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3-09-03 15:07
20230903 로마서 강해 29강 롬 4:12-17 상속자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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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3-09-04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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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03 로마서 강해 29강 상속자

다 함께 묵상 기도드리겠습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 고백하겠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 말씀, 잠언서 25장 20절에서 22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잠25:20~22)
“마음이 상한 자에게 노래하는 것은 추운 날에 옷을 벗음 같고 소다 위에 초를 부음 같으니라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그리하는 것은 핀 숯으로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는 네게 상을 주시리라”

기도하겠습니다.
복음이 소다 위에 초를 부음 같은 그러한 기능을 하기에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원수가 새롭게 만들어질 수밖에 없고,
그러한 원수들 앞에 십자가 사랑만을 증거하는 저희들로 삼아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원수 갚는 것은 심판주 되신 주님께 있음을 말씀하셨으니
주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시편 74편 12절에서 23절 말씀을 교독하겠습니다.

(시74:12~23)
“하나님은 예로부터 나의 왕이시라 인간에 구원을 베푸셨나이다 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 악어의 머리를 파쇄하시고 그것을 사막에 거하는 자에게 식물로 주셨으며 바위를 쪼개사 큰 물을 내시며 길이 흐르는 강들을 말리우셨나이다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예비하셨으며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여름과 겨울을 이루셨나이다 여호와여 이것을 기억하소서 원수가 주를 비방하며 우매한 백성이 주의 이름을 능욕하였나이다 주의 멧비둘기의 생명을 들짐승에게 주지 마시며 주의 가난한 자의 목숨을 영영히 잊지 마소서 언약을 돌아보소서 대저 땅 흑암한 곳에 강포한 자의 처소가 가득하였나이다 학대 받은 자로 부끄러이 돌아가게 마시고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로 주의 이름을 찬송케 하소서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주의 원통을 푸시고 우매한 자가 종일 주를 비방하는 것을 기억하소서 주의 대적의 소리를 잊지 마소서 일어나 주를 항거하는 자의 훤화가 항상 상달하나이다”

이 시간 전원우 집사님 우리를 대표해서 기도해 주시겠습니다.

주님, 오늘도 예배에 참여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날마다의 삶에서 원치 않는 육신의 것들이 나올지라도 나의 어떠함이 아니라
주님의 어떠하심이기에 더 이상 사탄의 참소가 먹히지 않는 자유를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늘 말씀을 들어도 나의 생각, 나의 뜻, 나의 의지가 어느새 내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자인데
이런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신 주님,
오늘 이 시간도 말씀 되신 주님께서 나 자신밖에 모르는 자들에게
‘나는 아니오’ 주님이 주체가 되심을 알게 하셔서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저희로 삼아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나님 말씀, 로마서 4장 13절에서 17절 말씀을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롬4:13~17)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아멘.

로마서 처음 시작을 할 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으로 출발을 합니다. 하나님의 복음.
나의 복음이 아니라고 분명히 다시 말씀드립니다.

기쁜 소식은 내가 기뻐하는 소식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기뻐하는 소식에 아들의 죽음에 참여한 자들이 그 기쁨에 동참을 하게 되는 거예요.
그게 한국말로 참예라는 표현으로 하죠. 그리고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롬1:2)
복음은 약속이라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 옛날 성경은 (제 성경이 1950몇 년도 성경이니까) ‘언약’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요즘 성경은 다 ‘약속’으로 번역을 해놨습니다. 헬라어 성경에 ‘약속’으로 돼 있거든요.
그 약속이 나오거든요. 약속.

이 약속이 굉장히 중요하죠. 누구에게 중요한가? 하면
아버지와 아들과의 그 약속에 있어서도 굉장히 중요하지만
유대인들, 유대인들이라고 지금 계속 나오는데 이 유대인들은 남은 자들이거든요.
구약에 말하는 그 이스라엘이 아니라 예수님 당시에는 남은 자들입니다.
그 남은 자들에게 이 약속은 너무나 중요한 거예요.

그 약속이 무엇이냐? 라고 하면
“네 씨로 말미암아, 네 씨가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에 모래알 같이 많을 것이라”라는 약속이에요.
벌써 이렇게 되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로마서에 의해서 깨진다는 느낌이 안 듭니까?

복음은 아들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것은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라는 거예요. 뭔가 안 맞잖아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은 세 가지잖아요.
씨에 대한 약속과 땅에 대한 약속과 복에 대한 약속이거든요.
이 세 가지 요소는 아브라함이 볼 때 땅은 땅이요.

땅은 땅이요. 왜 그런가? 하면
땅은 뭐가 있어야 차지할 수 있습니까? 약속의 땅은, 자식이 있어야 돼요. 아무도 없는데,
집사님 자식이 한 명도 없는데 상속을 해준다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상속받을 대상이 있나요, 없나요? 없죠.
상속받을 대상이 없는데 땅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복의 근원이, 온 민족의 조상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얘기예요. 없는데.
이게 너무나 중요한 복음이거든요.

지금 로마서를 출발을 할 때 약속을 언급을 했습니다.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렇게 되면
아브라함께 약속한 창세기 12장 1절에서 2절, 3절에 약속한 그 약속이
아들임을 소개하고 있는 거예요. 눈치채셨어요? 눈치 못 챘죠? 여러분이.
지금 로마서 28강, 29강 하고 있는데.

왜 눈치를 못 채는가? 하면
분명히 말씀을 드렸는데 다 잊어버리는 이유가 뭐냐? 하면
로마서를 읽어오게 되면 이 복음이 계속해서 누구 중심으로 바뀌기 시작하는가? 하면
구원받은 성도 중심으로 바뀌기 시작하는 거예요.
오늘 본문도 그중에 하나예요.

그래서 로마서를 강해한 사람들의 설교를 보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로 끝내지를 못해요.
약속은 아들에 대한 약속이라면,
어떤 본문을 이야기하더라도 ‘십자가에서 다 완성하셨다’로 설교가 종결이 나야 되거든요.
그런데 그렇지 못한 이유가 뭐냐? 라고 하면
인간은 독특하게도, 그래서 성경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있고 유대교가 있는 거예요.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가 거기 있는 겁니다.

이방인들이 복음을 알아봤자 어느 정도 수준밖에 안 되는가? 하면
아무리 높이 뛰어도 누구 수준? 아브라함 수준. 남은 자 유대인 수준밖에 안 돼요.
왜냐하면 지금 로마서 여러분 많이 읽고 있잖아요. 많이 들었고 수많은 강의를 들어봤잖아요.
맞죠? 맞는데 남는 게 뭐예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오늘 ‘울어도 못하네.’ 부흥회 많이 불렀죠. 그죠?
근데 이 가사가 맞는 말이긴 하는데 ‘믿으면 하겠네’라는 게 뭘로 바뀌어버렸어요?
나의 믿음으로 바뀌어버렸거든요. 저도 많이 불러봤어요. 박수 치면서.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우리가 성경에 나오는 믿음을 들여다보니까
아들의 믿음이죠. 우리의 믿음은 철저하게 배제가 되고.
그래서 ‘믿으면 하겠네’라는 이 가사가 엉터리인데
이 엉터리로 나와야 제대로 된 복음이 나올 거 아니에요.
그 엉터리 믿음을 사람들이 갖기를 원하는 겁니다.
교회에서 그걸 이야기를 해야 사람들한테 먹히는 거예요. 이해가 되고.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렇게 말씀을 전하면
얼마나 받아들이기가 쉬워요. ‘믿습니다’ 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로마서 1장부터 말씀이 진행되면서 창세기도 마찬가지지만,
말씀이 진행되면 될수록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가? 하면
그 믿는다는 너의 믿음은 가짜인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을 살해한 믿음이 된다’라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면서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살해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찾지 못한다면
그걸 알지 못한다면 성령 못 받은 자예요.
오죽하면 아브라함의 믿음을 흉내내기 위해서 자기 자식도 죽인 인간이 있잖아요. 옛날에.
한 20~30년 전입니까. 계시받았다 하면서 아들 바쳐라 해서 아들 죽였어요.
자기 아들이 메시야가 아닌데...
그런 믿음을 오늘날 얼마나 많이 갖고 있습니까?

그 믿음을 어떻게 표현합니까? 돈을 갖다 바치거든요.
십일조를 갖다 바치고, 시간을 갖다 바치고. 그것만 갖다 바칩니까?
저희 어머니의 기도의 소원은 우리 아들 주의 종이 되게 해달라는 거였어요.
이게 뭐예요? 탐심의 끝자락입니다. 탐심의 끝자락.

제가 저희 어머니 얘기했지만, 여러분의 부모도 똑같잖아요. 여러분이 부모잖아요.
부모 마음이 자식이 고3이 되니까. 어떻습니까? 절로 기도가 안 되나요?
기도 안 된다는 것은 그만큼 강퍅하다는 건데...
사태가 사태로 몰려지지 않는 거예요.

그저께 어떤 분하고 통화를 하는데 저는 그분이 이 설교를 들을 거예요. 아마.
그분이 신장 이식 수술을 했대요. 한 2~3년 전에 문제가 생겨가지고 일주일에 세 번 투석을 받는데요.
투석을 받으면 쉬어야 되고, 쉬다가 준비해서 투석받고...
저는 몇 차례 만났는데 그런 분인 줄 몰랐거든요.
근데 갑자기 연락이 왔대요. DNA가 맞는 공여자가 나왔다라는 겁니다.
이건 ‘로또 저리 가라’는 확률이래요. 그래서 온 의사들이 난리법석을 떨면서
어쨌든 수술을 무사히 마치고 하시는 말씀이,
잘 됐어요. 형제 부모한테 기증을 받은 것보다 더 잘 됐대요. 이 간증 이야기하니까 눈이 반짝반짝...
저한테 그러시더라고요. 그분이 복음을 알거든요.
제 책도 읽고 수술하러 가면서도 책을 갖고 갔대요. 성경책하고 두 개.
그리고 이분이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성경의 전체 흐름을 꿰고 있대요. 아 정말 놀랐습니다.
매 장에 중요한 내용을 다 떠올리는데 그걸 떠올렸대요. 그 수술을 준비하면서 책도 보면서.
그러면서 기도를 했대요. ‘죽으면 죽으리라’

자세히 들어보니까 ‘죽으면 죽으리라’는 그 말이 에스더가 말하는 ‘죽으면 죽으리라’가 아닌 거예요.
주님이 기도를 들어줬다는 겁니다. 내년 3월달에 딸도 결혼을 해야 되고
그전에 수술을 하려면 미리 해야 된다는데 응답이 됐다는 거예요. 8월 8일이 자기 생일인데
그때 맞춰서 해달라고. 다 응답이 됐대요.
제가 또 가만히 있습니까? ‘마귀가 응답해 주셨네요.’
아마 그 말을 하면 대부분 사람들이 전화 끊을 겁니다.
왜냐하면 ‘너는 그 상태를 안 당해봤기 때문에 그런 소리하지 않느냐?’라고 하면

욥에게 시비를 건 게 악마잖아요. 악마가 하나님께 뭐라고 이야기를 합니까?
뭐라고 이야기해요? ‘까닭 없이 하나님을 공경할 리가 없다’라는 거예요.
그분이 목사님이신데 목사님. 만일에 목사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까닭이 있으니까 공경하네요.
제 말이 틀렸습니까?

지금 복음은요 단절된 세계예요. 없는데 생긴 겁니다.
그러면 거기에 무엇이 나와야 되는가? 하면 십자가가 나와야 돼요.
죽어 마땅한데. 안 주셔도 되는데. 복음 때문에 살려준 거예요.
아직 살았다고 말을 못해요.
왜냐하면 격리 기간이 홀로 살아야 되는 기간이 한 네 달 정도 된대요. 방에서. 면역력이 약해가지고.
어쨌든 뭐 어쨌든 지금 잘 되는데.

그러면 십자가가 나와야 되지 않습니까?
만일에 목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갖고 사람들한테 간증을 하면 사람들이 다 좋아하죠.
근데 만일에 ‘십자가 피 때문에 저를 살린 것 같습니다.’
‘죽였어도 좋았는데 피 공로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씀을 한다면
다른 사람이 좋아하겠느냐? 라는 거예요. 싫어하겠죠.
그 피만 빼보세요. 아마 전국 방방곡곡 돌아다니면서 간증할 거리거든요.
DNA가 맞아서 될 확률이 거의 없대요. 강남 성모병원이 잘한대요. 혹시 신장 이식할 분은.

믿음의 세계, 지금 계속해서 믿음을 이야기하고 있거든요.
그 믿음의 세계라는 것은 단절된 세계예요.
우리에게 그런 경험이 없어라는 게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도 똑같이 그러한 체험들이 있었잖아요. 체험들이 있었으면, 그 이삭을 받았으면,
그 이삭을 통하여서 아예 새겨놔 버리잖아요. 비웃었다라는 내용을.

그러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주님을 비웃은 그 모습으로서의 일들인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십자가의 은혜라. 은혜라.
십자가를 위해서 나를 살린다라고 하지만
막상 사태 속으로 들어가고, 여러분이 지금 삶의 정황 속에 들어가니까 어떻습니까?
모든 게 나를 위한 거 아니에요? 오늘 기도도 하셨지만.
그거 하라고 우리를 살리는 거예요.
그것만 하라고 살리는 게 아니죠.

거기에 피를 이야기하게 되면 어떤 사태가 벌어집니까?
도무지 일어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지는 거예요.
원인과 결과잖아요. 내가 하나님께 의지하였더니 하나님이 나에게 특별한 은혜를 주셔가지고
은혜를 주셨다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얘기했죠.
저희 집 옆에 보면 원불교 모임 장소가 있거든요.
그 앞에 커다랗게 써 놓은 게 뭔가? 하면 ‘모든 것이 은혜라.’

여러분 제가 좀 이렇게 다니면서 이렇게 두리번 많이 하거든요. ‘은혜라’고 이야기를 하잖아요.
여러분도 다 은혜라 하거든요. 교회 다니는 사람들 입만 떼면 은혜라 이야기합니다.
특히 대형 교회 다니는 사람들, 한번 교제를 해보세요. ‘다 은혜죠. 다 주님의 은혜죠.’
근데 그 사람한테 십자가 이야기하면
화를 내거든요. ‘이야기하지 마라. 많이 들었다’ 이야기하죠.

근데 은혜라 하면 십자가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고, 그걸 들어도 지겹지 않아야 되고,
감사가 나와야 되는데 짜증이 나는 거예요.
그 은혜의 자리에 십자가를 집어넣어버리니까.
뭐가 은혜입니까?
그 DNA가 맞아서 내가 지금 새롭게 살았는 것보다 십자가 사랑이 부족해요?
‘에이 목사님 그런 일을 안 겪어봐서...’ 그러니까 믿음이 없는 거예요.
모든 걸 보이는 것으로 판단을 하잖아요.

왜 말씀의 세계를,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느냐? 라는 겁니다.
그 이유는 로마서를 읽으면서, 그분이 (이야기를 해야죠. 그분이) 그 얘기를 하니까 너무 감사하대요.
본인이 놓쳤잖아요.
마귀는 그걸 갖고 와버리면 그때부터 그 발설을 계속하는 순간 십자가의 증인이 아니라
이 유대인들이 믿었던 우상 여호와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아들에 관한 건데
아들에 관한 것은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약속한 거예요.
약속은 아브라함의 약속의 성취예요.
이렇게 되면 내가 들어갈 천국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아예 없다니까요.

‘내가 받을 복’, 없습니다.
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 안에서 이미 복을 다 받아버렸어요.
받아버리니까 내가 받을 복들은 다 거짓 복이에요.
가짜 복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어떻게 합니까? 우리를? 지우게 하잖아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지워집니다.
요즘 잘 못 드셔 가지고 빨리 지워질지도 모르는데....
그걸 목격을 해도, 죽는 자를 목격해도, 자기를 포기를 못하는 겁니다.

다시 로마서 4장으로 오면 13절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여기에 “후사”라는 말은 상속자입니다.
지금 왜 사도 바울이 이 이야기를 하느냐? 라고 하면
로마서 8장에 가면 상속자가 나와요.

사실 구약에 의하면 상속자가 굉장히 중요해요.
왜냐하면 “분깃이다,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라는 그 말씀들은
모두가 다 무엇과 관련돼 있는가? 하면 상속자와 관련돼 있고,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땅을 분배할 때 ‘기업’이라 했잖아요.
기업이라 할 때 그건 ‘네가 상속자로서 그 땅을 유업으로 받는다’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기업이 되어버리면 어떻게 돼요? ‘하나님을 유업으로 받는다’라는 거예요.
그런 말도 성령을 받지 못하면 깨닫지를 못하는 거예요.
성도들은 다 하나님을 유업으로 받았죠.
왜 안 받은 척합니까? 주님이 우리와 동행을 하잖아요.

하나님을 유업으로 받으면
우리는 뭔가 괜찮아지고 훌륭해지고 일이 잘 풀리고 만사 내 뜻대로 되고......
악마적 생각을 하는 겁니다.
지금 로마에 있는 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있거든요.
그들은 이 상속자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 상속자 사상이 굉장히 중요한데

제가 대학원 다닐 때 거기 있던 명예 교수님이 상속자에 대한 책이 한 800페이지인가
엄청나게 두꺼운 책을 쓰는데...

상속자가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그런데 성경이 희한한 것은 사복음서에 보면 상속자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없다라는 사실입니다.
지금 로마서에서는 이 “상속자가 되리라”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를 하거든요.
‘예수 그리스도 중심이기 때문에 상속자는 예수님뿐이다’ 이것만 이야기해야 된다는 사람이 있어요.
그것만 이야기하면 무엇이 나오지 않는가? 하면요 상속자는 나오는데,
그 상속자가 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렸다는 내용이 안 나와요.

복음에 정답을 얘기하는 사람의 문제가 뭔가? 하면요 죄가 안 나온다는 거예요.
자기는 복음을 안다고 생각하거든요.
복음을 아는데 무슨 죄가 나옵니까? 복음을 아는 자에게는 죄가 안 나와요.
자기가 의롭기 때문에. 이미 복음을 알아버렸기 때문에

지금 사도 바울이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약속”
그게 온 민족이 너로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고, 열국의 아비가 될 것을 말씀을 하셨잖아요.
그래서 아브라함과 그 씨에게, 자손에게 상속자가 되리라고 약속을 하셨다라는 겁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정답을 원하는 사람은 이거 빼고,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이 되면 여기에 누가 들어가는가? 하면 성도들이 들어가거든요.
성도들 빼버리고, ‘상속자는 예수님뿐이야’만 자꾸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사람은요 뭘 모르는가? 하면
이 상속자가 된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이 상속자가 되거든요. 그게 로마서에 보면,
맏아들이 상속자가 되시고,
상속자 되신 그분에 의해서 이 양자들이 상속자가 됩니다. 상속자들이 되죠.

그러면 이 상속자들은 뭘 받았느냐? 라면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받을 것이요”라고 이렇게 나오는데
그건 다 추가적인 요소고, 부수적인 것이고.
이 양자들은 맏아들의 십자가의 완료성을 받아버렸어요.
뭔가 앞뒤가 이상한 것 같지 않습니까?

아들이면 상속자거든요.
그러면 상속자면 우리는 뭘 받았다라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았다’ 이야기하고 싶잖아요.
안 그래도 어제 목사들과 한 3시간 정도 4시간 정도 얘기를 나눴는데
어떤 집단에서는 ‘하나님 나라’ 중심으로 설교를 하거든요. 거기는 복음도 없는 동네인데,
말씀 운동이라는 박용기 목사, 김기욱 목사 그 후계자인데, 하나님 나라 중심으로 얘기한대요.
제가 그랬어요. 그 말은 틀리지 않았어요.

틀리지 않는데 왜 문제가 되느냐? 하면
그 사람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지금 아들을 이야기하지 않고 뭘 이야기해요?
아브라함 언약으로 가버립니다. 창세기 12장으로 가버려요.
씨와 그다음, 나라와 복을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왜 그걸 이야기하는가? 하면 그들이 중심으로 삼는 성경 구절이 창세기 1장 28절이거든요.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 이 이런 소리를 하고 앉았어요.
그게 해석이 되려면
예수님이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잖아요.
그럼 온 땅을 뭘로 만들어 버립니까? 온 우주를?
십자가 중심으로 재편해버리죠.
십자가 중심으로 재편해버리면 온 우주를 불로써 다 불살라버립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그 당시에 유대인들이 갖고 있었잖아요.
그러면 그 하나님 나라와 예수님이 몰고 온 하나님 나라는 충돌이에요.
충돌인데 어떻게 충돌이 일어나느냐? 하면
그들이 믿는 하나님 나라에 의해서 하나님 나라의 완성자이신 그분이 박살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십니다.
죽은 그 자리에 하나님 나라가 새롭게 만들어져요.
그것도 모르고 하나님 나라 중심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아들이라고 이야기하니까 대구에 대구교회라는 게 있거든요. 이현래 목사라고.
거기도 뭐 세상 말로 하면 ‘한칼’ 하죠.
‘목사만 설교해야 되느냐? 우리가 다 작은 예수인데, 니도 하고 나도 하고...’
그런 주장을 하는 거거든요.
‘작은 예수’라는 말이 맞아요, 틀려요? 맞잖아요. 주님이 동행을 하니까.
근데 맞는데 ‘작은 예수’라면 어떻게 돼야 돼요?
‘나는 아니오’가 나와야 되죠. 작은 예수는, 큰 예수가 아니니까.
피만을 자랑해야 되잖아요. 어린 양의 피.

근데 자기가 작은 예수니까 예수님처럼 산다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처럼 사는 거는 좋은데, 예수님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어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주는 방식으로 살았잖아요.
제가 볼 때는 바보들이에요. 바보들. 그러니까 귀신 씌인 겁니다. 일곱 귀신.

논리적으로 따져도 그 논리가 맞는 거 아니에요?
근데 사람들이 왜 거기에 빠져듭니까?
지가 신이 되고 싶거든요. 지가 하나님이 되고 싶은 겁니다.
오죽하면 자기를 ‘작은 예수’라 하겠어요?
진짜 자기가 작은 예수라면
‘여러분들 저를 개무시해도 저는 십자가밖에 자랑할 게 없습니다.’ 이렇게 나와야 되죠.

지금 로마서에서 앞부분에서 이 아들, 아들이 상속자임을 분명히 말씀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 뒷부분에 오게 되면 지금 이 모든 말씀들이 아들을 이야기하고 소개하고 있고 증거하고 있다라고
생각지 않는 거예요. 계속해서.
누구를 자꾸 떠올리는가? 하면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자기’를 떠올리는 거예요. ‘인간’을 떠올리는 겁니다. ‘교회’를 떠올리는 거예요.

여러분이 이걸 아셔야 돼요.
이 로마서가 편지가 날아가기 시작하면 로마 교회가 사라집니다.
사도 바울이 나중에 로마에 갔을 때 교인들이 왔잖아요.
왔는데 그다음 어떻게 됐어요? 없잖아요.

뭐만 남습니까?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게 이 복음이잖아요.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잖아요. 그죠?
맞죠? 그럼 십자가만 남는 겁니다.
‘그럼 교회는 어디 있어요?’
어디 있기는요? 이 땅에는 계속해서 새롭게 생성이 되고 새롭게 만들어지고.

지금 이 말씀을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뒤에 보면
“이 약속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이것 때문에 지금 이야기를 하거든요.
이 약속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 율법이라는 게 뭐냐? 라고 하면 간단합니다.
선악과를 먹었잖아요. 선악과를 먹었을 때 인간에게 율법이 주어진다면
어떤 상태로 반응을 하느냐? 라고 하면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에덴 동산에 들어갈 수 있다’라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제가 지난주에도 오후에 언급을 했습니까? 지지난주에?
이방인의 양심이 어디에 있나요? 외부에 있나요? 몸 안에 있나요? 몸 안에 있죠.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양심은 어디에 있나요?
그들은 양심이 있어요, 없어요? ‘에이 그들에게는 율법이 있는데...’
율법은 외부에 있잖아요.

그 외부에 있는 율법이 이방인과 똑같은 양심을 가진 자에게 들어오게 되면
그 율법을 갖고 어떻게 합니까? 서로 고소하고 변론하고 이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똑같습니다. 구조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이스라엘이나 똑같은 거예요.

그들이 그 율법이 왔을 때, 왜 안 듣느냐? 라고 하면
첫 번째는 안 듣잖아요. 불순종하잖아요.
그 이유는 율법을 지키는 것보다 안 지켜서 얻는 유익이 훨씬 크기 때문에 그래요.
꼭 우리 같잖아요. 복음 듣는다고 돈이 떨어집니까? 뭐 자식이 잘됩니까? 교회 한 번 나온다고.
오히려 복음을 들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와장창 무너지는데.
‘차라리 그것보다도 이익되는 걸 택하자’라는 게 우리의 생각 아니에요?
그게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 보니까 이방 나라들이 나보다 더 잘 살아요.
그 이유는 우상을 섬기고 자기가 기뻐하는 대로 살아가는 그 모습이 탐이 나잖아요.
그래서 우상을 섬겨서 하나님이 심판했습니다.
재밌는 것은 이스라엘은 심판당하는데
이방 나라들은 더 강력한 나라로 계속해서 새롭게 세워져요.

우리는 바벨론을 멸망시켰으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 나라를 더 이상 부러워 안 할 것 같은데,
그 자리에 또 누가 생깁니까?
메데 파사가, 페르시아 제국이 생기고 그다음에 헬라 마케도니아 제국이 생기고, 로마 제국이 생기고
그다음 뭐가 생겼어요? 미국이 생기고...

그런데 자기들은 어떻습니까?
계속해서 노예, 종의 삶을 사는 겁니다. 잠시 물론 독립을 했지만.
그 이후에, 예수님 때가 되면 이제 남은 자들이라는 사상이 그들 속에서 팽배하게 만들어지죠.
그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사두개인들, 그들입니다. 그들 세계에 메시야가 오신다는 거예요.
그 메시야가 오시면 자기들은 메시야에 의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천국 백성이 되는 혜택을 받을 거라고 생각을 할까요? 하지 않을까요?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구약을 읽어보셔야 되는데
읽어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메시야에 의해서,
‘메시야의 전적인 희생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 사태가 발생한다’는 그런 신앙은
만들어질 수도 없고요. 그런 신앙은 절대적으로 부정을 합니다.

시편 81편을 한번 보겠습니다. (아삽의 시 영장으로 깃딧에 맞춘 노래)
“우리 능력 되신 하나님께 높이 노래하며 야곱의 하나님께 즐거이 소리할지어다 시를 읊으며 소고를 치고 아름다운 수금에 비파를 아우를지어다 월삭과 월망과 (월망이라는 것은 보름이거든요. 계속해서 이 절기가 추가가 되고요. 자기들이 집어넣어서 이 잔치를 벌이는 겁니다.) 우리의 절일에 나팔을 불지어다 이는 이스라엘의 율례요 야곱의 하나님의 규례로다 (규례를 지키는 겁니다.) 하나님이 애굽 땅을 치러 나가시던 때에 요셉의 족속 중에 이를 증거로 세우셨도다 거기서 내가 알지 못하던 말씀을 들었나니 이르시되 내가 그 어깨에서 짐을 벗기고 그 손에서 광주리를 놓게 하였도다 (이 종 되었던 곳에서 하나님께서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출하는 건데요.) 네가 고난 중에 부르짖으매 내가 너를 건졌고 뇌성의 은은한 곳에서 네게 응답하며 므리바 물가에서 너를 시험하였도다”

너를 시험해서 통과했습니까, 못했습니까? 못했죠.
못 했는데 어떻게 되었어요? 약속의 땅에 들어갔다니까요.
지금 시편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면요 앞뒤가 계속해서 모순이 돼요.
지금 여기까지 보게 되면 출애굽할 수 있었던 근거가 뭐예요? 출애굽을 어떻게 할 수 있었습니까?
여기에 보면 그들이 부르짖어서? 천만의 말씀이에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언약이에요.
부르짖음은 종이 되었을 때부터 계속 부르짖었고요.
애굽에 내려갔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잘 먹고 잘 사는 건 아닙니다.
그중에도 가난한 사람이 있었을 거 아닙니까? 그들의 부르짖음은 주님이 안 들었을까요? 듣죠.
고아와 과부의 부르짖음을 다 들으시기 때문에.

그러면 이것은, 이 부르짖음은 어디에 합류당한 거예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그 약속에 합류당하여서 하나님께서 응답을 하신 겁니다.
그들의 이 부르짖음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하면
그들의 부르짖음에 의해서 그들이 애굽에서 구출 받았다는 말을 못하게 하기 위해서
부르짖게 하였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출애굽기에 보면 여호와께 부르짖었다는 말이 안 나와요.
괴로우니까 탄식을 하는 거예요.
장로님 일하실 때 힘드시니까 한숨 나오잖아요.
그 탄식을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얘기입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예요?

사도바울이 주님을 만날 때 기도했습니까? 기도했습니까?
‘믿겠습니다.’ ‘믿으면 하겠네’ 이거 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이미 그런 믿음을 갖고 있었는데,
안 했잖아요. 근데 갑자기 주님이 찾아오신 거예요. 그게 구원이거든요.

왜 그러한 구원을 주시는가?
이 믿음이라는 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 구원을 주시고 상속자가 되게 하시는 이유는
은혜이기 때문에 그래요. 은혜임을 말씀하기 위해서. (우리 여기 줌에 은혜가 들어와 있는데)

지금 81편 앞부분까지 보게 되면 전혀 자기들의 행위가 없잖아요. 후반부 봅시다(8절~).
“내 백성이여 들으라 내가 네게 증거하리라 이스라엘이여 내게 듣기를 원하노라 너희 중에 다른 신을 두지 말며 이방신에게 절하지 말지어다”이렇게 나오죠.
“다른 신을 두지 말고 이방인에게 절하지 말지어다.” 이렇게 하면 들어야 돼요, 말아야 돼요?
1번, 들어야 된다. 2번, 안 들어야 된다.
몇 번이에요? 사춘기들은 답을 알죠. 안 들어야 된다.
사춘기가 복음을 좀 아는 것 같아요. 지 마음대로 하니까. 그다음 봅시다(10절).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인간들이 제일 좋아하는 구절 아닙니까? “입을 열라 채우리라”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치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그 마음에 강퍅한 대로 버려두어 그 임의대로 행케 하였도다”
자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된다는 말이예요? 말아야 된다는 말이예요?
들으라고 하잖아요.
듣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강퍅한 대로 내버려뒀고 심판 가운데로 내모는 거잖아요.
그다음 봅시다.

“이스라엘이 내 도 행하기를 원하노라”
이게 하나님이 원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내 도 행하기를 원하노라.”

“그리하면 내가 속히 저희 원수를 제어하며 내 손을 돌려 저희 대적을 치리니”
하나님의 도를 행할 때 그 원수를 제어하고 하나님의 손은 원래는 누구를 칩니까?
순종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치다가 어디로 갑니까? 이 이방 나라를 친다라는 얘기거든요.

그다음 “여호와를 한하는 자는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는) 저에게 복종하는 체할지라도 저희 시대는 영원히 계속하리라 내가 또 미래의 아름다운 것으로 저희에게 먹이며 반석에서 나오는 꿀로 너를 만족케 하리라 하셨도다”
마지막에는 이 농산물의 축복이잖아요.
자녀가 잘 되고 범사가 잘 되고 그 축복이거든요.

자 여러분이 시편 81편을 읽었습니다. 지금, 지금 읽었습니다. 유대인이고 뭐고 빼고.
이 말씀을 들으면 어떻게 살아야 돼요?
‘어떻게 살아야 된다’ 할 때 인간들은 이렇게 생각해요. 자기 혼자 망상을 해요.
자기는 이방인이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살았는가?’를 말씀 속으로 들어가 보면
그 모습이 나의 모습인데 사람들은 말씀을 안 보죠. 왜? 내가 이방인이기 때문에.
논리가 재밌죠?

그런데 주님께서 십자가의 영을 줘버리면 모든 말씀이 어디로 들어옵니까?
성도의 몸속으로 들어와버리죠.
그러면 창세기에서 말라기까지 모든 말씀이 우리 속으로 들어온 거예요.

그런데 복음을 좀 안다고 하면 성경 읽으면서 이렇게 보면 어디로 가야 돼요?
말씀으로 가야 되거든요.
말씀으로 가지 않고 이 말씀을 읽고 자기가 자기를 지금 재보는 겁니다.
그게 선악과 먹은 인간의 특징이에요.

재 보니까 말씀이 앞뒤가 안 맞잖아요.
그러면 이거는 이거대로 믿고, 십자가는 십자가대로 믿는 거예요.
여러분이 아마 이런 신앙생활을 얼마나 오랫동안 해왔는지 모를 겁니다.
제가 보기에는 다 그렇게 살아왔을 거예요. 모순되는 요소를 갖고.
그건 믿음도 아니죠. 그건.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십자가를 전하고 있거든요.

유대인들이 이 시편을 묵상을 하잖아요.
시편을 지혜서라 하잖아요. 맞나요? 하여튼 짓기는 잘 지어요.
시편, 잠언, 전도, 아가. 뭐 이런 지혜서라 하는데
지혜서라 하면 십자가가 나와야 되거든요.

그런데 지혜서라 하니까 뭐를 끄집어내는가? 하면 인간의 지혜를 끄집어내요.
인간의 지혜를 끄집어낸 그 최고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자들이 바리새인과 서기관입니다.
그들이 예수님 앞에 내뱉는 모든 것들은 최상의 지혜예요. 최상의 지혜.

그런데 그 지혜 앞에 예수님이 무슨 지혜를 내놓습니까? 십자가의 지혜를 내놓아요.
이 시편 81편의 말씀을 예수님이 어떻게 해석을 하고 예수님 자신이 적용을 해내시는가?
누가복음 20장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상속자에 대해서 잘 알고 있잖아요.
아브라함의 씨가 갈라디아서에 보면 ‘한 사람’이라고 했잖아요.
그 한 사람이 이 예수 그리스도. 그 아들임을 다 알고 있잖아요.
그 아들이 지금 누가복음 20장에서는 제가 볼 때는 유일하게
물론 다른 복음서에도 나오는데 똑같은 본문인데요.
유일하게 나오는 상속자에 대한 이야기예요.

그런데 이 상속자를 독특하게 설명을 하는 겁니다. 봅시다. 20장 1절
“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말하여 가로되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세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무슨 권세로 예수님께서 지금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지 말라.’ 이렇게 쫓아내면서 했느냐?
그 권세가 뭐냐? 무슨 권세냐? 이거예요. ‘너거 아버지 뭐 하시노?’ 이 얘기잖아요. 너 아버지...
‘너의 스승이 누구냐?’ 얘기거든요. 맨날 복음 전하면 저한테 묻는 게 ‘누구한테 배웠느냐?’
‘은혜입니다’ 그건 또 안 들어요.
은혜를 받은 적이 없으니까 맨날 누구한테 배운 것밖에 몰라요.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 네가 하나님이 보낸 자냐? 이렇게 묻는 거거든요.
이게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렇게 성전을 이렇게 가서 이런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지금 네가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그러한 어떤 권세자냐? 질문을 할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반문을 합니다.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아마 목사들한테 성도들이 질문을 했을 때 목사가 이런 식으로 답변하면
성도들이 뭘 하는지 아세요? 비웃죠.
목사는 묻는 말에 정답을 이야기해야 되잖아요.

제가 어제 어떤 목사님이 저한테 질문을 하시길래 제가 반문을 했어요.
‘목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냐?’고.
자기 생각을 사람들이 안 드러내거든요. 왜냐하면 사람들이 다 미꾸라지 같아가지고.
그래서 제가 목사들한테 강의를 할 때는
‘목사님 말씀을 먼저 한번 들어보고 저도 이야기하겠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는데

예수님이 질문을 하는데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이렇게 질문을 해요.
완전 외통수거든요. 이 질문 자체가. 그 뒤에 나오잖아요.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러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에게서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저희가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세례 요한에 대해서 모든 민중들은, 백성들은 선지자로 인정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들만은 인정하지 않죠. 왜 인정하지 않습니까? 똑같은 겁니다.
‘너 어디서 굴러왔어?’

근데 세례요한은 뭐라 합니까?
‘이사야가 예언한 그 당사자다’ 이렇게 소개를 하거든요.
이들은 수요일날 얘기를 했잖아요. 제자들이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된다”라고 이야기를 할 때 왜 그 이야기를 했는가? 하면
그들은 엘리야가 먼저 오면 알아본다는 이야기예요. 그래서 엘리야가 먼저 올 거라 했어요.

근데 엘리야를 못 알아보죠. 수요일날 왜 못 알아봤다 했습니까? (안 듣는 분들이 대부분이니까)
왜 못 알아봤다 했어요?
자신들은 만만했거든요. 열왕기상에 나오는 그 엘리야에 대해서, 아합왕이나,
뭐 인정하면 이세벨의 목을 날려야 될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거든요.
백성들이 동원되어서 그 우상의 바알과 아세라의 거짓 선지자들을 다 죽였지만
그게 끝이에요. 그게 끝이라니까요.

그러면 엘리야가 그런 일을 했을 때 알아봤습니까? 알아보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서기관들이 눈 뜬 장님인 거예요.
우리들과 똑같은 겁니다. 엘리야를 읽으면서
‘아 우리는 엘리야 때 지금 만일에 엘리야 선지자가 활동하면 믿습니다.’ 이래 나올 거예요.
그게 바리새인과 서기관입니다.

근데 그들 앞에 엘리야가 있었죠. 엘리야가 두 사람이었잖아요.
세례요한도 있고, 예수님이 계시잖아요. 알아봅니까, 못 알아봅니까? 못 알아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을 봐도 그들은 눈 뜬 소경에 불과한 거예요.
얼마나 예수님의 말씀이 놀랍습니까?

지금 “세례요한이 누구로부터 났느냐? 하나님께로서 났느냐? 사람에게로서 났느냐?”
질문을 했을 때 이들은 지금 뭘 하고 있습니까? 지금. 자기 관리를 하고 있어요.
이런 거 보면요. 우리 같지 않습니까? 아까 제가 그런 분한테 얘기를 하다가 제가 그런 말 안 하면요.
관계를 오래 끌고 갈 수 있어요. 결론은 우리가 모르니까.

근데 어느 누가 나는 체험을 못했고 자기는 그런 큰 체험을 했는데...
거기에 완전히 초를 칩니까? 오늘 잠언서에 나오듯이.
자기 관리하고 있거든요. 눈치 보고 있는 겁니다. 이들이 우리의 모습이에요.

십자가를 십자가라고 얘기를 해야 되는데, 홍시를 홍시라 말을 못해요.
왜? 눈치 보이기 때문에. ‘이거 저이가 못 알아들을 건데...’ 자기도 못 알아들어놓고.
정말 웃기지 않습니까?
복음이라는 것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거잖아요. 피공로로.
원인이 없잖아요. 원인이.

근데 복음을 들은 사람들 보면 전할 때
‘이거 못 알아들을 건데...’ ‘내가 더 공부해서 이야기해야 될 건데.’
복음을 개무시를 누가 하는가? 하면 ‘복음을 안다’ 하는 사람이 하는 거예요.
자기가 뭐가 뛰어나서 지혜로 가르치겠어요?
십자가의 지혜는 모든 인간의 지식을 폐해버리는데. 어리석다고 만드는데.
그러면 그 어리석음에 동참하면 되잖아요.

왜 그 어리석음에 동참하면서 이 인간이 전하지 않은,
(우리는 내가 전해서 믿기를 원하잖아요.) 사도행전을 보세요. 지가 전해서 믿은 경우가 없습니다.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 십자가의 완료성 속에서 이미 확정된 자들만 반응을 할 뿐이에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자기가 복음을 전했다라고 하지 않죠.
누가 전합니까? 성령께서 전하는 거예요. 성령께서 듣게 하고.
눈치를 보고 있거든요.

이 엘리야를 잘 알잖아요. “하나님 편에 서든지 사람 편에 서든지 하라”라는 그 내용이 있거든요.
그 세례요한하고 이렇게 맞물리는 이유가 있어요. 이 본문 자체가.
이들은 양다리를 딱 걸치는 거예요. 양다리를 딱 걸치는 거예요. 

“대답하되 어디로서인지 알지 못하노라”
이게 살 길입니다. 제3의 길이죠.
하나님 편도 아니고 사람 편도 아니고 어디? 3의 길.
그러니까 3의 길도 악마적 사고예요. 그다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그래서 예수님이 권세 얘기 안 했습니까? 그 이야기가 9절부터 나오는 비유 이야기예요.
예수님이 어떤 권세로 지금 이 성전을 뒤엎어버리고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하시느냐? 그걸 말씀하는 게 이 비유입니다.
유명한 비유죠. 봅시다.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나중에 이사야에도 나오거든요. 이스라엘을 포도원으로 비유를 합니다.)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심히 때리고 그저 보내었거늘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심히 때리고 능욕하고 그저 보내었거늘”
선지자를 보낼 때마다 (뭐 앞뒤가 안 맞지만)
주님께서 그 포도 농사를 지으면 선지자를 보내면 뭘 원하는 거예요? 소출이 뭐예요?
회개하는 것 아닙니까? 근데 때리고 죽여버려요.
재밌는 건 예수님이 이렇게 부르면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도 상하게 하고 내어쫓는지라”
아직까지는 죽이는 내용은 나오지 않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가로되 어찌할꼬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혹 그는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그건 지극히 상식적이잖아요. 그죠?
“아들을 보내면 공경하리라 하였는데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혹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포도원 밖에 내어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사람들이 듣고 가로되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하거늘”
그렇게 되면 안 된다라는 거예요.
이 포도원, 누구 이야기하는지 알고요. 거기 보면 17절에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뇨”
지금 이 말씀을 끌고 오거든요. 시편 118편 말씀을.
끌고 왔다라는 것은 지금 이 ‘상속자가 누구냐?’라는 얘기예요.
상속자와 상속자가 부딪히는 겁니다. 지금.

그런데 이 이스라엘은 진짜 상속자입니까, 아닙니까? 아니에요.
진짜 상속자는 따로 있어요. 아들이 따로 있습니다.
따로 있는데, 이들이 예수님이 상속자임을 알고 죽입니까? 모르고 죽입니까?
비유에 의하면 알고 죽였잖아요.

그런데 실제로는 그들이 알아서 죽였습니까? 몰라서 죽였습니까? 모르고 죽이잖아요.
그 모르고 죽인 내용을, 알고 죽인 것으로 말씀을 하는 겁니다.
인간들은 납득이 안 돼요.
성도들만 아멘하는 내용입니다. 말씀 자체가.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이것은 우리들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죠.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이 모든 말씀들에 대해서 이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신 줄 알고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

지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뭐밖에 모르는가? 하면
대제사장들은 ‘이 말은 자기들에게 한다’라고 생각을 해요.
근데 예수님의 말씀은 자기 증거예요. 자기를 증거하고 계신 거예요.
내가 누구냐? 라는 거예요.
내가 바로 건축자들이 버린 돌로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상속자라는 겁니다.

그러면 상속자가 되려면 반드시 어떻게 돼야 돼요? 버림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되는 겁니다.
누구에 의해서? 포도원 종에 의해서.
여기는 종으로 나오지만 실제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이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출애굽기 4장에 보면.

그 아들이 누구를 죽입니까?
자기들이 상속자라고 우기면서 진짜 하나님의 상속자인 그 아들을 살해해버립니다.
그 살해당한 분이 상속자가 되고
놀라운 것은 그 살해당한 그 상속자에 의해서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이 가루로 만들어 흩어진 그 상태야말로 상속자에 합류하는 사람들이죠.
이렇게 되면 상속자는 누구뿐이냐? 하면 아들뿐이에요.
아들뿐이라 하면 문제가 있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아들이 상속자예요.
십자가가 없는 상속자는 상속자가 아닙니다.
지금 로마서 8장을 미리 끌고 온 거예요.

다시 로마서 4장으로 가서 제가 상속자는 예수님뿐이라 했습니다.
맏아들은 예수님뿐이에요. 상속자는. 유일한 상속자예요.
그런데 로마서에서는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약속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돼요. 그것은 아들을 통해서 성취가 되고
아들을 통해서 성취가 된 그 내용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그 약속이,
그대로 또 이루어져야 돼요. 그걸 지금 말씀을 하는데
이 약속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아까 시편 81편을 봤잖아요.

약속을 받으려면 율법을 지켜야 돼요? 안 지켜야 돼요? 답변을 한번 해보세요.
율법을 지켜야 돼요? 안 지켜야 돼요?
복음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것과 상관이 없습니다라고 나와야 돼요.
질문에 함정이 있었죠. 지켜야 돼요? 안 지켜야 돼요?
그럼 우리가 아는 것은 안 지켜야 된다라고 이야기할 거 아닙니까? 그죠?
그럼 안 지키면 약속을 받습니까?
성경을 읽을 때 계속해서 선악 구조를 읽는 거예요.

인간들은 안 지킨다고 약속을 받는 게 아니에요. 지금 여기에 보면
약속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이렇게 이야기해요. ‘믿음의 의’
‘믿음의 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거죠.
그러면 이 믿음은 어떻게 주어지느냐? 라고 하면 16절에. 15절 먼저 하고 16절 봅시다.

14절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약속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거든요.
만일에 상속자가 아브라함도 상속자가 되고 그 후손들도 상속자가 되는데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가 되면,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그 믿음도 헛것이라는 거예요.
율법을 끌고 온다는 것은 믿음을 헛것으로 만드는 짓이고
이것은 약속 자체를 없애버리는 행위라는 거예요.

이걸 이해하기가 왜 어려운가? 하면요.
복음이라는 자체가 우리 쪽에서 올라갈 방법이 없어요.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해서
아들을 화목 제물로 주셔가지고 그 화목 제물을 통해서 의롭게 하신 겁니다.
우리 쪽에서 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믿음으로 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래 너 말 잘했다.’ 그 믿음을 어디를 갖고 옵니까?
아브라함의 믿음을 갖고 오잖아요. 창세기 15장 16장을 갖고 온다니까요.
그래야 믿음이 헛되지 않다라는 것. 그래야만 약속이 약속대로 폐하여지지 않고
약속대로 그것이 유효하다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라는 겁니다.
지금 계속해서 로마서는 불가능성을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믿는 순간 가능성으로 다 바뀌어버려요.
말씀을 자기가 다 믿어버리고.
‘말씀이 그렇구나. 그렇구나.’ 하면서 관찰자가 되죠. 구경꾼이 되고.

그런데 말씀은 십자가를 전하잖아요.
십자가를 전한다는 것은 십자가 사건 속으로 우리를 빨려 들어가게 되면
계속해서 우리는 단절 속에서, 불연속 속에서 살아가는 성도인 거예요.
그걸 날마다 죽는다라는 겁니다.

이걸 연속으로 만들어버리면 자기 자랑하죠.
주님의 스토리를 이야기를 해야 되잖아요. 주님이 하신 일을.
거기에 누구 이야기를 합니까? 연속이 되면? 나의 스토리가 들어오잖아요.
나의 스토리를 못 넣도록 무슨 사건을 일으킵니까?
오늘도 우리를 죽여버립니다. 그게 말씀의 능력이에요.

거기에 나의 이야기를 집어넣게 되면 그걸 율법이라고 하거든요.
율법은 자기 행위를 통해서 자기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거거든요.
‘에이 목사님 심판 아래 있게 하려함이라’
심판 아래 있는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뿐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항상 어떤 자로 드러나는가? 하면
‘나는 아니요.’ 죄인 중에 괴수로 드러나죠.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가 될 수 없다는 겁니다.
만일에 그러하다면 믿음도 헛것이고 약속도 폐했다라는 겁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이 모세에게 율법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약속을 날리는 것이 뭔가? 하면
‘율법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라는 논리예요.
그 논리 속에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모두가 다 들어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말씀 자체가.
그걸 왜 나누어요?
사람들이 왜 얼마나 저도 좀 무식하지만, 너무 무식한 것 같아요.

유대인이 되었든 이방인이 되었든 이 모든 말씀을 성도에게 하는 말씀 아닙니까? 맞죠?
성도에게 하는 말씀이라면
그게 유대인에게 한 말입니까, 이방인에게 하는 말입니까?
성도에 대한 말씀으로 받아야 되잖아요.
그런데 이 말씀을 관찰하니까 자기가 분석을 해요.
‘이거는 유대인 이야기고 이거는 이방인 이야기고...’

사도바울이 그걸 구분하는 이유는 죄의 깊이 때문에 그래요.
십자가의 사랑의 깊이 때문에 이야기를 하는 거지.
그걸 쪼개가지고 이방인은 다르고 유대인은 어떻고...

어떤 사람은 ‘이방인에게는 율법이 필요 없다’라고 하는데
그 사람이 말하는 율법이 도대체 뭘 이야기하는지 모르겠어요.
모든 율법은 예수님에 대해서 전하면 율법을 열심히 상고해야 되죠.
율법이 예수님을 전하고 있잖아요. 십자가를 전하고 있잖아요.

성령 못 받은 사람은 율법을 통해서 십자가를 보는 게 아니라 뭘 봅니까? 자기 행위를 보죠.
성화론의 문제가 뭔가? 하면 ‘말씀대로 살아야 된다’라는 자체가 이 행위를 내놓는 거거든요.
행위를 내놓는 자체는 뭘 날리는가? 하면
믿음을 헛것으로 만들고, 그러니까 자기 믿음이 가짜라는 것을 스스로 자인하는 겁니다.
그리고 약속을 날려버린 거예요. ‘나 약속 못 받았다’ 이야기예요.

얼마나 웃기는 사태가 발생합니까?
약속을 받았다는 자들이 자기 행위를 내놓는 거예요. 계속.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니까 말씀대로 살아야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아까 누가복음 20장 하다가 말았는데) 어떻게 상속자가 됩니까?
어떻게 율법의 완성자가 되고 율법의 마침이 돼요?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자들, 율법을 지킨다고 하는 자들에 의해서
살해당함으로 말미암아 상속자가 돼요. 율법을 지켜서 상속자가 된 게 아니에요.
십자가에서 상속자가 되셨잖아요.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상속자가 된 것 그건 맞는데
그래도 예수님은 율법을 다 지켰을 거야. 그래서 상속자가 될 거야.’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상속자가 되는 방식이? 길이 둘이잖아요.

예수님이 상속자가 되는 방법은
이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자,
상속자라고 주장하는 자들에 의해서 살해당함으로 말미암아 상속자가 되신 거예요.

이렇게 되면 그 예수님의 상속자 속에 합류 당하는 상속자들은
자기들이 상속자 될 근거가 있나요, 없나요? 있죠. 그게 뭔가? 하면 믿음이라는 겁니다.
그 믿음의 실체가 뭐냐? 라고 하면
‘나의 믿음은 믿음이 아니고 어떻게 믿더라도, 어떻게 행하더라도 나는 상속자가 될 수 없습니다’를
담고 있는 게 믿음이에요. 그게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조금 더 볼게요.

“그러므로 (헬라어 성경에는 ‘이것이’ 이렇게 돼 있거든요. ‘후사가 되는 이것이’
잘 적어놓은 것 같아요. 앞부분에)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이제 나옵니다.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상속자가 되는 방식은 은혜여야 돼요.
왜냐하면 이 상속자들은 뭘 증거하는 자들이냐? 하면 주의 이름을 증거하는 자들입니다.
십자가를 증거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은혜에 속한 자들이 되고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된다라는 겁니다. 상속자는.

은혜라는 것은 십자가의 완료성을 담고 있는 내용이에요.
그래서 믿음이 되어지면 그 믿음은 ‘나의 믿음은 아니요’ 정도가 아니라
나의 믿음이 상속자를 살해했고,
살해당한 그 상속자가 나를 약속의 자녀로 참여시켜 주셨다는 내용이 담겨 있는 게
믿음이라는 겁니다.

‘아니 목사님 그런 걸 어떻게 믿어요?’ 그 말이 나와야 돼요.
그러니까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죠. 선물이잖아요. 선물.
선물은 주시는 분이 주셔야 자기 의를 내세우게 주셔야 받는 거지.
‘아니 그런 식으로 설교해서 누가 믿습니까?’
설교해서 예수 믿었다는 사람 한 사람도 못 봤어요. 저는.
예수님이 설교를 잘하셨잖아요. 예수님보다 설교 잘한 사람이 있나요? 없잖아요.
누가 믿었습니까?
사도들이 할 때? 믿었다고요? 주님이 믿게 하셨죠

철저하게 후사가 되는 방식은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된다”는 겁니다.
‘우리 쪽에서는 없다’라는 거예요.
그러면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라면, 로마에 있는 성도라면,
계속해서 없음이 계속해서 나와야 돼요.
그걸 성경 예수님의 표현으로 하면 자기 부인의 능력이에요.

이 ‘자기 부인의 능력은 나로부터 나올 수 없다’라는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말 갖고 ‘나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나는 죄인이고 십자가 붙들고...’
말은 할 수 있어요. 해놓고 ‘이거 이게 바로 십자가의 원수의 모습입니다. 긍휼히 여겨주옵소서.’
이렇게 나가야 돼요. 성경 좀 배우면 대부분이 그렇게 흐르거든요.
선악밖에 몰라서 그래요.

지금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그러한 사고를 갖고 있는 자들을 완전히 박살을 냅니다.
그게 히브리서의 표현으로 하면 찔러 쪼개버려요.
영과 혼과 골수를 찔러 쪼개버립니다.
그러면 찔러 쪼갬을 당하는 이 기쁨, 이 행복. 받은 자 외에는 알 길이 없잖아요.

십자가의 그 사랑이 DNA가 일치해서 신장 이식 받은 것보다 못합니까?
우리가 언제 가짜로 드러나는가? 하면 그럴 때 가짜가 드러나요. 가짜로.
십자가의 사랑은 비교할 수 없다라고 말했는데
로또 한 번 당첨되면 십자가 사랑하고 비교하는 정도가 아니고
이 로또는 십자가 사랑과 비교가 안 돼. 거꾸로.
우리 자식의 대학 합격이라든가 안 그러면 취업이라든가

주님이 왜 그 사태로 몰아갑니까?
우리는 그런 이 사태가 일어나지 않기를 원하잖아요.
왜 일어나지 않기를 원하냐? 하면
자꾸 자기가 신이 되고 싶은 거예요. 십자가의 증인이 되기를 원치 않고.

우리가 좀 사람들 앞에 어리석음과 좀 이렇게 뭐랄까요? 부끄러운 모습들이 잘 드러나야 돼요.
주님이 사태를 그렇게 일으키는 겁니다.
우리는 그럴 때 어떻게 합니까?
‘아휴 그때 내가 그렇게 안 했으면...’ 또 보세요. 자기 관리 들어가거든요.
그럼 자기 관리 들어가면 말씀이 한 대 팡 칩니다. 또 또...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만 생각하지 않고.
거기에 믿음을 헛되게 하려고 하고,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게 하는 그런 짓거리들을 계속 솟아나도록 우리를 그렇게 몰아가는 거예요.
십자가의 증인이기 때문에.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 베드로의 모습이,
아니면 사도행전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대판 싸우는 모습이 너무나 중요한 거예요.

제가 여기서 저기 우리 목사님하고 대판 싸웠다 칩시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딱 나타나는가? 하면요
내 편 들든지, 목사님 편들든지, 또 한 편은 ‘나는 주님 편 들겠다.’
누가 가장 악마적인가? 하면 주님 편드는 인간이 가장 악마적이에요.
왜냐하면 죄인이 안 되려고 하거든요.

그런 사건이 있었잖아요.
탕자교회 있을 때, 제가 그래 할 때 ‘나는 누구 편도 들지 않겠다’라는 거예요.
그건 자기 의롭다는 것밖에 안 되죠. 그럼 자기는 자기편 든다는 거거든요.
그런 모습들이 인간들 속에서 드러나야 돼요. 복음에 의해서 깨지면 감사가 되는데

그 의로움을 계속 밀어붙이게 되면 뭐가 되는가? 하면
십자가의 희생 공로를 헛되게 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그런 걸 좋아하잖아요. 고상한 걸 좋아하잖아요. 편들지 말고 듣기만 하는 사람.
얼마나 고상합니까? 그런 인간에게는 십자가가 필요 없습니다.
주님은 죄인을 부르러 왔거든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그다음 조금 더 보겠습니다.
아직 한 2분 남았으니까

16절 “그 약속을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놀랍죠. 우리는 이 ‘약속을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하니까 되게 신나는 이야기인데
이 약속은 누구에게 주어집니까? 오로지 은혜를 따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죠.
그러면 굳게, 모든 후손에게 약속을 굳게 하려면, 십자가 사건이 현장화돼야 돼요.
인간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들을 부정당해야 됩니다.

약속을 굳게 한다고 하니까
‘야 이건 진짜 흔들리지 않는 시몬스 침대네. 이건 진짜 붙들 만하네.’
‘이걸 믿어야 됩니다. 약속을 굳게 하기 위해서 믿음으로 된다고 했으니까
여러분 믿음을 포기하면 안 됩니다.’ 이게 사기꾼들이잖아요.
아브라함의 믿음과 정반대의 행로를 걷고 있잖아요.

로마서에서 왜 아브라함의 믿음을 15장 7절에서 끌고 왔는지 아세요?
우리 같으면 12장을 끌고 올 수도 있어요.
사도바울이 쓰면 계시가 되잖아요. 그러면 이걸 믿었다라는 그 내용을 이렇게 추가할 수 있잖아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가라 했을 때 아브라함이 믿고 갔다.
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자’ 이렇게 하면 계시가 되잖아요.
지금 그런 내용들이 가득하거든요. 성경에.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15장 6절을 갖고 온 이유가 있다라는 겁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15:6)
그건 십자가의 피 공로만을 드러내기 위한 약속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성도에게는 뭐밖에 안 나와야 돼요? 피만 나와야 돼요. 그게 로마서 7장 8장입니다.

7장에서는 내부에서 또 다른 자아와 전쟁이 벌어지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라고 하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걸로 끝납니까? 그거는 피가 안 나왔잖아요. 아직. 내부에서는 피가 안 나왔잖아요.
그런데 그 외부로 발산되면 어떻습니까?
환란과 기근과 위험과 적신과 칼들이 등장을 하죠.
놀랍게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사태가 되는 겁니다.
뭐 때문에 그런 일이 발생합니까? 뭐 때문에 그래요?
‘인간의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될 인간이 없다’라고 얘기를 하기 때문에 그래요.

‘믿으면 되겠네요?’
그 ‘믿어서 안 된다’라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공격을 당하는 겁니다.
인간이 하는 어떤 행위도 십자가 앞에서는 원수 짓이고,
아들을 살해하는 짓이라고 얘기를 하기 때문에 미움을 받는 거예요.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율법에 속한 자들 중에도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들이 있잖아요.
그 얘기를 하는 겁니다. 이 얘기를 하지 아니하면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가? 하면
‘유대인들은 구원이 없다’가 돼버려요. 로마서에서 되게 어렵게 돼 있지만. 그다음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너가 누굽니까? 아브라함이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의로 여기셨다.”
그를 많은 민족의 조상이라 하잖아요.
그럼 아브라함은 이런 겁니다. 하나님께서 새롭게 창조한 피조물이에요.
그게 조상이에요.

그러면 그 조상을 따라서 그 후손들이 되려면 그 되는 방식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없는데 성경은 왜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하느냐? 라고 하면
‘없다’라고 복음을 전하는 게 아니라 ‘주 예수를 믿으라’고 복음을 전하면서
인간은 그 방법밖에 없습니다.
‘믿으라’고 전하면서
‘그 믿는 믿음은 결코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 수 없다’라는 것을 가르치는 방식으로
주님은 말씀하는 거예요.

마치 사도 바울이 로마서부터 시작해서 얼마나 많은 지식을 펼쳐냅니까?
지식을 쫙 펼쳐내고 뭐라고 합니까?
‘이것은 바로 십자가의 지혜다’라고 하죠. 충격 아닙니까? 지금 못 알아들었습니까?
로마서 고린도전 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와 빌립보서, 골로새서에서
얼마나 많은 지식들입니까? 그 지식을 쏟아내고 뭐라 합니까?
그 지식 체계를 부정해버리죠. ‘십자가의 지혜’라고 소개를 해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그 지식 속 하나하나의 모든 내용이 십자가의 지혜가 쏟아지는 말씀이 돼요.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행위를 통하여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계속해서 지금 없다를 이야기하면서 십자가의 완료성을 계속해서 소개하는 겁니다.
그다음 봅시다.

“그의 믿은 바 (이제 이게 가장 우리를 유혹하는 구절이죠.)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어떻습니까? 뭘 믿었다고요?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를 믿었다는 거예요.
잘 들어봅시다. 이 이야기 마칠게요. 힘들겠지만.

없는 데서 있는 것 같이 불렀잖아요. 그죠?
아브라함은 없었어요. 없는 자가 뭘 믿어요? 예?
아브라함이 믿었다는 내용은 없는 데서 있는 것 같이 불렀다는 내용이잖아요. 맞죠?
그러면 그 믿음 속에는 뭐가 있습니까? 없음이 들어가 있는 거예요.

죽은 자를 산 자같이 이렇게 만드셨다라고 했을 때는
아브라함이 죽었는데 어떻게 부르심에 응답을 합니까?
(말씀이 너무 깊이 들어가니까 어려워져버렸는데)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이 말씀 속에 아브라함이 합류를 하게 되면 자기는 없는 자가 되고 죽은 자가 된다라는 이야기입니다.

성도가 이 믿음에 합류한 자들이에요.
십자가 사건 속에 합류했기 때문에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라는 말은
나는 없는 자고 죽은 자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없다’ 죽은 자를 아브라함은 어떻게 표현해 냈습니까? 믿음으로 표현해 낸 거예요.
아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야 되는 겁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로지 십자가에 피 흘리신 주님만을 증거케 하기 위해서
유일한 상속자 되신 아들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서 상속자들로 삼아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고스란히 담은 아브라함처럼
저희들에게도 그리스도의 믿음을 담아주셔서
날마다 나 자신을 부인하는 가운데 십자가만 자랑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만을 드러내기를 소원하는 주의 백성에게 축원하옵나이다. 아멘.