
그러니까 야곱이 뭐라 합니까? ‘만일 그것을 훔친 자가 있다면 죽여도 좋다.’ 이렇게 나오죠.

이걸 보면 라반이 얼마나 자기의 신을 충실하게 섬기는가? 나오죠.
우리 같으면 하나님이 야곱의 하나님이 나타나서 ‘선악간 말하지 말라’ 하면
두려워서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을 거 아니에요.
그런데 그 부분은 두려워요. 거기에서 만일에 선악간을 건드리면 나한테 저주가 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내가 안 건드리는데,
드라빔을 내가 뺏지 않으면 또 저주가 온다는 거예요. 이게 우상을 믿는 자의 모습입니다.
철저하게 자기 중심이에요.
자기 중심인 인간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직접 계시해서 말씀을 하셔도
그 말씀도 선악과로 판단해서 자기 입장에서 옳고 그름을 따져서 취사 선택을 한다는 겁니다.
이게 오늘날 우리들이에요. 복음을 아무리 들어도 그걸 취사 선택을 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애굽에서 구출을 받습니다.
구출을 받은 이후에 홍해를 건너고 만나를 내려서 메추라기를 먹으면서 이 광야 길을 걸었습니다.
더 놀라운 일은 불과 구름 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셨거든요.
그 정도 되면 하나님이 동행한다는 걸 눈치채야 되잖아요.
우리 같으면 하나님에 대해서 불신을 갖겠습니까? 안 갖겠습니까? 안 갖죠.
불과 구름 기둥으로 계속 인도하신단 말입니다. 만나도 계속 내려지고 있고요.

그런데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올려서
이 증거판을 주신다라고 말씀을 하신 그 상황에서 모세가 더디 내려오니까 이들이 요란해집니다.
소란스러워지죠. 어떻게 소란스러워지는가?

(출32:1)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재밌는 게 이런 거죠. 불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고 만나를 내려주셔도
그들 눈에는 무엇이 필요했습니까? 눈에 보이는 인물이 필요한 겁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상상하고 있었느냐? 이 얘기예요.
모세와 같을 거라 생각하는 거예요. 이게 재밌어요.
이 출애굽기 20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실 때 우상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거든요.

(출20:1)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출20: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출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하시면서 덧붙이는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출20: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별 모양이나 달 모양이나 해 모양이나 ‘땅 아래 있는 것이나’
땅 아래에 뭐가 있어요? 나무 돌 풀 바람 모든 요소에요. 바람까지도 형상으로 만들잖아요.
그리고 물속에 있는 물고기

여러분이 요즘은 여행을 안 가도 되잖아요.
인터넷 여행을 이렇게 유명지 보면 모든 게 형상화돼 있죠. 형상화
인간이 생각하는 하나님이 그러하다라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준이 낮아서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서
‘이것이 바로 너희를 인도한 여호와 하나님이라’ 이렇게 얘기한 게 아니에요.
인간들은, 자기로부터밖에 하나님을 상상할 수밖에 없어요.
애굽 땅에서 인도한 여호와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그려온 겁니다.

왜 송아지냐?라고 할 때는 애굽에서 송아지의 우상이 있었거든요.
자기들이 보기에 가장 마음에 들어요.
인간이 가장 마음에 드는 걸 만들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우상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뭔가 우상을 새롭게 조작해낼 때 유명한 인물들을 모델로 삼잖아요.
이 동네 같으면 관우라든가, 관우가 얼마나 돈을 많이 벌어줍니까?
한국 같으면 박정희, 박정희를 우상으로 여러분 생각 안 한다라고 할지 모르지만요.
그 우상으로 생각해요. 노무현 문재인 이제 조금 있으면 윤석열 다 우상이에요.
그런 식으로 인간들이 인식을 하는 겁니다.

왜 그러면 ‘우리를 위하여’라는 표현을 쓰느냐? 분명히 20장에서 말씀하셨잖아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아무 형상도 만들지 말라 ’
이 말씀을 왜 안 듣느냐? 할 때는 자기들이 하는 일은 정당하다라는 거예요.
이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일이라는 겁니다.
왜냐? 자기들이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서 그 황금 송아지를 뭐라고 불렀습니까?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한 우리의 신이라는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우리는 여기에서 주목해야 되는 것이 황금 송아지가 우상이다.
그것에 우리는 주목을 하지만 주님은 거기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그 황금 송아지가 어디에서 나왔어요? 너희들 집단, 지성 집단이죠.
저 아래에 있는 무식한 사람들의 무의식 속을 끌어 모으면 지성인들이 그것을 종합을 해서
그 집단들이 아이디어를 내는데 그 낸 내용이 뭔가? 하면 황금 송아지예요.
그러면 그 황금 송아지는 그들의 의식을 고스란히 대변하는 겁니다.
우상이 누구냐? 너 자신이 우상이라는 거예요. 지금

사도 바울이 아테네에서 그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분노한 것은 그것이 누구와 엮여 있어요.
하나님이 하필 그때 그 상황을 주신 겁니다. 유대인들과 엮여 있는 겁니다.
회당에서 모이지만 회당 자체가 우상으로 가득 찬 거예요.
그들이 왜 모였습니까? 왜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들어왔어요?
왜 이들이 황금 송아지를 만듭니까?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이라면 누구를 위해 있어야 되죠? 나를 위해 있어야 돼요.

오늘날 교회가 그러잖아요.
예수님이 부활하셨잖아요. 누구를 위해 부활을 해야 돼요? 나를 위해 예요.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유는? 예수님 자신을 위해서 부활하셨어요.

설교를 들을 때 내가 부정당하면 인간은 참지를 못해요. 말씀을 들을 때
지금 우리가 사도행전을 살펴보지만
사도 바울이 회당마다 들어가서 복음을 전할 때 그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요.
그들 자신이 말씀을 듣는 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 철학자 이야기는 다음 주에 하고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향해서 여호와만을 섬기는 자들을 향해서
너희들이 우상이라고 공격을 해버린 거예요.

이들은 황금 송아지를 믿는 자들이 아닙니다.
이슬람교를 보면 그 회당에 들어가 봤잖아요.
들어가 봤어요? 들어가면 아무것도 없어요.
말씀만 있어요. 천장에 저 벽 쪽에
유대인들도 동일해요. 아무것도 없죠.

그 이후에 기독교인들이 로마교나 아니면 그리스 동방 정교나
이런 인간들이 온갖 것들을 다 갖다 붙여놨는데,
유대인들이 바보가 아니거든요. 자기들이 성전 안에 우상을 섬겨서 멸망당했습니다.
우상을 만들었고 그곳에서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멸망당했거든요.
그러니 이들에게는 오로지 말씀 중심이에요.
얼마나 말씀 중심이면 말씀을 다 외워버립니까?

그들에게 가서 십자가 복음을 전한 거예요.
우리가 볼 때는 십자가 복음이 그들에게 유익이 될 것 같죠.
사람들이 예수 믿으면 구원 얻는다니까
‘예수 믿으면 나한테 이익이 되는구나. 천국 가는구나’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예수 믿으면 나에게 이익이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왜 나에게 이익이 없느냐?라고 할 때는 나는 죽어버리기 때문에 그래요. 나가 없어요.
천국은 내가 들어가는 곳이 아니에요. 그리스도의 몸만 들어가요.
‘아 그리스도의 몸에 내가 들어가야지‘
나는 죽었는데 내가 어떻게 거기에 들어갑니까? 기독교가 다 사기를 친 거죠.

그러니 이 기독교 복음 자체가 어떤 복음이 됐어요? 우상숭배교가 된 겁니다.
십자가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나는 것이 기쁨이 안 돼요.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것도 우리에게 가져다 주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죄인이 되었으면 어떻게 살아야죠.
우크라이나 전쟁 났을 때 많이 도와주고 얼마나 그들이 힘듭니까? 그들만 힘듭니까? 여러분
저 아프리카나 기아 그 굶어 죽는 사람이요. 굶는 사람이 8억 명이예요. 8억 명
그렇게 불쌍하면요. 뉴욕에 가서 쓰레기통을 뒤져 가지고
뒤지기 전에 쓰레기 버리기 전에 그 음식들 남은 거 다 끌어모아서 가난한 자들이 나눠주세요.
버리는 게 20억명 분이랍니다. 전 세계에서

자기가 아는 세계가 다 이기 때문에 그래요.
십자가의 안목으로 보면 모든 것이 죄가 아닌 게 없습니다.
문제는 죄로 드러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고 나에게 무슨 도움이 되느냐?
나에게 도움 되는 게 없습니다.
십자가에 피흘리신 그분의 주되심의 능력만이 드러나는 거예요.
그 능력만이 드러나는 것은 현상에서는 어떠한 변화를 감지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현상은 반발하고 반항하고 공격하죠.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요. 처음에는 좋아하는 것 같은데요. 복음을 좋아하지 않아요.
복음을 전했으면, 그다음에 당신이 뭔가를 나에게 보여달라는 거예요.
나에게 친절하게 베풀든지 돈을 주든지 밥을 사든지, 제가 그런 사람을 너무 많이 만났어요.
복음을 전해주면요. 나중에 뭐라고 하면 돈 달라고 해요.
아니 목사가 복음 전하면서 밥 한끼 안 산대요.
제가 밥 살려고 복음 전합니까?

십자가가 우리에게 유익이 안 돼요. 요한복음 5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유명한 말씀이죠. 예수님께서 말씀대로 살아가는 그들을 향해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요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5: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요5:41)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요5: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정말 예수님의 말씀이 쉽지가 않습니다.
왜 쉽지 않은가?라고 할 때는
우리들 자신이 이미 영생을 얻기 위해서 작동하는 기계적 몸이기 때문에 그래요.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은 첫째 아담 안에 사는 자들이에요.
그들의 본능은 영생 얻고자 하는 그 욕망에 충만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으면서도 영생 얻고자 해요.
’나는 아니라‘고 여러분은 아닙니까?
’이 지긋지긋한 세상에 빨리 죽고 싶다.‘ 그게 영생 얻고자 하는 거예요.
’빨리 주님이 왔으면 좋겠다.‘

유대인들이 성경을 상고해요. 마치 베뢰아 사람들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베뢰아에서 설교를 할 때 이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같은 사람들이다.
이렇게 표현을 한 거예요.
성경을 왜 연구합니까? 성경 말씀을 왜 열심히 들어요?
다 잃어버리기 위해서 안개처럼 사라지기 위해서 연구합니까?
말씀을 배우고 연구하면 나 자아가 더 강렬해지죠.
’더 많은 정보가 들어오기 때문에 나는 말씀으로 무장한 사람이 되었다.‘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말씀은 정반대예요.
말씀을 배우고 읽을수록 죄인 중에 괴수로 드러나요. 뭘 해도 죄가 되는 겁니다.
이 유대인들의 문제가 성경을 주신 이유가? 달리 말하면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목적이
그들에게 영생을 주고 축복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서 약속을 하셨다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여러분들도 성경을 곰곰히 읽어보세요.
율법서를 읽어보면 거기에는 비법이 들어있죠. 축복받는 비법, 저주 받는 비법
그러면 뭘 선택하겠습니까? 당연히 축복받는 비법을 선택하겠죠.
그럼 이걸 오늘날로 표현하면 ’예수 믿으면 천국 안 믿으면 지옥‘ 뭘 선택하겠어요?
’나 예수 안 믿어도 천국 갈 수 있다‘라는 사람은 예수 안 믿는 걸 선택하겠고
’나 예수 믿어야 천국 가겠다‘는 사람은 예수 믿는 걸 선택하겠죠.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성경을 상고하나 성경은 내게 대해서 전한다‘고 했잖아요.
이게 진짜 중요한 말씀이거든요.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전합니다.
어떤 예수님? 사도행전에서 설교하고 있죠.
예수님은 성령 세례를 받으시고 어느 길로 갑니까? 십자가의 길로 가죠.
죽기 위해서 오셨거든요. 예수님의 죽으심을 증거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라는 겁니다.
’내게 대해서 증거한다‘ 할 때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말은 맞아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 속에 무엇이 담겨 있습니까?
예수라는 이름 속에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한다‘ 하죠.

자기 백성을 저에 대해서 어떻게 구원합니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구원하잖아요.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 받은 자잖아요.
기름 부음 받은 자가 왕이 되려면 어디에서 왕이 돼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 왕이 되잖아요.
이걸 다 빼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그 사람을 사람들이 주목하는 거예요.
’내게 대해서 전한다‘ 상대들은 못 알아듣죠.
성령 받은 바울만 알아듣고 나중에 제자들만 알아듣는 겁니다. 사도 요한만 알아듣는 거예요.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합니다.

(요5: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예수님 안에 영생이 있거든요. 이 말씀이요 함정입니다. 함정
어떤 함정인가? 하면요.
인간들은 이 성경을 알기 때문에 성경을 상고해서 구원을 얻는 그 행위로는 구원이 안 되잖아요.
안 되니까 믿음으로 구원이 되니까
’예수님께 가면 구원이 되겠네요.‘ 이렇게 지금 또 선택을 하는 거예요.

영생이라는 것은 십자가 지신 분의 주되심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요소예요.
그 요소는 우리가 취사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지옥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에 지신 분이 주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신 것이 영생이에요.
그러면 ’예수님께로 가면 영생을 얻을 수 있네요‘라고 하는 이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왜냐하면 주님이 따로 계시기 때문에

내가 주라면 내가 선택할 수 있어요. 그런데 내가 주가 아니에요.
여기에서 예수님은 인간의 우상성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어떤 우상성을 드러냅니까?
성경을 주니까 그 성경을 무슨 용도로 이용해요?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우리에게 이 땅에서 축복을 주고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메시야 왕국으로 인도하는‘
그러한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말씀에 순종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나에게 오라는 요청이 아니에요.
요청한다고 들을 인간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다 끝내버려요.
십자가에서 다 끝내서 주님이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만 들어옵니다.
그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가 어떻게 말씀을 갖고 인식을 하느냐?라고 할 때는
이것은 십자가를 자랑하라고 주신 영생이에요.
그러니 그 사람은 자기 구원 자랑하지 않습니다.

제가 사도행전 1장 설교를 지금 책을 이렇게 한다고 다시 보니까
박옥수 얘기를 조금 했더라고요. 짧게 한 게 아니고 길게 했는데
성경 자체를 구원 얻는 용도로 보는 거예요.
’여러분이 믿으면 구원 얻습니다.‘ 이 말씀도 마찬가지죠.
’성경을 읽을 때 영생 얻도록 상고하지 말고 예수 믿으면 구원 얻습니다.
예수만 믿으면 우리는 죄인이 아닙니다.‘ 말씀 자체를 오해하죠.

예수님에 대해서 전한다면 그 죽으심을 전하기 위해서 영생을 주신 거죠.
그러면 그 죽으심을 드러내는 자로서 영생을 받았다면
그 영생 받은 자의 인생은 어떤 인생이냐?라고 할 때는 죄인의 삶의 인생이에요.
십자가 앞에서는 죄 아닌 게 없기 때문에 복음을 전해도 죄고요.
들어도 죄고요. 뭘 해도 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5: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해 내게 오기를 원치 않는다

이 말씀의 의미는요 너희들 형편이 그렇다는 거예요.
어느 누구도 내게 오기를 원치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왔느냐? 사도 바울을 보세요.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미워하고 핍박하고 예수 믿는 자를 죽였거든요.
예수님께 가기를 절대로 원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픽업하죠. 뽑아버립니다. 이게 영생이에요.

왜 뽑았습니까?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거든요.
자기의 피 능력을 가장 잘 전할 수 있는 그 도구가 사도바울이에요.
사도 바울이 그러하다면 다른 모든 구원받은 자가 그러하다는 겁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고요 가룟 유다랑 똑같거든요.
십자가를 자랑하라고 구원하신 겁니다. 예수님의 선언은

(요5:41)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에게 없음을 알았다

이게 대화가 안 되는 겁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어떻게 해야 되죠?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다음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율법을 지켜야 되죠. 십일조를 해야 되죠. 금식도 해야 되고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이 다 그렇게 살아요.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나를 안 믿으니까 너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 해요.
만일 오늘날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가난한 자 도와주고
우크라이나에 가서 전쟁 피난민들을 도와주고 뭐 어려운 사람 도와주는 그들에게
당신 속에는 하나님 사랑하는 것이 없다라고 하면 뭐라고 하겠어요?
나 하나님 사랑하기 때문에 이렇게 한다는 거예요.

말귀를 못 알아듣죠. 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음이 어떻게 드러납니까?
’나 이거 해도 죄인인데요. 지옥가도 마땅합니다.‘
이렇게 나와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 속에 있는 거거든요.
근데 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는데 그들은 죄라는 것을 빼버리죠.
왜 그러냐?라고 할 때는
왜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서 ’우리를 인도할 우리의 신을 만들어라‘
왜 하나님께서 ’우상을 너를 위하여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에 있는 것이나 아무것도 만들지 말라 너를 위하여 만들지 말라‘ 말씀을 하신 이유는?
이 인간이요 악마의 종이기 때문에 악마를 닮았어요.
악마를 닮았기 때문에 마귀를 닮았기 때문에 자기 영광을 받고자 해요.
자기 영광을 받고자 하기 때문에 이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합니다.

(요5: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참 재밌죠.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해요.
사람의 이름 왜 사람의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느냐? 할 때는 공감이 돼요. 소통이 돼요.

그런데 사도 바울과 이 유대인 회당에서 만난 그들과 소통이 될까요? 안 될까요?
완전 다른 세계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한쪽은 하나님만 경외하고 우상을 섬기지 않는다라고 하는데

사도바울은 너희들 자신이 우상이야.’
그것이 어떻게 우상이냐?라고 물으면 복음 자체가 그들을 우상숭배자로 드러내기 때문에 그래요.
그들이 안 받아들이잖아요. 왜 안 받아들입니까?
네가 전하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는 나를 위한 예수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에 그래요
만일에 그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나를 위한 거라면,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목사님 어쨌든 구원은 나를 위한 게 맞지 않습니까? 나가 없다니까요. 나가 죽는다니까요.

마귀가 예수님을 더 잘 알아요.
너희들이 회당에 모여서 안식일마다 말씀을 읽고
메시야를 기다리면서 경건하게 생활하는 목적이 뭐냐?라는 겁니다.
그거나 저 아크로폴리스에서 아테네 신상입니까? 그 여자 그 여신이죠.
전쟁의 여신 지혜의 여신 또 어떤 것들이 있어요?
뭐 그런 어떤 여러 것들을 통합하는 그 여신을 섬기는 자들이나
길거리에 있는 수많은 신들을 섬기는 자들이나 그 철학자들이나 왜 그렇게 하느냐?
자기 행복을 위해서 스토아 학파하고 에피쿠로스 학파가 자기 행복을 위하는 거거든요.

인간의 행복, 너희들이 유대교로 들어와서
아니면 유대인 혈통을 갖고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회당에 모여서 말씀을 듣고 믿고 이렇게 순종하는 목적이 뭐냐? 네 행복을 위해서 아니냐
그걸 지적하니까 이들이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요?

이것이 어디까지 확장됩니까? 외부까지 확장돼요. 회당에서 아고라로 넘어가잖아요.
아고라는 잘 알잖아요. 당시에 시장도 열리고 민회도 열리고 재판도 열리고 서로 의사 교환하고
사교 모임도 하고 이 성경에 의하면 서로 뭡니까? 자기 의견을 막 개진하잖아요.
개진하는데 그게 그냥 한쪽은 뭐예요? ’한번 들어보자 그래 네가 어떤지‘ 이렇게 나오지만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들어볼 복음입니까? 상대를 어떻게 해버려요?
’너희 우상숭배자는 다 멸망당해야 돼‘ 이렇게 확장이 되는 겁니다.
결국 온 세상은 우상숭배하는 도시에요. 우상 숭배하는 세상입니다.

언제 우상을 섬겼습니까? 나를 섬기고 있잖아요.
우리 자신을 보면 나에게 불편한 것은 못 견디죠.
나에게 유익이 된다면 어떤 희생도 감수해요.
돈을 번다면 새벽 3시부터 일어나서 일을 하죠.
자기를 사랑하는 겁니다.

그럼 목사님 그래 안 살 수 있습니까?
그래 안 살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 자체가 수상하지요. 뭔가 노리고 있잖아요.
주님께서 우리의 형편과 상황을 현재 이 상황으로 몰아가시는 이유는?
십자가 피만을 자랑케 하기 위함이에요.

사도 바울이 분노를 내는 것은 오늘 이 시대에는 맞지 않습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그랬어요.
목사님 설교할 때 왜 그래 열을 내서 설교합니까? 그냥 조용히 얘기하면 다 알아들을 건데
그래서 제가 답변했어요. 전쟁 중인데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잖아요.
혈과 육이 아니라고 하니까 또 혈을 내면 안 된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자기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어떤 그 싸움 그걸 생각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분노가 났는데 분노난 걸, ’여러분 제가 여러분들 보니까 우상을 참 섬기네요.‘
물론 그렇게 표현할 수 있죠.
만일에 그렇게 했다면 오히려 상대를 더 분노를 야기시키겠죠.
비꼬는 것도 아니고 비아냥대는 것도 아니고

성도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이 세상이 우상숭배, 그것의 그 한복판임을 목격하면서
십자가 복음을 만난 가운데 분노하는 그러한 모습을 성도들은 드러나게 됩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할 때는
우리를 불러서 훌륭한 사람 되기 위해서 인정받는 사람 되기 위해서 우리를 부른 게 아니고요.
사도바울을 불러서 뭐 복음 잘 전해서 뭐 인기 있는 목사가 되라고 부른 게 아니에요.

주님의 증인이죠.
십자가에 달린 그분이 주가 되심을 어떤 식으로 드러내느냐?라고 할 때는
죄악의 모습을 낱낱이 드러내면서 주되심을 드러냅니다.
그러면서 둘로 딱 쪼개버립니다. 복음이 쪼개는 겁니다. 내가 쪼개는 것이 아니라

그 쪼개짐의 그 자리에는 반드시 어떤 일이 일어났느냐? 할 때는 희생물이 그 속에서 발생을 해요.
그 희생물 되는 자리로 바울을 인도하였고 우상숭배의 도시 예상 밖이었죠.
베뢰아에서 좀 더 먼 곳으로 도망치기 위해서 급히 도망한 그곳에서
또 핍박을 피해서 왔는데 더 큰 핍박 속으로 내몰리는 주님의 증인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우상이요.
나 자신이 나를 섬기는 우상 숭배자임을 말씀을 통하여 들려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말씀으로 인하여서 분노하게 하시고 그 분노에 의해 나 자신이 찢겨지게 하시고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주님의 일하심 속에서 주님의 분노를 마음껏 발산하기를 소원하는
주의 백성에게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